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0월 13일. '조선'에서 고쳐 부르게 된 우리 나라의 국호 1910년 대한 제국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다.
발해의 제 3대 문왕때의 연호. 737~793년간 사용하였다.
물주로부터 조달한 자금으로 노동자를 고용 관리하여 생산 활동을 영위하는 덕대를 통한 광산 경영 방식.
그릇의 표면을 약간 돋아나오게 띠 모양의 흙을 덧붙인 토기. 융기문토기 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에서는 부산동삼동, 양산 신암리, 양양 오산리, 춘성 내평리 등지에서 발굴된바 있다.
딸을 시집으로 보내지 않고 집에 대리고 있기로 하고 삼은 사위. 한자어로는 서 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들없이 딸만 가진 부모가 데릴사위를 들이는 것이 보통이나, 아들이 있는 집에서도 데릴사위를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상품을 매점 매석하여 가격 상승과 매매 조작을 노리던 조선 후기 상행위에 한 형태 혹은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 또는 상인 조직.
신성사상의 기반 위에서 자연발생하여, 거기에 노장사상, 유교, 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여러 신앙적 요소들을 수용하며 형성시킨 종교이다.
고려 후기 최고의 정부기관. 이미 삼국시대 원시집회소의 후신으로 군신합좌회의 장소이며, 각종 의식 및 행정실무의 집행기관인 남당의 별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도당은 고려 전기 변경의 군사문제를 논의하던 임시회의기관인 도병마사가 고종 말년 그 구성과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나타나기 시작한 명칭이다. 고려 후기 도당은 정사를 의논하는 재추의 합의기관인 동시에 백관을 총령하고 서사를 관장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
통일신라시대 9주의 장관.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이후 이미 도독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문무왕 때에 9주 장관의 명칭으로 도독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신라 중대에 있어서 도독이 갖는 정치 군사상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하대에 들어서면 도독이 강력한 세력자로 재등장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방세력과도 결타부되어 그 세력이 강화되었다. 신라 말기 문성왕 이후에는 외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보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성주 장군으로 칭하여지는 호족의 입장이 되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여 신라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며 숙위기관. 경대승에 의하여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이 도방은 일종의 사병집단제로서 원래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티는 말이었으나, 뒤에는 숙위대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경대승의 죽음으로 일시 해체되기도 하였으나 그 뒤 최충원이 집권하자 다시 설치되어 그 기능이 한층 강화 되었다. 최씨정권이 몰락됨으로써 한때 왕권에 예속되는듯하였으나 실제론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김준과 임연, 다시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러나 원종이 홍문계를 시켜 송송례와 삼별초를 움직여 임유무와 그 일당을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은 100여년 만에 끝나게 되었으며, 그들의 세력기반의 하나였던 도방도 아울러 폐지되었다.
일본의 무장. 정치가. 오와리국 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몽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오키치로 후에 하시바 히데요시라고 하였다가 다로대신 간파쿠가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중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었다. 1590년 천하통일을 이룸. 1592년과 1596년에 한국에 출병 (임진왜란과 정유재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조선시대의 소작 제도의 하나 지방에 따라서는 도조법 또는 도작법 이라고 불렸다.(20104 김수종)
승려가 출가할 때에 국가가 그 신분을 공인해주던 제도. 도첩제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도첩제는 억불숭유정책을 그 배경으로 자유로운 출가를 제한하고 불교를 국가적인 통치하에 예속시키기 위해서 시행되었다. 이 제도의 실시는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여 군정을 확보하려는 군사 경제적인 의도도 있었지만 불교 교세의 인적인 기반을 제약하여 불교를 억압하려 했던 데 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백제 부흥운동가 승려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자, 백제의 왕족이던 복신과 함께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 풍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아 독립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주류성 (지금의 한산)을 근거로 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해 오던 복신과 도침 사이에 반목이 생겨 도침은 복신에게 피살되었다.
조선시대에 그림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청. 도화서는 종6품의 아문으로서 그 직능은 장도화라고만 되어 있다. 예전에 의하면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된 관사로서 15명의 화학생도를 정원으로 더 두고 있다. 그러나 도화원이 1471년(성종2년)에 이르러서 도화서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초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였던 관청. 고려시대에 중앙관청으로서의 도화원이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서경(평양)에는 지방관청의 하나로 설치되었던 기록이 보인다.이루 미루어 중앙에도 도화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과 개화파가 합작하여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
1912년에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 까지 자주 독립 자유 민권 자강 개혁을 내 세우고 활동했던 시민적 정치단체 중심 세력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 급진 개혁파로 갑신정변 실패후 급진 개화파들은 국민 대중의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시민적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독립협회 운동을 추진 하였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에서는 대한 독립단,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대한 독립 군비단, 위군부, 광복당, 태극당, 광한단,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대한 통치부, 광정단 등의 독립군 조직이 설립, 특히 우리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신라시대에 귀족의 자제들 가운데 경서에 능통한 사람을 나라에서 뽑아 쓰던 제도
조선 말기 통리기무아문의 관직, 개항후 국내외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자 대외 통상의 새로운 과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생김.
불교용어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뜻이다. 돈오에 이르기까지는 그 이전에 정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한 후에 점수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 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되고 선조 때 간행된 우리나라의 전쟁사. 2권2책 활자본 1608년(선조 41)간행.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범하여 한사군을 설치하였던 때부터 고려말 이성계가 여진족 호발도를 물리칠때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사이에 일어난 30여회에 걸친 전쟁사를 기록한 책이다. 상하 두권으로 되어있고 내용은 37항목으로 되어있다.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조선 9대 성종의 명으로 1481년에 노사신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
1463년 정척에 양성지가 만들어 조정에 바친 지도. 특징은 도로,부,군,현,병영,수영등 인문 현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음
고조선시대부터 고려말까지의 편년체 역사서 56권 26책. 인본. 조선 세조의 명으로 최 항, 양성지 등이 1463년(세조9년)부터 편찬에 착수했으나 완성를 보지 못하고 84년(성종 15년)에 이르러 서거정에 의해 완성되었다. 단군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 사군, 삼한을 권수외기라 하여 1권에 수록하고, 삼국기를 8권 신라기를 4권 고려기를 44권에 수록하였다.
고려가 원 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 원나라가 고려의 서경에 설치하였던 관아. 70년 (원종11)에 원나라 세조는 자비령으로 경계를 삼아 그 이북의 지역을 모두 원나라의 영토로 만들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 그러다가 고려의 끈질긴 요청에 의해 90년 (충렬왕 16)에 드디어 동녕로총관부를 폐지하고 그 지역을 고려에 돌려 주었다.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지키되 근대 서구적인 기술은 받아들이자는 이론. 1880년 초 정치가이며 학자인 김윤식에 의하여 주창.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성리학의 이기론 적 우위관에 근거를 둠.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소중화사상인 화이론적 세계관에 이론적 바탕을 둠
1)고려가요의 하나 지은이 연대 미상 고려시대부터 구전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의 악학궤범에 한글로 가사가 실려 있다. 2)고려시대부터 전하는 관악곡. 세가락정읍이라고도 한다. 고려이후 궁중의 중요한 연례때 연주되어 온 장중하기 이를데 없는 아악의 별미이다. 3)궁중무용의 하나
고구려에서 매년 10월 국중대회를 열고 행하던 제천의식. 국정을 의논하고 그들의 시조인 주몽신, 즉 동명신과 그의 생모인 하백녀를 제사지낸 제천의식이다. 이 의식은 풍년이 들기를 빌고, 충성한 수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농제이기도 한데, 이 때 사직신, 영성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이제사를 행하는 날에는 많은 남녀노소가 한곳에 모여 술마시고 춤추는 것으로 날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신라때부터 조선조 숙종때까지의 시운을 모은 책. 154권 45책 서거정등의 편저. 고활자본과 목판본이 있다.
1883년8월에 성립된 관립 위국어 교육기관 통변학교라고도 함. 학생40여명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영어와 일어및 성경의 필사 등을 가르침. 3년 뒤인1886년에 유영공원이 세워지자 문을 닫음
조선후기의 대청및 대일관계의 교섭문서를 집대성한 책. 초편129권60책과 속편 불분권 36책으로 승문원 운각 활자로 간행
조선 숙종때 학자 안정복이 저술한 국사책. 20권20책. 인본. [통감강목]의 체제에 따라 고조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것으로, 1778년(정조 2)에 완성되어 사본으로 전하다가 1915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 본문 19권,부록 3권으로 구성, 책머리에 저자의 스승 이익의 미완성 서와 저자의 자서, 목록, 범례, 역대전수도, 지도, 역대관직연혁도가 있고, 부록은 고이, 과절, 잡설, 지리강역고정으로 되어 있다. 기자조선을 정통으로 삼아 단군조선을 이에 부수시키는 등의 오류는 범하고 있으나, 역대 관직연혁도와 부록 중에 수록된 고증의 일부는 귀중한 성과로 평가됨.
고려시대에 주로 가난한 백성의 의료와 구호를 맡아보던 관아 1049년 개성의 동쪽에 동 대비원을, 서쪽에 서 대비원을 설치 하였는데 두곳을 합쳐 동서대비원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의 진츌청 한양부 동부 연희방에 동활인원과용사에 있던 서 활인원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이다.
백제 제 24대왕(재위479~501). 이름은 모대. 문주왕의 조카 곤지의 아들 삼근왕의 뒤를이어 즉위하여 484년 남제와 수교했고, 485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 국책회사. 일본은 보호조약이 체결된 뒤 한국의 산업자본의 조장과 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국 의회에서 회사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1000만원의 자본금으로 서울에 본점을 두고 발족. 14년에는 농공은행에서 거액을 융자받아 전라도와 황해도의 옥답을 강제로 사들였다. 강점한 토지는 소작을 주어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들이고 영세농민에게 빌려준 곡물도 2할 이상의 고리로 받았다. 그 후 이러한 착취로 사세가 확장되자 회사법을 개정하여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만주, 몽고, 동부러시아, 중국, 필리핀, 남양제도,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등에 지사를 두는 외에 우리 나라에 17개 지점을 두고, 각국에 52개의 지사를 설립했으나, 일본 패전과 더불어 사라짐.
1세기초에 임둔 옛땅에서 자립한 부족국가. 동예의 주민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갈래로 영흥 덕원 안변 등지를 중심으로 분포된 총 2만호의 집단이었다.
조선 중기의 태의 허준이 지은 의서 25권 25책 관판. 1613년(광해군5) 내의원에서 훈련도감의 개주갑인자로 간행하였다. 이책은 원래 1596년(선조29)에 허준이 왕명을 받아 유의인 정작, 태의 이명원,양예수,김응탁,정예남등과 함께 찬짐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그 뒤 선조가 허준에게 다시 명하여 계속 편집하도록 하였으며,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어 고증하게 아였다. 허준이 전심전력하여 1610년에 완성하자 왕은 곧 내의원에 명하여 인출,널리 반포하게 하였다.
이제마가 저술한 한말의 의서, 4권 2책. 인본. 1984년(고종 31)에 일부를 간행, 계속 증보하다가 저자가 죽자 1901년(광무5)에 제자인 김영관, 한무연 등이 유고를 정리, 완간했다. 저자의 사상의학설이 집성된 저서로서 의방과 치방을 서술 이책에서는 인체를 기질과 성격에 따라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사상으로 나누고,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는 중증보다도 오히려 체질에 중점을 두고 시술을 해야한다고 주장. 질병치료에 있어 종래와 같은 음약오행설의 공존에 의존하지 않고 병자의 체질의 중점을 둔 것은 한의학의 전통을 벗어난 획기적인 학설이라 할 수 있다.
동국(東國)의 사람, 주인(主人), 사색당파(四色黨派)의 하나로, 명종(明宗)때 심의겸(沈義謙)의 당파와 대립한 김효원(金孝元)의 당파 <-> 서인(西人)
서울 사학(四學)의 하나. 동부(東部)에 있었음. 서학(西學)인 천주교(天主敎)에 반대하여, 최제우(崔濟愚)가 창도한 일종의 민족 종교. 단군 신화(檀君神話)에 나오는 환웅(桓雄)을 숭배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원리를 내걸고, 유교(儒敎).불교. 도교를 절충(折衷)한 것을 종지(宗旨)로 삼았음. <-> 서학(西學)
1569년(선조2)에 이이가 왕도정치에 대한 경륜을 주객의 문답체로 서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글. 총 11편.이책은 당시의 급선무가 안민이며, 안민은 정명으로써 이룰 수 있다 하여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며 정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근본이 됨을 논하였다.
농사군들이 농번기에 공동으로 협력하기 위한 부락이나 이(理)단위의 모임.
구석기시대(약 200만년~1만년전)의 사람들이 주로 만들어 쓰던 석기. 타제석기라고도 한다. 이석기는 구석기인들이 강가나 들에서 적절한 석재를 구한 다음, 돌을 깨서 만든 것으로 사냥에 필요한 무기와 일상용 도구로 사용되었다.
18세기에 서양 의학이 전해져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적 기능에 대하여 보다 정확한 지식을 얻어 이를 토대로 정약용이 자신이 연구하고 실험한 종두법을 소개한 저서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민중대회 1898년 3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러시아인 탁지부 고뭉과 군부 교련 사관의 해고를 요구하고 이승만, 홍정하 등 청년 연사가 열렬한 연설을 하여 대중의 여론을 일으켰다.
17세기 말 이후 대청 무역활도을 한 의주상인, 유만`만고라고도 한다. 책문후시를 통해 대청 및 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국경도시이자 중국의 관문인 의주가 대청 무역의 중심도시가 되고, 만상은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이 되었다.
고려 중기 당시 집권자인 최충헌의 사노비로서 노비들을 선동하여 노비해방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적의 난이 비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당시와 같은 신분 계급이 엄격하던 시대에 있어서 만적이 표시한 투쟁의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1931년 9월 18일 류타오거우 사건으로 비롯된 일본 관동군의 만주(지금의 중국 둥베이 지방)에 침략 전쟁, 이러한 침략행위는 37년의 중일 전쟁과 41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고구려시대의 무관직. 고구려에서는 각 지방의 성을 중심으로 군단이 편성되어 무관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말객은 그 중에서 대모달 다음가는 벼슬이다. 말객은 고구려 12관등)중 제7위인 대형 이상이어야 임명될 수 있는 무관이다.
고려 정중부의 집권기에 충청남도 공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란. 무신정권의 출현을 전후해 사회질서가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관리의 탐학이 심해 유망민이 속출하였다. 1176년(명종6) 천민부락 명학소에 살던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켜 자칭<산행병마사>라 일컫으며 공주를 공격 함락하였다. 정부에서 장군 정황재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토벌케 하였으나 오히려 패하자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천민부락을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을 파견하였음에도 응하지 않고 계속 난동을 부리다가 전면적인 토벌작전을 벌여 망이․망소이를 붙잡아 죽임으로 난이 끝났다.
1908년 4월27일 만주 북간도에 설립된 민족교육기관. 1906년에 설립되었다가 1년만에 폐교된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정신계승,1910년 3월 명동중학교 병설. 1911년 명동여학교 병설 일제는 1920년10월에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학교를 소각하고 교장을 구속하였다. 그 뒤 학교를 재건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폐교.
1851(철종2)~1895(고종32) 고종의 비,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 치록의 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라다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 1866년(고종3) 고종의 비로 입궁. 1895년 4월 일본군인과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 살해 당했다.
목민관 즉,수령들이 지켜야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정약용의 저서 48권16책. 필사본 부임.율기.봉공.애민.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진황.해관의 12편으로 나누고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72조로 편제
마한 54개 소국중의 하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지국은 청동기문화단계 이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지역에서 형성, 발전되어온 토착 정치집단의 하나로 백제국이 마한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기 전에는 마한 소국연맹체의 중심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1498년(연산군 4)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류자광 중심의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 사림파의 연원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에 이르러 영남 일대에 큰 지방세력을 형성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백제 제30대왕(재위 600~641). 이름 장. 법왕(法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충돌이 자주 있었다. 634년에는 왕흥사를 창건하고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서 이를 왕의 유흥지로 삼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 일으켜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만주 지린성 집안현 퉁꼬우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광개토대왕릉비의 북서쪽 1km 남짓한 곳에 위치하며 각저총과 나란히 있다. 묘실은 괴석을 쌓았고, 천장은 말각조정이며 회반죽을 두껍게 칠한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국 원나라의 왕여가 송나라의 세원록.평원록등을 가감하여 지은 법의학에 관한책.
조선 말기의 군영 1881년(고종18) 11월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양영으로 개편하면서 5군영 가운데 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합하여 무위영으로 하였다. 무위영은 명칭이나 구성으로 보아 1874년 4월에 설치된 바 있는 무위소의 연장으로 왕궁을 지키는 친군 내지는 근위군적인 것이었다. 1882년 대원군에 의해 폐지
상고시대에 예에서 행하던 제천의식. 해마다 음력10월에 공동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로 즐기는 행사이다. 부족의 친목도 꾀하는 원시적인 의식의 하나이다.
신라 제 30대 왕(재위 661~681). 이름은 법민, 태종무열왕의 맏아들.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황후 김씨, 비는 파진찬 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경기 김포군 월곶면(月串面) 포내리(浦內里) 문수산에서 해안지대를 성채로 연결한 조선시대의 산성. 사적 제139호. 둘래 약 2.4km. 1694년(숙종 20) 구축한 것으로,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마주보는 김포 쪽에 위치하여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도 입구를 지키는 성이다. 명칭는 문수사 라는 절에서 유래하였다. 취예루(取豫樓) 공해루(控海樓) 등 문루와 암문(暗門)이 각 3곳에 있었으며, 취예루는 갑곶진 건너편해안에 있어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1812념(순조 12) 대대적으러 중수하였고, 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과의 일대 격전지였다. 이때의 격전으로 해안 쪽 성벽과 분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었다. 지금은 해안 쪽 성벽과 분루가 없어지고 마을이 들어섰으며, 분구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다.
발해의 제3대왕. 재위기간 737~794. 이름은 대흠무. 무왕의 아들이다.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묘비에 의하면 대홍보력금륜성법대왕의 존호를 사용하였다 한다. 737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대옹이라 하였고, 774년에는 보력으로 개원하였다가 다시 대흥의 연호를 쓰게되어 그 연호를 지켰다.
1329(충숙왕16)~1398(태조7). 고려말 문신․학자. 본관은 남평. 첫 이름은 익첨. 자는 일신, 호는 삼우당. 강성현(지금의 경상남도 산청)출생, 숙선의 아들이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 김룡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장인인 정천익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사학자. 언론인. 호 호암(湖岩).평북이주 출신. 1910년 일본에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중퇴, 중국으로 가서 상하이[上海]의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하였다. 귀국하여 중동(中東) 중앙(中央) 배재(培材) 송도중학(松都中學)에서 교편을 잡은 뒤,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를 거쳐 33년 ≪조선일보(朝鮮日報)≫ 편집고문이 되어 7년 간 논설을 담당하는 한편, 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저서에 ≪조선사화(朝鮮史話)≫ (1945) ≪호암전집≫ ≪한국의 문화≫ (69) 등이 있다.
고려 때의 최초 중앙 의정기관으로 내사성과 문화성을 합한 명칭. 982년(성종)에 내의성을 고친 이름이다. 종1품에 관한 일을 당당하였고, 문하성은 왕명의 하달과 중신의 건의를 담당하였으므로 그 권한이 매우 컸고, 두 성의 관계가 밀접하여 성종 때는 두 성이 하나의 성처럼 되었다. 후에 내사성을 중서성으로 개칭함에 따라 중서문하성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의 수상직. 중서문하성의 장관으로 품질(品秩)은 종1품, 정원은 1인이었다. 같은 종1품직인 상서령이 종친이나 원로 재상에게 주어지는 영예직 또는 치사직, 증직 이었으므로 명실상부한 고려의 최고관직으로서 수상이 되었다. 1356년에는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문종관제가 복구되면서 중서문하성이 부활되고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되어 전개한 국산품장려운동. 조선물산에 대한 장려운동은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평양에서 조만식,김동원등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국산품 장려, 소비절약, 금연, 금주 운동을 전개 이와 함께 1922년말 조선청년연합회에서도 표어현상 모집 지방 순회 강연단 조직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945년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에 의하여 조직된 위원회.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조직되어 1946념 3월 제1차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1947년 11월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점됨으로써 가연 해체되었다. 미 소의 협상에 의한 한국민족의 분단(分斷)을 확정지은 회담이다.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에 있는 백제 시대의 석탑. 높이 14.25m.국보 제11호. 우리 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으로 현재 노상마을의 남방 원위치에 서 있는데, 거의 전면이 도괴되어 동북면한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평면방형탑으로서 6층 이상의 탑신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6월 11일에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중국의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과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사이에 맺어진 협정이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한국인의 무기 휴대와 한국내 칩입을 엄금하며, 위반자는 검거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2.재만 한인 단체를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 하며, 무기와 탄약을 몰수한다. 3.일제가 지명하는 독립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 한다. 4.한국인 취체의 실황을 상호 통보한다.]
조선시대에는 연등회나 팔관회가 쇠퇴하는 대신, 산대잡극과 나례가 성행하였다. 조정에는 사신들의 영접과 의식등을 위한 산대도감까지 둔일이 있었으나 조선중기 이후로 폐지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산대도감극 계통의 연희는 그것이 서민들에게 넘어간 이후의 가면극들이다. 산대도감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속극으로 산대극이라고도 하며, 가무의 부분과 스토리`대사의 연극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861~1905 한말의 문신 호는 계정이고, 시호는 충정이다. 1896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길에 일본`미국`영국 등을 둘러보았고, 이듬해에는 다시 유럽 6개국의 특명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유럽을 여행함으로서 새문물에 일찍 눈떴다. 귀국하여 민권 신장과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에 힘쓰던 중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한 장중장(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받았다.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소설, 한문으로 된 단편 소설로서 민유신이란 노인의 일화를 중심으로, 평범하고 풍자적인 표현을 써어 양반을 희롱하고 세상 사람을 훈계하는 내용이다.
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
한말의 병장. 본광은 여흥 자는 윤초 호는 퇴초자 판서의 영상의 장남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남 정산으로 은둔했다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킴. 연합의병 대장으로 추대
한민족이나 개인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생활 습속에 따라 제작한 대중적 실용화
박규수: 조선말기에 문신 개화 사상가 서울 계동 출신 북학파 거두 지원의 손자 1856년 애로호 사건에 관련, 1862년 7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 관련, 김극호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등을 배출
1883년 8월에 설치된 인쇄 출판기관 박영효의 건의에 따라 설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직후 조선은 시대적 요구에 응해 여러 가지 부국책을 추진하였는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산하기관인 동문학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
조선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반남. 자는 계긍 호는 잠수, 서계초수, 서계. 4살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 안동 정주 청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부인 정사무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1660년 증광 문과에 장원. 예조 좌랑, 병조 좌랑, 정언, 병조 정당, 지평호문 등 내외직을 역임.
순국지사 일명 성환 서울출신 어려서부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군대에 복무한지 10여년에 육군 참령이 되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만행이 자행되자 통분하여 일본인에 보복하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함.
조선 말기 정치가 본관은 반남. 초명은 무량. 자는 자순. 호는 춘고. 판서 원양의 아들. 1872년 철종이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 금릉위 정 1품 상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을 위해 제3차 수신사로 임명.
한말 일제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 자는 성칠. 호는 겸곡, 백암. 황해도 광주 출생. 이름 높은 성리학자로서 개화사상 대동교를 창립.
조선말기의 대신 본관은 반남. 자는 차중. 호는 축천. 1866년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 참판을 지냈고 신사유람단 일원 1898년 11월 황국협회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되자 다시 내부 대신이 됨.
군인정치가.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제 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농민 부모 사이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유신시대 1972년 10월 헌법 효력의 일부정지. 국회해산. 정당 활동 중지 등의 담화 발표. 전국 계엄령 선포했다. 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고 죽음.
조선 후기 실학파이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류하였다. 북학의, 북학서 내외판을 저술하였다. 정치. 사회 제도의 모순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원불교를 창건한 교조, 불교의 대종사. 전통적 예법을 혁신하여 `신경의례`를 제정 등 교화의 기틀을 제정하였다.
유형원이 통치제도에 관한 개혁안을 저술한 저서. 26권 13책, 목판본. 반계는 저자의 호이며 수록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 둔 것이라는 뜻이나 이는 저자의 겸사이고 체계 정연한 저술이다.
1884년 이후 곡물 반출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한일간의 의도적 분규사건.
조선시대 공납제에 있어서 공물의 납부를 대행함으로써 중간 이윤을 취하는 행위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 서울 출신. 1923년 3월 우리 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 거행.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백두산에 세운 정계비로 조선과 청국이 경계로 표시했다. 비석은 1712년에 당시 청나라의 총관 목극동 등과 조선관원들의 현지 답사로 세워졌다.
1919년 안회제의 백산상회가 주식회사로 개편된 민족기업인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들어냈다.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던 안희제가 독립운동가를 만나 의견교환과 실태를 목격한 후 구국운동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였다.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확대․조작하여 애국계몽운동가들을 투옥한 사건. 1910년을 전후로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 신민회와 배일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파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경찰은 군자금을 조달하다 잡힌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을 신민회원 등이 배후에서 조정한 것처럼 조작하여 유동열(柳東說)․ 윤치호(尹致昊) 등 6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그 가운데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하자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등 6명만 징역 5~6년을 선고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소재 불국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교. 국보 제 23호. 현존하는 신라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 두 개의 돌다리가 45°의 경사로 높다랗게 걸려 있는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 전체적으로는 U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서,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의 홍예의 시원형태를 보여준며, 다리의 좌우의 측면은 판석으로 막고 가로 세로 중방을 세운 것이 목조건축의 형태를 보여줌. 750년경 불국사의 중창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불국사가 불타버린 뒤 1686년, 1715년에 중수, 1973년에 없어졌던 난간을 맞춰 옛모습으로 복원.
소수서원.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1541년(중종 36)에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함. 15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백운동 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고 1550년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이는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위치를 확보하는 것으로, 후에 다른 사원들의 설립,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