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구장 창고에 보관중인 철거된 동대문야구장의 조명과 베이스 그리고 의자. 이 정도가 '한국야구의 어머니' 동대문야구장이 남긴 유품들이다 (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
근간의 일이다. 이메일을 통해 일본 스포츠평론가로부터 한국야구와 관계된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한국야구를 상징하는 야구장은 어디이며 돔구장은 있는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명문구단과 전·현직 선수는 누구인가’하는 게 질문의 요지였다. 여느 외국인이나 할 법한 평이한 질문이었고 어느 국내 야구기자나 쉽게 대답할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은 좀체 답변이 진전되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되레 대답해야 하는 쪽에서 '그러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건 바로 ‘한국야구역사를 대표하는 기념물은 무엇이고 야구박물관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이었다.
창고에 방치된 한국야구
8월 8일 KBO총재기 대학야구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목동구장을 찾았다. 결승전 취재가 목적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며칠 전 풀지 못한 질문의 답을 이곳에서 찾고 싶었다. 사전에 협조를 부탁한 대한야구협회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목동구장 내 <기계실>이라고 써진 창고 앞에 멈췄다.
“동대문야구장에 있던 것들을 여기(목동구장)로 가져오면서 따로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협회 관계자는 기계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오해가 없길 바란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터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목동구장 내 창고에 방치된 야구 자료 및 수장품들. 이것이 103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야구의 현실이다(스포츠춘추=박동희) |
“아….”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협회 관계자가 어째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창고 안은 각종 야구 관련 서적 및 서류, 사진 등으로 가득했지만 보관상태가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극악했다. 게다가 자료정리는 고사하고 각종 박스들은 테이프로 단단히 잠겨있는 상태였다. 협회 관계자들조차도 어느 박스에 무슨 내용의 자료가 들어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당연한 이유로 자료들의 보존상태가 하나같이 엉망이었다. 사진들은 대부분 찢겨있거나 변색돼 있었고 일부는 곰팡이에 훼손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동대문야구장에 있던 것들을….” 협회 관계자가 재차 같은 말을 했지만 이런 보존상태라면 명백하게 말해 ‘이사’때문은 아니었다. 한 원로 야구인은 “협회 창고가 동대문야구장에 있을 때도 야구 관련도서와 수장품, 사진 등은 지금처럼 보관됐다”며 “과거 동대문야구장 화재로 귀중한 야구자료들을 소실하고도 역사를 대하는 야구인들의 태도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꼬집었다.
창고 안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야구자료를 봤을 때 한숨이 나왔지만 그보다 더 실망한 건 ‘103년이 지나도록 고작 모아둔 자료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가’하는 것이었다. 자료라곤 대부분이 옛날 서적과 서류 그리고 기록지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대문야구장 철거 시 용케 들고 나온 조명과 베이스를 제외하곤 눈에 띄는 기념물도 없었다.
“과거 일부 야구인들은 야구자료들을 기념품이나 장식물쯤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용도로 쓰거나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협회 관계자의 증언이다.
지난해 ‘철완’ 김양중 선생을 인터뷰했을 때다. 1958년 내한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와의 경기에서 김양중 선생이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았을 때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 감동을 단번에 설명해줄 사진자료가 전무했다.
그렇다면 당시 경기를 카메라로 찍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다. 사진으로 찍고 김양중 선생이 보관까지 했지만 “잠시 쓰고 주겠다”며 언론사들과 주변 야구인들이 사진들을 하나 둘 가져간 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았다.
국내 야구인 가운데 역사적인 사진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했다던 김양중 선생은 그런 식으로 사진을 잃어버려 지금은 증명사진 몇 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대신 그의 사진들은 어느 야구인의 집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명한 자는 역사를 통해 배우고 바보는 경험을 통해 배운다
동대문야구장이 철거될 즈음 한 전직 기자는 “‘철거’가 아니라 동대문야구장이 다른 지역의 대체구장으로 '이전'되는 게 옳다"라고 주장했다. 동대문야구장에 깃든 한국야구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래야 “전설의 홈런왕 이영민이 때린 한국 야구 1호 홈런이, 그 더그아웃 계단을 밟고 오른 수많은 한국 야구 영웅들의 흔적들이 역사의 이름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동대문야구장의 철거와 함께 한국야구의 역사와 전통은 작은 산짐승이 돌 틈을 비집고 들어가듯 창고 안으로 숨어버렸다.
협회의 한 관계자는 “고척동 하프돔으로 이전하면 그때부터 체계적으로 야구 사료들과 자료들을 정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폴란드 속담처럼 오늘 하지 않은 일을 내일부터 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야구 사료와 자료들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을까. 대한야구협회와 비슷하다. KBO 역시 야구회관 지하에 각종 자료와 수집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말이 보관이지 역시 방치에 가깝다.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미 명예의 전당 쿠퍼스타운의 안내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그가 한 말은 이랬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바보는 경험을 통해 배웁니다. 위대한 스포츠 야구는 전자를 지향합니다."
자, 스스로에게 답을 하자. 한국야구는 어떤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1981년 한·일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한 양국 선수들의 기념촬영 장면. 사진 중앙 왼쪽이 조계현(군산상고), 오른쪽이 재일동포 김의명(일본명: 가네다 요시아키)이다. 아래 왼쪽부터 강기웅(대구고), 김상국(천안북일고).
1981년 한·일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한 양국 선수들의 기념촬영 장면. 사진 왼쪽부터 성준(경북고), 구도 기미야스(나고야전기고), 차동철(광주일고)
1977년 제 1회 슈퍼월드컵 우승 당시 기념사진. 한국야구가 세계정상에 오른 첫 대회였다
사진 뒤줄 왼쪽부터 유남호(롯데), 이재환(연세대 감독)코치, 윤동균(기업은행), 최동원(연세대), 천보성(롯데), 박해종(연세대). 앞줄 왼쪽부터 김재박(한국화장품), 장효조(한양대), 방기만(한국화장품)
사진 뒤줄 왼쪽부터 김정수(롯데), 김일권(육군), 김응용(한일은행) 감독, 박상규 야구협회 전무. 앞줄 왼쪽부터 심재원(한국화장품), 김시진(한양대), 임호균(동아대), 배대웅(기업은행), 유종겸(중앙대)
1977년 충암고 등록선수 명부.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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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사제지간이었던 35살 젊은 감독 김성근(SK)과 18살의 고3 포수 조범현(KIA)
1969년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전 경남고와 경북고 의 공식기록지. 전산화가 되지 않은 과거 기록은 대회 기록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만약 남은 기록지들이 훼손이라도 된다면 야구역사는 단절이 될 수밖에 없다. | | |
첫댓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