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팔마문학회 10년사
- 꾸준한 발걸음, 착실한 전진
순천팔마문학회가 이 고장 순천을 탯자리로 하여 태어난 지 올해로 벌써 열 돌을 맞이하였다.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팔마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필자로서는 대단히 감회가 깊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 팔마가 걸어온 10개 성상 동안에 어찌 크고 작은 변화가 없었겠는가. 창립 10주년을 자축하면서, 그 동안의 발자취를 적어 팔마문학회의 무궁한 앞날을 기약하고 훗날을 위한 역사적 자료로 삼고자 한다.
출범! 팔마문학회
순천팔마문학회가 태동한 것은 1992년 6월 18일이다. 이 날 문학회 결성의 뜻을 품고 필자를 중심으로 한 창립회원들이 공식적인 첫 모임을 가졌다.
지금은 순천 지역에 문학 동아리가 여럿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순천문학》을 발행하는 ‘순천문학동우회’가 유일하였다. 기성 문학 동아리에 편입하여 활동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필자는 좀더 새로운 체제와 방식으로 문학 활동을 펼쳐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새로운 문학회 창립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천 지역의 문학에 열의가 있는 교사들의 의사를 타진, 동참의 뜻을 가진 분들을 규합하였다.
창립에 앞서 ‘팔마문학회 발기문’이 작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질문명이 우상으로 떠받들어지는 오늘날 인간은 자아상실의 위기에 놓여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문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쓴 한 줄의 글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때로 자신을 절망케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메마른 때일수록 문학은 그 존재 이유와 명분을 뚜렷이 갖는다고 봅니다. 한 줄의 글을 쓰고 한 편의 작품을 읽는 문학 행위를 통해 우리는 잃어가는 것들을 다시 보게 되고, 자신과 이웃의 모습을 새로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마비의 고장, 이 곳 순천에 삶터를 둔 이들로서 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끼리 손을 잡고 문학동인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 고장의 상징인 팔마정신을 이어받는 뜻에서 ‘팔마문학회’(가칭)로 이름하여, 함께 오늘을 생각하고 내일을 고민하면서 문학적 역량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본 문학모임에서 주로 하게 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o 월 1회 모임, 문학에 관한 논의 및 정보 교환
o 연 2회 정도 문학기행
o 연 1회 동인지 발간
평소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고, 글쓰기에 열중해보고 싶은 분은 뜻을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패기 있고 집념 있는 동인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1992. 5월 일. 순천팔마문학회발기인 일동
이 문안은 문학회의 설립 취지와 활동 방법을 포괄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필자가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다량 인쇄하여 순천 시내 각급 학교의 문예 활동에 열의를 가진 교사들에게 발송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분들의 동참 의사를 타진하고, 아울러 팔마문학회의 역사적인 창립을 지역사회에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는 구실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침내 문학 활동의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첫 모임을 갖게 되었다.
팔마문학회 일지에 기록된 첫 모임 날의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시 : 1992. 6. 18.
모임 장소 : 고려삼계탕(남교오거리 민속다방 옆)
참석자 : 길석규․김영석․김성규․이효복․장병호(5인)
<안건> 1. 회의 명칭 : 순천팔마문학회
2. 임원 : 당분간 총무 체제(총무 : 장병호)
3. 운영방법 : ① 창작발표 : 회원 홀짝제로 창작품(시․수필)을 복사해 옴
② 독서토론 : 매월 토론자를 선정, 감상문을 써와서 함께 논의
4. 회비 : 월 1만원
모임의 명칭 ‘순천팔마문학회’는 이미 발기문에서 제시된 ‘가칭’을 확정한 것으로, 이 고장 순천을 대표하는 명칭인 ‘팔마’를 통해 지역적 연고를 드러내면서, 고려시대 청백리 최석 부사의 행적을 본받아 그와 같은 깨끗한 문학정신을 갖고 문학에 전념하자는 뜻을 담고 부여하였다. 당시 모임의 명칭을 거론할 때, 남들이 전혀 쓰지 않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자는 의견도 제시되었으나, 더 이상 논의되지 못하였다.
이 날 첫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다섯 명인데, 뒤이어 양원옥, 신충식, 정양주, 조수향 씨 등이 동참의사를 밝혀왔다. 그래서 총 9명을 창립회원으로 하여 지역신문에 취지문과 함께 창립 소식을 전했다. 팔마문학회 창립소식은 《순천신문》(1992.7.6.)을 비롯하여, 《전남동부신문》(1992.7.8.), 《광주매일》(1992.9.30.)과, 지역 생활정보신문인 《살림꾼》과 《봉화로》 등에 게재되었다.
이 가운데 《순천신문》에 실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팔마문학회」 창립
순천과 인근지역에 살고 있는 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지난 달 18일 문학모임을 창립하여 주변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다.
순천의 상징인 팔마정신을 문학적으로 이어받자는 뜻에서 ‘팔마문학회’라 칭한 이 모임은 매월 1회씩 월례회를 갖고 작품 발표와 독서토론을 통해 문학적 역량을 키워나갈 계획이다. 또한 연2회의 문학기행과 연 1회의 동인지 발간도 예정하고 있다.
특히 이 모임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자아상실의 위기에 처해 잃어가는 인간 본연의, 정신을 되찾는 길의 하나가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이 모임을 통해 문학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창작의욕을 고취하여 문학적 역량을 키워나가자는 데 설립취지를 갖고 있다.
현재 회원은 길석규 씨(순천고 교사)를 비롯 9인으로 되어 있는데, 문학에 뜻을 둔 이들의 더 많은 참여를 바라고 있다.(연락처 : 744-1873)
당시의 창립회원들 가운데 지금 활동을 쉬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그 때만 해도 문학에 대한 열의와 포부는 모두가 한 아름씩이었다.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문학회에서 변함없이 행해오고 있는 것은 ‘창작 발표’와 ‘독서토론’이다. 창작품 감상은 회원들이 달마다 번갈아 창작품을 써와서 함께 감상하고 느낌을 주고받는 합평회를 말한다. 그리고 독서토론이란 매월 모임 때 ‘이 달의 책’이라고 하여 다음달에 읽을 책을 선정하고, 그 책에 대한 감상문을 회원 중의 한 사람이 써와서 발표한 다음, 그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것이다.
누에가 뽕을 많이 먹어야 튼튼한 실을 많이 토해내듯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서는 창작과 독서를 겸비하는 뜻에서 매월 양서를 읽는 일에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1995년 1월부터는 한 권으로 줄어들었지만, 초창기 2년 4개월 동안만 해도 매월 시집과 소설집을 각각 한 권씩 선정해 읽을 정도로 독서열이 높았다.
회원 확보 및 회비
창립 첫해는 회원수가 많지 않아서 아무래도 모임에 활기가 부족했다. 모임이 활성화되려면 회원수가 적어도 20여 명은 되어야 하는데, 열 명 남짓한 회원 가운데 그나마 불참 회원까지 생기고 보면 분위기 조성이나 경비 마련에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창립 다음해부터 20명의 회원 확보를 목표로 지역 신문을 통해 팔마문학회를 홍보하는 한편, 생활정보지에 신입회원 모집 광고를 하였다. 다음은 1993년 2월 생활정보지 《살림꾼》에 실렸던 회원 모집 광고이다.
팔마문학회 회원 모집
팔마문학회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오니, 많은 연락을 바랍니다.
① 월1회 창작발표 및 독서토론 ② 연1회 문학기행
③ 연1회 작품집 출간 * 문의 : (0661)744-1873
이 모집광고를 보고 순천과 광양 지역의 아마추어 작가들이 문학회에 많이 들어왔고, 비로소 1993년 3월에 이르러 20명의 회원이 확보되었다.
그러나 회원 각자의 문학에 대한 소양이나 열의는 천차만별이었다. 열심히 참여하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걸어놓고 활동에 등한한 회원들도 많았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분들은 자연스레 정리가 되었고, 열의가 있는 회원들만 끝까지 남게 되었다.
창립 때부터 우리 문학회는 입회하는 데 까다로움이 없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이었다. 다른 문학동아리처럼 문단에 등단했거나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에 한하여 입회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열정을 지닌 사람은 희망할 경우 언제든지 받아들인 것이다. 탈퇴 또한 자유롭다. 누구든 활동하지 못할 사유가 발생했을 때는 부담없이 탈퇴할 수 있다. 문학활동이란 영리를 도모하는 일도 아니고, 억지로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인만큼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문학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문을 열어 둔 것이다. 회원의 입회와 탈퇴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임이 잘 운영되려면 회비 출납이 원활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모임이건 총무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모임의 월례회비는 처음에는 1만원이었는데, 5년 후인 1997년 3월부터 1만 5천원으로 인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년 전의 회비가 1만원이었다면 그동안의 물가상승률을 생각할 때 지금은 2만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월회비 2만원은 회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기 쉽다는 여론에 따라 아직껏 1만 5천원의 선에 묶어놓고 있다.
회비는 대개 문학기행 경비, 회원의 애경사 축조의금, 회원 등단 기념패비, 회원 식사비 등으로 지출되며, 특히 회원 작품집 발간에 가장 크게 쓰이고 있다.
문학기행
창립 1주년이 되던 1993년 6월 문학기행을 시도했다. 매월 실내 모임만 갖는 것도 따분한 일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쯤은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선배 문인들의 발자취를 찾아보자는 뜻에서 기획한 것이었다. 창립 당시의 계획은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행사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경비 문제로 인해 한 차례로 줄였다.
참가 인원은 회원 가족 6명을 포함한 21명으로, 12인승 봉고차 한 대와 승용차 2대에 나눠 타고 강진의 영랑생가와 다산초당을 둘러보았다. 마침 그 때는 유홍준의 「문화운산답사기」가 출간되어 인기가 오르고 있을 때인지라, 그 책을 읽고 ‘남도답사 일번지’로 명명한 강진 땅을 밟으니, 감회가 깊었다.
그 뒤 문학기행은 연례행사로 이어져서 해마다 6월이면 문학기행을 하는 달로 못이 박혀져, 한 해도 행사를 거르는 일이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첫 문학기행 때 ‘팔마문학회 문학기행’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하나 제작하였는데, 일부러 날짜를 새기지 않았으므로 해마다 지참하고 다니면서 기념사진용으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동안 회원들이 문학기행을 다녀온 지역은 93년의 강진에 이어 구례 운조루․하동 칠불사(94년), 고창 선운사․모양성(95년), 해남 녹우당․대흥사(96년), 진도 운림산방․남도석성(97년), 전부 부안 변산반도(98년), 벌교 태백산맥 현장․보성다원(99년), 지리산 연곡사․하동 평사리(2000년), 남원 혼불 마을․지리산 실상사(2001년), 경남 통영(2002년) 등지이다.
우리 문학회의 문학기행은 회원만이 아니라 회원 가족과 친지의 동반을 적극 환영하는 까닭에 이 날은 자연히 잔칫날과 같은 흥겨운 분위기를 띤다. 처음에는 봉고차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점차 모임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형 관광버스를 이용했다. 문학기행의 참가 인원은 적을 때는 99년 16명일 때도 있었으나, 많을 때는 94년에는 39명, 95년 38명이 참가하였고, 98년에는 48명의 참가로 역대 최다 인원을 기록하였다.
팔마의 문학기행은 유흥 위주의 관광행사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문학관련 장소를 기행지로 선정하고 있다. 아울러 치밀한 시간 계획과 자료 준비를 통해 회원과 가족들이 그 지역에 가서 문학적 향취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특히 진도(이현승 시인)와 부안(김민성 시인), 지리산(이원규 시인), 통영(최정규 시인)을 갔을 때는 그 지역 토박이 문인의 안내를 받아 문학기행의 의의를 살리고자 애썼다. 그밖에도 차량 이동 중에는 각종 퀴즈대회와 사행시 대회를 통해 상품 증정을 하면서, 즐겁고 유익한 행사로 이끌고 있다.
모임 장소
팔마문학회 창립 초기에는 모임장소가 마땅치 않아 장소 물색으로 애를 많이 먹었다. 처음 창립모임을 ‘고려 삼계탕’이라는 식당에서 가졌다. 순천 시내 남교오거리에서 시청으로 내려가는 길의 민속다방 옆에 있는 식당이었다. 저녁에 모이는지라 어차피 식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식당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손님들이 많이 끓는 곳은 소란한지라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다.
이곳저곳 찾아다닌 결과, 남교오거리 근처의 궁전예식장 지하 식당이 결혼식이 없는 날에는 조용하므로 그곳을 이용하였다. 그러다 1993년 1월부터는 순천시민회관 뒤에 있는 ‘덕진회관’이란 한식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다시 4월부터는 맘모스극장에서 시민다리로 가는 길옆에 ‘신천지’라는 중화요리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2층에 둥근 탁자가 놓인 조용한 방이 있어 모임하기에 알맞았다. 그래서 1994년 10월 모임까지 20개월 가까이 그 곳에서 모임을 가졌다. 식사는 물론 중화요리였다. 이같은 떠돌이 생활이 번거로울 때는 ‘우리 문학회의 전용회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김종주 회원이 연향동 부영아파트에 입주하더니, 사모님이 운영하는 영어교습학원 공간을 팔마 회원들을 위해 기꺼이 개방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1994년 11월부터 연향동 부영아파트를 이용하였다. 그러다가 김종주 회원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문학 활동을 중단하면서 더 이상 그 곳을 쓸 수 없게 되었다. 1995년 9월까지 10개월 동안의 모임을 끝으로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 때 다행히 장애선 회원이 운영하는 대우한문학원을 빌려 주어서, 1996년 4월부터는 또 그 곳을 모임장소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장애선 회원 역시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옮겨가게 되어 계속 공간을 빌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1998년 4월까지 만 2년 동안 장애선 회원의 신세를 많이 졌다.
그 다음으로 사용한 것은 순천시립도서관 연향분관 세미나실(1998.5~1998.9.)이었다. 한여름에 시원한 냉방기가 가동되는 매우 쾌적한 공간이었는데, 매월 사용할 때마다 관장에게 사용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모임 공간이 아쉬운 판에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는데, 5개월째가 되던 어느 날 도서관 관계자로부터 대여 불가의 통고를 받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장소를 물색한 끝에, 연향동 칠보당 2층에 있는 전국교직원노동종합 순천지회 사무실(1998.12.~199.4.)을 빌릴 수 있었다. 이 때 전교조 사무실 관리자인 금당고의 김길희 선생님이 팔마 모임을 위하여 여러모로 편리를 많이 봐주었다.
이렇게 떠돌이 살림을 하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시내 남내동의 ‘중앙서점’이 연향동 조은프라자 뒤쪽으로 신축이전을 하면서, 1층과 2층은 도서 매장으로 쓰고, 3층은 세미나실을 만들어 순천시민에게 무상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000년 5월부터 지금까지 내리 3년째 중앙서점을 이용하고 있다. 순천 문화의 진흥을 위해 특단의 배려를 한 중앙서점 박병화 사장의 큰 뜻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우리 문학회는 10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모임 장소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남모를 설움도 많이 겪었다. 다행히 중앙서점의 고마운 배려로 인해 안정을 되찾았고, 앞으로 당분간은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발전적으로 생각한다면 반드시 ‘팔마문학회관’이 마련되어서 이 곳에서 모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언젠가 그러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회장 선출과 팔마 규범
팔마문학회는 처음에 회장을 뽑지 않고 총무 대행 체제로 출발하여 2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다 1994년 3월 정기총회에서 초대 회장이 선출되었다. 현재까지 회장은 5대까지 선출되었는데, 역대 팔마문학회를 이끌어온 임원진을 다음과 같다.
초대 회장 장병호, 총무 이채인이 1994년 3월부터 1996년 2월까지 일했고, 1996년 3월 제2대 회장 정양주, 총무 장애선이 1998년 2월까지 회를 이끌었으며, 1998년 3월 제3대 회장으로 장병호가 다시 선출되어, 총무 이삼례와 함께 2002년 2월까지 일했고, 2000년 3월 제4대 회장 최순애, 총무 김계선이 선출되어 2002년 2월까지 팔마를 위해 봉사하였다. 그리고 문학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올해 2002년 3월 제5대 회장 박정남, 총무 송봉애가 선출되어 열 살의 나이에 걸맞게 착실히 회를 운영해가고 있다.
‘팔마문학회 규범’ 제9조 6항에 따르면 “모든 임원의 임기는 1년이며 연임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껏 우리 회의 임원들은 대개 1년의 임기를 채운 뒤, 정기총회에서 회원들의 의결에 따라 1년 연임하여, 모두 2년씩 회를 이끌어 왔다.
이 팔마문학회 규범은 1994년 당시 염장섭 회원이 기초를 한 것으로, 총 6장 15조, 부칙 4조로 되어 있다. 1995년의 회원 작품집인 제2호 『내가 소망하는 삶』에 처음 실렸고, 1999년 제6호 『바다바라기』에 두 번 째 실린 바 있다. 현재 우리 팔마문학회의 모든 활동은 이 규범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팔마통신
팔마문학회의 열 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10년의 세월을 채웠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매월 빠짐없이 모임을 가져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 한 달도 허송하는 일이 없이 각자 써온 작품을 함께 감상하고 토론하고, 또 선정한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10년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그만큼 지나온 그 세월이 값지고 의미가 깊은 것이다.
모임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매월 모임의 날짜와 시각, 장소를 알려주는 모임 안내장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모임 안내장은 모임 일정을 회원들에게 알려줄 뿐만 아니라, 모임의 제반 활동 소식과 회원 동정을 홍보하는 알림장 역할을 한다. 이것을 ‘팔마문학통신’이라는 명칭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회원의 가정으로 발송해왔다.
이 통신문을 일일이 발송하는 일은 꽤 손이 많이 간다. 다음달에 계획된 모임 일정과 이번 달 모임 내용을 작성하는 일, 그것을 복사하여 봉투에 담는 일, 겉봉에다 받는 이의 주소를 쓰거나 오려 붙이는 일, 또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 일 따위가 여간 번거롭지가 않다. 더구나 이 일을 한두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일년 열두 달 계속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므로 어지간한 봉사정신과 책임감을 갖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이 일은 그동안 대개 총무들이 맡아서 해왔다. 회원들은 이 팔마통신을 받을 때마다 보내는 이의 노고와 정성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작품집 발간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거니와, 문학회 활동 또한 동인작품집으로 그 성과가 드러난다. 팔마의 회원작품집은 창립 첫해에는 출간하지 못했다. 회원수의 부족으로 인해 작품집 발간 경비가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1993년이 되어서야 회원수가 늘어나고 회비도 웬만큼 적립되어 비로소 작품집을 발간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그해 연말에 작품을 모아 창간호를 펴낸 것이 1994년 1월 중순이었다. 책의 제목은 『한 줄기 밝은 햇살로』로 정했고, 출판사는 ‘글이랑’이었다. 500부를 발간하였고, 인쇄비는 모두 129만원이 들었다.
창간호가 배부된 1994년 1월 21일의 모임 소식을 기록한 팔마통신의 내용을 일부 옮겨 보자.
희망찬 갑술년을 시작하는 이번 신년 모임은 김종주․이효복․장병호․정양주․양준석․이채인․오명주․황선주․김상복․황미숙․고영심․전영희․이형근․이규황․조윤주 등 15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희망찬 자축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날 작품집 창간호 『한 줄기 밝은 햇살로』와 김종주 시집 『울음을 울음으로 통역해 주세요』가 출간되어서 간단한 떡잔치를 하였습니다. 작품집 창간은 지난 92년 창립 이후 본 팔마문학회의 가장 큰 숙원을 이룬 것으로서 팔마문학회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쾌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더욱 분발하여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자기연마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작품집 창간호가 어느덧 해를 거듭하여 오늘날 제10호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생각할수록 팔마가 흔들림이 없이 힘찬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껍기 그지없다.
이 작품집은 처음에는 오로지 회원의 회비로 충당했는데, 얼마 후부터는 문예진흥기금의 지원을 100만원 또는 150만원씩 받게 되어 한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제5호 <저 환한 은행잎>을 펴낼 때 순천시청으로부터 120만원 보조를 받았고, 그 이후인 제6호 <바다바라기>부터는 전라남도 문예진흥기금으로부터 150만원, 제7호는 100만원, 제8호는 190만원, 제9호는 100만원을 지원 받은 바 있다.
문예진흥기금은 매년 가을에 다음해에 지원받고자 하는 내용을 적어 신청하는데, 전라남도청 문화예술과에서 심의를 거쳐 그 결과를 새해 3월경에 동아리별로 통보해준다. 그리고 동아리에서 책을 펴내기에 앞서 지원금의 지급을 요구하면 통장으로 금액을 보내준다. 동아리에서는 책을 발행한 다음, 지원금 집행결과를 정산하여 증빙서류와 함께 전라남도청 문화예술과로 정산보고서를 보내면 된다.
작품집의 편집
그동안 팔마 작품집의 편집은 장병호 회원이 맡아왔고, 인쇄 또한 광주의 이효복 회원이 운영하는 출판사 ‘글이랑’에서 줄곧 수고를 하였다. 팔마 작품집은 편집에서 다른 동인지와 차별을 많이 두고자 애썼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 보자.
첫째로, 매호마다 책의 제목을 달리하고 있다.
대개 동인지의 제목은 그 동아리 명칭이나 지역명을 따라 ‘전남문학’, ‘여수문학’, ‘순천문학’ 따위로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 문학회는 그와 같은 천편일률적인 방식을 벗어나, 그 해 작품집에 실린 회원들의 작품 가운데서 적당한 제목 하나를 골라 표제로 삼기로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호의 개성을 살리고 독자성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창간호의 표제 <한 줄기 밝은 햇살로>는 양준석 회원의 시 제목이었다. 특별히 이 제목을 선택한 것은 팔마의 문학 활동이 이 고장 순천의 문화 발전에 ‘한 줄기 밝은 햇살’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집의 명칭과 표제작의 지은이 및 그 장르는 다음과 같다.
제2호 『내가 소망하는 삶은』(김상복 수필), 제3호 『내일은 맑음』(이한나 시), 제4호 『일과 사랑』(장세주 시), 제5호 『저 환한 은행잎』(정양주 시), 제6호 『바다바라기』(이삼례 시), 제7호 『길에 들어서기 위한 준비』(조태섭 시), 제8호 『평행선』(김계선 시), 제9호 『그림자 지우기』(김혜련 소설), 제10호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장병호 수필)
둘째로, ‘팔마서평’을 두어, 독서토론의 발표물을 싣고 있다.
이것은 여타 동인지가 대개 창작물만 싣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색다른 기획임이라 할 수 있다. 이 ‘팔마서평’에 회원들의 서평을 몇 편씩 꾸준히 실음으로써 회원들의 독서감상안을 기르고, 독서 의욕을 고취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이것은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셋째로, 기획특집 ‘순천지역 향토문화 탐방’의 연재이다.
지역문학회의 기능은 문학활동을 통해 문화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지역사회를 문화가 꽃피는 넉넉한 고장으로 만들어가는 데 일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원들이 좋은 문학작품을 창작하여 지역민들에게 문학의 향기를 전해주는 한편, 지역문화재를 발굴, 재조명하여 사라져가는 지역사회의 문화의식을 일깨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팔마에서는 순천지역의 향토문화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1996년 제4호 때부터 ‘팔마비’(청백리의 깨끗한 정신)의 탐방을 시작으로, 1997년 제5호 ‘임청대’(유배가사의 산실), 1998년 제6호 ‘순천 왜성’(정유재란의 격전지), 1999년 제7호 ‘연자루’(순천문화의 옛 요람), 2000년 제8호 ‘순천 향교’(순천교육의 발상지), 2002년 제9호 ‘정충사’(국토수호에 바친 충의의 얼)를 탐방하고, 그 역사적 의의와 보전 방안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 제시를 하였다.
이 향토문화 탐방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 답사를 여러 차례 하면서 관련 문헌을 두루 찾아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문화 발굴과 재조명은 팔마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는 사명감을 가지고 꾸준히 연재를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몇 년간 더 계속될 것이다.
넷째로, ‘함께 읽는 좋은 글’의 연재도 빼놓을 수 없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읽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한 편씩 싣는 기획이다. 그동안 실린 글은 제6호에 서울대 권영민 교수의 <시를 읽는 사회>, 제7호 수필가 윤오영의 <양잠설>, 제8호 조지훈 시인의 <시의 비밀>, 제9호 소설가 이호철 <문장 수련에 쏟은 정열>, 제10호 소설가 한승원 <글 잘쓰는 천재들의 말은 믿지 마라> 등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가슴에 와 닿는 좋은 글을 옮겨 실음으로써, 문학에 뜻을 둔 이들이 자극을 받고 분발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다섯째, 제목 활자체를 목각체로 하고 있다.
팔마 작품집에서 본문 내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목은 목각체를 쓰고 있다. 이 목각체는 옛날 목판활자를 새길 때의 필체를 본딴 것으로, 현대적인 세련미는 없으나 고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서체이다. 이 활자체에 대한 느낌은 회원의 취향에 따라 각각 다를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책이 명조체를 하는 것과 차별성을 갖기 위해서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여섯째, 회원의 작품과 곁들여 ‘창작수첩’을 싣고 있다.
우리 팔마 작품집은 편집상의 특징이 단조롭지 않고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그냥 회원작품만 몇 편 싣고 만다면 그 만큼 편집하기는 쉬울 것이다. 편집자가 번거로운 일을 감수하지 않으면 책은 그만큼 단조롭고 건조해져 버린다.
팔마 작품집을 좀더 다채로운 읽을거리가 있는 책으로 만들기 위하여, 1999년 제6호부터 회원의 작품 아래에 ‘창작수첩’을 싣고 있다. 이 창작수첩은 평소 자신의 문학관, 글을 쓸 때의 심경 따위를 200자 안팎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 작품이 아닌 작가의 육성을 독자에게 들려주고 자신의 문학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것 또한 앞으로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일곱째, 작품집의 표지 꾸미기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표지는 곧 그 책의 얼굴이요, 첫인상을 결정하는 간판의 구실을 한다. 팔마 작품집의 표지화는 초기에는 한국화를 전공한 양준석 회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 이후로는 여러 화가들의 도움을 번갈아 받았다.
그동안 도움을 준 표지화 작가와 작품명을 밝히면, 제1호 양준석(가족), 제2호 양준석(소나무), 제3호 홍성담(꽃), 제4호 홍성담, 제5호 김덕기(뱀사골의 가을), 제6호 양준석(꿈), 제7호 박문수(겨울 설악), 제8호 서남수(생-99) 제9호 송차자(자연-이미지) 제10호 김용근(순천하일)등이다.
여덟째, 정기구독자 모집제를 운영하고 있다.
문학인구의 저변확대와 발간비 확보를 위한 정기구독자 모집제를 1999년 8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정기구독을 통해 일반인들을 문예 진흥을 위한 후원자가 되도록 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아울러 문인과 독자와의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년 구독회비는 1만원이고, 영구구독은 10만원이다. 현재 정기구독 회원은 모두 55명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팔마 작품집을 알차게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누구든 책을 펼쳤을 때 단조롭게 느끼지 않도록, 좀더 알차고 다채로운 내용으로 독자를 만나기 위해서 사소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썼다. 특히 ‘글이랑’의 이효복 회원이 꼼꼼히 일해준 덕분에 맞춤법이 거의 틀리지 않은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10년 동안 내리 팔마 작품집을 출판해 준 이효복 회원의 우정에 감사 드리고, ‘도서출판 글이랑’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식사당번제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어디서나 의식주는 기본과제이다. 모임을 가질 때 식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팔마 창립 후 3년 동안은 음식점을 빌려 모임을 갖고, 바로 그 장소에서 식사를 했다. 회원의 아파트나 학원에서 모임을 가질 때는 식당에 불러다 먹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2000년 5월부터 중앙서점에서 모임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그 곳 세미나실로 식사를 부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모임을 되도록 빨리 끝내고,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했다.
식사비는 모임 출발 때부터 회비로 충당했다. 이 때 되도록 회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식사를 5천원 이하의 저렴한 것으로 했다. 그래도 회원 1인당 1만 5천원씩 내는 월회비 가운데 5천원을 식사비로 제하고 나면 회비적립은 1만원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 회비로 연말에 회원작품집을 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팔마의 재치꾼인 손샘 회원이 저녁식사 당번제를 제안했다.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당번을 맡아 저녁식사를 준비해와서 회원들과 함께 먹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되면 식사비를 더욱 절감할 수 있고, 여러 회원이 돌아가면서 당번을 맡기 때문에 1년에 한번 정도만 수고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이 제안은 여러 회원의 호응을 얻어, 1999년 4월 모임부터 손샘 회원을 시작으로 식사당번제가 실시되었다. 과연 그렇게 하니 회비 지출도 대폭 줄이고, 준비한 회원들의 성의가 듬뿍 담겨 있어, 훨씬 흥겹고 맛깔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식사당번제는 여성 회원들은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남성 회원들의 경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직장 일로 바쁜 회원들이나 식사를 마련하기 곤란한 회원들은 본인이 식사를 준비해오는 대신 식당으로 회원들을 안내하고 음식값을 계산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데 그런 때는 개인 부담이 다소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공금에서 약간 지원해 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식당에서 식사를 할 경우는 당번에게 회비 3만원을 지원해 주기로 하여, 지금까지 식사당번제는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열린 시낭송회
문학회의 기능은 회원 당사자들의 문학적 자질 함양과 친선이 일차적인 목적이지만, 나아가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적인 봉사 기능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회원들끼리 모임을 갖고 창작발표와 독서토론을 하는 것, 또는 문학기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문학에 대한 의욕을 고취하는 것들은 주로 전자에 해당하는 사항들이다.
그렇다면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적 봉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은 주로 학생․시민들을 위한 백일장 개최, 지역 문화의 발굴과 재조명, 시민들을 위한 문학강연회 등이 있을 수 있다. 현재 우리 고장에서는 순천문협을 중심으로 일부 문학동아리에서 학생 백일장과 시민백일장, 또는 문학강연회가 연례행사로 치러지고 있다.
우리 문학회에서는 어떻게 하면 지역사회와 문학이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시민들과 함께 하는 열린 시낭송회’를 마련하기로 했다. 우선 열린 시낭송회인 만큼 실내공간이 아닌 야외에서 공연형식으로 행사를 치른다. 그리고 우리 회원만의 행사로 일관하지 않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시민들에게도 시를 낭송할 기회를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문학의 멋과 흥취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시낭송만으로 일관하면 단조로우므로 중간에 노래와 악기 연주를 첨가하도록 한다.
제1회 열린시낭송회는 2000년 9월 순천시 죽도봉 공원 연자루에서 행해졌다. “시민들과 함께하는 열린 시낭송회”라는 플래카드를 연자루 난간에 걸어놓고, 초가을 오후의 산들바람을 맞으며 흥겨운 시낭송회를 진행했다. 시낭송집은 회원 각자가 자기 시를 30부씩 복사해와서 현장에서 함께 묶어 배포했다.
토요일인지라 많은 시민들이 공원을 찾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분들이 자연스럽게 시낭송을 구경을 하도록 하고, 또 희망자에게는 시를 읽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부분 구경으로 그칠 뿐 시낭송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또 연자루 아래까지 온 분들이 플래카드가 걸린 것을 보고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생각하고 2층 마루에 올라와 보지도 않고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적극적인 홍보와 안내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날 시낭송은 김계선 회원의 <가을미학>을 시작으로 15명의 회원이 시낭송을 했고, 순천대학생 최윤선 양의 시낭송, 고흥 금산중 서덕원 선생의 기타연주와 순천대 정권수 교수의 노래가 곁들여져 아주 흥겹고 흡족한 시간이 되었다. 아쉬운 것은 시민들의 참여가 없는 우리만의 잔치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2001년 제2회 열린 시낭송회도 전년도와 같은 달,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부산에 사는 김영호 회원이 먼 곳을 마다 않고 참석하여 수필 <탄생>을 낭송하는 등 14명의 회원이 참여했다.
이 두 번째 행사 때는 김철중 회원의 인터넷 카페 회원 4분이 서울, 부산, 안양, 여수 등지에서 참여하여 찬조 낭송을 해 주었고, 우리 회원들이 한복을 입고 낭송에 출연한 점, 회원 가족과 친지들이 많이 참여한 점은 전년도에 비해 돋보인 점이었다. 특히 찬조출연을 한 박연순 씨의 가야금 병창과 예당중학교 박두영 선생의 테너솔로가 조화를 이루어 분위기를 한껏 흥겹게 해주었다.
등단 회원
문단 등단은 문인으로서 반드시 한차례 거치게 되는 통과의례이다. 등단을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예비문인이 습작기를 거쳐 비로소 작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고, 자신의 존재를 문단에 널리 알린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등단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과거에는 신인 추천이나 신인상 제도를 운영하는 문예지의 숫자가 많지 않은 데다가 등단 절차가 엄격하고 까다로운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문예지가 난립하고 있는 데다, 문예지마다 신인상 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등단이 비교적 쉬운 대신, 등단자에 대한 질적 저하가 염려되고 있다.
우리 팔마 회원들의 등단 상황을 보면 신갑식(수필, 문학춘추, 1994. 겨울호), 김종주(시, 문학세계, 1994.3․4월호.), 최순애(시, 한맥문학, 1994.7․8월호), 이채인(시, 앞선문학, 1995.6월호), 박정남(시, 문예사조, 1997.), 김영호(수필, 문학춘추, 1997.봄호), 남석우(시, 한맥문학, 1998), 김혜련(시, 문학 21, 2000.4월호), 장병호(평론, 문예운동, 2000.여름호), 윤광진(시, 한맥문학, 2001.10월호), 김철중(시, 한맥문학, 2001.10월호) 등이다.
그리고 회원들의 개인 시집으로는 김종주의 『울음을 울음으로 통역해 주세요』(글이랑, 1994), 최순애의 『노짐고개』(글이랑, 1995), 박정남의 『석양 앞에 서니』(한맥문학사, 1998), 남석우의 『대답 없는 날들의 그 웃음』(동아기획, 2001) 등이 출간된 바 있다.
우리 팔마 회원 가운데는 앞으로 등단할 예비 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그러나 문학인에게 등단은 하나의 과정일 뿐 최종목표는 아니기 때문에 등단을 굳이 서두르지는 않고 있다. 등단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충실한 문학 수련과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팔마 카페 개설
2002년 4월 팔마문학 카페가 문을 열었다. 카페의 주소는 http://cafe.daum.net/palmaclub인데, 클릭하고 들어가면 “문학과 사랑이 있는 팔마문학회”라는 간판이 보이고, “지금 이 순간도 문학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과 광기를 주체하기 힘든 분이라면 우리 문학회의 문을 주저함 없이 두드리십시오.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버선발로 나와 반가이 맞이할 것입니다.”는 카페지기의 인사말이 방문객을 반긴다. 카페지기 김혜련 회원의 헌신적인 노고에 힘입어 팔마도 비로소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사이버 문학의 시대를 활짝 열게 되었다.
이 카페 안에는 자유게시판, 독서토론방, 시 창작실, 소설 창작실, 수필 창작실, 팔마문학회 소식, 팔마 발자취, 팔마문학회 주소록, 회원동정, 회원 정보 등 10여 개의 작은 방이 있다. 그리고 이들 방에는 팔마에 대한 각종 정보와 회원들의 작품, 그리고 회원간의 정겨운 대화들이 가득 담겨 있다.
특히 시 창작실에는 신들린 시제조기로 이름난 금빛밝음속 님의 주옥같은 작품 수십 편이 독자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팔마문학 카페는 팔마 회원이 아닌 분도 자유로이 가입하여 글을 올릴 수 있으며, 탈퇴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과거 활동 회원들
팔마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거주 이전 및 개인적 사유로 말미암아 활동을 중지한 분들이 많이 있다. 처음에는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오직 문학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한 울타리 안에서 만나 정을 나누었는데, 인연을 더욱 이어가지 못하여 아쉽다. 그렇지만 그분들도 팔마에 대한 좋은 기억을 지닌 채, 회원들의 안녕과 팔마의 발전을 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창립 이래로 10년이 흐르는 동안, 한 때 팔마회원으로 동고동락했던 분들의 이름들을 일괄하여 적어 본다.
길석규, 김성규, 김영석, 조수향, 오명주, 황선주, 임송본, 김경옥, 황미숙, 권민선, 이형근, 이규황, 김민숙, 조윤주, 송진아, 양재삼, 장채열, 김영아, 나승록, 김연자, 김태이, 장효문, 신갑식, 박진환, 이채인, 김상복, 장애선, 염장섭, 김종주, 주서호, 김석환, 연암, 이한나, 이재신, 장세주, 이금안, 강윤영, 배선임, 정양주, 안미경, 송창용, 박희정, 박재희, 추정례, 박은애, 양준석, 정혜숙, 윤재왕, 고영심, 이중재, 최효진, 신의섭, 이미옥
이 가운데 박진환 회원은 순천지방철도청 경리국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우리 문학회와 인연을 맺은 분이다. 충북 괴산 출생으로 서울에 가족을 두고 홀로 관사 생활을 하신 분인데, 매사에 이해심이 깊고 특히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깊은 친분을 나눴다. 그런데 서울로 옮겨간 뒤 1년 뒤에 지병으로 작고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1995년 1월 순천역에서 영전 축하의 꽃다발을 전해드린 것이 마지막일 줄이야! 작고 후에 사모님이 서문을 써서 펴낸 『구기자꽃이 피는 아침』(조선문학사, 1996)이라는 유고시집이 있다. 박진환 님과의 생전의 정리를 생각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현재 활동 회원들
2002년 10월 현재 팔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은 모두 24명이다. 10년전의 창립회원부터 시작하여 올해 들어온 신입회원까지 활동의 연륜은 각기 다르지만 팔마 회원간에는 아무런 벽이 없다. 문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한 가족이요, 한 동지인 것이다.
현재 활동중인 팔마 회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효복, 장병호, 전영희, 최순애, 김영호, 김계선, 이삼례, 손 샘, 조태섭, 김준영, 윤광진, 유 수, 박맹식, 박정남, 김혜련, 양승화, 김철중, 이두엽, 송봉애, 김화정, 박정빈, 남석우, 기미순, 임상호
문학활동이란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인이 좋아서, 뭔가 쓰고 싶은 욕구에 따라 하는 것인 만큼 문학회 활동 또한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다. 활동을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활동을 쉴 수도 있고, 그만둘 수도 있다. 아무도 제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문학이란 것은 일시적으로 가까이 하다 그만둘 것이 아니다. 일생의 과업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어찌 그 과정에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참고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살을 찢는 쓰라림 속에서 조개가 빛나는 진주를 키워내듯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월의 물결 따라 부침하는 것이 인생의 이치요,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회원들은 팔마의 언덕에서 다들 문학의 큰 꿈을 이루고, 또 팔마에서 맺은 문학적 인연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비는 마음이다.
꾸준한 발걸음, 착실한 전진
이상으로 팔마문학회 10년간의 활동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그동안 팔마문학회 운영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창립 초기부터 모임의 방식이며, 문학기행과 같은 각종 행사며, 작품집 출간이며 모든 것들이 한번 시작하면 중단함이 없이 꾸준히 추진되어 왔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팔마문학회는 눈에 띄는 큰 변화도 없고, 드러낼 만한 실적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학적 성장이란 것이 외형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인가. 그저 내적으로 실력을 다지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일관되게 걸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큰 자랑거리인 것이다. 이러한 착실한 발걸음은 언젠가 때가 오면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믿는다.
그동안 팔마를 열심히 이끌어온 역대 회장, 총무, 감사 분들의 노고에 감사 드리고, 팔마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는 성원을 보내준 회원 여러분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문학에 대한 회원들의 열정과 분투가 멈추지 않는 한, 팔마문학회의 앞날은 언제나 햇살 쏟아지는 봄하늘처럼 눈부실 것으로 확신한다. (기록 : 장병호)
첫댓글 선생님 이제는 30년사를 다시 쓰셔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