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 농부로 살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충남 홍성에서 올해로 열 네 번째 농사를 짓는 유기 농부 이환의입니다. 보통 제 일과는 아침 6시부터 시작합니다. 일어나자마자 소와 당나귀 등 가축의 밥을 주고 아침을 먹습니다. 요즘은 얼마전에 저희가 교육농장으로 선정되어 교육장을 짓는 등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이사이에 감자밭 풀매기, 쇠꼴 베기를 합니다. 그외 소소한 농작업이 몇가지 더 있지만 늘 하는 일이니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이렇듯 5~6월이나 10~11월은 농부들, 특히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저희 유기농가는 속칭 <죽음의 시간>입니다. 이때는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두어 시간이 온전한 휴식이겠지요. 그래도 이 생활을 십년 넘게 지속해온 속깊은 이유는 농부로 사는 맛과 멋 때문입니다.
과거 누군가가 제게 “귀농해서 제일 좋은 게 뭐냐?” 물으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 앉아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도시의 생리가 맞지않아 <마음의 행로(行路)>를 따라 농촌에 오게 되었지요. 솔직히 농사를 짓기 위해 농촌에 왔다기보다 농촌의 자연에 이끌려 왔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농촌이 주는 편안함처럼 자연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였습니다.
농촌으로 오게 되었으니 농사일을 준비하게 되었고 결국 농부가 제 직업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농사외에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귀농 1년전부터 농민신문을 구독하고, PC 통신으로 농업관련 정보를 검색하는 한편, 클리어 파일 세 권을 준비해 각각 <귀농한 사람들><특용작물><건축>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새롭게 시작할 때는 준비를 잘 하는 편인데 이때 제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지요.
당시 막 귀농운동본부가 결성되어 아내를 포함하여 단 세 강좌만 듣고 97년 가을 본부에서 추천해준 충남 홍성에 정착하였습니다. 물론 그 전에 배낭여행을 하며 나름대로 귀농지를 알아보기도 했지요. 귀농지 결정의 제일 요건이 <아이들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간다>였는데 뒤집어보면 부모인 저희 부부와 비슷한 연배를 찾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더 나은 조건도 있었지만 홍성을 선택한 것도 순전히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다행스럽게 이듬해 첫농사 시작전 귀농 선배 한 가정과 인접 면내 본부 출신 두 세 농가와 교류하게 되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기본 농기계는 경운기와 예취기 정도로 농가살림도 귀농학교에서 배운대로 자급후 잉여 농산물을 판매하여 수익을 얻는 소박한 농사였지요. 때문에 수십여가지 작물을 심고 가꾸느라 바쁘고 힘들었던 게 사실이나, 농업을 보는 관점이나 영농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농업의 갈래도 여러 가지지만 아마도 홍성의 귀농인들이 짓는 농사는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주창하신 가족농, 소농에 잘 부합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대개 책장에 녹색평론이나 귀농통문, 작아, 민들레 같은 월간지들이 있고 주곡인 벼농사와 밭농사를 합해 5천평 안팎의 유기 자급농이 당시 귀농 2~3년이 지난 동료 농가의 표준이었습니다. 모두들 같은 유기농업 단체에 가입하여 농업과 환경, 생태에 대한 교육이나 강연도 지속적으로 받았지요. 이즈음 형성된 농업과 농촌에 대한 교육과 그에 따른 자각이 지금껏 흔들리지 않고 농촌에 뿌리를 내리게 한 근원의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종교의 의식화 과정과 비슷한 것이지요.
저희가 귀농한 시점이 IMF 직전이어서 이후에 농촌에 들어오는 소위 <IMF형 귀농>과 자연스레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IMF형 귀농이란 IMF를 만나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잠시 의탁하게된 경우를 말합니다. 즉,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농촌으로 오게 된 분들이지요.
98년에 홍성군에서도 농업기술센터 주관으로 군내 귀농자 모임을 조직했는데 저희 귀농본부 출신들과는 농업관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달라도 많이 달랐습니다. 당시 결성된 <신농회> 모임도 회원들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두어 번 모이다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귀농 역시 긍정적 의미의 의식화(awareness)를 위한 교육의 중요성이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뒤 준비된 귀농을 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분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부연하면 비자발적 귀농인들중 상당수가 경기가 좀 나아지자 다시 탈농을 했다는 겁니다. 농촌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교육이나 일정한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고 내려가는 경우 살다가 조금만 어려움을 만나도 피턴(농촌을 피하는)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 비해 귀농본부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정착율이 더 높은 것은 순전히 교육효과와 농촌에 대한 애정, 끈끈한 동료애가 귀농인들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농촌에 사는 맛과 멋이 어려움을 견디는 근원의 힘이라 했는데 실제 농사를 지으면서 알아가는 맛에 이런 성향들이 어우러진 때문이겠지요. 지금은 전과는 달리 많은 귀농 교육기관들이 있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농사짓는 기술이나 방법, 지식보다 농업, 농촌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심어주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조금 다른 예이지만 제가 유기농업을 하고 있으니 비유 한 가지를 들겠습니다.
산지생협 등 유기농 생산자 조직이 제일 두려운 것이 회원들이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살포하는 행위입니다. 소비지 생협이나 농관원 같은 기관에서 불시에 검사를 하지만 아무리 검사와 감시를 강화해도 부정행위를 100% 막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선생님을 모셔서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려 주면 많은 경우 농사가 망하면 망했지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꿈도 꾸지 않습니다. 일종의 영성(靈性)수련에 가까운 환경과 생태교육이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분위기는 부자농부나 억대농부 만들기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홍성의 귀농인들이 대부분 무리없이 안착한 데에는 결정적으로 지역내에 생산-판매조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정농회나 풀무생협 생산자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니 바로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지요. 귀농 선후배 대부분이 본부 등에서 기왕에 유기농 교육을 받아온 덕분에 자연스레 유기농을 하고 판로가 일정부분 보장되니 대개 3년내로 수지의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드물게 저희 부부는 귀농 첫해부터 적자를 면했는데 그만큼 노력을 더한 결과이겠지요.
당시 저희집을 방문한 예비 귀농인들이 “얼마나 버세요?”라고 물으면 “돈도 없지만 돈 쓸 시간도 없다”고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유기 농가의 사계(四季)는 분주하고 틈이 잘 나지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완두콩을 시작으로 2월에 시작한 농사가 12월초순은 되어야 마무리되니 휴식은 겨울 두 달여 뿐입니다. 나머지 기간은 공휴일도 없지요. 그래서 전 농담으로 ‘바쁘지 않은 유기농은 가짜’라고 단언하지요.
덕분에 아직까지 살림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농사에 실패하거나 적자를 본 해는 없었습니다. 다만 몇년전 집을 짓고 저온저장고와 창고, 게스트 하우스 건축, 트랙터 교체 등 삶터를 새로 단장하고 생산기반에 투자하느라 얼마간의 빚이 있으나 장기저리이고 이제 거의 모든 투자가 끝난시점이어서 걱정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마 3년내 해결할 것이라 봅니다.
특별히 올해 상반기는 저희 부부에게 매우 바쁜 시기였습니다. 6천여평의 논밭 농사에 600여평의 고추 하우스 짓기, 도농교류 목적의 사랑채 건축 등 올 봄 농사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편히 쉬어본 날이 없네요. 돌아보니 귀농후 십여년을 비슷하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귀농 후배들 앞에 설 때 ‘우리 부부처럼 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보다 더 부지런하고 열심인 분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간의 농촌생활이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우리 부부의 삶은 권장하기 어려운 ^^ 모델이니까요. 지금의 농사방식은 저 혼자야 괜찮지만 아내에게 요즘 자꾸 이상 신호가 오고 있습니다. 풀을 잡느라 호미를 달고사니 아내는 농사 4년만에 건초염을 앓아 손가락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관행에서 유기재배로 돌아선 분들에게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더군요.
그래서 작년부터 스스로에게 ‘지금의 영농방식을 계속할 수 있을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 결과잠정적인 결론은 겸업농으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농사는 지속하되 영농규모를 좀 줄이고 다른 수입원을 찾자는 겁니다. 그간 아내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농(산)촌유학이나 농촌체험, 노인공동생활가정(group home)운영, 그외 효소나 장류 등의 농가단위 가공을 모색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농사를 기반으로 한 교육농장으로 겸업의 형태를 갖췄습니다.
저희는 아직 40대 중반의 나이에 트랙터 등 기본 농기계를 모두 갖췄고, 신축 주택과 퇴비자급이 가능하도록 한우와 당나귀를 기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3천 3백여평의 논밭을 소유했고 나머지도 도지가 싼 2천 7백여평의 농토를 경작하고 있으니 귀농 후배들이 봤을 때는 어쩌면 부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저희도 부모님의 노후나 자녀들의 교육비 등을 생각해 볼 때 걱정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큼 농업, 농촌의 미래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하니까요. 저희가 1차 농산물 생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쪽을 돌아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지요.
농촌에서는 판로 걱정이 제일 크지만 귀농후 아직까지 농산물을 팔지못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희는 생산량의 70%를 생협에 납품하고 나머지는 직거래 혹은 자가 소비를 해오고 있습니다. 택배를 연간 3백여건 가까이 보낼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택배비가 농산물값의 20%에 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쇼핑몰이나 직거래가 농산물을 파는데 효과적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물류비나 포장 시간 등을 고려하면 생각만큼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성공적인 귀농의 첫째 조건이 경제적 독립인데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2~3년내 수지를 맞추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요즈음 저는 귀농 혹은 귀촌을 준비하는 분들께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대로 삶터만 옮겨도 시골엔 큰 도움”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사는 홍성군도 현재 인구 9만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행정기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얼마전 귀농자 지원방안을 요청하러 군청에 방문할 때도 다른과보다 자치행정과부터 들렀습니다. 인구증가 정책과 관련해 귀농과 귀촌이 실질적인 대안임을 역설하기 위해서였지요. 예전에는 “열심히 하지 않을 거면 오지도 말라”고 했는데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지고 겸손해졌지요.
전국적으로 땅값이 다락같이 오르고 쇠고기 수입개방에 고유가 행진, 영농비 상승 등 귀농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수두룩하지만 농촌으로 향하는 발길은 계속되리라 봅니다.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열가지라면 농촌으로 가야 할 까닭은 그보다 더 많아 보이니까요.
결론적으로 한 사람의 도시인이 농부로 변신하거나 적어도 농촌에 뿌리를 내려 살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민간에 내맡기거나 스스로의 노력만을 강조해서는 부족합니다. 저희 가정만해도 아내의 협조와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결정적으로 산지에 풀무생협같은 유통조직이 있었기에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농촌이 유지되려면 획기적인 귀농지원 프로그램의 활성화와 제도화가 필요합니다. 지금 귀농•귀촌 지원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지만 이미 농촌에 정착한 저희들이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중앙부처에서 일선 농업기술센터까지 나서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 농촌의 모습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가져봅니다.
끝으로 일본에서 만난 한 귀농인의 사례 소개로 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십년전 일본에서 어느 농장을 방문했는데 농사를 지은 지 20년쯤 된 농장에는 여러 가지 시설로 가득 차 있더군요. 먼저 빗물과 하수를 모아 생태 연을 거쳐 흐르게 하니 깨끗한 물로 바뀌고 그 아래에선 잉어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생선을 살 일이 없다고 합니다.
돼지는 너른 목장에 풀어 놓았는 데 2미터 높이의 구름다리를 놓아 돼지가 뛰노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같이 간 친구는 이렇게 키우면 어미 돼지의 수명이 3배로 늘어난다고 하더군요. 그밖에도 물위에 지은 집과 닭과 새끼 돼지가 따스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바닥에 깐 푹신한 톱밥과 왕겨... 농장이 무슨 놀이 공원처럼 입체적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농장을 이렇게 재미있게 꾸밀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큰 돈을 들여 관광농원으로 만들지 않아도 십수년간 공든 탑들이 하나하나 보는 이의 마음을 물결치게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부부도 지금의 태양광 발전 시설외에 태양열 온수기를 더 달고 풍력 발전기와 작은 숯가마를 만들려고 하지만 그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재생가능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돼지의 수명을 세 배로 늘리고 닭과 새끼 돼지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세심히 돌보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 하겠지요. 생명이 가지는 본래의 수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늘려 쓰는 일과 삶- . 생명을 키우고 돌보는 농부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겁니다. 저희가 도시를 떠나 농촌에 사는 속깊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