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린 육백리
강 문 석
‘오늘은 휴전선 행각 마지막 날. 나는 지금 동부전선에서도 가장 치열한 격전을 치룬 향로봉을 오르고 있다. 설악산 한계령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개울이 이어진다. 발길은 북쪽을 향하면서도 눈은 연방 설악의 동쪽 골짜기를 향한다. 30년 만에 다시 보아도 밝은 빛 맑은 기운이 굽이쳐 흐르는 물보라와 함께 가슴속의 티끌을 단번에 씻어주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시원하냐. 그런데 이런 데서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겼더란 말이냐. 친소도 없이 은원도 없이 싸우다 말고 총을 던지고 폭포수에 발이라도 담그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데가 아니냐.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더구나 지난날 전투 중에서도 가장 처참했던 것이 이곳 향로봉 싸움이었다니 우리는 왜 그렇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중략…차는 어느새 진부령을 넘는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진부리에 닿는다. 마을은 터만 남았고 집도 사람도 없다. 길가에 비석 두 개만 서있다. 향로봉지구 전적비와 설화에 희생된 순국충혼비다. 피 발린 비석이요, 눈물어린 비석이다. 전적비석에는 1951년 3월 7일부터 6월 9일까지 우리 국군이 공산군과 싸워 이 지역을 되찾게 된 사적을 새겼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 휴전선을 지도에서 이처럼 북으로 높이 올려 놓은 것은 실상 이 싸움에서 승리한 때문이다. 전승 5년 후 초봄에 바로 이곳 향로봉 밑에서 눈사태로 우리 국군들이 희생된 아픔을 충혼비에 적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통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략… 마침내 1293미터 향로봉에 올랐다. 6백리 휴전선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마루에서 부슬비를 맞으며 바라본 남과 북의 강산. 아, 조국의 강토는 참으로 장하고 아름답도다. 그런데도 우리는 슬픔과 불행 속에 잠겨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우냐.
나는 마지막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덥석 붙들자 마치 강한 전류에 감전된 듯 손발과 가슴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철조망을 움켜잡은 채 한걸음씩 동쪽으로 바다를 향하여 걸었다. 끝없이 철썩이는 동해의 물결. 바닷가에 둘러쳐진 철조망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쇠말뚝 하나 잡아보려고 육백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하략….’
노산 이은상의 기행문 <피어린 육백리>의 앞부분이다. 6.25동란이 휴전으로 막을 내리고 나서 선생은 한반도의 허리를 두 동강으로 자른 휴전선 155마일을 직접 밟은 후 이 수필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1962년이었고 당시 난 서울 서대문 지역에서 글이 실린 신문을 배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필을 접할 수 있었다. 그땐 이미 작가의 <가고파>와 <옛 동산에 올라> <봄의 교향악>과 같은 명시들이 불후의 명곡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터였다. 40여 일 동안 신문에 연재되는 글을 가슴 졸이며 읽었고 휴전선에 대한 한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것은 어쩌면 동란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문연재가 끝나고 나서 작은 문고판으로 <피어린 6백리>를 펴낸 것은 책을 통해서 보다 많은 국민들에게 휴전선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주경야독하던 고학생이 그 책을 손에 쥐었던 걸 난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작년 가을 문인단체 문학기행지를 결정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이 ‘이은상문학관’이었다. 풋풋한 열여덟에 가슴으로 읽었던 <피어린 6백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은상문학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학관 건립은 선생의 친일행적 논란으로 벌써 십 수 년째 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선생께선 광복 전인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다시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그러고는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유명을 달리하자 유해는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선생을 사학가이자 수필가로 기억하고 있다.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거기에다 광복 후에는 문학보다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인물인지라 난 지금도 선생의 문학관을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국토의 허리를 가로지른 휴전선이 반세기를 지나고도 15년 세월이 더 흘렀다. 세계전사에 가장 비극적인 전쟁으로 오를 정도로 6.25동란은 참혹했으니 강토를 피로 물들이고도 남았을 터이다. 2005년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지구촌 대학생들을 초청하여 ‘평화대장정’이란 이름을 걸고 임진각을 출발하여 연천-철원-양구-인제 금강산까지 종주했고 또 세월이 흘렀다. 임진각에서 어린아이를 달고 온 외국인 커플을 만나자 13년 전 휴전선을 밟았던 사람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수성 예민하던 젊은 시절부터 줄곧 들어온 때문인지 임진각에 서고 보니 KBS 라디오연속극 ‘김삿갓북한방랑기’가 떠오른다. 매일 한낮 짧은 5분짜리로 전파를 탔던 인기프로그램이었다. 공산압제에 시달리는 북한동포들의 참상을 역사 속 풍류시인 김삿갓을 등장시켜 낱낱이 고발했던 것이다. 연속극은 항상 “어이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란 장탄식으로 끝나 휴전선의 한을 증폭시켰다. 오늘을 사는 노인들은 '김삿갓북한방랑기'로 인해 휴전선 너머의 동포들 실상을 알 수 있었을 터이다. 36년 전 작고한 노산 선생의 '피어린 육백리'를 떠올리노라면 지금처럼 걸을 수 있을 때 남북분단의 한이 서린 휴전선을 직접 밟아보고 싶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76493F5B46098D2B)
![](https://t1.daumcdn.net/cfile/cafe/99754D3F5B46098D2A)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D273F5B46098D0F)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43C3F5B46098E0E)
![](https://t1.daumcdn.net/cfile/cafe/9907793F5B46098E08)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3CD3F5B46098F0A)
![](https://t1.daumcdn.net/cfile/cafe/996E923F5B46099016)
![](https://t1.daumcdn.net/cfile/cafe/9917613F5B46099033)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826435B40AD3D2C)
![](https://t1.daumcdn.net/cfile/cafe/99E5CB435B40AD3D33)
![](https://t1.daumcdn.net/cfile/cafe/99EA79435B40AD3D10)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D09505B40AD3E2B)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080505B40AD3E1D)
![](https://t1.daumcdn.net/cfile/cafe/99A1E9385B4245F913)
![](https://t1.daumcdn.net/cfile/cafe/99E64C375B460D521D)
![](https://t1.daumcdn.net/cfile/cafe/9911AB375B460D5245)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D89375B460D5227)
![](https://t1.daumcdn.net/cfile/cafe/994F3C3E5B44E8D708)
![](https://t1.daumcdn.net/cfile/cafe/992E293E5B44E8D812)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4BF3E5B44E8D804)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353385B4245F92C)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C44425B4C8ABE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