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강해(3) 2009. 5. 20
돌아오려 하여
룻기 1:6
금주를 역설하는 여류 인사가 어느 날 어느 지역에서 연설 중에 이렇게 목청을 높였습니다.
“여러분, 이 고장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누구입니까? 제일 큰 집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술집 주인입니다.”
“옷을 최고로 잘 입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역시 술집 주인입니다.”
“한데 그 돈들이 모두 어디서 옵니까? 바로 여러분들한테서 옵니다.”
며칠 후 강연을 들었던 어떤 사람이 거리에서 그 연사와 마주치자 감동적인 강연을 잘 들었노라며 치하했다. “그래 술을 끊으셨군요!”라고 말하는 연사는 만족스런 표정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술집을 차렸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 해도 자기 멋대로 해석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자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 모압으로 떠났던 엘리멜렉의 가정은 불과 십년 만에 가문이 몰락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엘리멜렉이 기반도 닦기 전에 죽고, 홀로 키운 아들들도(‘말론과 기룐’)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후 그만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나오미와 이제 막 과부가 된 두 이방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불쌍하게 남겨진 세 여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는 것이 바로 6절 말씀입니다. 6절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6절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듣다”라는 단어입니다.
그 여인, 곧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습니다.
단순히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찾아오셨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돌보신단다!”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오미가 이 소식을 들었을까요?
누군가가 나오미에게 이 소식을 전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방 땅에 홀로 남겨져 있던 나오미가 이 소식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도 듣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복입니다.
예> 시장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어느 날 싸게 판다는 광고를 듣게 됩니다. 그러면 그날은 다른 날보다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혼잡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기회도 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듣는 것이 유익입니다. 듣는 것이 복입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롬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오늘 우리도 누군가가 들려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듣지 못하여 망하는 자가 없도록 땅 끝 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일어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물론 이 말은 어떤 행동을 시작하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듣고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듣고 무시하지 않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응답하는 자의 것입니다. 응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요청’과 ‘인간의 응답’이 조화되어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가지고 있어도 먹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이 세 여인들이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돌보시기 시작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응답하는 종교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를 사자성어로 고쳐보라고 했더니 젊은이들이 “기립발광”이라고 했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앉은뱅이들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과감하게 일어나 이 세대의 부름 받은 자로서의 소명을 잘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녀답게 더욱 더 굳게 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힘써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돌아가다” -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6절 이하 1장 전체에서 이 “슈브”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이 단어는 이 룻기의 내용은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단어입니다. 즉 이 룻기를 쓴 저자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룻기의 저자는 베들레헴을 버리고 떠한 한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돌아오는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버리지 아니하시고, 멸망치 아니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가정을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다시 회복시키시고, 그 가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과 인류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남편이 죽는 것도, 아들들이 죽는 것도 그녀에게는 비극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녀가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우리의 짧은 이해와 생각으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는 놀랍습니다.
엡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 야곱의 피신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됨.
예> 요셉의 팔림이 총리가 되는 계기가 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생각지도 않았던 시험과 고난이 닥쳐 올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비극이 아니라 축복의 기회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이용하셔서 끝내 우리를 주께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잘못한 아들을 징계하듯이 말입니다.
<나오는 말>
나오미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듣고 일어나 돌아가려고 결심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주의 부르심과 복음을 듣고 함께 일어나 순종하며,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부름 받은 주님의 선한 일꾼으로 온전히 쓰임 받은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그리고 이 교회와 이 민족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