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八線(38선)의 봄 / '김 석민'作詞 / '박 춘석'作曲 / '최 갑석'原唱' . 1953.7.27 휴전 이후? / 백 설희,이 미자 방백 대사 : 성우 '황 해'님 / 196?년도 Revival曲? 1.눈 녹이 38線에 꽃은 피누나! 鐵條網은 '녹'쓸고, 銃칼은 빛나! 歲月을 恨嘆하랴? 38線의 봄! 싸워서 功을 세워, 大將도 싫소! 2等兵 목숨바쳐, 故鄕 찾으리! ★ 傍白 臺辭(방백 대사) 어머님! 其동안 安寧하신지요? 저는 어머任 말씀대로, 이렇게 自由大韓의 품에 들어와서, 맡은 바 任務를 完遂하고 있읍니다! 安心하세요! 어머님! 어머님! 올 설에는 떡국이라도 잡수세요! 이 子息이 以南으로 넘어왔다고! 놈들의 모진 구박 끝에 惑是, 世上이라도 떠나시지나 않으시었는지요? 어머님! 당신이 돌아 오실 수 만 있다면, 살을 베어서 다리를 놓아 드리고, 뼈를 깎아서 지팽이를 만들어 드리겠읍니다! 살아주세요! 어떻게 하든지 살아 만 주세요! 반드시 其 웬수갚고! 어머님 앞에 세배드리구! 이 설을 떡국을 끓여드리겠어요! 봄이 오면은 꽃이 피고, 새가 울면은 故鄕이 그리워지는데! 왜 이 怨恨의 38線은 그대로 놓아두는지?! 어머님! 當身의 아들은 只今 北進命令만 기다리고 있읍니다! 그때가 오면! 그때가 오면! 반드시, 나는 부르짖으면서! 戰友들과 함께! 저 白頭山 上上峰에 太極旗를 꼿고! 어머님 앞으로 달려들겠어요! 어머님! 이 子息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當身의 아들의 凜凜한 姿態가 보이십니까? 언제나 怨恨의 北녘하늘을 바라다 보고, 北進命令만 기대리는! 當身의 아들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어봐 주세요! 어머니 ~ ~ ~ ~ ~ ~ ~ ~ ~ ↗ ! 2.눈 녹이 山골짝에 꽃은 피는데! 雪恨에 '젖은' 가슴, 풀릴 길 없고! 꽃 피면 더욱 슬퍼! 38線의 봄! 죽엄에 시달리는 北녘 내 故鄕! 그 同胞 웃는 얼골 보고 싶구나! ★以南 唯壹 血肉 동생 '채 명세'少尉의 戰死★ ------------------------------------------- ,,, ,,. (전략<前略>) ,,, ,,. 이렇게 美 第Ⅹ軍團에서 우리 제7사단 제5연대장으로 지내면서 잠시 전선(戰線)이 소강 상태(小康 狀態)로 접어든 1952년 5월 傾(경)! 난 예기(豫期)치 않은 일에 접(接)하게 된다. 나의 친동생 '채 명세'(蔡 命世)가 陸軍 소위로 任官하여, 내 7사단5 연대 바로 右側에 배치돼있는 제5사단36연대의 小隊長으로 배속(配屬)되었다는 全혀 뜻밖의 소식(消息)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반갑고 기쁘면서도 놀라운 消息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共産軍에게 랍치(拉致)된 어머님 소식을 몰라 늘 가슴 아픈 것을 참고 있던 참인데,,, . 내가 월남(越南)한 뒤 얼마 안돼 士官學校에 入校한 후 어머님도 월남하여 仁川에서 살고 계셨다. 任官 뒤에는 濟州道 제9연대로 配屬(배속), 4.3 事態 등으로 어머님과 떨어져 있어야 했고, 그 뒤 開城 38선 방어 임무(防禦 任務)를 담당(擔當)하던 제1사단 11연대 中隊長 시절에는 주말(週末)마다 京畿道 仁川에 가서 어머님을 뵙는 것이 나의 唯壹(유일)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松岳山 戰鬪(송악산 전투)가 끝나자, 이번에는 제2사단 25연대로 가서 태백산 지구(太白山 地區)에 共匪 討伐 作戰(공비 토벌 작전)에 참여(參與)하던 中 6.25 南侵을 당하여 仁川에 계시던 어머님이 共産軍에 拉致 當한 뒤, 生死 不明이 되셨다. 난 그 후 百方으로 어머님 消息(소식)을 탐문(探聞)했으나 모두 다 虛事였다. 나보다 3살 아래인 동생은 내가 월남할 무렵 평양 교원대학(平壤 敎員大學)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남았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에게서 군사우편 便紙(편지)가 덜컥 날아온 게 아닌가? 난 그 軍事 郵便(군사 우편) 편지 封套봉투()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便紙(펹디)의 주소(住所)가 우리 聯隊 바로 東側方에 배치(配置)돼 있는 第5師團 第36聯隊였다. 흥분(興奮)한 내가 便紙를 읽어보니 녀석은 그 간의 사연(事緣)부터 적어 내려갔다. 녀석은 卒業 後(졸업 후) 1.4後退(후퇴) 때 도망(逃亡)쳐 나왔다 한다. 그리곤 아무래도 戰爭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軍을 支願(지원), 1952년 1월, 綜合學校 #10期를 졸업(卒業)하곤 바로 少尉로 任官해 前線에 나왔다 한다. 녀석은 게다가 기특하게도 벌써 4개월 동안 용감(勇敢)하게 싸워 훈장(勳章)을 2개나 탔다고 자랑까지 늘어 놓았다. 어머님의 消息(소식)이 궁금하다는 그의 글에 나는 落膽(락담)하고 말았다. 어머님 생각을 하면 난 안타깝고 답답하였지만 그래도 血肉(혈육)이 以南땅에, 그것도 바로 내 聯隊 바로 東쪽에 와 있다는 걸 생각하니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생각 같아선 제36연대장 '오 창근'대령(#1기)한테 당장이라도 電話를 해 동생 좀 보내달라는 請託(청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戰時인데 내 동생이라고 해서 例外일 순 없지. 차례(次例)가 돼 녀석이 외출.외박(外出.外泊)한다면 모르지만,,, . 만약 녀석이 特別 外出.外泊한다면 주변(周邊)에선 兄 잘 만나서 좋겠다는 소리가 나올 게 뻔해. 그러니 안그러는게 좋겠어. 아마 녀석도 내 生覺(생각)과 같을 거야,,, ,,." 난 아예 36연대장 '오 창근'大領에겐 알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음부터 하루하루가 지나는게 즐거웠다. 녀석을 만날 걸 기다리며 보내는 재미로 時間가는 줄도 몰랐다. +++++++++++++++++++++ 그리곤 막 여름이 접어드는 6월경 드디어 난 외출나온 녀석과 만났다. 너무 기뻤고 반가웠다. 몇 년만에 보는 녀석은 검게 그을러 씩씩한 軍人으로 變해 있었으며, 내게 절도(節度)있게 부치는 경례(敬禮)도 당당했다. "兄님이 以南 가서 군인됐단 얘긴 들었읍니다. 아무튼 우리 家族(가족)은 어머님께서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셨고, 삼촌들도 놈들에게 끌려가 고문(拷問)을 당하는 등 잡안이 풍지박산됐읍니다." 난 가족(家族)과 친척(親戚) 얘기가 나오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쓰라림을 禁(금)할 수 없었다. "아시죠, 큰 삼촌은 워낙 甚(심)하게 拷問(고문)을 당해 제가 내려올 때 누워 계셨는데 可望(가망)이 없어 보였읍니다. 아마 벌써 돌어가셨을 겁니다. 또 작은 삼촌은 복숭아뼈를 망치로 때리는 拷問(고문)을 당해 걷지도 못하고,,, 폐인(廢人)이 다 됐읍니다. 저만 가까스로 빠져 나왔지만, 정말 共産黨들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모두 참변(慘變)을 당했읍니다. 兄님과 저는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共産黨 때려잡는 데 바칩시다." 우리 兄弟(형제)는 눈물을 흘리며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얘길 들어보니 以北은 지식인(知識人)들과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을 숙청(肅淸)하느라 정신(精神)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마침 빠져 나왔으니 안 그랬다면 아마 죽었을 거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살아계셔야 할 텐데,,, ." 말끝마다 나오는 어머니 생각은 끝내 우릴 울리고 말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어머니'란 單語가 우리의 가슴을 울릴지도 모른 채,,,. 난 녀석과 3일동안 懷抱(회포)를 풀며 함께 지냈다. 그러던 次 우리 第7師團長 '이 성가' 將軍이 연대 순시(聯隊 巡視)를 와 난 동생을 人事시켰다. 그런데 '李 成佳' 師團長('이 성가' 사단장)은 동생이 썩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채 대령. 거 동생 말이야. 아주 똘똘하게 생겼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副官(부관){당번.전령장교)으로 쓰고 싶으이,,,어떤가?" '이 성가(李 成佳)' 사단장(師團長)은 몇 番씩 내게 의향(意向)을 물었다. 그러나 난 녀석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공산군(共産軍과 싸우고 싶어 軍部에 들어 온 以上(이상) 그는 決코 後方에서 우물거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두시는게 좋을 것 같읍니다. 그놈 공산군(共産軍)과 싸우고 싶어 軍服(군복) 입었읍니다. 이마 지금의 小隊長 生活에 만족(滿足)할 겁니다. 本人도 前線에서 銃쏘는 걸 원(願)하지 決코 부관(副官)같은 건 안할 겁니다." 그래도 난 惑是(혹시)하며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에이, 형님두 전쟁(戰爭)통인데 당연(當然)히 싸워야죠,,, ." 난 그런 녀석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아니 너무 옳은 選擇(선택)이라는 便이 더 어울리겠다. 녀석이 歸隊(귀대)한 後 달반 程度(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니, 당신 정말 이럴 수 있소?" 의외(意外)로 바로 東측의 제5사단 36연대장 '오 창근'大領의 電話였다. 今方이라도 때릴 듯한 목소리. "아니, 선배(先輩)님, 제가 뭘 잘못한게 있습니까?" 난 갑작스런 그의 電話(전화)에 唐惶(당황)해 되물었다. "당신 동생 여기 있었다면서,,, .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했소?" 순간(瞬間) 난 퍼뜩 녀석에게 일이 發生했음을 감지(感知)했다. 왜냐하면 '오' 대령(大領)의 목소리는 怨望(원망)과 미안(未安)함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런데, ,,, 무슨, ,,, 일이 있습니까?" ",,, 전사(戰死)했소,,, ." 순간(瞬間)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수화기(受話器)를 든 손에 힘이 사라지며 눈 앞이 비틀비틀하고 있었다. 난 말까지 잃었다. 시간(時間)이 상당히 흐르자 '오 창근'大領의 목소리가 受話器를 타고 들려왔다. ",,,여보 채대령, 내 말 듣고 있소? '채'少尉는 정말 훌륭한 軍人이었소. 그간 勳章도 2개씩이나 타고,,, . 그리고 지금(只今)쯤은 이미 補職(보직)을 바꿀 때도 되었소. 그래 ,,, ,,. 당신(當身)이 내게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더라면 본부(本部)로 빼줄 수도 있었는데,,, ,,. 정말,,, ,,. 뭐라 말해야 할지,,, ,,." 그는 날 원망(怨望)하고 있었다. 마치 죄인(罪人)처럼 목소리는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더욱 未安(미안)했다. "선배先輩)님,,, . 우린 군인입니다. 군인은 어차피 戰爭터에서 죽게 마련입니다. 녀석도 자기 목숨 자기가 가져갔을 뿐입니다,,, . 그러니 너무 未安해 하실 必要 없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일 걸요,,, ." 이젠 오히려 내가 그를 慰勞(위로)해 주는 립장(立場)이 되었다. 그날 밤 난 슬픔에 차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끼던 #7기생 우리 第3大隊長 '노 심근' 少領을 잃은 지 몇 달만에 난 또 엄청난 양의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VAN FLEET' 美 第8軍 司令官도 자기 외아들을 공군 조종사(空軍 操縱士)로 적진(敵陳)에서 시체(屍體)조차도 못찾고 잃었는데,,, . 그래 軍人은 전쟁(戰爭)터에서 죽는 것만큼 幸福(행복)하고 자랑스러운 게 없는 거야. 물론 내가 녀석을 後方으로 빼든지, 아니면, 36연대장 '오 창근'大領한테 얘길 했다면, 녀석은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 하지만 그건 오히려 녀석과 날 辱되게 하는 거야. 軍人이면 軍人의 本分(본분)을 지키고 살아가야지. 녀석도, 나도 軍人의 길을 지켰으니 그밖에 무었을 더 바라겠나?!" 결국(結局), 이남( 以南)으로 와서 딱 한번 만나 본 녀석은 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난 그 녀석의 목숨까지 물려 받아 그 후에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곤 이렇게 오늘날까지도 긴 목숨을 부지(附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건 다 그놈 때문이다. 자랑스런 내 동생 '채 명세' 때문에,,, . ++++++++++++++++++++++++++ ★ ↗ 인용 출처 ↙ ⇒ 死線을 넘고 넘어('채 명신'회고록) / 매일 경제 신문사 / 2002년 6판 발행(\ 8,ㅇㅇㅇ원)/ ⇒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 중앙 도서관에 장서로 비치.열람 가능함. ======================== ★ 성우(聲優) 겸 映畵 배우 '황 해' : '괴 무현'을 탄핵 심판 회부했었던 그 해 여름에 작고하심. 부인은 가수 '백 설희' 님이시며, 자제분은 가수 '전 영록'인 바, '박'통 말기 경 전방 제7사단 보병연대 보병대대 소총중대에서 G.O.P 및 F.E.B.A 생활을 다 하고 병장 전역함. ,,. '황 해'님은 고향이 '황해도'로서 살아 생전에 빨갱이들에게 복수하고 고향 '황해도'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황 해'로 지었다는 말을 작고하신 지 얼마되지 않았을 제, 北漢江 파로호(破虜湖)에 낛시하러 왔다가는 3명으로부터 듣고 비로서 '황 해'님이 작고하셨음도 앎. ,,. 신문에 보도도 변변히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빨갱이 건달 날강도 '괴 무현'놈은 이랬었음. ,,. 지난 2010.5.5 작고하신 '백 설희'님. 삼가 고인의 명복이나마 빕니다. +++ '채 명신' 장군님은 제7사단 제5연대장을 하실 제, 북한강 동측에는 인접부대로 제5사단 제36연대에 동생 '채 명세'소위가 사선을 넘어 월남, 부산 동래, 육군종합학교에 시험 응시 소위 임관 복무! ,,. 1959년도에 '채 명신'장군은 제5연대장, 충남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 제Ⅲ군단 작전참모 근무 후, 준장 진급 후 '송 요찬 중장이 제1군사령관이고 '박 정희'소장이 참모장을 하던 밑에서 제1군 작전참모를 함. 그리고는 같은 원주 시내의 단구동 제38사단 {당시는 제2군 관할 향토 사단} 사단장을 하다가, 전방 제5사단장으로 전속.보직되어, 오늘 새벽! 그러니까 1961.5.18 새벽에 제5사단을 인솔, 야전군 건제 사단이 출동, 쿠테타를 진압하려는 미제8군사령부와 한국군 제Ⅵ군단의 진입을 억제하고 혁명을 성공시키자, 오전에는 육사교 학생 생도들의 혁명 지지 퍼레이드가 있었음. ,,. 혁명은 결정적으로 성사됨. '채 명신'제5사단장의 거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이 한림'제1군 사령관과 대판 언쟁했었으며, 미제8군사령관 '매구르더'대장 제5사단에 hel 기로 급래, 심한 논쟁을 함! ,,. '매그루더' 대장 귀경 즉시, 제5사단 사령부 상공에는, 미군 hel 기 2대가 24시간 교대로 시시 각각 부대 상황을 항공 감시 당했었다함. ___ 사선을 넘고 넘어 ___ 2009/05/18 ★ 上 : 1950년 경상북도 영덕.영해.청송.평해. 등지의 태백산 남쪽에서 대게릴라작전에 동원되었었을 제, 보병 제2사단 제25연대 제1대대 제2중대장 시절에 박은 대위 때의 모습. 中 : 저자인 '채 명신'장군께서 美 제Ⅹ군단 예하의 보병 제7사단 제5연대장 시절에 강원도 화천군 산양리 사방거리북쪽의 1220고지에서 中共軍과 對峙하던 중, 연대 관측소{OP}에서 砲兵 砲擊 誘導用 砲臺鏡 앞에서 추운 겨울에 박은 사진. 당시 한국 육군은 師團을 지휘할 軍團司令部가 제Ⅰ.Ⅱ軍團의 2개 軍團司令部 뿐이었음. 美 第8野戰軍司令部 麾下에는 美 第Ⅰ,Ⅱ,Ⅸ,Ⅹ,ⅩⅩⅣ軍團의 5개 軍團을 두고 UN軍들 및 韓國軍을 指揮하다가; 美 第Ⅸ,Ⅹ軍團의 2개 軍團을 解體하면서, 韓國軍 第Ⅲ,Ⅴ, Ⅵ軍團을 合同 勤務를 通하여 引繼引受 및 敎育을 시켜주고 創設시켜 준 뒤, 나머지 軍團들은 本國으로 撤收했었음. ++++++++++++++++++++++++++++++++++++++++++++++++++++++ 下:이남 유일 혈육 동생 '채 명세'소위와 함께 박은 사진. 저자가 제7사단 제5연대장 시절에 北漢江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인접하던 제5사단 제36연대 소대장이던 '채 명세'소위가, 兄인 나를 물어 물어, 수소문하여, 江原道 楊口郡 方山面 文登里 깊은 골짜기에서, 멀고 먼 길을 돌아, 날 찾아 면회왔음. 그는 平安南道 평양에서 敎員大學을 졸업하고 국민학교 敎師를 하다가, 점점 甚해지는 彈壓과 逼迫과를 견디다 못해; 決死的 탈출을 시도; 以南에 南下, 당시 慶南 釜山市 東萊區 東萊國民學校에, '육군사관학교.보병학교'를 통.폐합하여 開校한 戰時士官學校 ㅡ'육군종합학교'에 시험 응시, 少尉로 任官되어 配置된 곳이 공교롭게도 兄이 근무하는 北漢江을 東西로 사이에 둔 步兵 第5師團이었다. 그는 내게 이런 소식을 傳해주고; 특별 외박을 마치고 귀대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못해; 1952년 5월 여름, 밀고 밀리는 中共軍과의 戰鬪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지휘하다가 戰死했다. 이런 기별을 알려 주려고 왔었던 것일까? ,,. 그는 지금 서울 동작동 국립 묘지에서 잠자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後方인 경남 부산에서는, 1952년 5월,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을 간접선거제로 개헌한다면서 야당 단독 국회를 소집하려고 뻐쓰를 타고 가는 추악한 '정치 파동'을 스스로 야기하는 작태를 보였으며; 그런 속에는 민정 시찰이라는 美名 下에 지역구인 全南 順川으로 내려가서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現役 大尉를 언쟁으로 불법 소지하던 권총으로 射殺하고도 버젓이 구속되지 아니하고, 국회의원을 하던 '서 민호'도 타고 있었다. 헌병 총사령관 '원 용덕'중장님은 국군 대위 살인범 민주당 개케의원 '서 민호' 롬을 헌병대로 연행.체포하여,,. 2009/05/18 ★↗ 著者 '채 명신'將軍님의 少將 때 박은 寫眞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이 책자가 비치되어져 있음. 꼭 일독을 권합니다. 15개 단원(?)인데, 가장 high light 는 '백골 병단', '미국 유학', '5.16'이지만, 처음부터 거의 모든 단원들이 모두 흥미진진하면서 박력과 스릴로 맘이 오마조마하며 감동적인 부분도 여러군데임. 경기도 연천군 죄수 감방에 불시 시찰을 온 쏘련군 민사 군정 계엄 분소장 대령과의 짦막한 쏘련어 대화로 기적이 발생! 사관학교 #5기생 입교시의 눈물 겨운 식사 및 빵을 사먹으려다가 구대장 훈육관에게 적발되는 얘기. 제주도 4.3 사태시 소대원의 비밀 감시 경호로 웅덩이에서 몸을 씻다가 피살 직전 살아나게 되는 경위! 경기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의 제1사단 '김 석원'장군과의 비화. 태백산 공비 토벌 작전시의 물고기와 물 분리 작전 및 영어 사전에 의한 죽엄 모면. 수박.참외밭에서의 안개로 인한 극적 탈출! 1.4 후퇴시 적진 종단 3,000리 비화! 연대장에게 권총을 드리밀어 사살하겠다는 하극상 연출 사연! 무당 여자의 무서운 대예언 이야기와 신비스런 부적의 효험! 백골병단 임무 수행 과정 기상 천외한 비화/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철수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비통한 적장 대남 유격대 총책 '길 원팔' 중장의 딸 ___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고열/속수무책/주검을 눈속에 묻어야만 하는 비극! '백골병단 遊擊隊(유격대) 斥候(척후)와 아군 제9사단 搜索隊(수색대) 尖兵(첨병)과의 극적인 연결작전 전개 과정 및 대령 '박 정희' 제9사단 참모장 '박 정희' 대령과의 숙명적인 첫 만남! 미국 유학에 따르는 웃지 못할 챵피스럽고도 불쌍한 한국군 장교들의 겪는 사연들! 7사단 참모장.5연대장 시절의 고지 탈환 비화! 제20사단 제60연대장 시절 미 제Ⅹ군단장 '화이트'중장에게 혼쭐나면서 오히려 내종에 감복시키는 일! 특무대장 '김 창룡'소장과의 살얼음판 대결 사연. 충남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 시절의 '밀가루 사건'이 언론에 노출/십자 포화를 맞으면서 헌병대 구속 수감.조사받는 일! 제1군단 예하 사단에서의 소대장 _ 중대장 하극상 사살 사건의 조치 비화. 군부 출신 장성의 국회의원 제1호 탄생 및 제Ⅲ군단장 '송 요찬'소장과의 작계 론쟁 고집 비화! 제1군사령관 '송 요찬'중장의 작전참모 시절 厚生 事業(후생 사업) 단절 및 대담한 군대 毛布의 재산대장 장부 숫자 임의 삭제로 국회 특별 국정 감사 받는 일! 제5사단장 시절의 소{cow} 악덕장사꾼들의 군납 비리 실태에 정면 응징과 군인 가족들을 상대로한 악덕 火木(화목) 땔감 장사꾼들의 비리 척결. 제1군사령관 '이 한림'중장의 군사령부 감찰 조사 수검 및 불화! 제Ⅴ군단장 '박 림항'소장과의 정면 대결 및 보복! 감사원장으로써 '김 종필' 중앙정보부장의 4대의혹 사건을 적발 보고 처리하는 비화! 미국 재 유학하여 'TRUE MAN' 전 미국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 비화! 흥미 진진! 2009/05/20 ★↗ 최초이자 최후가 되어버렸던 정규군 유격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白骨 兵團!' 부대 규모를 기만할 목적으로 중공군 단위대 규모명칭인 사단과 군단 於間(어간)의 규모인 '兵團(병단)'으로 위장, 명칭조차도 으시시한 '白骨(백골)'을 冠形詞(관형사)를 사용! ,,. 정부로부터, 북한 위조 지폐를 極秘理(극비리)에 인쇄받아 침투, 북한 반란군 행세를 하면서 종횡무진, 경제를 교란키 위해 북한군 적진 내부에서 대대적으로 뿌려대면서 ,,. '백골 병단'작전참모인 '김 인식'대위와 해후하는 장면. 북동의 속초시로 향하는 彌矢嶺(미시령)와 북북동의 高城으로의 陳富嶺(진부령)과의 於間(어간) 三叉路(삼차로) 分岐點(분기점)의 龍垈里(용대리) 憲兵 檢問所 직후에 세워진 '백골병단 전적기념비'를 대장 '이 진삼' 제1군사령관{현 자유서진당 국회의원}이, 육군총장 '정 호용'대장 재가하에, 제Ⅲ군단 공병 여단에서 건립하였음. '백골병단 참모진들 ___ 작전참모 '김 인식'대위와 제1.2대대장들의 모임. 2009/05/21 ★↗ 제9사단{白馬부대} 참모장 '박 정희'대령이 파견한 제9사단 수색대대 尖兵(첨병)과 백골병단 유격대 斥候(척후)와의 성공적인 連結 作戰(연결 작전) 종료 후, 我軍(아군) 후방 지대인 江原道 江陵市(강릉시)로 철수 집결, 북한군 후방 지역에서의 반란군 행세를 하던 장비.복장 고대로 기념 사진을 박은 '백골 병단 정규군 유격대 간부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