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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렇게 늙어간다
박 경 승
어느 세대나 그렇겠지만, 내 생각에 우리 학년은 유독 많은 변화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잔나비띠여서일까, 항상 새로운 변화가 많았고 새로 바뀌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당연히 박정희인 줄만 알았고, 박정희나 김일성이 잘못되면 한쪽 체제가 끝장나는 줄 알고 자라왔다.
초등학교 5학년때, 갑자기 전국이 울음바다가 되었고 어린 우리가 느끼기에도 사회가 뒤숭숭해졌다. 바로 10. 26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아직도 김재규의 거사에는 많은 의혹점이 있고 알수없는 점들 투성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대한민국도 대통령이 바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랬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어야 정상이고 끝없이 변해가야 정상이다.
제2의 베이비붐 세대답게 우리학년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달랐다. 당시는 국민학교였는데 학생 수가 많아 오전 오후반을 운영할 정도로 교실이 부족했었다. 때문에 여수시내에만 2개의 초등학교가 생겨서 우리학년이 자산초등학교와 봉산초등학교의 1회 졸업생이 되었다.
6학년때에는 한참 여름방학을 즐기며 놀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소집을 시키더니(그때는 집에 전화기도 별로 없을때인데 용케도 모일 사람은 다 모였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정화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최초의 초등학교 정화위원회 구성멤버들이 되기도 했었다.
어차피 우리야 어려서 별 관심이 없었지만 중학교때는 최초로 야간통행금지가 없어지기도 했었다.
중학교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진학할때 최초로 충덕중학교가 신입생을 모집하여 또 1회 신입생이 되었고, 교정도 제대로 안갖추어진 상태로 우리는 입학을 하게 되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최악의 중학교 생활이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14살의 학생들에게 군대식 거수경례를 올리며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게 했는지, 그놈의 군대식 제식훈련을 왜그렇게 열심히 훈련해야 했는지 아직도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하필이면 우리학교는 구호가 '충덕'이라 다른학교 친구들에게 놀림깨나 받았다. 풍덕중학교 또는 퐁당중학교라고 놀려도 할말이 없었다.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교 교문이 생기고 학교 철봉을 공고 형들이 와서 용접을 해서 만들어주고 운동장에 축구 골대 하나 들어서는게 그렇게나 힘든 일인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이든 선생님들은 조선놈들 어쩌고 하는 소리를 시시때때로 내질렀고, 군대식 얼차례나 가혹행위를 무슨 남자다움의 표상인양 스스럼없이 해대며 으스대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우리에게 계속 최초의 변화가 찾아왔다. 중학교를 입학하면 당연히 입어야 했던 일제식 교복, 수십년 동안 학생의 상징이던 그 시커멓던 교복과 짧은 스포츠 머리가 자율화 된 것이다. 2년동안 교복을 입고 3학년 1년은 사복을 입고 다녔으니, 중학교를 교복과 사복을 동시에 입고다닌 최초의 학년이 바로 우리 학년이다. 1년 선배들은 중학교때 사복입은 기억이 없을 것이고 2년 후배만 해도 그 일제식 교복은 입어보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복이 많은 것일까 없는 것일까.
여담이지만 교복자율화가 발표되던날 미술선생님께서 우리반 65명 전원에게 일일이 사복을 입게 되엇는데 너는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라고 물어보신 일이 기억난다. 왜 그러셨는지 조금 궁금하다. 아마도 그분은 학생이 학생답지 않아진다고 생각하신 듯 했고 시건방져질 생각에 들떠있는 우리들이 모습이 못마땅하셨던듯 했었다. 65명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나서 나중에 하신 말씀의 요지가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고 어쩌고 그런 말씀이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선생님께서는 조금 착각하신 것이 당시 65명 중에 어떤 자신만의 의견을 확실히 말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고 그도 그럴것이 우리가 원해서 쟁취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사복을 입고자 열망한 것도 아니었으니 우리는 별로 선생님 생각처럼 들떠 있지도 않앗던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 뉴스를 보고 어머님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했었고 그 어린 나이에도 빈부격차에 따른 차별을 미리 떠올렸었다.
3학년 첫 등교일날 어머니가 새로 사주신 사복을 입고 학교를 가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벌써 40여년 전의 일이 그렇게도 생생히 기억되는 것을 보면 사소한 일이든 거창한 일이든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최초의 순간은 항상 선명히 기억되는 것 같다.
처음... 최초... 첫... 이런 단어들이 주는 신선함과 생소함 그리고 설레임...
생각만으로도 가슴뛰고 설레이던 많은 순간들. 새내기..첫사랑..첫키스..첫이별 ..
이제는 그러한 단어들이 수많은 순간들 속에 한 순간을 표현하는 그냥 단어가 되어버린 50대.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것은 가슴뛰게 하는 단어들이 하나씩 없어져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4년 3월
여수고를 진학했다. 한마디로 어마무시했다. 입학과 동시에 밤10시에 학교가 끝났고 매일같이 까막지 쓰기를 해야 했다.
정말 잊지못할 고영환 교장선생님. 그분의 카리스마와 추진력, 열정은 정말 대단했었다.
와튼스쿨, 와세다대학, 진주대아동명 고등학교, 장대언덕의불야성, 버즈학습, 등등 매주 월요일 조회시간에 되풀이되는 정신교육.
지금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우리 여수고등학교에 있어서는 거의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분이시라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성과와 발전을 이룩해낸 공이 확실한 반면 그 속에서 우리가 희생해야 했던 많은 것들.
우리는 명문 여수고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입학하자 마자 이름이 아닌 분단번호로 불리우게 되었고(흔히 학교에서 부여하는 학급번호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성적순으로 그사람의 번호를 매겨서 수업시간에도 활용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3분단1번은 그분단에서 공부를 젤 잘하는 학생이고 8번은 꼴찌인 학생이다. 그분단 번호를 알면 그 학생의 성적을 전교생이 다 짐작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번호이다) 정말 끔직한 것은 시시때때로 무기명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같은반에 학습분위기를 저해하는 친구의 이름을 적어내게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이름이 적힌 학생들은 따로 교육을 했고 교무실로 호출되기도 했다. 친구들간에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것도 부족해 내주변 누군가가 나를 밀고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교실 분위기... 지금 생각해도 끔직하다.
사실은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실컷 떠들기도 했고 놀기도 하고 담장도 넘어다니고 했지만 분명 잘못된 교육이었다고 생각된다.
누가 잔나비띠 아니랄까봐 고등학교에서도 최초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당시 교장선생님의 희망고문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수시로 너희가 최초로 순천고를 이겼다고 말씀하셨고
정말 어이없게도 도학력평가에서 순고를 이겼기 때문에 그 상으로 1학년에 수학여행을 보내준다고 하여, 1학년때 수학여행을 간 최초의 순간을 우리가 기록했다. 사실은 교육청 방침이었을 뿐이고 당시에는 속아서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참 억울해했었던 기억이 난다.
2학년때 갔다면 정말 재밌게 놀 수 있었을 텐데 순진하던 시절에 수학여행을 간 것이 너무 억울했었다.
수학여행 말이 나왔으니 거기에도 최초의 경험들이 묻어나온다. 당시 우리가 여행을 간 강원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서 애초 3박4일이던 수학여행이 하루 연기되어 4박5일로 늘어나게 되었다. 비록 비 때문에 어디도 못가고 여관방 안에서 모여 있었지만 그런 기억이 어디 흔하겠는가. 아마도 여행 도중에 1박이 추가되는 수학여행도 흔치 않을 것이고 더더욱 잊지 못할 일은 당시 우리나라의 폭우피해를 지원한답시고 북한이 최초로 시멘트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도 인터넷 어디를 찾아보면 그러한 기록이 있을 것이다.
1학년 말 정확히는 84년 12월14일, 돌산대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을 자처하던 전두환이 우리 학교를 들러 운동장에서 헬기를 타고 출발한 사건이 있었는데 아마 이것도 학교 최초의 일이 아닐까 싶다. 그 수일 전부터 흙산을 샅샅이 뒤지던 경호요원들, 그리고 1학년건물 옥상에서 햇빛에 반사되던 총열들, 잊지 못할 순간들 중에 하나이다. 덕분에 우리가 덕을 본 것도 있다. 학교에서는 당시 286컴퓨터 몇십대를 받아서 컴퓨터실을 만든 것이 수확이라 하겠지만, 활용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런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오히려 그 훨씬 전에 운동장 물빠짐 공사를 하기 위해 연탄재를 잔뜩 쌓아두었고 그것을 우리 학생들이 직접 체육시간 등에 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대통령이 온다니까 순식간에 포크레인을 불러서 공사를 마무리해 버린 것이 우리에겐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1986. 3월
그렇게 우리는 3학년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변화는 또 찾아왓다. 그 유명하신 고영환 교장선생님께서 광주로 가시고 김용백 교장선생님께서 부임해 오신 것이 가장 첫번째 변화였다. 드디어 교정에 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3이었고 교장선생님이 바뀐 것은 별로 실감도 못할 만큼 바쁘게 살아야 했다. 2학년 때까지는 10시에 끝나던 것이 3학년부터는 11시에 하교를 하게 되어 시내버스도 안다녀서 방향 맞는 친구들끼리 택시를 타야 하는 것도 작은 변화였고, 저녁 식사시간에 수많은 학부모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교문에 들어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꼴난 공부좀 한답시고 매일 도시락을 나르는 부모님들의 노력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그것도 잘못된 교육의 폐해였을까? 하여튼 집이 시골이거나 가난해서 부모님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배려나 어떤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게 생각했으니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잘못된 건 분명했다.
그 지겹던 월요일 조회시간이 대폭 줄어들었고, 그 유명한 용골대 이석주 선생님께서 학생과장을 맡아 공포분위기를 연출했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고3이라 별로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아마도 1년 후배들은 좀더 선명히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최초라는 변화는 공부에도 많이 있었다. 기존에 15과목 정도를 평가하던 것을 대폭 줄여서 우리는 최초로 9과목 시험을 보게 되었고, 또한 직전 선배들은 순천으로 가서 학력고사를 봐야 해서 많은 불편이 있었는데(지금의 여수 순천 거리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전날 미리 순천에 가서 숙소를잡아 자야 했다) 우리는 최초로 여수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수업시간에 공식적으로 다른 과목 공부를 하는 기이한 풍경도 연출이 되었고 학교에서 선택을 하지 않은 과목의 경우에는 완전히 관심 밖의 과목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과학 4과목 중에 우리 인문반은 생물을 선택했는데 그외 물리 지구과학 화학 과목은 과연 누가 관심있게 공부를 했을 것인가.
우리는 고3의 치열한 한해를 보내느라 잘 몰랐지만 그해가 그 유명한 86년 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막바지에 불어닥친 민주화 열풍, 그 수많은 왜곡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건대 집회에서 학생들이 전경들을 공격하는 장면만 편집해서 내보내는 뉴스들을 보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난다.
또한 고3이 되어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인연을 접하게 된다.
큰눈에 안경을 쓰고 우리와는 조금 다른 전북 억양의 말투를 쓰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 우리 담임선생님이 되셨다.
국어 중에서 고문을 가르치셔서 '나랏말쌈이'를 정말 무수히 듣고 또 무수히 듣고 외웠다.
그동안 우리가 배우고 겪어 왔던 선생님들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훨씬 민주적이고 훨씬 이성적이고 훨씬 지성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분처럼 엄정한 분을 보지 못했다. 행동이 과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일정한 선이 있었다.
다행히 훗날에도 인연이 계속되어 지금까지도 매년 뵙고 지내지만, 나는 내주변에서 우리 선생님처럼 반듯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게 마련인데 나는 그러한 선택의 순간이 오고 선뜻 어떤 선택하기가 어려울 때면
꼭 선생님을 떠올린다. 과연 선생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셧을까? 곰곰히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선택을 한다.
기질이나 성정이 판이해 꼭 선생님과 같은 판단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차피 인생은 매순간이 처음 접하는 순간들일진대, 선생님이라는 멘토가 가까이 계신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 새삼 감사할 뿐이다.
열아홉, 그 청춘의 강을 수월케 건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들 역시 그 작은 교실에서 60명이 모여 저마다의 강을 건넜다.
큰틀에서 보면 그냥 고3이라는 1년을 보낸 것 같지만, 개개인에게는 저마다의 아픔과 힘든 굴곡이 다 있었을 게다.
다행히도 커다란 문제없이 단 한명 낙오도 없이 자신의 1년을 지내고 우리는 졸업을 했다.
2007.년 졸업20주년
졸업20주년 행사는 동창회가 존재하는 한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이다.
못난 소나무가 선영을 지킨다 했던가! 어쨋든 나는 그동안 여수고 36회 동창회를 많이 이끌다보니 20주년 행사에도 우리반 모임을 책임지게 되었다. 다른 11개 반들과 달리 우리 반은 자연스럽게 열 몇명이 참석을 해주어서 어려움이 없이 치르게 되었다. 물론 모두의 노력이 가미된 탓이겠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 선생님께서 건재하시고 우리반의 영원한 반장 이용주 친구가 있어서 구심점이 되는 것은 아무도 부정치 않을 것이다.
2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담임선생님을 모시지 않으려 하는 반들이 꽤 있는 것을 보고 새삼 우리반은 운이 좋았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또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일을 최초로 하게 된다.
어렵게 모은 20주년 모임을 흐트리지 말고 매년 모이기로 반창회를 결성한 것이다.
하늘은 때로 예상치 못한 굴곡을 내려 일을 어렵게도 만들지만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인연을 준비해 주기도 하는 듯 하다.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것이 지금의 내나이에 선생님은 고향 임실 마을에 전원주택을 지어 귀향을 하신 것이다.
꽃재라는 아름다운 곳에 집을 짓고 꽃재별서 라는 멋진 이름도 지었지만 사실 쉽게 행하기 어려운 일인데,
과감하게 실행하신 선생님도 대단하시지만 응낙해주신 사모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매년 4월이면 선생님 댁에 모여서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처음에는 친목의 형태로 모이던 것을 정식 반창회 겸 상조회로 발전시켜 369 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모임을 만들었다.
이제는 벌써 12년이 흘러 다른 반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모임이 되었고 해마다 새로운 얼굴 한두 명이 나타나 그때마다 모임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해주니 정말 잘한 일이다.
매년 4월 셋째 주 토요일, 꽃재에 벗꽃이 봄비를 기다릴 때 쯤이면 보고픈 친구들이 모여든다. 때로는 족구 배구도 하고 때로는 산에도 가고 때로는 운동장 달리기도 하고, 아무리 유치한 짓을 해도 그저 즐겁다.
아름다운 자연에 좋은 친구들이 모였는데 어찌 맛난 음식이 빠지겠는가. 고향내음 풀풀나는 산나물을 사모님께서 준비하시고 소리만 들어도 즐거운 부침개도 준비하시곤 한다. 나이들수록 멋진 친구, 최진수가 전국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싱싱한 횟감과 해산물을 해마다 준비해오고 참 부지런하고 배울것 많은 친구 여상호가 맛난 여수 별미들을 준비해오곤 한다. 무엇이 부럽겠는가?
밤이 되면 속깊고 정많은 김홍철 친구 덕에 선생님댁 거실에 있는 노래방 기계로 맘껏 노래도 부른다. 마당에 불을 피워 그 숯불에 구운 고구마를 친구들과 소닥거리며 먹는 그 맛은 또 어떤가.
사실 고3때 같은 반이었다 해도 워낙 개인적 시간들이 없고 교실에만 매어 지내다 보니 서로를 알고 지내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우리가 40이 넘어 새로이 교분을 쌓다 보니 새삼스레 다시 발견하는 친구들이 모습도 참 많다. 어떨때는 깜짝 놀랄만큼 새로운 모습을 보기도 하고 어떨때는 어릴때 그모습이 그대로 생각나서 웃음짓게 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도 어쩔수 없는 50대 중늙은이들이 되었다.
가끔 나이를 생각하면 무서울 때가 있다.
속절없이 보내버린 시간들이 아쉽기도 하고
지나온 날들이 참 가슴저리게 그리울 때도 있다.
무얼하고 살았나 아차 하는 마음에 주위를 돌아보면
항상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연민을 믹스한 세월의 흔적들.
그렇게 늙어가는 것인가 생각하면 새삼스레 아버지의 등이 짠하게 보여지는 나이.
이제 나도 진짜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일까.
입벌리고 잠든 아내에게 괜히 고마워라고 혼자 말해보기도 하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진짜 다행인 것은
둘러보면 나하고 비슷하게 그저 고만고만하게
같은 모습으로 늙어가주는 친구들.
힘들기도 했을테고 어렵기도 했을텐데
학창시절 기억하나로 한없이 웃어주는 친구들.
그래!
나 이렇게 늙어간다.
욕심부리지 않고 친구들 건강한 모습에 같이 웃음지어가며
나 이렇게 늙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