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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권과 국익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집단의 딜레마를 풀기 위해 종종 ‘공리주의적 접근’이 시도된다. 저마다 중시하는 가치가 달라 가치의 서열을 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전쟁터에서 한 병사가 적국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면, 사랑이란 가치가 우선인가, 군인의 본분이란 가치가 우선인가. 이때 집단은 ‘다수의 만족’을 현실적 기준으로 정한다. 집단은 다수를 상정해 그 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린다. 인권과 국익의 대립도 같은 관점에서 다뤄져왔다. 국가는 다수를 포괄하기에 개별 인권은 침해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간 국익이 진정 다수 이익을 포괄하는 초월적 가치였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가령 국익이란 명목하에 보호돼 온 대기업은 오늘날 불공정한 한국 경제 시장의 주범이다. 이때 국익은 기득권의 방패 구실을 한다. 더구나 흔히 통용되는 국익의 개념 속엔 비정규직 노동자·여성·장애인·성소수자의 이익은 배제된다. 사회적 약자도 분명 내집단의 일원임에도 국익은 이들의 이익은 외면해 왔다. 국익이 기득권의 방패나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수단이 돼온 것이다.
국익이란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공리주의의 역설’에 주목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복잡다단하다. 과거처럼 집권당·대기업·가부장의 약진이 곧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퍼지는 낙수효과는 흐려졌다. 사회 각 영역에서 다양한 집단이 출현해 이익도 분화됐다. 정치는 양당·다당의 경쟁 구도로 발전하고, 경제는 자유무역과 공정 경제가 글로벌 스탠다드가 됐다. 더 이상 1인 가부장이 가계를 이끄는 가구 형태도 표준이 아니다. 이익을 중심으로 복잡한 집단들 속 교집합을 찾아내기 어려운 거다. 때문에 오늘날 사회에서 공리주의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위험하다. 모호한 집단적 이익을 내세워 소수 집단들의 복종을 강요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 이익 속에 남는 것은 항상 기득권이며 소수 집단은 자주 배제된다. 공리주의란 다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소수의 배제, 즉 ‘뺄셈’이다.
이제 국익보다 인권을 우선해 ‘덧셈의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 올해 들어 터져 나온 미투 운동이나 오너 갑질을 고발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는 집단을 위해 자신을 움츠려 왔던 이들의 외침이다. 만약 공리주의적 국익이 만연한 사회라면 이들의 아픔은 직장, 기업 브랜드 가치란 집단을 위해 여전히 침묵돼야만 한다. 인권을 우선하는 사회라는 믿음이 생길 때 움츠린 이들의 목소리가 당당히 터져 나올 수 있다. 그때 우리 사회는 확장된다. 이익은 나눠지지만 인권은 강해지고 늘어난다. 이미 우리 사회는 1987년 민주화를 통해 처음으로 기득권주의와 결별하고 사회의 질적 확장을 이룬 경험이 있다.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할 때다. 국익과 같은 집단주의하에 배제돼 온 이들을 우리 사회가 더 품어내야 한다.
2. ‘정치인의 막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하라.
매해 정치인의 막말 문제가 반복된다. 정치인이 본연의 업무를 망각하고 권력만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권력을 지향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왜’ 지향하는가도 잊어선 안 된다. 정치인은 기존 정치가 포괄하지 못하는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권력을 좇는다. 때문에 정치인의 권력 추구는 지지의 외연을 넓힐 사회의 새로운 균열 지점을 발굴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이때 정치인에게 ‘막’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거침없이 ‘사이다’ 발언을 던져야 정치가 포괄해내는 사회적 가치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막말이 가치 있진 않다. 정치인의 막말이 자기 확신에만 갇혀 다수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때 막말은 저질이 된다. 대중은 현실에서 강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 대중에겐 강자의 부조리에 짓눌린 억하심정이 있다. 국민을 대리해 투쟁하는 정치인이 다수의 공감을 얻을 말을 속 시원히 쏟아낼 때 국민의 응어리도 풀린다. 반면 다수의 공감과 무관한 만용의 목소리가 오고 갈 때 국민의 화는 더 쌓이며 막말은 저질이 된다. 19대 총선에서 김을동 전 의원이 여성 예비 후보들에게 ‘여성 후보들은 조금 모자라 보일 필요가 있다’며 내뱉은 막말은 여당 최고위원이라는 자신의 지위에도 먹칠을 하며 공분만 샀다.
공감을 얻는다고 막말이 저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아니다. 다수의 공감만 얻고 소수 약자의 갈증을 해소할 새로운 갈등을 동원하는 것에 소홀하면 막말은 ‘포퓰리즘’을 야기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다수의 지지를 먹고 산다. 항상 다수의 의지를 결집시키고 자신을 다수로 포장하기 위해 포퓰리즘은 소수 약자의 갈증 해결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낡고 해묵은 기존 갈등만 동원할 따름이다. 기존 갈등이 다수를 재결집할 힘을 갖기 위해 포퓰리즘은 막말을 기용한다. 익숙한 갈등이 새롭고 자극적으로 보이기 위해선 강렬한 막말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제대로 알고 실천에 옮긴 인물이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노동자의 권익 향상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정당의 이름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이었다. 독일 사회의 다수가 누군지 정확히 포착한 거다. 그는 노동자를 대변한다며 ‘유대인 박멸’을 내세웠다. 이민족과 독일 민족 간의 해묵은 갈등에 슬기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게 아닌 거침없는 막말을 쏟아내며 기존 갈등을 시한폭탄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거침없는 막말로 해묵은 갈등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포퓰리즘과 막말의 유착관계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포퓰리즘에 기용된 막말은 히틀러와 트럼프 사례에서처럼 약자 탄압의 빌미가 된다. 진정 필요한 막말은 스스로는 권력을 나누지 않고 국민에게 더 높은 권익을 보장하려 하지 않는 단단한 기득권에 균열을 낼 막말이다. 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 스스로는 강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소수 약자의 갈등을 다수의 의지와 묶어내는 것도 막말이 해야 할 일이다. 약자의 푸념 섞인 외마디 욕설은 공허하지만 권력을 가진 정치인의 막말은 소수 약자의 갈등을 실체화시켜 공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내내 거침없는 돌직구 막말로 유명했다. 그 대표가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이었다. 일국의 국가 원수가 남의 나라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위험한 막말이다. 그러나 3공화국 한일협정으로 탄생한 한일관계를 재정립하고 본격적으로 과거사를 청산해야 했던 시점에서 나온 저 발언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일 정책 기조에 정신적 밑바탕이 됐다. 만약 김영삼의 ‘용기’가 없었다면 한일관계에서 한국은 수세적 위치를 고수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김영삼의 막말이 소수 약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갈등을 국민 대다수의 의지와 묶어낸 것을 주목해야 한다. 진정한 막말이 사회의 권익을 소외된 사람들에게까지 전파시킬 계기를 마련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3. 지방분권 필요한가
대한민국은 ‘축제 공화국’이다. 한 해 만오천 개의 지방 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그중 흑자를 보는 건 함평 나비 축제, 화천 산천어 축제 정도다. 대부분은 이벤트성 졸속 행정으로 지방 재정 악화를 유발한다. 가령 F1 대회 유치를 위해 8000억이 넘는 예산을 쓴 전라남도는 결국 막대한 빚만 도민들에게 떠넘겼다. 또 인천은 아시안게임 유치를 위해 1조를 넘게 썼지만 경기장은 매년 적자를 내며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해 지방분권이 해답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섣부른 지방분권은 자칫 난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방 간 격차가 잔존하는 상황에서의 섣부른 지방분권은 ‘지방 간 이전투구’를 심화시킬 수 있다. 가령 벨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지방분권이 잘 돼있는 나라다. 연방 내각이 성립되려면 7개나 되는 지역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할 만큼 권한이 분산돼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은 국토 균형 발전에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북부와 남부는 개별적 발전 전략을 추구했고 신산업을 육성한 북부가 농업에 치중한 남부에 비해 크게 잘 살게 됐다. 벌어진 지방 격차는 남-북부 간 갈등을 심화시켰다. 북부는 독립을 원하고 남부는 북부를 이기적이라 비난하며 갈등한다. 중앙의 조율이 있었다면 지방 간 격차가 이 정도로 심해지진 않았을 거다.
단순한 지방분권보다 핵심에 다가서야 한다. 본질은 ‘지방 발전’이다. 지방분권 주장 속에는 지방분권을 실현해야 지방이 발전하고 국토가 고르게 발전할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지자체별로 지역 경제를 발전시킬 역량이 준비돼있지 않다면 축제 난맥상 같은 졸속 행정이 난무할 우려가 있다. 또 이미 낙후된 지방에 권한만 대폭 이양한다고 지방 간 격차를 극복할 묘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동서 간 지역주의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지나친 경쟁과 분열만 가증될 수 있다. 중앙의 컨트롤러가 지방 발전의 방향타를 잡아야 한다. 현재 산업 시설이 잘 발달된 경상도는 다른 광역권에 비해 수도권으로의 인구 흡수율이 가장 낮다. 경상도의 발전은 지방 자치가 아닌 중앙의 진두지휘로 이뤄졌다. 비록 정치적 이유로 타지역 소외 문제가 대두되긴 했으나 이는 지방 분권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극심한 지역주의 때문이었다. 핵심은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무엇을 위해서’인 거다.
균형 잡힌 지방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지방의 문제를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로 재구조화’하는 일이다. 지방분권으로 재정·인구가 각기 다른 지방들이 각자도생하는 것은 지방의 문제를 지방의 것으로 국한시키는 일이다. 가령 호남 소외 문제는 비단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남의 낙후 현상은 호남 인구의 수도권으로의 대거 흡수를 야기했고 이는 오늘날 수도권의 심각한 주거·교통 문제로 이어진 거다. 호남 소외가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재구조화됐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제 또 다른 지역 소외를 막기 위해서도 지방의 문제를 중앙의 문제로 환원하는 일은 중요하다. 원전 공론화가 모범적 효시였다. 공론화 이전까지 원전은 부산, 울산 등지에 국한된 문제로 인식됐다. 공론화 이후 국민적 관심이 모이고 대안도 함께 모색됐다. 아직 중앙의 간여가 필요하다. 지방분권은 지방 스스로 지역 현안을 해결하고 지역 경제를 지탱할 수 있을 때 추진돼도 늦지 않다.
4. 대통령 개헌안에 포함된 토지공개념에 대해 논하시오. 사유재산제와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를 포함시키시오.
작년 서울시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논란이 있었다. 일부 주민들은 특수학교가 집값을 떨어뜨리는 혐오 시설이라며 반대했다. 장애 학생 부모들은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해야 했다. 님비 현상이 낳은 비극이다. 님비·핌피 현상은 토지공개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토지는 장소 이전과 증식이 불가한 특수한 재화다. 해당 지역의 공공복리를 실현하기 위해선 해당 토지 외의 대안이 있기 어렵다. 때문에 개인 간 이전투구로 공익이 희생되지 않도록 국가의 조정이 요청된다. 토지공개념이 필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현재 토지공개념 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재산권 과잉’에 있다. 한국 사회는 합의·양보의 민주주의 규칙에는 동의하면서도 재산권은 유독 타협이 불가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긴다. 북한과의 오랜 대립이 작용한 탓이 크다. 극도의 공산주의 혐오인 ‘레드 콤플렉스’가 재산권의 합리적 제약마저 親공산주의 정책으로 보이게 만든 거다. 그러나 애초에 재산권 자체는 권리만 존재하는 신성불가침 권한이 아니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에 의하면 재산권은 ‘권리와 의무의 복합체’다. 다른 권리들처럼 제약을 동반한다. 지금처럼 의무는 외면된 채 권한만 과잉되면 공공복리 실현은 저해된다. 현재 서울 지역 특수교육 대상자 1만3000명 중 35%만이 특수학교에 다닌다. 그럼에도 지난 15년간 시민들의 반발로 특수학교 설립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재산권 과잉 속 님비가 공익을 계류시키는 거다.
토지공개념의 헌법 도입은 ‘재산권 과잉을 가라앉히는 선언’이 될 수 있다. 현행 헌법에서 재산권은 “공공복리에 적합”하게 행사돼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공공성이 높은 재화인 토지 조항도 마땅히 같은 맥락에서 표현돼야 했다. 그러나 현행 헌법상 토지 이용은 ‘효율’·‘개발’에 의해 제한되는 것으로 적시된다. 대원칙이 소원칙에 소급되지 않는 모양새다. 개헌을 통해 확실히 ‘공공복리’를 위해 토지 이용이 제약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재산권과 토지 조항의 맥락을 정리해 공익과 개인 자유 간 균형을 지향할 때, 재산권 과잉을 가라앉힐 동력이 생길 것이다.
나아가 재산권 과잉이 잦아든 자리에 ‘사람 중심 경제’가 자랄 수 있다. 지난 20년의 신자유주의는 효율만 중시한 나머지 다수의 희생을 초래했다. 노동 시장이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쪼개지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무한 경쟁 속 이기주의 만연으로 공익은 소외됐다. 현 정부는 사람 중심 경제를 선언했다. 사람 중심 경제는 과실을 공정히 분배해 공익을 실현함을 뜻한다. 토지공개념 헌법화는 그 마중물이다. 부동산은 공공 인프라로써 가치가 상승되는 대표적 자본이다. 그럼에도 연간 400조에 달하는 부동산 불로소득이 개인에게만 독점됐다. 토지공개념 도입은 불로소득에 공공의 기여를 인정하는 첫 선언이 된다. 토지를 출발점으로 해 부당하게 독점돼온 이윤들이 공정히 분배될수록 우리 사회의 공익과 더불어 사람 중심 경제도 살아날 것이다.
5. 한반도 주변국 관계를 고려한 북핵 해법을 논하라.
‘강수를 두면 미국은 회담에 나온다.’ 북한이 학습한 미국과의 회담 유도 방정식이다. 1993년과 2006년, 북한이 NPT 탈퇴와 1차 핵실험이란 강수를 두자 압박·무시로 일관하던 클린턴과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에 나왔다. 작년 6차 핵실험과 연이은 ICBM 도발도 그랬다. 북한은 사상 첫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얻어냈다. 북한의 강수 작전은 한반도 주변 현상을 수정하려는 시도다. 군사적 억지력 증대로 안보를 유지하려는 한반도 주변국들의 ‘피스 키핑’ 관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냉전 이래 한반도 주변국들의 안보 방정식은 피스 키핑이었다. 국제정치학계 거장 케네스 월츠에 따르면, 모두가 서로의 잠재적 적국인 상태에서 평화는 오직 힘의 균형으로 달성된다. 미국은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려 MD체계 라인을 바짝 조여 억지력을 키워왔다. 중국 역시 대대적인 국방력 강화로 미국의 세력 확장을 막고자 했다. 러시아는 경제 붕괴 후 앞선 군사력으로나마 역내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고, 일본도 끊임없이 집단적 자위권을 역설하며 군사력 증강을 꾀하고 있다. 어느 곳보다 동북아 안보는 월츠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스 키핑은 ‘강대국 간 안보 논리’에 그친다. 강대국이 힘의 균형을 꾀하는 사이, 약소국은 그에 따라가지 못해 강대국 질서에 편입되거나 소멸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자유 진영 질서에 편입돼 안보 무임승차를 누렸다. 매년 정례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이뤄지고 핵우산이 한반도 전역을 포괄한다. 이를 떠받칠 한미동맹도 견고하다. 반면 북한은 공산 진영의 붕괴로 자립을 꾀해야 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더 이상 북한의 안보를 책임지지 못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보다 강력하다던 북중우호조약은 중국에서도 폐기의 목소리가 높아진 상태며, 북소우호조약은 폐기된 지 오래다. 약소국으로서 안보 자립을 위해 북한은 상호확증파괴를 담보하는 핵을 택했다. 북핵은 최약소국이 직면한 동북아 피스 키핑의 반작용인 것이다.
혹자는 더 강한 피스 키핑으로 북핵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핵을 고도화할 시간이 남았기에 그 전에 강한 압박과 제재로 제압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이는 북핵 문제를 단순히 강대국-약소국 간 문제로 규정하는 단편적 시각이다. 한반도는 주변국 갈등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예컨대 크림 사태로 미러 관계가 악화되자, 러시아는 곧바로 대북 제재 유엔 결의에 비토권을 행사했다. 미러 문제가 한반도 문제로 전이된 거다. 미중 무역 전쟁에서도 북핵 이슈가 함께 거론된다. 한반도가 주변국의 대리전장이 된 상황에서 억지력을 통한 북핵의 일방적 해결은 외려 또 다른 중·러-미·일 간 피스 키핑을 자극할 뿐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선 동북아 안보 논리를 전환하는 거시적 해법이 필요하다. 개별 국가들의 안보 경쟁으로 지탱되는 평화는 북한의 핵 개발 유혹을 더욱 키울뿐더러, 갈등의 블랙홀로 기능하는 동북아 갈등 체제를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평화 체제를 구축해 안보 불안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피스 메이킹’이 필요하다. 우선 외부 갈등이 한반도로 유입되지 않도록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 정전이라는 어정쩡한 평화는 외부 갈등에 항상 취약하다. 외부 갈등의 유입을 차단해 한반도 문제를 다른 문제와 꼬이지 않게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동북아 다자 안보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북한도 안보 효능감을 충분히 느낄 때 핵 개발의 유혹을 떨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다. 좁게 바라볼수록 문제가 꼬여있어 풀기 어렵다. 거시적으로 접근해야 북핵 문제는 풀릴 수 있다.
6. 유튜브 저널리즘에 대한 명과 암을 지적하고, 공영방송이 유튜브 저널리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논하시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지상파 9시 뉴스를 보던 시대가 있었다. 국민들은 어젯밤 9시 뉴스에 나온 소재로 가정과 직장, 술자리에서 가족·동료·친구들과 토론했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의 등장은 이 체제에 균열을 일으켰다. 다양한 정파성을 띠는 종편 채널들은 시청자에게 뉴스가 선택가능함을 보여줬다. 뒤이어 등장한 유튜브 저널리즘은 새 현상의 기폭제가 됐다. 규제로부터의 자유와 운영의 기동성을 무기로 시청자 개개의 입맛에 맞춤식으로 정보를 팔기 시작했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뉴스가 공론 형성을 위해 모두가 소비하는 ‘공공재’에서, 간접적 광고 수익을 제공하고 개인별로 취사선택하는 ‘사적재’로 변해가는 현상을 굳게 하고 있다.
시장은 다양한 상품 간 경쟁을 전제한다. 뉴스가 사적 재화로 변해가는 흐름은 의제의 폭을 넓혔다. 유튜브 저널리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대개의 의제들은 진보/보수의 틀로 나뉘었다. 반면 현재 유튜브 뉴스 채널들은 진보/보수라는 잣대만으로는 분류하기 힘들다. 보수 내에서도 온건·시장·반공 보수로 스펙트럼이 넓고, 진보 내에서도 탈물질·성평등·분배 정의로 채널이 다양하다. 규제로 인해 극단적 소재는 의제화하기 힘든 기존 매체들과 달리 유튜브 저널리즘은 비교적 자유롭게 극단적 이슈까지 소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의제 폭의 좌·우 한계선을 넓혔다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변화된 의제가 공론화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개별 시청자의 관심에 따라 철처한 타겟팅이 이뤄진다. 즐겨 본 영상의 분류를 통해 추천 영상들이 제시되고 시청자는 관심에 부합하는 또 다른 영상을 시청한다. 유튜브 채널은 끊임없이 시청자의 성향에 부합하는 정보를 제공해야만 구독자의 응집력을 높여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다. 일종의 ‘정보 버블’이 형성된다. 정보 버블은 의제를 존속시킨다. 존속하는 의제는 음모론으로 숙성된다. 예컨대 정규재TV의 인기 영상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의혹 반박 영상은 이미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의 판단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꾸준히 높은 조회수 증가율을 보이며 탄핵 음모론과 대선 불복 여론을 키우고 있다. 사회적 합의로 해소되지 않는 의제화는 ‘자폐적 소통’에 그칠 뿐이다. 귀결은 사회 내 갈등의 만연이다.
일반적 정보는 취사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뉴스 정보는 개인의 취사선택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뉴스 정보는 시민의 공적 의사결정을 위한 판단의 도구이며, 해당 정보를 바탕으로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뉴스 정보가 단순히 일반적인 시장의 상품으로만 남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공론화를 불발시키는 자폐적 소통에 머문다는 점에서 저널리즘으로서의 한계가 존재한다.
유튜브 저널리즘에 대처할 공영방송의 과제도 여기에 있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다변화한 의제들을 공론화를 통한 의제 해소로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외려 다른 자극적 소재들을 찾아 의제 해소를 더욱 늦출 우려도 있다. 기존 상업 언론도 상업 논리를 따져 합의적 대안 마련에까지는 관심을 보일 유인이 적다. 의제 설정과 의제 해소라는 두 책임을 모두 안고 있는 공영방송만이 의제 설정과 공론장 기능의 의무가 명확하다. 공영방송은 유튜브 저널리즘과 기타 상업 언론이 다하지 못하는 공론장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KBS는 유튜브 저널리즘의 등장으로 다변화된 의제를 자폐적 소통이 아닌 건설적 소통의 공론화로 바꾸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유튜브에서 조회 수가 높은 뉴스 시사 콘텐츠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적극적인 방식의 적극적 개입이 요구된다. 미디어 비평의 범주에 유투브 콘텐츠를 포함하고 이를 평가함으로써 자폐적 소통이 지니는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7. 은산분리 정책에 대해 논하라
미꾸라지들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선 역으로 천적인 메기를 어항에 넣으면 된다. 메기를 피하려는 생존 본능이 자극되면서 미꾸라지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생기를 잃지 않기에 그렇다. 이른바 ‘메기 효과’다. 업계 전반의 경쟁력을 키우는 기본 경제 이론이지만, 한국은 적어도 은행업에 관해선 메기 효과를 지양했다. 대신 은산 분리를 통한 경제적 안정을 택했다. 은산 분리는 기업 집단이 소비자의 자본을 사금고처럼 활용하는 불안정성을 차단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반작용으로 은행업으로 외부 진입은 차단됐다. 귀결은 5대 시중 은행의 ‘과점 체제’였다.
5대 은행 체제의 ‘고요한’ 안정은 ‘서민-중소기업 경제 활성화’에는 악영향을 끼쳤다. 5대 은행은 그간 고신용·저금리 대출을 고수했다. 굳건한 과점 체제와 예대 마진으로 쉽게 돈을 버는 상황에서 굳이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용 등급 4~6의 중신용자들이란 사각지대가 발생했다. 제1 금융권에서 밀려난 중신용자들은 제2 금융권으로 흡수됐다. 제2 금융권 대출의 60% 이상이 중신용자들이다. 이들은 제2 금융권에서 4배가 넘는 고금리를 견뎌야한다. 기업도 비슷하다. 2015년 한국 중소기업의 평균 대출 거절률은 40%가 넘어 OECD 평균의 3.7배에 달했다. 한국 경제의 허리를 담당하는 서민과 중소기업이 금융 사각지대에 남아있던 것이다.
은산 분리 완화 논의 흐름을 타고 출현한 인터넷전문은행은 5대 은행 과점 구조에 조금씩 균열을 냈다. 90%가 넘는 스마트폰 이용률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모바일 환경에 힘입어 인터넷전문은행은 빠르게 성장했다. 출범 불과 1년 만에 케이뱅크는 고객수 70만을 확보했다. 카카오뱅크는 월간 송금액이 100억씩 증가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핀테크에 친숙하지 않은 50대의 70% 이상이 인터넷전문은행을 이용할 의향이 있단 의사를 내비쳤다. 인터넷전문은행들이 두각을 나타내자 시중 은행들도 중금리 대출 상품을 속속 내놓는 등 변화를 모색 중이다.
그러나 은산 분리 완화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은행 과점 구조 혁파를 장담하기 어렵다. 은산 분리가 존재하는 한 신규 은행은 안정적으로 자본을 확충하기 어렵다. 증자가 어려우면 저변이 넓은 금융 상품을 제공하기보단 예대 마진을 남기는 기존 시중 은행을 답습하게 된다. 예컨대 케이뱅크는 소주주들로 구성된 은행으로서 증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때문에 케이뱅크는 리스크가 큰 중소기업 대출을 피하고, 시중 은행보다 높은 대출 이자를 책정해 외려 서민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다. 이처럼 은산 분리가 완화되지 않으면, 인터넷전문은행들은 기존 은행 장사 논리를 답습하거나 상대적으로 부실한 제2 금융권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정부는 서민의 구매력과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경제 전략으로 내걸었다.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선 임금 인상과 혁신 측면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유동성도 뒷받침돼야한다. 선결 조건은 제2, 제3 금융권으로 내몰리는 서민과 중소기업을 구제할 고품질의 금융 상품이 제공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은산 분리를 통한 안정적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 일각에선 대기업 집단의 은행 진출을 터주는 것 아니냐 우려하지만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제약을 거는 조항을 넣어 해결할 수 있다. 서민·중소기업 경제 활성화는 한국 은행업의 고요한 안정이 아닌 건강한 자극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8. 다매체 시대와 공영방송
온 가족이 둘러앉아 지상파 9시 뉴스를 보던 시대가 있었다. 국민들은 어젯밤 TV에 나온 뉴스로 가정과 직장, 술자리에서 토론했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의 등장은 이 체제에 균열을 일으켰다. 다양한 정파성을 띠는 종편채널들은 시청자에게 뉴스가 선택 가능함을 보여줬다. 모바일 기기의 발달로 뒤이어 등장한 팟캐스트·유튜브 저널리즘은 이 현상을 강화했다. 규제로부터의 자유와 운영의 기동성을 무기로 시청자 개개의 입맛에 맞춤식으로 정보를 팔기 시작했다. 뉴스의 선택 가능함은 뉴스의 속성도 바꿔 놨다. 이제 뉴스는 공론 형성을 위해 모두가 소비하던 ‘공공재’에서, 개인별로 취사선택하는 ‘사적재’로 변화한 것이다. 이른바 뉴스의 ‘상품화’다.
시장은 다양한 상품 간 경쟁을 전제한다. 뉴스의 상품화는 진보·보수에만 머물던 기존 의제 폭을 넓혔다. 팟캐스트나 유튜브 채널의 의제 스펙트럼은 진보 계열에선 분배·환경·성평등으로, 보수에선 온건·시장·반공 보수로 넓다. 그러나 다변화된 뉴스가 공론화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대중은 새 저널리즘이 맞춤식으로 내놓은 뉴스 상품을 구매하며 본인의 지향에 맞는 의제만을 소비하게 된다. 의제마저도 상품화되는 것이다. 공론화의 필수 전제는 서로 다른 가치끼리의 충돌이다. 공통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소비하는 의제는 공론이 아닌 ‘자폐적 소통’에 머물게 된다.
의제는 공론으로 이어져 성숙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때 소임을 다하고 해소된다. 그러나 자폐적 소통 속 존속된 의제는 곧잘 음모론으로 숙성된다. 가령 한 극우 유튜브 채널의 전직 대통령 의혹 반박 영상은 이미 사법 절차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대선 불복 여론과 탄핵 음모론을 키우고 있다. 사회적 합의 부재와 음모론의 숙성은 사회 갈등의 만연으로 귀결된다. 이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사회 통합에 진력할 책임이 있는 공영방송에 대한 비난을 키운다. KBS가 의제의 상품화를 극복하고 자폐적 소통을 공론으로 바꿔 놔야할 이유다.
팩트체킹 등 정확성을 강화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아무리 가짜에 의한 의제라도 그 의제의 소비엔 시민 개개의 지향이 담겨있다. 단순 진위 판별에만 매달리면 ‘팩트 폭력’이 돼 KBS란 공론장에 더욱 거리감을 가질 수 있다. ‘시민들과 함께하는 어젠다 빌딩’에 주력해 공론의 효능감을 느끼도록 해야한다. 그간 언론은 소수 이해당사자만 포괄하는 단일 프레임으로 뉴스를 보도했다. 특히 정치 뉴스는 여야가 주연, 시민은 카메오였다. 시민은 세팅된 의제의 수동적 관찰자에 머물렀다. KBS는 다각적 프레임으로 의제와 시민 간 접점을 최대한 찾아내 보도에 반영해야 한다. 예컨대 영국 BBC의 시민 인터뷰는 단순한 길거리에서 벗어나 헬스클럽·요양원·농어촌 등 각지에서 이뤄진다. 사안을 다각도로 다루기에 그만큼 다양한 시민 구성을 반영하려 하는 것이다. KBS가 의제와 시민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시민의 목소리를 담을 때, 시민들은 소외감 대신 의제를 같이 키워간다는 효능감을 느낄 것이다.
나아가 시민과 키워간 의제를 꾸준히 관리하는 ‘어젠다 키핑’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보도라도 한두 번에 그치면 공론의 효능감은 지속될 수 없다. 시민과 함께 만든 의제가 정치·제도의 변화까지 일궈내는 모습을 끝까지 추적해 온전한 효능감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시민의 일반의지를 대표하는 공영방송만이 파편화된 이해를 떠난 건강한 자극을 정치·제도권에 줄 수 있다. 시민과 함께 의제를 키우고 사회 변화를 이끄는 공론의 효능감이 우리 사회의 자폐적 소통을 멈추고 사회 통합이란 KBS의 의무를 달성케 할 것이다.
9.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세대가 혐오의 대상이 돼 가고 있다. 혐오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근본 원인과 해법을 논하시오.
일본엔 ‘부라쿠’라 불리는 공동체가 있다. 400여 개 남짓한 부라쿠엔 300만 명 정도의 부라쿠민이 산다. 부라쿠민들은 과거부터 히닝(非人)으로 멸칭되며 대대로 천대 받고 있다. 여전히 취업·결혼 등 사회문화 분야에서 암묵적인 부라쿠민 천대가 지속된다. 부라쿠민의 탄생은 일왕 신성화를 위한 정치적 작업과 관계있었다. 일본 사회엔 인간이 아닌 인간(非人)이 있는데, 인간보다 못난 집단은 부라쿠에서 저열하게 살아가며, 인간보다 고귀한 일왕 가문은 사회를 군림할 정당성이 있다는 거다. 이는 권력이 가진 ‘구분 짓기’의 속성을 짐작케 한다. ‘나’보다 못난 집단을 규정하고 구분해내는 힘은 곧 권력이 된다.
어느덧 한국 사회에서 구분 짓기는 ‘일상화’돼 있다. 한국은 무한 경쟁 사회다. 삶의 단계 별로 언제나 각각의 경쟁이 자리한다. 치열한 대학 입시가 시작이다. 학벌은 곧 사회적 권력을 넣는 1차적 수단이다. 부모들은 기를 쓰고 자녀를 닦달해 좋은 대학에 보내려 한다. 승자는 ‘하늘(SKY)’로 떠받들어지고, 패배자는 ‘지잡대생’으로 구분 지음된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입시를 넘어 직장·주거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경쟁이 스며들게 했다. 안정된 직장 생활·내 집 마련이란 당연한 생활의 권리는 능력과 자본 경쟁을 통한 쟁취의 대상으로 변화했다. 패배자에게 주어지는 건 조롱 섞인 구분 지음이다. 임대주택거주자를 비하하는 ‘휴거(휴먼시아 거지)’란 표현이 최근 초등생에게까지 성행한다는 건 만연해진 삶의 경쟁과 일상화된 구분 짓기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 전 방위적 혐오 현상도 일상화된 구분 짓기와 무관치 않다. 신자유주의 버블이 꺼진 지 10년 이래 저성장·양극화는 뉴노멀이 됐다. 학벌 경쟁에 허덕인 청년들은 이제 10%의 청년 실업의 벽에 마주한다. 애써 취업해도 평균 연봉은 몇 년째 제자리인 3000여만 원이다. 반면 평균 서울 집값은 8억에 달한다.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서울 집 한 채 마련에 20~30년이 족히 걸린다. 성공 사다리의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평균적 다수는 ‘루저’로 전락한다. 여기서 전 방위적 혐오는 출발한다. 이제 누구나 자기도 구분 지음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패배자로서 구분 지음 당하느니 어떻게든 자신보다 못한 자를 찾아내 구분 짓기를 시도한다. 나이·성정체성 등 생래적 지위에 선을 긋고 혐오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남성·이성애자·젊음은 경쟁으로 얻을 필요 없는 귀속지위이기에 구분 짓기의 손쉬운 근거가 된다.
성공 사다리의 문을 다시 넓히려는 노력이 전 방위적 혐오를 일시적으로 완화할 수도 있다. 애써 구분 지을 대상을 찾아 나서기보단 개인의 성공을 위해 다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경쟁이 사회의 주요 원리로 남아있는 한, 경쟁에 내재한 구분 짓기란 본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 해결은 경쟁 사회의 폐해를 완화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패배자가 되는 불안을 덜어주는 게 첫걸음이다. 실패해도 괜찮을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예컨대 사회 안전망이 확립된 북유럽의 청년들은 정치 참여가 매우 활발하다. 스웨덴 정치가의 절반이 청년 당원 출신이며 30대 청년 장관도 나왔다. 든든한 사회 안전망 덕에 청년의 에너지가 자기비하나 혐오로 이어지지 않고 사회를 바꿔보려는 역동적 의지로 발현되는 거다.
나아가 사회 전 영역에 내면화된 경쟁 원리를 걷어내야 한다. 입시 경쟁의 완화가 작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성적 줄 세우기보다는 얼마나 잘 협동하는 인재인지 가려내는 평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쟁의 승리보다 타인과의 조화가 사회적 권력 배분의 기준이 될 때 권력의 작용은 구분 짓기가 아닌 ‘포함하기’가 될 것이다. 누구나 패배해도 괜찮은 사회, 끊임없이 타인과의 조화를 고민하는 사회가 될 때 우리 사회의 만연한 혐오와 구분 짓기도 사라질 것이다.
10. 부동산 문제가 고질병처럼 해결되지 않는 근본원인과 해법에 대해 논하라.
한국 사회에서 주택은 거주지 이상의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흔히 쓰이는 ‘내 집 마련의 꿈’이란 표현에서 보이듯, 주택은 이미 간절한 성취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국민적 여망에 힘입어 한국의 자가보유율은 매년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선진국 수준인 60%대에 올라섰다. “아파트 가격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자가보유율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작년 국토교통부 장관 임명장을 수여하며 대통령이 한 말이다. 내 집 마련이 국민적 여망인 상황에서 자연스레 국가 주택 철학도 ‘내 집 마련 사회 구현’이 됐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내 집 마련의 꿈을 소박한 꿈으로만 바라보기엔 무리가 있다. 주택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요긴한 ‘투기 자산’이 됐다. 지난 20년간 이른바 똘똘한 한 채로 불리는 강남의 주택 가격은 10~20배가 넘게 올랐다. 서울과 지방 6대 광역시의 평균 집값이 각각 2.3배, 1.6배 오른 것과 대조적이다. 언론에 연일 “강남 불패·부동산 불패 신화”가 대서특필된다. 이에 ‘더 늦기 전에 노른자 땅에 집 한 채 마련해놔야 한다’는 투기 심리는 굳어진다.
주택 소유가 투기로 전락한 데는 내 집 마련 사회 철학 속 ‘소유 중심주의’가 자리했다. 부동산 정책엔 딜레마가 존재한다. 모두가 주택을 구매할 땐 집값 안정을 원하지만 주택 소유자가 되고 나선 집값이 오르길 원한다. 이전 정부가 택한 절충안은 구매 희망자를 ‘예비’ 소유자로 상정해 모두를 소유자로 아우르는 것이었다. LTV·DTI 규제를 완화해 대출을 쉽게 하고 양도세 완화로 매매를 활성화시켜 주택 가격을 끌어올리는 식이었다. 빚이 불어나더라도 주택 가격은 오를 것이기에 구매자는 예비 소유자의 입장에서 만족할 수 있었다. 중심을 소유자에 놓는 부동산 정책은 투기 심리를 꺾기보단 투기 심리를 추종한 것이다.
부동산 문제를 단순히 집값 안정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해법은 간단하다. 대출 규제를 엄격화해 수요를 억제하고 가격을 내리면 된다. 그러나 부동산 문제는 단순히 주택 시장의 문제가 아니다. 소유 중심주의적 부동산 정책의 기저엔 알맹이 없는 자산효과(Wealth Effect)를 노린 ‘부동산 버블 경제’가 있다. 자산효과는 자산 가치가 커질수록 소비·투자도 진작되는 현상이다. MB정부가 재건축 규제를 풀어주고, 박근혜 정부 경제부총리가 “빚내서 집사라”며 수요를 적극 장려한 건 단기간의 손쉬운 자산효과를 노린 측면이 있다. 문제는 부동산에 의한 내실 없는 자산효과가 국가 경제의 불확실성을 급격히 키웠다는 거다. 10년만에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60%대에서 90%대로 급격히 올랐다. 가계부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동산의 가치가 폭락하면 한국 가계 경제도 치명타를 입는다. 수요 활성화든, 수요 억제든 ‘소유’를 쉽게 만들어준다는 소유 중심주의적 발상은 한계가 있고 위험성이 크다.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법은 부동산 정책의 소유 중심주의에서 ‘거주 중심주의’로의 전환이다. MB정부 때 실패한 보금자리주택을 반면교사 삼아, 신규 분양 대신 공공주택 임대를 확대하는 게 구체적 방법이다. 이때 국가가 재건축 주택을 시세대로 매입하고 자산 이전 시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장치로 안정적으로 거주 중심 주택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나아가 부동산 자산효과에 기대는 한국 경제의 불안정한 체질 개선이 요청된다. 이전처럼 토건 사업·집값 상승을 통한 단기적 자산효과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산업 투자와 기업 성장으로 이뤄지는 내실 있는 자산효과를 뚝심 있게 추구해야한다. 국가 경제의 안정성이 확립돼야 기존 부동산 정책으로의 구심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제 ‘내 집 마련’이 아닌 ‘내 집을 마련할 필요가 없는 사회 구현’이 국가의 새로운 주택 철학이 돼야 한다.
11. 언론의 독립성 제고 방안을 논해라 (mbc 대비)
작년 말 자유한국당 대표의 뇌물 수수 재판의 대법 판결이 나왔다. 자유한국당은 무죄 선고를 자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선 당시 첨예하게 벌어지던 야당 내 갈등에 질문이 쏟아졌다. 홍준표 대표는 “이 좋은 날에 왜 그런 질문을 하나”라며 답변을 회피했고 “질문거리가 돼야 답변을 하지”라며 기자들에게 면박을 줬다. 기자들도 기가 눌렸는지 홍대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질문을 멈춰버렸다. ‘질문’이라는 언론의 본령이 마비된 순간이었다. 언론의 독립성은 다름 아닌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가’에 있다. 위 사례처럼 유력 취재원에게 언론이 꼼짝하지 못하고 종속돼 있을 때 언론은 독립성을 잃는다.
이른바 ‘발표 저널리즘’이 문제다. 발표 저널리즘은 유력 취재원들이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어 기사를 작성하는 보도 관행을 말한다. 현재 언론은 열심히 발품 판 취재보단 유력자가 흘려주는 정보에 기대는 관행이 만연하다. 발표 저널리즘은 필연적으로 권언유착을 낳는다. 유력자들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으로 기사를 쓰도록 특종을 당근으로 제시한다. 만약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기사를 낼 경우 해당 언론을 특종에서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채찍을 가한다. 경쟁지 기자가 다 아는 정보를 자신만 모르는 건 속보 경쟁에 시달리는 기자들에게 치명적이다. 때문에 기자들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를 검열한다. 지난 세월호 사건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실언을 진보 언론들이 그대로 보도하자,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이들에 출입정지 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발표 저널리즘이 국민의 알권리보다 권력자 심기경호를 우선으로 만드는 거다.
독립성을 제고하기 위해 MBC는 발표 저널리즘을 지양하고 새로운 저널리즘을 지향해야 한다. 새로운 저널리즘이란 ‘이슈 저널리즘’이다. 이슈 저널리즘은 단신성 속보, 특종 경쟁을 지양하고 기획 기사 중심으로 깊이 있는 정보를 전해 이슈를 만들어가는 보도다.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에 충실하자는 보도 문화다. 이슈 저널리즘은 속보 경쟁에 매달리지 않아도 돼 권력의 눈치를 볼 필요가 줄어 기자들에게 질문할 자유를 키워준다. 나아가 MBC가 제기하는 의제에 정치권이 집중하게 만들어 여론에 빠르게 대응해가는 정치 문화를 조성해갈 수 있다. 취재력과 자본이 일천한 군소 인터넷 언론은 발표 저널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반면 MBC는 공영방송으로서 재정이 안정적이고 우수한 취재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공영방송이 먼저 이슈 저널리즘을 이끌어야 한다.
선결돼야 할 것은 MBC의 신뢰성 회복이다. 국민의 신뢰와 관심이 모여 있을 때 기자의 질문은 힘을 얻는다. 국민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는 질문은 유력자에게 우스울 뿐이다. 그간 MBC는 지배 구조의 여권 편향성으로 친정부 방송의 오명을 써야 했다. 정치권의 입김에 좌우되는 현행 지배 구조를 바꿔 여야를 막론해 정치권을 비판할 수 있다는 신뢰를 얻어야 한다. BBC 이사회처럼 내부 추천 인사들을 이사회에 등용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미국 백악관에 50년 이상 출입한 헬렌 토마스는 말했다.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될 수 있다.” 발표 저널리즘을 청산하고 이슈 저널리즘과 지배 구조 개편을 통해 신뢰를 회복할 때 MBC의 질문은 날카로워지고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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