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집트 시대
일찍이 성경(Bible)에서도 시박(Sheba)의 여왕이 예루살렘(Jerusalem)에 있는 솔로몬(Solomon)왕을 배알하려 여행하였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고,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는 킬로이(Kiloys)라는 글씨와 그림이 함께 새겨져 있는 여행의 기록을 바위나 벽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투스(Herodotus)도 이집트인들의 관광에 대하여 기술한 바가 있어, 그를 고대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여행자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하여 여행이 증가하면서 점차 호스피타리티 센터(hospitality centers)라는 호텔의 개념과 같은 숙박시설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지금의 그리스 영토인 크레테(Crete) 섬에는 B.C. 1500년경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호스텔(hostel)이 남겨 보존되고 있다.
2. 그리스 시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포스(Olympus)산 위에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제우스(Zeus)신을 비롯한 종교적 활동으로 여행의 왕래가 많았고, 기원전 776년 이후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경기대회에는 객지로부터의 많은 여행자들을 불러들여 관광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
이 시대의 관광이 새로운 차원의 전기를 주어 그리스는 상용여행, 관용여행 및 종교여행이 역시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City-States)가 발달되면서 특히, 위락관광으로서 쇼(floor shows)와 무녀(dancing girl), 그리고 도박(gambling)이 성행하였고, 또한 시민들의 해외여행과 관용업무여행에 도움을 주는 "프록스모스(Proxemos)제도" 즉, 오늘의 Tour Guide와 Consultant 같은 여행안내와 상담자의 역할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3. 로마 시대
로마시대의 군사 및 정부조직은 제국주의의 제도하에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 문화적으로 서양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의 분쟁속에서도 대체로 여행의 안전과 자유는 오랫동안 보장되면서 여행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고대 로마의 여행은 4가지 조건에 의해서 더욱 성행하였다.
① 로마의 화폐(coins)는 여행자들의 이동조건의 매개물이었고
② 우수한 육로와 수로(water routes)는 여행의 촉진역할을 다하였고
③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공용어로 통용되면서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었고
④ 법적시스템이 당시 외국법정과 재판권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또한, 거대한 영토의 지배와 세력의 확대는 경제성장을 촉진하여 상품과 서비스의 수요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이때 무역목적에 따른 중산층의 여행 증가는 종교, 위락, 요양 등의 목적으로 전국을 또는, 세계의 관광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경에 로마제국이 붕괴되면서 치안이 혼란해지고, 도로가 황폐되고, 화폐경제로 부터 실물경제로 전환되어 관광의 악조건이 작용하여 소위, 관광의 공백시대가 도래하였다.
이러한 암흑시대(Dark Ages)가 시작되었어도 예루살렘(Jerusalem)을 찾는 아랍인들의 여행이 점차 늘어갔으며 마침내 르네상스(Renaissance)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2절 중세와 근대의 관광현상과 숙박시설
1. 중세 도시시대
도시생활은 경제적 전문화에 기인하면서 빠른 문명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말하자면 중세에 있어 유럽의 도시문명은 무역과 제조업의 성장과 함께 도시인구의 증가, 상인들의 이동, 중산층의 탄생, 십자군의 전쟁 등은 다시 여행을 활발하게 자극시키고, 더욱이 문명의 서광으로서 작가들의 활동은 르네상스(Renaissance)의 무대를 등장시켜 여행의 촉진을 유도하게 되었다.
그동안 동서의 교역은 성장을 거듭하여 여행의 동기를 더욱 우발시키고 여가는 프랑스, 독일, 이태리, 홀랜드 및 이집트에서 더욱 생성하여 여행을 촉진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들이 1700년도에 와서는 세계의 경제와 사회의 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대량관광(mass-tourism)이 발전하게 되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관광에 새로운 전환기를 주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호텔의 개념으로서 숙박시설이 필요에 따라 설립되면서 대량관광의 형태를 부분적이나마 수용할 수가 있었다.
2. 그랜드 투어(Grand Tour)시대와 영국
그랜드 투어는 17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성행하였던 관광의 형태로서, 처음에는 부유한 상류계층의 자녀들을 교육목적으로 견문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서유럽 등의 순환여행을 실시하였던 때부터 생겨났던 것이다. 존 터우너(John towner)박사는 그랜드 투어를 연구하는데는 충분한 자료가 없어 그 당시의 일기, 편지 및 여행기록의 기초적 정보자료에 근거를 두고 그랜드투어를 연구하였다.
그랜드 투어의 정의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옛날 명문 집안의 젊은층이 교육의 기초과목으로 유럽내에 관심있는 도시와 지역 등을 여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본래 서유럽내의 특정지역과 도시는 정해 있지 않고 교육과 위락의 목적으로 여행하였었다.
영국에서의 호텔(hotel)이란 단어는 1760년에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1600년도에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영국의 스롭시어(Shrophshire) 지방에서 목조2층의 건물로서 "Feathers Hotel of Ludlow"가 등장하여 벌써 호텔이란 말이 생겨나고 있었다.
호텔이 등장하기 전에 여행객들은 대게의 경우, 목적지에서 민박을 청하거나 하숙(lodging)이나 셋방(chamber)에 숙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774년에 벌써 데이비드 로(David Low) 씨에 의해서 코벤트(Covent) 정원인 아처(Load Archer)경의 농가에 First Family Hotel이라는 현대적 호텔의 모형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60년동안 영국의 도시 및 휴양지에 현대식의 호텔들이 건립되면서 1838년에는 유스톤(Euston)에 First Railway Terminal Hotel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19세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민들에게는 外食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많은 인구가 교외에 살기 때문에 점심식사하러 집에 갈 수 없는 사람이나, 낮에 쇼핑하러 중심지로 들어온 시민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하는 적절한 음식점과 커피숖이 증가하였다. 터번(tavern)같은 곳에서는 시민들이 이곳에서 숙박과 커피, 그리고 간이음식을 즐겼던 것이다.
근대의 영국호텔은 무엇보다도 리츠(Cesar Ritz;1850~1918)에 의해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즉, 그는 1889년에 런던에 세워진 Savoy Hotel을 인수하면서 호텔경영은 물론, 식당업을 번창시켜 미국의 외식산업에도 크게 공헌한 바가 있다.
그 후 1974년 영국의 총객실수가 500,000개에 달하고 있으나 객실 수용능력의 절반이 해변지역의 휴양지 호텔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호텔경영자는 주로 순수호텔업자, 주류업자, 호텔 및 케터리업자, 기타 등으로 구분되면서 오늘의 Trusthouse Forte가 총호텔수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그 그룹형태가 방대하였다.
3.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러 절대 왕권제도하에서 왕후.귀족들을 대상으로 특권 계급전용의 호화스러운 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호텔도 역시 관광호텔은 Deluxe, 1, 2, 3, 4등급으로 구분되면서 모텔과 터미널호텔도 포함되고 있지만 정부의 불인가된 호텔로도 존재하고 있다. 특히, 정식허가를 얻은 호텔과, 연중 몇 달(月)만 영업하는 계절적 호텔, 식당이 없는 Pension, 특정지역에 세워진 모텔이나 공원 호텔 등이 그 예이다.
4. 독일
독일에서 호텔의 등장은 1807년에 근대호텔의 개념으로 온천지인 바덴바덴에 건립된 Badische Hof를 지적할 수 있다. 이 호텔은 초기의 여관(inn)에 비해 대단히 호화스러운 숙박시설로서 건물구조도 크고 대소의 응접실, 발코니, 오락실, 독서실, 식당, 침실 및 욕실 등이 조직적으로 잘 설비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냉수와 온수의 공급이 원할하고 정원 등이 마련되어 있어서 근대 호텔과 다를 바 없었다.
이 호텔의 등장은 스위스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전 구라파의 호텔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준 동기가 되었다. 그 후 1874년에는 베를린에 Kaiser Hof가, 1876년에는 라인강변에 Frankfurter Hof가 건립되었다.
5. 스위스
스위스는 자연적인 관광자원으로서 옛부터 여행객들에게 풍부한 매력을 주었을뿐더러 고대부터 런던에서 파리, 그리고 로마를 연결하는 길목의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근엽부터 스위스는 유럽의 유일한 관광지(playgorund)로 각광을 받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곳의 호텔들은 결과적으로 세계의 휴식처로서 매력을 갖게 되었다. 특히, 스위스의 호텔들은 휴양지(resort) 호텔로서 제공되고 있었다.
Baur의 아들 Theodor Baur는 Tschurni씨와 함께 Ouschy에서 호텔 전문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Theodor Baur씨는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팁(tips)의 폐지를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Lucerne의 Grand Hotel National은 1871년에 개업하여 6년후에는 프랑스에서 Ritz가 돌아와 27세의 나이로 지배인으로서 종사한 유명한 호텔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유럽지역의 왕족들이 방문하기도 한 이 호텔은 특히, 벨지움의 Albert왕과 왕비가신혼여행 중에 투숙한 후 그의 왕족들이 정기적으로 이 호텔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스위스는 유럽인들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사랑받는 휴양지로서 무수한 고급호텔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제3절 미국의 호텔발전 과정
1. 초기의 숙박시설
아메리카 신대륙이 발견된 이래 많은 유럽인들이 이주하면서, 그중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신천지를 찾아간 Puritan과 무역.개척의 이익을 목적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노력으로 자유독립의 정신을 갖고 신대륙을 개척하고 경제적 발전을 급속도로 진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식민지를 본국상품의 판매시장 및 원료 공급지로 보는 중상주의정책을 채용하여 식민지의 상공업 발달을 억제하였다. 이렇게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하여 식민지인의 본국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지고 반항운동이 고조되면서도 이민들의 이동이 빈번하여 자연히 영국과 같은 Tavern이나 Inn들이 속속 생겨 나고 있었다.
그리고 호텔(hotel)이란 용어가 라틴어의 "Hospitale"에서 파생된후, 미국에서는 1791년에 호텔이란 말이 도입되어 1790년에 도시안내에서(City Directories)에서 많은 타번과 호텔이 숙박시설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 후 1820년에 들어와서 호텔이란 용어가 더욱 미국에서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호텔이 귀족계급을 위한 목적보다도 상업호텔의 색채가 강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해 가고 있었다.
2. 시티 호텔의 등장과 제1차 황금기
미국 식민지 시대와 합중국 시대의 뉴욕에서는 Ciy Hotel이란 호텔이 일찍이 등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랑시(James De Lancy)씨의 사저로서 Fraunces Tavern이라 하여 1754년에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는 필라델피아에서 채택된 수입반대결의안(Non-importation Resolutions)의 서명회의(1865. 11. 31)가 6일간이나 열렸고, 혁명운동이 한창일 때는 군사본부로 이용되기도 하고, 본관뒤의 큰 건물은 무도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City Hotel이 등장한 이후 1829년까지의 35년간을 미국 호텔산업의 제1차 황금기(The first golden age of hotels in the U.S)라고 부르고 있다.
3. 근대호텔의 출현과 트레몬트 하우스
1829년에는 보스톤(Boston)에 최초의 현대식 호텔은 Tremont House가 등장했다. 소위, 이 호텔을 가르켜 "근대호텔산업의 원조(The Adam and Eve of the Modern Hotel Industry)"라고 부르면서 미국이나 유럽에 있어 새로운 호텔경영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게 되었다. 이 호텔은 로비(lobby)를 구비하여 고객이 바(bar)에서 등록(check-in)할 필요가 없이 바로 호텔 로비를 통하여 투숙할 수 가 있었다.
말하자면 트레몬트 하우스의 등장은 호텔경영에 있어 호텔의 규모, 구조, 설비, 투자액 및 경영기술 등에 있어서 무조건 "최초(first-class)"의 생성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트레몬트는 향후 65년간 세계적인 호텔로서 명성을 다해 왔지만, 다른 호텔의 근대적인 경영기술의 경쟁에서 물러나기 직전 20여년까지는 2류호텔로 그 여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트레몬트는 19세기에 있어 호텔경영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역사적인 호텔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4. 제2차 황금기와 스타틀러
미국의 호텔산업계는 20세기에 들어와 새로 늘어나는 여행인구에 대한 서비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여행객들이 원하는 숙박시설의 형태(types of accommodations), 서비스의 신개발(new services), 중산층 고객(middle-class traveler)에 맞는 숙박시설과 서비스, 또는 이들에게 적합한 운영형태, 적당한 수익을 위한 객실요금(room rates)등으로 호텔업자들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스타틀러(E. M. Statler)씨가 호텔업계에 제일인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왕족.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채산운영을 도외시한 서비스를 개발한 스타틀러는 과학적이고 합리적 경영방식을 채택하여 근대호텔산업의 혁신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의 근대호텔산업에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킨 그를 세상에서는 자동차의 혁명왕 포드(Henry Ford)에 비교하여 "근대호텔의 혁명왕"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스타틀러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경험과 창안(ideas)으로 오늘날 호텔경영에 많은 기술과 서비스의 개선에 혁명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1.5 달러로 욕실이 달린 객실을 이용할 수 있다.(A room and a bath for a dollar and a half.)"라는 슬로건(slogan)을 창시하여서 중산층 고객을 다량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호텔들은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대규모 호텔들이 연이어 건립되었다. 뉴욕에서만도 다수의 호텔들이 신축되었고, 소도시에서는 현대식 호텔들이 없이는 도시의 체면이 안선다는 여론이 집약되고 있었다.
1920년에는 New Waldorf Astoria 호텔이 47층의 2,150실을 가지고 개업을 하고, 1927년에는 시카고에서 Stevens Hotel(지금의 Conard Hotel)이 3,000실을 갖고 문을 열었는데 1967년의 소련 모스크바에서 건설된 Hotel Rossiya(3,500실)와 1990년 미국의 라스베가스의 Excalibur Hotel(4,032)이 있기까지는 세계최대의 호텔이 되었다.
5. 공황기
호텔의 붐도 1930년도 미국이 경제대공황기를 맞이하면서 호텔황금기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를 가르켜 호텔경영사상 가장 불행하였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당시 호텔산업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산업으로 생각되면서, 전체 호텔의 85%이상이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도 스타틀러의 몇몇 호텔들은 불황시대를 이겨내는 경영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특권계급을 상대로한 호화호텔들은 미국에서 시대적응을 못하고 도태된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때의 불황을 통하여 호텔경영의 이론은 일반대중을 고객으로 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지론이 되면서 경영합리화를 위한 체인(chain) 호텔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호텔업자들은 자기의 호텔부동산을 헐값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호텔에는 고객의 발길을 끊기고 조용한 가운데 모든 객실이 텅 빈 상태이었다. 어떤 호텔기업은 객실료를 인하하면서 호텔운영을 모색하여 보았지만, 역시 실패하기가 일쑤였다. 당시 호텔 투숙율이 65%가 손익분기점인데도 1935년의 투숙율은 51%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호텔 재정전문가들도 호텔산업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산업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한 때 호텔소유주였던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회사(Metroplitan Life Insurance Co.)도 몰락하고 말았다 그 후에 경제가 회복되면서도 호텔투자가들은 호텔을 흰코끼리(white elephant)라 생각하여 몇몇 사람만이 마지 못해 호텔에 투자하곤 하였다.
6. 회복 정착기
대공황이 지나고 1940년 이후에는 차차 미국의 호텔산업이 낙관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군인들의 이동과 더불어 여행의 빈도가 커서 당시 호텔들은 객실의 부족으로 즐거운 비명을 울려야만 했다. 그리고 자동차와 다른 운송시설의 급격한 증가는 인간이 원하는 곳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가 있었다. 따라서 1947년에는 평균 객실 이용률이 90%로 상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호텔의 시설과 서비스는 수준 이하였다. 왜냐하면 전쟁 당시 젊은이들은 군대에 징집되었기 때문에 종업원이 상당히 부족했고, 수요에 공급이 따르지 못하여 여행객들은 호텔의 로비에서 잠을 청할 처지였다. 또한 전쟁이 갑자기 끝남으로해서 호텔객실의 공급을 예측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때에는 완전한 호텔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인적자원도 대량 부족했고 경험있는 종업원은 더욱 채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텔서비스가 수준 이하로 낙후 되고 있었지만, 호텔 경영자들은 최대한의 정성을 다하여 호텔산업이 기간산업인양 국가 전쟁에 공헌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호텔을 열심히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와 항공기를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급증하면서 호텔의 체재일수가 짧아져 호텔투숙 점유율이 낮아지고 있었다. 반면에 도시주변과 시내 또는, 고속도로 및 공항부근에는 Franchising System에 의해 호텔가 모텔들이 낮은 세금의 혜택으로 대량 건축되므로 해서 공급과잉의 현상을 낳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서 체인호텔 시스템이 도입되어 The Hilton Corporation과 Sheraton of America 등은 쌍벽을 이루어 체인호텔 경영방식으로 발전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로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7. 모텔(motel)의 발전기
도로의 정비와 자동차의 증가로 여행객들은 좀더 멀리, 그리고 좀더 오래도록 여행을 즐기면서 숙박비가 비싸고 절차가 까다로운 호텔보다도 이용하기 쉽고 저렴한 모텔을 찾고 있었다. 호텔사업은 1920년을 위시하여 19세기 중엽부터 철도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철도가 있기 전의 여관이나 Tavern들은 점차 호텔화 되어 가기도 하였으나, 자동차가 생겨나면서 자동차 이용객들은 값싸고 이용하기 편리한 모텔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모터 호텔이 너무 대형화 되면서 투자의 위축과 고객들의 수요감소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는 객실은 좁고 시설은 단조롭지만 고객들의 시장성향에 의해서 Budget Mutel이 성행하고 있었다. Days Inns는 버젯 모텔의 체인으로서 가장 크며, 상용빌딩처럼 로비도 없고 후론트 업무는 잡다한 가게에서 직접 Check-in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버젯 체인으로는 Motel 6를 들 수가 있다.
제4절 한국 숙박시설의 발전형태
1. 고대 숙박시설의 발전과정
부족국가에서 이어 온 삼국은 부족간의 이동이나,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서 옛부터 그들의 이동은 빈번했을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중국세력의 투쟁과정에서 생성하였다.
삼국의 사회는 귀족관료계급이 지배하고 평민과 노예계급을 중심으로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삼국중 고구려는 중국문화와 접하면서 가장 먼저 정치 및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특히, 고구려는 농업을 주요산업으로 하면서 수렵과 목축업이 성행하여 그들의 이동이 많았다고 본다.
삼국 시대의 여행계층은 왕, 귀족, 승려, 학생 등의 지배계층이 주종을 이루고 또한, 관제의 공용여행과 상인들의 이동, 씨족들의 이주, 군사상의 이동 등이 당시의 여행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조 시대
태조 이성계가 정몽주 등의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1392).
그리고 국도를 한양으로 천도(태조 3년, 1394)함에 따라 상류계급과 그 속족들의 대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조에는 양반, 중인, 상민 및 천인의 사회조직에서 적어도 중인 이상에서 귀족들이 직업의 선택이나 거주이전의 자유에서 여행과 이동이 원활하였다.
또한, 세종원년(1419)에 대마도를 정벌하면서부터 왜와의 통상으로 삼포를 개항케 하고 무역왕래가 빈번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김종서로 하여금 두만강변의 야인을 몰아내기 위하여 육진을 설치하여 남부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상인들의 급격한 증가는 그들의 숙소 증가를 가져왔고 역시 항구주변의 객주가 발달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군사적으로 국내.외인들의 이동이 심하였지만 일반서민들의 여행은 매우 둔화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이 1899년에 경인철도부설권을 미국으로부터 매수하여 인천과 노량진사이에 최초로 철도가 개설(1899)되어 여행자들의 왕래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그 후 노일전쟁시에 일본이 전쟁의 수행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경부선(1904)과 경의선(1906)이 생기면서, 차차 각처에 지선이 부설되고 1898년에는 한.미합작으로 전차와 전등이 가설되고 있었다.
3. 호텔의 생성시대
서구식 숙박시설인 호텔(hotel)의 등장은 우리 나라의 숙박산업에 전환기를 가져다 주었다.
지금까지의 여관은 온돌(일식은 다다미)등으로서 객실이 구성되고 있었지만, 호텔의 객실은 침대(bed)와 가구 및 침구로서 구성된 서양식들의 방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인천(서린동)에 大佛호텔이 벽돌 3층의 11실으로 일본인 호리리기다로씨가 1887년 건축에 착수하여 1888년에 낙성시킨 호텔로서, 당시 가장 고급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한국을 찾는 구라파인이나 미국인을 상대로 한 양식호텔로 설계된 것이다.
이 대불호텔이 생기기 전에 외국인들은 외국영사관에게 신세를 지게 마련이었다. 그때 구미인들은 문호를 개방치 않던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왕래하는 외국인이 증가일로에 있으면서, 대불호텔이 그들에게는 물론 인천 거주의 외국인들에게까지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4. 철도호텔의 발전기
구미나 일본등지에서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철도산업의 부대사업으로 철도이용객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경인선, 경의선, 경부선의 개통은 비로서 철도호텔을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말하자면 교통의 발달로 인한 인구의 집중과 상공업의 발달은 숙박시설의 필요성을 더욱 자극한 결과이다.
이 시대에는 철도호텔의 생성과 아울러 철도주변과 온천 등지의 휴향지를 중심으로 휴양지호텔(resort hotel)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 또한 일제시대의 호텔은 어차피 日人들의 손에 의해서 호텔들이 세워지고 운영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조선호텔의 등장은 선진 외국의 호텔경영기법을 도입한데 대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겠다.
5. 현대호텔의 발전형태
20세기 중엽부터 우리 나라의 철도운행이 성행하였고, 일본 항공이 취항한 후, 1929년 9월 10일에는 정식으로 우리 나라에도 항공노선이 개설되면서 특히, 일본인들의 출입이 많아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일합병(1910) 이후 일본의 식민지 정책하에 도시의 번창과 도시인구의 증가와 함께 많은 여행자들이 편리해진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이동이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1960년 이후의 호텔의 출현을 보면, 아스토리아 호텔(Astoria Hotel)이 1960년 10월 6일에 객실 25실로 개업을 하고, 메트로 호텔(Metro Hotel)이 동년 12월 15일에 객실 80개를 가지고 문을 열고, 그랜드 호텔(Grand Hotel)이 1962년 2월 14일에 33개의 객실로, 부산의 동래호텔이 동년 4월 1일에 62실로 각각 영업을 개시하여 우리나라 민영호텔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뭐니 뭐니해도 1963년 4월 8일에 개관한 워커힐(Walker Hill)의 등장은 우리 나라 호텔산업계에 큰 발전의 효시를 가져다 준 셈이다.
이 호텔은 대지 197,000평에 연건평 2만평에 달하는 복합건물호텔로, 당시 고객 471명을 수용할 수 있는 254개의 객실을 확보하여 그 당시 동양 최대의 휴양지(resort hotel)로서 그 위용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지금의 워커힐은 미국의 쉐라톤(Sheraton)호텔과 후랜차이즈 경영으로 객실 806실로 증충되어 명실공히 호화 호텔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966년에는 순민간자본으로 세워진 당시 업계의 최대 호텔로서 세종호텔이 객실 322실을 가지고 문을 열게 되었다.
요약)우리나라 호텔의 역사
1) 근대이전
- 신라 소지왕 9년에 개설된 역관(삼국사기 기록)
- 고려시대 참역제
- 조선시대 객주: 숙박을 전문으로 하는 보상객주
2) 근대적 숙박시설
- 구한말 개항이후 외국인들의 필요에 의한 한식과 일식의 여관 발생
3) 호텔의 생성
- 1888년 일본인 호리 리기다가 인천에 대불호텔개관(3층11실)
- 청국인 이태가 스튜워드호텔 개관
- 1902년 독일인 손탁이 손탁호텔 개관
4) 현대호텔의 탄생
- 1936년 반도호텔 개관
: 111실 보유 / 미국 스타틀러 호텔의 경영방식 도입
: 최대의 시설규모를 갖춘 호텔
- 1954년 교통부 육운국에 관광과 설치
- 1952년 대원호텔, 1955년 금수장호텔, 1957년 해운대 관광호텔 / 사보이호텔
- 1961년 관광산업진흥법 제정 : 관광호텔 분류시작
- 1962년 국제관광공사 설립
- 1963년 워커힐호텔 개관 : 254실 보유
- 1970년 조선호텔 개관 ( 최초의 자본 / 경영분리운영 )
- 1979년- 86년 다수의 대규모 특급호텔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