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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창포불교대학 3번째 강의 자료 (2014. 4. 02)
1. 사찰 참배의 예절(불교입문 23쪽)
사찰은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하고 장엄한 곳이다.
속세의 번뇌를 씻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곳이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곳이다.
그리고 스님들이 상주하며 공부하고 수행하는 도량이기도 하다.
사찰에 가면 일주문 一柱門, 금강문 金剛門, 천왕문 天王門, 불이문 不二門또는 해탈문 解脫門을 지나는 것이 통례다.
일주문(一柱門) (불교입문 52쪽에서 다시 학습합니다.)
절 입구에서 제일먼저 볼 수 있는 건물은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 불리 우는 첫 번째 관문, 그것은 일심(一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煩惱)를 흩어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달려있다. 일주문은 흔히 기둥이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하나의 기둥이 아니라 '나란히 개념'이다.
부산 범어사나 통도사의 일주문 기둥은 네 개다. 일주문은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여기서부터 절의 영역이다”라는 의미다.
절은 대개 깊은 산중에 있어 절을 찾는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다가 일주문을 보고 안정감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속세(俗世)와 불계(佛界)를 구분 짓는 경계 역할을 하며 문을 통과하는 순간 부처님의 마음과 일심(一心)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절에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어진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 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 데 그 뜻이 있다.
현상 면에서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般若)와 번뇌(煩惱)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이 새워진 것이다.
금강문(金剛門)
금강문은 사찰 입구의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으로,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한다. 흔히 [인왕상]이라 불리는 두 명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어 [인왕문]이라고도 한다.
이중 오른쪽을 지키는 역사가 [나라연금강]이고, 왼쪽을 지키고 있는 역사가 [밀적금강]이다. [나라연금강]은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고 하고, 야차신(夜叉神)의 우두머리인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쥐고 있다.
금강저는 지혜의 무기이며 번뇌를 부수는 보리심의 상징이다. 오른쪽에 입을 벌리고 서 계신 분은 [나라연금강]으로 [아형 금강]이라고도 하며, 왼쪽에 입을 다물고 서 계신 분은 [밀적금강]으로 [옴형 금강]이라고도 한다. 이 두 분을 합쳐서 우주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상징하는 진언“옴”을 의미한다.
천왕문과 마찬가지로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정면 3칸 중 가운뎃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쪽 1칸은 바깥쪽 3면을 벽으로 처리하여 안에[금강역사상]을 세워 둔다.
[금강역사상]은 불법을 훼방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경계하고,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신과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승불교의《오분율(五分律)》에 따르면 부처가 있는 곳에는 항상 5백의 금강신이 있어 좌우에서 부처를 호위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사찰에서는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서 금강역사상을 안치하고 있다.
흔히 [사찰의 삼문]이라 하면 일주문·천왕문·불이문(不二門)을 말하며, 따라서 '금강문'을 세우지 않은 사찰도 많다. 금강문이 있는 사찰은 금강문이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지만, 금강문이 없는 사찰은 천왕문이 대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찰에 따라서는 금강문없이 천왕문에 금강역사를 모시기도 하고, 영광 불갑사(佛甲寺)의 경우처럼 천왕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기도 한다.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惡鬼)가 제거되어 가람(伽藍)의 내부는 청정도량(靑淨道場)이 된다는 것이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건물로 일명 봉황문이라고도 한다.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본래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천에 거주한다. 사천왕천은 욕계6천의 제1천이다. 사천왕은 사천왕천 위에 있는 도리천의 우두머리인 제석을 섬기며 수미산 중턱 사방의 문을 수호하는 신이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였으나, 석가모니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자들을 보호한다.
천왕문은 보통 정면 삼칸, 측면 일칸의 평명형태로 좌우 일칸에 천왕 두분씩 봉안하고, 중앙에는 출입 통로를 만든다.
천왕문 입구에 들어서서 봤을 때 오른쪽에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을, 왼쪽에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광목천왕을 모신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은 중생을 두루 보살피고 국토를 지키며, 온몸은 동방을 표방하는 오행색(五行色)인 청색을 띠고 있다.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자신의 덕망으로 만물을 소생시키며, 붉은 기운이 도는 적육색의 몸에 분노한 눈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고, 왼손은 위로 들어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엄지와 중지로 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백색이며, 웅변으로서 온갖 나쁜 말(거짓말, 삿된 말, 이간질하는 말, 상스런 말)들을 물리치기 때문에 다른 천왕들과는 달리 입을 벌린 형상으로 오른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왼손은 보탑을 받들고 있다. 이 보탑 속에는 많은 보물이 들어 있어서 이를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복과 덕을 베푼다고 한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도량을 지키면서 항상 설법을 듣는다고 하여 다문이라 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광명신이 되었으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수미산 북쪽을 지키는 천왕이 되었으며, 몸은 흑색이며,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챈 환한 미소를 띠면서 '비파'를 타는 형상을 하고 있다.
불이문(不二門)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문(不二門)이 나타난다.
이 문은 번뇌의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하며, 궁극적으로 번뇌와 해탈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문'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해탈문은 누각 밑을 통과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2층의 다락집 형태인 누각 밑 1층 기둥 사이로 길이 나 있어 문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2층 누각'은 불법을 설하는 '강당'으로 쓰여 왔다. 그래서 진입하는 쪽에서 보면 문이요 진입하고 난 뒤 법당 쪽에서 보면 누각으로 다가온다.
불이문인 해탈문을 지나면 그 사찰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이 보인다. 그리고 법당 앞마당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말씀인 경전을 간직한 탑과 석등이 서 있다.
불이란 둘이 아니라는 경지이다. 이 문을 본당에 들어서는 곳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요, 생과 사가 둘이 아니며, 부처와 중생,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 색과 공 ,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이며,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그 근거는 법계의 실상이 항상 여여평등하다는 데 있다.
그러나 불이가 하나를 뜻하는 것도 같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서로 개별성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평등과 자유 그 자체이다. 진정한 불이는 참된 해탈의 경지, 즉 언어를 넘어선 것에 있다.
불교이 우주관에 의하면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이 지키는 사천왕천을 지나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다. 도리천 위에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서 있다. 이 불이문이 '해탈문(解脫門)'이다. 불이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어 버리고 해탈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불이문은 사찰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기도 하다. '불국사 불이문'에는 자하문(紫霞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문에 들어서려면 청운교와 백운교를 거치는데, 이들 다리의 계단은 모두 33개이다. 곧 도리천의 33천을 상징적으로 조형화한 것이다. 자하는 자주빛 안개라는 뜻으로 부처의 몸 빛깔을 상징한다. 이 문을 통과해야 '부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뜻한다.
'절' 속의 '불이문'이 있는 선상(線上)의 경역(境域)은 오직 '도리천'을 지난 지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의 여러 하늘, 예를 들면 범천(梵天)까지를 포괄하는 곳으로 상징화된다.
사천왕천을 지나 '도리천' 위에 '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을 지나야만 비로소 '욕계'의 음욕(淫欲)에서 벗어나 항상 깨끗하고 조용한 하늘 사람들의 나라인 색계(無界)의 첫째 하늘, 범천(梵天) 곧 초선천(初禪天)의 하늘인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등이 열린다.
도리천: 도리천은 불교의 28천중 욕계6천의 제2천이다.
도리천은 33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리천은 불법에 귀의한 원래 인도의 천신 인드라신인 제석천이 다스리고 있다. 벼락과 비바람을 관장했던 마신(魔神)은 부처님의 감화를 입어 불교에 귀의한 뒤 정법을 수호하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옹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제석천왕은 현실적으로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천왕으로 그는 반석위에 굳건히 서서 오른손으로 불자(拂子)를 쥐고 왼손으로 금강저(金剛杵)를 받치고 있다. 불자는 중생의 번뇌를 털어내는 상징적인 도구이며, 금강저는 탐요과 죄악을 타파하는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도구이다.
불이분(不二門) : 사찰로 들어가는 三門 중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
사찰에 있는 여러 문 중에서 본당에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 바로 불이문(不二門)이다. 말 그대로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진리는 곧 하나임을 의미한다.
이 문을 본당 입구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연결된 하나이다. 이렇게 불이(不二)를 알게 되면 비로소 부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불이는 분별도 떠났고, 언어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데『유마경』에는 불이법문(不二法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마가 보살들에게“불이법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니, 문수보살이 대답하기를“모든 것을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고, 알려 해도 알 수 없으므로 모든 물음과 답변을 초월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문수보살이 유마에게 불이법문을 물었다.
그러나 유마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문수보살은 그러한 유마를 칭찬하며“문자와 말까지도 있지 아니한 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길”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은 열반에 들기 전“나는 40여 년간 단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불이와 통하는 맥락이다. 불이문을 지남은 곧 해탈에 이름을 상징하므로 해탈문 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해탈문을 별도로 두는 절도 있다.
해탈(解脫)이란 미혹의 세계에서 빠져나옴을 의미한다.
그 문을 통과하는 중생들이 미혹에서 벗어나 해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참고로 해탈에는 심(心)해탈과 혜(慧)해탈이 있다.
심해탈은 마음속의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남을 뜻하고, 혜해탈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부도(浮屠)
부도는 불탑의 어원인 스투파(stupa)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탑'이라 할 때에는 불탑을 말하고, 부도라 할 때에는 고승의 묘탑(墓塔)을 의미한다. 부도의 건립은 사승(師僧)을 중시하는 선종의 유행과 깊은 관련을 가졌거니와, 그 결과 장엄하고 수려한 작품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대사찰에는 절 밖의 한쪽에 부도전이 있다. 돌아간 고승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를 함께 모셔 둔 곳이다.
‘부도밭’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전각을 뜻하는 글자인 전(殿)자를 붙여 부도전(浮屠殿)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별한 경우에는 실제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비를 모시는 경우도 있다.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는 부도암이라 하여 암자를 뜻하는 말로 부도전을 부르기도 했다.
원래 부도(浮屠)라는 말은 부처님을 뜻하는 말이다.
불교의 교주인 부처의 범어인 붓다(buddha)를 음사한 말이다.
불도(佛圖), 또는 휴도(休屠)라 음사하기도 했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을 때 중국 사람들이 불교를 부도교(浮屠敎), 부처님을 부도씨(浮屠氏)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위서>, <후한서>등에 나온다.
스님들도 또한 부도씨 혹은 부도인(浮屠人)이라 했다. 또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최초에 생긴 절을 부도사(浮屠祠)라 불렀다. 중국 최초의 사찰이 백마사(白馬寺)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에 초(楚)나라 영왕(英王)과 동한(東漢)의 환제(桓帝)가 부도사를 지어 부도(부처)와 노자를 함께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와 이 말의 의미가 조금씩 변환되어 절이나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다가 열반에 든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는 탑까지도 모두 부도라 부르게 됐다. 그리하여 탑자를 붙여 부도탑이라고도 했다. 또 솔도파(率都婆)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범어 스투파(Stupa)를 음사한 말로 3층, 5층 등 지붕이 있는 높은 탑이 아닌 작은 판탑(板塔)을 가리킨다.
이 부도탑을 조성하는 공덕을 설해 놓은 경전도 있다. <잡보장경> 5권에는 인도의 어떤 장자가 불탑과 승방을 지어 보시하고는 다음 생에 삼십삼천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십삼천은 욕계 제2천인 도리천을 말한다.
실제로 부도탑은 영묘(靈廟)와 같은 것이다. 탑 안에 사리(舍利, Sarira)나 유골을 모시기 때문에 묘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사리에 대해서는 고도의 수행을 성취한 고승들이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을 닦고 육바라밀의 공덕을 성취한 수행력으로 나오는 결정체라고 설명하는데 번역하면 영골(靈骨)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어원이 가지고 있는 뜻에서 말한다면 죽은 이의 유해 유골이 모두 사리인 셈이지만 후대에 와서 화장을 한 뒤에 습골(拾骨)을 할 때 발견되는 작은 구슬 모양의 결정체를 가리켜 사리라고 했다.
옛날에는 이 부도탑을 참배하기 위하여 순례를 한 스님들이 많았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스님은 중국 천태산에 가서 지자대사의 탑을 친견하고 발원문을 짓고 탑 앞에서 큰 서원을 발하였다는 내용이 대각국사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부도는 대부분 탑비와 함께 세워졌기 때문에 탑비를 통해 건립 연대나 입적한 스님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석조 건축의 양식을 통해 불교미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는 사료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온 9세기 이후 통일신라 후기에 구산선문이 이루어지고 난 뒤부터 사자상승의 법맥이 이어지면서 고승들의 부도를 찾아 예배하는 풍습이 생기면서 많은 부도가 건립됐다.
(불교입문 23쪽 수업내용)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이르는 길은 여래개가 있지만, 반드시 정해진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사찰의 들머리인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서면서부터는 부처님의 도량이므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일주문(一柱門)에서 법당을 향해 합장 반배를 올리면서부터 사찰 예절이 시작된다. 절에서는 항상 가운데(일명 : 어간 御間이라함) 통로를 피해야 한다.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는 이는 항상 자기를 낮추고 다른 이를 공경해야 한다.
사찰 안에서는 경건한 몸가짐으로 좌측통행을 하는 것이 좋다.
옷차림 또한 단정해야 한다.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이나 생명을 경시한 모피 옷 등은 절에서는 삼가야 할 옷차림이다.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天王門)을 만나면 같은 방법으로 반배의 예를 올린다. 사천왕은 불교를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법당에 이르기 전에 역대 조사 스님의 부도(浮屠)를 지나게 되면 역시 합장 반배를 한다.
도중에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나도 합장 반배를 해야 한다.
절에 와서는 제일 먼저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나서 볼일을 보는 것이 불자의 예절이다. 격을 갖춘 사찰에서는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곧바로 올라가면 대웅전 마당에 이른다.
마당에 모신 탑전에 예배를 드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비로소 법당에 이른다.
법당 앞의 탑에는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다.
사리를 모신 탑은 부처님의 몸과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부처님 대하듯 합장반배로 3배의 예를 올린다.
탑을 돌며 기도할 때는 탑을 오른쪽으로 돈다. (시계 방향)
절에 갈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단정한 복장과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이는 불자와 비불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상식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 너무 짧은 치마를 입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은 자제해야 하며, 맨발로 법당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양말을 갖추어 신어야 한다.
일주문에 도착하면 먼저 자신의 외양뿐 아니라 마음 까지도 잘 살펴서 성스러운 도량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또한 우연히 절에 가게 되었을지라도 손을 깨끗이 씻고 참배를 올려야 하며, 경내에서는 술을 비롯하여 금지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2. 법당 예절(불교입문 24쪽)
법당 아래 계단을 오를 때는 좌측통행을 하는 것이 좋다.
중앙 계단과 좌 ,우 계단이 따로 있으면 좌, 우 계단을 이용한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법당 좌, 우측 문을 이용한다.
이때 법당 중앙문은 이용하지 말아야한다.
(스님도 큰 스님이 아니면 중앙문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아야 한다.
정갈한 마음은 신발 벗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너의 발밑을 잘 살펴라.
곧, 자기의 자신을 살펴보라는 뜻이다.
지팡이나 우산을 가져온 경우, 법당 벽에 기대어 놓지 않도록 한다.
불자는 등산, 여행시 사찰을 찾았을 때 그 쪽(시찰 방향)으로 합장하고 시간이 나면 법당에 들어가서 예배해야 한다.
법당의 구조-상단, 중단, 영단 (불교입문 61쪽에서 다시 학습합니다)
법당은 통상 상단, 중단, 영단의 삼단구조로 되어 있다.
부처님상과 보살상을 모신 상단,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들을 모신 중단, 그리고 영가를 모신 영단이 그것이다.
상단(上壇)
법당의 어간문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 가장 높은 단상을 설치하고 그 중앙에 부처님상을 모시는데 이 단상을 상단이라고 하며, 부처님과 보살상을 모셨기 때문에 불보살단(佛菩薩壇)이라고 한다. 혹은 줄여 불단(佛壇)이라고 하는데 이 상단에는 그 절의 본존불상과 후불탱화를 모시는 것이 상례이다.
중단(中壇)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신 신장단(神將壇)을 중단이라고 한다.
여러 신장님을 모신 단상이기 때문에 신중단(神中壇)이라고도 하며, 제석천이나 사천왕, 대범천 등의 천상 신중과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가루마, 마후라 등 팔부신장 등을 모신 곳이다.
또한 우리 민속 신앙에 의해 칠성과 산신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영단(靈壇)
영가(靈駕)의 위패가 모셔진 단상이며, 후불탱화로서 통상 아미타여래영도와 감로탱화가 모셔져 있으며 이곳을 하단(下壇)이라고도 한다.
절에 갈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단정한 복장과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이는 불자와 비불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상식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 너무 짧은 치마를 입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은 자제해야 하며, 맨발로 법당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양말을 갖추어 신어야 한다.
일주문에 도착하면 먼저 자신의 외양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잘 살펴서 성스러운 도량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또한 우연히 절에 가게 되었을지라도 손을 깨끗이 씻고 참배를 올려야 하며, 경내에서는 술을 비롯하여 금지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 법당의 출입 예절
경내에 들어간 뒤, 법당을 출입할 때에는 전면에 있는 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법당 건물의 좌우에 나 있는 문을 이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건물의 좌우에 문이 없고 전면에만 문이 있는 경우에는 중앙에 있는 문을 피해야 하며, 가능한 한 양쪽 끝에 있는 문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전면 중앙에 있는 문은 어간문(御間門)이라 하며, 그 절의 조실(祖室), 주지, 원로스님 등이 출입하는 문이다. 어간(御間) : 절의 법당이나 큰 방 한복판에 있는 칸.
어간문은 부처님이 앉아 있는 주좌(主座)에서 정면으로 나 있는 문이다. 따라서 어간문을 지날 때에는 부처님 앞을 지나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항상 차수(叉手)하거나 합장을 해야 하며,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지나다녀야 한다.
● 법당 안의 예절
법당에 들어가서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은 후 단정히 선 채로 먼저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반배, 즉 허리를 반쯤 숙여서 인사한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다시 합장 반배를 한 뒤에 촛불을 켠다.
이때 촛불이 켜 있으면 자신이 초를 준비했을지라도 그대로 탁자 앞에 놓고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를 때에는 한 개만 촛불에 붙여서 그대로 향로에 꽂는다.
향을 올린 뒤에는 다기(茶器)에 맑은 물을 담아서 올리고 준비한 과일 등을 깨끗이 씻어서 불단에 올린다.
● 사찰 경내의 예절
사찰 경내에서는 단정한 몸가짐으로 엄숙하게 정진해야 한다.
신을 꺾어 신거나 소리를 내어 끌지 않도록 주의하며, 항상 조용히 다녀야 한다. 경내에서는 음주, 식육, 흡연, 고성방가를 해서는 안 된다. 가래침을 뱉거나 코를 풀어서도 안 되며, 함부로 휴지나 쓰레기를 버려서도 안 된다.
세속적인 화제로 신성한 도량을 시끄럽게 하거나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
스님 또는 불자를 만났을 경우에 합장하여 인사한다.
종을 쳐 본다거나 북을 두드려서는 안 된다. 사찰에 있는 모든 물건은 삼보의 귀중한 공용물이므로 소중히 여기며, 항상 제자리에 놓아두어야 한다.
식사는 언제나 평등하게 나눠 먹어야 하며, 많을 경우에는 미리 덜어내어 결코 남기거나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마루에 걸터앉거나 불전을 등지고 서 있지 않도록 한다.
● 스님에게 예배할 때
스님을 만나면 반드시 합장하고 절을 올린다.
밖에서 만났을 때에는 그대로 서서 합장 반배를 해도 좋지만, 방안에 들어가면 다시 합장하고 오체투지의 큰절을 올린다. 만약 밖에서 인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스님이 자리에 좌정하면, 다시 큰절을 하는 것이 예의다.
또한 법문을 청할 때에는 큰절로 3배를 올리며, 법문이 끝나거나 법회가 끝났을 때에도 감사하는 예를 드려야 한다.
스님을 만나더라도 예배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스님이 좌선 중일 때, 식사 중일 때, 설법할 때, 세수하고 양치할 때, 목욕하거나 누워서 쉴 때,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 다만, 공손한 태도로 가볍게 목례만 한다.
● 법회의 예절
법회는 부처님의 정법을 배우기 위한 모임으로서, 참석자는 독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법회에 임해야 한다.
법회에 참석할 때는 항상 법회 의식집과 필기도구를 준비한다.
단정한 몸가짐으로 20∼30분 전에 먼저 와 자리를 정돈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며, 자리에 앉을 때는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앉는다.
하지만 맨 앞줄의 스님들 자리와 집전하는 법사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신발은 차례로 정리하여 벗어 놓으며, 신발의 앞부분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한다. 맨 나중에 들어오는 불자는 다시 한 번 신발을 정리하고 들어온다.
먼저 법당에 도착한 법우는 법회에 필요한 의식집이나 좌복 등을 깔아 놓아 법회 준비를 한다.
소지품은 지정된 장소에 가지런히 놓고, 법회시간 10분 전에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설법 장소에 모여 법회가 시작될 때까지 조용히 앉아 기다린다.
법문을 들을 때에는 단정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펴고 들어야 한다. 두 눈은 스님을 응시하되, 공손한 자세로 정면에서 약간 아래쪽에 두는 것이 무난하다.
설법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사가 설하는 것이므로 경솔한 마음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법회란 단지 설법을 듣는 것만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신행생활이기 때문에 정해진 법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야 한다.
혹시 법회에 갔을 때 늦게 참석하여 이미 법회가 시작하였으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살며시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한다.
이때에는 향을 사르거나 촛불을 켜거나 또 큰절을 한다 하여 앞에 나가 번잡하게 해서는 안 되며, 합장 반배한 뒤 가만히 참석하였다가 법회가 끝난 뒤에 하는 것이 좋다.
또한 설법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나가는 것은 큰 실례이며, 불가피한 일이 있을 때는 미리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살며시 일어나야 한다.
공양예절(불교입문 28쪽)
공양(供養)은 공급하여 자양한다는 뜻으로 부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며 나아가 스님 및 어떤 대상에게 무엇을 드리는 것 까지도 의미한다.
또한 음식을 먹는 행위를 공양이라고 한다.
그리고 육법공양은 부처님께 올리는 여섯 가지 공양물을 말한다.
쌀, 향, 꽃, 과일, 차, 촛불 이 여섯 가지를 공양하는 의미는 6바라밀을 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므로,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것은 법계에 공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진리를 받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법공양은 부처님께 올리는 여섯 가지 공양을 의미하는데, 쌀, 향, 꽃, 과일, 차, 촛불이다. 이 여섯 가지를 부처님께 공양하는 의미는 6바라밀을 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것은 법계에 공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진리를 받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쌀 공양은 육신을 가진 이에게 음식을 베푸는 공덕으로 보시바라밀을 의미한다. 쌀은 농부에게 있어서 곧 기쁨이다. 수확한 쌀을 손에 든 농부는 환희로 가득하다. 쌀의 공양은 이처럼 기쁨과 환희를 준다. 선열은 법락이다. 법락이란 불교를 믿으면서 일어나는 기쁜 마음들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선열미라 한다.
둘째 향공양은 여러 생 동안 덮어둔 자성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지계바라밀을 의미한다. 향은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그 연기는 하나로 융합되는데 그것은 희생과 화합을 의미하며 이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향기와 즐거움을 주게 된다.
이것은 영혼의 심지에 진리의 불을 붙이는 구도자들이 취해야 하는 삶이며 자기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대승불교의 정신으로 궁극적으로는 해탈을 성취한다는 의미로 해탈향이라 한다.
셋째 꽃 공양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참는 인욕바라밀을 의미한다.
꽃은 피기 위해 온갖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 그처럼 우리 중생들도 성취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온갖 수행을 해야 한다. 즉 꽃은 인욕을 상징한다.
넷째 과일공양으로 항상 신선한 법의 참맛을 깨달아 정진바라밀을 의미한다.
과일은 열매로 우리들의 수행과 보살행은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거두기 위한 즉 보리과를 성취한다.
다섯째 차 공양으로 여러 생 동안 윤회의 시달린 갈증을 벗어나는 선정바라밀을 의미한다. 중생들 마음속의 탐.진.치 삼독은 우리를 끝없는 윤회와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나 감로의 청정한 물은 윤회를 벗어난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기에 감로의 근원인 부처님께 차를 바친다.
마지막으로 촛불과 등공양은 지혜바라밀을 상징한다.
촛불은 탁하던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녹여가면서 맑은 물로써 빛을 발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구도와 보살행으로 모든 탁한 것을 맑게 해주고 청정함으로 태어난 지혜의 눈으로 진리의 불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촛불이 마음을 밝히는 등불로 전환되며 등불은 무명의 어둠속에서 길잃은 중생들을 위해 지혜의 길을 밝혀주는 의미로 반야등이라고 한다.
삼륜청정(三輪淸淨), 삼륜공적(三輪空寂) 불자법요집 29쪽 참고
삼륜(三輪)이란 베푸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보시한 물건(施物)이 깨끗해야 한다. 주었으되 준 것이 없고 받았으되 받은 것이 없는 그런 무위의 베품을 삼륜공적(三輪空寂)이라고 한다.
베푸는 자도 공하며(施空), 받은 자도 공하며(受空), 베풀어지는 물건도 공하다(施物空)하여 삼륜체공(三輪體空)이라고도 한다.
베풀 때는 베푼다는 생각 없이 보시를 행하라.
참다운 보시는
베푼 사람도 없고
베푼 물건도 없고
베품을 받는 사람도 없다. <대품반야 습응품>
보살은 무엇에 집착해 보시해서는 안 된다.
즉, 형체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생각의 대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보시하되 보시했다는 생각의 자취마저 없어야 한다. <금강경>
아무 조건도 바라는 것도 없이 베푸는 것을 무주상無住相 보시라고 한다.
베푼 사람도 받는 사람도 베푼 물건에 대한 모든 관념에서 벗어난 보시, 마치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이 하는 보시야말로 참다운 보시다.
이를 가리켜 삼륜청정(三輪淸淨), 삼륜공적(三輪空寂)이라고 한다.
삼륜청정(三輪淸淨)
1. 주는 사람은 깨끗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환희심으로 보시한다.
2. 받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 최고로 값지게 쓴다.
3. 보시 물건은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어야 하며, 부정하게 얻은 물건이나 해로움을 주는 것은 안 된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또한 재물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무재칠시(無財七施)도 있다.
1. 부드러운 눈으로 사람을 대하는 안시(眼施) - 따뜻한 눈빛
2. 부드럽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 웃는 얼굴
3. 좋은 말로 사람을 대하는 언사시(言辭施) - 부드러운 말
4. 예의 바르게 사람을 대하는 심시(心施) - 마음으로 남을 위함
5. 다른 사람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신시(身施) - 몸으로 남을 이롭게 함
6. 다른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床座施) - 하심하고 공덕을 남에게 돌림
7. 사람을 재워주는 방사시(房舍施)가 그것이다.
보시를 할 때에는 주었다는 생각과 이에 따른 복과 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참된 보시이다. 이것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한다.
삼륜청정, 삼륜공적 (법정스님의 산문집 일기일회에서)
내가 누구에게 베풀 때 이 세 가지 것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활짝 열려야합니다.
둘째, 받는 쪽도 그저 고마운 마음 외에 다른 분별이 없어야합니다
셋째, 주는 매개체인 물건도 청정한 것,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한 물건이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만 온전한 보시입니다
삼륜청정이란 불자라면 보시의 행을 근본으로 삼는데 보시함에 있어서 삼륜청정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알아보면 보시하는 데는 3가지가 청정해야 한다고 하니 이를 삼륜청정이라 합니다. 삼륜이란 베푸는 자와 받는 자와 보시한 물건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가 깨끗할 때 비로소 참된 베풂이 됩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것은 베풀어지는 시물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베풀고 받는 그 행위에 어떤 불순한 목적이나 상에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 무위의 견지에서 볼 때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또 베풀어지는 물건도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삼륜에서 륜이란 수레바퀴를 뜻합니다.
마치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입니다.
누가 주는 자이고 누가 받는 자라는 불변의 규정성이 없습니다.
주었으되 준 것이 없고 받았으되 받은 것이 없는 그런 무위의 베풂을 삼륜공적이라고 합니다. 베푸는 자도 공하며, 받은 자도 공하며, 베풀어지는 물건도 공하다하여 삼륜체공이라고도 합니다.
달마 대사와 양무제와의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양무제는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불전에 공양을 많이 올려서 당시 중국 불교의 흥성에 크게 기여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제는 자신의 공덕이 참으로 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큰스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마스님을 만나 자신이 베푼 공덕이 얼마나 큰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일언지하에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무제의 보시는 베풀었다는 상에 집착하고 있는 유위의 베풂이었기 때문에 자선은 될지언정 참된 공덕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시한 사람의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무리하게 한 보시는 받는 사람의 입장은 좋은지 몰라도 그 보시로 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면 결코 깨끗한 마음이 날수 없고, “자리이타”의 기본이념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보시는 사찰이나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상을 내지 않고 하는 보시가 진정한 보시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재물을 보시하는 것만이 보시가 아니라 무재칠보시, 법시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찰에 많은 보시를 요구하는 스님들 결코 청정한 보시 받는 자의 마음이 아님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보시는 복을 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업을 쌓아가는 길임을 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시하는 자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하는 보시는 복을 많이 받겠다는 허황된 욕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보시는 결코 진정한 보시가 아니며 오히려 보시자의 욕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돈 10원을 보시하더라도 상을 내지 않는 보시“삼륜청정”하고,“자리이타”의 기본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을 받겠다는 욕심에서의 보시는 또 하나의 상을 만들고 욕심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될 뿐입니다.
오관게(五觀偈) 불교입문 29쪽
승려의 식사 때마다 식사에 대한 고마움을 일깨우는 게송
1. 계공다소량피래처(計功多少量彼來處) : 온갖 정성이 두루 쌓인 이 공양을
2. 촌기덕행전결응공(村己德行全缺應供) : 부족한 덕행으로 감히 공양을 받는구나
3. 방심이과탐등위종(防心離過貪等爲宗) : 탐심을 버리고 허물을 막고
4. 정사양약위료형고(正思良藥爲療形枯) : 바른 생각으로 육신을 지탱하는 약을 삼으며
5. 위성도업응수차식(爲成道業膺受此食):| 도를 이루고자 이제 먹노라.
1. 이 식사가 있기까지 공이 얼마나 든 것인가를 생각한다.
2. 자기의 덕행이 공양을 받을 만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3. 마음을 지키고 허물을 여의는 데는 삼독(三毒)을 없애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음을 관한다.
4. 밥 먹는 것을 약으로 여겨 몸의 여윔을 방지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관한다.
5.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공양을 받는 것임을 관한다.
불심사 공양(供養)발원문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안으로는 성불의 보약으로 삼고
밖으로는 중생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南無 摩訶般若波羅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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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시복습 하고 갑니다._()_
잠시 머물다 높고도 귀한 말씀 잘 새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_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