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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글밭 스크랩 김현우 단편소설 - 노구(老軀), 그 지루함
남전 南田 추천 0 조회 166 10.03.27 11: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래 졸작이 <경남문학>(2010 봄호, 90)에 실렸다.

 

천수중 선생이 물었다. 그보다 나이가 열댓 살 적지만 친하게 지내는 남동만 조합장에게.

“수면제 몇 알 쯤 먹어야 죽어? 조합장.”

산림조합장을 지낸 남동만은 한참만에야 그랬다.

“그,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더. 제 나이 여든이 되었지만 잠은 잘 자서 수면제와 친했어야 말이죠. 설마······?”

“아, 아냐! 내가 요새 이명이 너무 심해 잠이 안와! 그래서 수면제를 간혹 먹거든. 궁금해서 그러지 .이곳에 온지 반년이 지났는데! 의사 양반 처방에 감질이 나서 원! 매번 사흘치만 처방해 줘. 한 일주일치 쯤 처방해 주면 면담하러 자꾸 다니지 않아도 편코 말이야. 왔다갔다 그것도 괴로우이! ”

“우짜거나! 바다 구경이나 잘 하이소. 거기 석양이 좋지요? 선생님. 황혼에 붉게 물든 바다가 화폭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네. 내 수일 내로 가 뵙지요.”

“야, 남 조합장! 바다 구경하면 뭐하나? 석양? 황혼? 붉게 물든 바다? 뭘 봐도 넌더리나고 지루하긴 마찬가지야.”

그러면서 천 선생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쓸데없는 말만했구먼.’ 하고 그는 느릿느릿 휴대폰을 머리맡에 내려놓으며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그의 전화에 관심을 보이는 늙은이들은 없었다. 모두 속이 텅텅 빈 고목들이 자빠져 나뒹굴고 있었다. 잎이 다 떨어졌거나 아니면 묵은 가지에 두어 개 잎이 달려 살아있다는 시늉만 하는 듯한 흉물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남자 간병인 홍씨가 요 전날 병실에 들어오더니 떠들어 댔다. 누가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좋은 일이 있어도 건강이 걱정되는 나이가 몇 살 쯤 될까요?”

물론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반쯤은 귀가 먹었고 반쯤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노인네들이니 대답할 여력이 통 없었다. 그러니 자문자답일 밖에.

“바로 환갑이 될 때랍니다. 무리하면 쓰러지는 나이는 64살이고요, 상 받을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나이는 69살이랍니다.”

“·······.”

“허어! 내 말에 좀 반응들 해 보소.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영 재미없네!”

“·······.”

“가만있자······, 여게서 제일 연세적은 고덕주 아버님은 73살이니까 누가 옆에 있어도 방귀를 뀔 수 있는 나이고, 아, 아니지, 황씨 아버님이 72살이지, 천천히 하늘과 가까워지는 나이야. 그러고 보니 80살 잡수신 마종환 아버님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해도 괜찮은 나이고……. 나, 이거 인터넷에서 떠도는 걸 배운 거요.”

그는 손에서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뭘 베껴온 모양이었다.

“가만있자······. 김선길 아버님은 이 자식이 뉘 집 자식인지 잘 모르는 나이라는데? 81살이니까. 그리고 87살 잡수신 정씨 아버님은 귀신을 봐도 놀라지 않는 다는데? 더 얘기할까요? 88세는 뛴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걷고 있고요, 89살이 되면 주민등록번호를 잊어버리고요, 93살이 되면 한국말도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고요, 한 살 더 먹으면 무형문화재래요. 아흔여섯이면 간지러운 코도 다른 사람이 긁어주고요, 97살이 되면 노인대학에서도 받아 주지 않고요, 아흔아홉이 되면 가끔 하나님과 싸울 수 있는 나이래요. 100살? 그건 인생에서 놓여나 그냥 노는 나이래요.”

간병인 홍씨가 한참을 떠들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종이를 다시 뒤적거리더니 말했다.

“천수중 아버님 연세는 아흔다섯이니까······ 무엇을 하든 주위에서 신기하게 보는 연세래요. 정말 그럴듯하죠? 천 선생님이야 정신 말짱하지, 대소변 분간하지, 혼자서 산보 다니시지. 정말 그 연세에 정정하시니 신기한 일이죠.”

그제야 누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천 선생이 와 우리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 수가 없제. 사지가 멀쩡하제. 아직 기운이 펄펄하제.”

“에끼! 보행기 짚고 겨우 댕기는데 기운이 펄펄해? 풍을 치도 유분수지. 듣도 보도 않은 넘이 들었으면 진짜로 믿겠네.”

“안 그렇소? 천 선생이 누구맨치로 중풍이 들었나? 치매끼가 있나? 정신은 젊을 때처럼 또록또록 하고 부축도 안 받고 기동을 하는데 나이가 아흔다섯 살이 믿기지 않소. 괜히 나이를 부풀린 거 아니요?”

“허어! 늙은 사람 히야까시가 심하네. 기동력을 잃고 들어온 사람보고 멀쩡하다니! 물론 난 중풍도 안 들고 치매끼도 없어! 허지만 남의 부축 없이는 못 살아. 그러고 마누라 없이 나 혼자 집에서 살 수도 없었고······. 걷고 뛰거나 움직이는 걸 잃으면 동시에 생명을 유지할 능력, 그 마지막 기능도 상실해 버린다는 뜻이라네.”

천 선생의 말에 중풍으로 몸 반쪽이 마비되어 고생을 하지만 의사 표시는 가능한 고덕주 영감이 동정하는 투로 말했다.

“선생님은 자제분들도 다 잘되어 있다면서 자식들 집에 가시면 될 껄 요양원에 들어오셨으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힙니다. 자식들이 다 그런가 봐요. 하나 남은 아버지 모실 생각들이 통 없으니! 나도 그런 겁니다. 마누라만 살아 있었어도 이놈으 요양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을 것인데! 사실 중풍을 전문으로 치료한다는 병원에 입원해서 반년을 넘게 양방 치료에다 한방치료까지 다 받아 좀 회복이 되니까 제 놈들 집에 날 데려가지 않고 이놈으 요양원에다 옮겨 놓지 뭡니까? 물론 입원비도 싸고······. 죽을 자리나 봐 놓으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고 영감의 말에 천 선생은 할 말이 없어 멍하게 천정만 바라보았다.

-- 그래 자식이란 게!

걸을 수 없게 되면서 그것이 곧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리가 무너지면 건강 그 자체도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천 선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정원수를 키우는 천지수목원 주인이었다. 해방 직후 한동안 초등학교 교사를 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사장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불렀다. 40대에 정원수와 꽃나무 키우는 일을 시작해 그쪽에 상당한 기술과 실력을 쌓아 만 여평이 넘는 농장을 경영했다. 그래서 원예조합이나 산림조합의 조합장도 지냈건만 현직에서 물러나고서는 그냥 선생으로 불리는 게 좋았다. 누가 ‘조합장님!’ 하면 ‘그냥 선생이라 불러!’하고 정정을 해 주기도 했다.

한창 일하던 5, 60대 시절에 나무 키우기에 매달렸다. 만여 평이 넘는 임야를 개발하여 느티나무를 비롯해 왕벚나무, 은행, 메타세쿼이아, 단풍, 가문비나무 같은 십여 년을 키워야 돈이 되는 나무들도 심었지만 주로 자금 회전이 빠른 정원수를 심고 키우는데 주력했다. 자귀나무, 금목서, 은목서, 산호수, 병꽃나무, 광나무, 동백, 명자나무, 배롱나무, 영산홍, 철쭉······ 여하튼 심어보지 않은 정원수가 없을 정도로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한창 고속도로 개설이니 국도 확장이니 하면서 도로공사와 성냥갑 같은 아파트 건설 공사가 엄청나게 많았던 시절에는 가로수용인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 메타세쿼이아, 회나무, 향나무, 이팝나무 등이나 주변조경에 사용되는 영산홍이나 철쭉 같은 꽃나무들과 아파트 단지에는 박태기, 구상나무 같은 정원수들을 대량 팔아서 엄청나게 큰돈을 벌기도 했다.

원예농이란 세월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나무 한 그루, 꽃나무 한 포기 심어 놓고 가꾸며 돈과 인력이 계속 들어가는데 수익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묘목대와 비료 값, 인부임은 얼마를 넘길 수 없는 기한내에 갚아야 하는 채무였으면서도 무한정 투자해 놓고 나무가 어느 정도 상품가치가 있을 만하게 자랄 때까지 목을 늘이고 기다려야 하는 업종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 시기까지 버틸 수 있는 자금 확보가 관건이었다. 느티나무나 히말라야시다, 향나무, 반송 등 소나무류, 왕벚나무, 동백나무는 십여 년이 흘러야 제대로 수형이 잡힌 된 상품이 되었다. 그 보다 작은 옥향이나 황금측백, 금목서, 산수유, 남천, 목련 같은 정원수 종류도 상당한 세월이 지나야 제 값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상품이 되었다. 그때까지 버티자면 2, 3년만에 출하가 가능한 명자나무, 영산홍이나 자산홍, 철쭉, 천리향 같은 걸 단기에 대량 생산해 판매해야 하는데 그것들은 사람 손이 많이 가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밤낮 나무에 매달려서 가지를 치고 휘고 젖히고 자르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정원수는 가급적이면 키를 크게 키우지 않으면서도 모양이 안정적이도록 수형을 잘 잡아야 비싸게 값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 세월이 하수상하다보니 유행하는 추세도 사전에 잘 알아서 대처해야 했다. 한때 히말라야시다가 상록수이면서도 수형도 멋지고 잘 자란다면서 학교나 관공서 등 새 건물이 들어섰다면 으레 운동장이나 마당에 그것이 심어졌다. 그런데 어쩌다 뿌리가 약해서 태풍에 잘 넘어지고 또 너무 가지가 잘 뻗어나가기 때문에 되래 그늘이 많아져 그게 짐이 된다는 평판 때문에 일시에 인기가 추락하면서 히말라야시다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렸다. 천 선생도 수 백 그루를 팔아먹지 못해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날마다 나무를 가꾸느라 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내렸다. 겨울이라고 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이면 제초도 하고 배롱나무나 매화, 목련, 홍단풍, 홍매화, 꽃사과 같은 것의 가지를 다듬는 일의 연속이었다. 또 나무들에 시비(施肥)를 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물론 인부를 고용하기도 했지만 아예 월급을 주고 머슴처럼 고용한 사람이 하나, 부르면 달려오는 인부가 셋, 그러고도 남녀 십여 명이 단골로 일하러 농장을 드나들었다. 워낙 무릎 관절을 많이 쓰는 일을 했던 탓에 환갑이 지나고 나니까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퇴행성관절염이라 했다. 어쩌다 더 아프기도 하고 덜 아프기도 해 정형외과로 신경외과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그냥저냥 견뎠다. 체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게 100개의 관절 중 무릎이고, 평지를 걸을 때도 4~7배나 영향을 받는다고 의사가 말해 주었다.

“오래오래 살면서 건강하려면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지요 그처럼 천 선생이야말로 날마다 농장에서 일하는 분이니 그건 맞은 말이 아니고 좀 쉬엄쉬엄 일하십시오, 죽자 사자 마시고······.”

“나도 그래서 일꾼들 시키고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만 합니다. 하지만 원예라는 게 잔소리 가지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기술이거든요.”

“천 선생 체형이 딱 좋기는 합니다. 체중이 많이 나가지 않으니 말입니다.”

일흔이 되어서도 신경통이 물리치료로는 시원찮아 한의원에 갔더니 한의사가 하는 말이,

“동의보감에 약보다는 식보요, 식보보다는 행보(行補)라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시간이 나면 무조건 걸어야 한다고 했는데 많이 움직이십시오. 일흔이 넘으면 곧잘 눕고 싶은 나이인데 말입니다. 누우면 약해지고 병듭니다. 그러니 제가 지어주는 약 잘 자시고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일흔이 넘고부터는 예전처럼 일하는 게 힘에 부쳤다. 오전 나무 심을 구덩이 몇 개를 파고나면 녹초가 되었다. 나무를 한 그루 파고 나면 피로가 몰려와 쉬어야 했다. 그렇지만 새벽이면 그는 등산화를 신고 농장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아침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일 시켜야 할 것들을 점검했다. 홍삼이니 양파즙이니 몸에 좋다는 보약을 지어 먹기도 했다. 평생 땅을 파며 살아오며 다진 체력이 그나마 남았던지 푹 쉬고 나면 회복되어 힘을 쑬 수 있을 만큼 되어 또 움직였다. 그러나 일흔 대여섯을 고비로 점차 직접 나무를 가꾸고 손질하는 것을 줄이고 인부들에게 맡기기 시작해서 여든이 가까이 되었을 때는 거의 박 영감에게 일임하다시피 하고 지냈다.

삼십 년 가까이 머슴처럼 천지수목원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박 영감 내외는 농장 끝자락에 자그마한 농막을 짓고 살았다. 박 영감 내외는 그들 내외와 한 식구나 다름없었다. 박 영감의 부인 진동댁은 그의 집 살림을 도맡아 살아주었다. 농장에서 부리는 일꾼이 많을 때는 십여 명이 넘었고 그들의 밥이나 중참을 해 대자면 천 선생 부인 혼자 힘으로 불가능했다. 세월이 흘러 천 선생이나 박 영감네 자식들이 제 살길을 찾아 부산으로 서울로 다 나가고 난 다음에는 두 집 모두 단출하게 내외간뿐이 되자 아예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천 선생 집에서 넷이서 함께 지냈다. 천 선생은 박 영감 내외를 농장 일꾼이나 머슴이 아니라 친형제처럼 그들을 대했다. 아침저녁 밥도 함께 먹었고 나이 많아 점점 기력이 떨어지는 천 선생의 수발도 진동댁이 열심히 들어주어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박 영감은 그 보다 열댓 살이나 적었지만 술고래여서 천 선생이 여든이 들던 해에 중풍으로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박 영감 나이가 겨우 육십 하고도 다섯 살 밖에 안 되었다. 박 영감의 부인 진동댁은 부산에 사는 아들이 함께 살자고 오란다면서 아들네로 살러 가 버렸다. 천 선생 내외가 살림살기에 너무나 벅차서 진동댁에게 섭섭지 않을 만큼의 돈을 내놓으며 몇 번이나 만류하고 주저앉히려고 설득을 했건만 그녀는 냉담하고도 막무가내로 가야한다며 고집을 피우더니 끝내 가 버리고 말았다. 집안일을 돕던 사람 둘을 한꺼번에 잃은 셈이어서 천 선생도 아쉬움이 많았지만 아내도 몹시 섭섭해 했다. 자연히 아내도 살림살기에 힘들어 했다. 마흔 댓 되는 황씨라는 일꾼 내외를 박 영감 대신 농막에 들여놓았지만 나무를 가꾸는 기술이 전연 없는 사람이라서 시시콜콜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야 일이 제대로 되었다. 자연히 농장 수입도 떨어지고 관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사내의 마누라도 천성이 게으르고 무디어 아예 주인집 살림을 무관심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외는 더욱 피곤해졌다. 결국 나이를 일흔 댓 넘긴 아내가 병들었다. 평소 당뇨도 있고 허리도 속도 편치 않았다. 서울에 사는 아들네가 아내를 데려가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폐암이란 진단이 내려졌고 1년 만에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그 혼자 회성동 봉화산 기슭 만여 평 농장 한가운데 덩그렇게 서있었던 큰 집에 내동이 쳐진 셈이었다.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난 이후 낙심이 컸던 천 선생은 농장 일에 손을 놓고 말았다. 체력이 따라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껏 박 영감 덕에 농장을 쉽게 운영해 왔지만 나이 여든에 더 이상 농장 일에 신경을 쓴 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듯했다. 죽은 박 영감 대신 일하는 황씨로는 수목관리조차 부실해져서 농장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지고 있었다. 전에 산림조합장을 지낸 남동만이나 오래동안 동업자로 친하게 지낸 원예조합원이나 상인들을 통해서 농장을 맡아 운영할 사람을 찾아서 통째로 맡겨버렸다. 지주가 논을 팔지 않고 벼농사를 소작인에게 주듯이 그런 형식이었다. 농장을 맡아 제 수완껏 경영하고 1년에 얼마씩 임대료를 받는 형식이었다. 농장을 맡은 사람은 김상수라는 충청도에서 묘목 농사를 하던 사람으로 충청도 사람답게 점잖고 심성이 고운 사람으로 믿을 만 했다.

김상수가 농장을 맡게 되자 천 선생은 천지수목원 한가운데 집을 김상수에게 물려주고 아내가 아플 때 사 두었던 시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픈 아내가 드나들기 쉬운 1층을 잡아 두었는데 나이 많은 그에게도 적격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아파트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기에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아파트가 단독주택보다 관리도 쉽고 드나들기에도 낫다는 주장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큰아들은 부산에서 장사를 했다. 젊어서부터 옷장수도 했고 다방도 했고 슈퍼도 했고 술집도 노래방도 차렸다. 가구점도 크게 벌려서 사업이 한때 번창하기도 했다. 그런데 번번이 오래 가지를 못하고 얼마 후면 업종을 바꾸었다며 자주 천 선생에게 사업자금을 대 달라고 달려오곤 했었다. 작은 아들은 서울에서 제법 이름 있는 IT회사를 다녔는데 월급을 많이 받아서 돈을 펑펑 쓰며 잘 나가는 월급쟁이가 되었다. 어찌하든 아들들도 제 앞가림을 한다고 하지만 천 선생이 보기에는 여전히 어린 아들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위태위태한 허점이 많이 보여 걱정이었다. 다만 위안이 된다면 아들들이 아비의 재산을 넘보지 않고 제 힘껏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기 전 큰 아들이 그랬다.

“아버지, 농원을 김상수 사장에게 맡겼으니 저희 집으로 가셔서 함께 사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노인네 혼자서 어떻게 하시려고?”

“부산으로 가기 싫어! 거기가면 친구가 있나? 아는 사람이 있어 내왕을 할 끼가? 여게 살아야 심심찮게 왔다 갔다 하지.”

“아, 부산에서 지내시다가 심심하면 친구 만나시러 오시면 되지요.”

“옛말에 늙어 죽을 때가 되면 미물도 고향으로 돌아온다는데 이제 팔십이 되어가지고 타향으로 가? 안될 말이다.”

천 선생의 단호한 말에 큰아들은 아버지 편한 대로 하시라면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한 다음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와서 꺼낸 얘기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천지수목원을 처분하자는 것이었다.

“아버지! 임대 형식으로 농장을 맡기면 무슨 수입이 많겠습니까? 고작 용돈 정도밖에 생기지 않을 텐데요. 이왕 아버지가 농장 경영에서 손을 떼신다면 인제 그것 처분해 버리지요. 심어져 있는 수목들만 해도 수 천 그루이니 그것과 함께 농장을 처분한다면 수십억은 받을 것입니다. 그걸 은행에다 넣어두시면 예금이자만 해도 굉장할 겁니다.”

큰 아들의 말에 작은 아들도 덩달아,

“형님 말이 그럴 듯 하네요. 농장은 관리하기에도 여든이 넘은 아버지께는 부담이 되고 그러니까······.”

하고 부추기는 말을 했다. 그때 천 선생은 단호하게 말을 했다.

“안 판다! 어째 만든 농장인데! 내 평생의 피땀이 쏟아져 들어간 곳이야!”

노인네의 단호한 소리에 아들들은 두 말을 않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농장을 일구기 위해서 천 선생 내외가 피땀을 얼마나 흘렸으며 우여곡절은 좀 많았으며 많은 세월을 보내며 고생했는지 구구절절 어릴 적부터 보고 들었던 얘기를 아버지가 꺼낼 것이 틀림없으니 아들들은 더 이상 농장을 팔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천 선생이야말로 자신의 평생 성과를 두고 보는 것이 좋았다. 비록 이전처럼 큰 수입을 올릴 수 없다하더라도 천지농원이란 간판과 땅은 그대로 지니고 살다 저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또 한 가지 아들들의 걱정은 혼자 지낼 아버지의 수발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들과 따로 떨어져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여든 살 노인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 재취(再娶)를 하는 것인데 당자의 의견은 어떤지 하고 아들들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뭐라 카노? 내 나이가 육십만 되었어도 새장가를 갈 엄두를 낼 끼다. 그런데 인자 내 나이가 몇 살이고? 여든 하고도 두 살인데 어떤 여자가 오려고 하겠어? 네 어미가 죽고 난 다음에 농원에 일하러 다니는 아주머니들 소개로 파출부를 구해 썼듯이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아침저녁 왔다 갔다 하는 파출부로는 안심이 안 됩니다. 농장 집에 사셨을 때는 황씨 내외가 옆에 있어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이사를 나왔으니 그분들 도움도 받지 못하고요. 아파트에서 아버지가 외롭게 혼자 계시다간 뭔 일이 언제 생길지 누가 압니까?”

사실 아들들의 걱정이 일리가 있었다.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다가 갑자기 혼절을 하거나 중풍기라도 발작이 된다면 어디다 연락을 한단 말인가? 혼자 살던 늙은이가 죽은 지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에 간혹 나왔듯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들네와 합치기도 싫고 재취는 더더욱 난감한 상황에서 이래저래 흔들리는 듯한 꼴을 아들들에게 보이기 싫어 천 선생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걱정 말아라. 너희들이 자주 전화나 해라. 그리고 요새 와서 일해 주는 아주머니도 싹싹하고 부지런하니 괜찮더라. 물론 며느리나 아들보다는 못하고 네 어미보다야 못하지만······.”

“그럼 며느리더러 아버지가 즐겨 드실 반찬을 자주 해 날라라고 하겠습니다.”

아들들의 말에 며느리들도 그랬다.

“옆에서 저희들이 함께 있으면서 아버님 수발을 들었으면 참 좋을 것이지만······. 그럴 수도 없네요. 자주 반찬 해 가지고 찾아 뵐 게요.”

“그래, 그것이 낫다. 난 너희들 걱정시키지 않고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만 하늘이 주신 목숨을 내 손으로 끊는다는 것도 죄일성 싶어 그럴 수도 없고·······. 사는 날꺼징 잘 살아보자.”

아들 며느리들과의 일은 일단락되었지만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난 다음 천 선생의 일상생활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다행스럽게도 농장 일을 하지 않아서인지 신경통도 덜하고 타고난 체질이 강건했음인지 감기 같은 잔병치레는 자주 하지만 고혈압이나 당뇨도 없었고 큰 병은 오지 않아 한결 지내기가 수월하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이 일상의 시작이기도 했다. 아파트나 동리 골목을 왔다 갔다 하면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인사도 하고 골목 참기름집 앞에 있는 커피자판기에서 누가 커피를 뽑아 주거나 아니면 그가 먼저 뽑아서 여럿이 함께 마시며 살아가는 얘기들을 듣기도 했다.

날씨가 맑고 좋을 때면 봉화산 기슭에 있는 절에도 가보고 아내와 박 영감 산소가 있는 천지수목원에도 갔다. 무덤가 잔디밭에 난 잡초를 뽑는 게 일이었다. 일꾼을 시켜 주변에 철쭉과 영산홍도 심고 울타리 삼아 일 년 내내 푸른 광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아내 무덤 옆은 그가 누울 자리였다. 오가며 지켜보니 농장을 맡은 김상수 사장은 규모 있게 수목을 다듬고 팔아 제법 수입을 올리는 듯했다.

아내가 죽은 이듬 해, 한동안 이가 아파 고생을 했다. 치과를 찾았다가 성한 이 몇 개 남은 것 다 뽑고 틀니를 해 넣었다.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여러 달이 걸렸다. 일하지 않고 놀아서 그런지 예전에 많이 아프던 무릎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났을까? 초겨울 추위가 심하던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박 영감 부인 진동댁이 찾아왔다. 아들네 집에 간 이후 간혹 마산에 오면 전화를 하든지 밀감 한 봉지라도 사서 들고 꼭꼭 왔었다.

“내, 선생님 하고 살라꼬 왔심더.”

진동댁의 첫 마디가 그랬다.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뭐라카노? 멀쩡한 아들네 두고 우째?”하고 반문했다. 진동댁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마디로 아들집에서는 그녀가 짐 덩어리고 천대받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보다 못하고 고양이보다 못한 신세라는 한탄이었다.

“말도 마이소. 내가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습니껴? 선생님 앞이니까 내 할 말을 다 하지예. 내 한 일, 이 년 그동안 속 많이 ?었습니더. 처음에는 안 그러더니 세월이 갈수록 며느리는 날 저거 집 벌레처럼 여기고 손주들은 공부에 방해된다면서 골방에 처 백혀서 찍 소리도 말라꼬 하지예······.”

“아들이 있잖아? 내가 그 놈 클 때 지켜봐서 아는데 효자가 아니었어?”

“효자지예. 효자고 말고예? 지 마누라하고 이혼할라꼬 이혼장 써 들고 법원까지 안 갔습니껴. 내가 어찌 그 꼬라지를 보고 그냥 그 집구석에 궁뎅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있겠어예? 차라리 여게 와서 선생님 수발들민서 맘 편히 사는 게 백 번 났제.”

“허어! 그렇게 되었어?”

“여게가 바로 내 친정이고 선생님이 내 친정 오라버니인데 내가 오데 가겠어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말이 진실로 타당했다. 삼십 여 년을 한 집안에서 흉허물 없이 살아 왔잖은가? 아니 진동댁은 그의 집안일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여자가 아니었던가?

“그래, 그래! 나도 진동댁 같은 아줌마가 내 수발을 들어줬으면 했어. 요새 우리 집에 오는 파출부가 통 내 입에 맞은 반찬을 만들어 주지 못해.”

그는 얼씨구나 하고 당장 집에 오는 파출부 아줌마를 내 보내 버렸다. 진동댁은 그날로 아파트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아들들도 그 소식을 듣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어쩌면 속으로 잘 되었다고 했을지 몰랐다.

천 선생은 진동댁이 집에 들어 온 이후 마음이 편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파출부가 아니니 그래서 좋았고, 참 남부끄러운 일이지만 속옷을 어쩌다 실수로 버리기라도 하면 내놓기가 어려웠는데 진동댁에게는 그런 염려를 안 해도 되어 더욱 마음이 편했다.

그러구러 잔잔한 세월이 흘렀다.

동내 한 바퀴를 슬슬 돌면 찌부둥하던 몸이 가벼워지고 자신감도 생기고 즐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하게 흐르는 물줄기처럼 마음속에도 천천히 부드럽게 흘러가는 편안함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행복이란 생각이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평안함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러나 새벽, 잠이 깨면 문득 지루함을 느꼈다. 또 하루를 그렁저렁 어떻게 보내나? 그런 걱정이 슬며시 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행의 그림자 같았다. 이제 욕심도 버렸다고 믿었다. 욕심을 버리고 나면 평안해 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내가 좀 더 주면 될 걸, 내가 조금 손해 보면 될 걸, 내가 쬐끔 노력하면 될 것을, 내가 지긋이 기다렸으면 될 것을, 내가 조금 더 움직이었으면 될 걸.”

하고 지난날의 인색과 조급과 나태를 반성했다.

아흔 살을 넘겼을 즈음 그에게는 일상이란 게 없었다. 그저 벽에 걸린 달력이나 시계는 가만히 멈춰 서 있었고 밖에 나가면 바람마저 제자리에서 오도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간혹 그의 아파트에 들려주는 남동만 조합장에게,

“뭐, 20대 때는 세월이 20km요 60대는 시속 60km라더니, 언제는 이놈의 세월이 빠르게 흘러 는 듯 하더니 이제 아흔이 넘으니 시속 90km가 아니라 도로 그네가 왔다갔다 하듯 제자리에서 흔들거리고만 있는 듯하네.”

너무 느리게 가는 시간을 탓했다.

“그래도 천 선생님은 나이 먹은 티가 하나도 안 납니다. 길을 나서면 저와 동갑내기로 볼 겁니다.”

“에끼! 사람 놀리기는! 열댓살이나 떨어지는 남 조합장과 날 동갑으로 봐? 소가 들어도 웃겠군.”

“아닙니다? 선생님 기력이 정말 좋지요. 아흔이 넘은 노인네가 귀도 안 먹었지요, 지팽이만 짚고 남의 부축 없이 다니시는 게 어딥니까? 어짜든지 지루하단 생각 버리시고 오래오래 사십시오.”

“어허! 빨리 죽어야 할 사람보고 그게 무슨 농인가?”

“빨리 죽고 싶다는 사람치고 장수 안하는 사람 못 보았습니다. 선생님!”

경로당에 나가면 천 선생은 다른 노인네들에게도,

“이거, 언제 죽을지 기약이 없어 지루하네.”

하고 하루 빨리 죽고 싶다는 그런 말을 했다. 그러면 다른 노인네들은,

“아이고! 천 선생! 저는 어제 아래가 일흔이라고 친구들 모아 잔치를 했는데 벌써 팔십이요. 세월이 정말 유수 같고 기력은 날로 쇠약해 져서 하루가 다른데 지루하다니요? 나는 그저 세월이 70km, 80km 너무 빨리 흘러가요.”

하고들 세월의 덧없음을 하소연했다.

천 선생은 그 즈음 일주일이면 꼬박꼬박 다니던 동리 공동목욕탕에 가지 못했다. 목욕탕 바닥이 미끄러워 어지럽고 불안할 뿐만 아니라 목욕을 한다는 것도 힘에 달렸다. 그래서 전적으로 진동댁이 그의 빠짝 마른 몸을 씻기고 닦았다. 또 진동댁의 도움을 전연 받을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잠자리에 누우면 귀가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귀에서 왕왕 소리가 나는데 어떨 적에는 라디오 잡음 같기도 하고 어떨 적에는 뇌 저 깊은 구석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파열음 같았다. 이비인후과에 찾아갔더니 의사가 이명(耳鳴)이라면서 그랬다.

“댁에 냉장고 있지요? 냉장고 소리가 평소 잘 들리지 않지요? 가까이 갔거나 신경을 쓰면 소리가 들릴까 그렇지요?”

“그, 그렇지.”

“그처럼 이명이란 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좀 진정이 됩니다. 이거 뭐 별 뾰족한 치료방법이 아직은 없는 듯합니다. 그저 친구삼아 지내세요.”

그러니까 불치(不治)란 것이었다. 좀 지나면 난청이 될 수도 있다는 말도 들려주었다. 귀에서 소리가 윙윙 왕왕 찡찡 하고 들리니 잠이 올 리가 없고 자주 잠을 깨니 할 일없이 화장실에만 들락날락하며 소변을 보는데 그 또한 재미가 없었다. 가뜩이나 양기가 없어 소변 줄기가 발 앞에 뚝뚝 떨어져 옷을 버리기가 일수인데 자주 소변을 보니 나올 것도 없었고 힘을 주어봤자 한참을 기다려 두어 방울 나오고 또 두어 방울 나오니······. 금방 돌아서면 또 마려웠다. 그래서 참아보려면 방광이 이젠 완전히 망가졌는지 그 또한 참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소변이 마려워지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늙음이 분하고 억울하고 그래서,

― 에이! 일찍 죽어야 하는데! 마누라 앞서 죽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를 백 번도 넘게 했다.

아흔 다섯이 드는 해에 어지럼증이 도졌고 그래서 중상을 입었다. 아파트 입구에는 지면보다 조금 높게 서너 계단 대리석이 깔렸는데 어쭙잖게 발을 헛디뎠는가, 미끄러졌는가? 분명치 않지만 하여간 넘어졌는데 발목도 손목도 뼈에 금이 갔다는 게 아닌가? 다행히 허리뼈는 다치지 않았다는데 허리가 너무 아팠다. 차에 실려 정형외과에 갔고 꼼짝없이 들어 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진동댁이 간호를 한다고 병실에 붙어 지냈다. 아들네들이 들락거리면서 저희들끼리 의논하더니 하루는 큰아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이제 천지수목원 처분하입시더. 그래서 아버지가 편히 지낼 요양병원으로 옮기시고요. 우리 형제가 병구완을 할 수 없으니 그게 제일 좋을 듯합니더.”

“안 된다. 병구완은 진동댁이 하면 될 것이고,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농장은 안 판다!”

아들들은 농장을 판 돈으로 그를 양로원 같이 시설이 아주 좋은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켜 죽을 때까지 지내게 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는 그 얘기를 듣고 기가 막히고 슬펐다.

-- 내 말로가 그렇게 되는구나.

또 하루는 농장의 김상수가 병실로 찾아오더니 병문안 끝에 농장을 사겠다고 말했다.

“이제 제 힘으로 농장을 절반 쯤 살 수 있을 듯합니다. 어르신, 제게 넘겨주십시오. 시세에 따라 값을 쳐 드리겠습니다. 자제분들도 제 뜻에 찬성하시더군요. 절반 5천 평만 파세요. 어르신이 섭섭하시다니 나머지 5천 평은 그냥 두시고요.”

천 선생 큰아들은 나이가 일흔이 다 되어 가는데 이때껏 벌어 놓은 것을 까먹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나이가 예순 댓 되는 작은아들도 나이가 많아 상무 전무 같은 관리직에는 턱걸이를 하다가 오르지도 못하고 퇴직을 하고 말았다. 퇴직 후에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한다면서 부동산업에 투신하더니 언제는 살만하다고 큰 소리를 치더니 최근에는 부동산 경기가 내리막이라서 생활이 팍팍해졌다면서 애비를 보러 오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천 선생은 아들들의 얘기와 김상수의 권유에 오랫동안 갈등하며 밤잠을 설쳤다. 남동만을 불러다 놓고 상의를 했다. 남동만은 명쾌한 답을 즉석에서 했다.

“선생님! 이제 스트레스 받을 고집 피우지 마십시오. 그냥 아들들 하자는 대로 하세요. 선생님 생전에 이루어 놓은 것 사라지는 것이 아깝기도 하고 붙잡아 놓고 싶겠지만 이제 훌훌 털고 떠날 준비하세요.”

그는 한참만에야, “알았어.”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는 농장 절반을 처분하면서 아들에게 조건을 두 가지 내걸었다. 하나는 45년을 함께 고생하고 뒷바라지 해준 진동댁에게 1억을 주거나 작은 아파트라도 사주고 생활비를 좀 풍족하게 줘라, 또 하나는 그와 진동댁 모두 농장 산소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진동댁이 우리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를 돌본 건 큰 은혜를 입은 거나 다름없지요. 하지만 1억이란 거금을 준다거나 아파트를 사 주라니요? 그건 못하겠습니다. 법적으로 남남인데 만약 진동댁에게 돈을 줬다간 그 아들놈에게 다 뺏기고 맙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 산소 곁에 모시는 건 당연하지요. 물론 진동댁도 박 영감 무덤 옆에 묻어 드릴꺼구요.”

“야, 이놈아!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고 우리 집 식구가 진동댁에게 서운하게 하면 죄 받는다!”

“하여간, 아버지! 제가 효자는 못되지만 그것만은 안 됩니다. 제가 앞으로도 적당하게 알아서 진동댁을 돌볼 테니 걱정 마십쇼.”

“허어!”

천 선생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큰아들도 나이가 예순 여덟이니 세상일을 처리하기에 제 소신대로 할 나이라 결코 늙은 아비에게 양보할 눈치가 전연 없었다. 천 선생은 남동만을 불렀다. 그리고 전부터 가지고 있던 예금통장 여러 개를 내 놓았다.

“남 조합장, 아들놈들이 섭섭하게도 내 말을 안 듣는 군. 자네가 진동댁이 살만한 자그만 아파트 한 채 사 주고 그래도 돈이 남거든 생활비하라고 주게. 아들들에게는 비밀이야.”

“선생님 생각이 옳습니더. 진동댁도 이제는 호호백발 노인이 되어 허리가 구부러지고 숨이 차서 기동하기에도 힘이 든답디더. 안노인이 혼자 살려면 동사무소 가서 배급 타 먹어야할 형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걱정하지. 나야 요양병원에 가면 이제는 더 돈 쓸 일도 없을 것이고 진동댁이라도 편안히 노후를 보내야지.”

 

 

남동만 조합장이 병문안을 자주 다니는 진동댁의 전화를 받은 것은 천 선생이 ‘수면제를 몇 알 먹어야 죽나?’ 하고 물었던 열흘 후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선생님이, 선생님이·······.”

하고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와 그라요? 진동댁! 선생님께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때 다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요양병원 간병인 홍씨인 듯한 남자 음성이었다.

“천 선생님께서 돌아 가셨어요. 잠 오는 약을 과다 복용했나봐요. 자제분들께 연락을 했습니다만 할머니께서 조합장님께 연락을 꼭 먼저 해야 한다꼬 하기에······.”

“아아! 알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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