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한 두번째 항해>
2003년 추석이었다. 추석이라고는 하나 찜통처럼 더운 날씨였다.
나는 두 번째로 가져오기로 되어 있는 30피트 요트를 가져오기 위해
오사카의 닷노아 요트하바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추석연휴를 함께하기 위해
가족이 모두모여 회의를 했다. 일단 모두 오사카로 같이 가서 관광을 한 다음 나는
요트를 타고 돌아오고 나머지는 부산과 오사카를 오가는 판스타
페리호로 돌아오기로 계획을 하였다. 또 그렇게 티켓도 예약을 했다.
그러나 가족이 모두 2박3일의 오사카 관광을 마치고 집사람과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국제 페리 터미널로 갔을 때 느닷없이 초등학교6학년인
둘째아들 준호가 아빠랑 남겠다고 했다. 반갑기는 했지만 선뜻 승낙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준호는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바닷길을 건너기에
힘들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녀석이 지금 아빠와의
항해보다 닷노아의 해수욕장을 더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럴 정도로 준호는 물놀이를 좋아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그
녀석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도 끝까지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준호를 많이
따랐던 셋째는 이미 수상한 기미를 눈치 채곤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꽁무니를
따라 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잔꾀를 써 겨우 셋째를
따돌리고 페리 터미널을 빠져 나왔다. 거짓말을 하고 이제 6살밖에
안되는 꼬마를 따돌리고 나니 마음이 몹시 찹찹하고 미안했다. 혹시
녀석이 울면서 따라올까 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빠른 걸음으로 터미널로
부터 멀리 벗어났다. 잠시 마음이 아팠다. 둘은 지하철을 타고
오사카의 중심지인 남바역까지 가서 닷노아행 기차를 갈아타고
그곳으로부터 한시간을
더 간 뒤 닷노아 요트 하바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배에서 자는 것을 포기하고 민박집을 찾았다. 방 한 칸에 두 사람이 자는
비용으로 8만원이 들었다 어른이 5만원 아이가 3만원 이었다. 일본은
숙박비를 사람 수 대로 받는 통에 대식구인 우리가족이 가장 불리한 것이
숙소를 잡을 때였다. 저녁때는 동네의 주막 같은 주점에 들러 일본민심도
느낄 겸해서 식사와 맥주 몇 잔을 비우러 갔다. 대화가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요트를 타고 아들과 부산까지 간다고 하니 모두 대단하다고들
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베테랑 요트 맨 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것이 두번째항해라는 것을 알면 어떨까 아마 일본인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도 초등학생 아들까지
데리고서 말이다. 무식한 것이 용감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바다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용기를 불러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전통일본식 민박집에서 하루밤을 편히 쉰 다음 1키로 쯤 떨어진 요트 하버에 가서
출발 전 점검을 시작했다. 엔진과 돛의 상태 그리고 식료품등을
점검하고 배의 연료도 가득 채우고 또 20리터들이 연료 다섯 통을
여분으로 더 준비 하였다. 낮 동안은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햇빛에 데워진 데크 아래의 선실은 찜통이었다. 팬티만 입고
작업을 하는데도 채 30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둘은 500미터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우리 말고 해수욕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바닷가로 나오기엔 오늘 기온이 너무 높은 것 같았다.
우리는 두 시간 가량을 물에서 신나게 놀고 배로 돌아왔다. 잠시
그늘을 찾아 들어가 쉰 다음 배 밑바닥에 붙어있는 담치나 조개 그리고
해초류를 제거하기 위해 수경을 끼고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두 시간
가량 배 밑바닥을 넙적한 칼과 수세미 그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깨끗이
정리한 후 올라왔다. 그리고 조금 후 저녁시간에 맞춰 나온 세관직원들의 오케이
싸인을 받음으로써 출발준비가 완전히 끝이 났다. 이날 밤은 배에서
자기위해서 배를 수도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가 30분가량 샤워를 시킨뒤 우리도 몇 번씩
샤워를 하여 체온을 식힌 뒤에야 배에서 잠들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을 서둘렀지만 출발준비가 덜된 부분이 있어
마무리를 하다보니 어느새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비상용품까지
마지막 점검을 하고 닷노아 요트 하버 사무실에 가서 작별인사를 나눈 뒤
10시 30분경 로프를 풀고 닷노아 요트하바의 항을 벗어났다. 한시간
가량을 아카시 대교를 향하여 나아갔다. 오른쪽에는 오사카 칸사이
공항이 바다위의 섬처럼 멀리 보이고 있었다.
이때 항해중인 요트는 30피트 크루저
요트로 선명은 스타윙 이었다. 이때까지도 나는 자동조타장치인 오토파일럿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해 중에는 잠시도 라다를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힘들었다. 그러나 핸디GPS의 사용법은 알고 있어서 눈만 믿고
가던 첫 번째 항해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아들과 함께 가면
적적함도 덜하고 어떤 식으로든 항해가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적잖게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때 준호는
저를 책임지지 못할 것이고 어떻게든 그것도 나의 몫인 되는 것이기 때문에
때문이었다. 세 시간 가량을 항해하다 바람의 방향이 좋아지자 잠깐 준호에게
틸러를 맡기고 주 돛의 카바를 벗겼다. 장시간 세일을 사용치 않아 커버 속에
말벌들이 살고 있어 출발 전에 스프레이를 뿌려 모두 처리했었다. 그런데 커버를
벗기자 완전히 죽지 않은 몇 놈이 최후의 날개 짓을 하면서 날아올랐다. 그리고
선수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뒤쪽으로 날려가 맨몸으로
구명조끼만 입은 준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새끼손가락만한
말벌이 갑자기 자기의 몸을 파고들자 준호는 비명을 질러댔다.
“으악!!!! 아부지!!!!!!아부지!!!!!아부지!!!” “준호야 !!!!!
준호야 !!!” 나는 벗기려던 커버를 놓고 스프링처럼 튕기며
총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선실로 뛰어들어 스프레이를 들고 나와 준호의
몸속으로 마구마구 뿌렸다. 나의 행동이 너무 빨라 나도 놀랄
지경이었다. 스프레이를 냅다 뿌려대자 구명조끼 아래로 보금자리를
앚아간 보복을 마친듯 말벌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제서야 구명조끼를 벗기고 놀란 준호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한참을 배를 정지시키고 앉아 있다 서로를 쳐다보면 씨익 웃었다. 그리곤 다시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후 2시를 넘어서자 앞쪽으로 육지의
윤곽이 확실히 보였다. 흐린 날씨 때문에 선명 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시력 만를 통해서도 항해가 되었다. 멀찌감치 아카시대교도
보이는 것 같았다. 오후 4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 되자 아카시 대교를
통과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히가시우라항으로 뱃머리를 돌려
18시경 입항하였다. 항은 조용하였고 주변에는 식당과 슈퍼조차도 보이질
않았다. 밤이 되자 몇몇 낚시꾼들이 정어리새끼를 잡으려고 항내에서
릴낚시를 던져놓고 곰패질을 하고 있었고 오렌지색 가로등만 황양하게
밝힌 타국의 낮선 포구는 적막감만 더해주었다. 저녁을 해먹은 뒤 준호가
심심할까봐 정어리 낚시를 해보았지만 고기도 사람을 알아보았는지
잘 잡히지가 않았다. 일찍감치 낚시를 걷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동이트자 배를 움직여 히가시우라항을 나섰다.
해변과 이삼 마일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가다 아카시 대교 쪽으로 방향을
틀어 넓은 만인 하리마나다로 조류를 거슬러 있는 힘을 다해 전진 시켰지만 속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두 시간가량을 육지사이의 폭이 제일 좁은 다리주변의 물살과
씨름을 한 후 해역이 넓은 지역으로 나오자 속도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태양이 뜨겁게 배위로 내려 쪼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커버를
찾아 조타석 앞쪽에 햇빛가리개로 설치했다. 큰 상선들이 지나다니는
항로와 같은 방향이지만 우린 조금 벗어난 옆의 항로를 그어놓고
최소한 7~8시간을 가야 근처 까지 갈 수 있는 소두도를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갔다. 핸디GPS도 건전지를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꺼두었다가 가끔씩 확인하며 때로는 앞서가는 상선을 목표물로 때론
햇빛에 쪼이는 각도를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조차도
잠깐 동안의 목표물이 되어 지그재그 운항이 가장 적게 되도록 잠시도
시선을 늦추지 않고 나아갔다. 가는 동안에 태양이 점점 머리 쪽으로
옮겨 감에 따라 햇빛 가리게도 계속하여 따라 옮겼다. 준호는 밤과
낮 구별 없이 거의 누워서 자거나 누워채 있었다. 일어나면 속이
매스꺼워 잠깐 동안도 앉아 있질 못하는 것 같았다. 바람은 거의
없었지만 배가 앞으로 나아갈 때 생기는 바람은 잠을 자기에 딱 좋을
정도였다. 거울처럼 잔잔한 바다를 달리는 요트위의 그늘 막 아래 적당한
바람은 수면제처럼 준호를 재웠다. 소두도를 지나면서 항로를 가로질러
남목도 쪽으로 향했다. 항로를 오가는 큰 배들은 멀리서 보기에는
속도가 아주 느린 것 같아 보이지만 항로를 서로 교차할 때는 그 배들의
속도가 결코 느리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배의 속도가
느리다 보니 여러 지점에서 항로를 건너 가야할 경우가 가끔씩
있었는데 아주 조심스럽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은 자칫하면 큰 배의
사각지대 안으로 들어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 쓰였다.
그것은 최고시속이 40킬로 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차로 큰 차들이
100킬로 이상 달리고 있는 고속도로를 진입하려는 것처럼
어렵고 부담스럽고 진땀나는 일이 었다.
그리고 지금같이 시속4노트 미만의 속력밖에 갈수 없을 땐 더욱더 항로를
가로지르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들 다리사이를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어린아이같이 "쪼로록 쪼로록"
항로를 넘나들어
오후5시경 남목도의 포구에 도착하여 배 뒤쪽에 닻을 내리고 앞줄을 던져 배를
고정시켰다. 이곳 남목도는 첫 번째 항해 때도 들어 왔던 곳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그때는 혼자 항해를 하여 왔고 배에서 자다가
더위와 모기 때문에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오늘은 민박집에 가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항이 훤히 바라보이는 민박집에서 시원한 물에
샤워도 하고 에어콘 아래에서 맛있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셋째날은 5시경부터 항해를 시작하였다. 준호는 민박집에서 자다 잠자리만
배로 옮겼을 뿐 선실에서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줄기차게
줄기차게"잘도 잤다.해도를 보면 섬의 항구앞쪽으로 모래턱이 1~2미터의 깊이로
넓게 펼쳐져 있는 걸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섬을 나와 우측으로
90도 꺾어 항로 쪽으로 바짝 접근한 뒤 항로 밖에서 역주행을
하며 두 번째 다리 쪽으로 나아갔다. 일본 내만은 항로표시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큰 선박의 항로 안쪽으로만 들어가지 않으면 반대편 항로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두 번째 다리를 통과 할 때 조류가 서로 부딪혀
소용돌이가 여기저기에서 생기고 그곳을 통과할 때면 속도가 뚝 떨어져
틸러를 잡은 손에 물의 압력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아래쪽의 물들이 위로 솟구쳐 오르고 그로인해 바닷물이
여기저기 큰 원을 그리고 밀려나면 혹시 배가 저곳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본 내만에는 큰 바다와 만나는
여러 개의 입구가 있어 그쪽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이 내만 어딘가에서
만났다가 다시 돌아 나오길 반복하기 때문에 하루에 한두 차례는 꼭
이 찜찜한 소용돌이를 만나야만 했고 그것으로 인하여 속도가
빨라질 때도 있었고 느려질 때도 있었다. 다리를 지나 두 갈래 길의
항로가 있었지만 좌측항로를 따라 다음 정박지인 키구마를 향해서
나아갔다. 잠시 후 또 넓은 만을 통과하여 미도해협을 지나 방향을
크게 남서쪽으로 틀어 항로를 따라 내려가다 17시경 키구마항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입항하였다. 이곳에 내린 뒤 우리는 카메라를 잃어
버렸다. 동래 낚시꾼들 옆에 붙어 그 사람들이 뿌리는 밑밥 부분에
낚시를 던져 저녁 찬거리를 잡다가 그만 카메라가 물속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방파제 위와 바다까지의 거리는 4미터 정도이고
물깊이는 5미터 정도였다. 물속으로 떨어진 카메라는 천천히 아래로
빠져 내려갔다. 이럴수가 황당했다. 얼마나 소중한 사진들인데
그깟 정어리 새끼몇마리 낚을려고 카메라을 잃어버렸단 말인가.
내 머리통을 지어 박고 싶었다. 하던 짓을 그만두었다. 그리곤
건전지와 약간의 음식과 생수를 사기위해 신작로 길로 나갔지만
제법 큰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한 곳과 카센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센타에 들어가 슈퍼가 어딘지 물으니 도로를 따라 아래로 5킬로 미터
정도 또는 위쪽으로 5킬로미터 어느 쪽으로든 5킬로미터 정도는 가야
슈퍼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슈퍼가 있어도 족히 3~4개는
있을만한 큰 동네인데도 슈퍼나 편의점이 없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별 수가 없었다. 건전지는 포기하고 식수는 가정집에
부탁해서 수돗물로 물통을 채웠다. 포구를 바로 바라보고 있는 한
아담한 집에서 물을 얻었는데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너무 친절하고 상냥해서 혼자 기분이 야릇해졌다. "내 한테 반했나"
멍하니 있는데 옆에서 슬그머니 잡아 끄는 아들 손에 화들짝 놀라
’아리가또고자이마쓰‘를 복창하며 배로 돌아왔다.
넷째 날도 동이트기 무섭게 출발하였다. 일단
항로 쪽을 바라보며 배를 진행시켰다. 항로로 바로 진입하려면 직각에
가까운 항로수정이 필요하고 거리도 멀었으므로 (실제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함) 항로의 접근을 하면서도 최대한 시간을 절약
하기위해 각도를 조정해가며 접근한 뒤 10분정도만에 항로를 가로질러
우리가 진행하는 항로 바깥쪽으로 우리만의 항로를 만들어 나아갔다.
약도수로로 돌아갔을 때 GPS를 작동시킬 건전지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9시쯤 근처 섬의 포구로 들어갔다. 이 섬도 역시
세대수는 많았지만 슈퍼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배를 묶어두고 동래 골목골목을 찾아 돌아 겨우 할머니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찾아 필요한 건전지를 살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건전지는 두개에 보통 3천원 정도로 한국의 5배정도 가격이었기
때문에 건전지 몇 개 빵 몇 개 콜라 우유 몇 개에 계산은 5~6만원이
훌쩍 넘어갔다. 그러나 필요한 건전지를 구한 것이 기쁜 일 이었다.
다시 배를 출항하여 계속하여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번 항해는
첫 번째 항해와는 달리 배의 속도가 조금 더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은 앞전에 머물렀던 평군도 보다 조금 더 가려고 계획했다.
예상보다 속도가 좋아 예전에 쉬었던 섬을 지나쳐 갈 무렵 배에
밑바닥에 뭔가 턱하고 걸리는 것 같더니 배의 속도가 갑자기 3노트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선채도 몹시 떨렸다. 뒤쪽 배기통으로
시커먼 연기가 나왔다. 투명했던 냉각수도 검은색에 가까웠다. 원래는
냉각수와 배기가스가 같이 나오긴 하지만 투명이거나 하얀색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배를 후진과 전진을 시켜 확인해 보았지만 여전히
속도는 나지 않고 경유와 섞인 시커먼 냉각수가 바다위로 뿌려졌다.
이렇게는 더 이상 갈수가 없었다. 배를 전에 정박했던 평군도로 돌려
천천히 엔진에 무리를 주지 않은 채로 다가갔다. 배를 정박해놓고
일본으로 전화를 해도 한국으로 전화를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엔진에서 생긴 것 같았는데 일본에서 기술자가 와도 이 섬까지
와서 수리를 시키려면 2~3백만원은 족히 들겠고 한국에서 기술자가
온다고 해도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많이 들고 부속도 구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약 2시간 가량 섬에 배를 대어 놓고 생각했다. 엔진 룸을
열어 놓고 아무리 생각해도 실마리를 찾기 힘들었다. 일단 우리는
푹푹 찌는 배에서 내려 작은 가게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아이스크림부터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차가운 생수도 한통씩 사서
우리 배 옆의 어선에 올라 타 그 배의 조타석 그늘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곳에서 우리 배는 작은 어선한척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때 준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아버지 배 뒤에 있는 거 저게 뭐예요?”하고
손가락으로 우리배의 뒤를 가르쳤다. 물이 맑아 물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배에는 비닐과 가는 밧줄이 프로펠라 부근으로부터 물속으로
늘어 떨어져 있었다.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준호를 끌어안아 들어
올려 몇 번을 흔들어주었다. 그렇다.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저것인
것이었다. 나는 옷을 벗어 던지고 수경을 낀 채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스크류 부근에는 비닐과 가는 밧줄들이 엉켜 있어서 접이식 날개로
되어 있는 스크류 두 개 중에 하나를 칭칭 감고 있어 외날개로 회전을
하다보니 배의진동도 많았고 엔진에 무리도 가게 되어 검은 연기와
경우를 쏟아낸 것이었다. 프로펠라가 있는 위치로부터 배의 위까지
전체를 밧줄로 빙 둘러 탄탄하게 감은 뒤 그 밧줄을 잡고 물속으로
들어가 스크류를 감고 있는 이 왠수같은 것들을 칼로 잘라 제거 시켰다.
그런 다음 배를 시운전 해보니 마치 날개를 달아 올린 것 같이 물속을
시원하게 미끄러져 나갔다. 시운전과 동시에 출항하여 3시간쯤
항해하여 축도에 도착하였다. 섬은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세대수도 많고
항내의 선박도 많았다. 섬 주민들과 해상보안청 아저씨가 나와 정박한
장소를 친절히 안내해 주었고 한 아저씨는 자기의 집 앞 화분에서
기른 듯 한 토마토를 몇 개 주고 갔다. 조금 뒤 순경아저씨는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고 그 다음부터 그 아저씨와 아주 힘든 확인 또
확인 작업을 밤 10시까지 계속해야만 했다. 거의 인내력이 다되어
주먹다짐이 오갈 뻔 할 때쯤 그 아저씨는 ’쓰미마쌩‘ 이란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다섯째 날 아침 일찍 그 친절하고 철저하고 업무진행이
조금 느린 순경아저씨가 나와 우리에 밧줄을 풀어 주었다. 일본사람
들의 내면세계를 조금 들어다 보는 것 같았다. 배는 곧장 주방난만을
항하여 나아갔다. 시모노세키 관문해협을 향해 마지막 내만의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항로 중에는 부표나 그물이 거의 없었고
항로와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 부근을 지나는 선박도 거의 없었다.
평안하고 기분 좋은 항해를 9시간정도 계속하여 관문교 앞에 도착했다.
첫 번째 항해에서 워낙 심하게 정신적으로 시달린 지역이라 관문교를
향해가는 마음은 다가갈수록 불안감을 더했다. 오후3시경 관문교
입구에 다다르자 예전처럼 표시판에는 조명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W" 서쪽으로 ”“나가는 조류 ”3“3노트....다시 말하면 서쪽
으로 그러니까 대한해협 쪽으로 나가는 조류방향을 타고 시속3노트로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가장 편안하게 관문해협을
지나갈 수 있는 좋은 상태였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관문교 해협은
대한해협 쪽으로 나가면서 왼쪽항로 끝엔 적색항로표시가 우측 끝에는
녹색항로 표시가 되어있었다. 오른쪽 녹색표시판 조금 안쪽으로
그러니까 항로를 조금 벗어나서 나아갔다. 항로 밖이었으므로 수심이
낮을 지도 몰라 최대한 항로 쪽으로 붙어서 가려고 애를 섰다.
그러나 관문대교를 1키로미터 정도 앞두고 갑자기 배가 물속에서 아주
굵은 밧줄이라도 걸린 것처럼 정지하며 선수 쪽이 물속으로 쭈-욱 빨려
들어가며 정지해 버렸다. 아니 실제로는 정지했는지 뭔가에 끌려가는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배를 후진시키고 있었다. 생각을
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전속후진이었다. 물살이 배를 계속 관문교쪽으로 밀고 있었지만
배는 조금씩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십미터쯤 배를 후진시킨 후
배를 180도 돌려 오던 길로 1킬로미터 쯤 도망치듯 되돌아 나왔다.
귀신에 홀린 것인가..물밑에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마음을
진정시키는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곤 원인은 바깥쪽의
수심이 낮은 지역의 모래뻘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관문교를
다가갈 쯤 우측으로 완만하게 보이는 모래사장같은 것이 보였는데
생각해보니 거기서부터 밑바닥이 완만하거나 아님 새로 만들어진
모래턱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30분쯤 해협 속으로 점잖게 오가는
대형선박들을 보고 있다가 해협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항로
안쪽길을 택했다. 거대한 상선들이 많이 다녔지만 해협의 속도제한
때문인가 그로인한 파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우측편으로 보이는
시모노세키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 우측으로 꺾어 해협을 따라
돌아가다 항로를 가로질러 16시 30분경 고꾸라항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세관 앞에 잠시 배를 묶어두고 세관으로 뛰어갔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제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출항신고를 이곳에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관에서 출항신고를 마치고 다시 출입국
관리소로가 여권에 출국스탬프를 받았다. 내일아침 8시까지 일본을
떠난다는 조건이었다. 세관도 같은 시각까지 허락을 받았었다.
나는 공중 전화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내일의 날씨를 물었다.
파도가 1미터쯤 치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과
작은 마트 등에 가서 필요한 것을 보충하였다. 여섯째 날 아침을 해먹고
8시경 항해를 시작하였다. 고쿠라로 부터 부산까지 약 133마일
정도였다. 20시간이 조금 넘게 항해하여야 할 것으로 예상 되었다.
GPS에 최종점인 부산 요트경기장을 입력하고 그 점으로부터 시모노
세키까지 직선상에 줄을 그은 뒤 중간중간에 좌표를 찍어 입력하였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쓰시마의 북단 쪽 항구 한곳과
시모노세키와 쓰시마 사이에 있는 작은섬인 오키노시마의 좌표를
입력해 두었다. 그리고 나서 맑은 하늘아래 잔잔한 바닷길을 따라
부산을 목표점으로 하고 나아갔다. 한시간 쯤 넓은 바다를 쪽으로
나왔을까 날씨는 최고였다. 산들바람에 엷은 파도 이런 바다가 있어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트롤링 낚시를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보조돛과 메인세일을 모두 올리고
시원한 바다를 기분좋게 미끄러져 나아갔다. 시모노세키 앞쪽에 있는
섬을 벗어날 무렵 바다멀리 앞쪽에 약간 큰 구름띠가 나타났다.
바람이 조금 시원해졌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보조돛을 내리고 훌쩍 앞쪽으로 다가온 검은 구름을 보고서도 잠시
지나가는 구름이겠거니 했다. 일본 내만을 항해할 때도 그랬다.
어느덧 구름이 다가와 한두 시간 가량 비바람을 몰아치고 가곤 했으니까
잠시 후 시커먼 구름 밑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강해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주 돛을 내릴 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만
견디자 금방 지나가겠지 나는 조금 있으면 지나가겠지 생각하고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파도는 3~4미터를 넘고
있었고 강한 바람이 요트를 눕히고 있었다. 이미 바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준호는 선실에서 잠자고 있었고 나는 혼자서 세일을 내릴
찬스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파도는 거칠게 몰려오고 바람은 배위의
모든 줄을 울려대며 으르렁 거렸다. 굳이 세일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바람과 비켜서기라도 하면 뱃전까지 배가 기울어 졌다. 세일을
당겨두고 있으면 잘못하면 배가 뒤집힐 것 같았다. 나는 배를 파도와
비스듬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파도를 타고 넘었다. 그리고 돛을
조정하는 줄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강풍에 세일이 찢어질 듯 무섭게
펄럭거렸다. 하지만 배의 기울어짐은 훨씬 덜했다. 그러나 배가 물마루
위로 올라갔을 땐 바람이 배의 측면을 밀어붙여 배가 옆으로 45도 쯤
기울어 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돛이 바람을 받는 것을 막아 최대한 배를 적게 기울이며 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통에 선실에서 준호가 기어 나왔다. 멀미를 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소리쳤다.“빨리 들어가! 여기나오면 죽는다 말이야 ”
“너 빠지면 죽어”
안에서 싱크대에 토하란 말이야!!!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아들은 싱크대를 잡고 위액 아니 노란
똥물까지 쏟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비바람은 몰아치고 세일은 미친
듯이 펄럭이며 날뛰고 파도는 뱃전을 막고 올라와 조타석 쪽으로
퍼부어댔다. 이런 와중에 아들이 또 밖으로 나와 얼굴을 내밀었다.
이 상황에서 준호는 밖에서 소변을 보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들어가! 들어가란 말이야! 안에서 해결해!”
나는 틸러를 잠시도 놓고 있을 수 없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워낙
높은 파도와 비바람이 몰아 쳐대어 틸러를 놓으면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주 돛마저 가운데가 찢어지며 두 동강이
나버렸다. 세일의 장력으로 평행을 유지하고 있던 붐 대가 갑판위로
떨어졌다. 나는 엔진속력을 완전히 줄였다. 그리고는 반쯤 바깥쪽으로
떨어져 밀려나있던 붐 대를 생명선 안쪽으로 당겨 넣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는 풀어진 축범 줄과 찢어진 돛이 뒤로 날리며 얼굴과 몸을
채찍처럼 내려쳤다. 쏟아지는 파도도 더욱더 못 견디게 괴롭혔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속도를 완전히 정지시키고 입에 칼을 물고
마스터부근까지 기어가 한손으론 마스터를 잡고 나머지 한손으로 입에
물고 있었던 칼을 쥐고 주 돛을 끌어올리는 메인 헬려드와 축범줄
그리고 아웃 폴을 당겨주는 로프를 모두 잘라버렸다. 불과 몇 초 만에
일이었다. 그러자 돛이 세찬 바람을 맞으며 배 뒤 쪽으로 날려 가버렸다.
아비규환 같은 펄럭거림도 없어졌다. 그러나 이대로 부산 쪽으로 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GPS에 목표지점을 오키노시마로 변경하였다. 남은
거리는 23마일이었다. 배의속도는 시속3노트정도였다. 그럼 8시간을
이 미친 바다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이 11시를
조금 넘었으니 잘못하면 아무런 정보도 모르는 섬을 야간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무서움이 뇌리를 스쳤다. 어쨌든 선택에 여부가 없었다. 배를
오키노시마로 향했다. 방향을 돌리자 파도를 타기가 훨씬 쉬워졌다.
그러나 나는 오키노시마 항이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제발 선착장이
있기만을 빌었다. 죽기 살기로 찾아간 섬에 포구가 없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는 것일 것이다. 속도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악몽 같은 폭풍우속을 6시간동안 항해하여 오키노시마가 보이는 1마일
부근까지 도착했다. 비바람과 짙은 구름으로 아직 초저녁인데도
어둑어둑했다. 눈을 씻고 보아도 항이나 방파제 같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나 이제 어떡하나 거의 500M쯤 가까이 다가
갔을 때도 방파제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없구나! 없어" 가슴이 철렁 내려
않았다. 지금부터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게 마냥 망설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여기서 계속 부산 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섬을 돌아가 바람과
파도를 피할만한 곳에 앙카를 내리고 있다가 바다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다시 항해를 계속 할 것인가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나는 섬 뒤쪽에 앙카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이런 파도를 뚫고 혼자서 20시간이상을 계속 항해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하고 난 뒤 나는 배를 섬 뒤쪽을 향해
돌렸다. 그러고도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암초대와 본 섬 사이를 아쉬운
마음으로 유심히 보며 지나갔다. 그런데 방향이 돌아서자 희미하게
하얀 벽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조금씩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암초를 염려하며 나아갔다.
맞았다 그것은 방파제였다. 오키노시마에는 항이 있었다.
“이제 살았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이때의 안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섬으로 더 다가서자 양쪽으로 높게 쌓아 올려진 방파제와 그 입구
바깥쪽에 정면 파도를 막아주는 일자형으로 된 방파제 겸 인공섬이 있었다.
그사이에는 밀려드는 큰 파도의 영향으로 태풍 때 백사장의 파도처럼
물마루가 높이 올라가며 바닷물을 쓸고 다녔다. 조심스럽게 파도를 타고
들어가며 그 사잇길로 파도를 따라 쓸려가다 오른쪽으로 급회전하여
오키노시마 항으로 들어섰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섬 안은 몇 십 척의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배를
접안한 후 선착장에 두 겹 세 겹 묶었다. 항내에도 바람과 파도의 영향은 상당했다.
묶어놓은 줄 때문에 선채의 앞뒤는 고정되어 있었지만 마스터와 배 옆을
후려치는 바람으로 배가 몇 십도씩 드러누웠다 일어서길 반복하고 줄도
터질 듯이 탱탱해졌다 느슨해졌다를 배의 움직임에 따라 반복했다.
그러나 우리는 선실양쪽의 의자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배가 아무리
출렁거려도 잠은 왔다. 얼마나 잤을까 정신을 차려 일어나 보니
밤이었다. 선착장위에는 집이 한 채 있었는데 불이 밝혀져 있었다.
누군가가 이 섬에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계속 잤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우리는 피항지를 찾아 들어왔으니 괜찮았지만 지금부터는 집이
문제였다. 오늘 아침에 도착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집에서는
날씨가 나빠져서 심상치 않은데 배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 마음이 오죽할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저녁이 되어도 계속 돌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되면 가족들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이렇게 무사한 것을 알리지 못하는 마음 또한 괴로운 것이다.
바다는 뒤집혀져 있는데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해경에 신고를 하게
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해경과 해군이 또 우리를 수색하러 온 바다를
헤매고 다닐 테고 집사람은 자식까지 데려간 나를 원망하며 울다가
쓰러질 것이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어제 불이 켜져 있던 집으로 갔다. 굳게 닫힌 문에 대고 노크를
몇 번 해보았지만 대답이 없어 하는 수없이 문을 열고 불렀다.
"누구 없어요? 누구 없어요?"
몇 번을 그렇게 부르자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몸집 좋은 아저씨가
나왔다. 이미 어제 저녁에 정박되어 있는 배를 보았는지 그렇게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들어오라는 몸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염치불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쪽 마루에는 사무실 겸 식탁의 용도로 사용되는 소파가 있었고
안쪽에는 가운데에 복도가 있고 좌측에는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우측에는 방이 2칸 있었다. 일단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간 우리는
소파에 앉았다. 이때 나는 일본어실력이 초보 수준이었기 때문에 온몸을
사용하여 피난하게 된 사정과 출발지와 도착지를 설명했다. 그리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한문을 적어가며 이야기 했다. 30분정도 걸려
우리의 피항에 관한 얘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등대지기 아저씨는
얘기를 다 듣고는 무전기를 통하여 후쿠오카의 해상보안청과 연락하여
외국선박의 피항에 대한 보고를 했다. 보고를 끝내고 앉은 아저씨에게
나는 이번에는 우리가 오늘 도착하지 못했을 때 우리가족과 한국의 바다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고 난 그는 다시 해상
보안청을 무전으로 불렀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무전기를
통하여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보안청 직원과 현재 상황을 얘기
한 뒤 무전기를 통하여 집과 연결이 되었다. 무전기를 통하여
전화수화기에서 나오는 음성이 너무 작게 들렸기 때문에 나는
고함을 질렀다.
"여기 시모노세키와 쓰시마섬 중간에 있는 오키노시마라는
섬인데 이곳에 피항해 들어와 안전하게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뭐라고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겪었던 일보다 더 큰 난리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등대지기 아저씨는 어린학생이 염려되었는지 밤에 잠은 마루에서
자고 좋다고 해 날이 좋아 질 때까지 며칠간 신세를 지기로 했다.
항이 있을까 걱정하고 들어온 섬이었지만 이젠 편히 쉴 수 있는
잠자리까지 생긴 것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소식도 전하고 나니
그때서야 섬에 놀러온 것 같은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그쳤지만 바람과 파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번 구름은 그냥 지나가는 구름띠가 아니라 강풍을 동반한
온난전선이었다. 이런 사나운 기상은 이틀이나 더 계속 되었다.
그러고도 그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리고 그 뒤를 태풍이
따라왔다. 그 태풍은 큐우슈우 남쪽으로 지나갔지만 바람과 파도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오키노시마를 강타했다. 항내에서조차 묶어
놓았던 우리배의 줄이 터져 나갔다. 우리는 좀더 안정된
곳으로 배를 옮기려고 항내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배를 바람과
일직전상에 두어 배를 조금이나마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 와서 어디든 흔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곳 오키노시마항은 종교제단 소유의 섬으로 등대지기 한명이
섬을 지키고 있었다. 섬의 푯말에 한국말로 “섬에 상륙하지 말고
낚시도 하지 말고 쓰레기는 가져가라”는 안내문과 중국말로
되어있는 푯말도 꼽혀있었다. 이러한 것을 이곳에 궂은 날씨로
피항을 오는 배가 가끔씩 있는 모양이었다. 오키노시마에 피항한 후
4일째가 되는 날부터 일본의 오징어 배들과 어선들이 낮 동안의
휴식을 위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풍랑주의보가 해제된
모양이었다. 섬으로 들어온 일본 어부들은 초라한 우리 부자를
발견하고는 식사시간에 초대도하고 식료품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심지어 참치 한 마리를 통째로 주기도 하였다. 4일간
계속되는 강풍을 맞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이 섬에 오던 날 부산으로 계속 갔다면 죽을 고생을 하고서라도
부산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섬 뒤에 앙카를 내리고 피항을
했더라면 바로 코앞에 이렇게 좋은 항구가 있는 것도 모른 체
낭패를 당하였을 것이다. 낮에 올라가
확인한 남쪽지역은 여기저기 암초가 숨어있는 지뢰밭과도 같은
곳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여 소름이 쫘-악 끼쳤다. 바람은
지독히도 잦아지지 않았다. 섬에 서 있는데도 바람에 밀려 다녔다.
그렇게 오키노시마에 피항하여 생활한지 6일째 되던 날 아침 우리는
뒷산으로 올라가 탈출을 앞둔 빠삐용 같은 심정으로 파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2.5~3미터의 파도에 백파가 바다를 가득 덮고 있었고 파도는
방파제와 부딪히며 부서져 하늘로 솟아올랐다. 무섭고 두려웠다.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고 싶었다. 10시를 넘어서자
파도가 조금 잦아드는 것 같았다. 우리 부자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다소 부담스러운 파도였지만 출항 준비를 하고 바다로 나갔다.
섬의 앞쪽을 돌아 부산 쪽으로 방향을 돌려 2시간 정도 나아갔다.
처음에는 2미터정도 치던 파도가 어느새 3미터를 넘어서고 있었다.
파도가 점점 높아지는 걸 보고 배를 돌렸다. 오키노시마로 다시 돌아
갔다. 날이 더 좋아질 때 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피항한 지
일주일째 된 날 아침 또 기상을 체크했다. 날씨가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계속 기다리다 보면 이보다 더 좋은날은 있겠지 그러나
부산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이 섬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우리를 바다 쪽으로 향하게 했다.
8시경 다시 한번 오키노시마를 출발하였다. 파도는 2~2.5미터를 치고
있었지만
백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갈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부산을
향해 나아갔다. 일본오사카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아들에게 군가를
몇 가지 가르쳐줬다. 내가 무서워 부르다보니 아들도 같이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전우여 잘 잤느냐 어젯밤 꿈속에서”
“높은 산 깊은 물을 박차고 나가는 사나이 진군에는 밤낮이 없다.”
등등 군가를 크게 부르다 보면 두려움도 많이 없어진다.
내가 선창을 하면 아들은 따라 부르고 하면서 솜털같은 흡수력으로
금방 노래를 외워버렸다. 이렇게 오키노시마로부터 12시간 가량을
항해하여 밤9시경 부산근처에 도착했다. 환하게 불을 밝힌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야경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들과 나는 서로 손을 부딪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악수도 나누었다. 수고했다. 해내었다.
살았다. 그런 마음의 인사였을 것이다. 그 후 2004년 여름 방학 준호는
다시 한번 오사카에서 부산까지 아버지를 따라 항해한 뒤 이제는 요트장
부근에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나는 언젠가 준호가 요트장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첫댓글 전에 읽고 오늘 다시 읽어도 찡합니다. 혼자서 항해를 한다면 내만은 모르겠지만 원도는 아무래도 2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읽을 때마다 오타가 있군요..다시 한번 읽을 때 마다 저도 그때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내년에 동북아 크루징을 하고 싶은데 계획대로 잘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윤선장님의 강인함에 탄복할 뿐입니다. 대양항해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없이 값진 산 자료가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처음가입하고 글을 읽었습니다 가슴찡한 이야기군요 저도 배를 한척 소유하고 운항하고 싶어 관심이 많은데 강선장님과 같이 강해질수 있을까 반문하고 있습니다 자주들려서 눈동냥 하겠습니다
네 환영합니다...부지런히 항해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아.
고맙습니다. 자주들러 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마지막 부분이 너무 가슴을 켕기게 하는군요,....너무 ,.너무 감동스럽고,.윤선장의 열정과 아들과의 벌인 사투의 바닷폭풍이 금방이라도 일어나 덥칠것 같은 글들입니다,.................아름답습니다,....존경스럽습니다,..!
이렇게 까지 표현해 주시닌 제가 더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대략 감동 입니다.ㅠㅠ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편소설을 한편 읽은것보다 더욱더 감동이 밀려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