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최덕홍 요한 주교의 사목
제1절 최덕홍 요한 신부가 제6대 감목으로 임명되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8년 12월 21일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를 Anthedones 명의 주교로서 대구대목구 제6대 감목으로 임영하였다. Byrne(方) 교황 대사 서리로부터 23일 연락을 받고 Byrne(方) 교황 대사 서리를 찾아가서 사양하다가 결국 수락하였다. 최덕홍 요한 신부는 24일 정식으로 감목과 주교 임명 통보를 받았다.
1948년 12월 21일 교황님으로부터 최 요한 신부님을 Anthedones
명의 주교이며 대구대목구장으로 선발되었다는 전문을 받고 이를
오늘 일자로 인정하고 확인합니다. 같은 전문에 의해서 대칙서를
받기 전에 주교 서품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법적 규
정을 준수하고 반대 사항이 없는 한 유효합니다.
1949년 1월 24일 교황 대사 서리
빠트리시오 야고보 Byrne(方) 몬시뇰
최덕홍 요한 주교는 1949년 2월 5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주교 서품 보고를 하였다.
저는 1948년 12월 21일 교황 대사 서리 Byrne(方) 몬시뇰이 보내
신 연락을 23일 받았습니다. 즉시 Byrne(方) 몬시뇰을 찾아뵙고
저의 부당함을 먼저 말씀드리고 그 임명을 사양하였습니다. 그러
나 마침내 하느님과 장상(長上)들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 순명의
정신으로 겸손하게 그 임명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서약서대로 서약을 하고 1949년 1월 30일 주교로 서품되었
습니다. 주교 서품 주례는 서울대목구 노기남 바오로 주교님께서
집전하셨고 라리보(Larribeau, 元) 주교님과 무세(Mousset, 文)
주교님이 함께 집전하셨습니다. 교황 대사 서리 Byrne(方) 몬시뇰
이 참석하신 가운데 대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남한의
모든 주교님들과 70명의 사제들과 많은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착좌식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부당한 종
대구대목구장
최 요한 주교
최덕홍 요한 주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 첫 주교가 되었다.
최덕홍 요한 주교의 주요 경력
본적 경상북도 대구부 비산동 173번지의 5
1902년 6월 2일
1914년 10월 3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입학
1920년 6월 20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중등과 졸업
1922년 6월 20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철학과 졸업
1926년 5월 29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신학과 졸업
신부로 서품
1926년 5월 30일 전라남도 제주읍본당 보좌
1936년 6월 29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
1940년 6월 25일 서울 소신학교(동성상업학교) 사감
1942년 2월 1일 전주지목구 경리
1944년 12월 1일 목포 주임
1948년 12월 21일 대구대목구 감목으로 임명됨
1949년 1월 30일 주교로 서품, 감목으로 착좌
제2절 메리놀 선교회에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다
1948년 8월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떠난 자리는 너무나 컸다. 재정의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신부의 부족이 심각하였다. 최덕홍 요한 주교는 1949년 3월 5일 메리놀 선교회 총장에게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착좌하자마자 저는 재정과 신부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빈 본당이 6개가 넘습니다. 따라서 많은 전교 신부님들을 우리 교구에
파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선 우리 교구의 큰 도시인 부산, 마산과 다른 도시에 파견해 주시기 바랍니
다. 이 도시에 대해서는 Carrol 신부님께서 눈으로 보시고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총장님께 현재의 우리 교구 실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드리리라 믿습
니다. 특히 (교회의) 중등학교 사정과 사회복지사업 등에 관해서 언급이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총장님께서 특별한 배려를 해주시고 또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고 기대하겠습니다.
4월 19일 참사위원회에서 최덕홍 요한 주교는 미국 메리놀 선교회 총장 Lane 신부가 사정상 신부 파견을 거절했다고 알렸다. 어느 선교회가 대구대목구에 신부를 파견하겠는가? 외국인에게 반기를 들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을 추방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을 텐데.
제3절 천주교회보를 다시 발간하다
1949년 1월 16일 대구대목구 가톨릭 청년연합회 총회는 첫 사업으로 천주교회보를 다시 발간하기로 하였다. 천주교회보는 1927년 4월 1일 창간되었다가 1933년 4월 1일을 끝으로 폐간하였다.
최덕홍 주교는 천주교회보를 다시 발간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친애하는 대구교구 남녀 신자들은 1949년 4월 1일부로 다시 발간되는
천주교회보를 힘대로 애독하고 또 힘대로 후원하기를 권합니다.........
이제 본 주교는 새로 결정된 대구교구 청년연합회로 하여금 다시 천주
교회보를 발간하기로 준허함은 이는 다만 청년 운동을 위할 뿐이 아니요
가톨릭운동 전반을 위하여 이러한 보도 기관 내지 언론 기관이 절실히 필
요한 때문입니다. 본보에 게재되는 모든 기사는 ........ 일반 신자의 신심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오 일반 사회에도 유익한 점이 많이 있을
터이며 더구나 새나라 건국 대업에 기여할 바 적지 아니할 것을 믿음으
로 힘대로 선전할 열심을 발하기를 아울러 권하오니 친애하온 신자 일동
은 각별히 명심하여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시 발간된 천주교회보는 변천을 거듭하여 오늘의 가톨릭신문으로 발전하였다.
제4절 중등학교를 세우다
김천본당의 최재선 요한 신부는 1947년 4월에 초등학교인 성의학교를 폐쇄하고 중등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재원이 부족하여 정식 중학교를 설립할 수가 없어서 중등과정의 성의여자중학원을 설립하였다. 마지못하여 다니는 학생들도, 보내는 학부모들도 도무지 만족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재선 신부는 교구의 지원을 받아서 1949년 3월 10일 김천 성의여자초급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응모자가 매우 적어서 정원을 채울 수가 없었다. 딸보다는 아들을 정식 중학교에 보내려는 풍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31일 남녀공학의 성의중학교 인가를 받았다.
최덕홍 주교는 1952년 3월 14일 남자 6학급과 여자 3학급 남녀공학의 성의상업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경주본당의 신원식 루카 신부는 1949년 2월 28일 근화여자중학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최덕홍 주교는 1950년 5월 3일 인가를 받아서 근화여자중학교를 설립하고 6월 26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6 · 25전쟁이 터진 바로 다음날이어서 참석한 사람들이 불안하여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가운데 식을 마쳤다.
제5절 해방 후 첫 주교회의에서 14개 사항을 결정하다
1949년 4월 5일부터 8일까지 서울에서 교황 대사 서리 Byrne(方) 몬시뇰의 사회로 해방 후 첫 주교회의가 열렸고, 다음과 같은 14개 사항이 결정되었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내용들이 몇 가지 있다.
1) 미사 후에 바치는 레오 교황의 기도는 한국말로 바친다.
2) 보통 미사 한 대의 예물은 500원으로 한다.
3) 사제들이나 신자들에게 명했던 명령기도는 취소한다.
4) 전교회비는 1년에 어른은 100원, 어린이는 20원으로 한다.
5) 세례, 견진, 혼인 대장에 표기할 각 교구의 약자(略字)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서울 S, 대구 TK, 대전 TJ, 전주 J, 광주 K, 춘천 TT
6) 공과(工課, 기도서)의 아침 기도, 저녁 기도, 성로신공(聖路神工, 십자가의 길 기도), 그밖의 다른 기도문 등을 새로 수정하고 추가하기
로 한다.
7) 여자 교리교사의 특별 연수를 여름 동안 서울에서 개최한다.
8) 성년(聖年)에 개최되는 바티칸 전시회에 한국 고유 전시품을 전 교구의 이름으로 보내고, 그 비용은 각 교구가 10만원씩 부담한다.
9)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를 설립하고, 총재는 노기남 주교, 위원은 크레이그(Craig, 奇) 메리놀회 신부와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
부로 한다.
10) 한국 교회의 공동 기관지 경향잡지의 편집국장에게 여러 가지 소식과 의견을 제공하여 협조하기로 한다.
11) 이미 있는 가톨릭 청년 단체(아직 조직되지 않았으면 새로 조직하도록 하고)들을 하나의 조직체로 결합하게 하여 그 명칭을 가톨릭청
년회라 한다.
12) 한국의 전통 축제인 음력 설날과 8월 보름에는 대재(斷食)와 소재(禁肉)를 관면한다.
13) 헝가리의 민첸티(Minscenty) 추기경에 대한 부당한 처형을 반대하는 공식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한다.
14) Byrne(方) 교황 대사 서리를 교황 대사로 승격시켜 주도록 청원하기로 한다.(註 Byrne(方) 교황 대사 서리는 1949년 6월 13일 서울에
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제6절 천주교 대구교구 연맹을 결성하다
1949년 4월 5일부터 8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해방 후 첫 주교회의에서 결정된 바에 따라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교리교사 및 교사들의 연수회가 개최되었다. 연수회가 끝나고 바로 평신도 협의회(대한 천주교 연맹)와 가톨릭 중앙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최 주교는 이 두 기구의 대구교구 위원으로 서봉길 요한 신부를 위촉하였다.
천주교회의 최고 기관인 가톨릭 중앙협의회의 지도를 받아 실천적 활동을 할 행동체로서 대한 천주교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이 연맹은 청년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여 신자들의 역량을 총집결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연맹은 대내적으로 신앙을 한층 더 공고히 하고, 긴밀한 연대를 통하여 통일된 행동을 민활하게 하며, 대외적으로는 입법 · 행정 · 교육 · 산업
· 문화 등 각 분야에 가톨릭 정신을 보급하여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기로 하였다.
최 주교는 청년연합회 정기 총회를 계기로 천주교 대구교구 연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1950년 2월 25일(토) 오후 4시부터 26일(일) 오전 10시까지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각 본당 대표 1명씩 참석한 가운데 천주교 대구교구 연맹을 결성하였다.
제7절 남북통일과 북한 종교 자유를 기원하는 성체대회를 거행하다
최 주교는 1949년 성체대회의 기도 지향을 남북통일과 북한의 종교 자유로 정하였다. 6월 19일 오전 9시 30분 화려하게 장식된 성모당에서 시내 5개 본당 신자들과 청년연합회 피정에 참여한 지방의 청년들 등 1만 여명이 최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였다.
10시 30분경에 미사가 끝난 후 성체께 대한 신앙을 표시하며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 왕국의 시위 행진인 성체 행렬이 시작되었다. 대건중학교(지금의 남산동 신학대학)와 수녀원에 가설된 제대에서 성체강복식을 거행하고 정오경에 남북통일과 북한의 종교 자유를 위하여 어둠의 힘을 물리쳐 주시기를 기원하는 성체대회를 마쳤다.
제8절 해성병원을 세우다
드망즈 주교 때부터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과 교회 학교 학생들의 지정 병원이었던 중앙병원의 박영대 요셉 원장은 개성 출신으로 일제 통치가 끝나자 병원을 처분하려고 하였다. 박 원장은 최덕홍 주교에게 병원을 인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최 주교는 1949년 11월 22일 참사위원회에서 논의한 후 중앙병원을 인수하기로 하였다. 최 주교는 1950년 2월 16일 종로 2가 33번지의 중앙병원 대지와 건물, 의료기기 및 약품 그리고 종로 2가 35번지의 대지와 건물 전부를 29,350,000원에 매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최 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이 병원의 주보(主保)로 정하고 성모의 상징인 해성(海星, 바다의 별)을 따라 '천주교 해성병원'이라 하였다. 5월 1일 오전 11시 30분 최 주교는 병원을 축성하고, 병원 내의 소성당에서 성체강복식을 가졌다. 초대 원장은 서울대 병원 의사 조무준(趙武駿)씨가, 간호사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맡았다. 교구가 운영하는 첫 종합병원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교구가 인수한 이 중앙병원 건물은 1928년 2월에 확장 신축한 붉은 벽돌 2층으로 연 건평 160평이었다. 1950년 6 · 25 전쟁이 터지자 군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1956년 3월부터 시설과 의료진을 보강하고 '천주교 성가병원(聖家病院)'으로 바꾸었다. 원장은 오이석 마르코 박사가 초빙되었다. 그 후 내부 수리를 마치고 시설을 완비하여 1960년 9월 16일부터 내과, 소아과, 외과, 산부인과, 피부과, X선과의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구에서 개원한 파티마병원을 확장하면서 성가병원은 없어지고, 지금은 그 병원 자리에 가톨릭 근로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제9절 복자 김대건 신부를 한국 성직자 주보로 모시다
교황청 예부성성은 1949년 11월 25일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한국 성직자의 주보(主保)로 정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7월 5일에 1등급 성대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최덕홍 주교는 1950년 1월 25일 공문 제10호를 통해서 발표하였다.
1984년 서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한 후 7월 5일에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주요 약력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출생
1827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 청파, 용인의 한덕동, 골배마실(현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로 이사
1836년 4월 골배마실 이웃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됨
12월 3일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조신철 가롤로 등의 인도를 받아 국경의 변문(邊門) 으로 출발
12월 28일 조선에 입국하려고 머물고 있던 요동의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 댁에 도착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설치된 '조선 신학교'에서 수학
1839년 4월 6일 마카오 민란 때문에 필리핀으로 피난하여 수학
11월 마카오로 귀환
1841년 11월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8월 24일 상해에서 약 30리 되는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 미사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 출발
9월 28일 제주도 표착
10월 12일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11월-12월 서울 및 용인의 은이 공소 방문
1846년 5월 14일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교우들과 함께 마포 출발
6월 5일 체포됨
9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음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57년 9월 23일 가경자로 선포됨
1925년 7월 5일 복자로 선포됨
1984년 5월 6일 성인으로 선포됨
제10절 끔찍한 6 · 25 전쟁을 참된 신앙생활로 극복하자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 정권의 침략으로 전쟁이 터지자 최 주교는 7월 1일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발표하고 어려운 시기에 신자들이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실천해 주기를 당부하였다.
국가의 초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우리 교구 내의 모든 성직자와 모든 신자들에게 무한히 인자하신 하느님의 강복을 본 주교는 성심껏 비는 바입니다.
20세기의 괴물 38선은 바야흐로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끔찍하게도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담한 비극으로 말미암아 지리적 사상적 38선이 끊어지는 천주의 안배를 찬미할지도 모르니 모든 성직자 모든 신자들은 조금도 신앙생활에 동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성년(聖年)이오 또 우리 복자 79위의 시복 25주년이니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 첨례(축일)를 기하여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은 우리 치명 선조들의 용감한 순교 정신을 본받아 더욱 활발한 신앙생활을 전개하며 우리 죄와 우리 민족의 범한 모든 죄악을 힘대로 보속하며, 시급한 사태에 모든 불리한 조건을 배제하기 위하여 복자들의 전구를 통하여 열심히 기구하기를 권장합니다.
이런 혼란한 시국을 이용하여 민심을 교란시키는 악질 도배들과 또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선전하는 악질분자들에게 농락되지 말고, 필승의 순교 정신으로 직장을 굳게 지키고 생업에 힘써 신자로서의 아름다운 표양을 비신자들에게 보여주어 전교에 도움이 되도록 권합시다.
현 사태가 계속된다면 틀림없이 주리고 헐벗고 집 없는 동포와 불쌍한 부상자들이 속출할 터이니 무엇보다도 애덕의 실천이 없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전교에도 지장이 있을 터이니 특별히 경계하는 동시에 양심적인 협력으로 남모르게 남을 돕는 큰 공적을 잊지 말기를 거듭 부탁하는 바입니다.
제11절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의 막대한 원조를 받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터진 전쟁의 참상은 말과 글로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주미(駐美) 대사 장면(張勉) 박사는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한국을 위한 기도와 원조를 호소하였다. 미국 가톨릭교회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인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와 물질적 원조를 하는 데 그리스도교적 형제애를 발휘하기로 하였다.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 전재(戰災)구호부는 8월부터 막대한 물자를 유엔군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 한국에 수송하였다.
1950년 한 해 동안 미국 민간 구호 단체들이 한국에 보낸 280만 달러 중에서 200만 달러 이상이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에서 보낸 것이다. 1953년 상반기까지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에서 보낸 의료품과 의류 등은 916만 1천 파운드로서 당시 가격으로 1,130만 달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는 1919년 9월 24일 창립된 이후 많은 활동을 미국 내외에서 펼쳤으며, 1943년 1월부터 전재(戰災)구호부가 설립하였다. 6 · 25 전쟁 당시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 한국 지부장은 교황 사절 서리 캐롤(Carrol, 安) 주교였다. 1953년 2월 미국 본부에서 휴 맥그룬을 한국위원으로 파견하자 대구교구는 5월 14일 맥그룬 위원을 맞아 효성여대 강당에서 구호 감사회를 개최하였다.
본당을 통하여 밀가루와 식료품 등 구호 물자들이 배분되자 많은 사람들이 '재보다는 잿밥'에 관심을 갖고 구름같이 몰려와서 교리반에는 예비 신자들이 넘쳐났고 '밀가루 신자'가 양산(量産)된 부작용도 낳았다.
제12절 전쟁 중에 십자가 조각(보목)을 지키려 고심하다
6 · 25 전쟁의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되어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몰려왔다. 대구도 매우 위험한 지경이 되었다. 최악의 경우 피난길에 올라야 할 처지였다. 문제는 보목(寶木)이었다. 보목이란 예수님이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조각이다. 참으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
1912년 2월 25일 일요일 파리대교구 교구장 아멜리(Amelie) 추기경이 파리 대교구청의 보물 보관소에 있는 진짜 십자가의 상당히 큰 조각을 대구대목구 초대 감목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에게 보내왔다. 크다고는 하지만 가느다란 바늘 끝 정도의 크기여서 굵은 도토리 깎정이만한 조그만 케이스에 들어있다. 그 케이스를 다시 조금 큰 십자가 가운데 파인 홈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당시에는 해마다 사순절부터 매주 금요일 주교좌성당에서 신자들은 이 보목 십자가에 친구(親口, 입맞춤)를 하였다. 이 보목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고심해야 하였다. 주임 서봉길 요한 신부는 가슴에 품고 피난을 가는 방안, 땅에 파묻고 가는 방안 등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가슴에 품고 떠나는 방안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후퇴하자 보목 피란의 걱정은 없게 되었다.
제13절 매일신문사를 시작하다
최덕홍 주교는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던 문화 사업에도 남다른 관심과 안목을 가졌었다. 그래서 당시 영남일보에 많은 후원을 하였다. 그런데 대구에서 1946년 3월 1일부터 발행된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이 우여곡절 끝에 1950년 8월 1일부터 대구매일신문으로 바꾸어 일반 신문으로 탈바꿈하였으나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최 주교는 용단을 내려 1950년 12월 18일 그 신문을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구는 교회 사업을 하기에도 벅찬 시기였다. 그래서 교구 신부들의 의견도 찬반양론이 팽팽하였다. 그러나 최 주교는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문화 사업을 하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 볼 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대구매일신문을 인수하였다.
최 주교는 신문사를 주식회사로 바꾸고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폭적인 증자를 하고 사원을 증원하고 시설을 개체하였다. 그렇게 하여 대구매일신문의 면모를 일신하고 어느 정도 본 궤도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대구매일신문이 오늘의 매일신문으로 발전하였다.
제14절 효성여자대학을 설립하다
최덕홍 주교는 1951년 9월 25일 재단법인 대구구(大邱區) 천주교회 유지재단 이사회를 개최하고 효성여자초급대학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여자 대학 설립에 대하여 신중을 기하고, 초 · 중등 교육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효성여중 교장을 역임했고 효성여고 교장으로 재직중이던 전석재 신부가 여자 대학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효성초등과 효성여중 · 고를 '효성학원'으로 보던 전석재 신부가 효성여대까지 넓히기로 한 것이다.
사전 준비를 한 전석재 신부가 이사회에서 상세한 내역을 발표하였다. 최 주교는 대학의 운영은 당장이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예수회에 위탁하기로 하였다. 최 주교는 예수회와 협의하여 희망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하였다.
무세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연금당하고 있었던 당시 대명천주교회(지금의 남산본당의 건너편에 있었다) 건물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당시 물자가 귀하고 값도 비싸서 새로 건물을 짓기가 매우 어려웠고, 2층으로 되어 있어서 대학 건물로 적합하고 부지도 넓어서 부속 건물을 건축하기도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남산본당은 성 유스티노신학교 성당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학교 건물은 대건중학교가 사용하고 있었지만 축성된 성당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신자들도 성 유스티노신학교의 성당으로 이전하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1955년 5월 5일 지금의 남산성당이 축성되었다.)
대학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교황청의 교육 사업 지원금 전액을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농지개혁법 시행으로 받게 되는 보상금으로 일본인들이 운영하다가 남긴 귀속 재산인 '조선인조피혁주식회사'를 불하받아 경영하여 수익을 확보하기로 하였다.
1951년 10월 15일 신청을 하여 1952년 4월 10일 효성여자초급대학(曉星女子初級大學)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국어국문학과 2학급 100명, 가정학과 2학급 100명, 음악학과 2학급 100명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사제 부족이 심각한 대구대목구가 어찌하여 6년전인 1945년 3월 30일 일본군에게 징발당하여 동면 중이던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되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여자 대학을 설립하기로 하였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서울 신학교에 신학생들을 보내어 교육시키는 비용을 대구에서 그대로 쓰면 될 것이고, 성 유스티노신학교 건물도 그대로 쓰면 될 것이고, 대건중학교는 남산본당으로 옮기면 될 일이었다. 운영 재원은 교황청 교육 사업 지원금 전액과 토지 보상금이나 그 보상금으로 인조피혁공장을 불하받아 확보하기로 하였다. 1948년 9월 '신학생 후원회'가 결성되어 회원 모집도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학교를 되살려 오히려 사제 성소 개발 육성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잘못된 판단으로 30년이 훨씬 지나서야 깊은 동면에 빠졌던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선목신학대학으로 살아났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판단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시어 두 대학을 오늘의 대구가톨릭대학교로 발전시켜 주셨다.
안타깝게도 농지 보상금으로 불하받아 운영하던 인조피혁공장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당시 대구대목구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공장이 기술 부족으로 제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파산한 것인지, 제품은 생산했지만 경영을 잘못해서 파산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 부정에 의한 파산인지 원인도 규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책임진 사람도 없었다.
사라진 인조피혁공장을 통하여 두 가지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교구 재산 관리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 손실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추궁하고 최대한으로 복원해야 한다.
인사를 제대로 하여야 한다. 능력과 열성과 책임 의식을 갖춘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여야 한다. 적재적소(適材適所)란 말을 명심해야 한다!
제15절 분도수회에 왜관과 가실본당을 맡기다
최덕홍 주교는 심각한 사제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메리놀회에 부탁했지만 거절되었다. 최 주교는 1952년 6월 5일 참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왜관본당과 가실본당을 분도수도회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최 주교는 6월 16일 공문을 통하여 교황청으로부터 덕원 · 함흥 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분도수도회 비털리(Timotheus Biterli, 李) 원장 신부의 착좌식이 7월 6일 왜관 분도수도원에서 있을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왜관본당 주임에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신부를, 가실본당 주임에 최영호 비안네 수도회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후 위탁 본당을 확대하다가 최 주교는 1953년 12월 20일 함흥 · 덕원 교구장 서리인 비털리 몬시뇰에게 지구장과 주교 대리 권한을 부여하였다.
제16절 예수성심시녀회를 설립하다
최덕홍 주교는 1952년 9월 8일 교황청에서 최 주교에게 허락한 권한에 의해서(교황청 공문 1602-52호) '예수성심시녀회'를 교구 설립 수도회로 정식 설립하였다고 9월 25일 공문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최 주교는 김 젤마나 수녀를 총원장으로, 김 벨라뎃다 수녀를 수련장으로, 델랑드(Deslandes, 南大榮) 신부를 고해 지도 신부로 임명하고, 특별 고해 신부로 뤼카(Lucas, 柳嘉鴻) 신부와, 포항과 경주에 있는 신부들을 임명하였다.
델랑드 신부는 1935년 12월 8일 6명의 동정녀로 모임을 시작하고 공동생활을 하기 위하여 1936년 10월에 집을 지어 '삼덕당(三德堂)'이라 하였다. 17년간의 파란곡절을 겪고 정식 수도회로서의 조건과 시설을 갖춘 다음 1952년 3월 교황청에 인가 신청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드디어 인가를 받은 예수성심시녀회는 지금은 대구, 서울, 부산관구로 발전하였다.
제17절 주교좌성당 축성 50주년에 『대구천주교회사』를 편찬하다
1952년 11월 7일 계산동 주교좌대성당이 축성 50년을 맞이하였다. 이 뜻 깊은 기념일을 맞이하여 신자 유지들은 3천여만 원을 내어서 성당 안에 천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장궤틀과 의자를 설치하였다. 11월 9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에 최 요한 주교의 집전으로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축하위원회는 12월 25일 『대구천주교회사』를 간행하였는데 저자는 최정복이었다. 그는 천주교회보에 대구천주교회사를 연재하려고 생각하여 6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원고를 거의 정리하였다. 그러나 돌연 천주교회보가 폐간이 되어 연재를 하지 못하고 자료와 원고를 명도회관에 두었다. 천주교회보가 다시 간행되자 최정복은 그 자료와 원고를 찾았는데 일부가 없어졌다. 자료를 다시 수집하고 정리하여 주교좌성당 축성 50년을 기하여 발행하였다.
이 50년사는 평신도 특히 청년회원들의 행적에 주안점을 두고 상세하게 기록한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교구의 사목 방향이나 성직자들의 사목이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가늠해 보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제18절 경상남도를 지구대리구로 설정하다
최덕홍 주교는 1954년 6월 18일 경상남도를 지구대리구로 설정하고 독립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7월 7일 공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인사 발령도 하였다.
모든 사제의 피정이 끝나는 오늘 1954년 6월 18일 모든 면에서 우리 교구의 반을 차지하는 경상남도를 지구대리구로 설정합니다. 지구대리구의 지위는 독립을 위한 준비와 같이 과도적인 것입니다. 지구대리구장과 사제들과 신자들이 성교회의 뜻을 빨리 완수하느냐 또는 느리게 완수하느냐에 따라서 지구대리구를 대구대목구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유리한지를 교황님께서 내리시는 판단도 빠르거나 늦거나 할 것입니다.
나의 양심과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지구대리구장에게 점진적으로 권한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이 점차 주교로서 요구되는 사항 외에 주교의 권한을 행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구대리구장의 직무와 직책과 권한은 교회법 제8장 제445-450조에 따라 부여됩니다. 지구대리구장 자신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제들은 그 법에 의해서 살 것이며 이 법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권한은 주교로부터 위임된 것이며, 지구대리구장이 장상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19절 신자들을 벨기에로 유학보내다
교회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벨기에 정부와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에 의하여 제1차로 파견되는 벨기에 유학단 일행이 1954년 6월 30일 오후에 출발하였다. 이날 최덕홍 주교와 교회의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경북 도지사, 관공서 대표, 교육 관계자와 학생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대구역을 떠난 일행은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일본으로 가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였다.
일행은 장병화 신부, 당시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장이었던 이효상,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 부장이었던 김달호와 교회의 중등학교 교원이었던 이태재, 남규일, 이기영, 최정식이었다.
이효상 김달호 두 교수는 2년간 대학 경영 견학 및 학술 연구를 하고, 장병화 신부와 나머지 신자 교원들은 루뱅대학의 지망 학과에서 4년간 전공을 공부하기로 하였다.
제20절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시작하다
1936년에 드망즈 주교를 찾아왔던 도쿄의 프란치스코회 요한 요셉 원장이 1937년 4월 15일 다시 와서 부산 영도에 수도회를 세우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드망즈 주교가 거절하자, 프란치스코회는 대전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과 2차대전으로 인하여 모든 계획과 사업이 중단되었다. 수도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캐나다 성 프란치스코 모수도원(母修道院)의 관구장 헤르베 부레 신부가 한국에 와서 서울과 대전을 거쳐 1949년 11월 26일 대구에 와서 최덕홍 요한 주교를 방문하였다. 최 주교는 대구교구에도 터를 잡아주기를 요청하였다.
11월 27일 9시 30분에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대구의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에게 강복을 하였다. 그리고 캐나다 모원에서 수련 중인 한국인 3명 중에 퇴강 출신 김영기 바오로가 있다고 전했다. 대구의 제3회원이 몇 명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입회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대전에서 입회했을 것이다.
대구교구에서는 박재수 요한 신부가 경남 진영 주임으로 있던 1951년 10월 20일 성(聖) 오상(五傷) 프란치스코회 제3회 설립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 10월 29일 성 오상 프란치스코회 제3회 설립을 위한 임시 회의를 개최하고 1954년 초에 정식으로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최덕홍 요한 주교의 인가를 받고 1954년 6월 19일 일본 도쿄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석종관 신부에게 편지를 하였다. 7월 13일 답장을 받고 마침 진영에 와있던 홍 마리아에게 제3회에 대한 책임을 맡겼다.
최덕홍 주교와 박재수 신부와 석종관 신부는 1926년 5월 29일 드망즈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이날 서품된 신부는 모두 11명이었다. 박재수 신부는 가는 곳마다 성 오상 프란치스코회 제3회를 설립하였다.
제21절 성모 성심께 교구와 모든 교회를 봉헌하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성모 승천 교리를 신덕 도리로 반포하였다. 그래서 성모 호칭 기도에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가 들어가게 되었다. 1917년 파티마에 나타나신 성모께서 가공할 재앙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하자 없으신 성심께 가장 경건한 봉헌'을 하도록 요청하셨으며, 교황 비오 12세도 이 봉헌을 권유하였다.
최덕홍 주교는 1953년 7월 25일 이런 사실들을 상기시키면서 교구의 모든 본당과 공소에서 다음과 같이 봉헌식을 장엄하게 거행하도록 요청하였다.
1. 의향(意向)
러시아의 회개 · 모든 죄악의 보상 · 한국 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성모 승천을 신덕 도리로 반포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2. 봉헌 일시
1953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3. 장소와 인원
교구(경상남북도)의
모든 본당에서는 주임 신부가 모든 신자와 함께
모든 공소에서는 회장이 공소 신자와 함께 할 것.
제22절 한미 합동 성체대회를 성대하게 거행하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3년 9월 8일 성모 성탄 축일에 칙서 '풀젠스 코로나 플로리에(영광에 빛나는 花冠)'를 발표하면서 1953년 12월부터 1954년 12월까지 1년간을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교의 선포 100주년을 기념하는 '성모 성년(聖年)'으로 선포하였다.
새로운 전쟁의 위험이 감돌고 있는 때에 평화의 승리를 위하여 신앙의 불꽃을 더욱 높여 성모 성년 마지막으 화려하게 장식하는 한미 합동 성체대회를 1954년 10월 31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불신과 회의(懷疑)의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만민의 참된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정신적 지배와 통치 아래서만 세계가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온 천하에 표명하였다.
최덕홍 주교는 오전 9시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성직자 수도자와 국군 약 500명과 미군 약 500명만이 참례할 수 있었다. 1만 명의 신자들은 모두 성당 마당과 도로 양편에 정렬하여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였다. 미사 후에 미군 장교들이 정중히 일산(日傘)을 받들고 호위하는 성체 거동이 성모당을 향하였다.
정오가 지나 성모당 제대에 성체가 봉안되고 성체 강복이 있었다. 그리고 계산동 주교좌성당에 들어가지 못한 신자들을 위하여 미사가 봉헌되었다.
제23절 사제 인사 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