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안동준(에드워드, 44)씨네 집에는 '인물'이 한 명 있다. 둘째 아들 기헌(안토니오, 12)이다.
기헌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성당(죽림동본당)에서 산다. 친구들과 공차기를 해도 넓은 운동장을 놔두고 꼭 성당 마당에서 한다. 그러다 수녀가 병자방문을 나가면 졸졸 따라다니면서 함께 기도해 주고, 저녁미사까지 참례하고 돌아온다.
그뿐 아니다. 자기 방 책상 옆에 제대를 차려 놓고 거의 매일 미사(?)도 집전한다. 복사단 부단장이다 보니 미사 전례문을 줄줄이 꿰고 있다. 포도주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쥬스. 아버지 안씨는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저 놈이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나"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중앙시장 한 귀퉁이에서 커튼 가게를 운영하는 안씨는 "이 녀석아, 미사를 드리려면 제대로 드려"라며 남는 천으로 제의를 만들어 주었다.
미사 얘기로 한참 웃고 있을 때 막내딸 평화(프란체스카, 5)가 나섰다.
"오빠가 신부님하면 내가 옆에서 복사서요."
귀염둥이 '평화' 이름에도 재미난 사연이 담겨있다. 춘천교구가 2000년 6월25일 대희년 행사 일환으로 주최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에서 안씨는 평화의 종을 타종하는 영광을 얻었다. 민족 비극의 날에 '평화의 옥동자'를 출산할 예정인 아빠 자격으로.
그날 스포트라이트와 박수를 받으면서 종을 치고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가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늦게 태어났다. 안씨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출산 인사를 열흘 동안 받느라 곤혹을 치렀다. 딸의 호적상 이름은 '대희년'에서 딴 희원이지만 집에서는 평화라고 부른다.
안씨네 저녁기도 풍경도 남다르다. 가족이 모처럼 일찍 저녁식사를 마치는 날이면 아이들은 기도회를 열자고 보챈다. 아빠와 엄마가 거실에서 성가를 부르면 아이들이 각자 방에서 촛불을 들고 입장하는 기도회다. 맨 앞에서 성서를 들고 입장하는 '짝퉁 신부님'은 물론 둘째 기헌이다. 기도상에 둘러앉아 그날 복음을 읽고 각자 기도를 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와 다툰 것도 스스럼없이 얘기한다. 안씨도 가게에서 속상했던 일까지 가족에게 털어놓는다. 저녁기도를 바치려고 촛불을 켜면 아이들이 알아서 기도상으로 모여앉는 게 안씨네 집 풍경이다.
"신앙교육이요? 특별한 게 없습니다. 저녁에 피곤해서 꾀를 부리려고 하면 아이들이 먼저 기도 안하느냐고 보채는 통에 소홀히 할 수가 없어요. 주위에서 성가정이라고 칭찬하지만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안씨는 손사래를 치지만, 아이들 신앙교육은 다름 아닌 부모의 성실한 생활태도에서 나온다. 안씨와 부인 정금선(루치아, 39)씨는 맨몸으로 결혼해 사글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결혼 전부터 여태껏 다른 데 한눈 팔지 않고 재봉일을 해왔다. 7평 남짓한 커튼 가게가 생활 터전이다. 재래시장이 위축돼 요즘은 두 사람 수입이 웬만한 월급쟁이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래도 가족들 모두가 건강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에 감사하면서 산다. 얼마 전까지 24평 아파트에서 처가 식구까지 합쳐 10명이 북적거리면서 살 때도 불편을 모르고 살았다.
안씨는 하느님 일이라면 재봉틀을 돌리다가도 뛰어나간다. 성인 복사단 단장ㆍ평협 총무ㆍ성심회원 등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성당에 갈 일이 생긴다. 눈이 내리면 눈 치우러도 간다. 그는 "하느님 집인데 폭우나 폭설 내릴 때 가서 살펴보는 건 당연한 도리 아니냐"고 말했다.
부인 정씨는 처음에 그런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감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성당에 가면서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말하는 남편한테 바가지깨나 긁었다. 정씨는 "나도 신랑한테 오염됐다"며 웃었다.
"주님을 가정 가운데 모시고 살면 걱정할 일이 없어요. 근심 걱정까지 다 그분께 맡겨드리는 걸요."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