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연극세상 두 번째 작품
장막 희곡
물고기 남자
작/ 이강백
연출/ 이상우
등장인물
이영복
김진만
남자
여자
브로커
일꾼들
때: 여름
곳: 바닷가 양식장
남해연안의 양식장. 무대 중앙에 가건물처럼 허술하게 지은 창고가 있다. 물고기 양식에서사용하는 도구들- 알에서 갓 부화된 치어를 담아두는 수조.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뜰채, 좁은 통로에서도 운반 가능한 외바퀴수레, 사료용 먹이가 담긴 부대들, 양철통들, 낡은 군용침대, 허공에 매달린 해먹, 페인트칠이 벗겨진 탁자와 의자들, 그밖의 잡동사니들이 가건물 안을 차지하고 있다. 가건물 앞, 무대 전면이 좁은 뜰이며 객석은 바다가 된다. 바다는 적조현상으로 피처럼 붉다. 특히 저녁 무렵 황혼에는 그 붉은 색깔은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온통 차고 넘친다. 가건물 뒤. 무대 후면을 좌우로 횡단하는 길이 있다. 왼쪽이 읍내로 가는 방향이며 오른쪽이 바닷가의 다른 양식장들 쪽으로 가는 방향이다. 이영복과 김진만은 40년 동년배이다. 그들은 물고기 양식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이, 손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꾐에 빠져 양식장을 공동명의로 구입하였다. 무더운 여름에 발생한 적조 현상은 그들이 기대를 걸었던 양식어들을 집단폐사 시켰다. 브로커의 나이는 분명하지 않다. 얼핏보면 그는 이영복과 김진만보다 늙어 보이기도 하며. 혹은 반대로 젊어 보이기도 한다. 브로커는 이영복과 김진만에게 깍듯이 경어를 사용한다. 남자는 30대 중반이다. 그는 말끔한 용모와 교양있는 태도로서 호감을 준다. 여자는 30대 초반이며, 남자의 아내이다. 여자 역시 품위있는 말과 행동을 한다. 양식장의 일꾼들은 이영복과 김진만에게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주변의 다른 양식장에서 일급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이 연극을 다섯 명의 인물들(이영복, 김진만, 남자, 여자, 브로커) 만으로 진행할 경우, 일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장] 1장
(저녁무렵, 가건물 뒷길, 양어장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일꾼들이 외바퀴 수레들을 밀며 다가온다. 수레마다 양식장에서 건져낸 죽은 물고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일꾼들은 가건물 뒤를지나 죽은 물고기들을 묻는 구덩이를 향해간다. 그 구덩이는 가건물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후 일꾼들이 빈 수레를 밀며 되돌아오는 것으로 보아서 구덩이는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레의 반복되는 행렬은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된다. 가건물 안, 이영복이 군용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침대맡에는 주파수 조정이 안되는 고장난 라디오가 켜져 있다. 일기 예보와 권투시합 중계방송이 뒤섞여서 들려온다. 김진만, 구덩이에 죽은 물고기들을 버리고 돌아온다. 그는 양식장으로 가지 않고. 외바퀴 수레를 가건물 안에 멈춰 세우더니, 안으로 들어온다.)
[김진만] 바싹바싹 목이 타! 새까맣게 가슴속도 타고! (식탁으로 가서 주전자를 들어올리더니 입을 벌리고 물을 쏟아 붓는다) 며칠째 죽은 물고기만 건져냈더니 염병할, 나도 이젠 죽고 말겠어!
[이영복] (침묵)
[김진만] 건져도 건져도 끝이 없다니까!
[이영복] (침묵)
[김진만] 다 죽은거야! 한 놈도 남김없이, 수십만 마리가 한꺼번에 다 뒈져 버렸어!
[이영복] (침묵)
[김진만] 자넨 어때? 몸살인지 염병인지, 좀 나은거야?
[이영복] 라디오를 들었어---
[김진만] 라디오를 들으면 뭐해? 적조경보만 방송할 뿐, 무슨 대책을 알려주는게 없잖아? 속수무책이야, 속수무책! 날씨는 염병 앓듯 무덥고, 바닷물은 끓어 오르고, 시뻘건 플랑크톤이 바닷속에 가득 퍼져 독을 뿜어대니--- 도대체 우린 어떻게 해야지?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 고장난 라디오 좀 꺼!
(이영복, 라디오의 소리를 멈춘다)
[김진만] 여봐, 자네만 충격을 받은게 아냐. 이번 일로 나 역시 충격이 커. 자네
[페이지] 003
돈, 내 돈, 몽땅 털어서 이 염병할 양식장에 쏟아 넣었지! 그랬는데 염병할, 우린 이제 완전히 망했어!
[이영복] (침묵)
[김진만] 얼빠진 듯 가만있지 말고, 무슨 좋은 방법을 말해봐!
[이영복] 생각해 봐야겠어---
[김진만] 도대체 언제까지 생각만 할거야? 우리가 공동명의로 이 양식장을 구입했을 때, 그 염병할 브로커 자식이 뭐라고 했지? 몰라도 된다고 했어. 몰라도 된다고! 우리가 물고기를 먹어만 봤지 길러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그 사기꾼 브로커 자식이 몰라도 되니깐 안심하라는 거야. 손톱만한 물고기 새끼들을 사다가 양식장에 집어넣고 몇 개월쯤 기다리기만 하면, 저절로 말뚝만하게 자라난다면서, 투자한 돈의 몇 백배를 번다나 어쩐다나--- 우리가 속은거야! 몰라도 된다는 그 사기꾼 브로커 자식한테 우리가 속은거라구!
[이영복] (침묵)
[김진만] 우린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이영복] (침묵)
[김진만] 대답 좀 해!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 염병 앓다가 꼬꾸라질 자식이 상습적으로 남을 속여먹는 브로커라는 거야. 다른 양식장 일꾼들이 말해주더군. 적조 때가 되면 나타나 아주 헐값으로 양식장을 샀다가, 적조가 사라진 다음 아주 비싸게 팔아먹는 댔어. 가만히 앉아서 떼돈 벌 수 있다는 그놈 꾐에, 순진한 우리도 걸려든 거지
(김진만, 허공에 걸린 해먹으로 가서 작업복과 장화를 벗는다)
[김진만] 그 염병할 놈, 사기꾼 브로커 자식. 여기 다시 나타나기만 해봐라!
(김진만, 해먹 위로 올라가 눕는다)
[김진만] 난 가만두지 않을거야! 그 자식이 나타나면. 멱살 잡고 따귀부터 때리겠어! 양식장을 되돌려 줄테니까 우리 돈 내놓으라 호통을 치겠다구!
[이영복]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 있을까---
[김진만] 뭐라구?
[페이지] 004
[이영복] (침묵)
[김진만] 방금 뭐라고 했잖아!
[이영복] 난 생각해 봤어--- 생각해 봤더니---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은--- 뭔가 알고 했던건 하나도 없어
[김진만]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이영복] 생각해봐. 자네도. 우리가 처음했던 일은--- 신설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던 일이었지. 그런데 우린 무슨 책인지도 몰라도 됐어. 그저 오천권 가져오라 그러면 아무책이나 오천권 가져다주고, 만권 주문하면 만권 갖다 주고---
[김진만] 사립이든 공립이든 새로 지은 도서관은 의무적으로 채울 분량이 있잖아! 도서관 사서들이 일일이 책의 내용을 읽고 주문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구 우리가 내용을 선별해서 납품할 수도 없는 일이지!
[이영복]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야. 우리가 해온 일들은. 몰라도 되는 거였지. 도서관 납품으로 번 돈을 주식에 투자한 것도. 우리가 주식에 대해서 알고 했던 일은 아니었어.
[김진만] 어쨌든 우린 몰라도 돈을 벌었잖아!
[이영복] 주식으로 번 돈을 다음엔 택지 사업에 투자했고--- 몇 번인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 우리는 바다 양식장을 사들였지. 몰라도 된다--- 몰라도 물고기는 자란다는 말은--- 그 브로커 입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목소리였어---
(김진만, 벌떡 일어나 앉는다. 허공의 해먹이 좌우로 요동친다)
[김진만] 그러니까 뭐야? 우리가 이렇게 쫄딱 망한건 우리 잘못이다, 그거야?
[이영복] 이번만은--- 꼭 알아야겠어
[김진만] 뭘 알아? 아니, 알아서 뭐해? 망해버린 이제 와서 물고기 양식법을 알겠다는 거야 뭐야?
[이영복] 생각해보면 망한 이유는 알수 있겠지
[김진만] 염병할, 생각해 볼것도 없어! 우리가 망한건 그 사기꾼 브로커의 농간 때문이지. 우리 자신의 잘못은 아냐!
(유람선의 경적이 들려온다. 유람선은 양식장 가까이 다가와서 선회한다. 엔진 소리, 물결 갈라지는 소리, 유람선의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유행가 소리 등이 뒤섞여 들린다. 가건물 뒷길, 일꾼들이 수레를 멈추고
[페이지] 005
유람선을 바라본다. 김진만은 잔뜩 화가 나서 해먹에서 뛰어 내려온다)
[김진만] 저런 개자식들이 있나! 남들은 망해서 죽을 지경인데, 저 개자식들은 유람선을 타고 와서 시뻘건 바다가 재미있다 구경을 해? (두손을 둥글게 오무려 외친다) 야, 이 개자식들아! 암초에 부딪쳐 침몰해 버려라!
[이영복] 그냥 둬. 우리도 저 배를 탔었잖아
[김진만] 야, 몽땅 빠져 죽어버려!
[이영복] 파라다이스 관광호, 저 배 이름이 기억날거야
[김진만] 하지만 우리가 저 배를 탔던 때는 지난해 가을이었어! 적조는 구경도 못했고. 맑고 푸른 바다만 보았었다구!
(김진만, 가건물 앞으로 뛰어 나가 유람선을 향해 외친다)
[김진만] 이 개자식들아, 빠져 죽어라! 너희들 몽땅 적조속에 빠져서 죽어버려!
(유람선의 온갖 소리와 김진만의 외침이 뒤섞인다. 잠시 후, 유람선은 경적을 울리며 멀어진다. 김진만은 가건물 안으로 되돌아 온다)
[김진만] 고함을 질렀더니 목이 더 타는군!
[이영복] (침묵)
[김진만] (식탁의 주전자를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으며) 물도 없어!
(브로커, 가건물 뒤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다. 그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정장 차림이다. 가건물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브로커는 소리내 웃는다)
[브로커] 속이 다 후련하시겠습니다. 실컷 욕설을 하셨으니. 하하, 하하하, 배에서 들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김진만] 누구야?
[브로커] 납니다, 나
(브로커, 자전거에 실었던 손가방을 들고 가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브로커] 나를 잊은건 아니겠지요?
[페이지] 006
[김진만] 뭐, 잊었냐구? (브로커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는다) 이 사기꾼 브로커 자식아!
[브로커] 갑자기 왜이러십니까?
[김진만] (따귀를 칠 자세를 취하며) 어서 우리 돈 내놔!
[브로커] 아아, 점잖게 행동합시다. (이영복에게) 여보세요, 이 양반 좀 말려요
[이영복] (김진만에게 다가와서) 놓아드려, 멱살은 놓고 말해도 되잖아
[김진만] 놓으면 달아날걸!
[브로커] 달아날 사람이 왜 찾아오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안그래요?
[김진만] (브로커의 멱살을 놓는다) 대답해! 우리 돈 어떻게 할거야?
[브로커] 아이구, 숨막혀 죽을 뻔했네. 여긴 멱살을 안 잡혀도 숨쉬기가 어려운 곳이에요. 죽은 물고기들 썩는 냄새, 그 지독한 악취 때문에 숨이 막히거든요. 그래서 내가 좋은걸 가져왔어요. 진짜 양주입니다. 스코틀랜드산 위스키! 이걸 마시면 악취를 견딜 수 있죠!
(브로커, 가방을 열고 술 한병을 꺼낸다)
[브로커] 얼음 있겠지요? 양주는 얼음을 넣고 차갑게 마셔야 부드럽게 넘어가거든요
[김진만] 얼음은 없어
[브로커] 왜 없죠?
[김진만] 왜 없냐구--- ? 냉장고가 없으니까 얼음이 없지!
[브로커] 여름엔 냉장고를 꼭 사두라고 내가 말했는데요?
[김진만]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부로커] 지난 해 가을에 분명히 말했어요. 양식장 매매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 냉장고가 꼭 필요하니 사두라고 했잖아요
[김진만] (이영복에게) 그랬었나--- ?
[이영복] 글쎄--- 기억나지 않는군
[브로커] 할 수 없군요. 얼음없이 그냥 마십시다. (식탁 위의 지저분한 그릇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든다) 술잔은 준비해 두셨겠죠? 깨끗한 유리잔이라든가 크리스탈잔 같은--- ?
[김진만] 설마 술잔을 사두라는 말은 안 하셨겟지?
[브로커] 물론 그 말도 했었어요. 내 기억은 정확합니다. 매매 도장을 찍으면서, 내가 두분께 물었었죠. 혹시 결혼
[페이지] 007
은 하셨느냐 그랬더니, 두 분 다 결혼은 하셨고 아이들도 있다고 하시더군요
[브로커] (김진만을 바라보며) 선생께선 열다섯살짜리 사내아이, 열두살짜리와 아홉 살짜리 여자애가 있다고 하셨지요? (이영복에게) 선생 가족은 부인과 사내아이 하나라고 하셨구요. 난 양식장 때문에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사는게 힘들거라고, 무척 외롭고 괴롭더라도 기운을 내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브로커, 손가방에서 크리스탈 술잔 세 개를 꺼내 식탁위에 올려놓고 술을 따른다. 그는 자기 몫의 술잔을 높이 쳐든다)
[브로커] 자, 마십시다!
(김진만과 이영복, 브로커의 행동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브로커] 왜 마시질 않죠? 놀랠 것 없어요. 선생들께서 잊었을 것 같아 내가 술잔을 준비해 왔습니다. 자, 드세요! 우리 기분 좋게 건배합시다!
(김진만과 이영복, 브로커의 권유에 술잔을 든다. 브로커는 술을 마신다음 가건물 안을 둘러본다)
[브로커] 얼핏 둘러봐도 알겠습니다. 두분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퀴퀴한 이불, 땀과 소금기에 찌든 옷, 음식물 찌꺼기를 씻지 않은 그릇들--- 일년만 참자, 일년만 참고 고생하면 떼돈을 벌어 가족들과 기쁘게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다짐이야 하셨겠지만 이런 곳에서 일년을 보낸다는 건 지옥에서의 천 년과 같았겠죠
[김진만] 맞아, 당신 말이 맞다구! 그렇게 모든걸 잘 아는 당신이 우릴 속였어!
[브로커] 속이다니요?
[김진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한테 그랬잖아! 양식장은 몰라도 된다, 물고기는 저절로 자란다면서!
[브로커] 난 그런 말 안했는데요?
[김진만] 안했다?
[브로커] 네
[김진만] 우리 둘 다 들었어! 지난해 가을, 우리 둘이 파라다이스 관광호를 타고 바다 구경을 왔었잖아! 맑고 푸른 바다 구경을 하면서 참 멋있다, 멋있어, 우리둘이 연신 감탄하고 있는데 당신이 슬그머니 우리 곁으로
[페이지] 008
다가오더군!
[브로커] 그건 그랬었죠. 나도 그 배를 타고 있었으니까요.
[김진만] 그러더니 우리더러 보라고, 손가락으로 바닷가쪽을 가리켰어!
[브로커] 네, 그랬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시늉을 하며) 바로 이렇게 검지 손가락으로.
[김진만] (이영복에게) 다음은 자네가 말해! 이 사기꾼이 우리에게 뭐라고 했는지 말하라구![브로커] 잠깐만요. 난 그때를 다 기억합니다. 두 분이 하도 감탄하시기에 내가 바닷가를 가리키며 말했지요. 저기 바닷가에 양식장이 있는데 사지 않겠냐구요. 마침 나는 그 양식장을 팔아야 했고, 그래서 살 만한 사람을 찾는 중이었거든요.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두 분이 곧 사겠다는 반응을 나타내셨어요
[김진만] 몰라도 된다고 했잖아, 몰라도 된다고!
[브로커] 아뇨, 난 몰라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김진만] 어어, 이 사기꾼이--- (이영복에게) 여봐, 자네가 말하라니까! 사실 그대로 말해![이영복] 내 기억에는--- 그날--- 그러니까--- 얼마면 살 수 있느냐, 우리가 물었고---
[브로커] 난 일억오천만원이면 팔겠다 대답했죠
[이영복] 우린 사고는 싶지만--- 양식장 일은 전혀 모른다고 했어요
[브로커] 그렇게 말했다구요? 전혀 들은 기억이 없는데요!
[이영복] 당신은 우리에게 해마다 여름이면 적조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줘야 했어요
[브로커] 아, 그건 말 안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어떤 해엔 적조현상이 생기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요. 여름 날씨가 무더우면 붉은 플랭크톤이 번식하고, 서늘하면 번식하지 않으니까요. 일년 전에, 그 다음해의 여름 날씨를 어떻게 알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김진만과 이영복의 잔에 술을 따른다) 잔이 비었군요. 한잔씩 더 하세요
[이영복] 당신은 다른 것들도 말 안했어요. 우리에게 당연히 알려줬어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입을 다물고 말 안한거죠
[김진만] 염병할, 양식장 팔아먹을 생각만 했던거지! 물고기 새끼들을 집어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팔뚝만큼 커다란 물고기가 된다면서, 우리를 얼렁뚱땅 속여먹은 거야
[브로커] 인간이란 그래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것만 기억하죠. 아주 좋은 것,
[페이지] 009
희망적인 것만 기억하고, 나쁜건 모두 잊어버리는 겁니다
[김진만]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기억이 아니라 양식장이야! 물고기가 다 죽어버린 양식장을 어떻게 할거냐. 그것이 지금은 중요한 거라구!
[브로커] 기억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서로 기억을 대조해서, 책임이 어느쪽에 있는지 가려내야 하니까요
[김진만] 그까짓 기억은 어찌됐든 상관없다니까! 당신 양식장은 당신이 다시 가져가! 우리돈 일억오천은 우리에게 돌려주고! 그럼 되는거야! 원상태 대로 하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다구!
[브로커] (이영복에게) 선생도 같은 의견이십니까?
[김진만] 물론 똑같지! 우린 동업자거든!
[브로커] (이영복에게) 원상태대로 하자. 정말 그건가요?
[이영복] 네---
[김진만] 힘있게 대답해!
[이영복] 네, 그렇습니다
[브로커] 그럼 더 이상 말할 필요 없군요
(브로커, 식탁 위의 술잔들을 뒤집어 비운다. 그리고 손가방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술잔을 닦더니 그것들을 하나씩 가방속에 집어 넣는다)
[김진만] 당신, 지금 뭣하는거야?
[브로커] 돌아가려구요
[김진만] 돌아가다니--- ?
[브로커] 난 그래도 선생들을 위해서 왔던겁니다. 점잖게 고급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면, 서로 만족할 만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지요. (가방을 들고 나갈 자세를 취하며) 그런데 유감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는군요
[김진만] 염병할! 당신 조건은 뭐야?
[브로커] 내 조건은 공정합니다
[김진만] 말을 해! 그 공정한 조건을 들어보자구!
[브로커] 십분지 일이지요
[김진만] 십분지--- 일--- ?
[브로커] 원금의 십분지 일을 주고 양식장은 내가 다시 사겠습니다
[김진만] 이런 개자식이 있나!
[브로커] 냉정히 생각하길 바랍니다. 잘 생각하셔서 십분지 일이라도 받는 것이
[페이지] 010
유리하다고 판단되거든 연락 하십시오. 난 읍내 여관에 있겠습니다
(브로커, 유유히 가건물 밖으로 나간다)
[장] 2장
(아침, 날이 밝는다. 창고 뒤쪽 길은 인적이 없이 조용하다. 이영복은 군용 침대에 누워있고 김진만은 해먹에 누워있다. 사이, 김진만, 몸을 뒤척인다. 해먹이 흔들린다. 김진만은 상반신의 일부를 해먹 밖으로 내놓고 아래에 있는 이영복을 향해 말한다)
[김진만] 여봐, 자는거야?
[이영복] 아니
[김진만] 난 꼬박 뜬눈으로 샜어
[이영복] 나도 못잤어
[김진만] 영병할---
[이영복] (침묵)
[김진만] 엊저녁 마신 술이 싸구려 아냐? 좋은 술은 깊은 잠을 자게 할텐데--- 도리어 밤새껏 골치만 지끈지끈 쑤시게 하더라구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 냉장고 말야,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아. 우리가 또 한번 그 사기꾼한테 당한거야
[이영복]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난 지난 밤--- 여러가질 생각했지. 그 중에서--- 이상한게 기억났어
[김진만] 그게 뭔데?
[이영복] 음, 어떤 그림이야. 물고기와 사람을 반씩 합쳐놓은 것같은...
[김진만] 잠은 안자고 공상을 했었군
[이영복]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을 예로 들어 가리키며) 하반신은 이렇게, 발끝에서 허리까지는 물고기야. 허리부터는 점점 사람 몸으로 변해서. 두 손도 달렸고, 머리도 달렸는데--- 분명히 남자의 모습이었어
[김진만] 난 인어는 봤지. 어릴 때 동화책이나 만화책에서 많이 봤거든
[이영복] 인어하곤 달라. 인어는 하반신이 물고기, 상반신은 여자잖아. 그런데 내가 봤던 그건 남자였다니까
[김진만] 좋아, 어디에서 그걸 봤었는데?
[이영복] 글세--- 어딘지는 모르겠어. 혹시 우리가 도서관에 납품하던 책에서 본
[페이지] 011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자네 기억나?
[김진만] 난 본적이 없어
[이영복] 어쨌든 그 이상한 그림 때문에--- 우리가 배를 탔던 것 같아---
[김진만] 배만 안탔으면 염병할, 우린 사기꾼 브로커를 만나지도 않았을거고, 이렇게 양식에 투자했다가 쫄닥 망하게 되지도 않았겠지!
(김진만과 이영복, 침묵. 그들은 바다쪽을 바라본다. 창고 뒷길, 일꾼들이 외바퀴 수레를 끌면서 바닷가의 양식장으로 가고 있다)
[김진만] 저 사람들, 해 떳다고 또 시작이군. 하루종일 죽은 물고기 건지는게 지겹지도 않은거야?
[이영복] 자넨 오늘 쉬어. 내가 하지
[김진만] 오늘 일하고 또 며칠 아프려고?
[이영복] 그래도 건져내야지. 죽은 걸 그냥 뒀다간 썩어서 다른 산 것마저 죽게 되잖아
[김진만] 산 것은 이젠 없어!
(김진만, 해먹 아래 벗어 두었던 옷을 입는다)
[김진만] 희망을 갖지마, 더 이상! 저 사람들도 무슨 희망이 있어서 저런 짓을 하는건 아니라구. 물고기란 물고기는 다 죽은걸 알면서도 하루종일 저렇게 할 뿐이야
[이영복] (침묵)
[김진만] 사실은 어젯밤 잠을 안자면서 생각해봤어. 자네가 반절은 인간, 반절은 물고기를 합쳐놓은 것 같은 그런 공상이나 하고 있을 때, 난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지. 결국 뭐냐,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그 사기꾼 브로커에게 양식장을 되파는거야, 그게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 해결방법, 유일한 탈출구라구. 하지만 십분지 일은 억울해. 양식장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어? (치어들을 담아 두었던 수조를 가리키며) 저 커다란 수조 가득히 새끼 물고기를 사왔었잖아. 거기에 사료용 먹이에다가, 또 그 동안의 우리들 품삯까지 계산하면 엄청거야. 어쨌든 양식장 원금의 십분지 일을 받는다면 겨우 일천오백이잖아. 그걸 공동투자한 우리가 절반씩 나눠가지면 칠백이십오--- 여봐, 내말 듣고 있어?
[이영복] 음, 듣고 있어
[페이지] 012
[김진만] 정말 그건 푼돈이지!
[이영복] (침묵)
[김진만] 난 읍내에 갈거야. 읍내 여관에 가면 그 브로커 자식을 만날 수 있겠지! 만나서 원금의 십분지 사, 최소한 그 정도는 달라고 하겠어!
[이영복] 그가 들어줄까--- ?
[김진만] 어제 저녁 그 자식이 왔을 때, 우리 조건을 강력히 제시하고 결판을 냈어야 했어. 그런데 자넨 너무 소극적이었지. 완전히 풀이 죽어서, 그 자식이 무슨 소릴 해도 반박 한 번 제대로 못하더라구
[이영복] (침묵)
[김진만] 자넨 오늘 여기 있어. 나 혼자 가서 결판짓는게 낫지!
[이영복] 읍내에 가거든 살 것이 있는데---
[김진만] 말해봐, 뭔데?
[이영복] 쌀이 바닥났어. 먹을만한 부식도 없고---
[김진만] (손을 내밀며) 돈을 줘
(이영복, 군용침대의 벼개에서 지갑을 꺼내와 김진만에게 준다. 김진만, 지갑을 열어보더니 실망한 표정이다)
[김진만] 겨우 이거야, 우리에게 남은 돈이?
[이영복] 음
[김진만] 염병할--- 굶어 죽게 생겼군!
(김진만, 지갑을 다시 호주머니 속에 넣고 가건물 밖으로 나간다. 가건물 뒷길, 김진만은 일꾼들과 마주친다. 일꾼들의 수레에는 물고기 대신 죽은 사람들이 실려 있다. 그냥 지나치려 했던 김진만이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듯이 멈춰선다)
[김진만] 이거--- 어떻게 된거지?
[일꾼들] (아무 대답없이 수레를 밀면서 지나간다)
[김진만] 어떻게 된거냐고 묻잖아?
[한일꾼] (김진만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김진만] 뭐, 파라다이스호?
(김진만, 가건물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페이지] 013
[김진만] 사람이 죽었어! 죽은 물고기가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건져서 실어 간다구!
[이영복] 무슨 소리야?
[김진만] 저길 봐! 양식장 일꾼들이 실어 가잖아! 파라다이스호가 암초에 부딧혔다는 거야. 어젯밤에! 설마 내가 욕을 했다고, 빠져버려라 욕 좀 했다고 침몰한 건 아니겠지?
[이영복]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 된다) 맙소사---
[김진만] 물론 아니지, 아니야! 배에서는 내 욕이 들리지도 않았을걸! 나, 다녀올게! 읍내에 가서 그 브로커 자식도 만나고, 먹을 것도 사오겠어!
(김진만, 짐짓 태연하게 가건물 밖으로 나간다)
[장] 3장
(오후 3시경 이영복, 굵은 철사를 휘어서 갈고리 형태가 되도록 만든다. 무더위와 허기에 지친 듯 그의 작업은 힘겨워 보인다. 그는 가건물 안에서 기다란 장대를 찾아내더니, 장대 끝에 갈고리를 달고 끈으로 묶는다. 김진만, 읍내에서 돌아온다. 그는 양손에 들었던 두 개의 짐꾸러미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김진만] 염병할, 직사하게 더워! 짐은 무겁고 말이야! 이걸 들고 오는데 죽는줄 알았어!
[이영복] 미안해, 자넬 시켜서---
[김진만] 그게 뭐야?
[이영복] 음, 이거 갈고리---
[김진만] 그걸 왜 만들었지?
[이영복] 죽은 사람들을 건지려고
[김진만] 어디 나에게 줘봐
(김진만, 이영복에게 갈고리 달린 장대를 받아들고 살펴본다)
[이영복] 아까 낮에 우리 양식장엘 가봤지
[김진만] 제법 잘 만들었군
[이영복] 다른 양식장 일꾼들을 만났는데, 지금까지 건진건 몇 명 안되고--- 대부분 배가 침몰한 곳에 잠겨 있을 거라는군
[페이지] 014
[김진만] 침몰한 곳이 어디야?
[이영복] 양식장과는 상당히 멀어
[김진만] 멀다구? 아침에 양식장에서 시체를 건져냈었잖아?
[이영복] 그건 밀물 때 바닷가 쪽으로 밀려왔다가 양식장 차단망에 걸린거지. 구조선도 여러척 왔었지만, 양식장 근처에 조금 있다가 다들 침몰한 곳으로 옮겨가더군
(김진만, 갈고리 달린 장대로써 식탁 위에 있는 짐꾸러미 하나를 낚아 올린다)
[김진만] 이정도면 충분해! 아무리 무거운 시체라도 충분히 건져올릴 수 있겠다구!
[이영복] (식탁위에 남아있는 짐꾸러미를 푼다) 이건 통조림 뿐인데?
[김진만] 고등어 통조림, 정어리 통조림이지! 양식장에서 물고기 한 마리 생것으로 잡아먹지 못하고 통조림에 든 것을 사먹어야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거야?
(김진만, 갈고리 달린 장대로 낚아 올렸던 짐꾸러미를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김진만] 짠, 짜라짠! 이게 뭐냐, 양주야! 어저녁 브로커 자식이 가방속에 넣어갔던 바로 그 양주라구! 자네 배고플텐데, 시장기를 없애는 덴 밥보다는 술이 빨라. 안주는 통조림을 하나 따면 돼
[이영복] 술은--- 싫어
[김진만] 정어리를 먹겠어? 고등어를 먹겠어?
[이영복] 먹고 싶거든 자네나 먹어
[김진만] (통조림 뚜껑을 따며) 얼핏 봐서는 몰라. 정어리와 고등어, 고등어와 정어리, 서로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구 (뚜껑이 열린 통조림 속을 들여다 본다) 하긴 자세히 봐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자넨 알아?
(김진만, 식탁 위의 그릇 두 개에 양주를 붓는다)
[김진만] 어쨌든 마셔
[이영복] 난 싫다니까
[페이지] 015
[김진만]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이영복] 아냐---
(김진만, 그릇에 담긴 술을 단숨에 마신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통조림속에 든 생선 한 토막을 입에 넣는다)
[김진만] 그 브로커 자식 말이야, 능청맞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자기는 크리스탈 술잔만 챙겨온 줄 알았는데, 여관에 와서 보니깐 술병이 가방속에 있더라는 거야. 그러면서 우리가 얼마나 자길 욕했겠느냐, 째째한 자식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멀리 자기 귀에까지 들리더라는군
[이영복] 우리 조건을 말했어?
[김진만] 물론 했지! 원금의 십분지 일은 터무니 없으니 십분지 사를 달라. 그랬더니 그 염병할 자식이, 십분지 사야말로 터무니없다는 거야!
(김진만, 다시 손가락으로 통조림 속의 생선 한 토막을 집어내 입에 넣는다)
[김진만] 직접 먹어봐도 모르겠어. 정어리와 고등어, 그 맛의 차이를 모르겠다구, 어쨌든 사기꾼 브로커 자식과 나는 서로 팽팽히 맞섰지. 그 자식 하는 말이 십분지 일도 잘 쳐준거래. 요즘 양식장 팔 사람은 많지만 살 사람은 없다는거야. 왜 없느냐. 내가 따져 물었지. 우리 같은 순진한 사람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한테 다시 넘겨 팔아라. 그랬더니 그 자식이 이러잖아. 예전엔 적조 현상이 드문 탓인지 그걸 사람들이 몰랐는데, 요즘엔 적조만 생기면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것 모를 사람 찾기란 아주 힘들다는 거야. 난 그거라면 걱정 말아라, 파라다이스 관광호는 침몰해 버렸다고 했지. 그 사기꾼 자식, 처음엔 믿지 않더군. 무슨 농담이냐, 그럼 표정이야. 그랬는데, 여관 근처가 시끄러워졌어 (통조림에서 생선 토막을 꺼내 내밀며) 자네도 먹어봐, 정어리 맛인지 꽁치 맛인지 구별해 보라구
[이영복] 자네나 먹어
[김진만] (생선 토막을 자기 입에 넣는다) 그 사기꾼 브로커 자식이 묵고 있는 여관이 읍사무소 바로 앞이었는데, 그 자식과 내가 창밖으로 바라보니까 읍사무소 정문에 사고대책 임시본부라고 쓴 현수막을 걸고 있잖아. 신문사 취재차, 병원 응급차, 그리고 유가족을 실은 자동차들이 몰려와
[페이지] 016
서 야단 법석이야. 사기꾼 브로커 자식 그제서야 표정이 심각해지더군. 이제 입장이 유리해진건 그 자식이 아니라 우리야
[이영복] 뭐가 유리해 졌지? 오히려 이번 사고 때문에 적조가 더 유명해 질텐데?
[김진만] 자넨 하나는 생각하고 둘은 생각 못하는군. 모두들 관심은 사고에만 쏠려 있어. 그렇잖아? 물고기 죽는 것하고 사람 죽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 당분간 적조는 입에 오르지도 않고, 오직 물속에 빠져 죽은 사람들 이야기만 떠들썩할걸
[이영복] (뚜껑 열린 통조림을 바라보며) 통조림엔 정어리라고 표시되어 있어
[김진만] 그걸 어떻게 믿어? 정어리 대신 꽁치를 넣을 수도 있잖아?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 사기꾼 자식과 내가 점심을 먹으러 갔지. 여관에서 나와서 식당으로 갔는데, 거기서 내가 뭘 봤는지 알아? 식당에 이상한 남자들이 가득 차 있더군. 잠수복, 오리발, 산소통, 그런 장비를 가진 남자들이 말이야. 그리곤 그들끼리 소근댔어. 내일이나 모래쯤이면 시체 한 구당 찬만원이 될거라구
[이영복] 천만원이라니?
[김진만] 사망자의 시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군. 시체가 있는 경우 보상금 문제도 빨리 해결나고, 생명보험이라든가 각종 보험금도 곧바로 지급된다는 거지. 하지만 시체가 없으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진데. 실종자의 사망이 확실해질 때까지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하고, 보험금 지급도 보류되고--- 경찰이 바닷속에서 시체 찾는 노력은 하겠지만 별로 기대할 것 없다는 거야. 결국 애가 탄 유가족들이 돈을 주고 전문적으로 시체 건지는 사람한테 맡긴다는군. 내가 봐도 잠수복 입은 그들은 완전히 프로더라구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래서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 왕년엔 나도 해병대 잠수 대원이었다--- 내말 듣고 있어?
[이영복] 음, 듣고 있어
[김진만] 사기꾼 브로커 자식, 얼굴 표정이 달라지는 거야. 밥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게 참말이냐고 물었어. 난 눈썹 하나 까딱않고 계속 큰소리를 쳤지. 물론 해병대는 커녕 헤엄칠 줄도 모르지만--- 그 브로커 자식, 완전히 기가 죽더군. 그러면서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내 말 듣는 거야?
[이영복] 듣고 있잖아. 그가 우리 바라는 대로 주겠다고 하던가?
[페이지] 017
[김진만] 그 자식이 당장 확답을 안하고는, 대신 우리를 한번 더 만나러 오겠데
[이영복] 만나러 온다면--- ?
[김진만] 십분지 사에 대해서 우리와 협상해보겠다 그거지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 자식이 이 양주를 자네한테 갖다 주라더군
[이영복] 왜 나에게?
[김진만] 내가 워낙 강한 상대니까, 약해 보이는 자네에게 선물을 줘서 호감을 사려는 수작이겠지
[이영복] 언제 오겠다고는 안해?
[김진만] 오늘 저녁에 올지 모르지, 아니면 내일 아침에
[이영복] 그렇게 빨리?
[김진만] 급한건 그 자식이야
[이영복] (침묵)
[김진만] 우린 느긋해 보일수록 좋아. 그렇잖아?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 사기꾼 브로커 자식과 나는 점심을 먹고 헤어졌지. 서로 상대방 실력을 인정하듯 힘껏 악수를 하고 말이야. 그 자식은 여관으로 기어들어가고, 나는 읍내 시장에 가서 물건들을 샀어. 겨우 통조림 몇 개, 쌀 몇 되--- 우리 신세가 참 처량하더군
(김진만, 벌떡 일어나 갈고리 장대를 집어들고 나가려 한다)
[이영복] 어딜가?
[김진만] 천만원짜리!
[이영복] 천만원 짜리--- ?
[김진만] 시체를 건지려구!
[이영복] 썰물 때야. 지금은
[김진만] 양식장 너머 멀리 바다로 나가야지! 두고봐! 수두룩하게 건져올테니까!
(김진만, 어깨에 갈고리 장대를 둘러매고 나간다. 그는 가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외바퀴 수레를 끌고 길쪽으로 간다. 죽은 물고기가 가득 담긴 수레를 끌고 오는 일꾼들과 마주친다. 김진만, 의기양양하게 지나간다)
[페이지] 018
[장] 4장
(새벽. 가건물 주변, 안개가 자욱하다. 김진만, 안개속에서 나타난다. 그는 외바퀴 수레에 의식불명의 한 남자를 싣고 가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이영복을 부른다)
[김진만] 여봐, 자는거야? 일어나서 이걸 보라구!
[이영복] (침대에서 일어나며) 그게 뭔데?
[김진만] 내가 사람을 건졌어!
(이영복, 김진만이 세워둔 수레로 다가간다)
[김진만] 아직 살아있어
[이영복] 살아 있다니--- ?
[김진만] 죽지 않았다 그거지.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촛대바위 알지? 그 부근 암초에서 뭔가 사람 신음소리가 들리더군
[이영복] 불을 켜야겠어. 어두워서 잘 안보여
(이영복, 식탁으로 가서 위에 매달려 있는 전등을 켠다)
[김진만] 전등은 켜지마!
[이영복] 왜--- ?
[김진만] 어서 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없어!
(이영복, 김진만의 기세에 눌려 전등을 끈다.)
[이영복] 상처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잖아?
[김진만] 내가 봤는데 몸은 멀쩡해. 다만 지금은 탈진상태여서 움직이지 않을 뿐이야
[이영복] 그래도 어서 병원에 데려 가야지
[김진만] 병원보다는 먼저 읍내에 가서 알아볼게 있어. 산 사람을 건지면 얼마를 받는지 그걸 알아봐야지. 여봐, 자네 생각은 어때? 죽은 사람을 천만원 받는다면, 산 사람은 더 받지 않겠어?
[이영복] 우선 내 침대에 눕히자구
[페이지] 019
(이영복, 외바퀴 수레를 자신의 침대로 끌고 간다. 이영복과 김진만은 남자를 침대에 눕힌다)
[이영복] 자네가 발견했을 때 이 남자 말을 했었어?
[김진만] 말은 못했지. 하지만 난 한눈에 알아봤어. 파라다이스호에 탔던 사람이라는걸
[이영복] 어떻게--- ?
[김진만]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거든
[이영복] 다행이군
[김진만] 아까 자네한테 물었잖아? 산 사람이 죽은 사람보다 훨씬 비싸겠지?
[이영복] (침묵)
[김진만] 왜 대답을 안해?
[이영복] 글쎄--- 산 사람을 죽은 사람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
(이영복, 침대에 눕힌 남자의 가슴에 귀를 댄다)
[이영복] 심장이 뛰는데---
[김진만] 그래, 사람이란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거든! 그러니깐 산 사람을 발견한 나에겐 보상금을 몇 배나 더 많이 줘야 당연해!
[이영복] 온몸이 차가워. 젖은 옷을 벗기고 맛사지를 해야겠어
(이영복, 남자의 젖은 옷을 벗긴다. 김진만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식탁으로 가서 양주병과 숟가락을 들고 온다)
[김진만] 이걸 먹여봐
[이영복] 술을?
[심진만] (숟가락에 술을 따라 이영복에게 내밀며) 술을 먹으면 체온이 높아져
(이영복, 남자의 입을 벌리고 술이 담긴 숟가락을 넣는다. 김진만, 다시 식탁으로 가서 통조림통을 들고 온다)
[김진만] 고등어를 먹일까? 아니면 정어리를 먹여? 하긴 뭘 먹여도 분간 못하겠지?
[페이지] 020
[이영복] 아직 그런걸 먹일 때가 아냐. 기도에 막혀 죽을지도 몰라
[김진만] 그래?
[이영복] 술도 먹이지 않는게 좋겠어
[김진만]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말하는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괜히 아는체 하다가 죽이지 말어. 죽으면 값 떨어져
(이영복, 남자의 몸을 맛사지 한다. 가건물 뒷길. 안개속에서 브로커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다. 브로커는 하얀색 반바지와 하얀색 티셔츠를 입은 경쾌한 차림이다. 그는 가건물 앞족에 와서 자전거의 경음기를 울린다)
[김진만] 이 새벽에 누구야?
[이영복] 누가 왔지?
[김진만] 내가 나가볼테니까, 자넨 담요로 그 사람을 덮어놔!
(김진만, 황급히 가건물 앞쪽으로 나온다. 이영복은 담요를 펼쳐서 남자를 덮어준다)
[브로커] 안녕하십니까!
[김진만] 염병할, 누구라구--- 이렇게 일찍 왠일이야?
[브로커] 운동이죠. 아침 일찍 조깅보다는 자전거가 몸에 좋거든요 (가건물 앞을 자전거에 탄채 맴돌며) 선생은 무슨 운동을 하세요?
[김진만] 난 운동 안해
[브로커] 자전거는 다리 근육에도 좋고, 심폐 기능에도 좋아요
[김진만] 좋거든 혼자 실컷 하시지
[브로커] (자전거를 멈춰 세운다) 선생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봤지요. 어제 여관으로 날 찾아와서 그러셨잖아요. 이번 일로 선생의 친구분 충격이 크다구요. 완전히 얼빠진 듯 멍청하게만 앉아있다, 선생 역시 그 꼴이 되기전에 하루라도 빨리 여길 떠나고 싶다. 그런 애절한 부탁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난 동정심이랄까 불쌍한 사람한테 자선을 베풀고 싶은 심정, 뭐 그렇게 되더군요. 하지만 십분지 사를 달라는 건 터무니 없어요.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들어드릴 수 없는겁니다
[김진만] 여봐, 지금 말 다했어?
[브로커] 왜 벌컥 화를 내시죠?
[페이지] 021
[김진만] 내가 당신한테 애걸복걸 했다구?
[브로커] 네, 어제 날 만나서 그랬잖아요
[김진만] 난 당신한테 비굴하게 그런 적 없어! 당당히, 내가 받아야 할 금액을 제시한 거라구! 그런데 뭐, 불쌍한 사람처럼 애절하게 부탁을 해?
[브로커] 눈물까지 줄줄 흘리시던걸요
[김진만] 내가 눈물까지--- ?
[브로커] 전혀 기억이 없으세요?
[김진만] 염병할! 당신이 없는 기억을 지어낸다고 내가 기죽을 것 같아?
[브로커] 기가 죽다니요?
[김진만] 기가 팍 죽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십분지 일만 받고 물러날 것 같으냐구?
[브로커] 선생하곤 말이 통하질 않는군요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며) 선생의 동업자, 안에 계시겠죠?
[김진만] (브로커 앞을 가로막는다) 안돼! 들어가지마!
[브로커] 난 선생 친구분과 말하고 싶어요
[김진만] (가건물 안을 향하여) 이리 나와봐! 이 사기꾼 브로커가 자네하고 말하겠데!
(이영복, 가건물 밖으로 나온다. 브로커는 이영복을 자세히 살펴본다)
[브로커] 저어, 괜찮으세요?
[이영복] 네--- ?
[브로커] 혹시나 정상이 아니십니까?
[이영복] 무슨 말씀이신지--- ?
[브로커] 어제 선생의 동업자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더군요, 선생이 아주 이상해 졌다구요
[김진만] 내가 언제 그랬어?
[브로커] 내 기억은 확실합니다. 지난 해 일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겨우 어제 일을 잊겠어요? (이영복에게) 나 때문에 정신적 충격이 컸다니 미안합니다. 어쨌든 내가 조금은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래서 다시 한번 드리는 말씀인데, 원금의 십분지 일을 받고 양식장을 처분하세요.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그것마저 받기 어렵습니다
[김진만] 이 자식이 어제하곤 전혀 딴판이네!
[브로커] (냉정한 태도로) 이 자식이라뇨?
[페이지] 022
[김진만] 내가 말한 것 기억 못해? 당신이 또 십분지 일 어쩌구 하길래, 난 파라다이스호가 침몰했다 그랬지?
[브로커] 침몰은 나도 알고 있었어요. 아침 일찍부터 그 소문으로 읍내 전체가 떠들썩했으니까요 (이영복을 바라본다) 그런데 뒤늦게, 선생의 동업자인 저분이 헐래벌덕 달려오더군요.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을 싣고 다니며 적조를 관광을 시키던 배가 침몰했으니,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그럽디다. 앞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아질 텐데--- 십분지 일 받고는 안 팔겠다, 최소한 원금의 십분지 사는 내놓아라, 마치 그것도 더 받을 수 있는걸 양보한다는 듯이 그러셨어요
[김진만] 바로 그거야! 이제 유리해진건 우리고, 불리한 건 당신이라구!
[브로커] 하지만 선생들이 유리해졌다는 건 착각일 뿐이죠.
[김진만] 착각--- ?
[브로커] 착각은 성질 급한 사람한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김진만] 뭐가 어째?
[브로커] (여전히 김진만은 외면하고 이영복을 바라보면서) 저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앞세웁니다. 그리곤 뭔가 알지도 못한채, 욕망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거지요
[김진만] 좋아, 좋다구! 그럼 한가지만 묻겠는데, 살아 있는 사람이 비싼거야, 아니면 죽어 있는 사람이 비싼거야?
[브로커] (김진만에게 얼굴을 돌리며) 네? 무슨 질문인지---
[김진만] 그것도 몰라? (의기양양하게 브로커의 어깨를 툭툭치며) 그거야 산 사람이 몇 배나 비싸지! 그래서 우리가 유리해졌고 당신은 불리해졌어!
[브로커] 무슨 뜻인지 난 모르겠어요
[김진만] 그럼 힌트를 주지. 보상금!
[브로커] 보상금--- ?
[김진만] 더 이상 설명 않겠어!
[브로커] 글쎄요, 경우에 따라서 다른 것 아닐까요? 죽은 사람 보상금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산 사람 보상금은 주지 않거든요
[김진만] 뭐, 뭐라구--- ?
[브로커] 무슨 보상금인지 힌트 하나만 더 주시죠?
[김진만] 저리 비켜! 내가 직접 읍내에 가서 알아볼테니까!
(김진만, 브로커를 밀치더니 자전거를 빼앗는다)
[페이지] 023
[브로커] 그건 내 자전거예요!
(김진만,자전거에 올라타고 읍내를 향해 달려간다. 이영복은 넘어져 있는 브로커를 부축해서 세운다)
[이영복] 어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브로커] (엉덩이를 손으로 털며) 아뇨, 괜찮아요
[이영복] 다행입니다
[브로커] 선생의 동업자, 참 빠른데요. 저렇게 조급한 사람과 상대하면 반드시 이깁니다. 더구나 나는 상대방을 바싹바싹 약올리는 재주가 있거든요. 결국 저 사람은 양식장을 팔고 떠날겁니다. 하지만 선생은 달라요. 팔겠다는 것도 아니고 안팔겠다는 것도 아닌--- 선생의 태도는 애매모호 하거든요
(이영복, 안개가 걷혀가는 바닷가 쪽을 가리킨다)
[이영복] 저쪽 저 바닷가를 보세요
[브로커] (바닷가 쪽을 본다) 뭐가 있죠?
[이영복] 잘 아시겠지만 저 바닷가의 양식장들은 모두 팔려고 내놓은 겁니다.
[브로커] 아, 그런데 하필이면 이 양식장이냐, 그건가요?
[이영복] 네.
[브로커] 물론 다른건 더 싸게 살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양식장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브로커인 내가 일곱 번째 샀다가 팔았던 거예요. 이제 여덟 번째, 계속해서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이 내 목표이자 취미입니다
[이영복] (침묵)
[브로커] 내가 너무 솔직했는가요?
[이영복] (침묵)
[브로커] 나의 솔직함이 선생의 태도를 분명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의 동업자는 팔겠다는데, 선생이 안 팔겠다면매매가 성립 안되거든요.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선생 역시동업자와 똑같은 결정을 해 주세요
[이영복] (침묵)
[페이지] 024
[브로커] 그럼 내 부탁을 들어주시는 줄 알고 난 이만 가겠습니다
(브로커, 가건물 뒤쪽으로 걸어간다. 이영복,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갈매기 한 마리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이영복의 머리 위를 지나 바닷가 쪽으로 날아간다)
[장] 5장
(낮, 눈부신 뙤약볕. 가건물 뒷길, 외바퀴 수레에 죽은 물고기를 가득 실은 일꾼들이 띄엄띄엄 지나간다. 가건물 안, 이영복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남자에게 묽게 끓인 죽을 먹이고 있다. 남자는 침대에 눕혀진채 상반신이 약간 높게 벼개로 받쳐져 있다)
[이영복] 한 숟갈 더 드시지요
[남자]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영복] 더 드세요. 그래야 기운을 차릴텐데요
[남자] 아--- 아뇨---
[이영복] (죽그릇과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그럼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합시다
[남자] (고개를 끄덕인다)
[이영복] 편안히 눕혀 드릴까요?
[남자] 네---
[이영복] (벼개를 빼내 상반신을 낮추며)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오늘 새벽 내 친구가 구해드렸지요. 기억 나십니까?
[남자] (침묵)
[이영복] 가족이 알면 굉장히 기뻐할 겁니다
[남자] 고맙습니다---
(가건물 뒷길, 김진만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다. 급히 서두르는 기세가 역력하다. 그는 가건물앞에 자전거를 안으로 세우고 뛰어들어온다)
[김진만] 여봐, 그 남자 어떻게 됐어?
[이영복] 이제 막 깨어났어
[김진만] 깨어났다구?
[이영복] 음. 내가 죽을 끓여 좀 먹였지
[김진만] 그 남자를 묶어야 해!
[페이지] 025
[이영복] 묶다니--- ?
[김진만]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으라구! 그리고 입을 틀어 막어!
[이영복] 입을 왜?
[김진만] 말 못하게 막아!
(김진만, 침대 주변에 있는 헌 옷을 집어서 잘게 찢는다. 그는 그 남자를 묶을 끈을 만들어이영복에게 던져준다)
[김진만] 자, 내가 시키는대로 해!
[이영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왜 이러는 거야?
[김진만] 그걸 설명할 시간이 없어! 지금 이리로 누가 오고 있다구! 읍내에서 만났지! 자기남편을 찾아주면 무려 삼천만원이나 주겠다는 여자야!
[이영복] 그런 여자가 여긴 왜 오는데?
[김진만] 내가 오라고 했지! 어서 서둘러!
[이영복] 그 여자가 오면 뭘 어떻게 하려구?
[김진만] 염병할! 그렇게 가만히 서서 지껄이기만 할거야? (남자의 입에 제갈을 물리듯 헌옷 뭉치를쑤셔 넣으며) 언제나 궂은 일은 내가 하는군. 여봐! 시간이 없어! 저기 내 해먹 밑으로 이 침대를 끌어다 놓고, 담요로 가려!
(김진만, 침대를 해먹 밑으로 끌어간다. 이영복은 마지못해 도와준다. 김진만은 담요를 넓다랗게 펼쳐서 해먹에 걸자 침대가 보이지 않게 가린다. 그리고 담요 뒤에서 남자의 몸을 묶는다. 잠시후 담요 뒤에서 나온 그는 식탁으로 가서 주전자의 물을 입안에 쏟는다. 물이 조금 나오다가 그친다)
[김진만] 주전자에 물 좀 넉넉히 담아놔!
[이영복] 알았어
[김진만] (주전자를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꼭 마시려고 하면 없거든!
[이영복] 아까 죽 끓일때 물을 써서 그런거야
(김진만, 식탁에 의자를 끌어다가 막처럼 쳐진 담요 앞에 놓는다)
[김진만] 자넨 이 앞을 지키고 있어! 그 여자가 오더라도 꼼짝말고 지키기만 하라구!
[페이지] 026
(김진만 가건물 밖으로 나와 뒷길 읍내 쪽 방향을 본다. 분홍색 양산을 든 한 여자가 걸어온다. 김진만, 여자를 마중 나가 가건물 안으로 데리고 온다)
[김진만] 들어오세요, 이 안으로. 남자들만 사는 곳이어서 지저분할 겁니다. (이영복을 가리키며) 내 동업자지요 부인께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 친구와 나는 이 근처 바닷속이라면 손바닥에 든것처럼 훤히 다 압니다
(김진만, 식탁의 의자를 담요가 쳐진 해먹에서 멀리 놓고 여자에게 앉도록 권한다)
[김진만] 앉으십시요, 부인. 지금 읍내에 모여있는 놈들, 잠수복입고 산소통맨 놈들은 모두 엉터리입니다. 그 자식들은 몰라요. 이곳에 처음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그저 돈 많이 라요. 신속정확하게 원하시는 사람을 찾아 드립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사례금을 깎자든가, 아예 못주겠다든가, 그래서는 안됩니다
[여자] 네. 제 남편이 확실하다면---
[김진만] 그야 물론이죠. 엉뚱한 사람 찾아놓고 돈 달라 할 순 없으니까요. 부인, 남편의 정확한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십시오.
[여자] (가슴에서 사진을 꺼내주며) 바로 이런 분이예요
(김진만, 사진을 받아들고 보더니 득의만면한 표정이 된다)
[김진만] 부인, 난 이 얼굴을 봤습니다
[여자] 보셨다뇨?
[김진만] 아--- 그건 찾아낼 자신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영복, 김진만에게 다가온다)
[이영복] 그 사진 좀 보여줘
[김진만] 거기 좀 가만히 있어!
[이영복] 나도 봐야겠어
[김진만] 자넨 봐도 모를 사람이야!
[페이지] 027
(김진만, 이영복을 피해서 여자가 앉은 의자 뒤로 간다)
[김진만] 어쨌든 부인, 남편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낼겁니다. 그런데 남편께서 살아있다면---
[여자] 그분은 살아계시지 않아요
[김진만] 그래도 살아있다면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삼천만원이라는 벽보를 붙이셨던데,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로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로 찾아낼 경우엔 몇 배를 더 주셔야 합니다.
[여자] 사망자 명단을 보고 또 봤어요. 제 남편 이름이 틀림없이 있었죠
(이영복, 다시 김진만에게 다가온다. 김진만은 담요 앞의 의자를 가리킨다)
[김진만] 자네 자린 저기야! 돈 받으면 반씩 나눌테니까 자넨 그 자리나 지켜!
[이영복] (손을 내밀며) 난 사진을 봐야겠어
[김진만]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짐진만, 다가오는 이영복을 피해 식탁으로 가더니 그 위에 올라앉는다)
[김진만] 부인 생각해보세요. 사람이란 살아있어야 가치가 있는겁니다. 죽어버리면 가치도 없고 아무소용도 없어요. 그런데도 사고대책 본부에 가서 알아봤더니, 산 사람한테는 아무 보상금이 없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에게만 보상금을 준다니, 그런 기가 막힐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영복, 식탁으로 다가온다. 김진만은 짜증을 내며 사진을 이영복에게 준다)
[김진만] 사진 줄테니까 아무 소리말고 보기 만해
[이영복] (사진을 받는다)
[김진만] (여자에게) 어때요. 내말이 틀렸습니까?
[여자] 전화로 연락 받았을 땐 그 분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파라다이스 관광회사라면서, 배가 침몰했다고--- 승객 명단에 이름이 있다고, 있으니까 확인해 보라더군요. 저는--- 제 남편이 그 배를탄 줄도 몰랐어요.
[페이지] 028
설마 바다에 가셨으리라고는--- 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라디오를 켰어요. 긴급 뉴스라면서 온통 그 소식뿐이었죠. 급히 서둘러 여기까지 내려 왔지만, 사망자 가족들이 바다를 향해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저는 제 남편의 죽음을 믿을수 없었어요
[페이지] 029
[김진만] 그렇죠, 부인. 충격이 크면 믿어지지 않는겁니다. (식탁 옆에서 사진을 보고 있는 이영복에게) 자네와 똑같군. 얼빠진게 똑같다구.
[여자] 밤이 되고 저는 바닷가에 혼자 앉아 있었어요. 울부짖던 사망자 가족들도 보이지 않고--- 우두커니 어둠 속에 혼자 앉아 남편의 죽음 을 생각했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는 남편을 사랑했어요. 그 분도 저를 사랑했구요--- 서로 사랑했던 때가 기억나면서 비로소 눈물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어느 때쯤인가--- 어둠 속에 가득 차있던 바닷물이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갔어요---
[김진만] 썰물이라는 겁니다, 그게. 요즘엔 적조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해서, 썰물 빠진 다음엔죽은 물고기들만 널려있죠
[여자] 제 마음속의 기억들--- 남편과 제가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썰물과 함께 저 멀리 빠져나가고--- 저는 바닥을 들어낸 제 마음속을 보았어요. 결국은 이렇구나--- 결국은 마음의 밑바닥을 보게 되었구나--- 아무 것도 없는--- 이 텅 빈 바닥을 보려고--- 남편은 죽은 거구나---
(이영복, 김진만의 곁을 떠나 여자 곁으로 다가간다. 그는 바닥에 앉는다)
[이영복] 그래서요--- 말씀을 계속하세요
[여자] 저는 슬프고--- 괴로웠어요--- 하지만---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일까요--- 저 멀리서 밀물이 다가왔어요. 제가 홀로 앉아있는 자리에까지--- 바닷물은 들어오고--- 해가 뜨고--- 세상은 다시 밝아지면서--- 제 생각이 달라졌죠. 남편의 죽음이라는 것--- 슬프고 괴로운 것만은 아냐--- 마음속에 뭔가 새로운 기대랄까--- 희망이 가득 차는걸 느꼈어요. 그러면서--- 그분이 남겨놓은 것들--- 예금과증권, 재산들을 생각해봤죠. 아이들이 없는 건 다행이야--- 아이들이 있었으면 다시 결혼하긴 어렵겠지--- 평소엔 --- 지나간 나날보다도 더---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너는 행복할거야---
[김진만] 염병할! 그러니까 뭐야, 남편이 죽어야 좋다는 겁니까?
[페이지] 030
[여자] 이젠 정말 불행한건 싫어요. 죽은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지만--- 남편 역시 행복한 건 아니였어요. 그 분의 마음속엔 그 어떤 괴로움이 있었거든요. 제가 알 수 없는--- 그 괴로움이--- 제 남편을 죽였죠---
[김진만] (걸터앉았던 식탁을 내려와 여자에게 다가오며) 결국은 죽어야 좋다는 말이군. 그런데 부자였소? 굉장한 재산을 남길만큼 남편은 부자냐구 묻는거요
[여자] 부자는 아니였어요
[김진만] 그럼--- 가난했소?
[여자] 가난하지도 않았구요
[이영복] 자넨 제발 이쪽으로 오지마!
[김진만] 나를 오지말라구? 어디로? (담요로서 가려놓은 곳을 가리키며) 아, 자네가 지킬자리에 내가 가지!
(김진만, 담요 앞에 놓여 있는 의자로 가서 앉는다. 그는 여자를 향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김진만] 이거 너무 멀리 떨어져서 의사소통이 될지 모르겠군! 여봐요, 부인! 사고대책 본부에서 들은 말인데, 사망자 보상금이 오천만원이랍디다. 그거 맞습니까?
[여자] 네, 맞아요
[김진만] 그럼 오천만원 중에서--- 남편 찾는 값 삼천만원 주고 나면 겨우 이천만원 남는데, 겨우 그걸 갖고 어떻게 평생을 행복하게 산단 말이요?
[여자] 그분의 생명보험이 있거든요
[김진만] 보험? 보험이 있다?
[여자] 네
[김진만] 얼마짜리인데?
[여자] 오억쯤이예요
[김진만] 이런 염병할! 부인의 남편은 부인이 모르는 고통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부인이 알고있는 그보험금 때문에 죽겠군!
[장] 6장
(아침, 가건물 안, 식탁. 이영복은 왼쪽, 김진만은 오른쪽, 그 가운데 남자가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이영복과 남자는 생각에 잠겨 음식 먹는 동작이 뜸한 반면, 김진만은 잔뜩 화가 나서 게걸스럽게 식사를 한다. 가건물 뒷길, 어제 낮
[페이지] 031
일꾼들이 놓고간 외바퀴 수레들이 그대로 있다)
[김진만] (통조림에 든 생선토막을 젓가락으로 꺼내 입안에 넣으며) 모르겠어, 모르겠다구! 먹고, 먹고, 또 먹어도 염병할, 고등어 맛인지, 정어리 맛인지 분간할 수 없거든! 생선이란 모두 비릿해! 비릿한게 역겨워! 구역질을 참으면서 억지로 먹는 거지!
(김진만, 이영복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둘다 생각에 잠긴 채 반응이 없다. 김진만은 식탁 밑으로 발길질을 하여 남자의 다리를 걷어찬다)
[김진만] 어서 먹어! 아침밥 먹고 나서 놓아줄 테니까 당신 맘대로 가!
[남자] 아아. 네---
[김진만] (통조림의 생선토막을 꺼내 남자 입 앞에 내밀며) 하지만 당신 고등어 맛 알아? 정어리 맛 아느냐구?
[남자] (침묵)
[김진만] (식탁 밑으로 발길질을 계속한다) 알아? 몰라?
[이영복] (김진만에게) 제발 좀 점잖게 먹어
[김진만] 난 원래 점잖은 사람이야! 밥 먹을 땐 절대로 옆사람을 걷어차거나 음식물을 입안에 쳐넣는 일을 안한다구! 하지만 말야, 저 인간을 보면 볼수록 화가 나.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살아있는 인간을 보고 있다는게 분통이 터져!
[이영복] 그만둬. 자네 정말 점잖지 못하게 왜 이러나?
[김진만] 그래도 난,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보다는 더 가치 있다고 믿어 왔어! 그런데 염병할 그게 아냐! 죽어야 가치가 있더라구. (남자에게) 그러니까 당신, 이걸 똑바로 알아둬!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 아무가치도 없는거야! 당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을 실망시킬 뿐이라구! 생각해봐! 첫째로 실망한 사람은 나야! 당신이 죽었으면 삼천만원 받잖아! (이영복을 가리키며) 두 번째 실망한 사람은 저 친구야! 굶겨서 보낼 수 없다, 아침밥이라도 먹여서 보내자, 저 친구 당신한테 친절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속은 그게 아니지! 삼천만원 받으면 반절은 자기 몫인데, 그게 헛꿈이라니 얼마나 허탈하겠어? 저 친구와 나는 동업자야. 둘이서 양식장을 동업하다가 아주 완전히 망했지. 우린 돈이 필요해 아주, 아주, 절실히, 우린 지금 돈이 필요하다
[페이지] 032
구! 아참, 그리고 실망할 사람 또 있지! 세 번째 가장 실망할 사람은 당신 마누라야. 직접 들었잖아? 어제 저녁 담요 뒤에서 당신 귀로 마누라 하시는 말씀 다 들었지? 보상금도 받고 보험금도 받아서 팔자를 고치겠다 그 말씀이셨는데, 오늘 아침 당신이 살아서 나타나봐? 반가워 폴쩍 뛰기는커녕, 실망이 워낙 커서 뒤로 홀라당 자빠지고 말걸!
[이영복] 자네 너무 심하군! 이왕 보낼 사람인데, 그런 농담을 할 것 없잖아!
[남자]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데요.
[김짐만] 그래 진담이다, 왜?
[남자] 내가 죽으면 진정 슬퍼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남자, 식탁위로 두손을 올려놓고 열 손가락을 펼친다. 곰곰히 생각하면서 하나씩 꼽는다)
[김진만] 염병 앓고 있네! 누구 약올리는 거야!
[남자] 파라다이스호가 침몰하던 때, 그 때도 난 이렇게 손가락을 꼽고 있었어요. 나 죽으면 슬퍼할 사람은---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 하나뿐인 여동생, 그리고 나의 아내, 넷이더군요. 물론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습니다. 사업과계로 아는 사람들--- 친척이나 친구들--- 이웃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겨우 넷 뿐이라니---
[김진만] 마누라는 슬퍼 않을 테니깐 빼!
[남자] (꼽았던 손가락 하나를 펼친다)
[김진만] 여동생도 빼야하는 것 아냐?
[남자] 그런 것도 같아요. 시집간 뒤엔 오랫동안 못 만났으니까---
[김진만] 늙은 부모님도 그렇지. 자식 죽으면 울지 않을 부모님이 어디 있어? 그런 자동적으로 울 사람을 계산해 넣는 건 무의미해
[남자] 아버지도 빼고 어머니도 빼면--- 실질적으론 아무도 없군요
[김진만] 그래! 그게 바로 당신의 모습이라구!
[남자] 네. 맞는 말씀이예요. 사실은--- 배가 암초에 부딪치자 모두들 살려고 아우성이었는데, 난 가만히 있었어요. 내 옆의 어떤 남자가 왜 가만히 있느냐 묻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 남자에게 손가락을 꼽아보라고 말했지요. 죽으면 진정 두분도 나를 따라해 보세요. 열 손가락을 활짝 펼친 다음에, 한 사람 생각나면 손가락 하나를 꼽는 겁니다. 자, 얼마나 되는지 손가락을 꼽아보세요
[페이지] 033
(남자, 식탁 위에 다시 두손을 올려놓고 열 손가락을 펼친다. 김진만,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다)
[김진만] 이런 염병 앓다가 꼬꾸라질!
[이영복] 왜 그래?
[김진만] 장대 어디 있지? 갈고리 달린 장대 말이야? 이런 쓸모 없는 인간과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난 죽은 시체나 건지러 가야겠어
(김진만, 갈고리 장대를 찾아들고 가건물 밖으로 나간다. 뒷길, 한 일꾼이 쇠바퀴 수레에 시체를 싣고 읍내 쪽을 향해 뛰어간다. 그 뒤를 다른 일꾼들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간다. 김진만,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바닷가쪽 길로 걸어간다)
[이영복] 이제 그만 가세요
[남자] 아뇨
[이영복] 왜요?
[남자] 난 내 삶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나 자신을 생각해 볼때---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요
[이영복] 산다는 건--- 본능이죠
[남자] 글쎄요--- 본능만이 아닌 그 무엇이 있어야 할텐데요---
[이영복] 이건물 뒤에 길이 있어요. 왼쪽으로 가면 읍내가 됩니다. 부인은 그곳에 계실거구요. 처음 가는 길이니까 제가 약도를 그려 드리지요
(이영복, 식탁에서 일어나 침대로 간다. 그는 침대 밑에서 공책과 연필을 꺼내 식탁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공책을 펼쳐 약도를 그린다)
[이영복] 지금 우리가 있는곳은 여깁니다. 길 오른쪽은 양식장들이 있는데, 그곳으론 가실 필요가 없어요. 읍내는 외쪽으로 사오 킬로쯤 걸어가야 합니다. 몇군데 주의 할 곳은--- 첫번째 삼거리에서는--- 곧장 가시고--- 다음 사거리는---
(남자, 약도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식탁위에 펼쳐놓은 자신의 손가락들을 바라본다)
[페이지] 034
[이영복] 왜 약도는 바라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보십니까?
[남자] 뭔가 새로운 걸 발견했거든요
[이영복] 뭐를요?
[남자] 새로운 계산법을요. 나 죽으면 슬퍼할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지금까지는 그렇게 계산했었는데, 전혀 다른 방법이 생각났어요. 나 죽으면 기뻐할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이렇게 계산하는거죠. (손가락들을 꼽으면서) 이것 보세요 놀랍게도 열 사람이 금방 넘어요!
[이영복] 그--- 그래서요?
[남자] 아, 이걸 왜 몰랐을까요! 내가 죽으면 남이 슬퍼하기만을 생각했었는데. 기뻐할 수도 있다니--- 파라다이스호가 침몰할 때 알았더라면, 난 구차하게 살지 않았을 거예요. 바닷물 속에 가라앉으면서 우연히 손에 잡힌게 구명조끼였죠. 과연 살아야 하나 의문이 들면서도 본능적이랄까--- 구명조끼를 입었지요. 이리저리 파도에 휩쓸려 다니다가--- 어떤 암초에 얹혀졌어요. 그리고는 목숨을 구해 이곳에 오게 된겁니다. 이젠 정말 괴롭더군요. 아내는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하지만 내가 담요뒤에 있는걸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런 말은 안했겠지요. 그런데 오늘은--- 더 괴로웠어요. 아예 담요로 가려 놓지도 않고, 직접 내 얼굴을 뻔히 쳐다보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이영복] 그건--- 오해하지 마세요.
[남자] 물론 오해일 수도 있죠. 그러나 더 이상 산다는 건 모욕이예요. 억지로 살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요?
[이영복] 자, 약도를 마저 그려드리지요. (공책의 종이를 뜯어내 약도를 그린다) 그러니까 네거리에서는--- 오른쪽으로 가세요. 그렇게 한참 가다가--- 다리를 지나면--- 다시 왼쪽으로---
[남자] 그만 두세요, 약도는. 난 그 길을 가지 않을 겁니다
(이영복, 약도 그리기를 멈춘다)
[남자] 종이 한 장 주시겠어요?
(이영복, 공책에서 종이를 뜯어준다)
[남자] 연필을 나도 그릴게 있거든요
[페이지] 035
(이영복, 남자에게 연필을 준다)
[남자] 인간은 과거에 본 것만을 미래에서 보게 된다더군요. 내가 중학교 다니던 때, 미술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남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영복은 그것을 바라본다)
[이영복] 아, 이건 물고기 남자군요! 하반신은 물고기, 상반신은 남자--- 나도 어디에선가 봤었는데, 기억 나질않아요.
[남자] 중학생일 때 내가 상상으로 그렸던 거죠. 그런데 파라다이스 관광회사 포스터에서 똑같은 걸 보게 됐어요.
[이영복] 파라다이스 관광회사---
[남자] 네. 어느 건물 벽에 뭐가 낯익은 형태가 있어서 다가갔더니, 바다 구경을 권유하는 관광포스터였죠.
[이영복] (이제야 비로소 생각난 듯이) 그래요! 나도 그 포스터를 봤었어요!
[남자] 그 순간 나는 과거에 본 것만이 미래에서 보게 된다는 것이 생각났고, 마침내 나는 나의 끝, 미래를 보기 위해 배를 탔었지요
(남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양손으로 들어 보인다. 물고기와 사람의 형상을 반씩 합친 물고기 남자가 그려져 있다)
[장] 7장
(늦은 오후. 가건물 뒷길, 서너 명의 일꾼들이 길 위에 세워놓은 빈 수레를 끌고 양식장쪽으로 간다. 길위에는 아직도 몇대의 빈 수레가 있다. 가건물 안. 남자가 군용 침대에 앉아서 고장난 라디오를 분해하여 고치고 있다. 이영복은 그 옆에 서서 지켜본다. 가건물 뒷길, 바닷가 쪽에서 김진만이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돌아 온다. 그는 가건물 안으로 들어오더니 화풀이하듯 갈고리 달린 장대를 내던진다)
[김진만] 염병할, 완전히 망신만 당했어!
[이영복] (갈고리 장대를 주워 벽에 기대 놓는다) 무슨 망신인데--- ?
[김진만] 사고 현장엔 접근도 못하게 해! (식탁의 주전자를 들어올리더니 입을 벌리고 물을 붓는다) 돈 받고 시체 건지는 놈들, 그 놈들 때문이지! 그 놈들이 워낙 극성이니까, 해양경찰들이 순시선을 타고 돌면서 막는 거
[페이지] 036
야!
[이영복] 그럼 금방 되돌아오지 그랬어?
[김진만] 경찰들 눈엔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야! 잠수복도 안입고, 산소통도 안매고, 오리발도 안신은 내가, 고무보트를 타고 와서는 길다란 갈고리로 바닷속을 휘젓는 꼴이 이상해 보였겠지. 그래서 한동안 막지도 않고 가만 있더라구. 그런데 그게 시체 건지려는 짓인줄 알고는, 염병앓다가 꼬꾸라질--- 요절복통을 하는거야! 경찰 순시선의 뱃머리에 달린 스피커, 그 고성능 스피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염병할--- "거기, 웃기는 아저씨, 나가요 나가!" (손에 들고 있는 주전자를 바라보며) 이거, 물이 없잖아? 내가 바싹바싹 속이 탈 때 넉넉히 마실 수 있도록 물 좀 가득 채워 놔!
[이영복] 미안해. 하지만 지금도 많이 마신걸.
[김진만] 시체를 건지기는 커녕 개망신만 당하고--- (남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안가고 있지?
[이영복] 고장난 라디오를 고치는 중이야
[김진만] 라디오를--- 고쳐?
[이영복] 기술자야. 잘 고치고 있어
[김진만] 자네, 나 좀 봐.
(김진만, 이영복을 데리고 가건물 앞으로 나온다. 그는 남자가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춘다)
[김진만] 저 남자와 무슨 이야기를 했어?
[이영복] (침묵)
[김진만] 뭔가 서로 말을 했을거 아냐?
[이영복] 죽고 싶다는군.
[김진만] 정말?
[이영복] (침묵)
[김진만] 염병할--- 정말 죽고 싶을 리가 없지!
[이영복] 정말이든 거짓말이든, 우린 저 남자를 살려 보내야 해
[김진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우린 더 이상 시체를 건질 수가 없어. 경찰 순시선에 붸겨나 변두리를 돌면서 봤는데, 잠수복 입은 놈들이 바닷속에 가득해. 우리처럼 갈고리로 시체를 건져 돈벌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기는 거고, 염병할--- 이젠 알겠지? 우리에겐 저 인간밖엔 없어
[페이지] 037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러니까 내 말은--- 저 인간이 죽겠다면 죽게 놔두자는거야. 일부러 우리가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잖아?
(가건물 안에서 고쳐진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가 주파수를 맞추는지 여러 종류의 방송이 번갈아 들린다)
[김진만] 왜 대답을 안 해?
[이영복]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며) 라디오를 고쳤으니깐 이젠 가라고 해야지
[김진만] (이영복의 어깨를 붙잡으며) 살려 보낼 필요 없다니까
[이영복] 자넨 아직도 저 남자를 미워하나?
[김진만] 밉고 안밉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건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지! 저 인간이 죽으면 우린 살 수 있어. 사례비로 삼천만원 받고, 양식장을 헐값에 빼앗으려는 사기꾼 브로커한테 더 버텼다가 팔면 그 돈도 많아. 그럼, 염병할, 여길 뜨는거야! 지옥인줄 모르고 빠졌던 이곳에서 깨끗이 뜨는 거라구!
(남자, 가건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남자] 다 고쳤어요! 이리 오셔서 들어보세요!
[김진만] 난 저 인간이 미워. 그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야, 자네도 마찬가질 걸. 죽은 인간은 사랑하기 쉽지만 산인간은 사랑하기 어려워
(이영복과 김진만, 가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나 맞는 라디오를 식탁 위에 옮겨놓고 다이얼을 돌린다)
[남자] 일기예보예요. 여전히 날씨는 무덥고, 바다의 적조는 더 퍼지고 있다는군요
(남자, 다이얼을 돌린다. 주파수가 바뀌며 다른 방송이 들린다)
[남자] 아, 이건 주식시세인데, 모든 주가들이 떨어져서 아주 야단이랍니다
[김진만] 염병할---
[페이지] 038
(남자,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린다. 탱고 음악이 들린다. 남자는 음악에 맞춰 능숙하게 춤동작을 한다)
[남자] 탱고예요! 곡목은 0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이영복과 김진만을 향해 춤을 청할 때의 인사처럼 허리를 굽히며) 자, 누가 나와 함께 춤을 추실까요?
[김진만] (남자에게 다가간다) 당신 내 말 똑바로 들어!
[남자] 네--- ?
[김진만] 이런 지랄발광하라고 살려 준것 아니야! 알았어?
[남자] 음악도 좋고, 춤도 좋잖아요
(김진만, 식탁 위의 라디오 멈춤버튼은 누른다)
[김진만] 죽고 싶다는 자가 음악도 좋고, 춤도 좋다니? 염별 할, 그게 말이나 되는거야?
[남자] 그게 왜 말이 안되지요?
[김진만] 음악도 춤도 다 싫어야 죽는거지!
[남자] 아뇨, 좋은건 살 때도 좋듯이, 죽을 때도 좋은 겁니다
[김진만] 입닥쳐!
[이영복] (김진만과 남자 사이에 끼여든다) 자네 이럴 것 없어. 이 사람은 갈거야. (남자를 향하여) 가요. 어서! 더이상 여기 있지 말고 어서 떠나요!
[김진만] 난 강제로 잡지 않아! 갈테면 가라구! 저런 건방진 놈을 붙잡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없어!
[남자] 내가 건방졌다면 용서하세요. 나 역시--- 변명 같지만--- 건방진건 싫거든요. 괜히 잘난체 해서 마음을 언짢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건 싫습니다
(가건물 뒷길, 손가방을 든 브로커가 걸어오고 있다. 그는 가건물 앞에 세워진 자전거를 발견하고, 고장난데가 없는지 살펴본다. 페달을 밟아 바퀴가 도는 상태를 확인하고, 손잡이를 돌려 보다가, 경보기를 울린다)
[김진만] 이런 염병할, 밖에 누가 왔잖아? (가건물 밖을 내다본다) 브로커야, 사기꾼 브로커! (남자에게 다급하게 말한다) 당신말이야, 저 사기꾼 브
[페이지] 039
로커 자식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어. 당장 밖으로 나갈 생각 말고 이 안의 어디든지 보이지 않게 숨어 있으라구.
(김진만, 가건물 앞으로 나와 브로커를 가로막는 자세로 선다)
[김진만] 여긴 또 웬일이야, 아무 예고도 없이?
[브로커] 내 자전거를 찾으러 왔죠
[김진만] 염병할, 좀더 타도록 내버려두시지!
[브로커] 그정도 탔으면 많이 탄거예요
(브로커 가건물 안으로 들어 가려한다)
[브로커] 안으로 들어갑시다.
[김진만] 왜--- ?
[브로커] (손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며) 중요한 서류가 있거든요
[김진만] 무슨 서류인데?
[브로커] 양어장 매매에 관한 계약서예요. 선생 동업자도 함께 봐야 하니깐 안으로 들어갑시다.
(김진만과 브로커, 가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김진만은 한걸음 앞서와서 사방을 둘러본다.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심한 듯이 이영복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김진만] 글쎄, 이 사기꾼 양반이 우리한테 볼일이 있다는군!
[브로커] 난 절대로 사기꾼이 아닙니다
[김진만] 그것봐. 사기꾼이 아니라는 그 말 자체가 사기라구
[브로커] (식탁위에 서류를 놓고 의자에 앉으며) 두분 다 여기에 앉으세요
(김진만과 이영복, 브로커, 식탁에 둘러앉는다)
[브로커] 사실은, 오늘 저녁 내가 최후 통첩하러 왔어요. 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이젠 양식장을 팔던가, 두 분이 상의해서 결정하세요
[김진만] 지금 당장--- ?
[브로커] 하루만 여유를 드리죠. 난 다 알게 됐어요. 선생이 뭣 때문에 배짱을 부
[페이지] 040
리는지 알게 됐다구요. 침몰한 배의 승선자 시체를 찾아주면 유가족들이 사례비로 큰 돈을 준다니까, 혹시나 그걸 찾아볼까 그런 생각이죠?
[김진만] 염병할, 난 그런 치사한 생각 없어!
[브로커] 그럼 내 자전거를 뺏어 타고 뻔질나게 읍내를 드나든건 뭡니까?
[김진만] 증거를 대라구, 증거를!
[브로커] 며칠전엔 어떤 여자를 데리고 왔었잖아요. 남편 시체를 찾아주면 삼천만원 준다는 여자를요. 그래도 잡아 뗄 거예요?
[김진만] 이거 염병 앓다가 꼬꾸라지겠군!
[브로커] 그 심정 이해 못하는건 아닙니다. 양식장이 망했으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 방법을 찾고 싶겠죠. 하지만 잘 들어요. 두 분을 위해 충고하는 건데, 이럴 땐 깨끗이 포기하는 겁니다. 구질구질하게 시체 따위에 희망을 걸고 차일 피일 결정을 미뤄두는 건 바보짓이라구요
[김진만] 누가 안 판댔어? 나는 물론 동업자인 내 친구도 판다고 했어!
[브로커] (이영복을 바라보며) 그거, 확실해요?
[김진만] 확실하지!
[브로커] 선생은 가만히 있어요. (이영복에게) 확실한지 대답하세요
[이영복] (침묵 한다)
[김진만] 저 친구가 대답 안하는 건 가격 때문이야! 십분지 일은 말도 안돼! 우리 조건은 최소한 원금의 십분지사야.
[브로커] 십분지 일입니다. 그 이상은 절대로 못줘요! (의자에서 일어선다) 계약서는 놓고 갑니다. 난 내일 저녁 다시 오죠. 오늘 당장 결판을 내려고 했는데, 하루 기회를 더 주는 거예요. 내일 올테니까 두 분 동업자끼리 사이좋게 의논하여 결정해 두세요
(브로커, 가건물 밖으로 나가 자전거에 올라탄다. 그는 읍내 방향의 길을 타고 간다)
[김진만] 염병할 사기꾼 브로커 자식! 우리더러 결판을 내라고 큰 소릴 쳐? (이영복에게) 그 남자 어디있어?
[이영복] (침묵)
[김진만] 어디 있냐구?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럼--- 도망간거야?
[페이지] 041
(남자,수조 안에서 뚜껑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남자] 여기 있는데요?
[김진만] 오, 거기 있었군 그래!
[남자] 이 속에 들어가 있었죠. 그런데 목욕탕 마냥 왜 이렇게 커요?
[김진만] 음, 그건 물고기 새끼들을 담아두는 곳이야. 양식장에 넣기 전에 얼마동안 자라도록 보호해 두는 수조라구!
(가건물 뒷길, 일꾼들이 외바퀴 수레에 동료 일꾼들을 태우고 지나간다. 수레에 탄 일꾼들은 장난으로 죽은 시늉을 하고 있다. 시체처럼 보이던 그들이 가건물 뒤를 지날 때 되살아나 수레에서 뛰어내린다. 그리고 그들은 수레보다 더 빠르게 앞을 향해 달려간다)
[장] 8장
(자정 무렵, 어둠. 가건물 안. 김진만은 공중에 걸린 해먹에 누워있고 이영복은 군용 침대에 웅크린채 앉아 있다. 남자, 바다쪽에서 양손에 바닷물을 담은 두개의 양철통을 들고 힘겹게 걸어온다. 그는 가건물 안으로 들어와 수조에 바닷물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양철통을 들고 가건물 밖으로 나간다)
[김진만] 신경 쓸 것 없어! 자기가 좋아서 죽겠다는데, 괜히 신경쓰지 말라구!
[이영복] (침묵)
[김진만] 잠이나 자!
[이영복] (침묵)
[김진만] 잠이나 자라니까!
[이영복] 수조에--- 물이 점점 가득 차고 있어---
[김진만] 도대체 왜 신경을 쓰는거야?
[이영복] (침묵)
[김진만] 저 남자 말이야, 아주 영리해. 수조에 바닷물을 가득 채우고 그 속에 들어가 죽는다는 발상은 정말 기발하거든. 더구나 우리더러 뭐랬어? 자기가 죽으면 바닷속에서 건져낸 걸로 하라는거야. 그렇게까지 우리 입장을 생각해 주다니, 영리하고 친절하고, 참 고마운 인간이지.
[이영복] (침묵)
[김진만] 우는거야? 계집애처럼 훌쩍훌쩍 울고 있잖아?
[페이지] 042
[이영복] (침묵)
[김진만] 염병할,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울어?
[이영목] (침묵)
[김진만] 만약 잘못했다면 그건 나야, 나! 나는, 저 남자가 죽기를 바랬으니 그게 잘못이지! 하지만 자넨 그게 아냐! 자네는 저 남자 죽기를 눈꼽 만큼도 바라지 않았잖아? 괴로워해도 내가 괴로워하고, 신경도 내가 쓸테니까, 자넨 편안히 잠이나 자!
[이영복] (침묵)
[김진만] 그럼 맘대로 해! 자던가, 말던가!
(김진만, 해먹 위에서 돌아눕는다. 해먹이 출렁 흔들린다. 이영복, 김진만에게 다가와서 흔들리는 해먹을 붙잡는다)
[이영복]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하지? 이럴 때 가만있으면 안된다는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
[김진만] 이미 가르쳐 줬잖아! 신경 쓰지말고 잠이나 자라구!
(남자, 바닷물이 담긴 양철통을 들고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그는 잠시 바닥에 통을 내려놓고 가쁜 순을 몰아 쉰다. 이영복, 그를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한다. 남자, 다시 양철통을 들고 수조에 가서 물을 채운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간다)
[이영복] 어떻게 해? 제발 좀 가르쳐 줘--- 난 어떻게--- 해야---
[김진만] 정말 염병 앓고 있군! (해먹 위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며) 도대체 지금 뭘 하겠다는 거야? 저 남자 물통이라도 들어주고 싶어? 그랬다간 오히려 죄가 돼. 자살 방조죄, 알아?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살인죄도 될 수 있어!
(김진만, 해먹에 다시 누워 머리끝까지 담요를 끌어 올려 덮는다)
[김진만] 이봐, 침대에 누워서 잠이나 자! 이럴땐 눈감고 자는게 상책이야! 눈을 감고 잠들면 아무것도 몰라서 좋고, 아무죄도 안지으니깐 좋잖아!
(남자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비틀비틀 걸어온다. 이영복, 남자에게
[페이지] 043
다가간다)
[이영복] 그거 줘요, 물통---
[남자] (이영복을 바라본다)
[이영복] 내가 들어드리지요.
[남자] 고맙지만, 괜찮아요.
[이영복] 제발... 나에게 줘요.
[남자] 그럼 하나씩 나눠 듭시다.
(남자, 이영복에게 바닷물이 담긴 양철통 하나를 준다. 남자와 이영복, 수조로 걸어가서 물을 붓는다. 수조에 물이 가득 찬다. 남자, 수면에 손바닥을 대고 살짝 두드려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한다.)
[남자] 이젠 가득 찼어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영복, 남자를 껴안는다. 남자, 이영복의 포옹에 어색해 하다가 두팔을 이영복의 등뒤로 돌려 껴안는다)
[이영복] 미안해요. 당신을 살리지 못해서---
[남자] 아뇨, 미안할거 없어요.
[이영복] 내 마음이--- 몹시 괴로워요. 마치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 같아요
[남자]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입니다. (이영복의 포옹을 풀며) 물 한통 도와주신 걸 영원히 기억하죠. 하긴--- 죽으면 기억할 수 없겠지만--- 부디 행복하시기를. 난 물속에 들어가 뚜껑을 닫겠어요.
(남자, 바닷물이 담긴 수조 안으로 들어간다. 뚜껑이 닫힌다. 이영복, 수조 옆에 주저앉는다. 김진만의 해먹이 거세게 흔들린다. 사이, 흔들리던 해먹이 차츰차츰 멈춘다. 김진만, 머리에 덮었던 담요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는 수조 옆의 이영복에게 나직하게 명령조로 말한다)
[김진만] 뚜껑을 열어봐.
[이영복] (움직이지 않는다)
[김진만] 열어 보라니까, 어서.
[이영복] (움직이지 않는다)
[페이지] 044
[김진만] (소리지른다) 열어!
[이영복] (엉거주춤 일어나서 뚜껑을 연다)
[김진만] 어때?
[이영복] 죽, 죽었어---
[김진만] 뚜껑 덮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염병할 여자를 데려와야겠군!
(이영복, 부들부들 떨면서 뚜껑을 덮는다)
[장] 9장
(아침, 가건물 뒷길, 일꾼들이 외바퀴 수레를 밀면서 지나간다. 가건물 안, 외바퀴 수레에 남자의 시체가 담겨져 있다. 여자와 김진만이 수레 곁에 서있고, 이영복은 수조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다. 슬픔에 잠긴 여자, 허리를 굽히고 죽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흐느껴 운다.)
[김진만] 이제 그만 진정하십시오. 부인, 부인은 운이 좋았어요. 읍내에는 아직도 시체를 못찾은 유가족들이 많습니다. 시체가 없으면 법률적 문제 등, 골치 아픈 문제가 한둘이 아니죠. 아까 부인을 만나러 읍내에 갔더니, 이번엔 변호사들이 잔뜩 몰려와 득실거립디다. 부인, 변호사 비용이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차라리 삼천만원주고 주고 이렇게 시체를 찾은 것이 싸게 먹힌 거예요. 변호사한테 문제를 맡겨 보세요. 염병할, 보상금이며 보험금 몽땅 다 먹히고 말겁니다.
[여자] 하지만 다르군요
[김진만] 다르다뇨?
[여자] 제 생각하곤 달라요
[김진만] 그럼 이 남자가 부인의 남편이 아니라는 겁니까?
[여자] 슬프지 않으리라--- 저는 생각했었죠. 과거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갔으니--- 그런데도 죽은 모습을 보니까--- (가슴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슬퍼요---
[김진만] 어쨌든 부인,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돈은 가져 오셨겠지요?
(여자, 가슴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김진만에게 준다. 김진만, 수표를 받아서 햇볕을 향해 비춰본다)
[여자] 가짜는 아니예요
[페이지] 045
[김진만] 물론 우리가 찾아드린 시체도 가짜는 아닙니다.
[여자] 제 남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죽는 순간--- 뭔가 생각이---
[김진만] 모르죠. 뭘 생각했는지는
[이영복] 내가 꺼냈습니다. 물 속에서 죽은---
[김진만] (이영복을 향해) 염병할,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이영복] 내가 두팔로 껴안아--- 꺼냈어요.
(김진만, 남자의 시신이 담긴 외마퀴 수레의 손잡이를 붙잡는다)
[김진만] 자, 갑시다! 읍내까지 실어다 드릴테니 뒤를 따라오세요!
[여자] 아뇨. 제가하죠
[김진만] 부인은 수레를 끌고 가기 힘들걸요
[여자] 그래도 제 남편의 마지막 길이예요. (김진만에게 수레의 손잡이를 달라고 손을 내밀며) 저에게 주세요. 제가 모셔 가야죠
(김진만, 수레의 손잡이를 여자에게 넘겨 준다. 여자, 수레를 끌고 가건물 밖으로 나간다)
[김진만] 여자는 변덕쟁이라더니--- 이제 와서 열녀노릇을 할 모양이군!
(가건물 뒷길, 읍내 쪽으로 수레를 끌고 가는 여자와 양식장 쪽으로 수레를 밀고 가는 일꾼들이 서로 교차한다. 일꾼들, 잠시 수레를 멈추고 여자를 바라본다. 김진만, 수표를 들고 이영복에게 다가간다)
[김진만] 이걸 보라구! 동그라미가--- 여덟개--- 삼천만원 짜리 수표야! 드디어 우린 죽지 않고 살게 됐어!
[이영복] 자넨 내가 알던 사람이 아냐.
[김진만] 뭐, 뭐라구?
[이영복] 예전엔 이렇지 않았지.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됐어
[김진만] 그게 무슨 염병 앓는 소리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없는 나야, 나! 오히려 달라진건 자네라구! 우리가 동업을 시작하던 때, 자넨 지금처럼 멍청하진 않았어. 괜히 몰라도 되는 것을 알려고 한 다음부터, 이상하게 얼이 빠져서 바보 멍청이로 변했지! 마침내는 나를 모르겠다니--- 동업자인 나를 모르면, 그럼 누굴 안다는 거야?
[페이지] 046
[이영복] 그 남자---
[김진만] 염병할, 그남자에 대해서 뭘 알아?
[이영복] (침묵한다)
[김진만] 그 남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나 해?
[이영복] (침묵)
[김진만] 왜 죽으려고 했는지느 아느냐구?
[이영복] (침묵)
[김진만] 대답해! 도대체 알고 있는게 뭐야?
[이영복] 내가 아는건--- 그 남자는 죽었어. 그리고--- 그 남자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됐어.
[김진만] 우리가 살아?
[이영복] 그래. 자네도 조금 전 같은 말을 했잖아. 드디어 우린 죽지 않고 살게 됐다구---
[김진만] 그건--- 염병할--- 이 엄청난 수표를 보고 감격해서 한 소리지! 그 남자하곤 아무 상관없어! 눈꼽 만큼도 난 상관 없으니까 괜히 확대시켜 오해하지 말라구!
[이영복] 자넨 상관없다지만 난 있어!
[김진만] 완전히 미쳤군! 죽을 때 겨우 물 한통 날라다 줬다고, 그 남자가 자네가 무슨 특별한 관계가 생긴건 아냐! 깨끗이 잊어버려, 그 남자는! 그 남자가 살고 있을 때도 우린 몰랐었고, 죽을 때도 몰랐었고, 더구나 죽은 다음엔 알게 없지!
[이영복] (두 손의 손가락들을 펼쳐 보이며) 난 안 미쳤어. 이것봐, 내 손가락은 모두 열개야.
(김진만, 어처구니 없다는 듯 뒷걸음으로 물러나 식탁으로 가서 그 위에 걸터앉는다)
[김진만] 우리 동업은 이것으로 끝내야겠어! 뭔가 서로 맞는게 있어야 동업을 하지, 우린 이제 달라도 너무 달라! 수표가 현금이 아니라서 유감이군. 당장 반절씩 나눠 갖고 헤어지면 되는건데--- (식탁 위에 놓여있는 양식장 계약서를 집어든다) 아참, 양식장 파는것도 남았잖아. 염병할--- 어떻게 한다--- ?
[이영복] 그돈은 모두 자네 가져
[김진만] 내가 다--- ?
[페이지] 047
[이영복] 하지만 양식장은 나에게 줘
[김진만] 양식장을?
[이영복] 그 남자를 판 돈의 내 몫으로 난 자네 몫의 양식장을 사야겠어
[김진만] 양식장은 뭘 하려구?
[이영복] (침묵)
[김진만] 쓸모없는 그걸 갖겠다는 건 바보짓이야! 정말 넋빠진 바보 멍청이나 할 짓이라구! 좋아 마음대로 해! 이젠 동업자도 아닌데, 내가 자넬 걱정할 필요 없지!
(김진만, 양식장 계약서를 찢어서 식탁 위에 놓는다)
[김진만] 사기꾼 브로커 자식이 오거든 그래, 자네한테 팔고 갔다구! 그 자식이 후회할 걸. 조금만 더 준다고 했어도, 난 그 자식에게 팔았을거야!
(김진만, 가건물 밖으로 나간다)
[장] 10장
(늦은 저녁, 황혼의 진붉은 빛깔이 온누리에 퍼져 있다. 가건물 뒷길, 정장을 입은 브로커가 자전거를 타고 읍내 쪽으로 다가온다. 가건물 안은 밖에 비해 어둡다. 이영복, 군용 침대에 누워 있다. 그의 무릎 위에는 물고기 남자를 그린 종이가 놓여 있다. 브로커, 가건물 앞에 자전거를 세운다. 그는 손가방을 들고 어두컴컴한 안으로 들어 온다)
[브로커] 이거 너무 어두워서--- 누구 없어요?
[이영복] (침묵)
[브로커] 없습니까?
[이영복] 여기, 내가 있는데요
(브로커, 이영복에게 다가온다)
[브로커] 그게 뭡니까? 어둠 속에서 뭘 그리 열심히 보고 있죠?
(이영복, 무릎 위의 종이를 브로커에게 내민다. 브로커, 그 종이를 받아서 눈앞에 가까이 대고 본다)
[페이지] 048
[브로커] 난 봐도 모르겠군요
[이영복] 물고기 남자예요
[브로커] 물고기 남자--- ?
[이영복] 네
[브로커] 글쎄요--- 공상속에나 있을까--- 이런 물고기 종류는 없어요. 물론 이런 모양의 사람도 없고. (종이를 이영복에게 되돌려주며) 동업자는 어디 있죠? 난 그를 만나러 왔어요.
[이영복] 그는 떠났어요.
[브로커] 떠나요?
[이영복]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브로커] 그럴 리가--- 오늘 저녁 내가 온다는 걸 알텐데요?
(이영복, 침대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간다. 그는 전등을 켠다. 식탁 위, 김진만이 찢어놓은 계약서가 놓여 있다. 브로커, 식탁으로 가서 계약서를 집어든다)
[브로커] 양식장 계약서는 왜 찢어져 있죠?
[이영복] 그가 나에게 팔았어요, 자기 몫을요. 공동 소유의 양식장을 이젠 나 혼자 갖게 됐습니다.
[브로커] 선생이 혼자--- ?
[이영복] 네.
[브로커] 그걸 전부 가져서 무얼 하려구요?
[이영복] (침묵)
[브로커] 아까 보여준, 그 물고기 남자인가 뭔가를 양식할 건가요?
[이영복] (침묵)
[브로커] 적조 때문에 아무 것도 살지 못합니다. 실컷 고생만 하고, 잔뜩 손해만 보고--- 선생이 직접 경험하셨잖아요.
[이영복] 그래서 나 자신이 갖기로 한 겁니다
[브로커] 무슨 말씀이신지--- ?
[이영복] (침묵)
[브로커] 그러니까 뭡니까--- 혼자 다 갖겠다는건--- 남에겐 팔지 않겠다, 그런 뜻입니까?
[이영복] 네.
[브로커] 왜요?
[페이지] 049
[이영복] 내가 팔면--- 산 사람은 나처럼 실컷 고생만 하고, 잔뜩 손해만 볼겁니다. 그걸 알면서 양식장을 팔 수는 없죠.
[브로커] 별 희안한 생각을 하셨군요. 도대체 선생이 다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선생을 잘 아는 사람이 양식장을 살리는 없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 사게 될텐데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 나를 보십시오! 선생과 다른 사람 사이에, 그 중간에, 브로커인 내가 있습니다. 선생은 일단 양식장을 나에게 넘겨주세요. 그럼 나는 적조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걸 살 사람을 찾아내 파는 겁니다. 그 경우, 선생은 누가 샀는지 모르며, 산 사람 역시 누가 팔았는지 모릅니다. 실컷 고생을 하고 잔뜩 손해를 봐도, 중간에 있는 선생이 들을 욕을 내가 중간에서 대신 듣고, 선생이 받을 워망을 내가 대신 받습니다. 선생은 아무 걱정 마시고 나에게 양식장을 팔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영복] 하지만 이젠 비켜 주시지요.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브로커] 날--- 비키라구요?
[이영복] 네.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입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요. 이 세상의 그 어떤 모르는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면 나도 괴로워야 당연하고, 그 어떤 모르는사람이 기뻐야 나도 기쁠 수 있거든요.
(브로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린다)
[브로커] 이건 뭔가--- 선생은 과민해지셨군요. 며칠 전 자전거를 찾으러 왔을때, 내가 이런 말을 했었죠. 선생의 동업자는 팔고 떠날 사람이 확실하지만, 선생의 태도는 애매모호한 것 같다구요.
[이영복] (침묵)
[브로커] 내 말을 기억하세요?
[이영복] 기억합니다.
[브로커] 선생은 그랬어요. 지금처럼 안 팔겠다는 고집같은건 없었지요. 그래서 난 선생에게 솔직한 심정으로 부탁을 했었습니다. 동업자인 친구분과 똑같은 결정을 하시도록요.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계약서는 얼마든지 새로 쓸 수 있어요. 그리고 대금은 즉시 현찰로 드리겠습니다.
[페이지] 050
(브로커, 손가방을 열어서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다. 브로커는 새 계약서를 꺼내 이영복에게 내민다)
[브로커] 매매계약은 간단해요. 여기에 이름을 쓰시고 도장 찍으면 끝납니다
[이영복] 아뇨
[브로커] (가건물 밖, 바닷가 쪽을 가리키며)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저 바닷가를 보세요
[이영복] (고개를 돌려 바닷가 쪽을 바라본다) 바닷가를 보라고 했던 건 바로 나였어요
[브로커] 물론입니다. 선생 자신이 이렇게 말했으니까요. (이영복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한다) "저기 있는 수많은 양식장들은 모두 팔려고 내놓은 것입니다. 아주 헐값이지요. 어느 것이든 원하는 대로 골라 살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양식장을 사려고 합니까?"
[이영복] 정확히 내가 한 말은 어느것이든 원하는 대로 골라 살 수 있다였죠. 그런데 꼭 이 양식장을 사려고 하는 가는, 내 말이 아니라 당신의 말이었습니다
[브로커] 아, 그랬던가요? 하지만 기억이 혼동될 만큼, 우린똑같은 생각을 했던거죠. 어쨌든 내기억이 틀림없다면, 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양식장은, 내가 일흔 번째 샀다가 팔았다구요
[이영복] 아뇨. 일곱 번째였다고 했어요.
[브로커] 일흔 번이든, 일곱 번이든, 아니 칠백 번이든 그건 별 문제가 아니예요. 지금의 문제는 선생이 안 팔겠다고 거부하면 그 어떤 숫자도 의미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내 말을? 나의 기록이 계속되지 못하고 여기서 끝나버릴 경우, 아무의미가 없다 그 겁니다! 다행히도 선생이 고집하지 않으면, 나도 내 조건을 양보하겠습니다. 처음 제시한 십분지 일 가격보다는 두배 많은 십분지 이를 드리지요!
[이영복] (침묵)
[브러커] 십분지 삼!
[이영복] (침묵)
[브로커] 십분지 사! 이건 선생의 동업자가 요구한 금액이지요. 더 이상의 양보는 곤란합니다.
[이영복] (침묵)
[브로커] 좋습니다, 좋아요! 이번 선생과의 거래에 대해서는, 난 이익을 남길 생각을 포기 했습니다. 다만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는 그것에 만족하고, 십
[페이지] 051
분지 십, 원금 전부를 드리지요!
[이영복] (침묵)
[브로커] 왜 아무 말씀 안하십니까?
[이영복] 난 그래도---
[브로커] 네?
[이영복] 팔지 않겠습니다
(브로커, 잔뜩 성이 나서 열어 놓았던 손가방을 큰소리가 나도록 닫는다)
[브로커] 참 어처구니없군! 여봐, 당신 혼자 안 판다고 내가 다른 양식장을 못 살 줄 알아? 얼마든지 난 골라 살 수 있어! 몇 푼 안주고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절을 받으면서 살 수 있다구!
(브로커, 이영복을 노려보더니 손가방을 들고 나간다)
[브로커] 당신 말이야, 이 세상의 모르는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듯이 착각하지마! 아무 상관없어! 중간에는 언제나 내가 있지, 아무도 없다구!
(브로커, 가건물 밖으로 나가서도 고함지른다)
[브로커] 망할 자식 같으니! 저런 자식은 완전히 망해버려야 속이 시원해!
(가건물 밖, 진붉은 황혼이 사라지고 어둡다. 밤하늘에는 달이 뜨고 별들이 반짝인다. 바닷가 양식장 쪽 길을 브로커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 양식장의 일꾼들, 죽은 물고기들을 실은 외바퀴 수레들을 밀면서 자전거와 엇갈리며 지나간다. 가건물 안, 이영복이 군용 침대로 가서 앉는다. 그는 남자가 고쳐준 라디오를 손에 들고 쓰다듬더니 작동 버튼을 누른다. 나지막하게, 이름 모를 음악이 들린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