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을 읽고
제 1편 : 1872년 카를 마르크스 54세가 되다.
1882년 4월 28일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는 짧게 쓰여 있었다.,
"내 예언자의 턱수염과 왕관처럼 머리를 덮었던 영광을 없애버렸네."
늑막염과 기관지염으로 몸이 쇠약해지면서 마침내 자신의 힘이 사라졌음을 받아들인 65세의 카를 마르크스는 알제리의 벤트노어 이발사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쳤다. 그러면서 그는 삭발 전에 사진을 한 장 찍어 두었다 그의 마지막 사진, 온화한 제우스요 지적인 크리스마스 神父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후세 사람들이 삭발한 모습을 절대 보지 못하게 해두었다.
1883년 3월 17일 토요일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의 외딴 구석에 그는 묻히고, 엥겔스는
"인류는 머리 하나만큼 키가 줄었다. 그것도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머리 하나만큼."
"이 시대에 가장 미움을 받고 중상을 당한 혁명적 천재인 그의 이름과 업적은 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것."
이라고 弔辭에서 예언하였다.
1872년에 마르크스는 54세가 되었다. 그는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었다.
집요한 학문탐구의 정열을 내연하던 젊은 날의 마르크스, 심도있는 학문적 천착과 활화산 같은 실천혁명의 의지를 뿜어내던 중년의 마르크스를 일단 정리하고, 이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초로가 된 마르크스의 일상과 이상을 그와 관계된 다양한 대화를 통해서들여다보자.
변증법을 삶의 내적 역학으로 받아들인 당대 유일의 영국인 사회주의자 어니스트 벨포트 백스는, 1881년 지식인용 월간지인 <모던 소트>에 기고한 글에서 [자본]에 대하여
"하나의 주의를 기초로 경제를 풀어낸 책인데 그 혁명적 성격과 광범위한 중요성에서 볼 때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나 역학에서의 중력의 법칙에 비길 만하다."
라고 평가했다.
이 기사를 읽고 마르크스는 흥분했다. 30여 년의 망명지인 섬나라 잉글랜드 볼던인 -무식하고 단순한, 좀 경박한 영국인종-들 사이에서 마침내 그를 이해하는 오직 한 사람의 영국인을 만난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진정한 열망에 가득 차서, 영국의 속물 근성에 담대하게 저항 하는 첫 글일세."
라고 1848년 혁명의 용사 프리드리히 아돌프 조지에게 말했으며, 더욱 기분이 좋았던 것은 <모던 소트>가 런던 웨스트 엔드의 여러 벽에 그 기사를 알리는 플래카드들을 내걸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병든 아내 -예니 마르크스, 프로이센 지배 계급 출신인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의 딸로서 여섯 살 연하인 유대인 출신인 보잘 것 없는 카를 마르크스의 집요한 구애에 굴복하여, 평생을 아내이자 마르크스의 충실한 비서로 - 식자공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미가 기어가는 것 같은 난해한 마르크스의 필적을 정서한, 그리하여 최대의 동지가 된 -에게 백스의 평과 플래카드 이야기를 들려주자, 간암으로 병석에 누워 죽어가던 예니는 즉시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 해 1881년 12월 2일, 줄담배를 피워대며 밤새워 일하느라 악화된 기관지염에 늑막염이 겹쳐 옆 침실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남편에게, 영어로 층계참 건너편 침실을 향해
"카를, 힘이 빠지고 있어요……."
라고 소리쳤다. 카를의 위대한 반려자요 공산주의의 어머니인 예니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의, 기독교와 관계없는 한 모퉁이에 묻혔다.
역설, 풍자, 모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그의 집요한 기대와 정열.
마르크스의 모든 작품에 살아 숨쉬는 이런 정신들은 실제의 그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마드리드에서 모스크바까지 온 유럽의 왕족과 귀족, 부르주아를 까닭 모를 공포에 떨게하는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의 말과 생활 모습, 대화에서 살펴보자. 단, 1872년 그가 54세가 된 이후의 모습이다.
"그는 키가 작고 몸집이 자그마했습니다. 머리카락과 턱수염은 희었지만 콧수염은 여전히 거무스름해서 묘한 대조를 이루더군요. 얼굴은 둥그스름한 편이었습니다. 잘 생긴 이마는 불룩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눈은 강렬한 편이었지만 전체적인 표정은 호감이 가는 쪽이었 습니다."
"그는 요람에 누운 아기를 잡아먹는 신사의 표정은 전혀 아니더군요. 그의 이야기는 견문 이 넓은, 아니 박식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만한 것이었습니다. 비교 문법에도 관심이 많아 옛 슬라브어를 비롯해 진기한 것들을 공부했고, 여러 가지 예스런 취향도 있더군요. 이따금 씩 비꼬는 기색을 내비치기는 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폐하와 공주님에 대해 몇 번 언급했는데, 그때마다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거론한 저명 인사들의 경우에도, 물론 신랄하 게 비판을 하기는 했지만, 마라 -프랑스 혁명 지도자-처럼 포악하거나 잔인한 태도와 말투 는 아니었습니다. 인터내셔널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서도 품위있게 말을 했습니 다."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내 인상은 그가 나와 정반대 되는 견해를 지닌 사람임을 감 안할 때, 전혀 나쁘지 않았으며, 기꺼이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세상을 뒤집을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닐 것입니다."
1879년 마운트스튜어드 경이 미르크스에 대한 관찰을 부탁한 빅토리아 공주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런데, 마운트스튜어드 경이 관찰한 바는 과연 정확할까?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보자.
"러시아에서 '머지 않아 큰 충돌' 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위로부터의 개혁에서 시작되어 차르 체제의 붕괴로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어 독일에서 '기존의 군사 체제' 에 대한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유럽의 통치자들이 군비 지출을 줄여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는데 합의함으로써 혁명을 막으려고 하겠지만, '온갖 공포와 질투'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부담은 점점 커질 것이다. 과학의 발전에 발을 맞추어 파괴 기술의 개 선이 이루어질 것이고, 해가 갈수록 전쟁의 값비싼 기계에 들어가는 비용은 늘어날 것이 다."
"경께선, 설사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그 혁명을 통해 반드시 공산주의자들의 모든 꿈과 계 획이 실현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모든 위 대한 운동은 속도가 더디오. 공산주의 혁명은 당신네들의 1688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더 나 은 것들을 향한 첫 걸음이 될 뿐이오."
마르크스는 자신의 말이 편지지에 적히게 될 것임을 몰랐음에도, 신중한 태도와 상식으로 교활한 심문자가 쳐놓은 작은 덫들을 잘 피해 나갔다.
또한, 그가 1875년에 카를스바트에 갔을 때 빈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는 늘 적절한 말, 놀랄 만한 비유,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농담을 던진다. 그가 아주 재치있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곁에 가게 되면 -여자와 아이들은 대화에서 가장 효과적 인 공작대상이다- 마르크스가 풍부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그의 추억들을 푸짐하게 펼쳐놓 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로맨티시즘이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숲의 노래를 부르던 과거로 돌아가기를 좋아한다."
그는 온천욕을 좋아해서 빅토리아 여왕과 테니슨 경이 아주 좋아하고 그 어느 곳보다 부르주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아일오브와이트 온천장에 가끔 갔는데, 그가 그곳에 갈 때마다 다른 손님들은 이 무시무시한 공산주의자 도깨비 왕초가 사실은 그 지역에서 열리는 파티의 중요인사라는 것을 알고 놀라곤 하였다.
마르크스는 의사가 허락할 때는 여전히 [자본]2권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패배를 받아들이고 온화한 일화집이나 쓰면서, 세상을 관찰하고 회고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정열적인 참여 -팸플랫과 청원서, 집회와 작전-의 세월은 끝이 난 것이다.
의사가 저녁에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다정한 주인 노릇을 하며, 위인과 알고 지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따라주고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러시아의 혁명가 니콜라이 모로조프는 말했다.
"그는 아주 상냥했다. 그가 병적이고 다가가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 독일의 저널리스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가부장적인 초연한 태도로 조용조용하게 말을 했다. 내가 상상하던 그림과는 정반대 였다. 사실 나는 그의 적들이 퍼뜨린 이야기 때문에, 아주 병적이고 짜증이 심한 노신사를 만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 있는 머리가 허연 노인의 웃음을 터뜨리는 검은 눈은 우정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의 말에는 온화함이 가득했다.
며칠 뒤 엥겔스에게 마르크스가 내 예상과는 많이 달라서 놀랐다고 말하자, 엥겔스는 '글세, 그래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엄청난 폭풍을 몰아올 수 있는 사람이지' 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냈다. 구운 쇠고기로 점심을 먹고 딸들인 라우나, 예니헨과 손자들과 함께 히스까지 긴 산책을 나섰다.
그것을 본 독일 사회민주주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우구스트 베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어디에서나 사람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던 마르크스가 따뜻한 애정을 드러내며 손자들과 놀아주고, 손자들은 또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도 기분이 좋았다."
마르크스는 나이가 들면서 집에서의 습관은 규칙적이고 온건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으면서 <더 타임스>를 읽고, 하루 일을 하러 서재로 들어갔다.
해질녘이면 검은 망토를 쓰고 중절모를 쓰고 -딸 엘리아노르는 '꼭 음모자들의 합창단 단원처럼 보인다고 말했다-런던 거리를 한 시간 정도 산책했다.
주피터 토난스 마르크스는 이제 굳이 적들의 중상이나 부정확한 말을 고치려들지 않았다. 그는 1879년 한 미국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말한 것이나 쓴 것을 일일이 바로잡으려 한다면, 비서가 스무 명쯤은 필요할 거요."
"나는 성가시게 구는 일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소. 젊은 시절에는 가끔 강력하게 나간 적도 있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지혜가 생기는 법이오. 적어도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 일은 피하게 된 것 같소."
나이는 또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이 거인을 30년 동안 무시했던 -그에게 암살자라고 욕을 할 때를 빼고는-영국인들조차 이제 약간의 호기심과 존경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노년기의 카를 마르크스의 정체를 외부 평가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의 독자들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구두를 닦지?' 에 대한 답은 생각하면서, 제 2편인 '노년기 카를 마르크스의 학적 활동' 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시도록.
첫댓글 근대서구의 2마리 괴물은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인데,그들에게서 공통된 점은 이성주의, 관념주의이다.이것은 또한 데카르트이후의 서구의 공통적인 병폐이기도하다. 그런의미에서 이성의 해체-이성의 정체에 눈뜨는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때늧은 감이 있으나 서구나,인류를 위해서나 그나마 다행이다.
마르크스,그대 사유의 천박함이여,그대 한몸의 재앙으로 끝나지 앉았다. 그대,대영제국도서관에서 용수의 "중론"을 한번이라도 보았던들 그어리석은 이름 역사에 기록되는 일일랑 없엇으리라.
우매한자의 희론에 현혹되어 먼지알갱이처럼 끄달리는 자-여기 또있는가.
청광만휴/마르크스를 이제 역사적 유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입니다. 긴 인류사에서 보면 칼 마르크스 이론의 맹점과 추종자들의 시행착오는 짧은 한 시대의 것들입니다. 마르크스 이론과 자본주의 이론이 현대에서 '克'의 개념으로 상호 보완하고 있지요. 퇴계와 율곡도 님의 관점에선 지독한 이성-관념론자이겠네요.
제 論은 글쓰기 또는 답글 기능을 이용해 주시고, '괴물', ''천박함', '먼지알갱이처럼 끄달리는' 등의 어휘는 지적 인식이 본질인 논객이 사용할 언어가 아니지요. '양백재'는 글의 품격을 유지한 論을 지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글을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