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자기 약속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반하는 것들은 반드시 심판을 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약속에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좋아할 인간은 아무도 없지요. 어떤 인간도 나 여기 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하나님의 백성 외에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하나님다워야 하잖아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협조를 기대하신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약속대로만 행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나님 혼자서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이것이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재통일이라는 의미는 원래 통일이 된 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만물이 통일이 된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주가 되심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리스도에 의한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상태를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된 상태입니다.
이 새 창조의 완성을 우리 인간들 편에서는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자들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묵시 안에서 완료된 하나님의 목적으로서 우리가 있지만, 새 피조물들이 자기를 지으신 그분과 인격적 관계, 사랑의 관계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이 역사 속에서 그 하나님을 아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으로서의 우리’라는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체적으로 어떤 목적도 가질 수 없다는 거지요. 또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말은 우리가 천사와 다르게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천사들도 우리를 알기 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부리는 종입니다. 인간들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우리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있다고 하잖아요. 여러분이 볼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성도라면 여러분을 섬기는 천사들이 여러분을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키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앎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이 앎이 묵시 안에서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피조 세계의 역사 속에서도 실행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그것을 현실로 체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곧 십자가가 전제된 하나 됨입니다. 언약의 피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의로우심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에덴의 선악과로부터 인류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주어지지 않으면 존재일 수도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아담의 범죄를 한시적으로 허락하시고, 죄의 내용과 심판, 그리고 범죄한 인간의 절대 부패와 비참함과 하나님나라 백성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목적은 모든 인간을 율법 아래 가두고 우리를 지으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정죄를 통해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으로서 율법입니다.(갈3:24) 복음은 그렇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의로 주어진 믿음인 것입니다.
범죄로 불의하고 부정한 인간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가 없고 거룩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 편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 없어요. 그래서 약속 안에 있는 죄인들은 외부의 누군가가 자기를 구원해 주어야 하는 절박함과 필연성을 깨닫게 되는데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믿음이라는 성령의 선물인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없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새창조는 시작도 완성도 모두 하나님이 다 하시는 거에요 그것을 아는 것이 구원이며 그들은 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지음받은 아들들이라고 에베소서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엡1:3-7)
선악 열매를 먹은 인간들은 무엇을 대면하든지 자기 존재의 증명과 자기 가치 챙기기에 이용을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정욕, 탐심(에피뚜미아)이라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두 마음으로 나누고 자기중심의 선악 판단을 하여 언제든지 하나님께 대들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욕만 아니라 한 마음(모노게네스)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에피뚜미아를 가지신 분이 이 땅을 다녀가신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이분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아들 예수밖에 없습니다. 아들만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고후4:4)(골1:15) 하나님께서 굳이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이 예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들은 모두 하나님과 영원을 살게 됩니다. 시편에 보면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아들들은 반드시 아들을 알고 사랑하는 자들로서 아들들인 것입니다. 사도도 같은 말을 하지요 고전16장 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이 편지가 교회에게 보낸 사도의 편지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에 오해된 하나님을 다시 가르쳐주시면서 모든 세상과 만물이 태초의 말씀이신 자신을 위해 있고 또 자신에 의해 새롭게 될 것임을 말슴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가 바로 그 말씀이시며 율법으로 계시하신 성전이시고 또 하나님이 받으실 유일한 희생제물로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자기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줄이면 이런것입니다. 하나님게서 인간들 수준에 맞게 율법과 성전과 희생 제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인간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이제는 보이는 율법으로 말하는 성전으로 오셔서 약속대로 자기사람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약속 안에 있는 아들들을 품에 안고 십자가에서 영단번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창세전 약속이며 새 창조의 완성이고 하늘과 땅의 통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요17장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이스라엘 그들 유대인들은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바라던 메시야는 그런 분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메시아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메시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메시아는 절대 죽으면 안 되는 메시아란 말입니다. 인간에게 맞아 죽는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 없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이루고 나면 다시 너희들에게 올 텐데, 그 때는 너희들의 기쁨이 충만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직은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너희들은 내가 누군지를 모른단다. 지금 너희 앞에 서 있는 예수는 너희들의 육신으로 보는 예수, 즉 나 있고 예수 있고의 틀 안에 갇힌 너희들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오게 되면 나 있고 예수 있고 가 아니라 나와 예수가 하나가 되는 거야. 내가 영으로 너희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때에야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거다. 그때는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야 그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기쁨이며 나의 기쁨을 너희들에게도 나누어 줄텐데 그와함께 세상의 미움도 같이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며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 같은 길을 가게 될거야... 이게 요17장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실감나세요? 실감이 나야 하는데 ...여러분이 말씀을 읽고 말씀을 나누고 또 말씀이 무시로 찾아와서 아, 그게 그거였어요? 하는 게 바로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고 그분과 한몸이 된 교회의 증거입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잖아요. 여러분, 인생 살아보니 뭐 가 그렇게 기쁘고 좋은 게 있습디까? 다 지나가는 것들이잖아요 진짜 기쁨은 주를 아는 것 그리고 그분과 사귐이 가장 행복한 거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이 오기 전”, 또 “계시 될 믿음의 때”라고 되어있는데, 이 믿음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종교인으로서 의지, 결단이 아니라 한 인격체와의 만남을 뜻합니다. 그분과의 사귐이며 나눔이에요
그 만남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어떤 종교적인 방법론들도 다 헛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자기최면일 뿐이에요 선택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만 하실 수 있는 선택이며 그분의 때에 값없이 주어지는 은사로서 조우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그분의 것이며 그분이 자기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실 때 우리는 그것들에 비로소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께서 나의 허락 없이 불시에 찾아오셔서 내 인생 전체를 차압해버리시는 상태가 예수 직면입니다. 그러니까 사기꾼들이 예수 직면시켜준다는 말에 속지 마시라는 말이에요. 그 말에 의외로 많아 넘어가더라고요. 그건 사이비 교주들이나 하는 소리지 인간에게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그것을 해줄 수 인간은 더더구나 없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주어지는 사랑의 일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율법에 가두어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떤 의도 없음을 알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율법이 가리키는 한 분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몽학선생(초등교사)로서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없던 믿음이 오게 되면 우리가 믿음이 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고 예수의 생명과도 연합된 십자가의 신비와 역설이 이해가 되고 또 그 십자가가 우리 일생에 믿음의 사건들로 발생되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세계는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인 상태로 믿음이 주체가 되어 벌리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띠 띠워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시는 모든 과정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핵심이에요.
믿음이 오기 전에 믿음이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율법 아래 가두어두셨습니다.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십니다. 로마서의 주제죠? 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하박국서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복음의 대헌장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책도 이 두 책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예수(믿음)가 오셨다는 말은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가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이말은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 의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 믿음이 등장한다는 말은 어떤 행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나의 주체적 행위에 대한 포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보편적 인간에게는 불가능이에요 가만 있지를 못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대부분의 반응이 “그런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 그래서 그럽니다. 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 하는 행위까지 포함해서...
이렇게 주가 계시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분이 내 인생을 사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갈2:20)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교회를 평생 다녀도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목사들 중에도 의외로 예수의 주되심을 믿지 않는 분이 많지요. 머리로는 아는데 믿어지지가 않는 겁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 보니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신학으로 믿음을 대신하는 거에요. 로마서에 나오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그런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리로 들을 귀가 없다보니 신학이 진리가 되어버린 거에요. 신학교에서 학점딴다고 학습한 것들만 있지 신학교가 복음을 가르치진 않는단 말입니다. 가르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들은 믿음 대신 율법행위만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오늘날 세상교회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율법신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 은혜 더하기 주일 성수, 십자가 더하기 십일조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여줍니다. 진리의 복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늘 자기 안에 분열을 일으키는 거에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예수 믿는다는 내 안에 쉼이 없는 것은 내가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현실이 나의 삶에 실제화 되는 말씀의 사건들로 우리 삶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사람입니다. 아직 믿음이 오지 않은 거예요. 예수를 못 만났고 예수를 모르는 겁니다. 주가 계시지 않은 상태 그것이 버림받은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사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삿11:37)
이해가 쉽지 않은 구절이에요. 처녀로 죽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가톨릭에서 들으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예수를 모르면, 즉 신랑이 없으면 그 사랑 모르면 그 자체로 수치라는 말입니다. 신랑(주)이 안 계셔서 여전히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이 주께서 내어버려 두심이니까 그래서 세상 교회들이 자기 믿고 싶은 예수를 믿게 내어버려 두심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다들 신랑없이 여자들끼리 동성애를 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에선 그것을 부끄러운 욕심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믿음, 그러니까 믿음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와 내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그 현실이 믿어지면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십자가의 현실이 나의 삶이 되는 사건들이 계속 발생되어 지는데, 이런 자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이 담아주신 보배를 자랑하기 위한 교회지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닌 거에요 고후4장의 말슴처럼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사건들로 채워지는 인생을 살게된 사람들만 그 보배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고후4:7-12)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에 했던 설교가 광야교회였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광야교회라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끝없이 배신하고 대적하고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그들 조상을 말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광야 1세대는 모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너희들의 그 육은 죽어야할 육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스데반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아담에게서 받은 그 몸을 잘 계발하고 훈련해서 천사와 방불한 성화의 상태가 되도록 가르치는 게 오늘날 변질된 개혁주의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 십자가에서 주님을 어떤 일을 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종교화 된 기독교 그래서 저는 그들을 대한 유대교 장로회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라는 말은 여러분들이 주를 위해 날마다 죽음에 언약의 죽음에 넘기운다는 말입니다. 그게 생명 있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사도의 말대로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하잖아요. 교회 강대상에서 떠드는 것처럼 예수 믿고 더 건강하고 더 축복 받고 더 잘 산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 찌끼 같고 미말에 끌려가는 패잔병 같아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런 예수는 믿지 말아야겠다는 반응이 나와야 진짜 예수 믿는 거란 말입니다. 광야 40년 우리 인생살이에 주께서 우리의 죄성, 즉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자들인지를 계속 들추실 때마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그 십자가 은혜만 곡 붙들 수밖에 없는 인생이에요 그렇게 비겁하게 십자가 뒤에 숨는 삶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삶이란 말입니다. 그들을 통해 십자가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도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시기 위한 불순종의 사건들이 우리 삶에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시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 있음이며 은혜의 왕노릇입니다.
그럼 모든 성도는 죽지 못해서 산다는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평강 평화와 기쁨을 공유하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넘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로마서에서 말한대로 이땅에서부터 그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롬14:17) 그래서 이따에서 그 나라는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 천국을 못 가는 거에요 교회 다니는 교인들 중에도 천국은 죽어봐야 알지 그러는 사람들 있는데 제가 장담하지만 그런 분들 천국 못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일부러 괴롭히시는 그런 심술궂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인생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 보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한가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이미 생명이 예수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그렇게 다루어 가시는 것이지 여러분을 고생시키고 극기 훈련시켜서 천국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중세 수도원들이 다 그렇게 오해한 거잖아요 속세를 떠나 자기 육체를 괴롭혀서라도 스스로 깨끗한 자가 되겠다고...그렇게 복음을 복음으로 알지 못했던 사람의 대표가 종교개혁자 루터에요 그가 그렇게 고행을 하고 자신을 깨끗이 지키려고 했지만 그이 마음엔 평강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 그가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 한구절에 가던 길을 유턴한 겁니다. 그게 오직 믿음이에요 그렇게 믿음을 다른 말로 바꾸면 행위 아님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어떤 착함도 어던 의도 하나님은 쓰레기로 보신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믿음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수단도 아니고 방법도 아니고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인간 편에서는 무엇으로도 만들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며 선물입니다. 선물은 우리의 바램이나 자격 능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이잖아요. 하나님이 주고 싶은 자에게 주시는 것이 선물입니다. 다른 말로는 약속의 실행입니다. 그래서 인간 편에서 만들 수 없는 관계라는 말 안에는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약속의 실행이 믿음이라는 현실로 주어졌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분의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약함으로 그분과 함께 믿음 안에서 산다고 바울이 고백을 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은 이땅을 다녀가신 그분, 약속대로 십자가지신 그분만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하면서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살기좋은 세상 만들기 하라고 교회가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음을 믿습니다. 그분이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십자가가 세상을 이긴 승리란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안에서 세상에 대해 못 박힌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만 나의 의요 거룩이요 구원임을 알게 되는 약한 자로 찌질이로 살게 되는 것이 진짜 경건이며 성화인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그런 믿음의 여정입니다. 고난의 긴 여정이에요.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 역정이 그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목적지로 돌아가는 모든 사건으로서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사람들이 통과한 사건들 중에는 어느 하나도 자기 스스로 승리를 챙겨가진 사건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지지리도 박복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이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구속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 세상과 시간이라는 무대 위에 펼쳐놓으신 구속의 역사가 따로 있는데, 그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무대에 불리어 나온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 믿는 자기를 증거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닙니다. 신자는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 하나님만 남기고 나라는 질그릇은 장렬하게 깨어져야 하는 거에요 그래야 그 보배만 빛나는 거란 말입니다. 보배 때문에 내가 가치있는 게 아니라 그 보배를 이용해서 질그릇에 금칠을 하는 게 아니라 보배의 광채를 가리는 나의 육적 자아가 날마다 깨어지는 게 믿음의 능력이란 말입니다
우리 카페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판 것이 맞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판다는 말은 없고 다른 신을 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왜 성경에 기록했느냐는 궁금함 때문에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 이유는 아브라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 그에게 어떤 자격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님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을 설명해주시기 위하여 불리어 나왔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저에게는 믿음이 없을까요? 저는 왜 남편 하나도 사랑할 수 없을까요? 왜 저는 다른 사람이 용서가 안 될까요? 그런 질문들을 하시는데 죄인들에게는 한 번 상처받은 것들이 잊히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믿음을 사랑을 설명해주시면 여러분도 믿음의 조상이 되고 용서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무능과 불가능이 폭로될 때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거에요. 나의 의와 거룩과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오래참음이 되시고 나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하시려고 성도에게는 ‘믿음으로’의 사건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3대의 삶을 성경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내용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 3대가 이 땅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알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한 성을 바라보면서 살았다고 하지요. 그렇게 믿음의 끝은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막12:26)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믿음이 아니면 모두 가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캐스팅하셔서 하나님의 시나리오대로 목적지까지 끌고가시면서 믿음 안에서 그들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멀리서 보고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으로 여러분은 이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함께 누리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이라도 빠지면 그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빈틈없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돌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죄인을 위해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이 충만하게 채워질 때까지 하나님의 손길은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