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산의 역사-세계와 한국
세계
◇ 연도별
[르네상스 시대]
1358년 아스티의 로탈리오가 로쉬멜론(3,537m)에 오른 것이 알프스-히말라야산(山) 지대에의
최초의 등산기록으로 남아 있다.
목적-교회를 짓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시종인 보프레는 그르노블에 있는 해발고도 2,125m의 몽테귀에 올랐다.
그는 정상에서 미사를 드릴 목적이었으나 오늘날에도 어렵다고 하는 암벽등반이었다.
1521년 에는 에스파냐의 코르테스가 부하인 몽타느 등을 시켜 멕시코의 화산
포포카테페틀(5,451m)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것은 화약을 만드는 데 사용할
황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18세기]
18세기에 들어와서 벨랑과 당뒤미디 등이 알프스의 4,000m 가까운 산들을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이 목사들이었다.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H.B.소쉬르가 프랑스의 샤모니를 방문하고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m)의 첫 등정에 상금을 걸었다.
1786년 샤모니의 의사 M.파카르와 수정(水晶) 채취를 하는 J.발마가 그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알프스 등산의 막이 올랐다.
[19세기]
1811년 융프라우(4,158m),
1829년 핀스터라르호른(4,275m)에 오르고,
1857년 세계 최초의 등산단체인 영국산악회(알파인 클럽)가 런던에서 창립되었다.
1865년 영국의 등산가 E.휨퍼가 등정이 불가능하다고 하던 마터호른(4,478m)을 등정.
◇ 산별
[5000m이상]
1874년 영국의 글로브 카프카스의 최고봉 엘브루스(5,630m)
1897년 영국의 피츠제럴드대(隊) 안데스의 최고봉인 아콩카과(당시 7,035m, 현재 6,960m).
1894년 뉴질랜드의 쿡산(3,754m),
1889년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산(5,895m)
1913년 알래스카의 매킨리남봉(6,191m)을 올랐다.
[히말라야]
18세기경부터 그리스도교의 선교사, 인도의 측량국 직원들이 드나들었으나,
순수한 등산을 목적으로 히말라야를 방문한 것은 영국의 그레엄이었다.
1883년 그레엄 가르왈과 시킴에 있는 7,000m 가까운 여러 산을 올랐다.
1895년에는 영국의 뛰어난 등산가 A.F.머머리가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8,125m)를 도전하였으나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1892년 영국의 카라코람 원정대가 파이어니어피크(6,888m)를 정복하였고,
1899년 영국의 프레시필드는 칸첸중가를 일주하였다.
1907년 영국의 롱스타프는 가르왈 히말라야의 트리술(7,120m)에 등정하였는데,
이것이 7,000m 이상의 고봉에 대한 세계 최초의 등정이다.
1909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치 공작이 조직한 대규모 등반대가 발토로 빙하(氷河)로 들어가
세계 2위봉 K2(고드윈오스턴산:8,611m)를 시험 등반하였는데,
초골리사(7,654m)의 7,500m까지 올라 고산등반의 신기록을 세웠다.
[8,000m급]
8,000m급 고봉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인데,
1921년 영국대는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제1차 정찰대를 보낸 것을 비롯하여
22, 24, 33, 35, 36, 38년 등 7회의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정상 가까이까지 갔으면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이 밖에도 K2·칸첸중가·낭가파르바트·히든피크의 여러 고봉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1950년 프랑스대가 네팔을 통하여 안나푸르나의 주봉(8,078m)을 처음으로 등정하였다.
이 등정은 인류 최초의 8,000m급 고봉의 등정이었고 가볍고 강한 나일론 제품의 텐트나
로프 등을 처음 사용하였다.
☞ 제2차 세계대전 후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가 되므로
에베레스트는 남쪽의 네팔 쪽에서 등반로를 찾게 되었고,
1952년 봄과 가을에 스위스대가 쿰부 빙하를 돌파하여 남동 능선을 타고
정상 가까이까지 이르러 등정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1953년 봄, 영국은 J.헌트를 대장으로 대등산대를 보내어 5월 29일 대원 E.힐러리가
셰르파 텐징과 함께 마침내 지구상의 최고지점에 올라섰는데, 이것은 히말라야 등산의
황금시대를 장식하는 쾌거였다. 그 후 7차례의 등정 성공이 있었으며,
1977년 9월 15일 한국의 김영도(金永棹) 대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등반대의 고상돈(高相敦) 대원이
정상에 오름으로써 세계 대열에 들게 되었다.
☞ 세계의 8,000m 급 고봉은 14좌(座)가 있으며 14좌 완전정복까지 1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 히말라야 등정 성공의 원인으로는 산소기구와 장비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비해
대폭적으로 개량된 점, 고산에서의 인체생리의 실체가 밝혀진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200좌 가까운 7,000m급도 이미 100좌 이상이 등정되었으며,
이후의 과제는 보다 어려운 루트를 통한 등정, 또는 산소기구 없이 오르는 등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등산 역사는 히말라야를 중심으로 훌륭한 기록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한국에서의 등산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는 토속적인 신앙의 대상을 주로 산에서 찾았고, 불교 전래 이후는 크고 작은 사찰이 심산에 자리잡게 되면서부터 승려는 물론, 신도들의 신앙적 수양·수도의 목적을 위한 산행이 있었다. 그 밖에 군사적인 목적과 훈련을 위하여 산에 오른 자취도 더러 찾아볼 수 있는데, 백두산의 정계비(定界碑), 신라의 황초령(黃草嶺)·마운령(摩雲嶺)의 유적, 북한산의 수렵비(狩獵碑), 화랑의 무예터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 근대적인 등산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에 조선산악회가 조직되어 일본인과 함께 백두산·금강산·집선봉 등을 오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역시 산악동호인의 모임인 은령회(銀嶺會)도 등산과 학술조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8·15광복 후 1950년대 후반 현대적인 등산기술이 도입되면서 낙후된 등산장비와 전근대적인 기술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동시에 전개되기 시작한 등산활동은 처음으로 한국 알피니즘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국내의 산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산악인들은 더 높은 곳을 찾아 원정대를 조직하여 외국의 산, 특히 히말라야 쪽으로 발길을 뻗기 시작하였다. 1962년 다울라기리 II봉을 정찰한 것을 필두로, 1970년에 추렌히말, 1971년에 로체샤르, 1972년과 1976년에 마나슬루 등을 오르는 동안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하였다.
국내의 산에서 해외원정을 목표로 훈련하던 중에 1969년 2월에는 설악산에서 한밤중에 눈사태를 만나 이희성(李熙成) 대장 등 10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이어 1976년 2월에는 같은 설악산의 설악골 상단부에서 에베레스트 훈련대의 최수남(崔秀男) 등 3명이 설벽을 횡단하던 도중 눈사태를 만나 매몰되었다.
국외에서는 1971년 마나슬루원정 때 김기섭 대원이 전락사하였고, 1972년에는 히말라야 제2차 마나슬루 원정대의 눈사태로 인한 조난이 가장 큰 사고로 김호섭 등 대원 5명과 펨바, 린지 등 셰르파 10명을 합쳐 15명이 눈 속에 매몰되었다.
한국 등산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기록은 1977년의 에베레스트 등정이다. 1962년에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어 결성된 대한산악연맹이 주관하여 김영도 대장 등 18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등반을 시작한 지 59일 만인 9월 15일에 고상돈(高相敦) 대원과 셰르파 펨바 노루부는 등정에 성공하였다.
그 이듬해 1978년 3월 6일에는 한국산악회의 전병구(全炳九) 대장 등 6명이 안나푸르나 IV봉을 겨냥하여 유동옥(兪東玉) 대원이 등정에 성공하였고, 다시 1979년에는 알래스카의 매킨리를 한국일보대·고령산악회대·고려대학교 산악부 등 3개 대(隊)가 등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일보대의 고상돈 대장과 이일교 대원은 하산길에 추락사하였다.
한국대에 의한 8,000m급 등정의 두 번째 성공은 1980년 4월 28일 동국대학교 산악반에 의한 마나슬루(8,163m) 등정이었다. 이인정(李仁楨) 대장 등 7명의 대원 중 서동환(徐東煥) 대원이 정상에 올랐다. 한편, 악우회(岳友會)는 1979년에 아이거 북벽을 오르는 데 성공하였고, 이듬해에는 유럽 알프스의 3대 북벽 중 나머지 그랑드조라스(4,208m)와 마터호른산도 등반하였다.
한국 산악인의 발길은 더욱 폭을 넓혀 1981년에는 남아메리카의 아콩카과(6,960m)를 서울대학교 자연대팀이 등정하였고, 에베레스트 대원이었던 장문삼(張文三)과 도창호(都昌鎬)는 뉴질랜드의 쿡산과 아콩카과를 실험등반하였다. 1982년 11월 2일에는 대한산악연맹 산하 대전자일클럽의 회원 김영한(金英漢)이 네팔 북동쪽에 자리한 처녀봉 고준바캉(7,806m)에 무산소로 등반하였다.
1977년에 일본의 세계적 등산가 우에무라 나오미[植村直己]가 시도하였다가 II봉으로 발길을 돌렸고, 1979년에도 일본대가 본격적으로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프랑스대가 한국대와 초등경쟁을 벌였는데, 10월 22일 6,700m 지점에서 물러섰다. 한국대는 당초 목표한 남동 능선 루트 대신 북동 능선으로 바꾸었는데, 프랑스대보다 어려운 벽등(壁登) 코스였는데도 성공하였다.
암벽등반은 물론 설벽과 빙벽 등반기술도 자체훈련 외에 프랑스의 샤모니와 스위스 체르마트의 등산학교 등지에서 실력을 기른 한국의 등산인들은 세계적인 난소(難所)에 도전하여 성공하였다. 1982년 9월 2일에 외국어대학교 산악회 회원 장준택(張俊澤) 등 3명은 난코스로 이름난 북아메리카 최고의 바위산 엘캐피탄의 900m 수직벽을 완등하였다.
한편 1981년 1월 아콩카과에서 있었던 김용환 대장의 고소장애(高所障碍)로 인한 실족사, 또한 7월의 아이거 북벽 미텔라기 능선에서의 신건호 대장·주동규 대원의 낙뢰 감전사, 그리고 같은 달 히말라야 카라코람의 바인타브락 정상 부근에서의 악우회 이정대 대원의 추락사 등 많은 희생도 치렀다.
한편, 8,000m급 고봉등정이 계속되어 1883년 허영호의 마나슬루 단독 등정, 1986년 K2, 1987~1988년 에베레스트 동계(8,611m) 등정, 1990년 가셔브롬 1봉(8,068m), 1991년 시샤팡마(8,028m) 남벽 등정, 1992년 낭가파르바트, 1993년에는 한국여성원정대를 비롯한 3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 그리고 8,000m급 고봉 중 미등봉이던 브로드피크(8,047m)를 1995년 7월 12일 에스파냐의 합동원정대로 등정에 성공하였다. 또한 1995년 10월 2일 엄홍길이 세계 4위봉 로체(8,516m) 등정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