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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10월 19일 함풍이씨 대종회 명칭으로 등록된지 5년이 되어 갈즈음 |
함풍부원군 이광봉 할아버님의 진정한 후손들이 함풍이씨 대동보 발행과 인터넷 족보 구축에 앞장서 매우 기쁘고 감격 스러웠습니다. |
지난 오랜세월 우리의 진정하신 올바른 선조님들께서 광봉 할아버님을 함풍이씨의 |
올바른 시조로 모시기 위해 온갖 고초을 격으시면서 노력 하셨지만 일부 힘있는 자 |
들과 자기의 이익을 위해 그에 동조하는 일부 일가님들의 반대로 아직도 함평이씨 편 에 남아있는 분들께 아쉬움을 전합니다. |
소인 정수! |
인사말에 즈음하여 제가 함풍이씨 대종회 참여와 청장년회장이란 중책을 맡게된 동기 를 말씀 드릴까 합니다. 어려서 말을하게 될쯤 어른들께서는 본관을 제일 먼저 가르치 |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기의 뿌리을 알 수 있는 책 바로 족보가 |
있기에 그리 하였겠고 조상의 얼을 본받기 위함 이었으리라 짐작 해봅니다. |
그리하였기에 저도 함평이씨로 알고 자랐습니만 저의 조부님께서는 함풍이씨라고도 했지요! |
함풍이씨 함평이씨는 똑같은 일가라는 설명도 잊지 않으셨답니다. 수백년동안 함풍이씨가 |
함평이씨로 둔갑한 역사이었기에 어른들께서도 혼란이 많으셨나 봅니다. 이런 혼란의 역사속 |
에서 제가 성인이 되어갈쯤 함평이씨 대동보란 족보을 접해보니 거기엔 이언 이란 역사에도 없는 인물이 우리의 시조로 올려있었으니 1년전 저의 인생 58년동안 그리알고 살아왔습니다. |
2014년 어느날 함풍이씨 카페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 함풍이씨 대종회가 등록 되기 전과 후에 도 함풍이씨 대종회에 많은 공을 세우신 권행 일가님께서 국사편찬위원회에 보낸 질의서와 회 |
신 내용을 보고 함풍이씨 시조는 함풍부원군 이광봉 할아버님께서 진정한 우리의 시조이시라고 |
확신 했습니다. 그동안 올바른 시조이신 함풍부원군 이광봉 할아버님을 증명하기 위해 열정을 |
가지고 노력해 주신 수많은 일가님들께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드리고 앞으로 전국의 많은 일가 |
님들께서 함풍이씨 대종회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
아직도 함풍부원군 광봉 할아버님의 자손 이시면서 함평이씨의 주장대로 시조를 이언으로 잘못 알고 계시는 일가 여러분들께서도 정보화 시대에 살아가고 계십니다. 진정 올바른 시조 할어버 |
님이 누구이신지 많은정보를 접하시어 함풍이씨 대종회에 적극 참여 부탁 드립니다. 대한민국의 |
성씨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고 대전에 뿌리공원이 조성되어있어 대한민국 각 성씨의 조형물에 |
각성씨의 시조와 훌륭하신 조상님들의 이름이 새겨지고 있습니다. |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나의 올바른 성씨와 시조을 알려주는게 우리들의 삶이고 임무라 생각 해봅니다. |
문명이 발달하여 바쁜 삶을 살다 보면은 조상을 잊고 살고 있는게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
어느덧 나이가 들고 지나온 삶을 되짚다 보면 나의 진정한 뿌리을 알고 싶고 훌륭한 조상님들을 자랑 |
하고 싶은게 동서양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라 생각 해봅니다. 대동보 및 인터넷 족보 구축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일가 여러분 가내에 항상 행복과 기쁨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
함풍이씨 대종회 청장년회장 이 정수 |
=설립 및 연역
-연역
◈ 함풍부원군 諱 광봉 祖
○ 관작 : 삼사사 벽상삼한삼중 대광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 함풍부원군
○ 배위 : 금성나씨(부: 나득황의 여)
○ 묘소 : 실전(나주 금성산 하)으로 설단봉사하다가 지금의 묘역에 봉분
○ 제사 : 매년 양력 11월 첫째 토요일 함평 만흥리 초동소재 유택에서 세일제로 봉사
◈ 약력(정인지의 고려사와 민지의 편년강목과 이색의 금경록 참조)
○ 1275(을해)년 고려 충렬왕 원년 출사. 정당문학이 되심
○ 1276(병자)년 고려 충렬왕 2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심
○ 1314(갑인)년 고려 충숙왕 원년 상호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새 정부 하례
○ 1319(을미)년 고려 충숙왕 6년 동지 밀직사사가 되심
○ 1320(경신)년 고려 충숙왕 7년 문하평리 되심
원나라에 인질로 가 계시던 충선왕이 토번으로 귀양 가실 때 모신 신하 세 사람을
삼충신(민지의 편년강목과 이색의 금경록에 기록됨)이라 하여 공신책봉을 할 때 이광봉
은 좌명공신을 받았는데 정인지는 고려사에 토번 귀양길에서 ‘이광봉’을 빼버리고
오히려 권한공과 함께 모반한 무리의 신유 귀양에 기록하였음.
이 기록으로 인하여 처음 족보할 때 참봉유인이 후손들의 출세를 막는다는 이유로 시조로 하지 말자는 의견을 내었고,
그에 따라 시조가 오늘날과 같이 바꿔치기 됨
○ 1321(신유)년 고려 충숙왕 8년 신유 귀양(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입도하지 않 고 권한공 등과 홍주에
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권한공 등과 모반한 사람을 나중에 공신으로 책봉할 수 있는가?)
○ 1324(갑자)년 고려 충숙왕 11년 삼사사가 되심
○ 1332(임신)년 고려 충선왕 원년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으로 책봉되심
◈ 奉祀 推進(봉사 추진)
○ 1963. 光逢조와 延조의 제단을 함평읍 만흥리 선영원에 설단 세일제(영모재 요감)
○ 1975. 10. 보사 착수(병진보로 발간됨. 1900년대 파보는 총 5회 발행하였음)
○ 1976. 9. 1 총회개최 부원군파종회 결성(회장 : 종성/ 부회장 : 종만. 정섭)
○ 1978. 4. 30 영모재 신축 준공(함평읍 만흥리 초동 부원군 재사-1977년 산역 후)
○ 1988. 12.1 교헌. 명헌. 래범. 기범. 강수 / 뿌리연구지 발간 배부, 진실규명 촉구
○ 2004. 6. 30 함평이씨 부원군종회 향사우 건립추진(위원장 등 간부진이 전국 순회)
○ 2010. 11. 6 영풍사 준공 봉안(회장:재진. 총무:재정. 재무:재복, 감사:규옥 판행)
○ 2011. 6. 25 함풍이씨 대종회 발족(회장:강수, 수석부회장 겸 총무 :권행, 부회장: 민성)
○ 2011. 10. 10 함풍이씨 등기부 등록(시조를 이광봉으로, 본관을 함풍으로)
○ 2011. 11. 5 광봉조를 시조로 모신 첫 세일제 봉행(강수 회장단이 추진)
○ 2012. 11.3 시조 세일제 봉행(영풍사-함평읍 만흥리 217-14,15 현장)
○ 2013. 11 2 시조 세일제 봉행
◈ 시조 바로 모시기 및 족보 바로 세우기 추진
○ 1791(정조 15년 辛亥) 12. 16 “함평이씨 족보사실록” 간행/후손 눌행재 이사직 著
1688년 최초의 대동보 간행을 위해 모이게 된 상황부터 1742(영조 18)년 임술보가 간행되기 까지 저간에 있었
던 이야기들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상세히 기술한다고 기록 이유를 밝히고 있음
○ 1988. 12.1 교헌. 명헌. 래범. 기범. 강수 / '뿌리연구지' 발간 배부, 진실규명 촉구
○ 1989. 10. 31 克諧(극해) 손 기범님이 '함이대동보 개수청원서'를 작성하여 대종회에 보냄
이후 강수, 종대. 궁범. 수범. 광범. 권행. 기성군 건환. 건규. 옥임 등이 광범위 사료를 찾아 밝히고 알리는데
무한 노력
○ 2006. 11.23 함평이씨 대종회(광주 쌍촌동 소재) 임원회를 소집한 장소에서 강수. 광범. 수범. 양범. 규옥
권행 등이 참석하여 시조를 바로 모시고 족보를 바로잡아 야한다고 역설. 토론 후 차후에 다시 토론하기로
해놓고 일방적으로 그 말을 어기고 함평이씨 대종회가 반박서와 내용통고문 등을 보냄
○ 2007. 함평이씨 족보평고 발간(저자 권행) 이후 2013년도 까지 보완수정하며 7판 인쇄
○ 2011. 6. 25 이후 서울 동대문에서 매월 첫주 토요일마다 시조를 바로 모시고 바른 족보를 하기 위해 꾸준
히 모여 의논(회장:강수, 부회장:권행을 위시해서 광범, 수범. 양범. 가범. 승범. 재정. 현범. 종학. 오포 길범, 재문. 규옥. 두백.
원주 재국, 대전광범. 상록. 민수, 기성군 건환, 옥임. 용임 등)
○ 2011년 11. 시조 세일제 이후 청장년회를 중심으로 양양. 홍천. 영광. 함평약곡 등의 시제에 참여하여 함평이씨 족보 오류 사실을 알림
○ 2011. 12. ~ 2012. 8 함평이씨 대종회 간부진들에게 시조가 뒤바뀐 것과 족보의 오류를 알리는 서신을 8
차에 걸쳐 보냄(옥임). 이후 함평이씨 대종회 측의 ‘강수. 권행. 옥임을 발보하고 고발하겠다'는 내용통고문
을 받음
○ 2012. 5. 25 제 4회 대전 효문화뿌리축제 참여 및 뿌리공원에 함풍이씨 조형물 공간 신청
○ 2012. 3. 광주 기성군가에서 무진보원본(함풍이씨족보)발견. 기성군회관에 가서 확인하고 기성군 후손들
과 회동(광범. 양범. 수범. 권행. 옥임) 족보사실록에서 밝힌 것과 같이 광봉조를 시조로하는 파를 족보 말미
에 별보로 기재해놓았음과 인문조 후손 손수의 방주에 인문은 광봉의 후손이라는 기록을 확인하고 족보사실
록의 진실여부를 재인식함
○ 2013. 10. 11 제 5회 대전 효문화뿌리축제 참여
○ 2014. 3. 바른 족보 수보를 앞두고 종친들의 동의를 구하러 다님 (족보편찬 동의서에 서울: 강수. 함성군파
계면. 명범. 재정. 규옥 /경기: 궁범 /대전: 재영 /광주: 기행 /죽음파:정범 /죽곡파 재범 등의 날인을 받아
대전 뿌리공원에서 열리는 함풍이씨대종회 임시총회 개최 알림장 발송)
->수고하신 일가님들: 회장대행 권행, 종학. 재문. 두백. 용임. 옥임. 기성군 건환
○ 2014. 3. 29 대전뿌리공원 내 체육관에서 함풍이씨 대동보 수보를 위한 임시총회 개최
(필선공파, 낭곡파, 죽곡파, 죽음파, 사과공파, 교수공파, 기성군파 등 60여 분 참석)
=조직도 및 운영진 연락처 (참고: 정관에 있는 조직 및 직책임. 도표로 그리시면 되겠네요. 참고로 청장년회와 족보연구회를
추가하면 좋을 듯)
회장 (명예회장. 고문단)
수석부회장
부회장
총무/ 재무/ 이사 /감사 // 청장년회 / 족보연구회/ 제례위원회/ 파종회/장학위원회 /사무국
연락처 (대표전화 : 00000000000000 )
=함풍이씨 향사일정
-시조 묘는 전남 함평읍 만흥리 산 16 번지에 영풍사 사당 옆에 유택이 모셔저 있으며, 세일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에 지낸다.
=오시는 길 ( 당분간 빼고 나중에 종무사무실이 생기면 넣는 것이 좋을 듯)
▢함풍이씨의 연원
=함풍이씨 유래
시조 : 이광봉(李光逢)
함풍이씨 시조(咸豊李氏 始祖)는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왕조의 제신(宰臣)으로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신 이광봉公이시다. 公
의 훈봉( 勳封)사실은 고려사와 여흥군 민지(驪興君 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과 한산군 목은 이색(韓山君 牧隱 李穡)의 금경록(金
鏡錄) 등에 재록(載錄)되어있다. 특히 박인간, 장원지와 함께 고려 3왕조의 삼충신이라 일컬음을 받았으며, ‘벽상 삼한삼중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이시다. 公의 후손들은 시조부군의 함풍부원군 군봉(君封)을 본관으로 하여 함풍이씨가 되었으므로
公을 득관조(得貫祖)로 모시고 있다.
고려국이 몽고족에게 시련을 당하고 내정을 간섭 당했을 때 원나라 연경(燕京)에 거주하는 충선왕이 전지(傳旨)로 고려국을 통치할
당시 전지를 고려국에 전하는 일을 광봉祖가 행사하였는데 후일 조선조에 들어와서 기록한 고려사에 ‘이광봉은 권한공 채홍철 등과
같이 권력을 남용하여 심양왕 고(暠)를 왕위에 올리려다 실패한 권간이라’하여 그 후손들이 출사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며 시조의
자리에서 밀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사실을 기록한 ‘족보사실록’의 발견과 더불어 뿌리를 찾고자 하는 종인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선조들의 국조방목 기록이나 우
리성씨 최초 족보기록과 국사편찬위원회에 다각도로 문의하여 회신 받은 내용 등에 의해 하나하나 풀어나가다 보니 광봉祖가 우리 성
씨의 시조임이 확실시됨으로서 우리 함풍이씨는 다음 족보인 2014년 족보부터 시조를 함풍부원군 부군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조선 인조 11년 계유초보(癸酉初譜)와 1688년도의 최초 족보인 ‘함풍이씨 족보(咸豊李氏族譜)’에 운(澐)조가 기술한 서문 첫줄을 보면
“함풍족보(咸豊族譜)는 함풍이씨 씨족(咸豊李氏 氏族)들을 기록한 책이라‘고 명시했으니 계유초보와 ’함풍이씨 족보‘에 재록된 모든
종인들은 함풍이씨(咸豊李氏) 인 것이다.
함풍이씨들은 사회각지에서 학문과 충절과 효행을 생명처럼 여기며 인륜의 가치를 추구해온 명문집안으로, 전남 함평군 함평읍 만흥
리 산 16번지 묘소 옆에 향사우 (享祀宇) 영풍사를 짓고 시조공과 그 아드님이신 정순대부 밀직제학 이연(正順大夫 密直提學 李延)
公과 장손(長孫)이신 봉익대부 밀직부사 이안저(奉翊大夫 密直副使 李安柢) 公과 차손이신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이안상(匡靖大夫 僉
議贊成事 李安相)공 등 삼세사현(三世四賢)을 경향각지에 흩어져 사는 공의 후손들과 함평의 유림(儒林)에서 매년 11월 첫째 주 토요
일에 제향( 祭享)하고 있다.
이광봉공의 후손들은 공의 잠덕( 潛德)과 여음(餘蔭)으로 과환( 科宦) 공신(功臣)과 충의. 도덕. 문장. 학행. 효열이 대를 이어 줄줄이 태어나 기성군 이긍(李兢), 영파공 이안(李岸), 약곡공 이문간(李文幹), 죽음공 이만영 (李萬營), 낭곡공 이억영(李億營), 죽곡공 이장영(李長營), 초재 이춘령(李春齡), 칠실공 이덕일(李德一)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호남(湖南)과 관동( 關東)의 망족( 望族)이 되었으며 현재에도 정치계, 경제계, 문화체육계 등 각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후손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활동하고 있다.
글 : 이옥임
= 함풍이씨 관련 고서기록
1."咸豊族譜譜咸豊李氏之族也 (함풍족보보함풍이씨지족야)" . ”원본의 표지 역시 “咸豊李
氏族譜(함풍이씨족보) "라고 되어있음. 이는 최초로 작성된 1633년 계유초보 (癸酉草譜 ) 서문임.
장양공 후손 운( 澐 )조가 작성. 즉 '함풍족보는 함풍이씨 종족을 기록한 책'의 뜻 입
니다.
2."咸平李氏(함평이씨)는 고려 密直司事 李光逢(밀직사사 이광봉)으로부터 示顯(시현)되었다"
(원문: 此其細可略也咸平之李自高麗密直司事光逢始顯 ). 이는 조선조에서 領相(영상)을 역임한 鄭澔(정호)대감
( 송강 정철의 현손 ) 의 유집인 丈巖集 (장암집)에 서술 됨. 또한 정호대감께서 이덕일장군 묘비에 " 咸李
高麗密直司事 光逢始顯無非府院君之後孫也 (함이 고려밀직사사 광봉시현 무비부원군지 후손야) "라고 기록 됨.
즉 함평이씨는 광봉조로 시현되었고 부원군 자손이 아닌 자가 없다. 즉 함평이씨는 모두 휘 이광봉조의 후손이
라는 뜻 입니다.
3." 咸平宗人草譜則仁問以光逢爲先代以孫秀爲子而無蘘三言~ (함평종인초보즉인문이광봉위선대이손수위자이무양삼언)”
이는 1688년 우리성씨 최초의 대동보인 “咸豊李氏族譜(함풍이씨족보) " (2012년 광주 종가에서 발견) 坤(곤, 권지 2)
131면 諱 孫秀祖 (휘 손수조)의 방주 기록입니다. 즉 휘 인문조는 휘 광봉조가 선대라는 뜻 입니다..
4. 족보상의 4세 휘 順之(순지)조의 방주에 ‘官至檢校興威衛大將軍配開州王氏有蔭光君忠翼之女( 관지검교흥위위대장군배
개주왕씨유음광군충익지녀)’ 라 했고, 개성왕씨 종족별기에 왕충익의 사위가 ‘咸豊人檢校興威衛大將軍順之(함풍인검
교흥위위대장군순지)’라 했으니 동일 인임. 개성왕씨 종족별기 끝머리 부기에 " 공족의 세계가 전하지 못한 것을 종
족별기라고 이르며 고려가 망한뒤에 그의 자손들이 한조사람이 된 것을 아울러 기재하였으니 ~ " 라고 기록됨. 조
선조에서 왕씨로 살아남을 수가 없어 성을 바꾼 사람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함평이씨 족보는 고려 충숙왕시대
휘 이광봉 조의 부친으로 기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5. "함평이씨 족보사실록"과 "죽곡집"에 의하면 ‘이광봉조의 후손 숙의 아드님에 이르러 형제가 7
인(인좌, 인형, 인원, 인관, 인계, 인검, 인문 )이다’고 기록됨. 이후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나
그 중 다섯 문중이 부원군 손에서 빠져나가 현재는 인좌, 인형 두 분만 부원군의 후손으로 남
아 있습니다. 7형제라는 근거는 손수조 방주에 인문조는 휘 광봉조가 선대라 했으므로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게 됩니다.
=함풍이씨 세계도 ( 인원 인검 인관 인계 인문조는 ? )
=함풍이씨 항렬도
일가(一家)의 항렬(行列)은 대저 나름대로의 원리(原理)를 좇아 옛 선조(先祖)로부터 30年을 주기로 이를 정
하였으며, 휘(衛) 광봉(光逢)으로부터 18世의 상계는 생략하고 그 이후 유자(儒字)로부터 38世까지의 항렬
표(行列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유(儒)○ | ○서(緖) | 민(敏)○ 돈(敦)○ | ○모(模) ○헌(憲) | ○환(煥) 계(啓)○ | ○기(基) ○범(範) | 종(鍾)○ ○열(烈) 재(載)○ | ○수(洙) 교(敎)○ ○행(行) | 근(根)○ 건(建)○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훈(勳) ○성(聖) ○현(賢) | 기(起)○ 규(奎)○ | ○회(會) ○선(善) | 원(源)○ 태(泰)○ | ○식(植) | 현(炫)○ 희(熙)○ | ○균(均) ○기(基) | 석(錫)○ 진(鎭)○ 호(鎬)○ | ○수(洙) |
37세 | 38세 |
| ||||||
병(秉)○ | ○열(烈) ○유(裕) |
※ 世와 世孫은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世孫이 된다. (예: 20世는 19世孫, 또는 20代는 19代孫 )
※ 世와 代는 같은 말이며 시조로 부터 순서을 뜻한다.
글 : 이 건환
=함풍이씨 족보사
(아래 도표는 명범 어르신 문증록 기록임. 비슷한 내용이 카페에도 있는데 년도가 좀 다르더군요. 확인요망)
족보는 한 씨족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서, 전하여 내려오는 선세(先世)의 체통(体統)을 올바르게 하고, 역대 조상님들의 위훈(偉勳)과 위업(偉業) 그리고 유훈(遺訓)등을 체계 있게 소상히 싣고 추원(追遠)하는 정성으로 조상님을 경모(敬慕)하며, 또한 명조수족(明祖收族)에 목표를 두고 동시에 자손들에게는 긍지(矜持)를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 조(同一祖)의 후손이면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동참(同參)하여 숭조목종(崇祖睦宗)은 물론 화합단결(和合団結)하여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족보사(族譜史)를 삼가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이조(李朝)초기인 1397년 나주(羅州) 회진(會津) 참의공(參議公)가(家)의 화재(火災)로 소장하고 있던 족보와 호구(戶口)가 소실되었으며 또한 임진병란(壬辰兵亂)등으로 구보(舊譜)등 문적(文籍)이 실전(失傳)되었다고 기록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1633년계유(癸酉)과 1663년계묘(癸卯)에 만들었다는 구초보(舊草譜) 2권은 아직 찾아 볼 수가 없고, 다만 서문(序文)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1688년 이조 숙종 때 최초로 무진대동보(戊辰大同譜)가 만들어졌으며, 1742년 임술보(壬戌譜)와 1758년 무인보(戊寅譜) 1807년 정묘보(丁卯譜) 1853년 계축보(癸丑譜) 1896년 병신보(丙申譜) 1924년 갑자보(甲子譜) 1957년 정유보(丁酉譜)까지 10호에 걸쳐 대동보(大同譜)를 수보(修譜)한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事實)이다.
우리의 보사(譜史)를 살펴보면 화재와 병란 등으로 족보와 호구가 실전 되어 믿을만한 문적이 없이 1688년 무진보(戊辰譜)를 처음 만들 때 경향(京鄕) 각지(各地)의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사가(私家)의 가승(家乘)을 모아서 고증(考證)하게 됨에 각각 그 내용이 다르자 각 문중에서 자기들이 소장하고 있던 가승이 옳다고 주장함으로 인하여 공정성을 잃은 채, 세계(世系)의 호착(互錯)과 호구(戶口) 연갑(年甲)이 도치(倒置)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호구변의(戶口辯疑)를 넣어 수보(修譜)하니, 의문이 일어나서 동족사이에 화해적으로 만들어져야 할 족보가 결국은 편보(偏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족보를 주관하였던 학덕 있는 어른들은 1688년 무진초보(戊辰初譜)를 한 뒤 매번 족보를 할 때마다 문적 등을 수집하여 올바른 족보를 만들려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한 정성을 역력히 엿볼 수가 있다. 그것은 수보(修譜)한 족보에 오착(誤錯)이 없다고는 보장할 수 없으니, 후손들은 족보를 수보 할 때마다 낙자서지(落者書之) 와자개지(訛者改之) 도자정지(倒者正之) 의자주지(義者主之) 오자변지(誤者辨之) 등으로 올바른 족보를 수보하라고 당부하신 유훈(遺訓)을 구절(句節句節)에 남기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우리족보의 내용을 보면 봉건시대의 사회제도 아래에서 반상의 구별과 귀천의 차별 등이 너무도 심했던 그 시대의 유물로서, 상기한 대로 우열이 심한 족보가 되어, 서차가 오착되었으며, 호구 연갑 등이 오착되어 있으므로, 족보를 할 때마다 동족 간에 올바르게 하자는 다툼이 있었으나, 뜻을 같이 못한 채 수보되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지난 1948년부터 대종회에서 대동보를 편찬 발간하기로 결의하고, 수보하는 일을 주관하여 추진하게 되자, 경향 각지의 종친들이 구보에 담긴 옛 어른들이 남기신 유훈에 따라, 이번의 대동보만은 명조수족(明祖收族)에 목표를 정하고 전 종인이 화합단결 하여 족보를 잘 아는 종친들과 머리를 맞대고 깊이 연구하여 올바른 족보를 수보하여 후대에게 떳떳하고 바르게 전수하고자, 여러 차례 건의한 바 있었으나, 대동보소에서는 무슨 연유인지 이를 수렴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1688년 무진보 발간 30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서문과 범례 그리고 의심스러운 변의를 번역 분석하여, 전국에 계시는 종친들에게 알리게 된 것을 매우 뜻있는 일이라 사료된다. 바라옵건대 이 뒤로 족보를 만들 때에는 조상님을 욕되게 하는 전철을 밟지 않도록 유념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여러분의 가정에 선조님들의 가호를 입어 무궁한 광영이 있으시기를 기원한다.
◈ 상의동정공(尙衣同正公)의 호구(戶口)변의 [상의동정공의 호구를 변의 하는 바 구보를 살펴보면 지원 2년 병자(丙子)에 호구(戶口)의 연령이 75세인즉 송나라 이종 경정3년 임술생(壬戌生)이 된다.]그러나 원(元)나라는 [지원의 연호가 두 곳에 있어 순제지원 2년 병자(丙子)라면 위로 계산하여 75세는 과연 송나라 경정 3년 임술생(壬戌生)이 된다.]
세조 지원13년 병자(丙子)라면 위로 계산하여 75세는 즉 송나라 영종 가태2년 임술생(壬戌生)이 되나 구보에는 순제지원2年 병자년(丙子年)으로 단정한다고 하였다.그러나 공의 제2손 예빈경(禮賓卿)의 호구를 살펴보면 황경원년 임자(壬子)에 년령이 37세라고 하면 송나라 단종 경염원년 병자생(丙子生)이 된다.
즉위로 따져 송나라 경정3년 임술(壬戌)까지 계산하면 조부(祖父)와 손자(孫子)의 연령차는 겨우 15년밖에 되지 않는다 어찌 이와 같은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순제지원은 송나라 황경년대의 후에 있을 즉 조손(祖孫)의 호구년대가 또한 이미 도치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건대 공의 지원 호구는 순제지원이 아니라 세조지원이며 공의 연령은 경정 임술생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구보에 재록한 것이 또한 호구가 진본에 직접 증거한 것이 아니라, 혹 전해 오는 문서의 기록에서 나온 것으로 처음에 2년이라는 글자가 없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지원 병자에 공의 생년이 75라는 문적을 후인들이 잘못 알고 지원병자는 순제지원 2년이라고 하였으니 즉 2년이라는 글자를 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 고찰하여 보면 고 종인 고암 유회가 수록한 보첩등본을 보면 원나라 세조 지원2년에 호구 공년이 75세라하고 병자(丙子) 두글자가 없으니 또한 본인이 병자란 두 글자가 없는지를 어찌 알 것인고? 다만 지원(至願)만이 있는 문적을 후인(後人)이 잘못 알고 지원2년은 순제지원 병자(丙子)라 하고 병자(丙子)란 두 글자를 더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조 지원 2년은 을축(乙丑)이 되고 그러한즉 2년과 13년을 가히 억단할 수 없는 것이다.조손(祖孫)의 연대가 정함이 같이 않으니 도착된 것은 공의 호구가 세조 지원으로 원단 하니 가히 알 것이다.항차 예빈경의 호구 연대가 공의 호구와 더욱 가증이 가깝다 하겠다.또한 지원 2년인즉 비록 두 지원이 있어 착각이 있는 것인즉 황경의 연대는 하나밖에 없으니 처음부터 와전이 있을 수 없으니 지원은 두 곳에 있어 유종하기가 어려운 즉 공의 연령은 이것으로 가히 증거 하니 추명자는 차를 박고( ..넓히 함)하여 변의 할 지어다!
◈ 이사순위호군 호구변의구보를 살펴보면 지원2년 병자(1336년)에 호구 공년이 30세이면 원나라 성종 대덕11년 정미(1307)생이라 하고 있다. 이 또한 순제지원 2년 병자 상계 하면 공의 제이자 례빈경의 황경 호구 연령을 상고하면 부자(父子)의 연령이 거꾸로 도치되어 있음을 이에 규명하니 공의 지원 2년이라는 호구는 또한 두렵게도 “순제지원2년 병자(1336년)가 아니라” 세조 지원13년 병자(1276)를 공의 호구로 보아 마땅하다. 이 세조 지원으로 계산하면 송나라 이종 순우7년 정미(1247)년이 된다. 이는 공의 제2자가 세조 지원13년 병자에 이미 출생하였으며 또한 공은 병자에 삼십이 되니 이것이 순리라 하겠다. 감히 우와 같이 변의 한다.
◈ 예빈경 호구변의구보를 살펴보면 황경원년 임자(1312)에 호구 공년이 37세라면 지원2년 병자(1336) 송나라가 망하지 않을 때이다. 홍무 30년(1397) 공의 손자 참의공의 가사가 실화 할 때 호구 및 족보는 소실되었다고 회진현 사형장의 전보에 나주목관이 말하였다. 지금 중국의 년금를 상고 한즉 황경 임자(1312)로부터 상거하여 37세이면 송나라 단종 경염원년 원나라 세조 지원 13년 병자가 된다. 그러한즉 공의 생년은 세조 지원 12년 병자(1376)생이 마땅하고 순제지원2년 병자(1336)생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세조 지원은 송나라 단종 때 임의로 송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을 때이다.
이러한즉 어찌 순제지원이라 하리요!그리고 또한 황경은 원나라 인종의 때이다.
즉 순제지원2년 병자는 25년 거꾸로 25년 뒤를 취하여 순제지원의 병자를 어떻게 공의 생년이라 하겠는가!그러한즉 세조 지원으로 하는 것이 더욱 의문이 없음으로 이에 감히 우와 같이 병정 한다.
◈ 함평군 연갑 변의부군의 연갑을 구보에서 살펴보면 1448년(명나라 영종 정통 30년) 무진생이라고 말을 하나 공의 아들 종생의 생년이 1423년(태종 영락21년) 계묘생으로 되어 있는 즉 부자의 연령이 어찌 이와 같이 오착될리 있겠는가?이에 감히 삼가 제종이 기록한 문적을 근거하고 또한 기고봉 비명에서 찬한바 있으니 1388년(홍무21년) 무진생으로 개수한다.
◈ 결어1688년 무진보를 편찬한 뒤 3백주년을 맞이하여 과거 구시대에 수보 하였던 족보의 서문과 범례 그리고 변의문을 번역하여 족보를 잘 알지 못하는 현시대의 종친들에게 알려 드림으로서 족보를 알게 하며 명조수록은 물론 숭조보본 하는 정성과, 나가서는 동일조의 후손이면, 빈부와 귀천을 차별함이 없이 화합단결하고 상부상조하여 단합된 역량으로 종문을 빛내고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어야 하겠다.
무릇 족보란 한 씨족의 사록으로서, 선조님들의 위훈과 위업 그리고 유훈 등을 체계 있게 올바로 재록하여 추원의 정성과 후대의 가보로서 전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함풍(평)이씨의 족보사를 살펴보면, 1688년 무진보를 할 때에 그 당시 봉건적 시류의 탓도 있거니와 각파 종문에 소장된 문적이 서로 달라서 수보 할 때마다 자기 집안의 문적만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화합된 올바른 족보를 하지 못하고 우열이 심한 족보를 하게 되어 이에 불만을 갖은 종문에서는 대동보에 불참하고 별보를 하는 등의 사례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 연유로 구보 중에 담겨있는 내용에 있어서 보체는 물론 차서나 호구 연갑 등이 오착되어 있음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또한 의혹이 가는 것은 시조께서 고려 태조 때 인물인지 광종 때의 인물인지 명백한 고증조차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84년도부터 대종회 주관으로 수보를 추진함에 있어 예외 없이 경향의 각 종친들이 이번만은 과거의 잘못된 부분을 올바로 잡아 떳떳한 족보를 하자고 수차에 걸쳐 대동보소에 건의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보대로 강행한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명조수족이라는 족보의 본래 목적에 반하여, 올바르게 하자는 종문의 중의를 외면하고, 올바르게 수보 할 것을 기대하고 동참을 주저하는 수많은 종친들을 족보에서 빼놓고 수보한다면 이로 인하여 우리 함풍(평)이씨는 분열만 심화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므로, 후일을 위하여 매우 걱정되는 바이다.
전국에 계시는 종친들께서는 우리 족보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후일 대동보를 할 때에는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고 전 종인이 화합해서 올바른 족보가 만들어 지도록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전철을 밟지 말고 전 종인이 화합해서 올바른 족보가 만들어 지도록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함풍이씨 역사인물
- 역사인물
시조로 부터 5대에 이르러 인좌(仁佐), 인형(仁衡), 준성(俊成)祖와 인원(仁元), 인관(仁琯), 인계(仁桂), 인검(仁檢), 인문(仁問)祖 (근거 : 무진보 손수조 방주에 광봉위 선대라고 기록됨) 이 후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여러 파로 분파 되었다.
이 긍(李兢:1389~1433) 조선 태종 5년 1405년 增廣試(증광시) 丙科에 급제한 후 1427년(세종 9년 )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교리, 공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와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지셨고, 1433년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성삼문과 같이 접영시에 급제한 일은 유명하다
이 안(李岸), 조선시대 1455년에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못 마땅히 여기고 벼슬을 마다 하고 세태에 비분강개하신 9世 영파정公은 신말주(사육신 신숙주의 아우) 와 같이 기관에 낙향 하였는데 신말주는 전북 순창에 귀래정을 짓고 은거 하였으며, 영파정은 향리 함평 기산 영수간에 정자를 지어 영파정이라 이름하고 두문불출 두 차례 나 세조께서 지평(사헌부 )장령으로 부르셔도 불사하신 단종의 유신으로 불사이군의 대의를 만천하에 밝혀 절의를 지키신 백세 청풍의 고결한 충절신(忠節臣)입니다.
이만영(李萬榮), 12世 죽음공 이만영(李萬榮)은 중종33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역임하시었다.
이장영(李長榮), 12世 죽곡공 이장영(李長榮)은 명종13년 식년문과와 선조19년 중시갑과에 두 번이나 장원급제하였고, 함양군수 등을 거쳐 선공감정(繕工監正)과 통정(通政), 관직은 부사에 이르러,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셨다.
이덕일(李德一), 13世 칠실공 이덕일(李德一) 장군은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는 화살하나로 두명의 적을 쓰러트릴 만큼 활솜씨가 뛰어나 이같은 용 맹이 알려져 이순신장군의 참모로 등용되어 임진왜란을 종결시키는데 크게 공을 세워 절충(折衝)장군 정3품에 올랐으나 나라의 위기 때에도 당파싸움만 일삼는 대신들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돌아와 움막 칠실(漆室)에 들어앉아 ‘우국 충절가 28 수’를 남기셨다.
글 이건환
-과거급제자(조선시대)대)
이 긍(李 兢:1389 己巳生)문과(文科)태종5년(1405) 을유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문과(文科)세종9년(1427) 정미 중시 을과(乙科)장원급제
이춘령(李春齡:1499 己未生) 문과(文科) 중종29년(1534) 갑오 식년시 을과(乙科)급제
이의번(李依蕃) 문과(文科) 중종32년(1537) 정유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만영(李萬榮:1510 庚午生) 문과(文科)중종33년(1538) 무술 별시 갑과(甲科)장원급제
이장영(李長榮:1521 辛巳生) 문과(文科) 명종13년(1558) 무오 식년시 을과(乙科)급제
이장영(李長榮:1521 辛巳生) 문과(文科) 선조19년(1586) 병술 중시 갑과(甲科)장원급제
이 경(李 璥:1538 戊戌生)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갑자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경화(李景華:1656 丙申生) 문과(文科) 숙종13년(1687) 정묘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경운(李景蕓:1666 丙午生) 문과(文科) 숙종19년(1693) 계유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의장(李宜章:1642 壬午生) 문과(文科) 숙종28년(1702) 임오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휘진(李彙晋:1680 庚申生) 문과(文科) 숙종34년(1708) 무자 식년시 을과(乙科)급제
이휘항(李彙恒:1695 乙亥生) 문과(文科) 영조2년(1726) 병오식년 갑과(甲科)장원급제
이중권(李中權:1737 丁巳生) 문과(文科) 영조35년(1759) 기묘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형필(李衡弼:1714 甲午生) 문과(文科) 영조35년(1759) 기묘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동식(李東埴:1745 乙丑生) 문과(文科) 정조7년(1783) 계묘 증광시 을과(乙科)급제
이영식(李英埴:1749 己巳生) 문과(文科) 순조3년(1803) 계해 증광시 병과(丙科)장원급제
이순범(李舜範:1841 辛丑生) 문과(文科) 고종1년(1864) 갑자 정시 병과(丙科)급제
이운봉(李雲鳳, 1673 癸丑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34년(1708) 식년시 이등(二等)
이운룡( 李雲龍,1678 己亥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 45년(1719) 증광시 3등(三等)
(잘 아시는 분이 더 채워주시고요)
※ 과거 급제자가 288명 ( 문과 : 73, 무과 : 14, 사마시 : 199, 의과 : 2 )에 이르는 명문 문인 집안이며 또
한 무인도 많았으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우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어 역사적으로 함풍이씨는 학문과 충
절과 효행을 생명처럼 여기며 인륜의 가치를 추구해온 명문가 집안이다.
글 이건환
=함풍이씨 현대인물
호범(재무부차관.국회의원),근범(함평보건소장), 희범(함평전화우체국장),재진(서울시의회부의장),기수(경상남도지사), 정인(향림사조실)진행(함평문화원장),강수(고창군수), 행만(국립공원사무소장),건영(경찰서장), 건영(육군중장3군사령관,국회의원),건익(현대계열사장),용섭(관세청장.국세청장.건설교통부장관.행정자치부장관.국회의원),민성(월야면장), 규옥(유일한의원장), 규성(불국사주지),숙형(서울시사무관), 기현(세무회계사) 그 외 해아릴 수 없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 상기는 1회 회보에서 발췌, 더 많이 계실텐데 잘아시는분이 채워주세요. 교육계 경제계 법조계 공학계 등 . )
▢함풍이씨 사진관
▢함풍이씨 인터넷족보
=인터넷족보 열람
=영상서적 열람(문중서적)
▢종친들의 광장
=종친회 알림공고
=주요행사 일정
=게시판(Q/A)
=함풍이씨 카페
=함풍이씨 토론 및 의견방
=운영진방
=자료실
- 족보 자료실
- 일반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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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쌍촌동 함평이씨 대종회 사무실에 강수 회장님은 가지 않으신거 같네요.
○ 2006. 11.23 함평이씨 대종회(광주 쌍촌동 소재) 임원회를 소집한 장소에서 강수. 광범. 수범. 양범. 규옥
권행 등이 참석하여 시조를 바로 모시고 족보를 바로잡아 야한다고 역설. 토론// 요 부분?
초동소재 유택에서 제사 모신다고 하는 것이 맞는가요? 아님 시조산이라고 하는 건지요?
그 말이 그 말... 유택(幽宅/산소)
안녕하시지요.
명절 잘보내시고요.
위 글은 카페에 있는 글 입니다.
어느 항목 몇째줄 글을 말씀하시나요?
알아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