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걱정하느냐
(예수님의 질문 3)
본문말씀: 마태복음 6장25절부터 34절까지(참조: 누가복음 12장22절부터 34절까지)
인생과 근심 걱정
살아가면서 걱정과 염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염려와 걱정은 우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지나친 염려와 걱정으로 우리의 정상적인 삶이 위협을 받을 때입니다. 지나친 염려 또는 쓸데없는 걱정은 우리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은 ‘걱정도 팔자야’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지나친 걱정과 근심이 우리 인생에 주는 해악에 대하여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나친 걱정과 염려의 위험에 대하여 지적하고 아무리 걱정근심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오늘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주님의 질문은 오늘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과연 주님의 말씀은 실천가능한 말입니까? 주님의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어떤 비결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생명을 중심으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걱정의 내용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먹는 것과 입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한 걱정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예수님은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하여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옷을 입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입는가?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목숨을 유지하고 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목숨과 우리의 몸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목숨과 몸이 음식과 옷보다 소중한 것을 깨닫는 사람은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 질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먹을 것과 입는 것으로 인하여 걱정과 근심이 생깁니까?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사는 것인가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쌓고 모으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웠던 보리 고개 시절을 이기게 해 준 것 중에 새마을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오늘의 한국을 이룩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길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새마을 운동이 보릿고개를 이기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만 치중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마을 운동이 새 마음운동이 되어서 물질을 넘어서는 삶 자제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운동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새마을 운동을 벌였지만 우리나라가 새롭게 변화되어서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에만 치중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매달려서 진정 생명의 존재의 의미를 망각하는 일들은 결국에는 다 부패할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끊임없는 새로운 걱정거리를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참다운 생명이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걱정거리가 더욱 많이 생기는 요즘 우리는 그럴수록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우리의 목숨과 몸을 위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걱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주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만일 우리가 들의 백합화의 영화가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걱정근심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들의 백합화의 옷 입은 것이 솔로몬의 그것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미적 감각이 없으셔서 아니면 너무나도 순진하셔서 정말 백합화의 꽃이 솔로몬의 옷보다 더 화려하였다고 믿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들의 백합화와 솔로몬의 옷을 절대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 인 들 늘일 수 있느냐?”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나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의 특징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겸허하기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깨닫고 할 수 없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새와 백합화는 자신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아옹다옹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키를 늘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강구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갑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대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자연의 법칙을 자꾸만 범하려고 합니다. 성서는 이러한 마음을 욕심 혹은 탐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걱정거리가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걱정이 있을 때 그것을 물리치려고 하지 말고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처럼 그것을 당연하듯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전 고려대학 정신과 의사 이시형씨가 쓴 글에 나오는 임상치료 이야기중의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기업인이 병에 걸렸습니다. 불면증이 곁들인 위장장애였습니다. 한 의사가 신경성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그래서 의사의 권유대로 사업에서 물러나서 시골에 내려가서 신경을 끄고 살기로 했습니다. 모든 걱정거리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했습니다. 아직도 젊은 아들에게 사업을 맡기고 그는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시골에서의 며칠은 그런대로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며칠 후부터 발생했습니다. 자꾸만 회사생각이 나고 신경이 쓰여 졌습니다. 다시 잠도 오지 않고 그는 걱정을 안 하려고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리기만 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로기 상태가 되었고 마침내 정신과를 찾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권면합니다. 다시 신경을 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신경 쓰는 일과 걱정거리는 인간생활에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병이 말끔히 치료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있는 걱정거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할 때 걱정은 진정한 의미에서 더 이상의 걱정이 안 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걱정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하여 삶이 피곤하고 찌든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은 들에 나가 공중의 새와 들의 꽃들 속에서 하나님의 자연섭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걱정거리들을 어떤 경우에는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상대방과 비교하는 나쁜 습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자신의 위치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 구하기
높은 가치를 구해야 합니다. 사람은 위를 보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먹는 것과 입는 것만을 가지고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바라고 또 그것을 향하여 나아갈 때 비로소 인간의 가치를 느끼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골로새서 3절~2절)
걱정을 이기는 가장 좋은 길은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할 때 우리는 오늘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걱정거리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우리의 인생의 수준의 높이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하찮은 것 때문에 걱정하면서 애를 끓고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허비해 왔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버리고 땅의 것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우리의 삶은 걱정이 많아지고 허무하고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에 어느 비행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비행사가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비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한참을 비행하는데 기체 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이 들려왔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기체 내에 이륙할시 쥐가 한 마리 기어 들어온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쥐가 정밀한 기계의 케이블을 갉아 먹는 소리였습니다. 마땅히 착륙할 장소도 없었고 그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연 듯 쥐는 설치 동물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설치동물이란 지하나 혹은 지상에서만 살 수 있는 동물이고 일정한 높이에서는 그만 죽고 마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 보다 비행기의 고도를 높였습니다. 한참을 올라가다보니 쥐가 케이블을 갉아 먹는 소리가 그쳤습니다. 쥐가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사히 목적지까지 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쥐와 같은 설치동물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힘을 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설치동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많은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마치 비행기내에 몰래 들어온 쥐처럼 우리의 인생의 케이블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비행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의 비행의 고도를 높여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걱정거리가 있을 때 땅만 내려다보면 결국 걱정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도를 높여 위엣 것을 바라볼 때 걱정이라고 하는 설치동물은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걱정과 근심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삶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왜 걱정하느냐?’ 에 각자가 답변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먹을 것, 입을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주님이 주신 생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 안에서 걱정거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인생의 고도를 높이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걱정이 생의 위기로 작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질문 앞에 ‘주님,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로 답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