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사범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북한의 침공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 온 장정들을 징집해 만든 일종의 예비군 체제인 '국민방위군' 사건은 불과 100여일 동안 징집된 50여만 명 중 5만명 이상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 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신동엽도 이때 국민방위군에 차출되었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져 귀향조치되었으나 너무 굶주린 나머지 민물게를 잡아 생으로 먹었다가 이것이 간디스토마로 발병했다. 훗날 신동엽이 간암으로 요절하게 된 이유가 거기 있었다.(위의 사진은 국민방위군으로 차출된 장정들이 행진하는 모습이다.)
군복무중 휴가차 고향 부여에 들렀을 때(금강 기슭에서 부인 印炳善과 함께) -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한 두 사람. 인병선 여사는 후에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운영해 왔고, 2002년엔 이 박물관을 부천시에 기증해 시립 박물관이 되도록 했다.(2003년 부천시에 개관 예정)
60년대 후반, 도봉산 등산길에서 -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시인 신동엽은 자주 등산을 했고, 집 안에서도 물구나무 서기나 요가 같은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술은 멀리하지 못했다.
신동엽 생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원래는 이엉을 얹은 전통 농가였는데 관리 문제로 기와를 얹었다고 한다.)
신동엽 시인의 연혁(1930~1969)
1930년 8월 18일 충청남도 부여읍 동남리에서 출생 - 부여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단국대 사학과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여러 우여곡절 끝에 20여 행을 삭제하고 그나마 당선도 아닌 입선이었다.)
1961년 명성여고 국어교사로 취임(작고시까지 재직)
1963년 <산에 언덕에>, <아니오> 등을 담은 시집 『아사녀』 출간
1966년 詩劇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연
1967년 펜클럽 작가기금으로 장편서사시 『금강(錦江)』 발표
1968년 오페라타 <석가탑>(백병동 작곡)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김수영 사망)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별세. 경기도 파주군 월롱산 기슭에 안장
1970년 4월 18일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에 詩碑를 세움
1975년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으나 내용이 긴급조치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당함
1979년 유고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발간
1980년 『증보판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됨
1982년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을 제정, 첫 지원대상자로 소설가 이문구가 선정된 이후 2002년 현재 20회(수상자 시인. 최종천)에 이름
1985년 5월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신동엽 생가' 복원
1988년 미발표 시집『꽃같이 그대 쓰러진』, 미발표 시집『젊은 시인의 사랑』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
1989년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
1993년 11월 20일 부여읍 능산리 왕릉 앞 산으로 이장
주요 시집으로 『아사녀(阿斯女)』(1963), 『{신동엽 전집』(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0), 『꽃같이 그대 쓰러진』(1989), 『금강』(1989),『젊은 시인의 사랑』(1989)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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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동엽 시인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어떤 계기로 그를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아마도 시를 좋아하던 친구의 소개가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이야 세월이 많이 좋아져서 신동엽을 비롯해 김수영 등 여러 좋은 시인과 작가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배울 수 있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무렵에는 그런 이들의 시를 드러내놓고 읽는다는 것 자체가 '문제적 자아를 지닌 학생'으로 찍히는 첩경이었다. 다행히도 여러 문제아들과 함께 뒹굴면서 우리들은 신동엽, 김수영, 신경림, 김지하, 문병란, 양성우 등의 시집을 읽었다. 우리들은 작은 동아리를 만들어 <늘 깨어있는 글>이라는 언더그라운드 잡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돌려보면서 토론하고, 카페를 빌려 시낭송회를 개최하기도 했었다. 그때가 1987년, 1988년 무렵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카페와 성당 지하의 주일학교 교실을 빌려 다른 학교 문예 서클 학생들까지 초빙해서 함께 시를 읽으며 고민했었고, 그 멤버들이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은 87년 연말 대선을 앞두고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서울지역고등학생 운동연합'의 농성 현장에서 였다.
우리는 신동엽 시인을 통해 하늘을 보았고, 잠시나마 열린 하늘을 통해 자유의 푸르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슴시린 하늘은 모두의 가슴에 때로는 가슴 뜨거운 희열로, 때로는 상처로 자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들은 그때 하늘을 보았던 것인가?
이야기하는 쟁기꾼, 신동엽 시인의 유년기
신동엽은 일제의 수탈이 한창이던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해 7월엔 함경남도 단천에서 군민 수천 명이 삼림조합에 반대해 군청과 경찰서를 습격했고, 그 와중에 일본 경찰의 발포로 1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고, 8월에는 평양 고무농장 노동자 1,800여명이 임금 인하 조치에 항의하는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독자였던 그의 부친 신연순에게는 전처 소생의 남매가 있었으나 아들이 돌을 넘긴 얼마 후 사망해 신동엽은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시인의 모친은 신동엽을 낳은 뒤로도 아이를 일곱이나 낳았지만 모두 딸이었고, 그 중 위로 셋은 일찍 죽고 만다. 아이가 태어나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기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던 데다가 아들로는 그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가 신동엽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지금은 부여시 한 복판이 된 그의 생가엔 얼마전까지만 해도 시인의 부친이 생존해 거처하고 있어서 생가를 찾는 이들에게 고인이 된 시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고 한다.
어려서 형제를 여럿 잃은 그의 유년 시절은 친구들과 뛰어놀기 보다는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을 적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어린 신동엽은 자신의 이복 누이인 신동희(1928년생)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고 하는데, 이는 태어나자마자 친어머니를 잃은 누이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를 마치 위인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처럼 비유하는 것 같아 부적절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정이 많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와 알고 지낸 동료 문인들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1937년 부여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그는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타며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6학년 되던 1942년 4월에는 부여 국민학교 대표 자격으로 일본 '내지 성지참배(內地聖地參拜)'라는 것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부모가 거는 기대는 컸다. 가난한 집 수재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신동엽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학비가 들지 않는 전주 사범에 진학했다. 사범학교는 지방학생들 모두에게 기숙사 생활을 시켰고, 학비를 모두 관에서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사범학교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초등 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엄격한 규제를 통해 그들이 요구하는 교원을 양상하고자 숱한 제약과 통제를 가하는 곳이기도 했다.
더욱이 일본은 1941년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내지(일본)인들에게 조차 극도의 내핍 생활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 무렵이었으니 비록 관에서 제공하는 식사라 할지라도 형편없는 것이었다. 신동엽의 아버지는 학교측에 사식원을 제출해보기도 했지만 학교측의 답변은 '국난시라 인고단련을 해야한다'며 이를 허가해주지 않았다. 결국 생각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음식을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부여에서 전주를 왕복했다고 한다. 신동엽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찾아온 분단상황과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은 같은 민족끼리의 좌와 우로 갈린 내분을 불러 일으킨다. 이 와중이었던 1948년 신동엽은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전주 사범을 퇴학당하고 만다. 이 해에는 남한 단독선거 반대 전국 총파업시위가 벌어졌고, 제주도에서도 단정 수립에 반대하며 4·3항쟁이 일어났다. 그런 중에 학교 공부보다는 이런저런 독서를 즐겨하던 그를 두고, 좌우 양측에서 밀고 당기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매우 컸으리라 생각된다. 서로가 극심하게 대립하는 동안 중도의 길을 택한 사람은 양측으로부터 배척당하기 마련이고, 해방 정국에서 그런 길을 모색하려 했던 정치가들 -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 - 은 암살당하기 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어쨌든 그가 퇴학당한 것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참여했기 때문인 것 같다.
분단과 한국전쟁, 국민방위군 사건과 신동엽
전주 사범을 중도에 그만두긴 했지만 그에게 초등학교 교원 자격은 인정되어 인근의 어느 국민학교에 발령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임 사흘 만에 전주 사범 시절 그와 대립하던 사람이 마침 같은 학교에 와 있었던 까닭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밭 600평을 팔아 신동엽으로 하여금 단국대 사학과의 등록금으로 주었다. 박봉우 시인의 회상에 의하면 그가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대학도 이름을 잘못 알고 찾아갔다가 귀찮아서 그냥 그 학교 원서 사 가지고 온" 탓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대학에 들어간 신동엽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땅에 들이닥친 외세에 의한 분단 현실에 대해서 고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인 부여로 피난갔다가 그곳에서 인민군에게 붙들려 7월부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강제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뒤 그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그해 12월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여러 곡절 깊은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그가 휘말려든 것이다. 원래 국민방위군이란 것 자체가 중국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면서 이승만 정권이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자 혹시라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될지 모를 젊은 장정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서 급조해낸 일종의 예비군과 같은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엄동설한에 소집된 장정들에게는 피복이나 식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그나마 지급되어야 할 물품들은 중간 관리자들이 모조리 착복해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장정들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두 사람 앞에 하나씩 지급되는 가마니 한 장씩을 덮고 자야했다. 그 결과 소집된 50만 명의 젊은 장정들 중 무려 5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신동엽도 이 때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은 물론이다. 이듬해 2월 다시 귀향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그는 민물게를 생으로 잡아먹는 바람에 간디스토마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 상한 그의 간은 영영 회복되지 않아 결국 그가 나이 40세도 안되어 요절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신동엽 시인을 두고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 시인이라고 평한다. 그는 외세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엔 좌우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연이어 들이닥친 한국전쟁이 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남겨주었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깨우칠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는 '국군이 북한 괴뢰군을 잘 막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를 믿고 시민들이 피난 보따리를 내려놓던 그 시간에 정부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후의 사태가 정부의 발표를 믿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국민을, 국민을 버리고 피난가 버린 정부가 처벌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수복후 서울시민을 도강파(渡江派)와 비도강파(非渡江派)로 분류하고 피난가지 않은 사람들을 부역자라는 이유로 처벌했다. 그리고 1950년 7월14일 이승만은 한 장의 서한을 통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넘겨 준다. 이것이 바로 '대전협정'이다. 이 날 이후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현재까지 미군이 가지고 있으니, 이는 주권 국가의 수치다. 시인 신동엽은 그런 시기를 살아왔던 것이다.
시인의 사랑과 생활
전쟁 기간 동안 '대전 전시 연합대학'을 졸업한 신동엽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일을 도우며 자취 생활을 했다. 그 해 초겨울 어느 따뜻한 날 신동엽은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던 단발머리 소녀 인병선(印炳善)을 이곳에서 만난다. 그녀는 남편 신동엽과 사별한 이듬해인 1970년 <여성동아>에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인과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서 한낮이 되자 나는 집 근처 책방으로 신간 서적을 사러 나갔다. 가끔 들러 주간지와 월간지를 사오던 서점이었다. 몇 가지 뒤적이다 찾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방 주인에게 "○○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책은 아직 못 갖다 놓았읍니다만 그 대신 이건 어떨까요?"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나는 책을 따라 자연히 그와 마주섰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 깊이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 크고 빛나는 눈! 비록 작달막한 키에 빛 바랜 허름한 군복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빛나는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눈빛은 너무 깊고 넓어 나의 온 가슴을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의 해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맵찬 눈매를 한 소녀가 가끔 들러 대중잡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예지 아니면 사상지 그리 어려운 학술 서적만 사가더란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해서 부여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매우 가난했고, 아내 인병선이 양장점을 개업하면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신동엽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인의 꿈을 키우며 보령농고에 취직한다. 그러나 간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병을 폐결핵으로 생각했으므로아내와 헤어져 본가에서 잠시 요양하게 된다. 그는 이 때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창작하여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된다. 이때 예심 심사위원을 맡았던 시인 박봉우는 그의 시를 심사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본심 심사위원에게 "굉장한 장시입니다. 문단이 깜짝 놀랄 겁니다."라며 추천했지만 본심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우리 시단의 시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동엽의 시는 20여 행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입선되었다. 시상식날 나타난 신동엽은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입은 완전 촌놈의 행색이었는데, 박봉우 시인은 그가 혼자서는 도저히 여관을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자신의 자취방에 데려다 재웠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박봉우와 신동엽은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문단에 데뷔했다고 해서 그의 생활이 갑자기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부인 인병선의 회고에 따르면 "결코 훌륭한 남편감은 아니었"다. 그는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집안 일을 챙기거나 생계 문제에 신경 쓰기 보다는 마음맞는 지기들과 술을 마시거나 그렇게 잘 했다는 노래 부르며 어울리기를 즐겨했다. 그러나 자식들의 회고에 따르면, 신동엽은 아버지로서는 더 없이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밤이면 어김없이 한두 번씩 건너가 세 아이들의 이불을 고쳐 덮어주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인은 "....일찍 가시려고 그랬을까. 평생 쏟을 사랑을 한꺼번에 쏟으려 한 것일까, 그의 가정에 대한 사랑은 지니치다 싶게 지극한 것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꾸준하게 다닌 직장이 바로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일이었다. 교육평론사를 그만두고 그는 교직을 물색하던 중 자리가 쉽게 나지 않자 소개는커녕 사전통고도 없이 명성여고 교장실로 뛰어들어가 심태진 교장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시작품들을 스크랩해놓은 노트를 던져두고 나왔다. 이를테면 그것은 "저는 이런저런 사람인데, 읽어보고 국어 교사로 씀직하면 한 번 써보시오"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화 끝에 그는 1961년부터 이 학교의 야간부 국어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교사로서 신동엽은 매우 성실한 스승이자 제자들에게 인기도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그의 맏딸 신정섭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재직하고 있던 명성여고 교지의 앙케이트란 같은 것을 보면 부친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으며, 시험문제를 출제하더라도 완전 주관식 문제를 출제해 '무엇무엇에 관해 논하라'는 식이었다. 그의 집엔 학생들이 자주 놀러 왔고, 그때 배운 학생 중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틈나는대로 찾아오는 이도 있다고 하니 그의 가르침이 단순히 입시 위주의 교육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신동엽은 비록 집안 소소한 일에는 등한한 편이었지만 장자로서의 책임감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부여 친가에서 밑의 동생들을 차례로 데려다 공부를 시키거나 취직시키는 등 자식된 도리를 다 하려 노력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시인이 된 녹두장군. 신동엽
신동엽의 체구는 잘 알려진 대로 작은 편이었고, 어려서는 굶주림과 가난을, 국민방위군 시절을 거치면서 영양실조와 간 디스토마까지 앓아 매우 병약했다. 그러나 신동엽의 쏘는 듯한 안광 만큼은 매우 또렷하게 빛났다는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를 듣노라면 녹두장군 전봉준의 인상이 떠오른다. 1969년 3월 중순, 40세의 신동엽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고, 그동안에도 그는 술을 마셨다. 결국 입원치료 일주일만에 병원측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퇴원을 지시했다. 그리고 며칠 후인 4월 7일, 신동엽은 문병 온 작가 남정현의 품에 안긴 채 마지막 숨을 거둔다.
우리들은 신동엽과 김수영을 다만 참여시의 양대 산맥쯤으로 생각하지만 두 사람의 시세계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김수영의 경우엔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지만 김수영이 도회지 출신(종로6가)으로 도시적 감수성의 시를 썼다면 신동엽은 농촌 출신으로 농촌 공동체적,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지녔다. 주제면에 있어서도 김수영이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출발해 '자유'의 문제를 탐구했다면 신동엽은 이것을 민족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시어들은 그의 실제 삶 체험에서 녹아든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신동엽은 외세 강점기인 일제 말기에 태어나, 외세의 대리전쟁이랄 수 있는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엔 밀려드는 외세의 문물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우리의 현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한 시인이었다. 그가 오늘날 참여시의 원조격으로 분류되는 탓에 그의 시어가 지닌 농밀한 서정성을 등한히 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의 시가 지닌 품격은 단지 그가 참여적인 강한 메시지를 담은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가 지닌 높은 문학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신동엽의 작품세계를 논하는데 있어 그의 시가 지닌 참여 의식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당시 우리 문단은 분단 이후 김수영이 일찍이 한탄한 바 있듯이 "알맹이는 다 가 버리고 쭉정이만 남은 상황"에 다름아니었다. 신동엽의 데뷔 작품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시 문단의 시풍과 매우 다르다는 이유로 20여행이나 삭제되는 수모 끝에 당선 아닌 입선으로 문단에 나오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50년대 전후의 한국 시단은 마치 90년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창궐했던 포스트 모더니즘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알맹이는 빠진 채 허무니, 실존이니를 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국적불명의 외래사조들이 넘쳐나는 시기에 신동엽의 전통적인 서정을 노래한 듯이 보이는 시는 시대에 뒤처졌거나 오히려 신선하게 여겨지도록 했다. 신동엽은 이런 문단의 분위기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4월 혁명 무렵의 신동엽은 문단에 데뷔한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에게 있어 암울하기만 했던 역사 체험(이미 이전에 그는 <진달래 산천>, <새로 열리는 땅> 등을 발표)이 극적인 분수령을 맞이한 순간이기도 했다. 4월 혁명은 김수영은 물론 신동엽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4월 혁명은 오래지 않아 그 숨이 끊어져 버렸다. 김수영은 다시 음울한 어조로 돌아갔고, 신동엽 역시 깊은 침잠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신동엽도 김수영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바퀴를 굴리기 위해서는 시인의 풍자와 예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치명적으로 느낀 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신동엽이 본격적인 참여시인의 면모를 드러내게 된 계기는 1964년 6.3 사태를 겪으면서였다. 그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서명에 참여하고 <발>, <4월은 갈아엎는 달> 등을 발표한다. 그리고 1967년엔 그의 대표작인 <껍데기는 가라>와 <금강(錦江)>을 발표한다. |
신동엽 시비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시비에는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서정적인'산에 언덕에'가 새겨져 있다.(대학 1학년 때 부여로 갔던 MT때 저마다 이 시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옆에 있는 반공 어쩌구 하는 기념비가 나오지 않게 조심하면서. 신동엽 시비는 원래 이 위치에 건립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소위 지역 유지라는 이들이 신동엽의 소싯적 행적 중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며 반대해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고, 그 옆에는 시비보다 더 큰 반공기념비가 서 있다.)
『증보 신동엽 전집』/ 신동엽/ 창작과비평사
『금강』/ 신동엽/ 창작과비평사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창작과 비평사
『꽃같이 그대 쓰러진』/ 신동엽/ 창작과비평사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 우리교육/ 2002년
* 이외에도 신동엽 시인에 대한 연구서 및 저서들이 새롭게 많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시인 신동엽을 위한 홈페이지 - 나루지기 김현석님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로서 시인 신동엽의 생애와 연혁, 주요 작품들에 대한 분석을 읽을 수 있는 매우 좋은 사이트입니다. 그외에도 신동엽 시인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여러 책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분들은 이곳을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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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의 수립과 진정한 민족시인. 신동엽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말들이 만들어진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문학평론가 채광석을 필두로 민족문학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우리 문학과 평단이 그런 인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였다. 그런데 신동엽은 그런 이론들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시 창작을 통해 민족문학을 정립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전문>
신동엽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껍데기는 가라>를 두고 어떤 이는 "어떤 사회과학자의 명쾌한 논문도 이 시의 선명한 메시지에는 미치지 못하리라"라고 평가하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4월 혁명도 그 알맹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라고 말한다. 문학은 다른 예술과 달리 기본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다른 예술도 매한가지겠지만 특히 문학을 다른 예술 분야와 경계 짓도록 만드는 부분은 타 장르의 예술에 비해 이성에 호소하는 바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성이 설명치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바를 그의 직관과 감각으로 단번에 찔러 버린다. 시인에게 내려진 최고의 상찬 중 하나인 예언자적 숙명은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이 시는 혁명을 배반한 자들, 또는 외국의 허접한 이론과 문화들을 그 외피(껍데기)로 뒤집어 쓴 자들을 모두 밀어내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이들에 의해 "한라에서 백두까지" '쇠붙이(무기와 분단, 외세)'를 내몰자고 선언한다. 그 주체는 바로 "향그러운 흙가슴"을 지닌 이들이다. 신동엽은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현실의 어려움에 대해 굴하지 않는 정신을 담아 시를 창작해냈다. 강한 메시지를 지녔음에도 그의 작품들은 메시지에 함몰되지 않고 신경림이 말한 것처럼 "민중적 서정성"을 획득한다. 우리 문학은 그를 통해 김지하를 비롯한 후대의 많은 시인들로 하여금 좀더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는 터전을 얻었다.
1968년 초겨울 어느날 서부전선 시찰길에 나선 문인들 - 왼쪽부터 문학평론가 임헌영, 소설가 박용숙, 시인 신동엽, 소설가 정을병, 남정현, 시인 이승우, 한승헌.
1987년이 저물고, 새롭게 밝아 버린 1988년의 어느 겨울날. 우리들은 차갑고 어두컴컴한 지하 골방에 앉아 지나간 1987년의 흥분을 곱씹어야 했다. 1987년에 우리가 품었던 희망은 거짓이었을까. 동족을 학살한 주모자인 전두환과 그 충실한 추종자였던 노태우를 구속시키고, 민주주의와 통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민간정부를 수립하자는 당시의 투쟁의 목표는 과연 성공했던 것일까. 우리는 담요 한 장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덮히며 생각했다. 우리를 억압하는 체제와 질서를 우리는 전복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비약(飛躍)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체제와 억압은 시민의 저항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더욱 야비해지고 교묘해질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의 정부로, 문민 정부로, 그리고 국민의 정부로 얼굴만 교체해 가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하지만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그 알맹이는 여전하다.
진정한 민족 시인이었던 신동엽의 외침, "껍데기는 가라"는 여전히 유효한 구호인 것이다. |
첫댓글 껍데기는 가라에서 얼핏 본 이름이였는데, 이런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동엽시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