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합기도를 알기 위해서는 [덕암] 최용술옹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합기도의 창시자인 최용술(1905년생)은(일본명 :요시다 아사오)1903년 충북 황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랍니다. 그이 나이 8살무렵 동네에 들어와 사탕공장을 하던 일본인 구마모또 에아찌부부는 그를 귀엽게 보았기에 거의 1년간을 같이 지내다시피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나이 9세 어느날 일본인 부부는 최용술에게 연의 일종인 아메다마를 주면서 여행을 갔다 오자고 말해 그는 아무의심없이 따라 나간 것이 일본의 시모노끼항 이었습니다. 아이가 없던 구마모또 에아찌부부의 납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도착 후 주위사람들이 불쌍한 어린아이를 유괴했다고 이들 부부에게 사람들이 말하자 당황한 부부가 도망쳐 버렸고 그 후 혼자 가된 그는 1년 반 가까이 오사카 요꼬하마등을 전전하면서 거지나 같은 고아생활을 합니다. 1913년 여름 공원에서 절의 주진인 오따나베 긴따로라는 노인을 만나 그를 따라 절로 들어가 그곳에서 그의 손자들과 2년을 보냅니다. 오따나베 긴따로 주지가 최용술에게 희망을 묻자 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 하니 몇 일후 자그마하고 구부정하고 쳐다보기조차 무서운 눈살을 가진 사람이 그를 찾았는데 그가 바로 그의 스승이된 다케다쇼오가꾸 이었습니다. 주지는 자신의 친구인 다께다소우가꾸(武田物角)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다케다 쇼오가꾸는 최용술옹을 일본의 악산으로 유명한 신수 니이가따산으로 데리고 갔고 산등성이에 작은 정자가 있었고 여기서 그는 처음 3년간은 밥과 빨래 심부름 등이 그의 차지였고 각고의 세월 17년간을 다케다 쇼가꾸로부터 대동유술의 3천8백가지 기술을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처음 입산할 때는 모두6명이었지만 하산할 때는 스승과 그뿐이었다.
최용술은 다께다 소오가꾸를 따라 일본을 순력하다 그의 나이 28세인 1915년 북해도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일본 합기도의 창시자 우에시바모리헤이를 만난다. 일본 아이키도측 역사는 최용술옹이 생전에 측 근 제자에게 구술한 것과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최용술옹이 우에시바와의 만남에 대해 생전에 측근 제자들에게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께다 소오가꾸 선생과 최용술옹이 1915년 북해도 욱천에 당도 했을 때 당시 북해도는 명치유신 이후의 본격적인 개척 사업으로 많은 노무자들이 현장 개간사업을 하고 있을 때 이었다. 당시 노무자들은 일본 사회의 범죄자들이나 부랑배들이 차출되어 투입되고 있을 때였 는데 그 현장을 지나던 다께다 소오가꾸 선생과 최용술옹은 일련의 노무자들로부터 시비가 벌어졌다. 몰려든 노무자들은 50여명 이었는데 이들과 다께다 소오가꾸간에 싸움이 붙었다. 다께다 소오가꾸는 순식간에 이들 전부를 모조리 해치우는 솜씨를 보였다. 이 때 멀찍이서 다께다 소오가꾸의 신기에 가까운 대동류 실전술기를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우에 시바 모리헤이였다. 당시 이미 기도류, 유생류, 유도 등 상당한 무술을 연마한 우에시바는 처음 보는 다께다 소오가꾸의 무술에 감동하여 다께다 소오가꾸와 최용술옹의 뒤를 미행했다. 다께다 소오가꾸와 최용술옹은 한밤을 지나 새벽에 거처에 당도했다. 우에시바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계속 미행하다 집을 확인 하고는 돌아갔다. 이튿날 우에시바는 다께다 소오가꾸를 방문하여 대동류 유술의 사사를 청했다. 그러나 다께다 소오가 꾸는 우에시바의 관상을 보고 너는 나의 무술을 배울만한 인물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그 후 우에시바가 거듭 찾아가 술기 교수를 애청하였으나 다께다 소오가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듭된 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우에시바는 집념을 놓지 않았다. 다께다소오 가꾸와 최용술옹의 거처를 맴돌며 틈을 찾았다. 다께다 소오가꾸와 최용술옹이 수련하던 곳 즉 도장은 모두 밀폐되어 밖에서 안을 볼 수 있 는 창문이 없었다. 대동류술기 교수는 문외불출이라 하여 수련 장소는 엄격히 밀폐된 공간에서 일대일로만 이루어졌다. 다께다 소오가꾸와 최용술옹이 술기를 수련할 때 우에시바는 인근에 있다가 촘촘한 나무사이 틈새로 몰래 술기장면을 엿보았다. 그리고는 다께다 소오가꾸가 외부에 출타하고 없을 때 혼자 있는 최용술옹을 찾아가 대동류 술기 한 수 씩을 배우려고 했다. 우에시바는 최용술옹이 조선인 처지임을 알고 당시 10대 이었던 최용술옹에게 고급스런 일본 한복 옷가지와 신발을 선물로 주며 대동류 기술을 원했다. 얼마 후 다께다 소오가꾸는 집안에서 보지 못하던 최용술옹의 옷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최용술을 다그쳤다. 이에 최용술이 사실을 실토하자. 문외불출의 비기인 대동류를 문외환에게 전하려했다며 혼을 내고 당장 우에시바를 데려오라고 진노했다. 우에시바가 도착하자 다께다 소오가꾸는 격노하여 어찌 아이를 꼬득여 기술을 빼내려는가 하고 혼찌검을 냈다. 그러나 우에시바의 집념은 대단하여 그 후에도 줄기차게 각종 선물과 경제적 공세로 다께다 소오가꾸의 마음을 사려했고 종내에는 다께다 소오가꾸가 곤경에 처한 일을 처리해줌으로서 술기 교수를 허락 받았다. 그러나 그 술기 교수는 철저히 한 수 당 얼마라는 경제적 거래로 이루어졌으며 대동류 고급 술기는 전수하지 않은 채 다께다 소오가꾸의 입장에서 우에시바의 격에 맞는 기술만을 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일본 아이키도측이 주장하는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다께다 소오가꾸를 만난 과정 『1915년 북해도의 한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우에시바는 우연히 그곳에 머무르던 다께다 소 오가꾸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다께다 소오가꾸는 광대뼈가 돌출한 용모에 날카로운 안광은 매섭게 빛나고, 그리고 꽉다문 입은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우에시바는 다께다 소오가꾸와 복도에서 스칠 때마다 그의 눈빛에서 불꽃 튀는 무인의 매서움과 그 인물의 몸에 밴 무술을 느낄 수 있었다. 우에시바는 대동류유술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허락받고 그 후 90일간 대동류 의 오의를 교수 받았다.』
일제말기에는 궁성(일본 왕이 거처하던 궁궐)안의 황족들을 교습하기 위해 무상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도 황족이나 귀족이 아니면 교습을 받을 수 없는 그 비술을 스승을 대신하여 전국각처의 도장을 돌았다. 그러던 중 2차 대전이 끝나 일본은 망하고 조국은 해방되었기에 조국을 향하여 귀환하는 동포의 대열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연일 계속되고 있을 때 최용술도 조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일본 유술계의 중심인물들은 모아놓고 엄숙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일부의 유술계 중진들이 둘러앉아 있고 서로들 이 중대한 안건
「당신은 이 나라의 명인이니 신중히 생각하고 꼭 가야한다면 손목을 맡겨놓고 가라는 말에도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결연한 그에게 일동은 더 말리지 못하고 일본 유술계의 큰 별 하나를 딴 나라에 빼앗기는 것이 몹시 안타깝기도 했지만 모두 손을 맞잡으며 눈물이 글썽거렸다한다.
34년만에야 고국 땅으로 돌아온것은그이 남이 42세 때였다. 무작정 대구까지 도착한 그는 대구 한국은행 옆에서 국화빵 가게를 내어 소일한다.
최용술도주가 한국에서 합기도를 처음 열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48년2월 해방정국때 식량난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양조장에서 나오는 주막(술지게미)을 구입하여 장사진을 칠때하였다. 이때 술지게미를 구입하려온 최용술씨가 차량관계로 옆 사람과 시비가 붙어 이상한 동작을 취한 것을 양조장 사장인 서복섭씨가 유심히 지켜보게 됐다. 자유당시절 야당국회의원을 지낸 서동진씨의 아들인 서씨는 유도초단에다 여러 운동을 해오던 터라 대국을 요청 , 양조장의 한방에서 시합을 갖게 됐다. 이때 최용술씨의 기술에 매효당한 서복섭씨는 최용술에게 간청하여 고려양조장 2층에서 본격적으로 개인교습을 승낙한 한다. 얼마 후 그의 신비로운 무술에 대해서 금방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정식무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인 깡패 건달까지 몰려들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합기도 현판식을 갖게 된 되는데 51년2월12일 당사 대구 시장북로(현 대구달성공원사거리) 대구양조장 2층에서 대한합기도유권술 도장을 연다. 최용술씨(당시 46세)가 (6단), 서복섭씨(27세)를 사범(4단), 서병돈씨(2단), 장승호씨(2단)그 후 입문한 서인혁씨등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수련생이 수련을 한다. 6.25동란 이후인 1954년, 여름, 도주선생은 염매시장 집에 도장을 냈다. 입관한 첫 입관 자가 지한재, 김무홍, 문종원 제씨였고 그 뒤를 이어 입문한 사람들이 강문진, 송중회, 김광호, 장정표, 신상철등 이었다. 이렇게 최용술 도주님께서 본격적으로 합기도 전파를 위한 노력으로 많은 합기도 유단자들이 배출되어 이후 국내의 합기도의 실력자들을 배출, 각지로 급격히 전파하는 모태가 됐다. 최용술씨의 문하에는 지한재씨, 장승호씨, 대구의 정무권씨(대한합기유권술협회) 등이 있었다. 1956 이후 서복섭씨의 합기 도장이 개설되고, 1959년 이후 지한재씨(현 샌프란시스코에서 합기도장 운영)는 성무관에서 대한합기도란 명칭으로 김무홍씨(현재 건자재상)는 신무관에서 한국 합기도로, 그리고 서인혁씨는 전통무술 대한국술원 명칭으로 서로가 다투어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1961 이후 많은 도장이 난립 성을 보이기 시작하여 우리 합기도의 백년대계를 위하고, 통일된 합기도 발전을 위하여 뜻있는 대구 유지들과 합기도인 들이 최용술 도주님을 중심으로 1961년부터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진 후 1963년 9월 2일 우리나라 문교부로부터 역사상 처음으로 합기무술 특수 법인인 사단법인 대한기도회 합기도 협회로 승인 받아 우리 합기도에 큰 획을 이루었다.
서울을 중심을 한 합기도는 대한합기도(성무관)와 한국합기도(신무관)가 통합하여 대한민국합기도로 이름을 한동안 유지하다가 다시 대한합기도와 국제연맹합기도 등 여러 단체로 갈라져 난립 성을 보였다. 그리고 1985년 전경환 씨에 의해 대한 합기도 협회를 새마을본부로 끌어드려 새마을 합기도 중앙연합회라는 것을 발족하여 한국 합기도의 통합을 이루어 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5공화국의 끝남과 함께 모든 계획은 사라지고 합기도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시련을 겪으며 수많은 단체가 난립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1대 서인혁(국술원) - 2대 서인선(대한기도회),장수옥(특공무술).박만동(궁중무술), 화랑도, 한무도 등.. 1대 지한재(성무관) - 2대 ? ? ? 3대 오세림(대한합기도협회),.. 1대 김무홍(신무관) - 2대 황덕규(대한신무합기도협회), 명재남(국제연맹 한국 합기회)
현대의 한국합기도
대한기도회(국술, 국술원) : 최용술 선생에게서 무술을 배운 서인혁 국사가 만든 것으로 최용술에게서 배웠던 기법과 중국무술과 기술교류를 하면서 형, 타격기, 전통무예와 궁중무술 등을 혼용하고 나름대로 무예도보통지의 원리에 부합시켜 만든 것이 현재 대한기도회(국술) 계열의 기법들입니다.특징은 초창기 부터 형을 도입하였고 무기 술이 다양하였다. 국술은 서인혁 국사가 대한민국 무술에서 각 단어의 뒷글자만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미국서는 국술이 합기도가 아닌 완전 다른 무술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합기도협회 : 지한재씨(합기도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는 최용술 선생에게서 배운 관절기와 타 무술의 타격기와 발차기를 도입하여 현재 합기도와 같이 만들어냅니다. 국제연맹 계열 : 대한합기도(성무관)와 한국합기도(신무관)가 통합하여 대한민국합기도로 있다가다시 분열되며서 새로이 생겨난 계열로 족술에다 일본의 아이키도라 불리는 기법을 한국식으로 토착시켜 만든 것이 기법.
지금은 나열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엄청 많은 유파(협회)가 생기면서 나름대로 따로 나가 협회를 만들면서 형도 만들고 특징적인 술기도 포함하고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이3가지 계열을 따라갑니다. 합기도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계열처럼 느껴지는 무술인 회전무술, 특공무술(기도회유파), 국술원무술, 궁중무술 화랑도, 한무도 등등도 이 계열을 따라 갑니다.
한, 일 양국에 모두 영향을 미친 다께다소오가꾸선생의 대동류합기유술의 역사는 다음의 두 가지 설을 갖는다. (1). 도미키교수의 설 일본 와세다대학의 도미키겐지(富木謙治)교수는 평생을 유술, 유도, 合氣道의 연구에 바친 사람이다. 그는 가마쿠라시대(1185-1333) 합기도가 신라 삼랑원의광을 시조로 하여 막부의 미나모토(源)가에 전해지고 이어서 다께다(武田)가에 남아 7대를 지나 다께다소오가꾸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원의광의 무사집안이 대동관이라고 한데서 대동류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 라고 그의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 도미키교수가 다께다소오가꾸가 생전에 말한 내용을 토대로하고 그의 제자에게 남긴 비전 목록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2). 다께다소오가꾸의 창작설 현대에서 일본의 학자들은 아이키도의 역사적인 문제를 보다 정확한 증거자료를 통해 검증하려 한다. 그중 合氣의 科學의 저자인 吉丸慶雪은 여러 추정 자료와 증언을 통하여 대동류합기유술은 다께다소오가꾸의 창작이다 라고 사견(私見)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다께다소오가꾸는 평소에 대동류합기유술은 신라삼랑원의광을 시조로 다께다 가문에 전하고 자신은 전승자라고 말하였는데 실제로 다께다소오가꾸선생의 스승은 호시나치카노리(사이고 타노모)라는 사실이 다께다선생 사후에 일본에서 일반에게 알려 졌다. 호시나치카노리는 그의 양자인 사이고시로와 다께다소가꾸에게 기술을 전수하였는데 사이고시로는 대동숙(大東塾)창립에 관여하고 다께다소오가꾸는 대동류합기유술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호시가나의 양자인 사이고시로는 일본 강도관의 사대천왕중의 한사람으로 그의 기술은 지금도 증언되는데 다께다소오가꾸의 기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시가나의 기술은 대동류유술이라고 칭하였는데 다께다소오가꾸는 자신의 기술을 더하고 合氣라는 명칭을 더한 것이다.
일본의 합기도 일본의 합기도는 일본 56대 청화(淸和)천황의 제6황태자 정순 친왕에서부터라고하며 천황의 선조인 경기(經基)- 만중(滿仲)-뢰신(賴新)에게서 이어져 뢰의(賴義)의 셋째 아들인 의광(義光)이 기초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의광의 기법은 의청에게 이어졌고 의청은 갑비(甲悲)의 무전촌(武田村)에 살며 갑비원 선조 무전씨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 합기술의 기법이 무전가에 전해져왔다. 대동 류는 무전가의 충신이던 다이도오 하사노께(大東久之助)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이 기법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명치 시대에 무전가의 다께다소오가꾸(武田物角)가 일반에게 공개한 뒤라고 한다. 우에시바모리헤이는 명치16년(1883年)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무술 가의 꿈을 키우던 중 다께다소오가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우에시바는 일본 전 지역에서 비전 되어 내려오던 20여 유파의 무술(죽내류, 관구류, 급심류, 신음류, 상생류, 대동류, 기도류, 유생류)의 여러 문파의 유술과 보장원류의 창술을 배웠다. 다께다에게 사사받은 뒤 우에시바는 和의 무술 아이끼도(合氣道)를 창시한 것이다. 다께다 소오가꾸는 1943년에 북해도 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 후 그의 아들 다께다 도끼무네(武田時宗)가 대동류를 이어받게 되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1883∼1969)는 1901년 기도류의 호택덕삼랑이였고 중정정승의 유생류 유술도 현재 합기도를 이루는데 기술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12년경 대동류 합기유술의 다께다 소오가꾸의 문하에 입문하여 1916년까지 4년 동안 그의 가르침을 받고 타무술과 조화시켜 1922년 합기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다. 일본 최초의 합기도 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1925년 동경에서 개관한 황무관(皇武館)이며 1940년 재단법인 황무회를 결성하여 인가를 받기까지 합기도의 중심적 존재였다. 그리고 1942년 『합기도』라는 명칭이 생겼던 것이다. 1948년 재단법인 황무회를 재단법인 합기회로 재편성하였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도 1969년 86세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우에시바 기쇼마루가 이어받아 세계 각국에 보급하고 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1883-1969)가 고유 유술의 일파 다이토류(大東流) 柔術을 배워서 창시, 관절을 이용하여 던지는 기술, 누르는 기술(당신기, 관절기)이 특색이 호신술로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다이쇼(大正) 말경(1925년)에 우에시바에 의해서 합기무술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최초의 합기도장이라고 볼 수 있는 황무관(皇武館)이 1930년에 일본 도쿄에서 문을 열었으나 1942년에 비로소 아이키도(合氣道,Aikido/Aikitsu)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이 명칭이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우리말 표기인 합기도로 바뀌게 된것이다.
일본합기도 단체와 일본식 합기도의 한국단체 "合氣道"라는 한자를 사용하지만, 아이키도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배울 수 있는 "합기도"와는 다른 무술이다. 합기도에 비해 발기술은 제한적으로 사용되며, 공방 원리에는 원을 그리는 움직임이 강조되고 전투보다는 화합을, 선공 보다는 방어를 우선시 하는 무술이다.
1대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1883-1969) 2대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1921-1999) 3남 3대 우에시바 모리테루(植芝守央, 1951~)차남
일본의 중앙 단체인 아이키카이(合氣會)와, 대만 내 아이키도단체인 대만 중화 아이키도 진흥회 등.. 각국 현지 단체가 있으며, 세제 적으로는 아이키도 국제연맹(IAF)이 존재한다. 일본의 아이키카이가 중앙 단체라고는 하지만 결집력은 부족한 편이며, 일본 내에는 사실상 아이키도에서 갈라져 나온 단체가 여럿 존재한다.
아이키카이 일본 합기회 본부도장. 일반적으로 '아이키카이류'라고 하면 특정 유파를 지칭한 다기 보다는 본부 도장의 스타일을 말할 때 사용한다. 실제로 아이키카이 소속 사범들도 저마다 스타일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키쇼마루 도주가 지향하던 스타일을 말한다.
료오신칸(養神館) 창시자의 초기 제자중 한명이었던 시오다 고조(鹽田剛三;1915~1994) 가 이끌던 단체이다. 부드럽고 원을 강조하는 아이키카이와는 달리 대동류에 좀 더 가까운 딱딱하고 엄격한 스타일이 특징이다. 일본 경찰들이 수련하는 아이키도 스타일이기도 하다. 기 연구회나 쇼도칸(昭道館)과는 달리 아이키카이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마류(岩間流) 창시자의 기술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토 모리히로(?藤守弘)의 유파이다. 체술외에 검술과 장술을 중요시한다.
기 아이키도 창시자 사후 내부 분쟁으로 본부 도장과 결별한 토헤이 코오이치의 단체이다. 기 훈련을 중요시하며 아이키도를 통해서 기를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기술도 매우 부드러운 특징이 있다.
쇼도칸(昭道館) 창시자의 초기 제자중 한명이었던 토미키 켄지(富木謙治)가 만든 유파로, '아이키도의 스포츠화 지향'이라는 독특함으로 다른 유파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와세다 대학 유도부의 황금시대에 화려한 실력을 뽐냈던 걸로 알려졌으며, 전일본유도연맹의 발족에 힘을 기울였고 실제 유도 공인 8단이었던 토미키가 강도관 스타일의 스포츠 지향을 통해 무술의 현대화를 추구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쇼도칸 아이키도는 란도리 시합, 카타 훈련 등으로 인해 다른 유파와 크게 구별되며, 아이키도계에서 유일하게 경기/대회가 개최되어 공식적으로 서로의 기량을 비교하는 자리가 존재한다. 쇼도칸 스타일의 아이키도를 창립자의 이름을 따 '토미키류(富木流)'라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일본합기도 인물들 사이토 모리히로(?藤守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제자. 이와마류(岩間流)로 분파. 시오다 고조(鹽田剛三):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제자. 료오신칸(養神館)으로 분파. 토미키 켄지(富木謙治):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제자. 쇼도칸(昭道館)으로 분파. 무술의 학문적 연구에 힘써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만주건국대학 교수, 와세다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토헤이 코오이치(藤平光一):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제자. 고바야시 야스오(小林保雄):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제자. 合氣道를 '아이기도'라고 읽는 계열인윤익암 관장의 스승
그럼 한국에는? 한국에는 아이키도 국제연맹에서 공인하는 대표 단체가 존재하지 않다가 윤익암 계열인 사단법인 대한아이기도(合氣道)연맹 2003 8월1일자로 아이기도 세계본부로 부터 공식지부임을 인정받음. 일본 아이키카이에서 인정하는 국내 단체로는 '아이기도'라는 이름을 쓰는 윤익암 계열의 사회단체 한국 합기회, 사단법인 대한 합기도 연맹 공식 등록단체명은 각각 합기회/합기도 연맹이나 통상 아이기회/아이기연맹으로 부른다. '아이키도'라는 이름을 쓰는 오세용 계열의 단체가 있다.
첫댓글 너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