경칩
경칩(驚蟄)은 24절기 중에서 세 번째로서 음력 2월 절기에 드는데 양력으로는 3월 5일이나 6일이며, 이날 태양의 황경은 345도가 된다. 계절적으로 이 무렵이 되면 날씨가 따뜻해지기 때문에 산야의 모든 풀이나 나무의 싹이 돋아날 준비를 하며 겨울잠에 빠졌던 개구리를 비롯한 온갖 동물이 깨어나 서서히 활동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뜻에서 ‘놀랄 경(驚)’과 ‘숨을 칩(蟄)’이라는 글자를 이용하여 명명한 절기 이름이다.
봄이 오는 부산한 길목이며 갖가지 소망과 욕심을 한껏 갖게 마련인 희망의 계절에 연유한 현상일까. 경칩에 세시 풍속은 꽤나 다양하며 간절한 기원을 담고 있다.
경칩 무렵은 개구리가 번식을 위해 겨우내 물이 고였던 논바닥의 웅덩이나 작은 개울물에 알을 낳는다. 그런데 위장병 치료를 비롯하여 몸에 좋다는 속설 때문에 개구리 알을 먹기도 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런가하면 지방에 따라서는 도롱뇽 알을 먹는 습속도 있었다. 또한 이 때 흙으로 담을 쌓거나 벽을 바르는 흙일(土役)을 해도 탈이 없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을 전제로 경칩이 되면 흙으로 담을 쌓거나 보수했으며 벽을 발랐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사용했던 흙이 건강에 좋다는 이유에서 요즘 많이 회자되는 ‘황토’가 아니었을까. 그 옛날에는 집안에 빈대가 들끓는 경우가 허다했다. 골칫거리인 빈대가 집안에 우글거리면 이날 재(灰)를 탄 물을 담은 그릇을 방의 사방 귀퉁이에 놓으면 없어진다고 믿었다.
경칩 전후에 이르면 동물 뿐 아니라 모든 식물이나 농작물도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때문에 월동작물인 보리와 밀, 시금치 등속도 분주하게 생육을 준비하는 시기인 관계로 이들의 관리는 물론이고 담배씨를 비롯하여 각종 씨앗의 파종을 하면서 본격적인 농사 준비를 했다. 이런 때문인지 구구가(九九歌)*의 경칩을 이르는 부분에서 ‘밭을 가는 소의 모습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음을 뜻.’하는 구구경우(九九耕牛)라는 정경의 묘사가 이채롭다. 또한 농가에서는 이 무렵 겨우내 변소에 모여진 인분을 퍼서 밭에 직접 뿌리거나 이를 마소(馬牛)를 비롯한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이 배출해 내는 두엄과 섞어서 충분히 숙성시켜 농사에 쓰일 퇴비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는 화학비료인 금비(金肥)가 거의 없었던 지난날 논밭의 지력을 높이고 농작물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하는 최상의 질을 자랑하는 빼어난 거름이었다.
농경사회에서 풍년은 최대의 바람으로 누구나 간절히 염원했다. 아직 보리를 수확하기 까마득한데도 불구하고 절실한 농심(農心)은 경칩에 보리 포기를 뽑아들고 풍흉을 예측하기도 했다. 겨우 삼동을 지난 어린 보리 싹을 뽑아들고 뿌리의 상태, 줄기의 건실성이나 잎의 개수를 바탕으로 풍흉을 헤아려보는 맥근점(麥根占)을 즐겨봤다. 그런가 하면 우리 음식문화에서 중한 김치에 관련된 전설도 포함되어 있다. 김치 맛을 좌우하는 김치독은 우수와 경칩을 지나 해동한 땅에서 파낸 흙으로 빚어 초봄에 가마에 구운 독이 좋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이 계절에 만든 독은 단단하면서도 김치 맛이 변질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농사 준비를 하면서도 풍류와 멋을 즐기는 여유도 잊지 않아 경칩이 되면 단풍나무나 고로쇠나무를 찾아가 베거나 상처를 낸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수액을 마시면 위장병 등에 좋다고 믿었다. 게다가 겨울을 지나며 잃기 쉬운 입맛을 되돌리거나 대책 없이 몰려올 춘곤증을 몰아낼 방책이었을까.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2월령(二月令)에서 봄나물을 예찬하고 있다. ‘산채는 일렀으니 들나물 캐어 먹세. 고들빼기, 씀바귀요 소로장이 물쑥’이라 노래하고 있다. 또한 질병이나 액땜을 하며 해충이나 잡초 번식을 억제하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검정콩(서리태)을 볶아 먹는 풍습도 있었다. 이는 기나긴 삼동을 지나면서 영향 불균형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단백을 벌충해 주는 지혜로움이 담겨있지 싶다.
우리 음식문화에서 장(醬)의 비중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그 옛날 장 담그기 또한 그 어떤 농사일에 못지않게 여겼다. 경칩 무렵이 되면 아낙네들은 정갈하게 씻은 장독에 메주와 소금물을 붓고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에서 말린 붉은 고추, 살균작용을 위해 참숯을 맨 위쪽에 띄우는 것으로 장 담그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장을 담근 장독에는 잡귀가 얼씬대지 못하도록 왼손으로 꼰 새끼줄에 솔잎, 고추, 한지들을 끼운 금줄을 쳐두고 비로서 안심했다.
사시찬요(四時纂要)*에 따르면 은행 껍질이 세모난 것은 ‘수(雄) 은행’이고, 두 모난 은행은 ‘암(雌) 은행’이라고 구분했다 이 은행을 정월대보름날 구해 두었다가, 경칩 날 지아비가 ‘수 은행’, 지어미가 ‘암 은행’을 먹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낭만을 즐겼다는 전언이다. 아울러 경칩날 저녁에 어두워지면 처녀 총각들이 동구 밖의 암수 은행나무를 빙빙 돌면서 사랑을 증명하거나 다지는 습속이 맘에 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로서 연인들이 은행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무한한 꿈과 희망을 가득 실은 약동과 소생의 서막이 서서히 열려가는 꿈의 절기가 도래하는 셈이다. 그런 정황에 걸 맞는 세시 풍속이 다양하다. 거기다가 다가올 농사일에 지쳐갈 심신을 보(補)하려는 보이지 않는 마음 씀씀이 흔적이 엿보여 빈틈없는 배려나 슬기로운 지혜와 우연찮게 마주치는 것 같아 더욱 흐뭇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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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구가 : 조선 고종 때 신채효가 구구법(九九法)에 중국 고사를 곁들여서 지은 가사(歌詞)로서 시조 형식을 띄고 있다. 이는 기나긴 농한기에 게을러진 농심을 추스르고 자연현상을 관찰하며 농사철을 합리적으로 고찰하는 내용이다.
* 농가월령가 :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1,032구의 월령체(月令體) 장편 가사이다.
* 사시찬요 : 조선 세조 때 강희맹이 왕명에 따라서 편찬한 책으로서, 1년 사계절의 농사와 농작물에 대한 주의 사항 및 열두 달에 걸쳐 펼쳐지는 행사 따위를 기록하고 있다.
복지, 2012년 03+04월호, 한국한센복지협회(www.khwa.or.kr),
(2011년 2월 25일 금요일)
첫댓글 경칩날 여러가지 풍습이 있네요.
그러고 보니 어릴적 아버지께서 황토에다
잘게 썰은 짚을 섞어서 아궁이도 바르고
벽에도 덧발랐는데 그때가 경칩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경칩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