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의 바위글씨
1.머리말
2.본문
3.맺는말
심충성
의성의 바위글씨
(1).머리말
의성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하천을 따라 경치좋은 암벽과 큰 바위에 선인들이 좋은 글귀를 새겨놓은 곳이 많다.
이제 옛님이 남긴 자취를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바위글씨 16개를 찾았는데 다음과 같다.
마평보 방천시(馬坪洑 防川時),빙계동(氷溪洞),여사대(如斯臺),성재암(聖在巖),병산벽(屛山壁),연경묘 봉표(延慶墓 封標),계석암(繼昔巖),마안대(馬鞍臺),
검암(儉巖),백운동문(白雲洞門),잠곡(蚕谷),검간 조선생 별업(黔澗 趙先生 別業),봉유대(鳳遊臺),빙산 효선동천(氷山 孝仙洞天),천인대(千仭坮),취하암(醉霞巖)
(2).본 문
1.마평보 방천시(馬坪洑 防川時)
단촌면 병방리 산 41번지에 있다.
점곡초등학교 옆 사촌삼거리에서 서쪽으로 79번 지방도를 따라 2.2km를 가면 자그마한 송내교가 나오는데
송내교를 건너자마자 왼쪽길로 들어가서 미천을 건너 동쪽 둑길로 700m정도 가면 길 오른쪽 절벽 2m높이에 있다.
가로 38cm,세로 20cm
馬坪洑 防川時(마평보 방천시):마뜰의 보를 막을 때
都監 朴漢哲(도감 박한철)
副都監 金震鍾(부도감 김진종)
主務 柳時奕(주무 류시혁)
監考 權宅壽(감고 권택수)
同 金長釗(동 김장쇠)
監督 金又乭(감독 김우돌)
大正 十二年 三月 日(대정 십이년 삼월 일):1923년 3월에 새김
사진1. 마평보 방천시(馬坪洑 防川時)
2.빙계동(氷溪洞)
춘산면 빙계리 산 74-3번지에 있다.
빙계계곡 무지개 다리 60m 전방 오른쪽 그랑 한 복판의 큰 바위 두 개중에 왼쪽바위에 새겨져 있다.
큰 물이 나서 바위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져서 글씨도 기울어진 것 같다.
바위 왼쪽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여러 명 적혀있다.
氷溪洞(빙계동)
빙(氷):가로 80cm,세로 100cm
계(溪):가로 75cm,세로 80cm
동(洞):가로 70cm,세로 75cm
글자는 아직 새긴 흔적이 조금 남아있는 걸로 봐서 100년쯤 되어 보이는데 주변의 글씨들을 보니
갑인 맹추(甲寅 孟秋)라고 써 놓은 것이 눈에 띄는데,1914년 9월쯤 동네 이름이 바뀐 기념으로 새긴 것 같다.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개편을 할 때 "빙산면'을 "춘산면"으로 하고
"서원,중리,하리" 마을을 "빙계1,2,3동"으로 고쳤다.
사진2.빙계동(氷溪洞)
3.여사대(如斯臺)
비안면 옥연리 산 69번지에 있다.
옥연1리 사천마을 양수장을 지나 그랑건너 바위산과 바위산 사이에 새겨져 있는데
물이 깊어 바로 건너지 못하고 사천마을에서 군위군 소보면의 사리2교를 건너 위천을 따라
북쪽으로 2km정도 걸어가면 암벽산 골짜기를 조금 올라가 왼쪽 암벽 중간에 쑥 들어간 곳에 새겨져 있다.
如斯臺(여사대)
如(여):가로:14.3cm,세로:11.3cm
斯(사):가로:15.5cm,세로:22.5cm
臺(대):가로:11cm,세로:22.5cm
1910년 봄에 지암 김재경선생(1841년~1926년)이 70세 되던 해에 새겼다.
사진3.여사대(如斯臺)
4.성재암(聖在巖)
비안면 장춘리 산 92번지에 있다.
장춘1리에서 동부교 약간 덜가서 남쪽 비포장 위천둑길을 따라 1.8km정도 가면
과수원하는 외딴집 앞산 중간에 논이 있고 그 위 샘물이 나는 병풍바위에 있다.
聖在巖(성재암)
壬辰猖 豩+犬 (임진창괴):임진년에 왜군이 날뛰었는데
聖牌在玆(성편재자):공자의 위패를 이곳에서 보존했네.
遺跡以巖(유적이암):바위에 흔적을 남겨
令人永思(령인영사):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생각하도록 하네.
毅歟孫福(의여손복):굳세다.손복이여.
忠義出天(충의출천):충의가 하늘에서 나왔노라.
衛聖其烈(위성기열):공자의 위패를 지킨 그 공적을
與巖久傳(여암구전):바위와 더불어 오래도록 전하리라.
壬辰 後 六 己未 刻(임진 후 육 기미 각):1919년에 새기다.
사진4.성재암(聖在巖)
5.병산벽(屛山壁)
비안면 장춘리 1046-5번지에 있다.
비안면 동부리에서 병산양수장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물가를 따라 동쪽으로 100m 간 다음 위쪽을 쳐다보면 있다.
위쪽은 김용배(金容培),대한 광무 □년 중추(大韓 光武 □年 仲秋),아래쪽은 병산벽(屛山壁) 이라고 새겨져 있다.
병(屛):가로 86cm,세로 106cm
산(山):가로 74cm,세로 86cm
벽(壁):가로 91cm,세로 112cm
屛山壁(병산벽):병산(비안현)이라는 고을을 다스린다.
"병산벽"글자는 김용배 초대 비안군수가 1898년 무술년에 박서생 사적비를 쓰면서 같이 새긴 것으로 보인다.
병산박씨 문중 어른께서 고려시대에 시조 "박우"라는 분이 나라에 공을 새워
병산군에 봉해져서 이 곳 땅을 식읍으로 받아 다스렸다고 알려주셨다.
박우라는 분은 율정 박서생(1371년~1436년)의 9대조이다.
한 대를 30년씩 계산을 하면 270년 전이니 1101년에 태어나서
50세 정도에 병산군에 봉해졌다고 보면 1151년 정도에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5.병산벽(屛山壁)
6.연경묘 봉표(延慶墓 封標)
점곡면 명고리 산 36번지에 있다.
명고리 미래축산 간판에서 동쪽으로 100m정도 떨어진 길 왼쪽 약간 높은 바위에 세 군데로 나누어져 새겨져 있다.
왼쪽과 오른쪽은 작게 쓰고 가운데는 크게 새겼다.
먼저 왼쪽 글씨를 살펴본다.
甲午 七月 日 奉審(갑오 칠월 일 봉심):1834년 7월에 받들어 살핌.
墓監 臣 金昌祐(묘감 신 김창우)
監董 臣 李政在(감동 신 이정재)
監守 安大福(감수 안대복)
가운데 글씨를 살펴본다.
延慶墓香(연경묘향)
炭山因(탄산인)
啓下城山玉谷(계하성산옥곡)
巖封標(암봉표)
효명세자(1809년~1830년)의 묘 제사에 쓸 목탄을 구하는 산이므로
임금의 명에 의해 성산 옥곡의 바위에 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세운 표.
오른쪽 글씨를 살펴본다.
本墓 守衛軍 金○○(본묘 수위군 김○○):묘를 지킨 군인 김○○
築洑○棏 金一本 曺典(축보○득 김일본 조전):보를 쌓은 김일본,조전
享司 執吏 金宗休(향사 집리 김종휴):제사를 지내는 아전 김종휴
勤書 風憲 朴尙允(근서 풍헌 박상윤):글을 쓴 풍헌 박상윤
전설로는 세종 대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옥곡 출신 취란이 궁중에서의 시기와 모함을 이기지 못해
아들 연경을 안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죽자 조정에서는 신하를 내려보내 장례를 치르고 옥곡을 묘산으로 내렸다고 한다.
그 때를 따져보면 세종 말기쯤인 1450년경이 되는데 글씨 상태를 봤을 때는 1834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사진6.연경묘 봉표(延慶墓 封標)
7.계석암(繼昔巖)
비안면 장춘리 산 76-2번지에 있다.
장춘1리를 지나 동부교 앞 정자가 있는 곳에서 남쪽방향
비포장 강둑길로 1.6km정도 가면 길 왼쪽 절벽에 있다.
전체 크기:가로 100cm,세로 100cm
繼昔巖(계석암)
繼:가로 27cm,세로 35cm
昔:가로 23cm,세로 35cm
巖:가로 25cm,세로 35cm
天朴之下龍淵之陽□□朴淵卽(천박지하용연지양□□박연즉):천박의 아래쪽 용연(龍淵)의 양지인 □□박연(朴淵)은 곧
吾家十餘世所居淵之南厓巖號(오가십여세소거연지남애암호):우리 집안이 십 여 세대 동안 살아온 곳으로 박연의 남쪽 언덕 바위를 일러
桂石亦我. 先遺躅所在玆巖繼(계석역아. 선유촉소재자암계):나 또한 계석이라 부른다.선조가 남긴 발자취가 이 바위에 이어져 있다.
昔而不變其高吾家繼昔而不移(석이불변기고오가계석이불이):이 바위가 지금까지 그 높이가 변치 않았고, 우리 집안도 지금까지 지키며 옮겨 살지 않았다.
其守吾遊玆巖愴感者多仍用巖(기수오유자암창감자다잉용암):내가 이 바위에서 놀면 슬픈 감정이 많았다.
號相似之音題以繼昔以寓繼繼(호상사지음제이계석이우계계):이에 바위 이름이 서로 비슷한 발음인 것으로써 계석(繼昔)으로 제(題)하여 잇고
如昔之意云爾(여석지의운이):이어 옛과 같이 우거한다는 뜻을 이른 것이다.
永曆 後 五 乙未 重陽節 朴淵 晩生(영력 후 오 을미 중양절 박연 만생):
영력제(남명의 마지막 황제(1649 - 1662) 후에 다섯 번째 을미년(1895년) 중양절(음9월9일)에 박연에서 늦게 태어난
善山 金在誠 謹識(선산 김재성 근지):본관이 선산인 김재성이 삼가 기록함.
사진7.계석암(繼昔巖)
8.마안대(馬鞍臺)
신평면 교안리 산 171-1번지에 있다.
교안4리 마을 앞 정자에서 서쪽 둑길을 130m정도 가면 큰 낙엽송 밑 절벽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체 크기는 가로 34.5cm,세로 89.5cm이며 각 글자 크기는 가로 24cm,세로 34cm정도 된다.
馬鞍臺(마안대):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잘록하게 낮게 된 모양 이 글자는
이 마을에 살았던 김동규(1888년~1959년)라는 분이 새겼으며, 연도는 1935년~1945년사이로 추정한다.
교안4리에 사는 이 분의 며느리 되는 분이 이야기를 해 주셨다.
글자위에 올라가서 보니 바위모양이 말안정 3개를 붙여놓은 모양과 닮았다.
사진8.마안대(馬鞍臺)
9.검암(儉巖)
비안면 장춘리 산 51번지에 있다.
장춘양수장에서 왼쪽으로 30m정도 떨어진 곳에 도로표지판이 있는데
여기서 동남쪽 산길로 35m정도 올라가면
글이 왼쪽편과 오른쪽편에 나누어져 새겨져 있다.
儉巖(검암)
儉(검):가로 32cm,세로 42cm,
巖(암):가로 43cm,세로 37cm
奢則己虧 儉故不傾( 사즉기휴 검고불경):사치하면 이지러기 쉽고 검소하면 기울지 않는다.
坐者行者 視此巖名(좌자행자 시차암명):앉는 자, 가는 자 이 바위글을 볼지어다.
丁巳 重刻(정사 중각):정사년(1917년)에 다시 새기다.
臨履齋 權 公 度謙 實行銘(임리재 권 공 도겸 실행명) :임리재라는 호를 쓰는 권도겸(1794~1859) 선생이 실천하는 뜻으로 새긴 글.
本安東 居寧海(본안동 거영해):본관이 안동이고 영해에 거주하며
官副正 銘在實行錄(관부정 명재실행록):벼슬은 부정(副正:종3품)이다. 명(銘)은 행실록에 실려 있다.
辛丑始刻(신축시각):신축년(1841년)에 처음 새겼고
後再 辛酉重刻(후재 신유중각):뒤에 신유년(1861년)에 다시 새기다.
사진9.검암(儉巖)
10.백운동문(白雲洞門)
구천면 청산리 407번지에 있다.
폐교된 청산초등학교 뒤편길로 70m정도 들어가면 왼쪽의 큰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높이:115cm,폭:32cm
이것은 68년간 일기를 써서 남긴 삭주공 노상추(1746~1829)가 이곳에 1814년에 와서 별업 화체당(花棣堂)을 조성하고 이를 기념하고자 새긴 글씨이다.
사진10.백운동문(白雲洞門)
11.잠곡(蚕谷)
단밀면 용곡리 산 9-1번지에 있다.
蚕谷(잠곡):누에모양의 골짜기
蚕:가로 35cm,세로 33cm
谷:가로 33cm,세로 31cm
光武 八䄵 四月 八日(광무 팔년 사월 팔일):1904년 4월 8일
止堂 李熙悳(지당 이희덕):이희덕이 쓰다.
산주인인 마을분이 잠곡의 뜻을 알려주셨다.
사진11.잠곡(蚕谷)
12.검간 조선생 별업(黔澗 趙先生 別業)
다인면 용무리 산 13번지에 있다.
단밀면 팔등리에서 동쪽에 있는 작은 팔등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위천둑길을 따라 1.4km를 가면 신하 배수장이라는 큰 건물이 보인다.
건물에서 서쪽으로 500m정도 가면 위천가에 큰 바위가 나오는데
그 바위 서쪽편 지상 6m높이에 있다.
전체 길이는 가로 165cm,세로 21cm이고
한 글자의 크기는 가로 19cm,세로 21cm이다.
글씨 상태를 보니 1920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조정(趙靖, 1555∼1636)은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학자이며 문신이며 호는 검간(黔澗)이다.
사진12.검간 조선생 별업(黔澗 趙先生 別業)
13.봉유대(鳳遊臺)
금성면 명덕리 985번지에 있다.
구련1리 마을앞으로 난 봉유대길을 따라 남쪽으로 400m정도 가면 쌍계천이 나오는데
그랑을 건너자마자 서쪽으로 난 둑길을 따라 300m정도 가면 왼쪽에 작은 암벽이 보인다.
30m정도 남쪽으로 들어가면 과수원 밭둑이 나오고 건너편에 있다.
봉유대(鳳遊臺),청저(靑渚)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 상태를 보니 1930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봉(鳳) 가로 42cm, 세로 33cm
유(遊) 가로 38cm, 세로 35cm
대(臺) 가로 32cm, 세로 46cm
청(淸) 가로 11.5cm, 세로 14cm
저(渚) 가로 10.5cm, 세로 12cm
사진13.봉유대(鳳遊臺)
14.빙산 효선동천(氷山 孝仙洞天)
춘산면 효선리 산 158-1번지에 있다.
효선1리에서 효선2리로 가다가 마을 첫번째 집에서 100m덜 가서 남쪽으로 빠지는
시멘트길을 따라 200m정도 가면 냇가 맞은편 넓은 바위에 있다.
글씨 상태를 보니 1930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박연문(朴淵文)
빙산효선동천(氷山孝仙洞天)
모설암(慕雪岩)
차암차제천백년풍(此岩此題千百年風)
고무금월이삼자우(古無今月二三子友)
경파(波題)
산수주인(山水主人)
김병흠(金柄欽)’, ‘김병찬(金秉燦)’, ‘박기하(朴耆夏)’, ‘박연백(朴淵伯)’, ‘박문호(朴文鎬)
경파(鏡波)
사진14.빙산 효선동천(氷山 孝仙洞天)
15.천인대(千仭坮)
봉양면 도원리 672-4번지에 있다.
도리원정류소에서 남쪽으로 난 구도리원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밑으로 내려가서
쌍계천을 따라 위쪽으로 200m정도 가면 암벽에 있다.
왼쪽부터 주인 이우성(主人 李宇星),천인대(千仭坮),이삼인(李三仁)이라고 적혀 있다.
글씨 상태를 보니 1930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천(千):가로 21cm, 세로 24.5cm
인(仭):가로 22cm, 세로 23cm
대(坮):가로 22cm, 세로 23cm
사진15.천인대(千仭坮)
16.취하암(醉霞巖)
사곡면 양지리 10번지에 있다.
주월사 삼성전 뒤편 암벽에 새겨져 있다.
오른쪽부터 취하암(醉霞巖),몽선대(夢仙臺),백동허(白東虛),김경운(金畊雲),
월영폭포(月暎瀑㳍),박헌광4290.4.3(朴憲光4290.4.3)이 새겨져 있다.
취하암(醉霞巖):노을에 물든 바위
몽선대(夢仙臺):신선이 꿈에 나타난 대
백동허(白東虛),김경운(金畊雲):주월사에 있었던 스님
월영폭포(月暎瀑㳍):달이 비치는 폭포
박헌광(朴憲光)4290.4.3:박헌광이 1957년 5월 2일에 새김
취하암(醉霞巖),몽선대(夢仙臺),월영폭포(月暎瀑㳍)는
글씨 상태를 봐서 1938년에 백동허 스님이 삼성각을 지으면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사진16.취하암(醉霞巖)
참고문헌
(춘산면사무소 홈페이지)
(지암선생연보)
(디지털 의성문화대전 )
(안강노씨 화림종중 표지석)
(3).맺음말
이상과 같이 16개의 바위글씨를 살펴보았다.
새긴 연도와 이름이 새긴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었다.
새긴 연도가 없는 경우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연도를 추정해서 적어놓았다.
의성의 구석에는 아직도 묻혀져 있는 바위글이 더 있을 것으로 짐작하며 겨울에 찾으러 다닐 것이다.
첫댓글 바위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처 찾아보지 못한 곳을 찾아 봐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성 향토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의성에 좋은 바위글이 많아서 참 좋습니다~^^
심선생 수고 많이 했습니다. "좋은 의향"이 될 것 같습니다.
의향 2집에 참여하게 되어서 좋습니다~^^
충성 씨! 좋은 자료 잘 봤습니다. 그동안 노고가 많았네요... 고맙습니다.
겨울에 쫓아댕긴 결과물이 결실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