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신문 입사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1982년이다, 필자는 인륜지대사 큰 선물이 내려 그 해 장가를 갔다. 결국 사진 한 장이 아내와의 백년가약을 맺어준것이다.
전우신문 입사한지도 2년이 지나니 예전 일간신문에서 배우고 익힌 경험이 되살아나고 마침 서구 신문의 디지털화 바람으로 편집방침이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전환되던 시기여서 더욱 능력이 발휘 되었다. 전우신문은 가로쓰기 편집 선두주자였기에 이윽고 일간신문들이 가로편집으로 들어서자 전우신문 편집기자들이 대거 일간지로 이동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전우신문도 특집부를 사진부를 개편해 사진기자도 보완하고 승리화보를 만들어 대내외 국방홍보의 위상을 드러내던 참이었다. 매 주 마다 1면에 통단 사진기사를 배치해 좋은 사진들은 가시효과를 드러냈다. 일에 대한 한 두려움이 없었던 필자는 젊은 기지를 맘껏 발휘하며 땅과 바다, 하늘을 누볐다.
이런 왕성한 시기에 배우자를 만나게 한 것은 동작동 국립묘지에서의 취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예전 신문사 동료 배우자의 소개로 만난 짝꿍은 썩 내키지 않았는지, 처 할머니께서 “천주교 세례를 받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며 묘한 운을 떼었다. 하루는 친절하게 옥수동 한옥 집앞까지 배웅을 했는데 문밖에서 "웬놈이 이 늦은 밤에 여염집 처자를 넘보느냐." 며 물바가지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결혼이 성사 되든 말든 종교는 어차피 하나 가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천주교 명동성당에서 교리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충일이 다가오자 대민홍보를 신문방침에 일환으로 내걸었던 뜻에도 부합하는 의미로 '어린이들과 군인과의 만남' 이란 이미지가 떠올랐다.
마침 배우자가 운영하고 있는곳이 어린이 미술학원이어서 '어린이들을 현충원에 일일학습겸 초대하고 싶다.' 고 하자 학부모님들과 상의해보겠다고 하더니 며칠 만에 회답이 왔다. 학부모들도 매우 반가워하고 우리 학원도 협조하기로 했다 고,
필자는 사무실에 대형버스 한 대와 동작동 현충원에는 육, 해, 공군 의장대와 군악대 지원 협조요청을 했다. 사무실 차량계서는 ‘전기자가 또 뭔 일을 저지르나 보네’ 웃으며 이른 아침 영등포 신림동 학원에 도착해 신나해 하는 어린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학원선생님 등 40여명을 승차시켰다.
순국선열들 묘소 앞에 숭고한 표정을 지으며 꽃을 바쳐 든 어린이들, 그 뒤로 육, 해, 공군 의장대가 참배를 올리자 군악대의 추모곡이 울려 퍼졌다. 순간 나의 카메라 렌즈도 떨렸다. 결국 이 한 장의 사진이 배우자와의 평생 가약을 맺어주는 동기가 됐다.
훗날 아내는 그때 현충원에 학원생들과 다녀온 후 "어떤 일도 옳다고 생각하면 두려워 하지않고 실행하는 필자의 신념을 보곤, 자신을 평생 굳게 지켜줄것이란 믿음이 들게 되었다." 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