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혁명을 지켜보다.
무고한 창생만 죽이고 성공치 못하리니 전쟁을 그만두라.
1. 동학형명.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훗날 우리 온 겨레에게 아리랑처럼 남은 이 노래.
이 슬픈 노래를 남긴 참혹한 연대가 오고 있었다. 한편으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고, 한편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땅 이 하늘을 울린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비바람, 모진 눈보라가 몰아쳐 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창검을 꽂은 군마의 행렬처럼 우리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1894년.
그이가 스물네 살 되던 해였다.
그이는 그 때 글방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사악한 벼슬아치들 때문에 나라 안이 무척이나 어수선하였다. 세상은 소용돌이 속에 잠겼다. 그 해 태인 동골 사람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분개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곧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었다.
그것이 곧 동학혁명이다.
동학을 창도한 이는 최제우(崔濟愚)이다.
최제우는 순조 24년인 1824년 경상북도 월성군에서 출생하였다. 경주 최씨로서 본명은 복술이었다. 제우는 그가 35세 때 스스로 고친 이름이다. 그의 자는 성묵(性黙)이며 호는 수운(水雲)이었다.
수운은 양반 가계에서 태어났으나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한 불운한 집안 출신이었다. 수운 자신의 출생 또한 아버지 최옥이 세 번째 취한 첩의 자식이었다. 서얼을 차별하던 당시 사회에서 수운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조차 없는 신분이었다.
그는 중국의 경전들은 물론이거니와 도교, 불교, 서학등도 공부하였으나 어느 것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0세에 고향을 떠나 세상을 떠돌았지만 올바른 길을 확인하지 못하고 만 11년이 지난 1854년, 31세 때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제 최제우는 유랑의 경험에서 보고 살핀 조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처가의 마을인 울산 일대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사색 명상에 빠지면서 득도를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때가 이르지 않아서인지 실패하고 36세 때인 1859년 10월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고향집은 팔린 상태였다. 그는 가정리 남쪽 구미산 계곡에 아버지 최옥이 살아 생전에 지어 놓았던 용담정(龍潭亭)을 손질하여 살림을 시작했다. 이 때 그는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제우(濟愚)로 바꾸었다.
그리고 용담정에서의 치열한 구도 노력 끝에 1860년 음력 4월 5일 마침내 득도하였다. 득도의 광경을 수운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증상, 그이와 연관 있음을 알리는 첫 일성이었다.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 4월 5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만고 없는 무극 대도 여몽 여각 득도로다
(『용담유사』,「용담가」중에서)
4월이라 초 5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 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용담유사』,「안심가」중에서)
뜻밖에도 경신년(庚申年) 4월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무슨 병인지 증세를 알 수 없고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디선가 갑자기 신선의 말씀이 들려 왔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캐어 물어 보았더니 하느님[上帝]이 대답하시기를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하느님(상제)이라 하니 너는 하느님을 모르느냐’하였다.‘왜 그러십니까’하고 까닭을 물었더니 하느님이 대답하시기를 ‘나 역시 지금까지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간에 태어나게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 법(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하였다.(용담유사』,「포덕문」중에서)
수운은 그가 창도한 새로운 사상 혹은 종교의 명칭을 동학이라 하였다. 그는 자신이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인즉 동학이라고 하였다. 동학이 서학, 혹은 서양의 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수운은 동학이 유불선(濡佛仙)을 합일하여 극복한 새로운 도이며 서학마저도 극복한 것으로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최고의 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창도후 1년 동안 이론화 작업을 거쳐 다음과 같은 시천주를 마련한다.
至氣今至 願爲大降 (지기금지 원위대강)
侍天主造化定 (시천주조화정)
永世不忘萬事知 (영세불망만사지)
하느님의 지극한 기운이 지금 저에게 크게 내려 기화되길 비옵나니
하느님을 모시오니 조화를 정하시고
길이 모시기를 잊지 않아 만 가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그는 1861년에는 「포덕문(布德文)」을 지은 후 포덕을 시작하였다. 포덕 시작 6개월만에 약3천 명의 사람들이 최제우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과 더불어 음해도 시작되었다. 특히 하느님을 섬기는 동학은 사실은 서학이며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중상이 치명적이었다.
서학이라는 중상은 급속히 퍼져나가 관헌은 동학을 핍박하였다. 수운은 11월에 피신의 길에 올라 웅천, 의령, 성주, 무주를 거쳐 남원의 은적암에서 1862년 3월까지 은거하였다.
그리고 수운이 다시 경주로 돌아오자 경주영은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1862년 9월 그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이 몰려가 항의하였으므로 곧 석방하였다.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도는 늘어갔다.
조정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동학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보고에 위협을 느껴 1863년 12월 선전관과 포졸을 파견하여 수운을 체포하고 대구감영에 투옥하였다. 경상 관찰사 서헌순의 심문보고를 받은 중아조정은 1864년 2월 29일 참형을 결정하여 대구감영에서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3월 10일 대구장터에서 참형이 집행되었다. 조정은 이후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교정하여 탄압하였다. 이를 기화로 하여 동학도에 대한 지방관의 탄압은 극심해져서 동학도의 재산을 빼앗는가 하면 심지어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월 최시형(崔時亨)이 2세 교주로서 수운의 순도 이후의 동학을 이끌어가게 된다. 해월은 1863년 7월 북접주인(北接主人)이라는, 어쩌면 그 자신을 위해 수운이 특별히 만든 직위에 임명됨으로써 2인자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수운은 시형에게 종통이 이어짐을 인정하고 도인들은 먼저 북접주인을 거쳐 자신을 만나도록 하였다. 수운의 사후 해월은 관헌에 쫓겨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평해, 울진, 영양, 예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1871년 3월 영해에서 이필제가 교도와 농민 5백여 명을 이끌고 봉기한 이필제의 난으로 급박하게 쫓겼다.
이러한 도피 행각 가운데 해월은 동학의 미래가 때[時]에 잘 부응하고 때를 만들고 때를 활용하는 데 달려있다고 보고 자신과 추종자들의 이름에 ‘시(時)’자를 넣어 개명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은 때에 따라 순응한다는 의미로‘시형(時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 이미 동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하느님‘의 출현을 바라고 있던 이 땅의 민초들에게 동학은 동학, 그자체로만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시형은 여전히 관에 쫓기는 몸이었다. 최시형은 이 때 항상 도망을 갔으므로‘최보따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면서도 항상 근면한 모습을 보였으며 가는 곳마다 반드시 나무를 심고 겨울이면 스스로 멍석을 짰다.
1892년, 충청관찰사 조병식은 드디어 동학교도들을 본격적으로 색출 단속하였다. 이에 따라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학을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일어났고, 이제 사회적 상황의 변화로 이러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동학의 교세가 커졌고 이미 조정에서도 유교 이외의 종교에도 자유를 주고 있었다.
서인주, 서병학 등의 충청도 동학도들은 교조신원을 하여 동학의 합법화와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운동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1892년 10월 동학도들은 최시형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공주에 모여 공주취회(公州聚會)를 열고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충청관찰사 조병식에게 교조의 신원과 동학도들에 대한 폭압을 금할 것을 요구하였다.
1892년 11월에는 최시형의 통문하에 삼례역에 수천명의 동학도들이 모여 전라관찰사 이경직에게 소장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찰사들이 포교의 자유를 인정할 재량은 없었다. 이에 동학도들은 국왕과 중아조정에 직접 호소하기로 하고, 1893년 2월 11일부터 3일간 광화문 앞에서 교조신원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면 소원대로 시행하겠다는 답을 하였지만 실제로는 지방관리들에게 동학을 엄중 단속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제 동학도들은 조정에 대해 직접적인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최시형은 1893년 3월 보은에 총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하고 종래의 접위에 몇 개의 접을 지휘하는 포를 두고 그 책임자로 대접주를 두는 조직개편을 단행한후 보은으로 동학도들을 불러 보은취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교조신원(敎祖伸寃)이 아니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주장하고, 취회 자체가 국가적 대의에 맞음을 들어 보은 군수의 해산 종용을 거부하였다. 20여일간 2만 7천여 동학도들이 전국에서 모여 대규모의 민중 대회를 열었다. 이제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한편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금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를 받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 접주로 있는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천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魚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 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 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
그들은 이러한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전라감사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 현감 박원명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과 교조의 신원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 무주. 장수. 금구. 부안. 고창. 흥덕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 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들을 증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려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고 여러 장수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에 임명하고 군사800명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에 입성한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의 황룡촌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이며 폐정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텐진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본군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가을 추수 때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고아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그 때 그이의 나이 24세, 전봉준은 40세였다.
2. 한 명의 생명이라도.
그이는 이 가슴 아픈 현실을 기켜보면서 더 이상 방관만 할 수가 없었다.
그이는 구리골에서 동학 접주인 박윤거를 만났다. 때마침 태인사람 안필성이 동학도 최두연과 함께 윤거로부터 동학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그이가 박씨와 이름을 나누고 그에게 권유하였다.
“동학군이 고부에서 난리를 일으켜 황토마루에서 승리 하였으나, 결국 패망할 것이다. 그대가 접주라고 하니 전란에 휘말려 들지 말고 또 무고한 생민을 전란에 끌어들이지 말라. 섣달이면 망하리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하나 읽어주었다.
月黑雁飛高 (월흑안비고)
單于夜遁逃 (선우야둔도)
欲將輕騎逐 (욕장경기축)
大雪滿弓刀 (대설만궁도)
달은 어두운데 기러기는 높이 날고
선우는 밤에 숨어서 도망한다.
장수는 말을 빨리 달려 뒤쫓고자 하나
큰 눈이 활과 칼이 되어 길을 막는다.
이 옛 글을 듣고난 윤거는 접주를 사면하고 말았다. 그 접주의 자리를 최두연이 맡아 부하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윤거와 달리 최두연은 그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승패가 불을 보듯 환하게 예고된 전쟁, 그이는 동학군이 겨울에 이르러 패망할 것을 알고 모든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이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혁명의 진원지인 호남지역을 돌아보며 더 이상의 화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동분서주하였다.
드디어 9월 18일(양력 10월 16일)에 해월이 전국 동학 교도에게 총동원령의 격문을 돌리고 전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 서울 진군을 위한 교두보로서 백제의 옛 도읍인 공주로 대공세를 시작하였다.
동학 혁명군의 김개남은 남원포에서, 김덕명은 금구 원평에서, 차치구와 손여옥은 정읍에서, 최경선은 태인에서, 정일서는 고부에서, 유한필은 함열에서, 오동호는 순창에서, 기우선은 장성에서, 손천민과 이용구는 청주에서 일어나 호남 53주의 강산과 전국을 뒤흔들었다.
동학군이 서서히 삼례를 떠나 공주를 공략하기 위해 은진과 논산 쪽으로 대진격하니 삼례를 떠난 동학군이 머지 않아 서울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온 나라 안에 퍼져 나갔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중국 본토까지 밀고 올라가 대승을 거두고 동학군 토벌책을 세우니, 이로부터 전국의 각 군에서는 동학군이 닥치는 대로 피살, 포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봉준 장군도 10월 말경에 공주를 공략하기 위해 비장한 공세를 펼쳤다.
그이는 몰살의 큰 위기에 처한 동학군의 운명을 내다보고 곧장 공주로 갔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간곡히 타일렀다.
“무고한 창생만 죽이고 성공치 못하리니 전쟁을 그만두라.”
최두연의 권유로 필성은 동학군에 들어가서 태인을 떠나 남원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전주 구이면 정자리에서 그이를 만나 깜짝 놀랐다. 그이는 필성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필성에게 뒤를 따르게 하였다. 두어 마장 함께 가다가 임실의 마구단에 이르렀다. 그 때 그이가 필성에게 말했다.
“날이 매우 차니 주막에서 쉬었다가 가자. 남원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되리라. 나의 말을 의심치 말라.”
그이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이 말에 필성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향로가 비밀이며 최두연을 만나기로 한 것도 단 둘만 아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성은 그이를 믿고 따를 수가 없었다.
“여비가 없어 머물 수가 없으며, 때를 맞추어 갈 길을 가야하겠습니다.”
그이는 빙긋 웃었다.
“굶을 걱정 말라. 두서너 시간 지나면 만날 사람이 이곳에 온다는데….”
그리고 함께 주막에 들렀다. 과연 그 얼마쯤의 시간이 지나자 군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필성은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이의 말대로 최두연이 수많은 군병을 거느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최두연은 말 위에서 급하게 필성에게 말했다.
“남원에 가지 말고 전주로 따라 오라. 급하니 내가 먼저 가겠다.”
최두연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졌다. 필성은 군마 무리를 쫓으려고 서둘렀다. 이것을 보고 그이가 다시 말했다.
“군마의 뒤를 쫓는 것은 어리석고 불리한 처사이니 천천히 가는 것이 옳다.”
그이는 필성을 데리고 전주로 향했다.
전주 가까이에 이르러 그이가 또 필성에게 말했다.
“오늘 전주에 소란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살상될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고 내일 전주에 들어가기로 하자.”
필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이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이와 필성은 전주의 수통목에서 쉬었다. 그곳에서 밤을 새운 그들은 이튿날 전주 성내에 들어가서 조용한 곳에 머물렀다. 저녁때가 되어 다시 그이가 필성을 불렀다.
“거리에 나가자. 볼 것이 있다.”
필성은 말없이 그이를 따라갔다. 거리 거리에는 사람의 머리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이는 가만 눈을 감았다. 눈물이 그이의 얼굴을 덮었다. 필성은 그이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보아라. 이렇게 위험한 때에 어찌 함부로 몸을 움직일수가 있겠느냐.”
그이의 음성은 잠겨있었다.
“때가 때인 만큼 몸을 신중히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그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필성도 눈을 감았다.
그이는 잠깐 필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뒤돌아섰다.
결국 필성은 그이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길로 동학군에 종사하였다. 그는 동학군과 함께 전주를 떠나 경성으로 향군하였다. 도중에 여산에 이르렀을 때 또다시 길가에 그이가 서 있었다.
“이제 종군하는군. 가는 길이 크게 불리하고 위험하니 부디 조심하여 행동하라.”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필성은 가던 길을 재촉하여 진잠읍을 지나 유성에 도달하였다. 이곳 장터에서 군병들이 하룻밤을 야영하였다. 다음날도 하루종일 군병들의 행군이 계속됐다. 야간행군도 감행됐다. 새벽에 군병들이 청주에서 삼십리 가량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청주의 관군 병영을 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 위에 또다시 그이가 서 있었다. 필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멍청하게 그이를 바라보는 필성을 향해 그이가 다시 말했다.
“너희 군중에 한 중이 있을 것이다. 그 중은 요승이고 그의 말에 군병들이 따르고 있으나 너희들은 그 말을 좇다가는 모두 멸망할 것이다.”
필성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목숨을 내어 던지면서 백성을 구하려는 마당에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으면서 사사건건 불길한 말만을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당신은 어찌 이곳까지 왔으며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필성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어찌 낸들 그것을 모르겠느냐. 그들을 미워할 수 있겠느냐. 불리한 앞일을 보고 일러주는 것이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아껴 건지려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이곳에서 동학군병들이 많이 희생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 구경하러 왔겠는가. 젊은이들의 목숨을 지켜보려고 왔도다. 그래도 너는 내가 아는 젊은이요. 알아들을만 하기 때문에 너에게 일러주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필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동학군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길, 그이의 간곡한 권유도 필성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말이 그의 눈과 귀를 멀게 한 것이다. 격양된 필성은 청주의 관군 병영 앞산까지 따라갔다.
그런데 이 진군에 공교롭게도 김형렬이 끼어 있었다. 형렬은 그 전부터 그이의 소문을 듣고 그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이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이는 형렬이 그곳에 올 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동학군은 관군의 복병들을 만나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행히 필성과 형렬은 산 속의 솔밭에 숨었다. 비록 그이의 말을 듣지 않고 종군했지만 어쩐지 그이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함성이 있었다. 와하! 그 소리들은 천둥과 같았다. 동학군들이 돌진했다. 콩 볶는 소리가 들렸다. 줄지은 동학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콩 볶는 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 하더니 칼날이 번뜩였다. 반짝이는 냇물처럼 번뜩였다. 그리고 흐르는 강물이 되었다. 그 강물 속에서 칼과 칼이 춤을 추고 있었다.
진달래가 피던 자리였다. 개나리가 피던 자리였다. 하늘보다도 높고 땅보다도 지순한 사내와 색시가 첫 보금자리를 틀던 자리였다. 형을 위해, 아우를 위해, 아니면 가엾은 부모와 새끼를 위해 무릎을 꿇고 낟가리를 하던 곳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삽작의 탱자울 같던 이웃들을 위해 울던 자리였다.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별을 보던 자리였다. 그곳에서 밀려나는 물과 밀려오는 물이 함께 울고 있었다. 우우웅!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고, 흰 물결 검은 물결이 뒤엉키고 있었다.
하얀 두건을 두른 생명들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뒤로 뒤로 밀렸다. 보리잎새가 바람에 흔들리듯. 사람들의 대가리들이 풀잎처럼 날렸다. 눈이 튀었다. 피가 튀었다. 여전히 함성이 울렸다. 함성이 끊어진 곳에 신음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있었다. 사람의 파도가 있었다. 큰 물이 작은 물을 밀어내고, 작은 물이 큰 물에 죽었다.
서로의 총과 칼은 서로의 가슴을 찔렀지만 들판엔 바람만이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대부분의 동학군 손엔 달랑 죽창 하나가 들려 있었다. 누구 것인지도 알 수 없는 피가 엉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온통 죽은 동학군의 붉은 피였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목젖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또 무조건 돌진했다.
“야아!”
“와아!”
언뜻 언뜻 관군의 칼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서로들의 눈 앞 저편에 서로가 죽여야 할 사람의 대가리들이 있었다. 다시 소리가 들렸다.
“죽여라!”
불 달은 더운 물은 얼음이 녹은 물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흰 물결이었다. 흰 물결이었다. 흰 물결이 검은 물결과 부딪쳤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고 살기 위해서 부딪쳤다. 하늘에는 별도 없었고, 달도 없었다. 그리고 구름도 없었다. 그리고 우는 사람이 있었다. 소리 없이 우는 사람이 있었다.
필성과 형렬이 그 지옥의 현장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어디선가 그들을 부르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그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형렬과 필성은 이제 스스로 그이를 향해 다가갔다.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그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정말 피신을 잘했다. 이제 안심하라. 이곳은 안전하니 관군의 추격이 없을 것이다.”
그이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고 돈을 필성에게 주면서 마을로 내려가서 떡을 사오라고 일렀다. 필성은 종일 먹지 못하여 허기지고 지친 몸을 일으켜 마을에 내려가서 떡을 사 갖고 되돌아 왔다.
필성과 형렬은 허기를 채웠다. 형렬은 물끄러미 그이를 바라보았다.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 그러나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경황도 없었지만 그이가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형렬은 그이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이 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한 마디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무참한 심경도 굶주림도 어느 만큼 가셨다.
“자아, 우리가 먼저 떠나는 것이 옳겠다. 잠시 후에 다시 동학군이 쫓겨서 올 터이니 속히 이곳을 떠나자. 어서 일어나 가자.”
그이가 앞장을 서니 두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진잠까지 도달했다. 그 때 나이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참으로 불쌍하다. 이곳에서 또 다시 동학군이 많은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한이 없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태가 기묘하게 움직이기에 말이다. 너희는 듣기 싫을 것이다. 과히 불쾌하게 생각지 말라. 사람이란 한 치도 앞을 볼 수 없어서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흘리기도 한다. 어서 나를 따르라.”
그들은 다시 으슥한 산길을 지나 아주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관군과 동학군이 접전을 벌인 것이다. 좀처럼 총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세 사람은 더 깊숙이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총소리가 이곳저곳에서 계속해서 들렸다. 형렬과 필성이 지쳐 발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이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드디어 갑사가 있는 계룡산에 들어섰다. 멀리서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형렬과 필성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멀리서 총소리와 목탁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날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그이는 산 속 나무가 우거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지만 필성과 형렬은 총소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죽은 동학군들의 처참한 모습을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들에게 그전까지의 감연한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직 두고 온 가족이 보고 싶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옳다는 명분 하나로 죽음을 불사하고 싸움에 뛰어들었지만 막상 동학군이 관군에게 살육당하는 처참한 현장을 목격하고는 인간 본래의 살고 싶은 욕망이 그들의 온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 가다가는 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니 이 산 속에서 자고 가자.”
또 시간이 흘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였다. 맞은편 풀 섶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있었다. 형렬과 필성은 놀라서 일어나 달아나려고 했다. 다행히 그는 머리를 깎은 승이었다. 얼굴에 잔뜩 겁을 먹은 그 승은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소?”
형렬이 물었다.
“동학군이 노성(魯城)에 진을 치고 도망치는 군사들을 붙들어 처단하고 있소.”
승은 그 한 마디를 던지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이 말을 듣고 필성과 형렬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이는 천천히 말했다.
“이곳에서 쉬자는 것이 바로 그런 화를 피하자는 것이니, 자아, 쉬고 내일 아침에 떠나면 아무런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조금도 겁을 먹지 말며 염려를 놓으라.”
그들은 그곳에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그들은 아침 일찍이 그곳을 떠났다.
“너희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러나 그이의 말에도 그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함께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산에 와서 읍내를 피해 샛길로 고산인내 장터로 향했다. 여산 읍내 사람들이 도주하는 동학군들의 옷을 벗겨 보복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산길로 산길로 계속해서 전주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이는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형렬은 구리골로, 필성은 닥뱀이 제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