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경존안하되 부득반연이경이어다. 수지자신죄장이 유여산해하고 수지
瞻敬尊顔하되 不得攀緣異境이어다. 須知自身罪障이 猶如山海하고 須知
이참사참으로 가이소제하며 심관능례소례가 개종진성연기하며 심신감
理慘事慘으로 可以消除하며 深觀能禮所禮가 皆從眞性緣起하며 深信感
응이 불허하야 영향상종하라
應이 不虛하야 影響相從하라
부처님의 존안을 우러러보며, 다른 경계에 끄달리지 말고, 마땅히 자신의 죄와 업장
이 마치 저 산과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은 줄 알고 마땅히 이참과 사참으로 참회하
여, 이를 소멸하며, 예배하는 자기 자신과 예배 받는 부처가 참된 성품과 연기따라 일
어난 줄을 깊이 알고, 깊은 믿음의 감응이 헛되지 아니하여,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첨경존안(瞻敬尊顔) 부득반연이경(不得攀緣異境)
불보살님의 성상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실제 생존하신 불보살님 전에 예불을 올리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되, 조
금도 딴 생각을 갖지 말라는 뜻이다. 딴 생각이란, 머리 속에 세속의 딴 일을 생각한다거나 눈길을 여기저기 주
어 정신 집중이 잘 안 된 경우이다.
수지자신죄장(須知自身罪障) 유여산해(猶如山海)
자기의 죄와 허물이 산과 바다만큼 많은 줄을 알아야 비로소 공부가 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견(正見)을
가진 사람의 생각은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일도 죄와 허물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남을 해롭게 한 일도 없고
도적질을 한 것도 아닌 데 이게 무슨 죄와 허물이라고 하는가? 하고 물을것이다. 마음 공부에 관심이 없는 사람,
눈앞의 욕심덩이로 꽉 채워져 있는 사람은 무슨 좋은 말이 귓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 죄와 허물이 깊이
생각될수록 공부도 깊어진다. 왜냐하면 겸손한 초발심자에게는 천하가 감사해야 할 은혜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남을 위해 한번 생각하는 것이 내 자신을 위해서 열 번 생각하는 것 보다 참으로 값진 시간이다.
수지이참사참(須知理懺事懺)
신 구 의 삼업 참회 중에서 의(意) 즉 이치로 참회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고 하고 신(身)과 구(口)로 참회하는
것을 사참(事懺)이라고 한다. 이참은 이와 같다. 죄란 본래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사실과, 자성 청정심 역시 어
떤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정삼매 속에서 관찰하여 훨훨 털어 버리는 것이다.
사참은 예배, 절 등 몸으로 하는 것과 염불, 경을 읽는 것 등 입으로 하는 것이 있다.
참회 방법으로는, 일단 법사나 큰스님께 찾아 뵙고 진실하게 죄와 허물을 말씀 드려서 스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된다. 가령 아주 큰 죄나 허물은 불보살님 전에 기도를 올려, 자신의 정수리에 불보살님이 손을 뻗쳐서 수기(受
記)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외 작은 죄나 허물은 스님의 지시대로 하면 끝난다. 또 재물로써 배상해야 할 일
이면 능력에 따라 배상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면 된다.
대중 참회법은, 대중 앞에 나서서 이렇게 고한다.
“저는 이러이러한 허물을 지었기에 대중 스님께 깊이 참회합니다. 앞으로는 다시 이런 허물을 짓지 않도록 하겠
습니다.”
반드시 스스로 죄를 발로(發露)하고 나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두 가지 조건이 따른다.
심관능례소례(深觀能禮所禮) 개종진성연기(皆從眞性緣起)
능례는 예를 올리는 주체자 중생이고 소례는 예를 받는 객체자 부처님이다. 무엇을 깊이 관찰하는가. 예를 올리
는 중생과 예배를 받는 부처님이 다 진여법성(眞如法性) 하나에서 연기한 것인 줄을 관찰한다는 뜻인데, 부처와
중생은 불이(不二), 하나는 이룬 부처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루지 않은 부처일 뿐 진여법성에서는 차이는 없
다는 생각이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 인연생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혼자 독불장군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며 이렇게 하여 인연하여 생긴다는 말이다.
심신감응불허(深信感應不虛) 영향상종(影響相從)
감(感)은 나의 정성이 부처님께 전달된다는 말이고 응(應)은 거기에서 반드시 반응이, 불보살님의 가피력(加被
力)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골짜기에 소리가 울려 퍼지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고, 물체가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거중요하되 수상양부쟁하며 수호상부호하며 신쟁논승부하며 신취두한
居衆寮하되 須相讓不爭하며 須互相扶護하며 愼諍論勝負하며 愼聚頭閒
화하며 신오착타혜하며 신좌와월차하며
話하며 愼誤着他鞋하며 愼坐臥越次하며
대중 밤에 거처할 때에는 마땅히 서로 양보하여 다투지 말며, 서로 도와주고 보호하
며, 옳으니 그르니 논쟁하여 승부 가리기를 삼가하라.
또한 머리 맞대고 모여 않아 한가히 잡담하는 것을 삼가며, 다른 사람의 신발을 잘못
신지 말며, 자리 잡아 않거나 누울 때도 차례를 어기지 않도록 하며,
거중료(居衆寮) 수상양부쟁(須相讓不爭) 수호상부호(須互相扶護)중료(衆寮)는 큰 방, 대중방, 선방 등
이다.
싸우지 말고 서로 형제처럼 돕고 친하게 지내도록 하였다.옛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풍수가 아주 나쁜 땅에서
도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많이 모여서 지내면 복지(福地)가 되는데 이것은 선정삼매의 기운이 어리고 서려서
땅의 기(氣)가 바뀌기 때문이다.
반대로, 천하 길지(吉地)에서도 화합하지 않은 대중이 모여 지내면 나쁜 땅이 되어 삼재팔난이 끊임없이 다가온
다고 하였다.신토불이(身土不二). 몸도 땅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나쁜 몸으로 태어 났고 못난 가문에서 자랐어
도 착한 마음을 먹고 남을 위해 마음을 열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불보살이다. 1000일 동안
이면 피부가 바뀌고, 3000일 동안이면 뼈가 바뀌고, 10000일 동안이면 골수가 바뀐다는 말도 이와 같다.
신쟁론승부(愼諍論勝負)
승부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승자, 패자가 있고 승자 역시 언젠가는 패자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 승부 시비에서 벗
어나려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다 말해서는 안된다. 생각이 떠올랐어도 잘 걸러서 지금 적당한지 살펴
보고 말을 해야 한다.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일수록 생각이 튀어 오르면 오른 대로 제멋대로 말하고 제멋대로 행
동한다. 제 한 몸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떠나야 품위 있는 문화인이다.
신취두한화(愼聚頭閒話)
어진다. 법정 스님은 한때 이런 교훈을 말씀하셨다. 대중방에서는 토굴처럼, 토굴에서는 대중방처럼. 대중방에
서 대중생활을 잘 하려면 호젓한 토굴에서처럼 조용하게 지내고, 반대로 토굴생활은 대중생활에서처럼 근면하
게 지내야 진정 수도자라고.
대객언담에 부득양어가추하고 단찬원문불사언정 부득예고방하야 견문
對客言談에 不得揚於家醜하고 但讚院門佛事언정 不得詣庫房하야 見聞
잡사하고 자생의혹이어다
雜事하고 自生疑惑이어다
비요사어던 부득유주엽현하야 여속교통하야 영타증질하고 실자도정이
非要事어던 不得遊州獵縣하야 與俗交通하야 令他憎嫉하고 失自道情이
이다
어다.
손님과 대화를 나눌 때는 내 집(절 집안)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지 말고 다만 절안의
불사를 찬탄할지언정 고방(창고․사무실)을 드나들며 이 일 저 일 잡된 일을 듣고 보아
스스로 의혹을 품지 말라.
요긴한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면서 속인들과 사귀면서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고, 도 닦는 뜻을 스스로 저버리지 말지어다.
대객언담(對客言談) 부득양어가추(不得揚於家醜)
객을 맞이해 이야기를 꺼낼 때에, 좀 부끄러운 절 일, 불미스러운 내용은 밖으로 드러내서 말하지 말라는 말이
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의 신심을 떨어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면 선신(善神)이 가
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려 듣고 나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면 악신(惡神)이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려 듣는 다
는 고사가 있다. 선신이 옹호를 해도 일을 이룰까 말까 하는데 악신이 가까이 있으니 어떻게 일대사 마치기를 기
약하랴.
부득예고방(不得詣庫房) 견문잡사(見聞雜事)
고방(庫房)은 원주실이나 종무소의 창고 같은 곳이다. 소임자가 아닌데 공연히 고방에 가서 잡다한 여러가지 일
을 보거나 듣고 의심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사판(事判)의 살림하는 소임자 스님의 처소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차라리 공부인에게는 매사가 모르는 게 약이 된다.
당유요사출행이어든 고주지인과 급관중자하야 영지거처하며 약입속가
儅有要事出行이어든 告住持人과 及管衆者하야 令知去處하며 若入俗家
어던 절수견지정념하되 신물견색문성하고 유탕사심이온 우황피금희소
어던 切須堅持正念하되 愼勿見色聞聲하고 流蕩邪心이온 又況披襟戱笑
하야 난설잡사하며 비시주식으로 망작무애지행하야 심괴불계야 우처
하야 亂說雜事하며 非時酒食으로 妄作無碍之行하야 深乖佛戒야 又處
현선인의 혐의지간이면 기위유지혜인야리요.
賢善人의 嫌疑之間이면 豈爲有智慧人也리요.
혹시라도 요긴한 일이 있어 꼭 외출하게 되면, 주지나 대중을 통솔․관장하는 사람에
게 말하여 가서 머무는 곳을 알려야 한다. 만약 속인의 집에 들게 되거든 부디 바른
생각을 굳게 지니되, 보고 듣는 경계에 끄달려 방탕하고 삿된 마음에 휩쓸리지 말아
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옷깃을 풀어헤치고 웃고 떠들면서 쓸데없이 잡된 일이나 지
껄이고, 때도 아닌 때에 밥먹고 술 마시며 망령되이 꼴사나운 짓을 하여 부처님이 정
해주신 계율을 크게 어길 것인가?
그리하여 어질고 착한 이들과 싫어하고 의심하는 사이가 된다면 어찌 지혜있는 사람
이라 하겠는가.
약입속가(若入俗家)
속가(俗家)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절에서 스님들끼리 ‘속가에 다녀왔다.’하고 말하면 부모형제가 사
는 자기 고향 마을 집을 말한다. 둘째는, 넓게 말해서 산문 밖에 있는 모든 세속 마을 집을 가리킨다.
절수견지정념(切須堅持正念)
간절하게 정념을 견지해야 한다는 뜻. 열반에 이르는 방법인 팔정도(八正道)에는 정념이 일곱 번째로 들어 있
다.
① 정견(正見) : 있다고 하는 상견(常見), 없다고 하는 단견(斷見) 등 두 가지 견해를 떠난 견해. 곧 진리를 바로
보고 다음에서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법다이 한다.
② 정사유(正思惟) : 정견을 통해서 사제(四諦)의 이치를 관(觀)하는 힘이 더욱 깊어진다.
③ 정어(正語) : 정견과 정사유를 통해서 거짓말이나 삿된 말을 하지 않는다.
④ 정업(正業) : 정견과 정사유를 통해 행동한다.
⑤ 정명(正命) : 정견과 정사유를 통해 악업을 짓지 않고 행동, 말, 생각 등 여법(如法)한 삼업으로 생활한다.
⑥ 정정진(正精進) : 악을 떠나 일심으로 노력하여 더욱 올곧게 힘써 나아간다.
⑦ 정념(正念) : 나쁜 생각을 떠나서 더욱 수행에 전념(專念)한다.
⑧ 정정(正定) : 산란한 생각을 떠나서 더욱 마음을 안정한다. 선정삼매로 들어가는 문 역할인 정념은 매우 중요
하다.
일을 성취하는 데에는 일의 빠르고 늦는 순서를 잘 알아야 한다. 경전에서, 선정삼매(禪定三昧)를 거치지 않은
수행자는 어떤 정각도 이룰 수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만큼 선정 삼매가 먼저 필요하다는 뜻. 예를 들면, 붓글씨
를 배우는 사람은 왕희지의 체, 안진견의 체, 구양순의 체 등 체본 필법(筆法)을 익히기 전에 먼저 손가락에 필
력(筆力)을 얻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과 같다.
속가에 들어가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선정삼매에서 나와야 허물이 없다. 이렇게 되면 속가와
출가의 구별도 없어진다. 초심자는 무엇보다 정념을 견지해야 한다.
신물견색문성(愼勿見色聞聲)
뒤에 자경문에서, 보아도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시비분별이 끊어진 자리. 그러나
중생은 귀로 들으면 들은 대로 시비하고 눈으로 보면 본대로 분별한다. 속가에 나아가서 이렇게 번뇌만 잔뜩 묻
혀 들어오는 출가자를 경계한다.
유탕사심(流蕩邪心)
삿된 마음에 흘러 빠진다 뜻으로 정념과 상대되는 말이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으로,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
고 정법에서 멀어진다. 그리하여 세속의 부귀영화에 눈을 돌리고.......
비시주식(非時酒食)
정오가 지나서 밥을 먹지 않는 게 비시불식(非時不食)이고 병자가 아닌데 술을 마시는 게 비시주식(非時酒食).
율장대로라면 저녁을 먹고 있는 수행자는 모두 계율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시대가 달라져서 지금은 그런 생각
을 내는 이도 적다. 옛날 한 노스님은, 저녁을 먹는 수행자가 많아지면 불법이 빨리 쇠약해질 것이라고 염려하면
서 한탄을 하였다.
주사당하되 신사미동행하며 신인사왕환하며 신견타호악하며 신탐구문
住社堂하되 愼沙彌同行하며 愼人事往還하며 愼見他好惡하며 愼貪求文
자하며 신수면과도하며 신산란반연이어다.
字하며 愼睡眠過度하며 愼散亂攀緣이어다.
공부하는 처소에 머물 때는 어린 사미와 함께 행동하기를 삼가하고 인사차 오고 가는
것을 삼가하며, 다른 사람의 잘 잘못을 참견하는 것을 삼가하고, 지나치게 문자를 구
하려 함을 삼가하며, 잠자는 것도 정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삼가하고, 인연 경계에 끄
달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삼가 할 지어라.
주사당(住社堂)
송광사의 선방 이름은 지금도 수선사(修禪社)이다. 사당(社堂)은 곧 선방을 가리킨다. 보조 스님 당시 송광사의
옛 이름 역시 수선사(修禪社)였다.
신사미동행(愼沙彌同行)
모닥불이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데 다른 축축한 나뭇잎을 불길 위에 덮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불길은 곧 꺼
지고 만다. 선방에 들어온 초심 비구들이 모닥불에 비유된다면 사미나 속인들은 축축한 나뭇잎에 비유될 것이
다.
신인사왕환(愼人事往還)
일숙각(一宿覺)으로 이름난 영가(永嘉) 스님이 처음 육조 혜능(惠能) 스님을 친견하고 그 앞에 서서 멋진 연출
을 한다. 영가 스님은 걸망을 진 채 주장자를 짚고 육조 혜능 스님의 주위를 삥 돌기만 한다. 이때 육조 혜능 스
님이 꾸짖는다.
“이보게, 수좌. 출가 사문이면 3천 위의와 8만 세행을 지켜야 하는데 자네는 그걸 모르는 거냐?” 영가 스님이 대
답한다.
“무상(無常)이 너무 빨라서 그렇습니다.”
무상한데 언제 예의범절을 다 지키고 공부를 할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하는 뜻이다. 법담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한다.......
화두 공부에 열중한 수좌는 오며가며 하는 인사치레를 생략하라는 뜻이지, 별로 공부에 열중하지도 않으면서 인
사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신견타호오(愼見他好惡)
호오(好惡)는 좋고 나쁜 것을 말한다. 참선 공부를 하면서 시선이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누구는 뭐가 좋고 누구는 뭐가 나쁘다, 하지 않고 오직화두일념(話頭一念) 뿐이다.
신탐구문자(愼貪求文字)
선(禪)의 근본 정신은 불립 문자(不立文字)이다. 그리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불립
문자(不立文字)는, 선(禪)은 언어문자를 훌쩍 뛰어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지 언어문자에 갇혔다면
그건 선이 아니라는 뜻.
직지인심(直指人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뜻인데 비유하면, 일천강물 속에 비친 일천 달을 가리키
지 않고 머리 위의 뜬 하늘 달을 바로 가리킨다는 뜻.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진리 그대로인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된다는 뜻.
신수면과도(愼睡眠過度)
음식과 잠을 잘 조정할 수만 있다면 그는 뛰어난 수행자이다. 범인은 정진할 시간에 잠을 자기 때문에 결국은 명
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잠을 잘 조정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이다.
신산란반연(愼散亂攀緣)
처음 인류에게 뛰어난 점은 생각(生覺)이었다.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데서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었고 〈만물의
영장〉이란 이름이 생겼다. 뒷날 이 생각 때문에 심한 병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사람이 너무 복잡한 생각을 많이
일으킨 탓이다.
명상법은 이러한 병의 치료법으로 나왔다. 새롭게 명상을 통하여, 생각이 있는 데서 생각이 없는 데로, 유념유상
(留念有想)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나아가기에 이르렀다. 보통은 병의 치료가 목적이었다.
선지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깨달음의 경지, 열반을 체험하였다. 이것이 선(禪)의 시초이다. 선(禪) 수행자는
있는 일을 줄여나가야지, 없는 일을 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방하착(放下着)! 모두 놓아버려야 한다. 생각을
다 비워야 한다.
약우종사가 승좌설법이어든 절부득어법에 작현애상하야 생퇴굴심하며
若遇宗師가 陞座說法이어든 切不得於法에 作懸崖想하야 生退屈心하며
혹작관문상하야 생용이심하고 당수허회문지하면 필유기발지시하며 부
或作慣聞想하야 生容易心하고 當須虛懷聞之하면 必有機發之時하며 不
득수학어자하야 단취구판이어다.
得隨學語者하야 但取口辦이어다.
만약 종사(선지식)께서 법상에 올라 설법하는 때를 만나거든, 그 법문을 듣고 (어렵
다는 생각에)부디 벼랑에 매달린 것 같은 생각을 지어 서 물러서려는 마음을 내거나
또는 익히 들어본 법문이라는 생각을 지어서 쉽게 여기는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마음을 텅 비우고 법문을 들으면 반드시 깨달음의 기연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말만 배우는 사람을 따라서 입으로만 판가름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약우종사승좌설법(若遇宗師陞座說法)
종(宗)은 종문(宗門)이고 종사는 종문의 어르신, 큰 스승이다. 선종에서 선사, 종사, 대선사, 대종사 하는 말은
종문을 대표해서 법이 있는 대선지식에게만 쓰는 칭호. 요즘에 와서는 별 기준이 없이 써서 법도를 크게 잃고 있
다.
작현애상(作懸崖想) 생퇴굴심(生退屈心)
학자가 법문을 듣는 바른 자세이다. 법문을 들을 때에는 단견(斷見) 상견(常見) 양단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① 단견은 불조의 법문을 따르기가 몹시 어려워 포기하고 말겠다는 뜻. 현애상(懸崖想)은 단견이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것 같이 몹시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들어 깨달음의 도(道)를 가볍게 여기는 것.
허회문지(虛懷聞之)그렇다면 어떻게 들을 것인가? 마음을 텅 비우고 법문을 듣는다. 쉽다거나 어렵다는 생각이
없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그러려니 할 뿐이다.
필유기발지시(必有機發之時) 반드시 깨달음을 이룰 때가 있고 마음이 열리어 성인의 대열에 오를 때가 있다는
뜻.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자는 성문각(聲聞覺), 줄여서 성문이라고 한다.
금강경에 나와있는 네 종류의 성인, 성문 사과(四果)를 살펴본다. 과(果)는 무루지(無漏智)가 생기는 지위.
① 수다원은, 발심(發心)이 잘 되어 처음으로 성인의 대열에 오른 이.
입류과(入流果).
② 사다함은, 다음 생에 인간계와 천상계에 한번 왕래하는 과를 이룬 이. 그 다음에 깨달음을 이룬다. 일래과(一
來果).
③ 아나함은, 욕계에 다시 오지 않는 과를 이룬 이. 다음 생에 색계나 무색계에 가서 깨달음을 이룬다. 불래과
(不來果).
④ 아라한은, 삼계(三界)를 뛰어 넘었어도 아직 의생신(意生身)이 남아 있어 구경각(究竟覺)은 이루지 못하였다
고 승만경(勝 經)에서는 지적한다. 그러나 거의 다 수행하였기 때문에 머지 않아 아라한이 구경각을 이루는 것
은 시간 문제. 성문은 연각(緣覺)과 함께 이승(二乘)이다.
불생과(不生果)
중생계를 말하는 삼계를 살펴본다.
① 욕계(欲界)는, 욕은 탐욕으로 재물욕, 음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혹은 장수욕) 등 오욕으로 이루어진 세계
이며 인간,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등 욕계 6천이 있다.
② 색계(色界)는, 색(色)은 물질로 미묘한 물질세계이며 선정의 깊고 낮음에 따라 색계 18천이 있다.
③ 무색계(無色界)는, 무색(無色)은 수상행식(受想行識)으로 정신세계이며 선정삼매에 가까운 무색계 4천이 있
다.
부득수학어자(不得隨學語者) 단취구판(但取口瓣)
공연히 말만 따라서 배우는 사람은, 하루종일 남의 집 소만을 세고 있는 사람과 같다. 몸소 실천을 하지 않은 법
문은 설득력을 잃는다.
소위사음수하면 성독하고 우음수하면 성유하니 지학은 성보리하고 우
所謂蛇飮水하면 成毒하고 牛飮水하면 成乳하니 知學은 成菩提하고 愚
학은 성생사라함이 시야니라.
學은 成生死라함이 是也니라.
이른바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듯이 지혜롭게 배
우면 보리를 이루것이고, 어리석게 배우면 나고 죽음ㅇ에 빠진다 함이 이를 두고 하
는 말이다.
소위(所謂) 사음수(巳飮水) 성독(成毒) 우음수(牛飮水) 성유(成乳)같은 물인데도 소가 물을 마시면 그것이
우유로 변하지만 독사가 마시면 독으로 변한다. 같은 비유로, 사자가 여우 소리를 내면 그것이 사자의 소리이고
여우가 사자 소리를 흉내내어도 그건 여우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까닭은 근본 바탕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
문이다. 이 글과 비슷한 내용이 법안종의 제3조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스님이 엮은 종경록(宗鏡錄)에
나온다.
“或守眞詮 而生語見 服甘露而早終 或敦圓理 而起着心 飮醍 而成毒혹 진리 법문을 꽉 움켜쥘 뿐 펼 줄 모르고 그
말에 좇아 견해를 일으킨다면 마치 불사약인 감로수를 복용하고도 도리어 일찍 죽는 사람과 같고, 혹 무상대도
(無上大道)에 간절히 나아가되 중도를 잃고 무상대도에 집착심을 갖는다면 마치 최상의 맛인 제호를 마시고도
독을 이룬 사람과 같다.”
왜 그럴까? 하나의 칼로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은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또 어떤 사람은 남을 해치고 자
신의 몸을 해치며, 자동차의 경우로 비유하자면, 편리하게 잘 쓰면 좋지만 음주운전 등으로 대형 교통사고를 일
으키게 되면 살인 무기. 모든 것이 다 이롭게 쓰면 이기(利器)이고 나쁘게 쓰면 흉기이다. 불법을 잘 배우는 사
람은 생사를 뛰어 넘어 정각을 이루나 어리석은 사람은 오히려 생사윤회의 원인이 되는 일만을 거듭한다. 많이
외우고 많이 법문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 안으로 회광반조( 廻光返照)해서 수행을 쌓지 못한 사람은 결국 일반
세속 학문을 익히는 지식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회광반조란, 언제나 공부인은 마음의 빛을 마음 안으로 돌
이켜 비춰본다는 뜻.
비유하면, 목수는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깎는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복도 깎고 잘라버려서 후손이 썩 좋지 않다
고 하는데 목수는 평생 자르고 깎는 업만을 짓기 때문인 것이다. 또 꿈틀꿈틀 살아있는 뱀을 아주 잘 그리는 화
가가 죽어서 뱀의 과보를 받았다는 고사가 있는데, 이와 같이 뱀의 업을 평생 지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업을 면할 수가 있을까? 목수는 자르고 깎을 때마다 원을 세우는데, 악한 생각, 말, 행동 등
악업을 깎고 자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화가는 뱀을 그릴 때마다 원을 세우는데, 생기발랄한 생명력으로 대우주
자연을 선행으로 장엄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부득어주법인에 생경박상하라 인지어도에 유장하면 불능진수하리니
又不得於主法人에 生輕薄想하라 因之於道에 有障하면 不能進修하리니
절수신지어다
切須愼之어다.
논에 운하되 여인이 야행에 죄인이 집거당로어던 야이인악고로 불수
論에 云하되 如人이 夜行에 罪人이 執炬當路어던 若以人惡故로 不受
광명하면 타갱락참거의라하시니
光明하면 墮坑落塹去矣라하시니
또한 법사에 대해 업신여기는 생각을 내지 말라. 그로 인하여 도에 장애가 생기어 수
행 정진을 못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삼가하고 삼가할지어다. 논(論)에 말하기를 “어
떤 사람이 밤길을 가는데 죄진 이가 횃불을 들어 길을 비춘다고 할 때에 만약 그 사람
이 나쁘다는 이유로 밝은 불빛을 비춰 줌을 싫다 하면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
다.” 하였다.
우부득어주법인(又不得於主法人) 생경박상(生輕薄想)고인네는 선지식이 없이는 도를 이룰 수가 없다고 말
하는데 선지식이 그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도를 이루려거든 먼저 자기 마음 안에 선지식을 모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뜻. 혹 선지식을 찾아 모셨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선지식에게 가
벼운 마음,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면 결코 도를 이루지 못한다.
“우러러 불보살님 전에 발원합니다. 불보살님의 가피력(加被力)으로, 선지식을 친견하여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무생(無生)의 법인(法印)을 돈오(頓悟)하기가 큰 원입니다.” 대혜종고(大慧宗 ) 스님의
서장(書狀)에 나오는 글. 글쓴이가 자주 송하는 법문 중의 하나이다.
論云 如人夜行 罪人執炬 當路
논장 어느 책에서 인용한 글이지 잘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눈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길을 가다가, 마침 죄를 지은 사람, 범죄인이 횃불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에 죄인의 횃불이니까 빨리 피하려고 결심한다면 어떻게 될까.
若以人惡故 不受光明
만약, 그 사람이 흉악범이기 때문에 피하여 불빛을 받지 않는다면 목적이 있는 사람이 사소한 일로 인하여 목적
이 있는 큰일을 젖혀두는 경우이다. 그가 죄인이란 이유로 조언까지를 무시해버린다면 안될 일이다.
墮坑落塹去矣
그리하여, 달이 없는 아주 컴컴한 밤길을 가다가 잘못하여 발을 한 발짝 잘못 내딛어서 구덩이에 쳐박혀 나뒹굴
고 말며, 낭떠러지에 떨어져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법문을 들을 때에는 정말 법문에만 정신을 쏟을 뿐이지, 법사의 나이, 성별, 출신, 학벌 등은 물을 게 없다. 선입
견을 가지고 법문을 듣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참으로 발심하여 시시비비와 멀어진 수행자에게는 만나는 이가 다 선지식이다. 왜냐하면 선지식에는 순행(順
行)과 역행(逆行)이 있는데, 순행하면 순행한 대로, 역행하면 역행한 대로 다 선지식이기 때문이다.
좋은 면에서 찬탄하면서 이끌어주는 이가 순행 보살이고 때로는 욕하고 미워하고 훼방하는 이는 역행 보살이다.
화엄경에서는 선지식 섬기기를 이렇게 말한다.“선지식(善知識)을 구하려고 할 때에는 심신을 피곤해 하지 않으
며선지식을 뵙고 난 후에는 싫증을 내지 않으며선지식에게 궁금한 점을 여쭐 때에는 노고(勞苦)를 아끼지 않으
며선지식을 가까이 모신 이후로는 뒤로 물러나지 않으며 선지식을 섬기고 있을 때에는 시종 끊어짐이 없으며 선
지식이 깨우침을 내릴 때에는 작은 어김도 없으며 선지식의 공덕에는 의심치 않으며 선지식의 설법을 들을 때에
는 출리문(出離門)을 열어 확정(確定)하며 선지식이 번뇌를 따르는 것을 보고는 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선지식
이 계신 곳에는 신심을 깊이 일으켜 변함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보살행(菩薩行)의 법문을 자주 들으며 보살의 공덕을 완성하며보살의
대원(大願)을 세우며 보살의 지혜 광명을 나타내며 보살의 선근(善根)을 이끌어 내며 여래의 보리과(菩提果)를
획득하며 보살의 묘행(妙行)을 거두어들이며 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힘을 낳으며 보살의 자재력(自在力)
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선남자 여러분,
보살은 선지식의 보살핌으로 말미암아 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며선지식의 성취로 말미암아 마음대로 태어나며 선지식의 힘으로 말미암아 업감(業感)을 깨며 선지식의 인욕의 갑옷으로 말미암아 악한 소리 한 마디를 듣지 않으며 선지식의 양육으로 말미암아 모든 교만을 다 떨쳐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법지차에 여리박빙하야 필수측이목이청현음하며 숙정진이상유치라
聞法之次에 如履薄氷하야 必須側耳目而聽玄音하며 肅情塵而賞幽致라
가 하당후에 묵좌관지하되 여유소의어던 박문선각하며 석척조순하고
가 下堂後에 黙坐觀之하되 如有所疑어던 博問先覺하며 夕惕朝詢하고
불람사발이어다 여시라야 내가능생정신하야 이도위회자여인저,
不濫絲髮이어다 如是라야 乃可能生正信하야 以道爲懷者歟인저,
설법을 들을 때는 마치 살얼음을 밟고 가듯이 간절히 귀와 눈을 기울여 현묘한 진리
의 소리를 들어야 하며, 마음속의 번뇌 티끌 맑히고 그윽한 뜻을 음미하여야 한다. 설
법이 끝난 뒤 법사가 당에서 내려가면 묵묵히 앉아서 관하되 어떤 의심나는 게 있거
든 선지식에 널리 물어야 하며, 아침 저녁으로 생각하고 의심나는 것을 물어서 털끝
만큼도 넘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야 비로서 올바른 믿음을 지녔다 할 수 있고 도로써 자기 마음 자리를
삼는 자라 할 것이다.
문법지차 여리박빙(聞法之次 如履薄氷)
세속을 벗어나서 혼자 살면서 사물의 뒷면에 숨은 뜻까지 내다보려는 사람은 법문을 들을 때에 살얼음을 밟는
사람처럼 정성을 다 해야 한다는 뜻. 시경(詩經)에는 전전긍긍(戰戰兢兢) 여림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
氷)이란 구절이 있다. 두려워하고 조심(操心) 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한다는 뜻.백장
청규 당시에는 헛생각이나 졸음에서 벗어나서 맑은 정신, 깨어있는 정신으로 상단 법문을 듣기 위해서, 청중은
모두 일어서서 시종 긴장된 자세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필수측이목이청현음(必須側耳目而聽玄音)
귀는 법문에 귀기울이고 눈은 법문을 하는 법사를 주시하는 등 한군데에 주의 집중을 다 한다는 뜻. 현(玄)자는
매우 깊다, 심오하다는 뜻. 현음은, 현묘(玄妙)한 진리의 말씀이며, 단견(斷見) 상견(常見)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은 중도 법문의 말씀이다. 색(色)과 공(空), 수상행식(受想行識)과 공,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 어디에도 떨어지
지 않는다.
숙정진이상유치(肅情塵而賞幽致)
법문을 듣는 가장 좋은 상태는, 마음 가운데 번뇌를 깨끗이 하여 선정삼매에 들어서 법문 내용의 깊은 이치, 깊
은 뜻을 감상하는 것이다. 때문에 법문을 듣기 전에 학자는 마음의 준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역대 조사들이
선지식의 한마디 말끝에 대오(大悟)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하당후 묵좌관지(下堂後 默坐觀之)
법문이 다 끝나서 선방으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떠들썩하니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 휩쓸리지 않
도록 노력한다. 조용하게 앉아 법사의 법문을 상기해 본다.
여유소의 박문선각(如有所疑 搏問先覺)
만약에 잘 모르는 부분이 있거든 나보다 먼저 공부한 분, 선각자에게 널리 묻는다. 옛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물어
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여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하였다. 모르는 데도 아는 것인 양 자신의 무지(無智)를 감
추는 일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석척조순 불람사발(夕 朝詢 不濫絲髮)
석척(夕 )은 주역(周易)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로, 깨달음을 얻기 전의 참선 학자의 몸가짐은 마치 승천(昇天)을
준비하는 용과 같이 아주 근신해야 한다는 말로 쓰고 있다. 낮 동안에 전전긍긍하듯이 잠을 자면서도 근념(勤
念)하며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서는 또 의심나는 것을 조실 스님께 나아가 간절하게 묻는다.
백장 청규 당시에는 선방이 일일점검제였다. 눈 푸른 납자를 당금질하는 조실채의 위치는 대중 선방 바로 곁에
있어서 학자가 정진을 하다가 수시로 조실채에 가서 법문을 여쭐 수가 있었다. 분초을 다투는 경지에서는 여차
없는 절차탁마(切磋琢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참선 학자는 누구나가 매일 조실채에 나아가서 법문
답을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고 의무였다.
치문(緇門) 영가답서(永嘉答書) 편에는 여기 제17과의 전체 내용이 들어있다. 어휘가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
을 뿐이고 전체 뜻에서는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다.
내가능생정신 이도위회자여(乃可能生正信 以道爲懷者歟) 요즘 외국 사람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 가운데서
하나가 ‘빨리, 빨리’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이 빨리 빨리, 허둥지둥, 천방지축이라는 표현이다.
바른 믿음, 서두르지 않는 수행은 쉽지 않다. 초심자가 부처님과 같은 대각(大覺)을 빨리 이루겠다는 조급한 마
음에서 무리수가 나오고 드물게는 삿된 생각이나 요행수를 좇게 된다. 주위를 돌라보면, 발심에서는 기라성같은
수많은 수행자가 있었으나 중도에 쓰러져 거의 보이지 않는 예가 적지 않다.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은 마치 장미
향기와 같이 정신(正信)으로 산다. 품질 개량을 하고 또 개량하면 꽃은 크고 빛깔이 곱고 성장이 빠르고 병충해
에 강하지만…허나 본래의 향기를 다 잃어버린 장미. 수도(修道)에서는 개량이 통하지 않는다. 순수 그대로 우
직한 게 바른 길이다. 소의 느릿느릿한 걸음처럼 좀 우직하게 천천히 정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시습숙한 애욕에치 전면의지하야 잠복환기하야 여격일학하나니 일
無始習熟한 愛欲恚痴 纏綿意地하야 暫伏還起하야 如隔日虐하나니 一
절시중에 직수용가행방편지혜지력하야 통자차호언정 기가한만으로 유
切時中에 直須用加行方便智慧之力하야 痛自遮護언정 豈可閒漫으로 遊
담무근하야 허상천일하고 욕기심종이구출로재리요
談無根하야 虛喪天日하고 欲冀心宗而求出路哉리요
시작을 알 수 없는 옛적부터 버릇처럼 익혀온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얽히
고 설켜있어 잠시 숙어진듯 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게 마치 하루걸러 앓는 학질과 같
으니, 어느 때든지 마땅히 수행을 돕는 수행의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써 스스로의 괴
로움을 막고 지킬지언정 어찌 한가하고 근거 없는 잡담을 즐기면서 세월을 허송하며
마음깨치기를 바라고 삼계(三界)로부터 벗어날 길을 구하고자 할 것인가.
무시습숙(無始習熟)
무시(無始)는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준말로, 시작을 알 수 없는 아주 오랜 시간을 가리킨다. 인과를 설명하면,
인(因)은 삼업(三業)의 씨앗이고 연(緣)은 햇볕, 물, 공기 같은 여러 조건이고 과(果)는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선악(善惡)의 과보이다. 이 가운데서 인은 다른 인에게 영향을 주고 연은 다른 연에게 영향을 주고 과
는 다른 과에 영향을 주고. 이같이 무수히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언제 시작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습숙은 오래 익힌 습관. 일심일념, 일거일동이 쌓여 습관이 되고 습관은 쌓여 업이 된다. 때문에 처음 한 생각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이 행동으로, 다시 행동이 업을 이루기 때문이다.
애욕애치 전면의지(愛欲 癡 纏綿意地)
애욕애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말한다. 나쁜 사람이란 ‘이기심에서 나 혼자 밖에 모르는 사람’ ‘나 뿐
인 사람’이라는 유머가 있다. 나 혼자 밖에 모른 데서 애욕(愛欲), 탐욕(貪欲)이 생기고, 다시 이 탐욕이 채워지
지 않았을 때에는 화가 치밀고, 다시 화를 풀지 않고 참회를 끝까지 하지 않으니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와 같이
탐진치는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연쇄고리이다.
의지(意地)은 불교 심리학인 유식에서 말하는 의식(意識)으로, 6식의 하나이고 8식의 하나이다. 의근(意根,
articles. 意로 이름되는 識은 제7말라식)에 의한 식이란 뜻. 의식의 성능은 물심(物心) 모든 총상의 요별(了別,
vijna), 즉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다. 의식의 작용이 없을 때에는 무상천(無想天) 사람의 무상정(無想定)이 대표
적인 경우이고 숙수(熟睡)와 멸진정(滅盡定), 민절(悶絶)의 경우도 있다. 그밖에는 늘 의식이 작용한다.
잠복환기 여격일학(暫伏還起 如隔日虐)
말라리아균으로 앓는 학질은 실제로 하루 반정도 시간을 두고 몸에서 열기과 냉기가 번갈아 일어난다고 한다.
이렇게 번뇌 망상은 끊어진 듯 하다 인연따라 다시 극성스럽게 일어난다.
예를 들면, 봄에 싹이 돌에 눌려 있으면 노란 싹 그대로 때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인연따라 돌 틈을 비집고 땅위
로 나오면 새 싹은 떡잎과 줄기를 파랗게 피운다. 지금 탐진치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
다. 인연 따라 언제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견지절하야 책궁비해하며 지비천선하야 개회조유어다. 근수이관력이
但堅志節하야 責躬匪懈하며 知非遷善하야 改悔調柔어다. 勤修而觀力이
전심하고 연마이행문이 익정하리라. 장기난조지상하면 도업이 항신하
轉深하고 鍊磨而行門이 益淨하리라. 長起難遭之想하면 道業이 恒新하
고 상회경행지심하면 종불퇴전하리니
고 常懷慶幸之心하면 終不退轉하리니
다만 (출가 발심한) 뜻과 절개를 굳게 다지고 스스로 채찍질해 게으르지 않도록 하고
잘못을 알면 바르게 고치며, 회개하고 뉘우쳐 마음을 조복하고 늘 부드럽게 할 것이
다.
부지런히 닦으면 관하는 힘이 더욱 깊어지고 단련하고, 갈아 닦으면 수행문이 더욱
청정하리라. 불법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오래(長) 오래 일으키면 도 닦는 일이 항
상 새롭고 언제나 경사스럽고 다행스런 일인가 생각하면 끝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이
다.
근수이관력 전심(勤修而觀力 轉深)
참선을 하면서 관을 닦으면 거기에서 힘이 점점 커진다.
관은 본래 선(禪, Dhyna)이나 비파사나와 같은 말이었으나 요즘은 엄격히 구별해서 쓰고 있다. 지(止, Sama
tha)와 관(觀, Vipayana)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지(止)의 힘은, 정력(定力)으로, 밖으로 쏟아져 나가려는 시선을 마음 안으로 돌이켜서 한 곳에 머무르게 한다.
마치 화두(話頭)를 들어서 자기 내면의 세계로 관심이 모아질 때에 마음이 고요하게 평정(平靜)되고, 더 나아가
서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요지부동할 때에 선정 삼매이다.
관(觀)의 힘은 혜력(慧力)으로, 눈앞에 보이는 현상의 이면(裏面)에 내재되어있는 진실한 이치를 꿰뚫어 본다.
선정 삼매 속의 정중동(靜中動). 유식에서는 심소(心所)로 수상행식(受想行識) 중 수상행(受想行)이 관에 해당
한다. 참선의 경계는, 깨어있으면서 성성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요하여 적적해야 한다는 선구(禪句) ‘성성적적
(惺惺寂寂)’ 중, 성성은 관(觀)을 말하고, 적적은 지(止)를 말한다.
조사어록에서, 이 수행자는 정력만 있다, 저 수행자는 혜력만 있다, 하는 표현으로 바르지 못한 수행자를 꾸짖는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장기난조지상(長起難遭之想)
경전을 펴면서 외우는 개경게(開經偈). 무상심심 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위없이 깊고 깊은 미묘한 법문은 백천
만겁 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워라아금문견 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제가 이제
수지해서 견문하게 되었으니원해여래 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여래의 진실한 뜻을 깨치도록 하소서.
경전을 대하는 태도는 이런 간절한 생각이 필요하다.
여시구구하면 자연정혜원명하야 견자심성하며 용여환비지하야 환도중
如是久久하면 自然定慧圓明하야 見自心性하며 用如幻悲智하야 還度衆
생하야 작인천대복전하리니 절수면지어다.
生하야 作人天大福田하리니 切須勉之어다.
이와 같이 오래오래 수행하면 자연히 정과 혜가 원만하게 밝아져 스스로 마음 성품을
보게 될 것이며, 법계가 환상 인줄 알고 자비와 반야의 지혜로서 중생을 제도하고 인․
천 가운데 큰 복밭을 일구 것이니 마땅히 간절히 마땅히 힘쓰고 힘쓸지어다
견자심성(見自心性)
보조국사는 53세 평생 세 차례의 깨달음 과정을 겪었다고 스스로 토로하였다.
첫 번째 깨달음은, 1182년 25세 때에 승과(僧科)에 오른 해인데 창평(지금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혹은 전남 나
주시?) 청원사(淸源寺)에서 도반 10여명 대중과 함께 정진하면서 육조단경(六祖檀經)을 읽을 때였다.
두 번째 깨달음은, 1185년 28세 때에 하가산(下柯山 혹은 鶴駕山, 지금 경북 예천군 보문면) 보문사(普門寺)에
서 3년 동안 정진하면서 이통현(李通玄) 거사의 신화엄론(新華嚴論) 40권을 읽을 때였다 세 번째 깨달음은,
1198년 41세 때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 지금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정진하면서 대혜 종고 선사의 어록
서장(書狀)을 읽을 때였다. 그 후, 1200년 43세 때에 송광산 길상사(吉祥寺, 지금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와 한국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실천하는 대총림을 열었다.
1205년 48세 때 가을 억보산(億寶山, 지금 전남 광양시 옥룡면 白雲山)에 백운암(白雲庵)을 창건하고 그곳에서
지내다가 겨울에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지어 송광사의 청규로 삼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