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시대의 군산
군산이 대한제국의 칙령에 의해 개항된 것은 1899년 5월 1일의 일이다
개항과 동시에 한국정부는 옥구감리 및 인천세관관할의 군산세관을 설치하여
행정사무를 개시하였다
이후 1906년 정부관제 개편으로 감리서가 폐지됨과 동시에 옥구군이 옥구부로
개편 되었는데 이때 군산 항만시설 확장을 위하여 강안(江岸)을 매축(埋築)하고
고정(固定) 기교(機橋) 1기를 설치하므로 서 비로소 근대적인 항구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한일합방직후인 1910년 9월에는 조선총독부 지방관제가 공포되어 옥구
부와 군사부가 개편 되었다.
그해 10월 1일 군산부청이 설치되면서 활기를 띠게 된 군산항은 이후 호남철도와
전주 - 군산간의 도로가 개통되면서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편리한 항구로서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비옥한 토지에 자리 잡고 있는 군산에 개항 초부터 일본인들이 앞 다투어
진출하여 농장을 형성 확대해 나갔던 만큼 군산항은 쌀의 수출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에는 한국의 전체 쌀 수출량의 20% 이상을 군산항에서 실어
갔으며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한국이 병참지가 되고 부터는 쌀의 집산지인 군산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도 공출이 더 심하였다
이렇듯 다른 지역에 비해 일본인 거주자의 수도 많고 수탈의 강도도 높았던 군산
이였기에 일인에 대한 저항의식도 그만큼 강하게 나타났다
1919년 3월5일 개정면 구암리 영명학교의교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한강
이남 지역 중 최초의 만세운동을 일으킨 이후 군산지역에서는 계속적으로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군산항이 발달함에 따라 노동자수가 증가하면서 정미소의 미선공이
나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를 비롯하여 일본인 농장주들의 과중한 소작료납부 요구
에 대한 소작농들의 항쟁(1927년 옥구군 서수면 이 엽사 농장) 등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1937년에 발표된
백릉(白凌) 채만식(蔡萬植)의 탁류(濁流)로 이 소설에는 미두장(米豆場)을 배경으로
1930년대 군산의 사회상과 생활상이 잘 담겨져 있다
“ 미제저수지는 ” 나운동의 은파관광지로 우리나라 수리조합 설치의시초로 속칭
“ 쌀밑방죽 ” 으로 불리 우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점에서 그 축조
시기는 조선초엽 이전으로 추정되며 군산지역 농업의 젖줄역할을 한 대규모 저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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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군산세관(전라북도 기념물 87호)
1905년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제1차 군산항 축항공사기간
(1905 ~ 1910) 중인 1908년(순종2년) 6월에 만들어졌다
서양식단층 건물로 건평은약 69평이며 불란서 또는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 자제를 수입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건물의 지붕은 고딕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
낸 것은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붕은 물고기비닐모양의 슬레이트로 되어있고 지붕위에는 3개의 뽀족한 첨탑
이 솟아 있는 모습으로 이러한 건축양식은 국내에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과 함
께 셋만 남아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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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조선은행
이 건물은 1922년에 일제식민지 정책의 총본산이었던 조선은행의 군산 지점으로
건립되었다
일본인 건축가 나까무라 요시헤이에 의해 설계되었고 중국인에 의하여 시공되었다
당시의 건축 상황에서 이와 같이 웅장한 건물이 경성 이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군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채만식의 탁류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지붕모양은 일본장군의 투구모양을 본 땄으며 중간에 천장을 설치하여 자연채광은
물론 군산을 감시하는 역할도 하였다 한다.
외관은 2층이지만 본래 높이는 4층 건물높이이다
일설에는 구 조선은행지하에 바다로 통하는 비상통로가 있어 비상시 구명정을 타고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이 전한다.
해방이후에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으로 바뀌어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화재로 겉모습만
남아 있다 지붕모양은 일본장군의 투구모양을 본떴으며 조선의 견제를 말살하기
위한회의자소이며 감시소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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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항) 군산항축항공사
군산 개항 후 한국 땅에서 쌀과 농산물을 반출하는 무역이 급증하자 항만
확장의 필요성을 느낀 일본거류민들이 세관책임자였던 프랑스인 라포트를
매수하여 공사를 진행시켰다
1905년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자금8만6천원으로 시작된 제1차 군산항축항공사
(1905 ~ 1910년)은 세관용지의 일부로 강안매립공사 고정 잔교1기설치
육상설비로는 석축의 접안 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2차축항공사(1909 ~ 1915)는 군산항축항기성회(1911)가 발족되어 총공사비
3만2천9백원으로 진행되었다
부두에 자동전화기 설치. 내항 역 연결. 고정 잔교 3기 등을 건설하였다
3차 공사는 공사비 2백85만원이 투입된 큰 공사였다.
해안을 매립하여 화물하치장 확장공사. 부잔교3기. 창고3동을 건설하여 쌀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철도선을 증설하여 하루 150량의 화차가 운행하게 되었다
4차축항공사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총 공사비 1천3백 2십만 원을 들여
대형부잔교 1기를 설치하여 3천 톤급 기선6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하였고
약2천미터의 상옥창고 2동을 신축 하였다
제4차 공사는 군산항을 일본의 병참기지화 하려는 목적이 강한 공사였다
결과적으로 일제시대 군산항은 부산. 인천에 이어 남한의 3대항의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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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항) 뜬 부두
군산내항은 금강 하구와 중부서해안 지역에 자리한 지리적 특징 때문에 고려
이후 호남지역의 세곡을 저장 운반하는 조운창고(군산창)가 운영되던 물류
유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해상교통로로서의 역할 때문에 1899년 개항이후 근대적인 항구로서
의 축항공사가 추진되었고 이때 역시부잔교가 만들어 진다
군산내항에 자리한 부잔교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
배의 접안이 어려운 서해안의 자연환경을 극복하고자 건조한 인공구조물이다
기본현태는 바닷물의 수위에 따라 상하로 움직이는 다리와 다리에 연결된 콘
크리트 함선이 접안시설로 이용되는 형태이다
부잔교의 건립은 군산항 제3차 축항공사기간인 1926년 ~ 1933년까지 3기를
설치하여 3천 톤급 기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수덕산토석채취 공사에 참여한 지역민에 의하면 하루 인금이 80전으로
다른일에 비하여 삯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공사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이며 완
성된 대형부잔교의 입수 식 때 사고가나서 한국인 노동자 10여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고 증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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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 국사 (국가지정 등록문화제 64호)
동 국사는 전국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시인 고은이 불가에 입문하여 불제자의
길을 걷기도 했던 사찰이다
1913년 일본인승려 우치다대사에 의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했는데 당시
일본에서 모든 건축 자제를 들여와 공사를 하였다고한다
동국사 입구에는 대리석 대문기둥이 서있는데 기둥양편에는 금강사(錦江寺)라는
옛 사찰의 명칭과 소화9년(1934)이라는 음각이 새겨져 있는데 누군가 일본천황
의 연호인 소화 글씨 위에 시멘트로 글씨를 지우려는 흔적이 남아있다.
동국사는 우리식절과 다른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입구에 일주문과 사천왕상이
없으며 지붕의 용마루가 일직선이여서 우리민족의 양식인 휘어진 곡선의
아름다움은 볼 수 없고 처마 및 단청이 없다
또 지붕의 경사가 급하고 추위에 견디기 위해 두터운 우리나라의 벽에 반에
동국사는 습기를 이기기 위해 삼면이 넒은 창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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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명공원
1906년 군산각국 거류지역의 명승지인 해망정 인근 9.907평을 일명 각국공원이라
이름을 정했다
이후 각국공원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 각국 조계지역
법이 폐지되자 각국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군산공원이라고 부르기 시작 했으며
군산시가 대일 무역으로 호황을 누리던 1933년에는 현 수시 탑이 서있는 산의 토지
6.088평을 매입하여 공원의 규모를 확대 하였다
이후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절제한 산림의 남벌로 산의 나무가 적어지자
19972년 해망동 수시 탑에서 미룡동의 군산대 뒷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개발제한
구역인 공원 지역으로 지정하고 그때까지 불리던 군산 공원이라는 명칭을 월명공원이라
바꾸어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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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명호수
월명호수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심의 산 위에 위치한 호수이다.
식수로 이용한 수원지 였기 때문에 상수원 보호를 위해 자연상태가 잘 보존 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은적사가 위치한 설림산과 봉수대가 있는 점방산 사이에 펼쳐진 계곡 이었던
이곳을 식수 저장 저수지를 만들고 군산 제1수원지라 불렸다.
1912년 6월18일 시작된 공사는 1915년 1월 4일 연 인원 10만여명이 동원 되어 준공 되였고
수질보호 명분으로 선암종은 폐사되고 당시 불상과 건축물들은 은적사로 옮겨으나
안타깝게도 은적사가 중창불사하며 옛 건물을 모두 철거하여 지금은 볼 수 없다.
1905년 군산을 방문한 전라감사 이석우씨가 말을 타고 선종암에 들렀다
가 이곳에서 후에 낚시를 하게 될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는 구전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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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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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18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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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최초 3.1운동(구.구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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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방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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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바위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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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째보선창(죽성포구)
![](https://t1.daumcdn.net/cfile/cafe/1624B54C4DAEF49B2B)
** 문학속의 째보선창(탁류.아리랑)
** 채만식 "소설가
** 해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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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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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 신흥동 구.히로쓰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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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시간이 되는데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