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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 스크랩 율법론
나무의자 추천 0 조회 30 14.09.28 10: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율법론                                                  편집자 글


 

1. 서론 : 율법,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용어 구분

2. 율법은 선하다

3. (율)법을 주신 목적

4. 법의 오용과 남용

5. 예수님의 교정

6. 율법 시대가 끝났다는데...

7. 율법과 복음

8. 율법과 성령

9.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

10. 반율법주의

11. 마치는 말                     (이상 2002년 집필)      

..................................................................................

12.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그리스도 (이하 2003년부터 인터넷에서 수집한 글)

13. 율법과 은혜

14. 율법에 관한 조각글 모음

 

 


                                    

 



◈1. 서론 : 율법,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용어 구분    렘36:23


※동전의 앞면과 뒷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동전 앞)은 자연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동전 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앞)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앞) 자연적으로 자기 삶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뒤).

동전의 양면은 서로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앞), 그 계명을 지킨다(뒤).(요 14:21 등)

한쪽 면으로는 온전하지 않다. 온전한 신앙이란 두 면이 항상 같이 연결된다.


※말씀을 잘라 버리면 안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두려워 떠는 자”(사 66:2)와

반대로 그것을 “칼로 삭뚝 삭뚝 잘라서 버리는 자(여호야김, 렘 36:23)가 나오는데,

나는 앞만 취하고(쉬워서), 뒷면은 칼로 잘라서 버리는 자(어려워서)가 되지 말자. 



▲1. 율법 law 

선한 것이다.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구분이 필요하다.

십계명은 율법의 대표, 곧 모든 법의 근본이 되는 헌법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선하다.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제사법’으로 3구분 된다.


신약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시민법’과 ‘제사법’으로서 율법은 끝났지만,

‘도덕법’은 사도행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도덕법’ 마저도 끝났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 글은 그것을 ‘반율법주의’라고 반박함.   


▲2. 율법주의 legalism

본질적으로 선한 율법을 악용, 남용, 오용한 것. 한 마디로 나쁜 것이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율법주의’는 나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율법주의자’ 였다.


돈, 밥, 칼 등은 좋게 잘 사용하면 선한 것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악한 것이 된다.

율법으로 사람들을 기준을 잡아주는데 사용하면 율법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고 율법에 걸어 남을 정죄하는데 잘못 사용했다.

그래서 ‘율법’은 선하지만, 그것을 오용한 것을 ‘율법주의’로 부른다. 나쁜 것이다.


(혹자는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 없이 똑같이 쓰고 있는데 주의를 요한다!

원래 성경은 자세히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동의 위험이 커서 신학자들이 ‘율법주의’라는 말을 고의적으로 고안했다)  


▲3. 반율법주의 anti-nomianism 

나중에 ◈10. ‘반율법주의’ 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일단 서두에서 개념을 알아보면,

율법율법주의를 서로 구분하지 못하고, 두 개가 똑같은 것으로 보고,

선한 율법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오해한다. 고로 율법은 모조리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성경에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절도 여럿 있다(◈6. 에서 설명 및 반박함)


일단 ‘율법’은 정도(正道)요, ‘율법주의’는 우측으로,

‘반율법주의’는 좌측으로

치우친 것으로 가정하고 이 글을 읽어 보자.  

............................................


◈2. 율법은 선하다    롬7:12~14


사람들은 은연중에, '율법은 나쁜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전체를 통째로 오해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나쁜 것을 하나님이 거룩한 산에서 돌 판에 정성껏 새겨 주실 리 없다.


율법이 나쁘다는 뜻은 - 율법이 외식, 형식, 전통, 정죄가 될 때 나쁜 것이다.

율법을 좋고, 옳게 사용하면 참 좋은 것이다.

율법의 본질은 선한 것, 좋은 것이다.


신용카드 사용 등 신용사회에 관한 경제법은 원래 목적상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하니까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등 나쁜 것으로 인식되는 이치와 같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데 - 그래도 율법이 선한가?

율법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근거를 제시해 주는 구절이다.


원수를 사랑해야지, 눈에는 눈으로 원수를 갚으면 되겠는가?

율법이 나쁜 것이므로 예수님이 교정해 주신 것이 아닌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율법의 원래 목적 

모세 시대 근동지역에서는 중죄를 짓고도 벌금/보석금으로 때우는 법이 유행했었다.

법은 만민에게 공평하고 평등하게 집행되어야 하는데,

부자들은 아무리 중죄를 지어도 만사형통이었다. 벌금 좀 내면 처벌을 면하니까.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만 형벌을 받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당시에 유행했었다.


그런 사회악을 타파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법이 ‘눈,눈, 이,이’였다. 

죄를 지으면 부자도, 가난한 자와 똑같이, 형벌을 받아야 했었다. 돈이 안 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이 법을 “악용”하기 시작했다. 용도를 변경했다. 

처절한 복수를 하고 싶은데, 거기에 당위성을 제시해 주는 법으로 잘못 사용했다.

결국 예수님이 오셔서 산상보훈에서 이 오해를 다시 바로 잡아주셨다.

원수를 갚지 말고 왼뺨도 돌려대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이 법의 원래 목적은 결코 나쁜 율법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나쁜 것을 만들어 우리에게 주실 리가 없다. 그것은 매우 공평한 법이었다.

‘나쁜 율법’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율법은 선하다.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간음하다 잡히면 현장에서 잡아 죽이라는데... 그래도 율법이 선한가?

그것은 '간음처벌법' 이라기보다, '간음방지법'의 목적이 더 크다.

간음은 현장에서 돌에 맞아 죽을 만큼 ‘큰 죄’라는 뜻이다.


간음한 사람도 간절히 회개한 사람은 용서받았다.

율법대로 죽지 않았다(간음방지법이라는 뜻).

구약의 다윗이 그랬고, 요 8장의 여인이 그랬다.


그러나 간음하고도 회개치 않은 사람은 2만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고전 10:8).

율법이 나쁘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회개치 않아서 죽은 것이다.


비슷한 예로,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출 21:15)

또한 안식일에 일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출 31:15)

그런데 안식일에 일했다고 진짜 죽임을 당한 사람의 기록은 성경에 거의 안 나온다.

모두 완벽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부모를 공경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말씀에 물을 타서 그 의미를 희석시킬까봐 두렵다)


요지는, 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에게 함정을 파고 처벌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다.

참 목적은, 경고를 주고, 경계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간음하다 잡히면 현장에서 죽이라는 법도 “선하다.”


일면 무자비하게 보이지만,

그 ‘간음법’을 제정하신 목적이, 사람을 죽이려고 간음하도록 숨어 기다림이 아니라

제발 간음하지 말라고, 그것은 맞아 죽을죄라고 사전 경계, 경고하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율법은 선하다.  


▶율법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구절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14)

So then, the law is holy, and the commandment is holy, righteous and good.


율법주의를 강하게 타파한 사람은 사도바울이다.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율법(제사법으로서의 율법)을 버리고

복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스스로 똑같은 로마서에서

율법(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이 거룩하며 신령하다는데(롬 7:12),

우리는 동전의 한쪽 면만 보면 안 된다.   


예수님도 마찬가지 주장을 펼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적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말고 가르쳐라”(마 5:18-19).

....................................................................


 

◈3. (율)법을 주신 목적    신10:13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우리를 구속하고 얽어매기 위해 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더욱 잘되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다.

율법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면, 아예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신 10:13) 

율법이 선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행복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안식일의 법은 사람을 얽어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주셨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막 2:27).


▶(율)법이 없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만약 서울에 교통법규가 없다고 상상해 보자. 사거리는 차로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다.

길에서는 덤프트럭 같은 큰 차가 최고다. 급하면 차들은 인도로 넘어 다닐 것이다.

교통법규는 운전자를 얽어매기도 한다.

그렇지만 교통법이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다.

마찬가지로 법을 주신 원래 목적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신 10:13)


출애굽 2백만 공동체에 법이 없었다면, 사회적 무질서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도덕법, 시민법, 제사법 등 율법을 주셨다.


▶법은 많아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된다.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바리새인들은 수 백 가지 시행령, 규례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외식하며 살았고, 그 법이 굴레와 속박이 되었다.

이것이 율법주의(율법과 구분필요)의 피해이다.


그렇다고 법을 송두리째 버려서는 안 된다.

‘돈세탁 방지법’등 필요한 것은 만들어야 한다.

반율법주의(무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 역시 잘못되었다.


만약 안식일의 법이 없으면, 사람은 쉬지 않고 일을 하다가, 결국 망한다.

하나님 법을 지키지 않아서 벌 받아 망하겠지만,

자연적인 결과(과로사)로 망한다. 그래서 안식일 법도 좋은 율법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도 마찬가지다.

만약 계명이 없어서 부모를 공경치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아 망하겠지만,

인간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이 붕괴됨으로써 자연히 망한다.


반대로 우리를 위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을 잘 지키면

계명을 지켜 하나님께 복 받아 잘되겠지만, 자연적인 결과로도 잘 된다.


(율)법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신 8:3, 마 4:4)

이 말씀의 뜻은 - ‘말씀(계명)을 듣고, 읽고, 지키면 행복하게 산다.’ 이다.

 

 

▶법은 무거운 것이 아님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마 11:30)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니(요 14:2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사람들은 자꾸 그 법을 무겁다고 생각한다. 믿지 않는 불신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면, 억지로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려고 애쓴다.


(물론 바울이 곤고한 사람이라 고백한 대로 우리는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다.

그러나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은 조금 틀려도 용서해 주신다.

그것이 ‘견인’교리이다.)

 

 

남편을 사랑하는 부인은, 남편 말에 순종하고, 조금 힘들어도 기꺼이 따른다.

그러나 남편이 아니면(사랑 없으면), 그의 가벼운 요구도 힘들게만 느껴진다.

..............................................................................


 

◈4. 법의 오용과 남용    딤전1:8


▶법을 무조건 자꾸 만든다고 능사인가?

금융 개혁을 위해, 금융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금융감독원’이 부패에 빠졌다.

그래서 금융감독원의 부패를 차단할 법률을 또 만들어야 한다고 뉴스에서 말한다.

그렇다면 새로 신설할 금융감독원의 상위 감독관청이 또 부패하면 어떻게 하나?


법을 무조건 새로이, 자꾸 만든다고 새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니다.

법을 바꾸려면 끝이 없다. 대신에 ‘법을 지키는 사람이 개혁되어져야 한다.’


▶사람을 속박하는 법

무슨 일만 터지면, 거기에 대처하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이제 한국도 변호사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기업, 사회, 가정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법이 얼마나 많은지, 법 때문에 기업 활동이 매우 위축되고 있다.

법에 안 걸리게 병원 운영하기 어렵고, 법률위반 없이 기업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법은 필요하되 가급적 간단할수록 좋다. 법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거기에 속박된다.

원래 법의 목적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인데,

수 천, 수 만 가지 법률이 도리어 사람을 얽어매고 속박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법을 악용하는 사람들

법의 원래 목적은 좋은 것이다. 사람을 속박하려고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악용'하는 것이 문제다.

 

자동차 사고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보험제도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경미한 접촉 사고가 나도 무조건 병원에 입원해 버린다.

법에 명시된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이다. 좋은 법을 나쁘게 악용하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또 새 법을 만들면, 그 법이 사람을 짓누르게 된다.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법에 저촉되어, 누가 고소만 하면 모든 국민이 법정에

서게 되고, 모든 국민이 범법자가 될 것이다. 


법을 자꾸 만들면 안 된다.

대신, 법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그것이 '타락한 죄인'의 손에 들려있으면, 오용/남용/악용된다.  

칼이 어머니나 의사의 손에 들려 있어야지,

강도의 손에 들려 있으면 오용/남용/악용된다.


▶선한 ‘율법’이 → 악한 ‘율법주의’로 변질되다

하나님은 원래 좋은 목적으로 법을 주셨다.

율법은 사탄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에 실수로 율법을 주셨다가, 나중에 교정해서 복음을 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다.


타락한 사람들이 율법을 오용/악용했다.

그 결과 선한 '율법'이 악한 '율법주의'로 변질되었다.

또한 거기에 따르는 수 백 가지의 규례와 시행령이 제정되었다.

그리고는 도리어 율법의 규례에 사람이 속박되어 버렸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자유케 하는 율법이 도리어,

남 눈치 보며 외식하며 지켜야하는 굴레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이 나쁜 것이다’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율법을 송두리째 버리려는 사람이 있다.

칼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칼을 버리면, 요리, 수술은 맨손으로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제사법', '시민법'은 버리되, '도덕법'(십계명)까지 버리면 안 된다. 


▶율법의 원래 정신은 ‘살리는 것’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용서하신 것

- 예수님은 율법(간음법)을 폐기하신 것인가?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하는 올무에 빠뜨리려고 함정을 팠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마음의)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 이것은 율법의 원래 정신(사람을 살리는 것)을 잘 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계명도 율법이다)은 바로 “사랑의 정신”이다. 


▶율법은 선한데, 법의 오용과 남용(율법주의)이 잘못된 것

법은 원래 사람을 경계, 규모있는 삶, 행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

“율법은 거룩하며 신령하다”(롬 7:12-14)


그러나 사람들은 자꾸 법을 악용, 오용한다.

그래서 그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또 다른 법을 만들어 보지만 도미노 현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셀 수 없는 많은 법은 사람에게 사슬이 되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도리어 사람에게 속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율법에 신물 난 사람들은, 이제 율법을 완전히 폐기해 버릴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반대쪽 극단인 ‘반율법주의’가 생겼는데, 그것은 무법천지를 만든다.


법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좋게 되려면,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게 사용할 때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율법은 법 있게 쓰면 선하다”(딤전 1:8).

 

 

▶우리는 양측 극단을 피해야 한다.

*우측극단-법을 더 좋게, 사회를 더 좋게 만들려고 자꾸 새 법과 규례, 조례,

준칙을 만드는 것, 결국 그것에 도리어 붙잡히게 됨. 율법주의자와 바리새인.


*좌측극단-율법주의의 폐해를 우려해서 율법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

반율법주의.(또는 無法주의 - 이런 말은 시중에 안 쓰는데 이해를 위해 만든 것임.)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은 보통 -율법주의-에 쏠린다.

그 다음에 진정으로 복음을 깨닫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모두 사함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좌측극단인 반율법주의(무법주의)로 빠진다.


▶적용: 법의 오용(誤用)의 실제적 사례


①카파라치

최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각종 불법 사례를 찍어 관할 관청에 고발해서

상당한 포상금(?)을 받아 챙기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언론에 보도된다.

그러나 과연 정당한 행동인지 의문이 생긴다.


각종 불법 사례를 카메라에 담아 신고하는 시민에게 일정액의 포상금을 지급하는

제도의 원래 시행 '목적'은 → 포상금으로 배불리라는 것이 당연히 ‘아니다’.

교통위반 등을 보다 철저히 막기 위함이 -본래 목적-이다.


교통위반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할 때 그것을 막기 위해 사진 찍어 신고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금을 타낼 목적으로 매일 수 십 장씩 사진을 찍는다면 → 법의 오용이다.     


②최근(2001년 당시) 노동계 파업을 보며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 노조활동에 관한 법률이 있다.

노동자들을 권익은 당연히 -법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법을 이용해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준법투쟁이라 볼 수 없다.

‘노조활동법’과 ‘집회시위법’ 등을 만든 목적은 시민을 불편하게 함이 ‘아니다’.


만약 시민에게 계속 불편을 준다면, 국회는 그 법의 철폐 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노동계는 노동자 관련법의 목적을 결코 오용/남용하지 말자.


파업이 시민을 계속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노동자의 폭력, 권익 남용'이다.

결코 '노동자의 권익 보호'라고 볼 수 없다.


집회, 시위, 파업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선진국적 특성이 결코 ‘아니다’. 

법을 원래 만든 목적대로 올바로 잘 쓰는 것이 바로 선진국적 노동 문화다.

...............................................................................


 

◈5. 예수님의 교정


선한 율법을 바리새인들이 남용/오용하자, 예수님은 이를 다시 완전케 해 주셨다.

율법을 폐기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원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가르치셨다.  


▶산상 수훈에서 십계명 및 다른 계명을 가르치고, 또한 교정(완전케)하신 예수님

산상 수훈은 율법(계명)을 잘못 오해한 사람들을 교정시켜 준다. 

율법과 선지자(구약성경)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셨다(마 5:17).


살인하지 말라(마 5:21-26) - 6계명 교정, 마음속에 미움부터 버려라(교정).

간음하지 말라(마 5:27-32) - 7계명 교정, 마음속에 음란부터 버려라(교정).

헛맹세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9계명과 관련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십계명 외에도 아래 율법을 더욱 완전케 하셨다. 

‘눈은 눈,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38)

‘이웃 사랑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43)

율법 자체를 몽땅 용도 폐기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commandment, 둘째는 그와 같으니(마 22:37)...

이것은 계명이다.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막 1:38)은 계명을 성실히 가르치셨다.

성경에는 ‘계명’을 ‘율법’과 호환해서 쓰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엡 6:2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율법)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십‘계명’도 ‘계명’ 아닌가. 

율법은 나쁘고 계명은 선한 것이 아니다. 둘은 하나이며, 둘 다 선하다.

 

 

▶새계명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이것은 옛 계명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옛 계명에 (사람들이 빠뜨린) '사랑'을 보태서 더욱 완전케 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며 겉 형식적인 율법을 지켰으나,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눅 11:42).

그래서 '사랑'을 더하신 것이다. 본질을 바꾸신 것은 결코 아니다.


계명(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되고 온전해 진다.

사랑 빠진 계명(율법)으로 저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


 

◈6. 율법 시대가 끝났다는데...  눅16:16


 

예수님은 새계명(새율법)을 주셨는데,

사실, 성경의 곳곳에는 복음이 온 이후로 이제 “율법이 끝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율법이 구약시대로 끝났다는 구절과 그 반박;


①“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


16절과 17절이 연결되어있다. 16절만 인용하고, 17절은 잘라 버리면 안 된다.

혹시 복음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버릴까봐 예수님은 17절을 첨가해 주셨다고 본다.


-율법과 선지자(구약성경)가 세례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은 그럼 무슨 뜻일까?

그것은 복음의 ‘그림자’였다. 이제는 예수님으로부터 ‘실체’가 드러나고 시작되었다.


②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것이라...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것이라 (갈3:19)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은 주로 ‘절기법, 제사법’을 뜻한다고 본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갈 4:10). - 본문 정황이 절기법, 제사법을 논하고 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2)

-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본문 정황이 겉 형식인 할례법을 논하고 있다.


전체 문맥상 그렇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은 이후에

어떤 유대인들이 와서 구약의 할례와 절기를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 하니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것에 따르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에 반박해서 쓴 글이 갈라디아서이다.

바울이 말한 것은 할례와 절기를 버리라는 것이지,

십계명 등 도덕법을 버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했다.

다른 말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아멘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용도폐기처분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속사람이 변화되었으니까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것은 억지가 아닌, 자연적인 믿음의 열매이다!


다른 말로, 믿는다 말하지만 계명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실제로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들이 믿는 정도의 믿음이다(약 2:19).  


③“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히 7:18-19)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히브리서가 말하는 율법은, 구약의 양과 소를 잡아드리는 ‘제사법’을 뜻한다.

예수님은 단 번에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셨다(히 9:12).

- 그래서 제사법으로서의 율법을 단번에 폐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 율법을 폐한다고 해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까지 버리면 오류이다.


기독교는 구약 율법의 겉 형식은 버리되

율법의 알맹이(법 정신, 도덕법, 십계명)까지 몽땅 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전체적 맥락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도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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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율법과 복음의 관계     요일5:3


▶믿는 사람(동전 앞면)은 그 계명을 지킴(동전 뒷면)

복음을 전하다고 하면서 율법을 무시하여 버리는 것은 큰 오류이다.

복음과 율법을 반대 개념으로 보는 것도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좀 유기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것은 ‘자연적, 자동적인automatic 상관관계’이다.

법을 지키는 조건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원해서, 자동적인 결과로’ 법을 지킨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믿는 자가 아니라는 뜻)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예수 믿고 심령이 새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킨다.

믿는다면서도 계명,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그 믿음이 의심스럽다.  


▶선입견을 버리자

어떤 사람은 (율)법이 무조건 나쁘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분은 '율법'이 나쁘다고 설교하면서 -사실은 '율법주의'가 나쁜 것임-

자기도 모르게 설교 시간에 율법을 전하고 있다.


어떤 분은 복음이 좋다고 설교하면서, 아예 계명에 대해서는 일절 가르치지 않고

늘 복음(?)만 전한다. 정직하게 보면 성경의 절반 이상은 계명이다.

성경에서 율법과 계명을 잘라버리면, 지금보다 부피가 70%는 줄어들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는데, 모세 5경이 주로 율법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그 뒤 역사서, 선지서들은 모세 5경의 재해석 및 기억remind이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 전체가 사실은 율법서인 것이다.

신약 성경은 ‘더 온전케 된 율법’이다.)


복음을 많이 전한 사도 바울이 복음만 전했는가?

바울서신의 전반부는 복음이고 후반부는 계명이다. 두 개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율법과 복음은 본질상 하나이다

복음이 좋다고, 율법을 버리는 것은 동전의 한 면을 보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동전의 앞뒤 면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기꺼이 율법을 지킨다. 두 개가 하나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그 계명을 지킨다”(요 14:21, 요일 5:3)


율법과 복음 둘 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셨으며,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천국을 누리라고 주셨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행복하게,

천국을 누리고 산다(신 8:3, 마 4:4). 이 말씀은 신구약에 동시에 나타난다.

신구약 성경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것은 믿음의 법이었다.

또한 율법을 완전케 하신 복음이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속사람이 변화되었으니까 완전케 하신 율법,

새 계명, 사랑의 법을 지킨다. 그것이 진짜 믿는 사람, 참된 믿음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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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율법과 성령    롬8:2


율법은 억압적인 개념, 반대로 성령은 자유로운 개념-그것은 오해이다.

율법과 성령은 물과 기름같이 얼른 보기에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율법과 성령은 서로 잘 조화된다.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성령도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하나는 구속과 억압이요, 하나는 자유와 해방이라면,

하나님이 조변석개하시는 분인가? 하나님에게는 실수가 없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   


▶1. 먼저 ‘죄와 사망의 (율)법’ the law of sin and death은 무엇인가?(롬 8:2)

율법은 본래 선한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이 그것을 악용했다.

사람을 살리고, 악한데 빠지지 않게 경계하고, 생명을 줌이 원래 율법의 목적인데, 

도리어 율법으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사람을 죽이는 목적으로 잘못 사용했다. 

그 결과, 선한 율법이 본의 아니게, (정)죄와 사망을 주는 율법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성령이 오셔서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 함

이제 성령이 오셔서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를 선언하셨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사람이 율법과 계명에 억눌려 남들 눈치 보며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함이 아니라,

모든 행위의 정오판단은 '내면적'이며, 그 행위의 마음의 '동기'를 따지게 된다.


악한 질투심과 혈기로 채찍을 휘두르는 것은 엄연한 율법의 위반이다.

그러나 성전을 깨끗케 하기 위해 채찍을 드신 것은, 그 동기가 선하다.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느하스가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은 '살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   

그 동기가, 미움이 아니라, 공동체를 사랑하고 지킨 것이었다.


계명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죄와 질병에 사로잡힌 자를 구해내는 것 -법정신을 살림- 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를 무릅쓰고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치셨다. 


사람이 기계적으로 율법을 지킴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살려서 자유롭게

하나님의 법을 지킴을 - 예수님이,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이것은 전혀 율법과 본질이 다른, 새로운 차원의 혁명적 개혁이 아니라

원래 율법을 주신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개혁이었다.

율법과 성령의 본질은 하나이며,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며, 속박이 아니라 해방/자유다. 


▶2.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그래서 바울은 성령과 율법을 조화시켰다.

그래서 생명을 주는 ‘성령의 율법’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이라고 불렀다

(롬 8:2).


원래 율법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고 행복을 주기 위해서이다(신 10;13)

법을 바로 쓰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 삶에 생명이 넘친다.


▶계명을 버리지 말라

누가 율법(계명)을 버렸는가? 예수님, 바울, 베드로? 아무도 버리지 않았다.

율법은 가르쳐져야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늘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율법이란 사람이 만든 잡다한 규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손 씻는 규례, 고르반의 규례 등)

하나님의 말씀(율법)으로 사람에게 생명, 믿음, 죄용서, 사랑, 소망을 심어준다.

그래서 생명을 주는 법이다(롬 8:2-생명의 성령의 법). 


교회에서 율법(계명)을 안 가르치면, 가르칠 것이 없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계명을 아울러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


목회자가 계명을 걸어 성도를 ‘치는’ 설교를 하는 것은-율법주의, 율법의 오용/남용

계명을 인용해서 성도를 세울 목적으로 경계, 꾸짖음, 권면-‘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사람을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 유익하다(딤후 3:15).


그러나 변화되지 못한 사람이 말씀을 걸어 비판/고소/정죄하니 율법이 욕을 먹는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은 말씀(계명, 율법)을 걸어서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물론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마음의 근본 동기이다.

 

▶3. 자유케 하는 율법(약 1:25, 2:12)

야고보도 율법을 폐기하지 않았다.

그런 원래 율법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서 '자유케 하는 율법'을 제창했다.


'속박하는 율법'은 말이 되지만, '자유케 하는 율법'은 얼핏 부조화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유케 하는 율법'은 진짜 말이 된다.

사람에게 힘과 용기, 생명과 자유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계명, 율법이다.

율법폐기론자들이 율법을 버리면,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자유, 힘, 용기를 줄 것인가?


▶윤리적 계명과 성령의 계명의 차이

물론 여기서 계명을 강조하는 것을 '공자의 도덕적 계명'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옛사람이 억지로 도덕적 계명을 지키려는

의지적 활동을 뜻한다.

 

성령의 법(계명)은, 성령의 역사로 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어서,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원,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킴을 말한다.  


▶성령의 법, 자유케 하는 율법의 실제적인 사례 연구case study


①안식일(주일)에 소풍을 갈 것인가 말것인가?

안식일에 오락을 금하는 법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주일날 교회에서 소풍을 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이 오락과 유흥을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 몸된 교회의 단합과 교제를 위한 것이라면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 목적이 선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법을 악용되어, 오락을 목적으로 성도들끼리 예배 후에 놀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천편일률적이고 기계적인 적용이 된다면-율법주의이다.

법의 정신을 살려서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음- 선한 의도로 적용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며, ‘자유케 하는 율법’이다.


②주일날 농구하고, 탁구치는 것은 오락인가?

마찬가지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교회 활동의 목적으로, 성도의 교제를 목적으로 하는 예배 후의 운동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주일날의 운동은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이런 것에 사람들은 규제를 받지 않는다.   

 

③가정에서, 자유케 하는 율법, 생명의 성령의 법의 예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서도 법이 있으면 좋다. 예를 들면;  

*야간 통금 10시

*자기 방은 자기가 정돈한다.

*집과 학교, 교회 등 일상생활권을 벗어나 멀리 갈 때는 꼭 사전에 전화허락 받는다.

 

이것은 자녀를 옳아매기 위한, 고통을 주기 위한 법이 아니다.

이 법을 지킴으로 자녀는 오히려 더욱 생명을 얻고 천국 삶을 누린다.

이런 법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자녀는 클수록 스스로 고생을 하게 된다.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는, 비록 거추장스럽지만, 이 법을 지키려고 애쓴다.

또한 그것은 자신을 위한 길이다.


율법이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으로 우리 교회/가정이 “무법천지”가 되고 있다.

법을 좋게, 생명을 주도록, 잘 사용할 때 우리는 천국을 누린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자

오늘날 일부 전통적 교회가 우측으로 ‘율법주의’에 빠져 복음의 생명을 잃어버렸고

일부 신흥 교회가 복음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좌측으로 치우쳐 율법을 버리고

‘반율법주의’(무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에 빠져 값싼 구원, 값싼 은혜를 외친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다.

율법을 주신 것이 실수로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잘못 사용해서 '율법주의'를 만든 것이다.

율법을 무시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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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    행15:2


초대교회부터 율법과 율법주의자의 열띤 논쟁이 다루어졌다.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격렬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행 15:2)


▶율법주의자들의 주장

이방인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15:1)

그들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5:5)

그들이 주장한 것은 율법 중에 제사법이요, 절기법이었다.


이것은 특별히 초대교회에 들어온 바리새파 출신자들이 주장한 내용이었다.

여기에 사도와 장로들이 의논하러 모여 ‘적지 않은’(큰) 변론이 있었다.


▶베드로의 주장 - 제사법과 절기법의 폐기를 주장, (맞는 말이다)

성령과 믿음을 주셔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런데 너희(율법주의자)가 어찌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매지 못하는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행 15:6-10)


▶야고보의 중재안 - 율법의 원래 목적만 지키고 나머지는 버려라, (옳다)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 등 이상 4가지만 멀리하라.

(이 네 가지는 당시 문화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매우 가증스런 것으로 추정됨)

이 요긴한 것 외에 아무 짐(율법의 겉껍데기)도 너희에게 지우지 않는 것이 옳다. 


▶ 공회의 결론

초대교회 공회는 유대교적 율법주의의 유입(제사, 절기, 할례)을 엄격히 금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멍에요(15:10절), 괴롭게 하는 것(15:24절)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율법을 송두리채 내다 버린 것도 결코 ‘아니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지켜야 할 꼭 필요한 네 가지의 포인트를 집어주었다.


그것은 율법의 정신(사랑, 거룩-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을 살린 것

이었다.

율법의 겉껍질과 형식을 버렸지만, 속 알맹이(율법의 본질)는 결코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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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반율법주의 Anti-nomianism


※어원분석; Anti-반, nomos-율법, 에서 나온 말.

‘반율법주의’로 또는 ‘도덕율 폐기주의’ 번역된다.

이 사상은 지금 두 가지 방향에서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살펴보면;


▶1. ‘도덕률 폐기주의’로서의 반율법주의

철학자 또는 인문학자(휴머니스트)들 가운데 이런 사상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다.


*주장-그들은, 사람인 이상 죄 짓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어차피 짓게 되는 죄인데, 어떻게 그것을 날마다 압박할 수 있으랴?

물론 적극적으로 죄짓는 것을 장려함은 아니지만, 인간이 죄짓는 것을 자연 현상

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위적인 도덕률로 너무 옥죄지 말라는 주장이다.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견해로는,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죄를 예정하셨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짓게끔 창조하셨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가급적 죄를 안 지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창조질서를 뛰어 넘으려는 주제넘은 짓으로 여긴다.


*반박-인간이 죄짓는 것은 필연적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항상 죄를

대항하라고 가르치지, 그냥 허용해도 좋다고 가르치진 않는다.

사람은 ‘원죄’와 ‘하나님의 형상’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

한 몸에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갖고 있다. 어차피 짓게 되는 죄를 그냥 놔두는

것은 인간이 ‘원죄성’만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주장하는 셈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원죄성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도 동시에 강조한다.

그래서 죄를 대적하고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위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인본주의(휴머니스트) 관점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규명하고 해석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관점이라 볼 수 없다.


▶2. ‘반율법주의’로서의 Anti-nomianism

이것은 일부 신학자 또는 일부 기독교 성도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사상이다.


*주장;

①한마디로, 성도들이 구약의 율법(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한번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더 이상 율법(도덕법)을 지킬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도들을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서 중에 이런 주장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②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의 도덕법을 가르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③이 이론은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초대교회 시절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특히 이런 주장이 왕성하게 나타난 것은 마르틴 루터 이후부터이다.

이신득의 사상을 오해한 사람들이 매시대마다 끊임없이 반율법주의를 들고 나왔다.


*반론-바울이 말한 율법에서 자유는, 시민법이나 제사법으로부터 자유였다.

다시 말해서 할례와 각종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원래 정신(사랑, 거룩)을 뺀 채,

율법의 겉치레 형식(할례를 받고 절기와 규례를 지키는 것)을 지키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이 통렬하게 율법을 버리라고 공격한 것이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도덕법(십계명)을 기꺼이 지킨다.

그것이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로 여기지 않는다.

비록 때로는 원죄성에 이끌려서 죄를 지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보고 즉시 회개하고 돌이킨다.


▶3. (위의 ▶2와 같은 맥락이지만) 좀 더 발전된 반율법주의 주장

이제 성도들은 율법에서 자유케 된 이후로부터는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 때문에

굳이 율법의 도덕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반론-성령은 성도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거기까지는 맞다.

그렇다고 도덕법을 버려서는 안 된다. 성령이 성도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는데,

도덕률은 방해가 아니라 거기에 도움을 준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무슨 이유에서든지 도덕법(십계명 등)을 버리는 것은,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반율법주의’이다.


▶마르틴 루터와 반율법주의

그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상당히 ‘친믿음적’이며,

‘반율법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시중에 많이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antinomian(반율법주의자)이란 말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서,

반율법주의를 많이 공박했다;


“루터는 설교에서... 율법이 복음과 구별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복음은 율법과 구별되어 설교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제7권 p.226 左열 13-14행, 기독교문사


인터넷 자료를 인용하면; ☞ http://mb-soft.com/believe/txn/antinomi.htm

This first major theological controversy in Protestant history lasted intermittently from 1537 to 1540. During this time Luther began to stress the role of the law in Christian life and to preach that it was needed to discipline Christians. He also wrote an important theological treatise to refute antinomianism once and for all: Against the Antinomians (1539).

(믿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큰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1537년에서 1540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참고로 종교개혁은 1517년). 이 기간동안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또한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훈계하는데 필요하다고 설교했다. 특히 그는 안티노미안니즘을 결정적으로 반박하는 중요한 신학 논문 “Against the Antinomians"을 1539년 발표했다.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박 주장; ☞ http://mb-soft.com/believe/txn/antinomi.htm

In general the various antinomian controversies in history have clarified the legitimate distinctions between law and gospel and between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일반적으로 역사적으로 내려왔던 안티노미안 논쟁은 한마디로 말해서 율법과 복음을 별개로 분리하려하고, 또한 ‘의화’와 ‘성화’를 분리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율법과 복음은 분리되지 않으며, ‘성화’ 없는 ‘의화’는 의미 없다. 의역 첨가) 


The Christian community as a whole has rejected antinomianism over the years for several reasons. It has regarded the view as damaging to the unity of the Bible, which demands that one part of the divine revelation must not contradict another. Even more important, it has argued that antinomians misunderstood the nature of justification by faith, which, though granted apart from the works of the law, is not sanctification. In general, orthodoxy teaches that the moral principles of the law are still valid, not as objective strivings but as fruits of the Holy Spirit at work in the life of the believer. This disposes of the objection that since the law is too demanding to be kept, it can be completely thrust aside as irrelevant to the individual living under grace.

기독교계가 반율법주의를 거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그것은 성경의 통일성에 위배된다. 하나의 신성한 계시(믿음)는 다른 신성한 계시(율법)와 서로 충돌되어질 수 없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반율법주의자들은 이신득의 신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신득의 신학은 율법적 공로에 관계없이 ‘의화’에 이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성화’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원=의화+성화+영화’ 즉 구원을 전 과정으로 보는 이해이다. ‘의화=구원의 완성’으로 보는 견해와는 다르다. 물론 저는 전자가 맞다고 본다. 의화는 구원의 시작이지만 이루어진 것fulfill은 아니다.) 정통주의 기독교는 도덕률이 여전히 유효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억지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로 본다. 사람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은혜아래 사는 성도의 삶에 비적합한 것으로서 여기고 아예 제쳐놓지만, 그것은 잘못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R D Linder


*우리는 율법(선한것)과 율법주의(악한것)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율법주의는 버리되, 율법까지 덩달아 버리면 안 된다. 그런데 율법이 복음에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는 반율법주의자들은, 도덕법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을 ‘율법주의자’ 또는 ‘가톨릭적 개신교도’로 도리어 역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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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치는 말, 율법을 행하라      마23:23


▲1. 예수님의 말씀 4개로 결론을 맺고 싶다.

예수님은 율법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①율법을 행하라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율법정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율법의 정신, 의,인,신-눅 의 병행구절에서는 '공의와 사랑')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너희는 먼저 .... 그 의를 구하라(마 6:33)

'의'를 구하는 것이란 도데체 무엇인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신 6:25)

하나님의 명령(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의’이다.


그 의를 구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신6:25),

그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마6:33)

믿는 사람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동적이고 자연적인 결과로 자원해서-법을 지킨다.


③작은 것도 버리지 말고 가르쳐라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적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말고 가르쳐라”(마 5:18-19).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

여기서 ‘모든 것’에는 계명(율법)도 포함된다. 아니 주류이다.


▶2. 도덕법은 영원하다

율법에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뉘어 진다.

*제사법-레위기에 주로 나타난 여러 가지 제사 및 규례, 절기법 및 할례법 포함.

*시민법-민법, 형법, 사법

*도덕법-십계명 등 윤리에 관련된 율법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시대를 마감하셨다. 그래서 ‘제사법’과 ‘시민법’은 끝났다.

‘제사법’이 끝난 이유는, 예수께서 단 번에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이다.

‘시민법’이 끝난 이유는, 이제 사도행전의 교회는 유대인의 교회가 아니라,

이방인과 더불어 전 세계 열방의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법’과 그 '율법의 정신'(사랑, 거룩 등)은 영원히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율법에 관한 잘못된 두 극단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을 버리자.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율법(제사법)이 변한 결과, 우리는 구약의 율법을 모두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

다만 구약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대요리문답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대요리문답 속에 그가 해석하는 십계명 해석이 있다.

살인하지 말라 -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간음하지 말라. - 우리의 순결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 - 우리의 사유재산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 - 이것은 우리의 인격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이며,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내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 깊은 뜻을 알면, 율법을 사랑하게 된다.

율법을 알고 율법의 뜻을 배우는 것만 아니라, 율법을 사랑하게 된다.


▲율법은 무조건 틀렸고, 복음은 무조건 맞다는 생각도 ‘잘못되었다’.

율법은 사탄이 준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틀릴 리가 절대 없다. 절대 진리이다.

율법을 가지고 판단,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율법주의'가 틀린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한 분 저자(하나님)로, 근본 사상은 일치한다.

구약(율법)이 잘못된 것을 신약(복음)으로 개혁한 것이 ‘아니다’고 본다.


구약(율법)은 선한 것인데,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고 잘못 사용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신약(복음)으로 완전케 하셨다.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다. 


성경의 본질, 사상은 신구약에서 변함이 없다.

신약과 구약은 한 저자요, 한 권의 책이며, 한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이란 말을 쓰기를 꺼려한다. 이단으로 찍힐 까봐.....

(사탄의 속임수일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이 해 주신 것(1국면)과 우리가 해야 할 일(2국면)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계명을 지켰고,

신약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계명을 지킨다.


1국면과 2국면의 연결 고리는 “감동과 변화”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크게 감동받아서, 크게 변화되어서” 자원해서

계명을 지킨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믿음이란, “감동과 변화, 그래서 순종”이다.


우리는 열심히 계명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성도들에게 생명과 자유와 행복과 하나님의 나라를 준다.


오늘날 교회가 힘을 못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계명이(율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 바울, 베드로, 모세, 여러 선지자, 모두 계명을 가르쳤다.

선한 목적-사랑-으로써 율법은 부지런히 가르쳐져야 하며(신 6:7),

주야로 묵상되어져야 하며(시 1:1),

이 율법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지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수 1:8)  


<김지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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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그리스도   롬8:3~4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버리지 말라”(마 5:17-19)고 하셨는데,

현대의 성도들은 율법을 취사선택하고 있다.


율법을 일점일획도 버리지 말라는 뜻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킬 것을 명하신 것이다.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율법을 어기는 것과 같다.


그런 하나님의 요구에, 인간이 과연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살지 못하는 완벽한 의로운 삶을 사셨다.

그렇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함을 통해, 예수님이 이루신 의를 내게 전가해 주신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우리는 2가지의 자세가 모두 필요하다;

①믿음-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완전한 의인이 되셔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해 주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②여기부터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반율법주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더욱 율법을 지키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행위로 의롭게 살려고 목표하고 사는 도덕적 수행의 사람(일반종교)이 아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더욱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기독교)이다.


<인터넷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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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율법과 은혜    눅1:6


(우스운 얘기지만) 하나님에게도 왼손이 있고, 바른손이 있다. - 마르틴 루터

왼손은 율법이 들려 있고, 오른손엔 은혜가 들려 있다.


율법 없이 은혜 없고, 은혜 없이 율법 없다.

둘은 서로가 같이 공유되어질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데에는, 율법과 은혜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회개는 쉽지 않다

우리 사람은 죄를 짓는데, ‘거저 회개하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진정한 회개는 그렇게 호락호락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뉘우치고 ‘일생동안’ 눈물 흘리며 무거운 죄짐을 지고 사는 사람 있다.

「죄와벌」에서도 주인공이 큰 죄책을 가지고 일평생 양심의 고통을 갖고 산다.

죄는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한탄한다고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선한 일을 하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구제를 쌓아도 잘 안 된다.

좀 더 나아가서, 스스로 자기 몸을 학대하며 고행을 해도 안 된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만 내 마음의 모든 죄 짐이 떠나며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은혜로 받는다.


▶우리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

그리고 은혜로 죄를 용서함 받는다.


율법으로 자기 죄를 깨닫는 것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자연인은 나름대로 죄책없이 행복하게 잘 사는데, 아직 율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율법을 올바르게 잘 깨달으면, 자기 운명과 자기 죄책에 대한 큰 두려움에 잡힌다.

그래서 율법으로 자기 죄를 깨닫는 것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은혜로 이제는 자기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왼손(율법)과 오른손(은혜)이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가?

그렇지 않다.


①정결법 - 미국인들에게 개고기로 만든 햄버거를 먹으라고 하면 질겁할 것이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미국인에게는 개고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율법에 나오는 정결법은, 문화적으로 그들 유대인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일례로, 돼지를 천하게 보는 그들 문화에서, 돼지를 안 먹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 문화에서는 돼지를 먹지 않는 것이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정결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다 해방되었다.)


②율법과 랍비 전통을 구분해야 한다.

율법을 해석해서 6백여 가지의 규례로 만든 랍비 전통은 정말 무거운 짐이었다.

(마 15:1-20, 막 7:1-23 등)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것은 짐은 짐이되, 가벼운 짐이었다(마 5:20-48, 11:29-30).

사람이 율법의 짐에서 완전 해방은 결코 아니었다.


③율법은 사람이 도저히 못 지킬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있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고 했다. 물론 모든 율법을 모조리 다 지켜 행했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흠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령, 사람이 율법을 어긴다고 해도, 제사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제사에 의해 자기 죄를 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들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올무를 사람들에게 두신 것이

“아니다.”


▶새 언약의 법이 더 어렵다

율법은 외적인 태도와 준수를 주로 요구하지만,

새 언약의 법은 우리의 내적 준수, 그러니까 마음의 준수를 따지므로

준수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갈 3:24는 율법은 어린아이들의 가정교사(몽학선생)와 같다고 했다.

결국 원래 율법의 “단순화한 적응”이었다. “초등학문”이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좀 더 고등한 학문을 배우듯이

새 언약의 법이, 구약의 율법보다, 더욱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기를, 율법은 너무 지키기 어려운데

예수님이 오셔서 주신 새 언약의 법은 지키기 쉬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오해하게끔 만드는 바울의 주장이 성경에 나온다.

바울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는데서 생기는 오해다.)

  

▶이것이 율법주의와 은혜와의 결정적인 차이

내가 사랑해야 되겠다가 아니고, 사랑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은혜를 받고서 저절로 자원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인터넷 설교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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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율법에 관한 조각글 모음



◑율법은 결혼반지와 같다


결혼한 사람들은 금반지, 다이어 반지를 낀다.

그것은, 결혼의 성실성을 상징하는 표이다.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고 살겠다는 서약의 표)

그런데 그 반지 자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 표식이지,

그것이 결혼관계의 성실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결혼반지와 같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했다는 거룩한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특권의식이 과도하게 지나쳐버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말았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화려한 반지와 같았다.

그런데, 그 화려한 반지에 매료된 나머지

그 반지를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인터넷 설교



◑율법은 출애굽 하고 나서 주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이것은 종교개혁 신학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논리입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고 이것을 지키면 구원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 가지 재앙과 큰 능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

건져서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오게 하고, 광야에 갖다놓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구해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라.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았으니 지켜라. 그리하여 자유하라.

그리하여 행복하라는 것이 율법의 근본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 입니까? 그러므로 율법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터넷 설교



◑ 교통법규만도 못한 계명


오늘날 우리는 십계명 중 하나를 어기는 것을 교통법규 위반하는 것만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무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하고 그의 율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속 좁은 그리스도인의 편협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들은 많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도 그것들은 어차피 우리가 지키지 않을 줄을 알고

단지 한번 해보신 말씀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인터넷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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