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민통선 안보관광코스 스페셜 길동무들의 나들이 강화평화전망대다.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2008년 개관한 평화전망대는 남북한의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여 평화적 통일의 기반을 다져 나가는 문화관광공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야외망배단이다. 북한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조상들에게 제를 올릴 수 있는 곳으로 상시 개방하고 있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가려 코앞에 있는 북녘땅을 볼 수가 없어 조금은 이쉽다.
제적봉(118m이다. 벌악봉(145m). 저담산(167m). 성덕산(215m)과 함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서면에 위치한 해발 1~200m의 나즈막한 4개의 산중에 하나다.
별악봉과 성덕산을 오를 수 있는 들머리다. 예전 강화지맥을 걸어면서 만났던 제적봉(118m). 별악봉(145m). 저담산(167m). 성덕산(215m)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서면에 있는 해발 1~200m의 나즈막한 4개의 산이다. 호젓한 능선길과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철산삼거리를 지난다. 삼거리를 뒤로 남북분단과 함께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고 포구터는 논으로 변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 강화군민들 조차 그 존재를 잊고 있는 산이포를 통과하게 된다. 선원들이 북적이던 풍요로운 뱃터 산이포는 19세기 말에서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까지 강화에서 가장 큰 포구로 전국에서도 손꼽혔다고 한다. 삼남지방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비롯한 다양한 물자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갈 때 물때를 기다리며 머물던 포구였다. 산이포는 100여척의 선박이 정박했고 700여 가구가 주거지를 형성했으며, 5일장이 열리면 황해도 연백 사람들까지 모였다고 한다. 수많은 선원들로 북적였고 각종 상점과 주막이 성황을 이뤘다, 사람들이 모이는데 터는 좁아서 주거지와 상점이 성냥갑 모양으로 붙어있고 골목길은 미로와 같았다고 한다.
이처럼 화려하고 풍요로운 역사를 지난 산이포가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해 2월 행정안전부의 국비 공모사업에 확정되어 2022년까지 총 98억 원이 투입 관광객에게 산이포의 역사를 알리고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는 민속마을로 조성될 예정이란다.
화남 고재형 선생은
山里浦前水色連 산이포 앞쪽은 바닷물에 닿아 있어,
漁歌一曲去來船 오고가는 배에서 고기잡이 노래곡조.
家家揭網家家酒 집집마다 그물 걸고 집집마다 술 담그니,
笑道延坪是貨泉ʻ 연평길은 재화의 샘ʼ이라고 웃으며 말하네.
민통선 안보관광코스는 이제 강화군 북부 해안순환도로로 들어선다. 해안가, 예부터 이 지역은 승천포와 산이포를 거점으로 서해와 한강, 예성강, 임진강 하구를 연결하며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사람의 발길이 사라진 지 어느덧 70년 오랜 잠에서 깨어나 수도권 제1의 민통선 안보관광코스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양사면으로 들어선다. 양사란 두 개의 절이란 뜻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때 서사면과 북사면을 합쳐서 양사면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길동무 뒷편 산자락에도 이름없는 돈대를 볼 수가 있다.
설 연휴를 맞아 낚시를 즐기고 있는 강태공의 모습이다.
길게 늘어서있는 전신주 그리고 길동무들의 발걸음이 아름답다.
인적이 없는 넓게 자리잡은 승천포 고려천도 공원에 들어선다. 승천포 마을에 조성된 1만㎡ 규모의 고려천도공원은 고려 천도 때 쓰였던 선박 승천호를 재현하고 고려사적비를 공원 안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려대장경 체험 시설과 휴식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고려고동사적비다. 고종(1192 ~ 1259)은 고려 제23대 국왕(재위: 1213년 ~ 1259년)이다. 고종은 즉위할 당시에는 최충헌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고종 6년(1219)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으매 왕은 제구실을 못하다가 고종 45년(1258)에 유경, 김준 등이 의(우의 손자)를 죽이자 왕에게 대권이 돌아왔다. 왕이 재위시에 북방의 민족들이 침입하여 그 어려움이 컸었는데 고종 3년(1216)에는 거란족이 쳐들어와 김취려, 조충 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고종 18년(1231) 몽골족이 쳐들어오자 다음해 강화도에 도읍을 옮긴 후 이곳을 강도라 하고 몽골족에 대항하였다. 몽골병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불타 버리자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 사이에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조판하니 이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8만대장경으로 민족문화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고종은 몽골군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내면서 강화를 이룩하려고 고종 46년(1259) 태자 전(뒤에 즉위하여 원종이 됨)을 몽골에 보낸 후 그 해에 승하하매 개경에 옮기지 못하고 홍릉에 모시게 된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를 형상화해 국난극복의 역사를 담은 상징조형물이다.
작년에는 없었던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와 '인공폭포'가 조성되었다는데 인공폭포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승천포는 조선시대까지 개경에서 강화를 잇는 뱃길이 닿는 포구였다. 기록에 따르면 황해도돠 평안도에서 서울로 가는 배들은 모두 승천포를 거쳐 갔을 정도의 큰 규모의 뱃너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로 천도할 당시, 고종의 어가 행렬이 처음 발 디딘 곳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몽골과 교섭할 때 두 나라 사신들이 승천포를 통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승천포의 역사적 의미를 담아 "고려 천도공원"이 조성되어 지난해 11월 개장했다. 오랜 시간 길 철망으로 가로막힌 쓸쓸한 민간이 출입통제 구역에서 다시금 활기 넘치는 공간으로 재도약하고 있다.
고종의 어가행렬도가 표시된 원형의 '앉음 벽 광장'이다.
고려 만월대의 출입문을 형상화한 '천도문'이다.
고려천도공원을 뒤로 다시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이어간다. 좌측으로 승천포돈대가 있지만 군사시설이라 카메라를 들여대지 못했다.
승룡돈대도 조용히 통과한다.
강화읍으로 들어선다.
대산교다. 대산리는 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묘동과 소산동에 송정면의 신성동 일부지역을 합하고 대묘동과 소산동에서 한글자씩 따서 대산리라 하였다고 한다.
돌모루다. 소산이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은 모퉁이라 돌모루라 칭했다고 한다. 예전에 아들 딸 낳고 행복한 보금자리였을 것 같은 폐가의 모습이 조금은 마음이 찡하다.
월곶리로 들어선다. 달뜨는 모습을 이곳에 있는 연미정(燕尾亭)에서 보는 것이 매우 아름답다 하여, 달곶 즉, 월곶(月串)이라 부르고 있다. 달(達)이 ‘높다’는 뜻인데 이것은 월(月)로 바꾼 경우가 지명에 많다고 한다. ‘높은 산’과 ‘곶’의 합성 지명이라는 것을 고성(高城)이란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단다.
원미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 목표가 보이니 발걸음도 한층 빨라진다.
월곶돈대로 들어선다.
5기 길동무의 겨울 프로그램인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에서 만났던 연미정이다. 월곶돈대ㆍ연미정은 강화팔경의 하나로 북녘 땅을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저 멀리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월곶돈대는 53돈대 중 하나다. 이곳에는 청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어 병자호란까지 이어진 비운의 정자, 연미정이 있다. 연미정은 강화팔경의 하나로 경관이 매우 뛰어났지만 민통선 지역으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가 지난 2008년에 완전 개방되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정이라 불리운다.
아직은 이르지마 우리가 걸어온 DMZ 철조망이 걷히며 남과 북이 연결되면 통일을 뜻한다. 그 날이 오면 인천서 염하를 지나 오른편으로 돌아 조강과 한강을 거슬러 올라 마포로, 용산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열릴 것이다. 인천서 서울 가는 뱃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염하 끝에서 왼편으로 돌면 조강을 타고 내려가는 뱃길도 있다.
조강을 끼고 열려 있던 뱃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예성강을 거슬러 연안, 배천, 개성으로 가는 뱃길이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 나루는 고려 시대 제일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강화읍에서 이십리 되는 승천에는 승천진 또는 승천포가 있었다. ‘진’은 나루요 ‘포’는 포구니 결국 같은 뜻, 배 닿는 곳이다. <강화부지>라고 하는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읍지에 양서, 곧 황해도, 평안도에서 서울로 가는 선박들은 모두 이 곳을 거쳐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 등 몇 지도에는 그 승천포에서 조강을 건너 맞은편 풍덕 땅에도 같은 이름, 승천포라는 지명이 있다. 두 승천포는 서로 맞보며 건너 다니는 나루였다. 이 승천나루가 고려 시대 개경에서 강화를 잇는 뱃길이었을 것이다. 풍덕에서 개성은 사십리 길이다. 그렇게 보면 강화에서 개성은 줄잡아 70리가 못되는 거리이다. 강화에서 서울이 140리니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강화에서 인천보다도 가깝다.
이 길을 왜그렇게 걷고 싶었는지 알 것 같다. 세 번만에 완성한 강화나들길 스페셜 도보여행 가칭 "강화나들길 21코스 강화평화전망대 가는 길"은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남긴다^^*
첫댓글 마지막 연미정이 너무 반가웠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발도 아프고..
그런데 까만봉지에 쵸코파이 선물 감동이었습니다.
아마 초소군인들도 정말 맛있게 먹으며 새해를 맞이할것 같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좋은 길나섬 많이 하시길 빕니다.
목표지점인 연미정이 보일때 정말 반가웠습니다. 길동무와 함께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만들었구나 생각하니 마지막 발걸음이 빨라졌지요. 예상시간 보다 30분 일찍 도착. 수고했습니다^^*
연무정.. 혹시 연무당까지 이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연미정에서 강화읍까지는 거리가 별로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강화읍이 이미 동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선생님 때문에 새로운 곳에서 즐겁게 걸었습니다.
산길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새로운 길이라는 의미만 하더라도
충분합니다. 월곶돈대 북쪽에는 어떻게 생긴 곳인가 늘 궁금했는데
그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었네요.
예전에 혼자 왔을 때 그곳 검문소에서 위쪽으로 걸어올라갈 수 있는지
물어본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실현될 수 있었네요.
저의 경험이 확장된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털것이 하나 줄었습니다. 정말 하나 남았네요
연미정을 컴퓨터 자판을 치다보면 왜 연무정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손가락이 어찌 ㅣ로 가야하는데 ㅜ로 가는 지 많이 오차가 나오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차라리 독수리 타법을 치면 그런일은 없겠지요. 오늘 아침 겨우 후기 정리 끝냈습니다. 블로그에는 아직 손도 못됐지만 감사합니다^^*
강화북부 지역을 멋지게 완주 하셨네요.
축하 드립니다.
창후리에서 평화 전망대찍고 연미정 까지도 20km가 넘는 거리일텐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연미정에서 끝내셨나요? 또 탈출은 어찌 하셨는지요? 관심 있습니다.
다음에 꼭 한번 걸어 보고 싶은 길인데, 연미정에서 귀가 차편도 알려주십시요.
섣달그믐날 긴 구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즐감 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화나들길 지도에 형광펜으로 걸을 길을 표시하다 보면 매번 북쪽 해안길을 걷지못해 섭섭했는데 이번 5기 길동무는 긋고 말았네요. 자료는 영상 및에 다 올려놓았으니 참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수명산님!
강화 제적봉 통일전망대부터 새롭게 개통된 해안순환도로와 고려천도공원을 거쳐 종점인 연미정에 이르는 안보관광코스 후반부의 여정을 즐감하였습니다~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강화북부해안길 리딩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길동무 정예요원들의 행사에 기꺼이 초대해 주셔서 깊은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정이 조금만 여유가 있었으면 숭뢰저수지도 탐방할 수 있었는데 그 것이 조금 아쉽군요. 고려천도길에서 강화평화빌리지를 지나 숭뢰저수지를 만나는 여정도 생각했었는데 3시 35분 버스를 놓치면 2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포기하고 순환도로를 따랐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출발은 쌀쌀하더니 후반기 따뜻한길 좋앗습니다.
약간의 아쉬움은 늘남지만 좋은 하루였습니다.사진 감사합니다 몆장 가져 갑니다.
미세먼지만 없었더라면 기쁨이 배가 되었을 터인데 그것이 조금 아쉽더군요. 강화평화전망대에서의 조망 작년과 마찮가지로 꽉 막힌 시야 그러나 지난해와는 달리 뻥뚫린 북부해안도로를 달려가는 길동무들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