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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에 선정된 이성희 |
그러나 고려증권은 그런 일반적인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마술의 팀이었다.
고전하리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려증권은 초반부터 기세를 올렸다. '배구 9단' 박삼용의 쳐내기와 문병택의 호쾌한 백어택으로 4-1로 달아난 고려증권은 국내 최장신 센터 제희경의 키값에 눌려 4-6 두 점차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후로는 별다른 위기를 맞지 않았다.
9-5로 앞선 상황에서 강성형의 스파이크와 문병택의 공격범실로 6-9로 추격 당해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박선출의 B속공, 이수동의 빠른 C속공과 때맞춰 나와준 김성현-마낙길의 범실에 편승해 점수를 12-6으로 벌렸다. 사실상 승부가 결정됐던 것이다.
이어 최성영이 임도헌의 공격을 막아내 14-7 매치포인트를 만들었고, 14-9에서 지창영이 백트를 맞고 또르르 굴러가다 떨어진 볼을 리시브하려다 중앙선을 밟는 에러를 범한 덕분에 3세트를 따냈다.
4세트 (16:14 현대 승리)
'양 팀 선수들 모두 겜에 중독된 거 같아요. 허허'
매 세트마다 명승부를 연출하는 양 팀의 플레이가 매우 만족스러운 듯 칭찬에 인색한 편인 오관영 해설우원도 양 팀 선수들을 치켜세우고 독려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3세트까지 펄펄 날아다니던 양 팀 선수들.. 2시간 여 동안 사력을 다해 뛴 덕분에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그 사이 코트에 본드칠이라도 해놓은 것인가. 양 팀 선수들 모두 좀처럼 발이 안 떨어졌다. 4세트부터는 체력전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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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터미네이터' 임도헌 |
세트 스코어 1-2로 벼랑 끝에 몰린 현대는 초반부터 거세게 몰아붙였다. 글구 마낙길의 쳐내기, 김성현의 서브 에이스, 강성형의 블로킹을 집중시키며 4-0으로 앞섰다.
고려증권은 박삼용-문병택의 좌우 공격을 앞세워 4-5 턱밑까지 쫒아갔지만 현대는 임도헌의 대포알 스파이크와 김성형-제희경의 콤비 블로킹으로 10-5까지 멀찌감치 도망갔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으면 고려증권이 아니지. 5점차로 질질 끌려가던 고려증권은 '역전의 명수'답게 순식간에 10-10 동점을 만들었다.
문병택의 라이트 공격과 최성영의 속공으로 6-10으로 따라붙은 뒤 임도헌의 서브 범실, 김성현의 네트 터치가 속출하는 사이 8-10으로 점수 차를 좁혔다. 이어 박삼용의 밀어넣기와 문병택의 백어택으로 10-10을 만드는 놀라운 저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이런 경기라면 맨날 중계방송하겠어요.'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는 오관영 해설우원.. 이 대목에서 또 다시 흥분했다.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먼저 13-13 균형을 깨뜨린 것은 현대. 임도헌이 문병택의 공격을 정확하게 차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삼용의 레프트 공격 성공으로 양 팀은 2세트에 이어 또다시 듀스를 맞았다.
마낙길이 문병택의 공격을 블로킹하며 현대가 15점에 먼저 도달했으나 아직 맘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곧바로 이병용이 속공으로 응수했고, 고려증권은일단 한숨을 돌렸다.
결국 피말리는 접전은 상무에서 갓 제대한 마낙길의 손에 의해서 마무리됐다. 마낙길은 15-14에서 연거푸 공격을 성공시키며 16-14 아슬아슬한 승리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오관영 해설우원은 또 한 마디 덧붙였다. '고려증권, 아주 징그러운 팀이에요'
5세트 (17:16 고려증권 승리)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 세트를 고려증권이 접수하면 고려증권의 우승이 확정되지만 현대가 이기면 96슈퍼리그 패권의 향방은 마지막 5차전에서 판가름 나는 상황이었다.
초반부터 양 팀은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게(?) 점수를 나눠가졌다. 랠리포인트제가 적용되는 5세트인만큼 속전속결이었다.
범실이 나올 때마다 범실을 저지른 팀 선수들의 얼굴은 초조함이 가득하고, 잿빛으로 변한 반면, '당신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오'라고 말하는 듯한 상대팀 선수들은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1점차 이상 벌어지지 않던 점수가 첨으로 2점차 이상 벌어진 것은 세트 후반. 10-10 상황에서 제희경이 박삼용의 공격을 가로막고, 최성영의 속공마저 걸리면서 현대는 12-10으로 앞섰다.
그러나 임도헌의 네트터치에 이어 박삼용의 연타가 네트 맞고 들어가는 행운으로 다시 12-12 동점이 됐고, 박삼용의 쳐내기로 13-12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현대도 끈덕졌다. 13-14로 뒤진 상황에서 김성현이 박삼용의 공격을 막아내며 14-14 듀스를 만든 것이었다. 박삼용의 시간차 공격으로 고려증권은 한 점 달아났지만 마낙길이 맞불을 놓으며 다시 15-15 동점. 마낙길의 레프트 공격이 작렬하며 오히려 현대가 16-15로 유리한 상황이 됐고, 박선출의 속공이 들어가 또 다시 16-16 동점.
이때 문병택의 라이트 공격이 터지며 고려증권은 또 다시 17-16 리드를 잡았다. '서브왕' 이성희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찬찬히 서브를 넣었다. 상대 강성형은 회심의 일타를 날렸으나 볼은 그대로 바운드됐다. 최성영이 걷어올린 볼은 세터 이성희에게 연결됐고, '파이팅 머신' 이수동이 힘껏 팔을 휘둘렀다.
볼은.. 블로킹벽을 뚫고 그대로 상대 코트에 떨어졌다.
이수동은 우승이 확정되자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플로어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던 선수들 눈이 벌겋게 변했다.
93년 이후 3년 만의 정상탈환이었다. 그것도 챔피언결정전 3승1패를 포함, 21승 2패의 빼어난 성적으로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었다.
슈퍼리그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고려증권은 다크호스 정도로 분류됐다. 우승은 언감생심이었다. 딴 팀 선수들에 비해 네임벨류가 처지고, 눈에 띄는 스타급 선수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버뜨.. 고려증권이 언제 이름 갖고 배구했더냐.
파워, 높이, 이름값.. 고려증권의 끈적끈적한 조직력 앞에서 이런 것들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성희, 박삼용, 이수동, 이병용, 박선출, 문병택, 최성영, 이병희, 송재택.. '무명군단'의 통쾌한 반란에 많은 사람덜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특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려증권의 우승은 현대같은 좋은 라이벌이 있어서 더욱 빛이 났다는 거다.(신감독, 내 말 알간?)
본 우원.. 운 좋게도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었다.
당시 분위기를 잠깐 설명하자면.. 관중석은 반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현대를 사모하는 오빠부대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끈끈한 조직력이 돋보이는 고려증권을 응원하는 넥타이 부대.
글구 본 우원은 아부지 넥타이 하나를 가방에 쑤셔넣은 후 넥타이 부대에 슬며시 끼어서 목이 터저랴 '고려,이겨라!'를 외쳤었다.
고백컨데.. 고려증권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은 울 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마음 짠~ 했다.
고려증권은 이제 역사 속의 팀이 됐다. IMF 된서리를 맞고 98슈퍼리그 이후 팀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슈퍼리그 통산 6회 우승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채. 하지만 많은 사람덜의 뇌리 속에 고려증권은 '영원한 챔피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아.. 그때 그 시절의 명승부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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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모든 스포츠를 좋아했습니다. 야구, 축구, 농구 , 배구 등등.. 경기를 보면서 흥분과 열광하던
제가 .. 언제부터인가 점점 경기를 보는 횟수도 줄어들고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최근에 그 이유를 하나 찾은것 같았습니다.
고려증권팀과 비슷한 팀을 볼수 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관용 해설자의 그당시 멘트가 생각납니다.
고려증권과 시합할때는 끝까지 가야합니다. 상대편팀한테는 아주 지긋지긋한 팀이죠....
시합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열정...
그당시 시합을 보는분들은 다 아실것입니다. 고려증권팀의 그 끝없이 물고늘어지는 그리고 끝까지
가는 투혼을..
요즘 스포츠경기에 그런 시합을 본것이 참 언제인가 싶습니다.
금방 경기의 승패 가 나오고 쉽게 뒤집혀지지 않는 경기 내용..
지고 있으면 그냥 끝나는 시합.. ...
그래서 인지 고려증권 팀의 그시절 그시합이 마냥 그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