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정주영씨는 무슨파인가요??
하동정 목사공파 정모좀 주세요.
답변 : 님과 계파가 다른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하동정씨 문헌공파입니다.
하나! 정확하게 문헌공라는 라고하나 고증할 수는 없습니다. 이북에서 넘어와 잘 모를 경우도 있구요. 같은 집안사람이 맞다고도하고 아니라고도 하지요.
하동정씨(河東鄭氏) 역대인물은 정도정 정인지 정순위 정수충
현재 재벌가 및 인물은 정주영 정한모 정몽준 정석채 정태현 정재설 정몽구 정병채 등
목사공파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한다하더라도 분파된 파입니다.
아래는 하동정씨 정보입니다.
하동 정씨(河東鄭氏)에 대(對)하여
1. 시조(始祖) : 정도정(鄭道正) 정 응(鄭 膺) 정손위(鄭遜位)
2. 유래(由來) :
하동정씨(河東鄭氏)는 고려(高麗) 숙종(肅宗) 때부터 명종(明宗 때까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던 손위(遜位)를 시조(始祖)로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1명 등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 58명을 배출(輩出)했다. 조선(朝鮮) 전기(前期)에는 세종(世宗)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編纂)한 초(招), 세종(世宗)~세조(世祖) 때 학자(學者) 인지(麟趾), 세종(世宗) 때 수충(守忠), 성종(成宗) 때 여창(汝昌) 등(等)이 특(特)히 돋보인다. 중기에는 광해군 때 택뢰(澤雷),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봉수(鳳壽)·기수(麒壽) 형제(兄弟), 당대(當代)의 뛰어난 서예(書藝)가였던 경흠(慶欽)과 충엽(忠燁), 지리학(地理學)자로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상기(尙驥) 등이 있다.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연원을 알 수 없는 여섯 계통(系統)으로 분류(分類)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하동정씨(河東鄭氏) 의 후손(後孫)들은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3파(派)가 있다.
첫째 계통(密直公 國龍派)의 시조(始祖) 정도정(鄭道正)은 신라(新羅) 진성왕(眞聖王) 때 하동지방의 호족(戶族)출신(出身)으로 923년(경명왕 7) 후백제군이 신라(新羅)를 침범할 때 하동호장(河東戶長)이 되어 향병(鄕兵)을 단련하여 하동성(河東城)을 지켰다. 그 뒤 고려(高麗)로 통합(統合)될 때는 경순왕(敬順王)을 개성까지 호위(護衛)하여 내의성상시(內議省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어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일세조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둘째 계통(政丞公 膺派)의 시조(始祖) 정응(鄭膺)은 고려(高麗) 덕종(德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한때 태자관(太子官)의 첨사(詹事)를 맡기도 했다.
셋째 계통(知部事公 遜位派)의 시조(始祖) 정손위(鄭遜位)는 고려(高麗)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명종(明宗) 등 5왕조에서 벼슬을 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예부사(知禮部事), 응양대장군(鷹揚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하동(河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정세유(鄭世裕)는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3.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정도정(鄭道正) 후손(後孫) 분파(分派)는 9세손(世孫)인 정난(鄭難)의 후손(後孫)이 산원공파(散員公派), 정 침(鄭{王+冗})의 후손(後孫)이 흥의공파(興義公派)이고, 하성부원군 정흥인(鄭興仁)의 아들 정인지(鄭麟趾)의 후손(後孫)이 문성공파(文成公派)이다. 이 파는 그 아들 대(代)에서 다시 익위공파(翊衛公派), 하성위공파(河城尉公派), 장정공파(莊靖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로 나누어진다. 정흥안(鄭興安)의 후손(後孫)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정흥도(鄭興道)의 후손(後孫)이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졌다. 8세손(世孫) 정을진(鄭乙珍)의 후손(後孫)이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나누어졌다. 정난연(鄭蘭衍)의 후손(後孫)은 증손(曾孫) 정지(鄭地)와 정전(鄭㙉)의 대(代)에 경열공파(景熱公派)와 병사공파(兵使公派)로 나누어졌다. 또한 정국교(鄭國僑)의 후손(後孫)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리(分離)되었다.
정승공 정응(鄭膺)의 후손(後孫)은 6세 휘(諱) 희(熙)까지 단일 계통(系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아들 셋 (휘 抱; 휘 招 : 휘 提)과 그의 증손(曾孫)들을 파조(派祖)로 하여 여러 파(派)로 분리(分離)되었다. 곧 휘(諱) 포의 장손(長孫) 휘(諱) 정서생(鄭瑞生 9세)의 후손(後孫)이 한림공파(翰林公派)로, 휘(諱) 초의 장손(長孫) 휘 맹손(鄭孟孫 9세)의 후손(後孫)이 주부공파(主簿公派)로 된 것이다. 그리고 3남 휘 제의 아들 하원군, 문절공 휘 수충(河原君, 文節公 諱 수충(鄭守忠, 1401-1469; 8세)의 아들 아홉(和 稷 穩 穆 積 稠 稑 稅 稛) 을 중심(中心)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졌다.
익위공파(翊衛公派)
파조(派祖)는 휘(諱) 광조(光祖)이며 문성공(文成公)의 제1子파이다. 광조(光祖)께서는 1416년(태종 병신)생으로 돈녕부첨지 절충장군, 용양위대호군, 세자장릉 좌익위(左翊衛)를 역임(歷任)하였다. 세조(世祖) 정축지변에 절립자정(絶立自靖)하시었다. 자는 다음과 같으며 그 후손(後孫)들은 전라남도(全羅南道) 해남과 충남(忠南) 논산 등지에 世居하고 있는데 2006년도 문성공파(文成公派) 병술(丙戌) 족보(族譜)에 1천여명이 등재되었다. 묘는 남양주군 별내면 화접리 주을동이라 하나 고증이 없어 설단 향사하다.
배위는 숙부인 죽산안씨이며 세종의빈(世宗儀賓)연창위(延昌尉)양효공맹담(良孝公孟聃)의 女로
묘는 합폄(合窆)이다 자(子)는 승은(承恩)이다
○승은(承恩)은 1433년(세종 계축)생이며 1451년(문종 신미)에 문과급제하여 1454년(단종 갑술)에 통정대부, 1457년(세조 정축)에 동래부를 다스리다가 부친상을 당했고 문성공의 밀교로 솔권해상(率眷海上)하고 남해촌(해남)에 정박하여 자호(自號)를 해은(海隱)이라 했으며 두문사객 하다가 1509년(중종 기사)에 졸(卒)하니 수는 77세이었다.
묘는 해리산 경좌
○배는 숙부인 여흥민씨. 묘는 부(祔). 자는 경문(慶門)이다.
하성위공파(河城尉公派)
파조는 휘 현조(顯祖)이며 문성공(文成公) 제 2子파이다. 현조께서는 1440년(세종 경신)생이며 世祖의 의숙공주(懿淑公主)와 혼인(婚姻)하여 등연영과제삼(登筵英科第三)하니 의빈부등제는 대개 특별한 은사다. 책추충보사(策推忠保社) 정난익대(定難翊戴) 순성명량 경제홍화좌리공신 유록대부 의빈부 의빈, 하성부원군이다.
성종시 참결대책녹훈일등이고 1504년(연산 갑자)에 적어안악(謫於安岳)하여 적소에서 돌아가시니 수가 65요 중종이 반정복관예장 했으며, 증시는 빈정공(빈玎公)이다.
묘는 고양 연희면 가좌동 해좌이고 의숙공주는 공묘상이었으나 임오년 의왕시 초평동 이교산 상봉 신좌 을향으로 천묘하여 합폄했다. 임인년 신도비를 수립하고, 1997년(정축)에 재실을 건립하여 김포 검단면 대곡리에 있던 사우를 1999년(기묘)에 초평동으로 이전했다.
또한 배 정경부인 우계이씨는 전직(典直) 증이참(贈吏參) 징(徵)의 여로써 의빈은 재취지례무(再娶之例無)나 상의 특명으로 윤허되었으며 묘는 광주 신원이고, 자는 다음과 같다. 그 후손들은 경기도 의왕시와 김포지방에 世居하고 있으며 2006년도 병술족보에는 1천여명이 등재되었다.
○승수(承秀) : 부호군(副護軍), 묘는 신원, 배는 충주박씨 자는 언백(彦伯)
○승영(承英) : 장사랑(將仕郞), 묘는 양주 이답면, 자는 광(廣)이다.
○승장(承장) : 성종 갑인(1494)생, 사헌부감찰 명종 기유(1549)졸. 묘는 군포 부곡동 탄현 경좌
배는 전주이씨, 묘는 공묘하 배 고령신씨, 묘는 쌍분, 자는 류(瑠)이다.
○승화(承華) : 자 충(忠) 신(臣)
○승란(承蘭) : 자 경(瓊) 영(暎) 림(琳)
○승무(承武) : 자 적(籍) 간(簡) 전(箋)
○승범(承範) :
○승온(承蘊) : 사역정(司譯正)
○승동(承董) : 예빈첨정(禮賓僉正) 자 요(堯) 순(舜) 우(禹) 직(稷) 기(夔)
장정공파(莊靖公派)
파조는 휘 숭조(崇祖)이며 문성공(文成公) 제 3子파이다. 숭조께서는 1442년(세종 임술)생이며 17세에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올라 전첨사간을 거쳐 이·공·형 3참판을 역임하고 성종대왕에 이르러 순성명양좌리공신에 봉작되다. 오위도총부도총관, 판한성부윤, 일지의금부사를 거쳐 이조, 호조판서와 경상도 관찰사 경기국제 순찰사를 제수받으니 관계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2품에 이르고 장정(莊靖)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지양(知楊) 근(根)의 여로 졸묘미상이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평양조씨로 판관(判官) 충노(忠老)의 여이며 묘는 공묘위에 있으며 자는 6자를 두었다
그 후손(後孫)들은 경상도(慶尙道) 하동 함양 경기도(京畿道) 파주 시흥 화성 충청도(忠淸道) 진천 부여 전라도(全羅道) 영암 강진 나주지역 등 전국 각 지방에 고루 분포되여 있으며 2006년도 병술족보에는 2만여명이 등재 되는 등 문성공파 종중 중에서도 제일 번창하고 왕성한 문중이다
공의 묘는 경기도(京畿道) 시흥시 광석동 201번지 속칭 취곡 갑좌이다.
ㅇ 승충(承忠) : 1467년(세조 정해)생, 생원, 정략장군, 1549년(명종 기유)졸 수 83세 ○배 영인 전주이씨
배 영인 평산신씨 자 응년(應年) 대년(大年) 개년(開年)
ㅇ 승효(承孝) -별제공파(別提公派) 파조로 별제공파 참조
ㅇ 승염(承廉) -참판공파(참判公派) 파조로 참판공파 참조
ㅇ 승근(承謹) -감찰공파(監察公派) 파조로 감찰공파 참조
ㅇ 승겸(承謙)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로 진사공파 참조
ㅇ 승동(承東) -참의공파(참議公派) 파조로 참의공파 참조
별제공파(別提公派)
파조는 휘 승효(承孝)이며 문성공(文成公)의 3자인 장정공의 2자파이다. 1469년(예종 己丑)생이며 생원에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를 역임하고 통정대부를 증직받음 1528년(중종 戊子)에 졸하고 묘는 장정공 묘역내 갑좌임
배위는 숙부인 교하노씨로 동영공(敦寧公) 유(裕)의 여이고 묘는 합폄이다
자(子)는 홍좌(弘佐), 홍필(弘弼), 홍보(弘輔), 홍우(弘佑), 홍익(弘翼)
참판공파(參判公派)
파조는 휘 승염(承廉)이며 문성공(文成公)의 3자인 장정공의 3자파이다 1475년(성종 乙未)생이며 무과급제하여 어모장군부호군(禦侮將軍副護軍)을 역임하고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을 증직 받음. 1546년(명종 丙午)에 졸하고 묘는 장정공묘역내 간좌임
배위는 증 정부인 언양김씨로 부사(府使) 극장(克鏘)의 여이고 묘는 합폄이다
자(子)는 인국(仁國), 의국(義國), 예국(禮國), 신국(信國), 원국(元國), 형국(亨國)
감찰공파(감찰공파)
파조는 휘 승근(承謹)이며 문성공(文成公)의 3자인 장정공의 4자파이다 1476년(성종 丙申)생이며 생원을 거쳐 음 사헌부감찰(蔭 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을 증직 받음 1555년(명종 乙卯)에 졸하고 묘는 장정공묘역내 묘좌임
배위는 증 정부인 전주이씨로 양록부정(楊麓副正) 수(粹)의 여이고 묘는 공묘후이다
자(子)는 식(式), 욱(彧)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는 휘 승겸(承謙)이며 문성공(文成公)의 3자인 장정공의 5자파이다 1480년(성종 庚子)생이며 진사(進士)를 역임 묘는 장정공묘계하이고 배위는 진주하씨로 영청(永淸)의 여이고 묘는 합폄이다
자(子)는 무(武), 계(戒), 희(羲), 홍명(弘溟)
참의공파(參議公派)
파조는 휘 승동(承東)이며 문성공(文成公)의 3자인 장정공의 6자파이다 성균진사로 문과 통정대부 사복시정을 역임하고 호조좌랑을 거쳐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다 연산갑자사화(燕山甲子士禍)로 피적우이성(被謫于利城)하다
묘는 단천(端川)
자(子)는 경익(卿翼)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파조(派祖)는 휘(諱) 경조(敬祖)이며 문성공(文成公) 제 4子파이다. 경조께서는 1455년(세조 乙亥)생이고 1474년(성종 甲午)에 사마시에 乙巳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세종왕자(世宗王子) 계양군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평안도 관찰사(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事)가 되였다 그 후손(後孫)들은 충청도(忠淸道) 괴산, 공주, 경기도(京畿道) 포천, 고양과 전라도(全羅道) 순천 강원도(江原道)의 평창등지에 世居하고 있으며 2006년도 병술(丙戌) 족보(族譜)에는 4,000여명이 등재되여 있다
1498년(연산 戊午)에 졸하고 묘는 경기(京畿) 양주군 별내면 화접리산29 유좌였으나 2006년 정부(政府)의 공공주택 개발계획(開發計劃)에 의거 공과 배의 묘소를 충청북도(忠淸北道)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산 4 곤좌 간향으로 이전함
배위는 정부인 여흥이씨로 병판경헌공(兵判敬憲公) 계손(繼孫)의 여이며 묘는 합폄이다
자(子)는 승희(承禧), 승우(承祐), 승상(承祥), 승종(承宗)
ㅇ 승희(承禧) : 현감(縣監) 묘는 고묘계하 유좌 배는 廣州李氏 묘는 쌍분
자는 인옥(仁沃), 인제(仁濟), 인흡(仁洽)
ㅇ 승우(承祐) : 봉정대부행사복시정(奉正大夫行司僕寺正) 증 병조참판(贈 兵曹參判)
묘는 고양 지도면 행신리능곡역후 갑좌
배는 증 정부인밀양박씨 묘는 쌍분
자는 인손(仁孫), 현손(賢孫)
승우(承祐), 인손(仁孫) 우대우위(兩代兩位) 묘소를 괴산군소수면 아성리
감역공(諱 舜賓-仁孫의 2자) 묘위로 1988년(戊辰)에 이묘함
ㅇ 승상(承祥) : 進士 배는 고령신씨(高靈申氏) 계자는 현손(賢孫)
ㅇ 승종(承宗) : 進士 배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졸묘미상
혹운공몰우임진란중(或云公歿于壬辰亂中) 자는 득남(得男)
찬성공파(贊成公派)
파조(派祖)는 휘(諱) 상조(尙祖)이며 문성공(文成公) 제 5子파이다. 상조께서는 1459년(세조 己卯)생이고 보공장군부호군을 지내시고 증 숭정대부(贈 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었다. 1491년(성종 辛亥)졸하고 묘는 남양주시 퇴계원면 퇴계원리 산 46 계좌이다
배위(配位)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로 부정(副正) 온천(溫泉)의 여이며 묘는 공묘우 산기슭 간좌임
그 후손(後孫)들은 경기도(京畿道) 남양주, 충청남도(忠淸南道) 부여,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지방에 세거(世居)하고 있는데 2006년도 병술(丙戌) 족보(族譜)에는 1,000여명이 등재되었다
자(子)는 세룡(世龍), 세호(世虎)
ㅇ 세룡(世龍) : 1483년(성종 癸未)생. 여절교위(勵節校尉). 1503년(연산 癸亥)졸
묘는 남양주퇴계원면에서 부여읍 능산리 산 30으로 이장
배는 전주이씨 , 묘는 합폄 , 자는 창손(昌孫)
ㅇ 세호(世虎) : 1486년(성종 丙午)생, 1516년(중종 丙子) 진사(進士), 己卯에 문과하여 吏,禮,兵曹의 左郞, 지제교(知製敎) 직제학(直提學) 응교(應敎) 필선(弼善) 부제학(副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전라, 경상, 평안, 함길 4도관찰사(觀察使) 吏, 兵, 工, 刑, 戶曹등 5曹判書, 중추판의금를 역임 1563년(명종 癸亥)졸, 수는 78歲 , 선조즉위(宣祖卽位)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1762년(영조 壬午) 증시 효간(贈諡 孝簡), 1630년(인조 庚午) 급내수개수석물(給內需改竪石物) 정급수묘군십오명(定給守墓軍15名) 임명부조건사입비(任命不祧建祠立碑)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 묘는 부(祔)
자(子)는 창서(昌瑞), 홍수(弘壽), 곤수(昆壽), 강수(崗壽)
4. 가문의 번영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1명과 58명의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를 배출(輩出)하였다.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 정초(鄭招), 정인지(鄭麟趾) 등을 들 수 있다. 정초(鄭招)는 1405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及第),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그 후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예조(禮曹), 형조(刑曹), 이조(吏曹)의 참판(參判)등을 역임(歷任)하고 이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歷法)을 개정(改定)했다. 정인지(鄭麟趾)는 1414년 문과(文科)에 장원 1425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며 1427년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수재였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우의정(右議政)에 승진(昇進)하고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55년 세조(世祖) 즉위(卽位) 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정택뢰(鄭澤雷)는 1617년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제기하자 그 부당(不當)함을 논(論)하다 화(禍)를 입게 된 이지익(李之翼)을 극력 변호, 이이첨 일당을 죽일 것을 상소하여 어머니 강(姜)씨와 함께 남해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정봉수(鄭鳳壽)는 1592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이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왕(王)을 모신 뒤 1605년 무안현대장(務安縣代將)으로 흑산도(黑山島) 앞바다에 침입(侵入)한 왜군(倭軍)을 섬멸(殲滅)하였으며 1627년 정유호란(丁酉胡亂) 때에는 철산의 의병장(義兵將)으로서 큰 공(功)을 세워 그 공(功)으로 철산부사鐵山府事)에 특진(特進)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5.본관 연혁
하동(河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서부(西部)에 위치(位置)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 신라(新羅) 다사군(多沙郡) 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하동(河東)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남해현(南海縣)을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하다가 후(後)에 분리(分離)하였고 1702년(숙종 28) 섬강(蟾江)을 관문(關門)으로 삼고 진주(晋州)의 악양(嶽陽) . 화개(花開) 등이 이에 속하였다. 1703년(숙종 29) 치소를 진답면 두곡(豆谷)에 설치(設置)하고 1704년(숙종 30) 부(府)로 승격(昇格), 1730년(영조 6) 치소를 나동(螺洞)으로 옮겼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昇格)하였다.
1915년 곤양군(昆陽郡)의 서면(西面)과 금양면(金陽面)을 편입(編入)하였고 1939년 하동면(河東면)이 읍(邑) 으로 승격(昇格)되었다.
정초鄭招, ?~1434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의 문신(文臣). 1430년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있을 때 왕명(王命)으로 《농사직설》을 편찬(編纂)하였으며,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改定)하였다. 1433년 이천과 함께 혼천의를 제작(製作)했으며 《삼강행실도발》을 편찬하였다. 경사에 밝았으며 역산, 복서에도 통달(通達)하였다. 저서로는 《회례문무악장》 등이 있다.
6.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정인지(鄭麟趾, 1396 丙子生) : 문과(文科) 태종14년(1414)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정인지(鄭麟趾, 1396 丙子生) : 문과(文科) 세종9년(1427) 중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정희안(鄭希顔, 1396 丙子生)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희적(鄭熙績, 1541 辛丑生) : 문과(文科) 선조1년(1567)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동혁(鄭東赫,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영조5년(1729)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최성(鄭○成, 1745 乙丑生) : 문과(文科) 정조8년(1784)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홍서(鄭弘緖, 1571 辛未生) : 문과(文科) 인조6년(1628) 별시 병과(丙科)
정세보(鄭世輔, 1613 癸丑生) : 문과(文科) 인조20년(1642) 식년시 을과(乙科)
정항령(鄭恒齡, 1700 庚辰生) : 문과(文科) 영조19년(1743) 정시 을과(乙科)
정몽필(鄭夢弼, 1725 乙巳生) : 문과(文科) 영조38년(1762)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312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63명, 무과 38명, 사마시 130명, 역과 43명, 의과 21명, 음양과 8명, 율과 9명)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조선(朝鮮) 전기 문신 겸 학자. 조선 초기의 대표적(代表的)인 유학자(儒學者)로 세종(世宗)~문종(文宗) 대에는 문화(文化) 발전(發展)에, 단종(端宗)~성종(成宗) 대(代)에는 정치안정(政治安靜)에 기여하였다.
정수충鄭守忠, 1401~1469 조선 전기 문신. 세조(世祖)의 등극을 도와 좌익공신이 되었다. 제학으로서 하원군에 봉해지고, 의경세자가 죽자 3년간 수묘관을 지냈다. 이어 중추원첨지사를 거쳐 1463년 대사성이 되고 좌찬성에 이르러 치사, 봉조하가 되었다.
정여창 [鄭汝昌, 1450~1504] 조선 전기 문신 겸 학자.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하였다. 《용학주소》 《주객문답설》 《진수잡저》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었다.
정봉수 [鄭鳳壽, 1572~1645] 조선 중기 문신. 정묘호란 때는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철산의 의병장으로 용골산성에서 후금병사 절반 이상을 무찌르고 포로가 되었던 수천명의 동포를 구출하여 그 공으로 철산부사에 특진되었다.
정경흠 [鄭慶欽, 1620~1678] 예론에 밝았던 조선 후기 학자. 인물·난초·포도·매화·대를 즐겨 그렸고 글씨에도 뛰어나 《황여도(皇輿圖)》 《동여도(東輿圖)》를 편찬하였다. 문집에 《육오당일기》가 있다.
정충엽 [鄭忠燁, ?~?] 조선 후기의 서화가. 서예에도 능했으며 남종화법에 바탕을 두고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른 정선파 화가로 추측된다. 작품에 《헐성루망만이천봉도(歇惺樓望萬二千峯圖)》 등이 전한다.
정상기 [鄭尙驥, 1678~1752] 조선 후기 실학파의 지리학(地理學)자로서 전국(全國)을 답사하였다. 과학적인 백리척을 이용하여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하였다. 토지개혁에서부터 병사(兵事)·산업·재정·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日常生活) 전반을 실용적(實用的)인 이용 면에서 연구(硏究)하였다.
7. 대동 항렬표
世數 |
23世 |
24世 |
25世 |
26世 |
27世 |
28世 |
29世 |
行列 |
○烈(열) ○煥(환) |
在(재)○ |
○鉉(현) |
淳(순)○ |
○采(채) ○相(상) |
燦(찬)○ 炳(병)○ |
○基(기) ○均(균) |
世數 |
30世 |
31世 |
32世 |
33世 |
34世 |
35世 |
36世 |
行列 |
會(회)○ 鍾(종)○ |
○永(영) ○澈(철) |
集(집)○ 柱(주)○ |
○燮(섭) ○光(광) |
敎(교)○ |
○鎬(호) |
泰(태)○ |
8. 주요세거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대운리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일원
-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도창리
-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
-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오봉동
-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인평동
-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강하동
- 황해도 안악군 서하면 중도리
-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용운리
인 구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42,418명이 있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15만 8396명, 가구수 4만 9440가구로, 정씨의 7.9%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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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을 두 손 모아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