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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과 보은을 잇는 호반 국도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노라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아찔한 다리, 장계교가 눈 앞에 들어온다면 미리 좌회전 깜빡이를 점등하고 속도를 줄여 다리 진입 장계관광지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선다. 가족과 연인 모두가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양한 공간배치를 통해 오는 이 모두가 특별한 추억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옥천의 명소 장계관광지는 옥천의 전통 민속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전통 민속자료 전시공간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거운 놀이시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락 공간, 한적한 호숫가를 거닐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산책 공간 등 세 공간으로 나뉜다.
정지용-아명은 지용(池龍)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옥천청마리제신탑[沃川靑馬里祭神塔]시도민속문화재 제1호 마한시대의 신당유적.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던 신당(神堂) 유적으로 마한시대부터 마을을 수호하는 구실을 해왔다. ‘탑신제당(塔身祭堂)’이라고도 불리며, 막돌을 원뿔형으로 쌓아올린 탑, 마을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장승,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솟대, 뒷산 소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모신 산신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제~짐대제(솟대)~장승제 순으로 제를 지내며, 제가 끝나면 농악대가 탑, 솟대, 장승, 우물 등을 찾아다니며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비는 굿을 한다. 이곳에서는 솟대와 장승을 4년마다 윤달이 있는 해에 다시 세워서, 신을 떠나보내는 신과 맞이하는 신으로 나눈다는 점이 특이하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옥천 청석교 향토전시관 앞의 정원에는 근사한 판형 돌다리가 연뭇 위에 세워져 있는 다리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으나, 2001년 4월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 전시하고 있다.
옥천은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이 있어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무대로 알려졌다 대체 가는곳마다 정지용님의 시가 적혀져 있고 특히나 향수는 벽에서 그려질만큼 쉽게 만날수 있는 작품이다 유원지는 호수가가 마음에 들어 걷기로 했다 호숫가 30리길 겨울날 사람은 두물다 겨우 서너쌍을 만났을 뿐이다 허기사 이겨울 누가 찬바람 맞으며 걷는것에 도전할까... 그럼 우린 정신나간 사람? 아니다 고요와 평온 그리고 한가로움 그자체다 조금 걷다보면 시한편 읽을거리 제공해 주었고 지루할때쯤 조각 한점 찬바람 그리고 호수의 물이 잔잔하다 스치는 옷자락에 마른가지 흔들리고 채녹아 내리지 못한 지난해 연줄기 고개숙인채 얼어붙은 모습이 생과사를 논한다 잠시 인간생을 생각할 즈음 꺾여버린 연줄기가 굽어진 사람 등처럼 휘여짐이 서럽다 긴한숨 들이 마시니 퍼뜩 정신이 든다 걷다가 걷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드라도 겨울날 이곳을 찾았던 시간을 그리움으로 기억할 한편의 글이라도 적어 두어야겠다고...
주소/충북 옥천군 안내면 장계리 산7-1(안내면 장계1길 57) 사진/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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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향수하면 정지용, 정지용하면 향수라 할 만큼 알려저 있지요.
옥천 태생이라는 것 까지는 알고 있으나,
문학활동을 하며 지내던 문학인들의 면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애석한 것은 해방과 정부수립 기간의 혼란한 틈에 신 지식인들이
현실보다 유토피아의 세계같이 미화된 사회이념주의에 물들어
북으로 넘어가 예술이나 문학활동을 꽃피우지 못한 애석함이 있어요.
그 중 한분이 정지용 님이기도 합니다.
계절적으로 아무것도 없을때라 쓸쓸함도 있지만
봄이 되면 생동감이 넘칠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문학인들의 조우도 이루어지고
나름대로 작품활동도 하면서 신인배출도 많은 것 같았습니다
문이 잠겨 안을 보진 못했지만 작품들도 전시가 되는가 보드라구요
심심치 않게 걸으며 읽는 재미도 괜찮았구요
따로히 부연설명이 없어도 잘아시는 새벽님이라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