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Galatia 새벽기도회 용.
01 갈라디아서 서론. 갈1:1-3. 408장.
http://cafe.daum.net/kibookch/LMRh/233 기북교회 권시혁목사
갈라디아-지명이름-젖과 같이 희다.-신령한 음료 교리 서신.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령한 음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되며,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생활을 육체의 일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개역 몽학선생이 개역 개정에서는 초등교사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특히 초등학교 교사가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학교까지 인도하는 노예를 의미했습니다.
사극-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님-대 학자가 수염을 기르고 의관을 정죄하여 하늘천 땅지-읽어보세요. 외워보세요. 글씨를 써 보세요. 할아버지뻘 되시는 선생님이 아주 어린 왕자에게 극존칭을 써 가면서 교육하는데 바로 몽학선생입니다.
그러나 이때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노예 신분은 아니고, 벼슬도 높은 벼슬일뿐 아니라, 자신이 가르친 왕자가 임금이 되었을 경우 대단한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신분도 높고 직책도 높지만, 왕자의 아주 기초를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1234, 하나 둘 셋 넷, ㄱㄴㄷㄹ 이렇게 인생 출발점을 가르치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6대 목회자 가정, 5대 장로 가정 신앙의 연조가 깊은 가정을 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는 전체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은 모두가 역사가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을 때는 다 좋지만 어려움이 닥칠 때 신앙의 뿌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어른의 역할이란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서로 분쟁을 잠재우고, 서로 화해를 종용할 때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쟁이나 아픔을 겪을 때 어른, 즉 지도자의 역할은 지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생각은 개역 개정이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목회자와 학자들이 개역개정으로 바뀌면서 의미가 약화되거나 축소되는 아쉬움을 표합니다.
다음 개정을 할 때는 이런 모든 사항을 잘 활용하여 더 의미 있게 번역되고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뜻이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라디아교회는 1:2 갈라디아 여러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회는 여러 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꼭 전달을 해야 할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광고 시간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알려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구원은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고 강변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지적하면서 이것이 믿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받을 수 없음을 주장합니다.
예루살렘 회의(행15장) 전인 바울의 초기 편지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15년 이상 자신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소아시아의 한 영토로서 바울이 그곳 교회들을 방문하였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행 16:6)
계시록에 7교회-엡서버두 사빌라에 포함되지 않은 교회로 생각하시면 됩닏.
갈라디아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연보함-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1)
베드로가 갈라디아로 흩어진 택한 자들에게 편지함-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
02. 갈라디아 교회: 갈1:1-3. 505장.
갈라디아: 젖과 같이 희다. 신령한 음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 1:1)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갈 1:2)
갈라디아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교회가 책망이나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변에 여러교회가 같은 성격의 환경과 문제에 부딪히면서 칭찬도 듣고 책망도 듣는 교회 군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기 교회라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의미하기 보다는 지역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봐도 좋겠습니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함께 신앙공동체로 모여 함께 살아가는 지역 교회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설명하고 변호한다
바울은 먼저 갈라디아인을 다시금 훈계한다(3:1-5).
바울은 어리석은 갈라디아인을 깨우치기 위해 아브라함의 신앙을 예로 들어 인용한다 (3:6-9)
바울의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시대 흐름상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할례와 대칭되는 칭의는 바울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교리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위해 낮아졌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함으로서 믿음에 의한 칭의를 설명한다 (3:11-14).
바울은 언약이나 약속을 실례로 들어 칭의에 대하여 말한다 (3:15-18).
사도는 율법의 목적과 용도에 관한 논쟁에서 한 설을 삽입한다(3:19-32).
바울은 율법 밑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요지를 제공한다( 3:26-29).
7)바울은 상속자를 실례로 들어 믿음으로서의 칭의를 말하고 있다(4:1-7)
8)칭의의 교리를 버린 것에 대하여 갈라디아인들에게 또 하나의 책망을 삽입하고 있다(4:8-1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의한 칭의 교리를 관련시키고 있다(5:6).
(바울의 선한 행위에 대한 정의와 부도덕에 대한 복음의 변호)
1)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칭의의 교리를 단단히 붙잡아야 한 이유를 재천명한다 (5:1-12)
2)사도는 의로워진 사람을 위한 율법과 선한 행위에 대한 그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다 (5:13-26).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7가지 축복.->구속의 7단계, 승리생활 비결 7가지 명령14가지 책망 20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8.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39. 모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40. 모두 그리스도로 옷입음-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41.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동등하고 하나가 됨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42. 모두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43. 모두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임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44. 모두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임-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03. 바울. 갈1:1. 310장.
검색: 사람, 살리다. 사도, 바울.
http://cafe.daum.net/kibookch/LMRh/235 바울 바이블렉스 바로가기
갈라디아서: 젖과 같이 희다. 신령한 음료.
바울-작은 자. 사울은 사도 바울의 유대 이름입니다. 사울-희망 소원.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 Saul이었다. 그는 갈리기아의 다소에서(행 9:11; 행 21:39; 행 22:3)유대인 양친에게서 태어났다(빌 3:5). 그의 부친은 바리새인이었으며(행 23:6) 로마의 시민이었다; 따라서 그 자신도 출생 시부터 로마 시민이 되었다(행 22:28; 행 16:37). 그는 도덕적, 지성적 양면에서 모두 탁월한 은사들을 부여 받았었다.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배웠다.
바울은 청년기 초에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져서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에게서 유대인의 신학을 철저히 교수 받았다(행 22:3; 행 5:34).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극히 흉포하게 공격하고 핍박했으나 마침내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한 기적에 의해 갑작스럽게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였으며 지칠 줄 모르고 굽힐 줄 모르는, 그리스도의 전파자요 많은 그리스도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그가 기독교의 동료들로부터 불후의 존경을 받을 자격을 확립한 것은 비단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사역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의 불멸의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사실, 즉 그가 자기의 하늘의 주님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여,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 "살아있는 믿음"을 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다는 것과, 모세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 창시자가 되는 영적 자유와 전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지극히 명료하게 가르쳤다는 사실에 의해서이다.
그의 열심과 교리로 그는 스스로 유대인들의 불구대천적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57년에[또는 보다 일반적인 의견에 따르면 58년] 그를 투옥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그는 처음에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 로마로 보내졌으며 거기에서 (64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에게서 유래한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이 영어 생활로부터 풀려나 스페인과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그 후에 2차로 투옥되어 네로가 아직 황제로 재위하였던 67년 또는 68년에 로마에서 마침내 사형을 당했다 한다.
바울은 신약성경 중 사도행전과 그의 붓으로 쓴 서신들에서 뿐만 아니라 벧후 3:15에서도 언급된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04. 나도 사도입니다. 갈1:1. 323장.
검색: 사도,
ajpovstolo"(652, 아포스톨로스) 사도 apostol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아포스톨로스(Lysias, Demosth.)는 처음에는 동사적 형용사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명사로 사용되었다.
(a) 아포스톨로스(ajpovstolo", 652)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아포스텔로 (ajpostevllw, 649: 보내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대하 17:7-9에 의하면 이 보냄을 받은 자들은 단순한 사절이 아니라 책임있는 직무, 즉 어떤 사람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를 말한다. 그의 행위는 "보낸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에서 당사자(보낸 사람)과 그 대리인은 동일하다:
(b)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사명을 받고 파송된 사절단에 대하여 사용하였다 (로마에 보낸 유대인들).
그의 선거인들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약성경의 사도의 의미에 영향을 주었다.
(c) 아포스톨로스는 아마도 후대 영지주의적 계통에서 신적 계시의 중재자로서의 '사자'라는 동방적인 개념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들의 학설에서 그 단수로는 '천상의 구세주'를, 복수로는 '수많은 구원자들' 즉 '영적인 사람들'을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포스톨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0여회 나타난다.
(a) 신약성경에서는 고전 헬라어의 경우와는 달리,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이 오직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무엇보다 하나의 특정한 직무 즉 원(原)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눅 6:12-눅 6: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고, 그의 삶을 함께 나누고, 그에게 속한 제자들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대표하고, 그와 보다 더 친밀하게 교제하고, 그럼으로써 특별한 권한을 가지게 될 열 두명을 선발하셨다.
(b) 사도는 경건한 사람이며 예수님에 의해 다른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어 부름받은 자이다: 이것은 사도는 예수님의 처지를 공유하고 그의 재산과 그의 직업과 그의 가족을 포기하며, 그의 잔을 마시고(마 20:23) 이와 함께 주님께서 받으시는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막 10:39)을 포함한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셨다"(행 1:2; 참조: 요 15:16; 요 15:19)고 주장한다.
바울은 항상 대리자로서의 그의 권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즉 소명에 의한 사도(롬 1:1)이다.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문구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고전 1:1; 고후 1:1; 골 1:1; 엡 1:1)이다.
(c) 사도는 본래 어떤 누군가에 의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어진 사람이다. 그 목적은 다소 세속적일 수 있다; 대리자나 대표로서 '아포스톨로스는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요 1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요 13:20).
(d)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의 이러한 역할을 위해서는 사도에게 능력과 권위가 부여될 필요가 있다(눅 24:49; 살전 1:5).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과 마귀를 억제하는 엑수시아(권세)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후계자 또는 대리자로서 사도들은 순회하는 전도자로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닌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살아간다: "사도들로 인하여, 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고후 6:7)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행 2:43; 행4:33; 행 4:37; 행 5:12).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만 전하였기 때문에(살전 2:13-"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약속들이 매우 신뢰할 만한 것임을 증명한다.
05. 사람으로 말미암아. 갈1:1. 339장.
검색: 사람, 살리다.
사람이란-안드로포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람, 일반적인 의미의 사람을 제한하지 않고 사용할 때 사랑을 배우게 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사람을 분별하면서 짐승이나 신과 구별되는 영역의 인간들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사람은 경멸적으로 보면 노예가 틀림없기도 합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면서 점점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사실 대학자들도 엄청난 연구와 고민 중에서도 어느 학자도 사람을 명확하게 풀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데 사람 파악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절대적으로 어려운 것은 부부 사이이고, 진짜로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인간 본연을 탐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창조 본연의 인간 모습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사실은 멋진 삶을 살고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자기 나름대로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을 찾기는 너무 힘든 순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그릇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2m도 안 되는 사람인데 거기에 모든 사람을 다 끌어다 넣어도, 모든 명예와 권세와 돈을 몰아 온다고 할지라도 그 작은 인간 하나를 채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흙에서 온 아담과 그 후손들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던 그런 모습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돈을 벌어보고, 세상 출세와 명예를 가져도, 칭찬도 들어보지만 결국 사람은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우기 전에는?
바울도 사실은 자신의 사역을 위하여 아라비아로 가게 되었는데,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서 영광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선은 가장 먼저 사도의 정통성을 의심받고 있을 때, 어려움이 닥치게 됩니다.
사실 최근에 인체의 비밀이 수도 없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인체를 밝혀내고 질병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정신의 세계로 들어가면 훨씬 더 운용의 폭이 좁아지지만, 사람의 심령은 다 다릅니다. 그러다가 영적 세계로 들어가면 사람이 가히 짐작 못 할 일들이 줄을 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인체를 구성하는 핵심 부서가 틀림없습니다. 거기서 영의 세계로 들어가면 자신마저 헷갈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무한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신적인 일을 간단하게 접어두고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사역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바울 사역 초기는 전환기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때리고 가두고 잡아 죽이려는 사람이라면 그후에는 예수를 위하여 자신이 순교의 제물로 나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사람의 부정과 비판 속에서도 이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으니, 그 후로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 본연의 고백이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자신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던 자였지만, 이제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선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라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혼돈과 공허가 아니라,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취하며 그 사랑에 젖고 싶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출발점을 하나님 안에서 강조합니다. 아직까지 신앙이 밑받침 하여 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은 사도로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바울의 사역은 멋지게 출발하지만 이제보다 더 상상못할 어려움이 닥칠 것이고, 우리는 집에서 시작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해 출발해야 합니다.
06. 함께 있는 형제와 더불어. 갈1:2-3. 426장.
검색: 함께
어제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정말 웃기는 것은 너무 쉬운 문제를 물으면 더 당황하고 모른다는 것이 이상한 기분입니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어려울 수 있지만, 내가 사람인데 사람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묘한 기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성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변증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하지만, 그들이 팔랑귀가 되어서 다른 복음을 쫓고 있음을 책망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칭찬하는 일이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책망은 잘하지 못하면 역효과가 있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어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해 놓고 다른 곳에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책망을 시급히 해야 할 순간이 왔으므로 힘든 결연한 의지와 거기에 깊은 사랑을 담고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떠나서 다른 곳에 와 있고, 그렇지만 지금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갈라디아 교회 개척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고, 바울과 함께 있는 일행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필리핀이나 멕시코, 미얀마 성도들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많이 변하고 또 신학생들은 목회 현장으로 갔겠지만, 꼭 만나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제가 아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지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손명락 선교사님이나 우리 동기 박남수, 박은덕 선교사님 현장을 꼭 둘러보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선교사님이 오셔서 설교하시고 간증하시면 몸으로는 가보지 못하지만 어떨까 궁금하시지요? 특별히 현장 사진을 보여주실 때는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제가 캄보디아 갔을 때 우리 노회 협력 이성민 선교사님의 사역지에서 과자를 나눠주는데 팬티도 한 장 안 걸치고 맨발로 과자를 위해 손을 내밀던 아기
그 아기는 이제 엄청나게 자라서 중고등학생이 되었겠지만, 그때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요?
저희들이 중학교 1, 2학년 때 야영하는 미군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저는 그때도 조금은 오지랖이 넓었는지 기브 미 초코렛. 초코렛을 달라고 해서 얻어먹은 기억이 나는데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 영어는 대학을 나와도 대화가 어렵다는 것은 들어보셨지요? 그냥 길가는 사람, 열차에서 만난 사람에게 말을 걸었던 기억들을 더듬어 봅니다.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꾸짖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극한 칭찬과 영적 축복을 선포하는데 사실은 이런 것들이 책망을 위한 전초전입니다.
저들은 부모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까요? 신앙 전수와 보호를 받습니다. 안전을 지켜주십니다. 그곳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에 대한 지식과 생활을 배우게 되고, 이단으로부터 안전을 보호받고, 서로가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을 안 하면 왜 안 나오셨는지 궁금하시지요? 때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시지요. 바울은 같이 있는 형제와 함께 갈라디아 여러 교회 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는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남 갈라디아는 비시다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가 있고, 북 갈라디아는 소아지아 중북부에 위치한 교회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자기가 세운 교회들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해 주며 서로의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현재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 사연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대화이며 일상입니다.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본받으려는 노력이지요.
가끔 우리는 부흥사들이 자기 교회의 장점을 들어서 우리가 본받기를 원해서 자랑하는 경우를 보는데, 아무리 자랑만 하고 있어도 자랑만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도 생활 가운데 장단점을 찾고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07. 아버지 father. pathvr(3962, 파테르) 갈1:3 579장.
검색: 아버지
아버지라고 제목을 정해놓고 아버지에 대한 찬송이 떠오르지 않아 어머니의 넓은 사랑을 불렀습니다. 물론 202장에 “하나님 아버지 주신책은” 이 찬송은 하나님 아버지까지 다 들어가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성경 책에 대한 찬송이라서 어머니의 넓은 사랑을 불렀습니다.
성경과 히브리 사상에서 아버지는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저 또한 아버지고, 저 또한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a) 명사 파테르(Homer 이래)는 인도 유럽어에서 유래된 파테르(pater) 즉 아버지는 고전 헬라어에서 실제 아버지나(Homer) 가계의 족장(Josephus) 또는 일반적으로 조상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Homer).
이밖에도 비유적 의미로 이 단어는 '선구자, 창시자, 존경받는 사람, 노인, 선생'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지적이나 영적인 부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b) 하나님은 아버지로, 즉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 부르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① 고대 동방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아이를 낳는 원초적인 행동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적, 육체적인 후예라는 신화적인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우가릿의 신 엘(El)은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웠고, 바벨로니아의 달의 신 신(Sin)은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불리웠다.
② 헬라의 제우스는(호머 시대부터) 모든 신적 존재와 모든 인간 존재의 아버지이며, 우주의 신이었다. 애굽에서 바로는 특별히 육체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다. 아버지란 이름은 무엇보다도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그의 자비로운 사랑과 선과 돌봄을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의 역할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두가지 태도이다.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무력함과 신에 대한 완전한 의존을 깨닫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신에 대한 어린애 같은 신뢰와 사랑의 태도'이다(G.Mensching, RGG3 Ⅵ1233).
(c) ① 플라톤은 만물의 근원이 아버지라는 사상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창조 신화에서 우주론적 형태의 아버지 개념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아버지시다.
②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권위는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는 그의 자식이며 그에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창조주이며 아버지이며, 유지자'이다
스토아 사상에는 제우스와 헬라의 성스러운 혼인 신화를 이용하여 세상을 신들이 낳은 것으로 그 기원을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신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인간이 신의 로고스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단지 현명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단지 좋은 사람들만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다소간 있는 것이다.
③ 고대의 신비교파에서는 초신자의 중생과 성화(聖化)가 신에 의해 태어나는 행동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신은 기도에서 "아버지"로 불리운다.
(a) 파테르의 일반적인 용법.
① 육체적인 부권은 창조주의 선물이며 명령이다(창 1:28).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참조: 창 27), 아버지는 그의 가족과 집(참조: 수 24:15b)의 우두머리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존경받아야 할 권위자인 것이다(출 20:12; 출 21:15; 출 21:17; 잠 23:22). 그의 가족을 먹이고 보호하고 교육시키는 것이 그의 의무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가족의 제사장이며(출 12:3이하) 선생이다(출 12:26이하; 출 13:14이하; 신 6:7; 신 6:20이하; 신 32:7; 신 32:46; 사 38:19). 그는 그의 가족의 생활을 언약에 따르도록 하는 책임이 있었으며, 자식들이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 했다. 종들까지도 주인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왕하 5:13).
② 파테르는 이스라엘의 초기 세대들에 대해 사용되었으며(시 22:4; 시 106:7), 그 이전 시대의 특출한 하나님의 사람들(집회서 44:1이하)과,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고 중보하던 자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은 그렇게 불리웠다(수 24:3; 대상 29:18).
③ 파테르는 제사장(삿 17:10; 삿 18:19)과 선지자(왕하 6:21; 왕하 13:14)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왕하 2:12에서 선지자의 제자가 그렇게 부를 때도 또한 영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란 칭호가 흔히 존경받는 서기관을 일컫던 랍비적 유대주의에서(SBⅠ 918f.)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는 토라의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에 때로 적용되고 있다(SBⅢ304이하).
08. 파테르의 종교적 용법 235장.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아버지로 언급되어 있다. 지상 아버지와 비교를 제외하고는(시 103:13; 잠 3:12; 참조: 신 1:31; 신 8:5), 아버지라는 명칭은 하나님에 대하여 단지 15회 사용되었는데, 13회는 통칭으로, 2회는 기도로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신 32:6; 사 63:16; 2회; 사 64:8; 렘 31:9; 말 1:6; 말 2:10), 혹은 이스라엘 왕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삼하 7:14과 병행구 대상 17:13; 대상 22:10; 대상 28:6; 시 89:26; 참조 시 2:7). 그 단어는 결코 다른 개인이나(시 68:5) 혹은 일반적인 인류와의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와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부권에 관한 견해 사이의 차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권은 생물학적, 혹은 신화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구원 신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자연적 상태나 특성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의 기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참조: 출 4:22; 신 14:1이하; 호 11:1이하).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연관되어 창조와 출생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 조차 그 뜻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미 존재한 백성에 대한 역사적 선택과 구속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사 63:16; 사 64:8). 선택하시고 구속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이 아버지로 묘사될 때, 그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사랑(렘 31:9, 렘 31:20; 참조: 호 11:8)과 존경 및 순종에 관한 요구(신 32:5이하; 렘 3:4이하, 렘 3:19; 말 1:6)등 두 가지가 다 표현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됨에 참여하고 있기때문에, 그들은 서로 충실해야 할 특별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말 2:10). 만일 한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가 백성의 일원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인 것이다(시 68:5; 시 68:4-10의 문맥에서).
호격 "내 아버지"는 렘 3:4; 렘 3:19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의미심장하게, 개인의 부르는 것이 아니고 선택된 백성의 기도로 사용된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파테르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157회, 종교적 의미로 245회 사용되었다.
1. 파테르의 일반 문자적 의미.
(a) 파테르는 아버지를 나타낸다: 마 2:22; 마 4:21이하; 마 8:21; 눅 1:17; 요 4:53; 행 7:14; 고전 5:1 등; "육체의 아버지"는 육체적 인간의 아버지들, 낳은 아버지를 가리킨다, 히 12:9.
엡 6:4에서 아버지는 적어도 할아버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명시된 가족의 규율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순종하라는 계명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들은 또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인간적이고 영적인 책임을 가리키고 있다(엡 6:1-엡 6:4; 골 3:20이하). 그리고 복수형은 양친 모두를 가리킨다.
(b) 파테르는 '보다 먼 조상', 곧, '종족이나 부족의 시조, 한 민족의 조상, 선조'를 나타낸다. 아브라함(마 3:9; 눅 1:73; 눅 16:24; 요 8:39; 행 7:2; 롬 4:1Rec., 롬 4:17이하), 이삭(롬 9:10; 야곱, 요 4:12), 다윗(막 11:10; 눅 1:32).
복수, '선조들', '조상들'(마 23:30, 마 23:32; 눅 6:23, 눅 6:26; 눅 11:47이하; 요 4:20; 요 6:31; 행 3:13; 행 3:25; 고전 10:1).
'종족의 시조들'(요 7:22; 롬 9:5; 롬 11:28).
(c) '나이가 더 앞선 자', '연장자'와 같은 의미: 요일 2:13이하.
2. 파테르의 비유적 용법.
(a) 파테르는 어떤 것의 원조이며 그것을 후세에 전해 물리는 자: "할례자의 조상"(롬 4:12), 자기 자신과 동일한 정신에 의해 생기를 부여받은 어떤 동족이나 사회의 원조:예컨대 "믿는 모든 자의 조상", 롬 4:11, 참조: 롬 4:12, 롬 4:16(마카베오일서 2:54), 자신의 정신을 타인들에게 주입시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자: 그리스도(요 8:38), 마귀의 자식들(요 8:41이하; 요 8:44)에 대해 사용되었다. 명예로운 칭호, 뛰어난 지혜와 경험
(b) 파테르는 아버지의 위치에 서서 아버지다운 방식으로 남을 보살피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를 나타낸다.
09. 은혜. 갈1:3. grace, 호의, 친절 favour. cavri"(5485, 카리스) 197장.
검색-은혜
용모->지식->금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사람들 중에 복리를(행복과 이익)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카라(carav, 5479)는 이 복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표현을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a)의 기본 의미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 '~을 위하여, ~에 대한 고려를 해서'를 의미한다.
(d) 아이스킬루스는 신들의 호의에 카리스를 사용했다. 플라톤의 문헌들에서 카리스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진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9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좋아함, 의향, 기호', 드물게 '매력, 아름다움, 애교'를 의미한다(시 45:2). 그리고 이 단어는 라촌(만족스러운 것, 사람들 사이에서, 잠 10:32;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은총, 잠 11:27; 사람이 '하나님께 얻는 은총'), 헤세드(은총, 에 2:9; 에 2:17), 라함(우애감, 단 1:9; 동정, 창 43:14), 토브(선한 것, 잠 18:22), 게둘라(영예의 표시, 에 6: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5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카리스는 비종교적인 행 24:27; 행 25:3; 행 25:9 등에 나타나며, 좀 더 분명하게는 행 2:47; 행 4:33에 나타난다.
② 구약성경의 영향이 눅 1:30; 행 7:46; 행 7:10; 눅 2:40; 눅 2:52; 눅 6:32 이하의 종교적인 용법에서 나타난다.
③ 카리스는 눅 4:22; 행 14:3에서 복음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행 6:8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11:23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카리스의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4:26; 행 15:40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행 15:11은 권고 형식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b) 바울 서신.
① 카리스는 바울의 중심 개념으로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롬 1:7; 살전 5:28 등).
② 바울에게 있어서는 카리스는 독특하게 구원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카리스가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갈 2:21)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롬 3:23-24) 구원의 전부이며(고후 6:1)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다(고전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롬 3:24 이하).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이다(롬 4:16). 은혜는 칭의의 기반이며, 그것에서 나타나게 된다(롬 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이다(갈 5:4).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이다. 은혜는 충분하다(고전 1:4). 우리는 더 요구하거나 더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에는 확신적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거짓 확신이 아니므로 자랑할만한 여지가 없다(고전 1:29; 참조: 갈 5:4).
③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은혜의 작용은 그 능력을 보여준다(롬 5:20-21). 은혜와 죄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5-6). 은혜는 교회 안에서, 보기로 바울의 모금에서(고후 8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은혜의 목적은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고후 9:8),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요구
10. 평강. 평화, 복지, 번영eijrhvnh(1515, 에이레네) 갈1:3.408장.
검색: 평강=평화=평안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 (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 (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겔 38:11; 겔 38:14; 겔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 (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 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 (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11.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1:1-3. 339장.
어느 곳이라고 신경이 안 쓰일 곳이 어디 있을까요? 바울이 갈라디아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이제 딴 목회지에서 사역하지만 늘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면 자신의 뜻이나 의지대로는 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기분 좋을 때는 힘써 사역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까지 감당하면서 매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힘들면 당연히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기에 그만 두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만 둘 수 없고,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끝까지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사역의 근거를 예수 부활을 들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나 모든 사역자들은 결국 예수의 부활을 증거해야 힘이 있고, 부활이 저들 메시지의 모든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있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두고 비중을 따진다면 어쩔 수 없이 부활에 더 많은 비중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역자입니다.
바울은 지금도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서신을 전합니다. 사역자들이 함께 있음은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개인이면 무너질 수 있는 중대한 일도, 여럿이 함께 있음으로 서로를 붙들어줄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는 面前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둡시다. 우리는 내 눈에는 안 보일 때라도 주님은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늘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흔들지지 말고 어떤 풍랑이 일어도 우리 마음은 늘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함 없는 은혜 때문에 우리가 여기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속상한다고 다 성질을 냈다면 여기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우리 가슴에는 항상 남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역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히 드러내야 합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고, 로마가 권력으로 온 세계를 다 뒤집어 놓으려고 할 때, 애국적인 유대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이고 애국적인 힌트가 되겠습니까?
전쟁과 전쟁 사이의 짧은 평강이 지금 사역하는 모든 분위기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고초를 당했던 것처럼, 바울과 일행들은 복음 전파에 매우 중차대한 저항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이 정도로 전쟁 없이 오랜 기간을 그래도 평강을 누릴 수 있음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 어떤 가정도 평온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이 방해 받고 밀리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빌고 난 다음에 갈라디아 성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저들을 엄히 꾸짖어 바로잡으려는 순간입니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바울은 목적 있는 편지를 써야 합니다.
왜 그렇게 귀가 얇아 말에 휩쓸리느냐? 내가 분명하고 명백하게 가르쳐줬는데 다른 교훈을 따라가느냐? 야단쳐야 하는데 우선은 수습하기 좋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목회 현장과 떨어진 대화의 몫이 각기 다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아주 엄한 책망과 저들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래도 지나간 잘못을 명백하게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엄격하게 책망하고 난 후에는 또다른 희망과 사랑을 심어줘야 합니다. 바른 자리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12. 자기 몸을 주신 예수님. 갈1:4. 321장. 215장.
검색:뜻, 악. 세대 대속=구속, 몸. 주셨으니=주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이며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깊은 은혜속에 위대함은 더 깊이 드러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주님의 사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위대함은 말로 표현 불가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지만 자신의 사랑과 인격을 우리에게 바로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가 직접 연결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사랑으로만 주더라도 성도들은 감당하지 못할 지경인데 바울은 하나님을 또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거기에 바로 연결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심령은 아주 간략하게 표현해 본다면 나의 하나님이 갈라디아 여러교회 모든 성도들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직접 펼치는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결정)은 한 사람도 잊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받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닫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과 마음이 통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는 자신이 깨닫는 사랑으로 인하여 그대로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큰데 이 세대가 너무 악합니다.(아픈, 불행한) 세상이 너무 선해서 모든 성도들을 사랑으로 품어준다고 하더라도, 애잔한 기분이 드는데 세상이 악해도 너무 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성도까지 넘어뜨리려 하니 하나님의 마음이 정말로 아픕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로 십자가로 보내셨는데 세상은 예수님이 대신 피흘리신 그런 성도들에게, 악으로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세상이 악하면 악할수록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질 수밖에 없고, 주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없는 깊은 사랑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대는 항상 악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 세대를 향하신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 사이에서 항상 가슴 아픈 사랑을 퍼붓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심정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성도들 상호 간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뜨거운 사랑을 갈라디아 성도들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가슴에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그 깊고 뜨거운 감격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눈길을 원하십니다.
우리 죄는 늘 최소한으로 생각하는데 결과는 걷잡을 수 없는 댓가를 요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작은 죄를 짓더라도 우리의 죗값은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 거룩한 사람,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자기 죄의 삯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간결하게 표현해 두셨는데 우리 죄를 대속(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가장 완전하고 온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죄를 대속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이 내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렸습니다. 물론 대속의 효력이 있었지만 완전한 대속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제물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늘 짐승이 죽고 또 죽어야 했습니다.
멸망 받고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피 흘려 주시고 구속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죄인으로 죽어야 할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로 서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 죄를 더 이상 물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내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다 가리워지고 씻겨졌습니다. 주여 대속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고, 피흘려 죽으신 주님의 은혜 앞에 우리는 그저 감격의 영광을 고백할 뿐입니다.
13. 영광이 세토토록. 갈1:5.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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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vxa(1391, 독사) 영광, 영화, 명성. 광채,
우리는 바울의 진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순간이나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고, 아울러 어느 교회 어느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에는 물러서지 않고 올인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독사는 원래는 그저 생각에서 유래했습니다.
① '기대, 의견, 견해, 단순한 추측', 철학적 주의.
② 좋은 평판, '명성, 칭찬'.
③ '빛, 광채'를 의미 한다.
이 단어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작품에서, '명예'나 '영광', 하나님의 광휘'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독사는 신약성경에서 167회 나오며, 한글개역 성경은 한번 '광채'로 번역하고, 모두 '영광'으로 번역했다.
독사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독사의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보다 70인역본을 따른다. 이 단어는 '평판'과 '능력'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헬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적 용어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70인역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영예', '하나님의 장엄',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가견적 광채는 고전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문맥에서 차이를 식별해야 한다. 그렇지만 항상 표현되는 것은, 비록 신현현의 가시적 요소를 여러 가지로 강조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예를 들면,
행 7:2에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눅 2:9의 크리스마스 기사에서 "주의 영광",
눅 9:31이하; 벧후 1:17의 변형에 대한 기사에서 "지극히 큰 영광",
행 22:11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 "그 빛의 광채",
계 15:8; 계 21:23의 하늘의 성전과 하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을 실제적 인정과 감사로 고백하거나(행 12:23; 롬 4:20; 계 16:9) 찬양하는 것(눅 2:14; 눅 19:38; 롬 11:36; 롬 16:27; 엡 3:21; 빌 4:20; 딤전 1:17; 계 4:9; 계 7:22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송영은 에스틴(ejstivn)을 전제한다. (갈1:5)
요한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용법과 인간이나 하나님이 부여해 주는 명예나 찬양에 대한 용법을 거의 순수하게 병행시킨다는 사실이다(요 12:41; 요 12:43).
독사는 예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 신약성경에서 독사를 하나님과 관련시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단계를 취한다.
롬 6:4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3:16에서는 영광 속으로 올리워진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행 7:55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의 오른 편에 계신 그를 보았다.
베드로전서에서 그의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벧전 1:11)과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벧전 1:21)에 대해 말한다.
히 13:21에 의하면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처럼 그에게 돌려진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 약 2:1)
누가복음에서 독사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모 기사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독사의 계시(눅 2:9)는 천사들의 출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그의 오심을 지적한다. 요 17:5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독사"를 언급한다.
요한복음에서, 오직 믿음으로 또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요 1:14;)
영광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강조하다가, 랍비들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을 보는 것에서 신약에 와서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부활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모됩니다. 천사와 세상 영광까지.
14. 다른 복음을 따름을 책망. 갈1:6-9. 5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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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2087, 헤테로스) AANS, (형용사 대격 중성 단수), 그밖에, 다른 몇의 뜻이며, '헤테로스'는 (243, 알로스)에서 유래했으며, 왼편, 다른 사람, 틀린, 더 많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교행위를 의미하며, 지금까지 믿었던 복음을 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심한 후에 신앙을 저버리고 있었으며, 그들이 받아들인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닌다른 복음은 둘 중의 하나가 본질에서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다르다는 뜻은 왼편과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왼편은 어둠과 수치의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유일함을 묘사할 때, 그들에게 수치가 되며 어둠의 그늘에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일한 복음과 인간의 가르침이 하나라고 믿는 것입니다.
복음 외에 다른 몇의 지식이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데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이상히 여긴 바울의 심정은 절망적이며 고통마저 느끼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2114, 주르) 모르는 사람이다. 이탈자. 싫어하다. 멀어지다. 이상하다. 배반
하다. 이방인, 사생아, 외국인, 창녀, 곁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형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바리새인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므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무지의 상태를 의미하며 진리와 멀어진 자들이 곁길로 걸어가는 이단자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생아와 같이 비 진리를 진리로 믿고 행하는 자들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첫댓글 아멘~^^!!! 네~^^ 목사님!!!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