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30일 금요일 오후 5시 30분 처남식구들은 일찍 공항에 나와 있었다. 장모님 환갑 축하를 겸해 온 가족이 제주도여행을 가는 것이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는 것과 제주도라는 미지의 땅으로 간다는 것에 몹시 들떠있었다.
비행기가 하늘로 박차 오르자 아이들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땅에서는 흐린 날씨였지만 구름을 뚫고 올라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허공은 솜 같은 구름이 끝없이 깔려 있다.
구름 사이로 언뜻 바다가 보이는 듯 하더니 활주로로 비행기는 내려앉았다.
미리 예약해둔 렌터카를 인수받아 우선 제주항 가까운 곳에 있는 이-마트를 찾아가서 장을 봤다. 이것저것 챙겨 넣고 숙소가 있는 성읍으로 향했다. 동부관광도로 위로 차를 얹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윈도브러시는 운전을 어렵게 했다.
성읍민속마을로 들어서서 길을 물어 숙소를 찾아 들었다. 콘도식으로 되어있는 방은 깨끗했다. 밥을 해먹고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5월 1일 토요일 근로자의 날.
느긋하게 늦잠을 잤다.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몰랐지만 숙소 주변으로는 건물이 없었고 풀과 나무들이 우거진 상쾌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우선 성읍민속마을을 돌아봤다. 감물을 들인 모자를 샀고 초가를 둘러 봤다. 돌하르방이 곳곳에 서있었다.
** 돌하르방: 제주도 시내 일원, 남제주군 대정읍 보성(保城) ·인성(仁城) ·안성리(安城里), 남제주군 표선면(表善面) 성읍리(城邑里) 등지에 산재하는 총 45기(基)의 제주 특유의 석상이며 1971년 8월 25일 지방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성읍리의 것이 141.4cm, 보성 ·안성 ·인성리의 것이 136.2cm이다. 조선시대에 제주시는 제주목(濟州牧)의 소재지였고 성읍리는 정의현청(旌義縣廳), 보성·안성·인성리는 대정현청(大靜縣廳)의 소재지였다. 본래는 주현(州縣)의 성문 앞에 세운 것을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석상들이 만들어진 연대는 담수계(淡水契) 《탐라지(耽羅誌)》에, 1754년(영조 30) 목사(牧使) 김몽규(金夢奎)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증이 없어 알 길이 없고, 3현(縣)에 있는 것을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석상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큰 눈에 자루병 같은 코를 가졌으며, 입술을 다문 얼굴에 감투를 썼고, 두 손을 배에 나란히 모으고 서 있다. 제주시에 있는 것과 성읍리에 있는 것은 기석(基石)을 받쳤고 특히 제주시의 것은 기석 전면에 O형과 L형의 굴각(掘刻)이 있다. 이 석상은 성문 앞에 서서 위엄을 보이면서 수호신적 ·주술적 ·금표적(禁標的)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어 육지의 장승[長]과 그 기능이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선에 있는 민속촌에 갔다. 요금이 무척 비쌌다. 할인권과 장애인 수첩을 숙소에 두고 나와서 내일로 관람을 미루고 해안도로를 따라 섭지코지로 향했다. 해안선을 따라 검은색 돌로 성이 쌓아져있다. 환해장성이라는 푯말이 서있다.
** 환해장성: 1998년 1월 7일 제주도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바다로부터 침입해 오는 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쌓은 것이다. 제주도는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적들이 상륙하기 좋은 곳이 많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방비로 해안선의 접안 할 수 있는 곳을 돌아가면서 돌로 성(城)을 쌓아 놓았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한 《탐라지》 〈고장성(古長城)〉조에 의하면 “연해 환축(環築)하여 둘레가 300여 리(약120㎞)라. 고려 원종(1270년 원종 11년)때 삼별초가 진도에서 반하니 왕은 시랑(侍郞) 고여림 등을 탐라에 파견하여 영병 1,000으로 이를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하였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탐라기년》에는 “6월에 영국 선박이 우도(牛島)에 정박하여 섬에 작은 흰 기를 세우고 섬 연안 수심을 1개월 동안이나 측량하면서 돌을 모아 회(灰)를 칠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이때 권직(權稷) 목사는 크게 놀라 마병(馬兵)과 총수(銃手)를 총동원하여 만일의 변에 대비하였고,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수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곳에 차를 세우고 바닷물에 손을 담것다. 말미잘을 건드려보기도 하고 바다골뱅이를 잡았다. 효진이는 꽃 사진도 찍었다. 오징어 세 마리를 구워 먹었다. 부드러운 것이 맛있었다.
드라마 '올인'으로 유명해진 '섭지코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다와 푸른 초원 그리고 꽃밭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길을 따라 등대까지 걸어 올랐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 지어진 건물들은 작년 가을에 불어온 태풍 '매미'로 다 날아가 버렸다. 등대 앞에 서니 바람이 너무나 세차게 불었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 돌아 내려오는 길에 효진이와 협자연대를 둘러 봤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비상 통신망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연대: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조선시대 초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성은 탐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대정성과 정의성을 비롯한 3성이 축성되었고, 9진. 10수전소. 25봉수대. 38연대가 이 시기에 설치되었다. 연대는 바닷가의 높은 지대에 석축 사면으로 쌓았고 상단 중앙에 대(봉덕)를 만들어 사용했었다. 봉수와 연대는 각각 별도로 했는데 평상시 1개, 황당선 출현 2개, 근경에 이르면 3개, 犯境이면 4개, 접전할 때 5개의 연기 또는 불꽃을 피워 연락했다. 제주도의 연대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서기1976년 9월 9일)된 것은 7기(신양, 온평, 조천, 귀덕, 신엄, 신천, 표선)이다.
협자연대: 섭지코지의 언덕 위에 있는데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희소가치가 있는 연대이다. 거의 직육면체로 보이는 석축물이며, 윗부분도 평면을 하고 있으며 불을 피웠던 자리에 약간의 흙이 있을 뿐이다.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연대는 협자·말등포·소마로 세 곳뿐이다. 협자연대에서 북쪽으로는 오소포연대와 성산망이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말등포연대와 연결된다. 협자연대에서 북동쪽으로 보면 일제시대에 만들어 놓은 고사포대의 잔해가 남아 있고 북쪽으로는 신양리 포제단이 보인다. 높이 4m 가로 9m 세로 9m 이고 별장 6명과 망지기 12명이 연대를 지켰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한라봉 두 박스를 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고, 양, 부씨의 결혼 설화가 전해지는 '혼인지'를 둘러보고 말과 연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올해 일찍 더워진 탓인지 유채 꽃은 지고 열매가 여물어 있었다. 숙소에서 할인권과 지도를 챙겨서 서귀포로 향했다. 비가 많이 내려 우선 실내 전시관인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가난과 예술에 대해 생각을 했고 가족사랑을 봤다. 세심하게 보려고 노력했지만 가족들을 생각해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중섭(호:대향(大鄕)과 서귀포: 1951(36세)봄에 6.25 전쟁의 악화된 전세에 따른 당국의 종용으로 가족과 제주도로 건너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했는데, <피난민과 첫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이다. 변두리의 작은 방을 제공받아 살기 시작하였는데, 적은 양의 배급과 고구마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 잡아온 게로 연명하였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평온한 눈빛을 지닌 소를 목격하고 다시 소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특히 이웃에 있는 잘생긴 소에 반하여 이를 열심히 그렸다. 또한 후일 벽화를 그리겠다며 갖가지 조개껍데기를 채집하기도 했다. 9월에 부산에서 열린 전시미술전(또는 월남미술가전)에 출품하였다. 서귀포에서 그린 것으로는 유화 <서귀포의 환상>, 그리고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이 있다.
지난 제주여행 때 관람을 한 우리 부부는 빠지고 나머지 가족은 여미지 식물원을 관람을 했다. 아이들이 보고싶어하는 테디베어 전시관에 아이들을 인솔해 내가 들어갔다. 곰인형으로 동, 서양의 역사를 재현했다. 설명을 해줬고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테디베어: 테디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애칭이다. 1902년 11월, 미시시피로 곰 사냥을 나갔던 미국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애칭 Teddy)대통령은 한 마리의 곰도 잡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보좌관이 어린 곰을 생포해와 사냥하기를 권했으나 대통령은 정당치 못한 일이라며 풀어주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지의 만화가 베리만(Clifford Berryman)은 이 에피소드를 한 컷의 만평으로 그려 신문에 실었고 대통령의 페어플레이 정신은 미국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곰 사냥 일화가 널리 알려지자, 뉴욕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모리스 밋첨(Morris Michtom)씨는 자신이 만든 곰인형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애칭인 테디를 붙여 '테디베어'라고 이름지어 팔아보기 시작했다. 곰인형은 날개돋친 듯 팔려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오늘날 테디베어는 곰인형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단일 사찰로는 동양최대라는 약천사 거대한 법당에 들어갔다. 법당 문을 들어서자 중년의 여인은 초파일이 가까우니 등을 달으라며 채근을 해댄다. 즐거운 마음은 곧 불쾌함으로 바뀐다. 참배를 하면서도 등뒤에 있는 여인이 의식이 되어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3층까지 돌아보면서 왜? 이렇게 엄청난 규모로 절을 지었는지, 만만치 않은 건립비용은 어떻게 조달을 했는지 궁금증이 더해졌다. 밖에는 더욱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약천사: 서귀포 중문단지관광단지 옆 대포동에 위치한 약천사는 1988년 2월 기공식을 가진 뒤 전국의 신도와 제일동포 등 10만여 신도의 도움으로 8년 6개월만에 완성한 약천사 대적광전은 단일 법당 건물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약천사라는 이름은 영험 많은 약수터라 하여 봄이면 솟았다가 가을이 되면 사라지는 신비의 샘물과 사철 솟아나는 약수의 물로 이루어진 연못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옛부터 `절터왓'이라 불리던 이곳에 1960년 김형곤이라는 학자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자그마한 굴속에서 100일 관음기도를 올리던 중 꿈에 약수를 받아 마신 후 건강을 회복,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약천사를 짓고 한 평생 포교에 전념하다가 입적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하나 이야기로는 봉불식이 있던 날, 제주도 전역에는 폭우로 인해 섬 전체가 물난리에 고생했는데, 약천사 주위에만 햇살이 맑고 투명하게 비치면서 2시간 동안이나 무지개가 나타나는 이적이 있었고 이후 불사가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유래도 있다.
조선 초기 불교건축양식을 딴 콘크리트 건물인 약천사 대적광전은 지하 1층, 지상 30m에 연건축면적 3,332㎡(약 1,000평)으로 외형상 4층이나 일반 건축물로는 8층 높이로 내부는 층계 구분 없이 통층으로 이뤄져있다. 대웅전과 지하로 연결된 2층 크기의 요사채에는 숙소 식당 매점 등이 갖추어져 있고 이외에도 굴법당, 삼성각, 사리탑 등으로 구성 되어있다.
법당 내부 정면에는 국내 최대인 높이 5m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4m의 좌대 위에 안치돼 있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부처(서방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가, 왼쪽에는 약사여래 부처(병고를 이기게 해주는 부처)가 모셔져 있다. 또 몇 년 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천도법회를 갖고 조선조 마지막 왕인 영친왕을 포함하여, 황후인 이방자여사, 문종대왕, 현덕왕후의 위패가 모셔져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중섭 미술관에서 소개받은 자구리식당은 형편없었다. 이중섭의 향수와 식당의 이름이 잘 맞아 기대를 했건만 재료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 값은 무척 비쌌다.
아내는 편두통이 밀려와 숙소로 돌아오자 곧바로 토하기 시작했다. 숙소 카운터에는 비상약이 없었다. 처남댁은 이곳 저곳 방들을 다니며 두통 약을 얻어와서 아내에게 건넸다.
나는 지하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하고 가볍게 샤워를 했다.
5월 2일 밤새 내린 비는 아침에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내는 아침까지도 두통으로 아파했다. 표선에 가면 약국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 참기로 했다. 오늘은 실내 관광이 좋을 듯하다. 실내에서 공연을 하는 조랑말 공연장에 전화를 했으나 계속 통화중이었다. 그냥 가보기로 했다. 공연장이 가까워지자 도로 가에 자리한 목장에는 어미 말과 새끼 말이 무리를 지어 서있었다. 공연장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고 조랑말 공연을 보려다 사람만 실컷 구경하게 될 것 같아 주차장 입구에서 차를 돌렸다.
표선에서 두통 약을 샀고 비옷을 샀다. 제주민속촌은 예나 지금이나 볼만했다. 최근에 방영한 인기드라마 '대장금'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져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볼 것은 많았지만 비를 피하느라 건성으로 지나친 곳이 많아 아쉬웠다. 관아 건물 앞에 설치되어있는 그네를 태워 달라는 효은이의 말에 우선 안전한지 내가 먼저 올라가서 그네를 굴렀다. 한참 하늘로 치솟고 있는데 효은이는 갑자기 등을 돌려 관아 쪽으로 걸어간다. 급해진 나는 효은이를 애타게 불러봐도 영 돌아볼 기색이 없다. 빗방울이 거세져서 옷은 흠뻑 젖었다. 그네를 세우려고 해도 금방 세워지지 않았다. 흑돼지 구이를 먹고 싶었지만 이 또한 효은이의 급한 성질 탓에 뒤로 미루고 차로 돌아왔다. 아내는 홀로 차에 남아 한 숨 잤다며 개운해 한다.
남원읍에 위치한 하나로마트에서 한라봉을 샀다. 알도 굵었고 무엇보다 믿고 살 수 있어 좋았다. 다른 곳 보다 훨씬 쌌다.
기름을 가득 넣었다. 추사적거지로 곧바로 달렸다.
시간에 쫓겨 건성으로 둘러봤지만 화려한 필체와 힘있는 글씨는 오래도록 잔영으로 남을 것이다. 뜰에 전시되어있는 석부작을 봤고 안쪽에 지어진 초가도 잠깐 둘러봤다. 다음에 제주에 올 기회가 있다면 다시 찬찬히 관람하고싶다.
**추사적거지: 2002년 4월 17일 제주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마을의 대정읍성 동문자리 바로 안쪽에 있다. 옛 대정현의 돌하르방과 김정희의 글씨 및 그림 복제품을 전시해 놓은 추사기념관이 있고, 김정희가 머물러 살던 초가 4동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놓았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 阮堂歲寒圖》(국보 188)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1840년(헌종 6)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에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의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한쪽 모퉁이에 있는 모거리(별채), 제주도 특유의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념관 쪽으로 정낭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집의 본래 정낭은 방앗간과 모거리 사이의 대문간에 있는 것이다. 김정희는 밖거리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모거리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점의 서화를 남겼다.
서부관광도로를 따라 제주시로 향했다. 제주에 가까워지자 비는 그쳤고 간간이 햇살이 보였다. 제주도 이 좁은 섬 안에서 날씨는 급격히 변한다. 날씨마저도 신비롭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려 책자에 나와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거부촌식당' 이곳은 규모가 엄청 컸고 대형차들이 즐비했다. 실내는 단체급식 하는 식당같이 식탁이 연이어져있었고 지저분했고 음식냄새가 심했다. 할인권으로 할인을 받을 수 있었지만 우린 얼른 돌아 나왔다. 또 다른 식당 '용꿈 돼지꿈'을 찾아갔다. 비교적 깨끗했다. 음료수 한 병을 서비스로 받았다.(책자에 붙은 서비스 표로 받을 수 있었다. 할인은 없다.)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시장이 반찬이다. 맛있게 먹었다.
공항주차장에서 무척 불쾌한 일이 벌어졌다. 렌터카회사 직원과의 일이다. 차 기름을 가득 넣었으니 차이만큼 돈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그쪽은 거부했다. 15,000원 가량 손해를 보게된 것이다. 계약서를 적을 때는 차를 인도할 시점에 기름 양(75% 명시)보다 적으면 돈을 받는 다는 말만했다. 그렇다면 가득 채웠으니 차이만큼 돈을 돌려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비행기 이륙시간은 다가오고 계속 다툴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서 보면 그들은 이런 것을 예상하고 차를 인도하면서 공항 앞에 주유소가 있음에도 기름을 가득 넣어 오지 않고 이런 작전을 쓴 것이다. 그들의 나쁜 저의가 불쾌했다.
공항 청사에서 아내와 이 문제로 다시 다투었다. 기분 좋게 여행하고 마지막에 이게 뭐란 말인가? 정말 불쾌했다.
그래도 빨리 마음을 정리했다. 일단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다시 편안해졌다. 대구를 향해 이륙한 비행기는 한동안 바다 위를 낮게 날더니 조금씩 흔들리며 구름을 뚫고 고도를 높였다. 검은 구름이 한참 아래로 보이자 비행기는 안정적으로 날았다.
대구공항을 나서면서 이번 여행이 흡족하다며 장모님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집에서 가까운 연경동 '이가네 더덕밥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나는 소주를 마셨다.
5월 3일 제주시청 렌터카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지만 출장 중이었다. 혹시나 하고 렌터카 회사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사과를 하고 돈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여타 렌터카 회사들도 같은 실정이며 이렇게 돈을 돌려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렌터카 회사는 소비자에게 차를 인도할 때 기름을 가득 넣어 준다면 소비자도 차를 반납할 때 기름을 가득 넣어주면 된다. 이렇게 하면 소비자는 불이익이 없을 것이며 공급자도 손해볼 일이 없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검은 마음으로 아리송한 양만큼의 기름이 든 차를 인도하면서 인수받을 당시를 생각한다. 부당이득을 바라는 것이다. 꼭 고쳐져야 할 일이다.
제주도는 여행지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여행지며 관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섬이다. 그러나 식당을 봐도 렌터카회사를 봐도 특산품을 판매하는 점포를 봐도 친절은 없다. 품질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가격은 일정하지도 않다. 바가지를 씌우려 혈안이 되어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우리야 어쩌다 한 번 가는 여행지이지만 고쳐야 할 일이다.
첫댓글 거머부..very good..~!!!!!!!!!!
ㅎㅎ..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