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활의 절정기 시절, 인류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 핵심 제자단을 동반하고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모하셨고, 신비스런 영광 속에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장 35절) 그 말씀으로 인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더욱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내려오시니, 산밑은 큰 군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나름 절박한 필요성을 지니고 찾아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서자 마자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악령을 한 아이에게서 쫒아내셨습니다.
그간 그 어떤 예언자나 명의(名醫)로부터도 볼수 없었던 탁월한 예수님의 치유 능력과 촌철살인의 말씀, 인간적인 매력 앞에 제자들은 물론이고 모여든 모든 사람들은 경탄과 박수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 스승님의 모습을 본 제자들의 어깨는 자기도 모르게 으쓱으쓱했겠지요. 제자들을 지인들에게 자랑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봤어? 저분이 바로 내가 모시고 있는 스승님이야! 내가 이런 사람이야!”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 가득 차오르는 기대감을 떨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이제 스승님의 나라가 서게 되면 ㅎㅎㅎ”
그러한 헛된 기대와 야심을 정확히 꽤뚫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엉뚱한 환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제자들의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는 초강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장 44절)
당신 수난에 대한 두번째 예언인 고통스런 이 말씁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지만, 어쩔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안배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야서 53장 6절)
제자들의 반응은? 안타깝게도 스승님의 말씀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메시아상이 전혀 엉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의 절절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지극히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란 존재를 통한 개인적인 야심의 성취를 위한 계획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피조물의 손에 넘겨져,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스런 관문을 통과하셔야 하는 운명을 지니셨습니다.
따라서 이웃을 위한 희생과 헌신, 모욕과 십자가 죽음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수용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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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깨달음과 도달함의 사이에 있는 십자가>
보조국사 지눌과 그 누이의 이야기입니다. 지눌의 누이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부처님처럼 훌륭한 동생이 있으니,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야. 동생이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지눌의 누이는 지눌이 열심히 불공을 닦아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을 무시하였습니다. 누이는 아랫마을에 살면서 지눌에게 반찬과 음식을 자주 갖다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누이가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눌은 누이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자기에게 먹어 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 먹기만 하는 동생을 보고 누이는 은근히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동생, 아무리 배고 고파도 그렇지. 내게 먹어 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서 먹는 법이 어디 있어?”
“왜요? 동생이 배부르게 먹으면 누님도 저절로 배부르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자네가 먹는데 왜 내 배가 불러?” 지눌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누님께서는 항상 동생인 제가 부처님 같으니, 그 불법의 힘이 누님에게도 저절로 미친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지눌의 누이도 불도를 열심히 닦기 시작했습니다.
지눌이 활동할 당시 불교는 선종과 교종의 갈등이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 선종은 깨달음을 중시하고 교종은 배우는 것을 중시합니다. 가톨릭종교로 말하자면 선종은 교회 내에 성령의 감도로 내려오는 진리인 ‘성전(聖傳)’을 말하고, 교종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록인 ‘성경(聖經)’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불경을 통해 배우려는 종파가 교종입니다. 반면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고 미소를 지었을 때 그 의미를 깨닫고 미소로 화답한 가섭의 예처럼, 설명할 수 없는 부처의 마음을 깨달으려는 것이 선종인 것입니다.
선종은 교종이 글자에 얽매인다고 비판했고, 교종은 선종이 무식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실제로 선종에서는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일부 승려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반면 교종 승려들은 정치에 관여하며 무신들을 차별대우하여 발생한 ‘무신의 난’이 발생하는 데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눌은 이 혼란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정혜쌍수’의 논리를 펼쳤습니다. ‘정’은 선종의 수행법을 말하고, ‘혜’는 지혜를 뜻하여 교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선종)과 말씀(교종)의 가르침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수행 방법으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는데, ‘돈오’는 선종의 깨달음이고, 그 깨달았다면 ‘점수’, 즉 조금씩 그 깨달은 곳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종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종의 도움으로 그 깨달은 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마치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번개가 번쩍 치는 것을 보고 나아갈 길을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길을 보았다고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았어도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보조국사 지눌의 깨달은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그 누이가 보조국사 지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려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두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칫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로 고백했다고 할 것을 다 했다고 믿으면 선종만 주장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깨달았다면 말씀을 통해 배우고 익혀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복음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신앙고백이 끝이 아니고 십자가가 남았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참으로 자신이 도달한 신앙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십자가가 다가왔을 때 도망치게 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선종과 같습니다. 교리를 배웠다고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그 배운 교리를 나의 것으로 체득하여 내가 변해가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길을 보았으면 더듬어 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안 되기 때문에 성체성사의 감동은 줄어들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잊고 심지어 사랑하라는 유일한 계명을 어기고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하기까지 되는 것입니다.
안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알면 그것이 나의 것이 되도록 체득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배부르다고 우리 배까지 부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먹고 마시고 행동해야 그리스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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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44-45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주님께서 사람들의 잔인한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예고를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들,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서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고,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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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리자는 아기 때 부모에게 버려져 며칠 동안 폐가에 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발견되어 살아났습니다. 그녀를 입양한 이나는 극도의 트라우마와 공포에 시달리는 리자를 인내와 끈기로 가르쳤습니다. 리자는 새어머니의 끈질긴 노력으로 러시아의 유명 모델이 되었습니다. 열 살 무렵 친어머니가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을 때 만나기를 거부하며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어떤 생명체도 피 흘림 없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피를 흘려야 진정한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을 위하여 마치 거름처럼 자신의 생명을 바칩니다. 이것이 부모의 자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칭찬하고 놀라워합니다. 아무도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영광의 시간에 죽는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 의아해하면서도 감히 무슨 뜻인지 여쭈어 보지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힘이 당신 십자가의 죽음 덕분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세상을 살리는 생명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려는 이는 생명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거부하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의 영광은 자녀에게 생명을 주어 자녀를 살게 할 때 드러내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의 영광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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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새로 사제 서품을 받으면, 새 사제들은 서울과 근교에 있는 수도원들을 방문해 첫 미사를 집전합니다.
서품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새벽 일찍 택시를 타고 어느 수녀원에 가는데 택시 기사 분이 제 로만카라를 보고는, “신부님이신가봐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네, 얼마 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젊은 나이에 출세하셨군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출세한 것이 맞긴 맞지만, 세속적인 사람들의 눈에 출세한 것처럼 보일만큼 편해 보이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살다가 예수님의 희생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어제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신 순간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베푸신 모든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증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당신의 존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전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희생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그리스도는 모든 병자들의 고통을 단번에 사라지게 하시는 분, 이스라엘 왕국의 현세적인 정복자, 어려움 없이 그들을 영광으로 이끌어주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예언을 통해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실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에 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이 장면의 제자들의 모습 속에는, 우리 신앙인들의 흔한 모습이 두 가지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삶의 괴로움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께 대한 강한 믿음과 희망으로 인하여 영광스러운 예수님,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고통과 죄를 이기신 결과”입니다.
무언가를 “이겼다”는 것은 일종의 어려움의 과정을 전제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운동 선수는 없습니다. 별다른 투자와 노력 없이 1등을 하는 학생도 없습니다. 이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에도 그만한 고통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는,혹시라도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이를 외면하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길 기대합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이러한 기대에만 너무 의지하다보면 실제로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원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짊어져 주시길, 그리고 이를 우리가 잘 견디어 내길 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 십자가를 없애주실 주님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답을 올바로 쓴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천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어원상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십니다”라는 답은, 우리의 입이 아닌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고통과 희생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공경이 밑받침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통을 겪으셨기에 우리의 고통 역시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힘을 모은다면 현세의 어려움은 극복되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 환호송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이러한 분이 우리의 주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오늘의 화답송처럼,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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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 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9,45)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신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물어보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을 때 준비 없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뿔뿔이 도망쳤고,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서도 의심과 혼란을 피하지 못한다. 가끔 우리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두려움을 동반하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물론 긍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긍정적’이라는 말의 의미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피하고 싶은 상황을 달리 해석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말이다.
불편을 느끼게 하는 진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만난다.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자 하는 우리의 움직임은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미봉책으로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진실만이 우리가 옳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려운 진실일수록 용기를 내어 그 앞에 서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틀렸다면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고, 숨겨진 참된 뜻을 신앙 안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려는 이들이 많아 보이는 세상이다.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진실을 거짓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많아 보이는 세상이다.
최소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앙 안에 살고 있다면, 진실 앞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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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작어떤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지거나, 일깨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의 삶에는 그런 경우가 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계획은 우리의 생각이나 뜻과는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적합한 만큼 이루어주시고 일깨워주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무작정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을날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노력 안에서 기다림이, 맡겨드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이, 뜻이 무엇인지 기도 중에 겸손하게 여쭤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듣기 위한 겸손하고도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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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신앙과 맹신>
루카 9,43ㄴ-45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신앙과 맹신>
신앙은 하느님과 믿는 이의 나눔입니다. 맹신은 하느님을 독재자로 섬깁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물음을 허락합니다. 맹신은 하느님께 대한 물음을 거부합니다.
신앙의 물음은 하느님과의 거리를 좁힙니다. 맹신적인 추종은 우상을 만들 뿐입니다.
신앙하는 이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맹신하는 이는 제가 만든 우상에 무릎을 꿇습니다.
신앙은 이성을 통해서 진리로 나아갑니다. 맹신은 감정에 취해 진리를 왜곡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참삶의 길입니다. 맹신은 하느님을 핑계 삼는 죽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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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하느님의 편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웃고 있는 너를 보는 내 마음은 기쁨이고, 울고 있는 너를 보는 내 마음은 짓이겨진 아픔이다. 내가 너를 위해 고통을 없이 해주고 싶어도 어차피 네가 넘어야 할 산 한 번은 지나야 할 고행이다. 너무 슬프다고만 말고, 너무 아프다고만 말고, 너를 더욱 굳건히 지켜 내 귀한 열매가 되어주렴. 너는 나의 귀한 보석으로, 너의 내 귀한 사랑으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야 합니까? 스승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혹시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서 차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들은 모두 무서워하며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미리 말씀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영광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고운님들의 모든 것도, 특히 고통과 슬픔, 어려움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놓일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면서 살라"는 의미로 미리 수난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어떤 석공이 돌덩어리를 해머로 내려치고 있었습니다. 100번이 넘게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돌덩어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101번째 그 꿈쩍도 하지 않았던 돌덩어리가 ‘쩍’ 하고 갈라집니다. 그렇다면 그 돌이 이렇게 두 조각이 난 것은 101번째 내리쳤던 해머질 한 번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첫 번째부터 101번째까지의 해머 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열매 맺기 위한 해머 질을 하는 은총 가득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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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68)
♧♧ 시편 51편 11절….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주소서."
9절이 의식적인 측면에서, 10절이 하느님과의 관계의 측면에서 죄의 용서를 간구한 것인 반면, 이 구절은...법적인 측면에서 죄의 용서를 간구한 것입니다. *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이는 주님의 정의에 그릇되게 자신의 죄를 눈감아 달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의 중함을 생각할 때 멸망 받을 수밖에 없으니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죄 값대로 형벌 받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 저의 모든 죄를 지워주소서... 죄에 대한 모든 기록을 판결문에서 삭제해 달라는 것입니다.
♧♧ 시편 51편 12절….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마음’은 감정과 사고, 그리고 행동을 유발시키는 지성, 감정 의지가 앉아 있는 자리입니다.(시편 4편 8절. 잠언 4장 23절. 참조) 다윗이 다시금 하느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느님께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그 능력으로 죄악에 물든 자신의 마음을 새롭고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 죄의 용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죄를 짓지 않는 변화된 마음을 지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굳건한 영...’은 ‘진실한 영’ ‘정직한 영’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곧 믿음을 말합니다. 다윗은 죄를 짓기 전에 자신에게 있었던 믿음을 새롭게 회복시켜 다시금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거룩한 영...’은 구약 시대에도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과 함께 섭리하셨던 성령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성령 하느님께서 자신과 늘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다윗의 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간구한 이유는 사울의 죄로 인해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을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서 떠났다는 사실(사무엘 상권 16장 13 절)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아 장차 임금이 될 자로 구별될 때에도 ‘주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실을 비추어 보아(사무엘 상권 16장 13절. 참조) 하느님께서 성령을 거두시면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느님께 자신의 죄 때문에 영원토록 자신을 버리지 마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늘 함께 해주시기를 재자 강조하며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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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린아이들이 함께 놀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뺨을 때렸습니다. 이렇게 뺨을 맞았을 때의 반응은 세 가지 경우가 있겠지요.
첫 번째는 때린 아이의 뺨을 똑같이 때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부여잡고 울면서 떠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뺨을 맞은 이유를 냉정히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밝은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세 번째 반응입니다. 뺨을 맞은 이유를 분석하다 보면 당연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반응을 따릅니다. 내가 당한 만큼 되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다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때린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만 가득합니다.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이 마음만 괴로워집니다. 이렇게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지만, 세 번째가 아닌 절대로 선택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고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의 상황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이를 미리 준비시키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도록 미리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그 말씀에 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 침묵하고 말지요. 지금까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보아왔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영원하리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영광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앞선 이야기의 세 번째 선택이 아니라, 두 번째를 선택합니다. 그래서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주님의 뜻을 거부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따져보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밝은 미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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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 온 지 1달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밝은 웃음으로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곧 적응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전보다 치안이 훨씬 좋아졌다고 하십니다. 뉴욕은 곳곳에 공원이 있으니 공원을 보는 재미도 있다고 합니다. 신문사도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예전보다는 일하기가 수월해졌다고 합니다. 뉴욕의 뮤지컬, 박물관을 구경하는 멋진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뉴욕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갑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뉴욕의 교통체증은 장난이 아니라고 합니다. 범칙금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고 합니다. 법정에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운전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뉴욕은 인건비가 비싸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불러서 했던 일도 여기서는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손재주가 없어서 그것도 걱정입니다. 사슴 진드기, 벼룩이 있어서 잘못 물리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합니다. 피부가 약한 편이라서 공원 갈 때도 신경이 쓰입니다. 차 안에 동전을 넣지 말라고 합니다. 동전 때문에 차 유리창이 깨질 수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차에 동전통은 없습니다. 걱정해 주는 말이 고맙습니다. 그런 말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은 아직 오직 않았다. (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지금 처한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최악이 아직 오지 않았다. (The wor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만난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나쁜 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지구에 온 어린 왕자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 주면 좋을까요? 아름다운 노을을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지구를 환하게 밝힌 태양이 잠시 쉬러 가는 거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을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그 이슬은 넓고 깊은 바다에서 왔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이슬이지만 큰 바다를 품고 있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그 주위에서 춤추는 나비와 벌에 관해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지구는 참 평화로운 곳이라 말하면 좋겠습니다. 생각하면 지구별은 이 넓고 광대한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별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어린 왕자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구별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때문에 오랜 시간 지구를 찾아온 설렘과 기대가 날아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 독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유배 생활의 어려움도 곧 끝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 머물리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걸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 멍에는 가볍고, 내 짐은 편합니다. 오늘 걱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내가 세상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 있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진리의 협조자, 성령을 보내 드립니다.”
사람에게 넘겨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모함과 질시를 받아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직 최선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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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하느님은 ‘삶의 중심’이시다-
믿는 이들의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요즘 참 많이 사용하는 삶은 ‘여정’이라는 말마디입니다. 이런 믿음의 여정에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십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믿음의 여정-하느님은 삶의 중심이시다-’로 정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계절에 와 있습니까? 나이 80을 한 평생으로 하여, 20까지는 봄, 40까지는 여름, 60까지는 가을, 80까지는 겨울로 치면 말입니다. 이 사계 인생들중 아마 가장 많이 수도원을 찾아 피정하는 분들은 가을 연령대에 걸친 분들일 것입니다.
가을은 무엇보다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보십시오. 가을철 9월은 순교자 성월,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성월 보다 시피 모두 기도의 계절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어느 계절보다 기도 많이 해야 할 가을철입니다.
가을은 익은 열매들을 거두는 수확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수녀원 피정을 끝내고 올 때 황금빛으로 익어가던 평야의 벼들은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열매 익어가는 황혼의 노년의 아름다움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런지요. 흡사 저녁 노을 아름다운 일몰日沒 때 같은 노년의 아름다움도 연상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중 과연 내 인생은 지금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가을 인생이라면 요즘 여기 요셉 수도원 과수원의 배나무들처럼 열매 탐스럽고 향기롭게 익어가는 인생이겠는지요? 영적 열매 부실한 가을 인생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꽃피는 봄에 이어 열매익어 가는 가을입니다. 은은한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편안하고 푸근한 가을의 열매 향기는 더 좋습니다. 과연 영성 열매의 향기, 신망애信望愛 열매의 향기 은은 그윽한 가을 인생인지요. 어제 참으로 오랜 만에 자매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피정에 참여했던 수녀님으로부터 제 소식을 듣고 보낸 편지 전문을 인용합니다.
-“신부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오랜만에 정아가다 수녀님을 통하여 소식듣고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수녀님 말씀이 이번 피정 주옥같고 옛 고승高僧같은 변함없으신 신부님이시라고 말씀하시며 강의 책 두고두고 보신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저역시 말씀 고플 땐 강론집 읽지요. 언젠가 뵈려 가려해도 제 건강이 안좋아져서 때론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못갔습니다. 신부님, 건강하시고 늘 불암산 아래 정주하고 계신 신부님, 제가 찾아 뵐때까지 건강하세요. 신부님, 행복하세요. 황희숙 소화 데레사 올림”-
믿음의 여정에,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한결같이 여전한 변함없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바로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이 이에 해당됩니다. 말씀이 고플 때 강론을 읽는 다는 표현이 참 절실하고 아름답습니다. 늘 하느님을 배곺아 하는, 목말라 하는 수도자들입니다. 어찌 수도자들뿐이겠습니까? 많은 믿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하여 하느님이 배곺아, 목말라 하느님을 찾아 말씀을 먹고 기도를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대전에서 어느 부부가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결혼한 30대 초반의 아들이 심한 게임 중독으로 수도원에 장기간 머물며 치유기간을 가질 수는 없는가 알아보려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간다는 이제 게임 도박때문에 도벽까지 생겼다는 것입니다. 후에 이런 내용을 들은 수도형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었습니다.
“중독은 병입니다. 중독에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 빠진다든지, 서바이블 게임을 한다던지, 높은 산에 땀을 뻘뻘흘리며 오른다던지---그런데 돈을 거는 도박 성격만한 재미가 없을 것 같고---병원에 입원 치료해도 장기적 해결책은 못될 것 같고---”
뚜렷한 결론이 없었습니다. 육신의 병 이상으로 참으로 무서운 것이 영혼의 병, 마음의 병, 정신의 병입니다. 무엇보다 중독이란 병이 참 심각합니다. 영혼을 육신을 파괴하여 폐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여 인생광야여정중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이지만 잘못 중독으로 미치면 폐인廢人이 된다는 제 지론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배고픔을, 목마름을, 갈망을, 갈증을 해소, 해갈시켜 줄 궁극의 대상은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날로 살아갈수록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깊어가는 우정의 사랑이 참으로 건강한 영육으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찾아 만나는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문, 아무것도 너를 이라는 가사와 곡이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 중심의 삶만이 한결같은 안정과 평화의 삶에 답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아직 이런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이 미약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에 놀라다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듣자 전전긍긍 불안해 합니다. 그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으니 그 뜻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물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란 말씀까지 함축된 예고입니다. 제자들은 몰랐지만 오늘의 우리는 이미 압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심을 말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이 이점을 깨달았더라면 불안해 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만, 아직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하느님의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이 이를 입증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바로 하느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음의 여정중에 우리의 영원한 도반으로 삶의 중심에 모시고 우정을 깊이할 때 참으로 한결같은 안정과 평화의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건강한 영혼에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자의 세 번째 환시중 다음 예언이 그대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파스카의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둘러 싼 보호의 불 벽이 되어 주시고 우리 한가운데에 영광이 되어 머무르시니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시온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보호의 불벽이 되어 주시고 우리 안에 영광이 되어 머무르심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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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루카 9,43) 오늘의 복음 대목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악령 들렸던 아이의 치유 사화에 이어 나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놀라워한다는 말이 이해되지요. 복음사가는 "다", "모든"이라는 수식어로 군중이 느끼는 경탄과 경외심을 극대화해 전달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갑자기 찬물이 확 끼얹어진 듯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제자들을 향해 이르십니다. "너희는"에 사용된 조사 "는"은 군중과 제자들을 구분합니다. 설령 군중은 경탄하고 기대에 부풀지라도, "너희에게만는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시며 첫 번째 예고 때(루카 9,22 참조)와 달리 수난에 대해서만 간략히 전하십니다. 기적도 일으키고 사람도 되살리는 분이 "사람들 손에 넘겨진다"니... 이 표현은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중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이사 53,7) 백성의 악행을 자원하여 대속하는 메시아 상이 깔려 더 비장하게 들립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루카 9,45)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잔뜩 고조된 성공 체험, 흥행 분위기에 들떠 있으니 수난 예고가 귀에 들릴 턱이 없지요. 이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빈틈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의 독서(입당송, 제1,2독서, 화답송, 복음 환호송, 복음, 영성체송)에는 우리 각자를 만나려 다가오시는 말씀께서 현존하십니다. 각자에게 맞게 다가오시는 말씀은 우리의 역사, 실존, 상황, 특성을 건드리시며 말을 건네시지요.
이런 비유는 좀 경박스러울지 모르나,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은 진정 살아계시기에, 우리 각자에게 맟춤형으로 요리된 "당신을 위한 오늘의 특선 메뉴"와 같습니다. 성령의 현존을 청한 후 그 말씀들을 읽고 머물고 묵상하면서, 천사와 목숨을 걸고 씨름한 야뽁 나루터의 야곱처럼 엎치락뒤치락 매달려, 들고 파고, 물어뜯고, 잘근잘근 씹고, 삼키고, 되새기고 하다 보면 말씀에 감추어진 뜻은 서서히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물론 이 과정이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매우 적절한 때에 은총으로 건드려 주시기에 깨달음 또한 그분께 맡기고 묵묵히 머무를 뿐이지요. 이는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준다"(지혜 6,13)는 지혜서 저자의 경험적 명제로도 확인되는 여정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이제보니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였지만, 더 깊이 진지하고 대담하게 여쭙지 못한 그들의 태도도 일조를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미 자기 안에 답을 가지고 있을 때는 더 못 알아듣습니다. 아니, 자기 욕구와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면 알아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못 알아듣는 체하는 동안 불편하게 다가오신 말씀께서 이번에는 그냥 지나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당신을 위한 오늘의 특선 요리"를 준비해 다가오시는데, 짐짓 모른 체하며 마치 뷔페에 온듯 구미에 맞는 음식(말씀)을 고르려 합니다. 소화가 잘 될 것 같은 음식, 즉 양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큰 무리 없이 무탈하고 다복하게 사는 데 격려와 위안이 되는 말씀을 찾아 헤매기도 하지요.
말씀에 관해 묻기 두려워하는 태도에는 여러 원인이 작용할 겁니다. 우선 게으르고 귀찮아서, 말씀보다 중요한 다른 일들이 널려 있어서, 말씀이 꽁꽁 감추어둔 자아를 건드릴까봐, 말씀이 미지근한 나를 삼켜버릴까봐, 행여 십자가를 주면서 세속적 욕망을 놓으라고 할까봐...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시기에 하까이 예언자에 이어 활동했던 즈카르야 예언자의 환시와 신탁 부분으로 그에게 내린 여덟 개의 환시 중 세 번째 환시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즈카 2,6) 즈카르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펼쳐 주시는 환시의 뜻을 묻습니다. 환시에 담긴 모호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한 인간이 천상 존재에게 용기내어 묻는 것입니다. 그에게 보여진 여덟 개의 환시 중, 드러난 정황이 매우 명확한 네 번째 환시(즈카 3,1-10)와 천사가 그에게 질문한 여섯 번째 환시(즈카 5,1-4)를 제외하고 즈카르야는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그에게 질문을 막을 만큼 심각한 선입견이나 두려움이 없고 또 심저에 자기를 위해 고정된 답이 없기에 가능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를 잡으리라. ...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즈카 2,8) 새 성전 건립과 도성 성벽의 재건에는 이방인의 시기와 방해라는 외부적 요인도 있었지만, 내부적 분열 상황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극복해야 할 어려움 중 하나였지요. 이에 주님께서 이 도성 재건이 당신의 뜻임을 반복적으로 예언자를 통해 들려 주십니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5) 이제 새 예루살렘은 자기 민족만의 좁고 편협한 울타리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구분과 분리, 차별을 상징하는 성벽 없이, 들어오려는 모든 이를 환대하고 껴안기 위해 끝없이 확장되는 널찍한 품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대신 주님께서 불 벽이 되어 주신다니 "사랑의 불"이 예루살렘을 에워쌀 것입니다.
재건될 새 성전, 그리고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성벽에 구획 지어지지 않아, 넓이에 한계를 모르는 영원한 도성이 될 것입니다. 성 안과 성 밖은 차가운 돌벽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불 벽으로 가늠하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주님께서 온 도성에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 되실 것입니다.
자기들 권위에 도전이 될까 두려워 주님 말씀을 외면한 바리사이들이나, 첫 번째 수난 예고 때의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 제자들처럼, 혹시 즈카르야 예언자도 제 민족만을 위한 예루살렘 도성의 영화를 꿈꾸어 질문들을 그냥 삼켰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다행히 그는 묻고 또 물으며 하느님 뜻의 핵심을 향해 깊이 깊이 들어갑니다. 자기 계획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뜻만을 추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간결한 수난 예고에 말문이 막혀 더 여쭙지도 못하고 결국 감추어진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에 담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적 의미까지 가닿지 못한 채 두려움만 가득 안고 말씀의 여정을 중단한 모양새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말씀과 함께 걷는 여정 안에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어도 경청하고 순히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사심없이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하여."(즈카 2,15) 묻고 답하고 듣고 새기고 머무르는 사이 우리는 말씀과 결합해 하나가 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일치! 온 힘을 다해 말씀에 몰입하고 전념하는 사이 내가 말씀이 되고 말씀이 내가 되는 신비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 두려움을 멀리 치워버리고 말씀에 한번 빠져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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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함께함’이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함
‘함께함’이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함’이란 올바른 평가와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우리 이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에서나 사랑을 찾아라.’는 두 번째 방법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함께함’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을 제대로 평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내 영혼의 리필」에서
♣사랑의 척도는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상대를 위해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는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자녀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갖고 자녀들을 다스리려고 하면 자녀가 홀로서기 힘들 뿐만 아니라, 주체성이 없어지고 창의력이 없어집니다.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고 오로지 부모의 뜻을 맞추기 위해 부모님의 평가와 관심에만 머무르면 자아의 상실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평생 동안 거짓자아가 형성되어 버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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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그 이유를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전합니다.
당시 메시아를 고대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제자들은 로마제국에서 그들을 구해 낼 승리의 메시아, 영광의 메시아를 희망했습니다. 그들은 감추어져 있는 뜻, 곧 승리와 영광과 부활에 앞서 전제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우리가 온전히 믿어야 할 교리의 전부이자 핵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모두가 함께 승리와 영광의 잔치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 있는, 숨겨져 있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삶의 자리에서 날마다 찾아오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기꺼이 짊어지고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제대로 믿고, 전부를 믿어서, 승리와 영광과 부활의 잔치에 함께 초대되어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교회가 깊은 선교 쇄신을 추구하는 오늘날, 우리가 날마다 수행하여야 하는 선포의 한 형태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이웃이든 전혀 낯선 이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준비가 늘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거리나 광장에서, 일할 때나 여행할 때와 같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2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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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모르는게 약>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는 제자가 없었죠 뭔가 의미심장하게 닥쳐올 어둠을 말씀하시는것 같으나 다시 여쭐 수 없는 분위기처럼 느껴집니다
말하는 사람의 속내를 다 헤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께하는 마음으로 지내다보면 그 뜻을 헤아리는게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내일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산다면 속 시원하고 좋을까요? 그렇지 않다는것 아시죠? 모르는게 약이 될 때도 있으니 오늘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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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
넘겨져도 사람의 생명은 생명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생명까지 우리들 손에 맡기십니다.
내어주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넘겨지심으로 하나가 되십니다.
삶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모진 우리가 새로워집니다.
넘겨지심으로 모든 경계와 구분을 허무십니다.
넘겨지심으로 우리와 공동체가 되십니다.
서로를 위한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넘겨지지 않으면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넘겨지고 내어주어야 서로를 살리는 생명이 됨을 십자가에서 다시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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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약한 모습이 가장 강한 모습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가장 강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십니다.
가장 약한 이름, 예수에 실망하지만 가장 약한 이름이 오히려 우리를 가장 뜨겁게 위로해 줍니다.
나약한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기에 나약한 모습에 이토록 우리가 잔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의 약함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약한 곳에서 하느님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연약한 한 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약함보다 더 절박한 기도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약함이었습니다.
버려진 거기에서 새 역사가 쓰여집니다. 사람이 된다는 건 서로의 약함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중심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장 약한 모습이 결국 모두를 하느님께로 모아들였습니다.
===================== 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