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수송동.
안국동에서 우정국과 한국일보사의 중으로 간으로 작은 골목이 있고
따라가면 옛날 숙명여고가 있던 조계사 뒷골목의 8층 빌딩 옥상에 지은 별채.
“선생님, 계십니까?”
옥상 위의 잡을 옥탑방 이라고 하여 가난한 셋방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
옥탑집은 한옥의 소슬대문을 모방해 현관의 문을 만들었는데 얼마 후
이 문이 열리고 50대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에는 흰색으로 그리고 아래는 검은 색으로 아래 위를 모두 한복으로
정장을 한 장한 이었는데 용모와 복장이 심상치 않았다.
원래 넓은 이마인데다가, 이마의 한 가운데만 남기고 양 각이 마치 뿔처럼
위로 한 뼘이나 치켜 올라가면서 머리가 빠져서 이마의 면적이 훨씬 넓어졌는데,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단정하게 하나로 묶었으므로 넓은 이마가 더욱
시원해 보였고, 귀 앞에서 턱의 옆으로 내려오는 구레나룻이 하관에 걸쳐서
호방하게 뒤로 어깨를 향해서 뻗쳐 있고, 그리고 큼직한 콧방울 아래와
턱밑에는 장비 같은 굵은 수염이 넓고 길게 가슴까지 위풍당당하게 늘어져
있었으며, 짙고 반듯한 눈썹 아래 형형한 눈빛이 아무리 자세를 공손하게
하여 겸손을 가장하여도 범 같은 위엄과 활활 타오르는 정렬적인 활달한
기품이 넘치는 것을 감출 수 없어 오히려 보는 이를 감동시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름은 진 표(陳 杓). 호는 개덕(開德)이라 했다.
돌돌 말린 서울 지도를 펴서 절반을 접고, 그것을 다시 절반을 접은 다음,
접힌 자리를 몇 번이고 세게 문질러 접힌 줄이 생기도록 하여 지도를 펴서
가로 세로 접힌 줄이 교차된 점에 노란색 형광펜으로 찍어서 둥글게 표를
하고 수제자 허척(許 척)에게 지도를 내어주며 지도의 형광펜으로 그린
표식의 지번을 즉시 옥탑가옥을 계약하라 지시하니 평소 사부의 기행을
익히 알고 있는 척은 지도의 위치에 해당되는 장소를 찾아가서 보니 때마침
옥상가옥 임대 중 이라는 A4용지 공고표지를 빌딩 현관유리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건물주인을 만나 스승이 보낸 사유를 밝히니 주인이 말하기를,
어제 밤 꿈에 은색 갑옷과 검은 말을 타고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뜨린
장수가 하늘에서 용마를 타고 내려오더니 이 집 옥상에 금으로 궁궐을
지으면서 이곳에 옥황상제의 명으로 도솔천 외원궁을 짓는다 하여서 집문서를
바치고 꿈에서 깨었으므로 오늘 과연 누가 이 옥상가옥을 찾아오는지가
궁금했다고 하면서 즉시 계약서를 작성하여 옥상 열쇠를 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옥상가옥을 접수하여 ‘자비의 손’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역술로는 태을, 기문, 육임과 특히 자미두수에 능통하고, 천문과 지리에
밝으며, 의술, 특히 전통침술에 통달한 기인이다.
젊어서 약관에 불교에 귀의하여 금강경을 독경하던 중 종6품 정신희유분
(正信希有分)에서 불타의 부촉을 받는 가피를 입어 무주상보시를 수행
방편으로 정하여 평생을 실행할 것을 서원하고 그 후 30년 이상을 국가와
인종과 색깔과 종교와 이념과 학력과 빈부와 남녀노소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할 때 까지, 나을 때까지 완전히 무료로 시술을 실천하고
하고 있었으며, 한국에서는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경주, 광주, 전주,
대전 등 전국의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전통침술을 가르치면서 2천명 이상의
제자를 양성해 배출하였고, 가는 데마다 제자들과 함께 무료침술봉사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서의 무료시술은 물론 인도 바라나시 당국에 세계침술봉사협회
(WASA)를 등록하고 뉴델리와 캘커타와 바라나시에 그리고 네팔의 카트만두에
침술대학을 열고 각 대학마다 부설무료침술병원을 열어, 각 병원마다
10개소의 무료침술봉사센터를 관리하도록 해서 인도와 네팔에 30개소의 상설
무료침술봉사센터를 10년간 운영해오고 있으면서 WASA를 UN에 국제 NGO로
등록하여 이러한 무료침술봉사시스템을 세계 모든 나라의 일차 진료기관
으로 정착시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는 침술대학을 인가 받지 못하므로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한의대를 열고 WASA의 무료침술봉사를 세계 모든 나라에 침술대학과
부설 무료침술봉사병원을 열어서 한국침술의 진가를 보이고 UN에 NGO로
등록하여 세계 개발도상국들을 대상으로 1차 진료기관으로 한국침술을
전파하여 세계침술을 석권하기 위하여 파견할 전위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주상보시를 수행의 방편으로 실천하고 있어서 알려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므로 하루 100명 이상의 환자들에게 무료시술을 30년
이상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 봉사센터가 조계사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불교인들은 그의 자비의손 무료침술봉사센터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오히려 무종교인이나 타 종교인들에게 더 알려져 있었으며 그를
도와 그의 이러한 성스러운 봉사에 동참하고 있는 회원들도 대부분 무종교인들
이거나 타종교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