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세다대학과 중앙대학생으로 재학중 조선호남학생단장 유학생은 큰주먹 김낙기는 국악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와세다대학 조선학우로 채규엽 고하정남 채만식과 어울리며 동경극장가에서 극장 기도를 하는등 학비를 버는 알바 학생으로 매일 보는 동서양의 음악 예술을 많이 보면서 고향에서 학대받는 무당,악사(재인)등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됐다. 고국의 음악 성산호주 신영채등 일본공연을 생각한다 그걸 계기로 고향의 고유전통예술 부흥에 힘을 썼던 것이다. 동경의 발달된 일본 국악을 보고 방학중에 고향에 와서 고향의 무속인들을 모아 국악과 판소리 농악을 고루 공연하고 장려하였다. 천민으로 학대받던 전통 음악인들이 칠보로 모여들어서 전문적인 농악단으로 조직되어 우도농악의 발전에 힘을 더한다. 전통음악이 천시되던 시대, 그는 천민들의 친구였다 일본에서 알바로 번 자금으로 농악기를 사고 천대 받는 고직이 무당들을 친구로 사귀며 이들을 괴롭히는 일본인 순사는 옷을 벗기고 매질하였다고 한다. 그 힘은 영화 '야인시대' 김두환처럼 김낙기가 일본정치의 중심세력과도 연계되는 파워가 있어서 일본당국도 조심했었다고 한다. 더욱이 당시는 국악기를 만들거나 연주하는 이유만으로도 천한 상놈이 되는 시대였다. 전북유일의 서원인 무성서원이 있고 서원에서 유림회원으로 등록만 되어도 세도를 부리고 서민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시대여서 음악은 말살되는 지역이었다. 서원 유림들이 파괴, 철거했던 당산과 솟대도 복원하고 동경극장과 같은 선진국의 문화 공간에 조선의 문화를 올려보려는 욕심에서 정읍국악을 발전시켜 타 지역보다 더 좋은 환경으로 개선했던 것이다. 김낙기는 조선말기 서원 유림들의 행패로 파괴돼 철거된 당산과 솟대(짐대)를 다시 세우고 농악대를 활성화하여 정부가 운영하는 협율사 악극단을 칠보에서 공연시킨다. 국악인들과 무속인들이 칠보에 몰려들었다
국악인이나 무속인에는 전씨와 신씨가 많은데 칠보면에는 호적이 없고 부안, 입암, 임실등 타지역에 호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음악을 연주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몰린 것으로 본다.
김낙기는 무당과 수준 높은 판소리패를 조직하여 동경, 오사까 등 대도시로 공연하게 하였는데 조선창극사 책에서도 유일하게 등장하는 신태인여자 성산호주, 칠보 석탄사람 엿장사 신영채를 무당인 전도성에게 소리를 배우게 하였다. 두차례나 도일 공연까지 했던 김낙기의 대동가극단 대동가극단이 조직되었을 때, 화중선은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그 인원 구성은 정읍 신태인 호남여관 주인이였던 성산호주, 강남중, 임방울, 신영채 등의 명창과 화중선, 전광문, 박초선, 신기남 등으로 판소리, 창극의 토막극, 남도 민요, 줄타기의 연행으로서 연중 가설무대로 전국을 순회공연하였다.
이 대동가극단이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대동가극단으로서는 두번째 도일 공연이었다. 일본의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화중선이 음반 취입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일본 각지의 군수품공장과 탄광에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를 위문하기 위하여 큐슈의 노무라, 야하다에서 공연을 마치고 오오사까에서 공연하였다.
1957년 옹동 산성초에서 임방울의 호남창극단 공연도 구경했다 임방울이 1949년에 호남창극단이란 유랑극단을 끌고 옹동면 산성초등학교에서5일간 공연한 것을 기자는 구경했기에 신영채, 이기곤, 임방울 등의 공연을 보았다. 신영채는 해방후에는 정읍국악원에서 소리를 가르쳤고 1957년 기자가 정읍국악원에서 배우면서 박홍규원장과 은희상, 유종구, 신달영, 나용주 등에게서 신영채에 관한 여담을 들은 기억이 있어 기재한다. 1957년 당시 기자는 가야금을 배우러 몇 달간 정읍국악원을 다녔다. 김낙기는 또한 천한 악기로서 만들기를 기피하는 가야금을 동생 김붕기에게 권유 했다. 악기제작이란 '천한' 직업을 친척 동생에게 권하기도 했고 가야금, 거문고 등등 국악기를 자신의 6촌 동생 김붕기에게 만들게 했던 것이다. 조선말기 가야금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살펴보면 악기제작은 장악원과 공조(工曹)의 공장(工匠) 두 곳에서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마지막 풍물장으로는 염상기(廉相騎)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궁중의 아악부에 있었던 사람으로조선이 망하자 국립국악원으로 옮겨와 각종 악기를 제작하고 보수했다. 1966년에 노환으로 죽었으니 조선시대 풍물장, 즉 악기 제작자로서는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정읍 칠보의 김붕기(金鵬基), 민간제작자로서 전주의 김명칠(金明七)은 중요무형문화재 악기장으로 지정된 김광주(金廣胄)의 부친인데 본래는 전라북도 정읍 칠보 사람이었다. 장성의 이모씨가 조선시대와 현재를 잇는 유명한 악기제작의 명장들이다. 김광주의 제자로는 최태진(崔泰珍)과 고흥곤(高興坤)이 있는데 근래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김붕기의 제자로는 이영수(李永洙) 씨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한국 악기장을 계승하고 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또 전라북도의 가야금 홍보자료에도 "우리나라 국악기 제작의 맥은 전북지방의 故김붕기 선생이 크게 활약했었고, 중요무형문화재 악기장은 지정되어 있으며,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신 이영수 선생과 고흥곤 선생 그리고 광주광역시의 이춘봉 선생과 고수환 선생이 가야금 제작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거문고 제작 전승자로는 최동식 선생님이 계신다"라고 기록돼 있다. 김낙기 동생 김붕기는 가야금 제작 명인 반열에 올랐다 전주 궁성악기사 최동식 가야금 무형문화재 전수자는 김붕기에게서 배운 경력이 있다고 한다. 모든 가야금, 거문고 악기장은 김붕기의 제자임을 최대 명예로 생각한다. "사악한 것이라고 없애라"는 잔혹하게 학대받았던 천한 직업이 악기 만들기였다. 한국의 가야금과 거문고 제작자들이 천민계급의 멍에를 벗기 위하여 모두 달아나 버리는 시대였다. 그런데 유독 정읍 칠보에서 김붕기와 김광칠이 만들어 일본에 팔고 여기서 쉽게 얻어진 거문고가 있었기에 신쾌동과 김윤덕의 산조가 남아 있는 것이다. 악기 명장 김붕기 없었으면 신쾌동도, 김윤덕도 노래밖에 못했다 왜 그 시대에 다른 곳에는 이런 악기장이 없었는가를 생각해본다. 김붕기는 칠보면 건흥마을, 와우리 칠보중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일제시대 이층집을 목재로 짓고 가야금 공방을 만들고 살았다. 신쾌동과 김윤덕은 거문고 악기가 없으면 노래밖에 할 수가 없었다. 칠보에서 도강김씨 세도 가문 김붕기를 동경유학생 김낙기가 설득하여 이루어 낸 결과이다. 칠보에는 이처럼 악기가 쉽게 구해져서 칠보면 축현리에 사는 축현리 가야금 김한동(1910-1964)은 농사 지게짐 위에 싣고 밭에 가서 휴식시간에 가야금산조를 연주한 낙천적인 농민이었다. 그 아들 김융기는 서울에서 산다고 한다. 걸인도 해금 켜며 구걸했던 칠보 지역 이처럼 악기를 직접 만들게 하여서 국악기 해금을 들고 연주하며 구걸하는 걸인도 있었다. 칠보에서 어느 노파는 아들이 사 들여온 해금 악기를 보더니 놀라면서 "아니 전날에 동냥치가 구걸하면서 쓰던 것이구먼. 불결하게 왜 들고왔어?"라고 나무라는 것을 보았다. 해금을 든 그 걸인은 악기장인지 조선궁중악사인지 알 수는 없었다. 판소리 창극단인 신영채, 신기남의 대동창극단만이 두번이나 일본순회 공연을 하였다. 여기서 한국의 산조 가야금과 거문고, 대금, 단소, 시조 등등을 왜 정읍사람 신쾌동, 김윤덕, 전용선, 전계문, 유종구, 전태봉 등등 정읍사람만이 계승했는지 근본 원인을 알게 한다. 정읍에 국악이 융성했고 정읍 국안인들이 유명했던 배경에는... 여기의 전태봉은 신태인 사람으로 김낙기의 처남이다. 가난한 건축학도 동경유학생 김낙기는 사리사욕의 기회도 많았으나 누구나 질겁하고 싫어하는 천한 예술을 동경에서 보고 깨우처 주려고 청춘을 버렸던 것이다. 정읍국악의 대 혜성으로 영원히 빛나는 신쾌동 거문고산조, 김윤덕 가야금산조 뒤에는 이시대의 악기 생산 환경과 악기를 소비하는 일본공연이란 통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