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유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문맥의 정의와 중요성
성경 해석에서 제일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한 마디로 대답하여 문맥이라고 할 수 있다. 문맥과 관련 없는 성경 해석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성경 해석에서 문맥은 중요한 것이다. 문맥(Context)이란 무엇인가? 문맥을 영어로는 Context라고 하는데 라틴어에서 왔으며 '함께'라는 의미의 Con과 '짜임(Weaving)'이라는 뜻의 Textus가 합성된 말이다.
곧 어떤 글을 이루기 위해 작은 부분적 단위들이 모여서 하나로 짜여져 있을 때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사상의 연관성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한 문장을 전후 문장과의 관련에서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상호 관련된 흐름 속에서 보는 것을 문맥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경을 문맥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문장이나 본문을 독자적으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위치하는 전후 본문과의 관련 속에서 해석한다는 말이다. 곧 글의 흐름을 중시하는 것이다. 문맥적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문자주의나 영해주의도 알고 보면 문맥을 무시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을 문맥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과 전혀 관계없는 온갖 억측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전 10:23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서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해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하면 갖가지 억측이 나올 수 있다.
모든 것이라고 했으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제한적이라는 뜻일까? 즉,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받으며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워졌으므로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해도 무방하다는 말씀인가? 심지어 우상 숭배를 하면서 십계명을 어기고 또는 살인이나 간음 같은 온갖 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것인가? 그렇게 까지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의 큰 자유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고 거칠 것이 없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그럴듯하게 여겨지지만 사실 문맥과는 관계없는 것이며,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성경을 자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가하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맥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0장을 전부 읽어보아야 한다. 1-13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하다가 멸망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이 당한 모든 것이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14-22절은 성찬과 이방인의 제사의 상징을 통해 우상 숭배의 영적 의미를 가르치면서 우상 숭배를 절대로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23절부터 마지막 33절까지가 10장의 결론 부분이 되고 있는데,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자유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때로는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글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이란 구약에서 명령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된 자들로서 율법의 구속을 받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유를 남용한다면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처럼 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다른 연약한 사람의 양심을 다칠 우려가 있다면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제와 흐름을 가진 말씀 가운데서 바울 사도는 6절에서 악을 즐겨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으며, 7절과 14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하였다. 또 8절에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9절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맥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이 가하다라고 한 것은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제한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라고 한 것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음식을 먹는 일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우상의 제물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모두 허용된다는 뜻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근거는 딤전 4:4에서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아무리 우상의 제물일지라도 단순한 물질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먹기 때문이다.
또 먹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 것은 고전 8:7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상에게 음식을 제물로 바치던 습관이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 음식에 실제로 우상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던 생각을 아직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은 현재 우상에게 음식을 바치지는 않지만 이전의 습관을 생각하면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음식 먹기를 꺼려할 것이다.
결국 23절의 뜻은 우상에게 제물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지만, 어떤 자유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 금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맥적인 해석은 뜻을 정확하게 아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구절은 한 구절씩 따로 떼어서 해석할 수 없다. 물론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책은 한 구절씩 독립적으로 표현된 것들도 있지만, 그것들도 잘 살펴보면 앞과 뒤의 연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엉뚱한 해석은 성경 말씀을 다른 말씀과 관련 없는 독립된 것으로 보고 상호 연관된 흐름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에서 문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탈문맥화(脫文脈化)의 사례들
(문맥을 무시한 요절)
말씀을 다른 말씀과 단절시키는 것은 요절화(要節化)하는 데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다 보면 문맥이 무시되고 본문에서 가르치는 의미와 전혀 다르게 적용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말씀을 암송하고 마음에 새기는 일은 좋은 것이지만, 본문에서 가르치는 의미를 벗어나서 엉뚱하게 알고 있다면 아무리 많이 외운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인이라면 거의 모든 장사하는 집마다 액자로 걸어놓고 있는 말씀 중에 욥 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만 뚝 떼어놓고 보면 크게 위로가 되고 고맙기 그지없는 말씀에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에 있는 대로 복을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걸어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과연 사람들의 생각처럼 복을 빌어주는 내용인가? 만일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복을 구하기 위해 걸어놓았다면 미신적인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그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문맥을 파악해야만 한다. 가깝게는 8장내에서 문맥이 파악되지만, 보다 넓게는 욥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욥기는 전체 42장으로 되어 있는데, 욥의 극심한 고난을 보고 달려온 친구들과 욥이 변론하는 장면이 대부분(4-37장)을 차지한다. 4장부터 시작되는 변론에서 친구들은 한결같이 욥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먼저 4-5장에서 엘리바스는 욥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이라고 하며 죄악을 토로하고 용서를 빌라고 한다. 그러자 6-7장에서 욥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8장에서 수아 사람 빌닷이 계속해서 욥에 대해 정죄를 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지 않는 욥을 책망(1-3절)하고 나서, 한술 더 떠서 욥 자신의 죄가 문제가 아니라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4절)고 한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용서를 구하고(5절) 청결하고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욥을 다시 돌아보시고(6절) 또 욥의 현재가 비록 미약해졌으나 나중에는 다시 창대케 해주실 것(7절)이라는 충고를 한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7절이 다른 말씀과 독립된 별개의 말씀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맥을 살펴보면 5절과 6절 상반절은 조건절이며, 6절 하반절과 7절은 귀결절이다. 즉, 욥이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해 열심히 용서를 구하면서 청결하고 정직하게 산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돌아보시고 나중에는 창대케 해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5-6절의 조건이 없으면 7절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7절의 복을 받으려면 현재 욥과 같이 큰 고통에 빠져서 죽은 자식들의 죄에 대해 계속 용서를 구하면서 청결하고 정직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7절만 달랑 떼어서 복을 비는데 사용할 수 있는 성질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신 5:16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라는 말씀에서 앞의 중요한 조건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떼어내고, 뒷 부분의 귀결절인 '네가 생명이 길고 장수하리라'만 생각하면서 좋아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성경에서 조건과 함께 제시되는 구절에서 앞부분의 조건을 떼어 내고 귀결절만 인용함으로써 오류에 빠지는 예는 무수히 많다.
또 7절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나중에 하나님께 꾸중듣는 빌닷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자식들이 죄를 지어서 죽었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해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모두 진리는 아닌 것이다. 렘 28:11을 보면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 같이 꺾어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속이면서 예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성경이 진리라는 것은 모든 문장이 진리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말씀들이 서로 연관을 짓고 진리로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문맥을 무시한 잘못된 요절은 신앙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키거나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따라서 진정한 요절이 되려면 부분적인 말씀을 떼어내어서는 안되며, 완전한 뜻이 드러날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이 반드시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문맥과 관계없는 관주)
또 하나 문맥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예로서 사 34:16의 말씀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인데, 이 구절을 가지고 성경 안에 모든 말씀은 반드시 짝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어떤 말씀이라도 그것과 대조되거나 쌍벽을 이루면서 보충적으로 설명해주는 말씀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의미까지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위의 구절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면서 모든 성경 구절은 반드시 다른 곳에 있는 성경 구절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관주(貫註)로 해석해야만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성경 구절들을 서로 일치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관주성경을 보게되면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데도 무리하게 관주를 붙여놓은 것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모든 성경 구절을 반드시 다른 성경 구절로 해석할 수는 없다. 실제적으로 모든 말씀이 완전하게 짝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또 성경이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책이지, 무슨 퍼즐(Puzzle)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것은 성경을 벗어나지 말고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범위 내에서 말씀을 해석하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 또는 인간의 지혜와 이성에 의존하여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성경을 문맥적으로 해석해야한다는 뜻이 된다. 문맥적인 해석은 성경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모든 구절이 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문제는 위의 구절에서 '이것들'을 '하나님의 말씀들'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리킨다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모으셨다는 것은 좀 이상한 표현이다.
문제 구절에서 '이것들'은 문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리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헨나( )는 여성형 복수 지시대명사인데, 만일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리키려면 남성형 복수 지시대명사인 헴( ) 또는 헴마( )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란 앞에 선행사가 있을 때 그것을 대신하여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므로, 적어도 한 번 이상 나왔던 것들이다. 또 복수형태로 되어있으므로 두 가지 이상의 것들을 의미한다. 앞에 나온 단어 중에서 말씀이라는 히브리어 다바르( )는 남성 단수 명사이므로 이를 가리킬 수 없다. 또 여호와의 책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책은 히브리어로 세페르( )로서 역시 단수이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들'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문맥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제 구절이 포함된 이사야 34장을 이해하려면, 24장부터 35장까지가 하나의 흐름을 가진 덩어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서 중에서 이 부분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길게 예언하고 있다. 이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24-27장은 여호와의 날이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이 있는 날이라고 하고 있으며, 다음 28-31장은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한다.
마지막 32-35장은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회복의 메시지인데, 여호와의 심판의 날 육적 이스라엘은 심판 받으나 영적 이스라엘은 오히려 구원을 얻게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33-34장은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으로 상징되는 앗수르와 에돔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이다.
34장의 핵심적 내용은 유다를 괴롭히던 에돔이 악의 제거와 함께 멸망케 된다는 것이다. 34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는데, 특히 유다를 괴롭히던 에돔을 철저하게 심판하신다고 하신다. 그래서 에돔 땅을 사람이 전혀 살지 못하는 황무한 곳으로 만드시고, 대신에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제각기 짝을 이루고 영영히 그 땅을 차지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 34:16의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어떤 단서도 없다. 또 내용의 흐름상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짝이 있다고 갑자기 말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정말 엉뚱한 내용이 될 것이다. 에돔의 심판을 예언하던 이사야 선지자가 갑자기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짝이 있다고 하면서 내용의 흐름과 관련 없는 말을 불쑥 한 마디 삽입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이것들'이란 11-15절까지 열거된 들짐승과 날짐승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16절만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면 절대 안되며, 앞의 본문과 바로 뒤의 17절을 연관지어서 문맥적으로 이해하여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즉, 에돔 땅이 황무해서 사람은 살지 못하게 되었지만,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들어와서 제각기 짝을 이루고 번식하며 그 땅에서 사람대신 영영히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 것이다.
문맥의 종류
(인접문맥)
어떤 구절이나 본문을 해석할 때, 바로 앞뒤의 문장이나 본문을 포함하여 형성되는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인접된 본문의 문맥 또는 줄여서 인접문맥이라고 한다. 이는 특정한 본문의 의미에 대해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므로 사실상의 진정한 문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맥적 해석에서 인접문맥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인접문맥은 다시 짧은 본문과의 관련성 속에서 형성된 것과 광범위한 본문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짧은 본문의 인접문맥에 유의하면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게 되지만, 광범위한 인접문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또 비교적 짧은 본문으로 형성되는 인접문맥은 발견하기가 용이한 편이지만, 광범위한 본문일 때는 인접문맥으로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먼저 짧은 본문으로 형성되는 인접문맥의 예를 살펴보자. 앞에서 요절을 암송할 때 문맥을 무시하는 사례가 많다고 하였는데, 주로 인접한 문맥을 무시한 결과이다. 사 58:11의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성도를 항상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여기며 흔히 암송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접문맥을 알지 못하면 개인의 복을 비는 허황된 말씀이 되어 버린다.
본 구절에 인접한 본문은 바로 앞의 9-10절과 바로 뒤의 12절이다. 따라서 이를 포함해서 58:9-12가 하나의 인접문맥을 형성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9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가 한 덩어리를 이루는 본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9절 하반절과 10절 상반절은 조건절이며,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는 귀결절이 된다. 즉,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원인이 되는 조건절이다.
복의 내용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인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며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인도하여 .......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에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修補)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도의 개인적인 복을 말씀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너'란 어느 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를 의인화하여 말씀하는 것이다. 즉, 유대 민족과 그들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 그들을 회복시키신다는 내용이다.
또한 문자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성전 회복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시대가 열리면 영적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주님의 새로운 통치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 곧 교회를 통한 신약 성도의 구원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1절만 떼어내어 성도가 복을 받는 말씀으로 인용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번에는 보다 광범위한 본문으로 형성되는 인접문맥을 알지 못하여 오류를 범하는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바울 사도가 사례를 받지 않고 자비량 목회를 한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자비량 목회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사도의 예를 무조건 교회가 지켜야할 규범으로 정하려는 것은 8장에서 10장에 걸친 광범위한 문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리석은 일이다.
만일 자비량 목회가 표준이 되려면 사도의 다른 모든 것도 똑같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그대로 따라야 하며, 선교를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전도 여행을 하다가 순교하는 일생을 마쳐야 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따르지 못하면서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는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의(義)를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항상 자비량으로 사역한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사도가 자비량 사역에 대하여 말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남용되어서는 안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제한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한 가지 예로써 언급한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고린도전서라는 책 전체의 광범위한 문맥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는 교회 내의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고는 있으나 2천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의 문화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기 때문에 문맥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난해한 서신으로 여겨진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당면한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 사도가 몇 가지 주제로 나누고 각각에 대하여 매우 길게 교훈하고 있어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첫 번째 주제는 교회 내의 분파하는 문제인데, 고전 1:10부터 시작된 고린도 교회의 파당에 관한 책망은 4장에서 사역자의 삶을 본받으라는 권면으로 계속 이어진다. 다음, 5-7은 음행하는 습성이 있는 자에 대하여 질책과 혼인과 이혼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 다음 주제는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이다. 그래서 사도는 8-10장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다음에 11장은 예배를 드릴 때의 경건한 복장과 성만찬의 의미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고, 12-14장은 은사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을 가르친다. 즉, 은사의 목적과 은사가 오용되고 사례, 가장 중요한 은사인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교훈한다. 그리고 15장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고 나서, 마지막 16장에서 연보와 끝마치는 인사를 한다.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려면 이러한 주제별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흐름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광범위한 문맥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분 부분으로 이루어진 한 덩어리씩의 흐름 속에서는 그 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9장에서 바울 사도가 사례를 받지 않고 자비량 목회를 한 것에 대하여 8장에서 10장까지의 한 덩어리의 광범위한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의 흐름은 우상의 제물을 자유롭게 먹는 자들에 대하여 비록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또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면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다른 사도들처럼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스스로 그 자유를 포기하고 자비량으로 사역을 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9장에서 바울 사도가 사례를 받지 않고 자비량 사역을 한 예를 든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관련하여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경우에 따라서 자비량으로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가 절대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타난 사도의 예를 무조건 규범으로 정하려 한다면 문맥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원접문맥)
그 다음엔 서로 떨어져 있는 본문간에도 어떤 흐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 원접 문맥 또는 분리 문맥이라고 한다. 이는 인접문맥을 통해서 원활히 해석되지 않을 경우에 본문과 떨어져 있는 다른 본문에서 해석의 단서를 찾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인접된 본문 속에서 흐름을 파악하기는 비교적 쉽지만, 떨어진 본문에서 흐름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튼 인접문맥으로써 해석하기 어려울 때는 같은 책 내에서든지 또는 다른 책에서라도 본문과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거나 어떤 평행 본문(Parallel Paragraph)을 찾고, 그 반복되는 내용과 평행 본문을 통해서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원접문맥은 다시 책 한 권내에서의 원접문맥과 성경책 전체 내에서의 문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책 한 권 내에서의 문맥은 인접한 본문을 통해서 금방 이해되지 않는 어떤 본문이 있을 때 그 본문이 속해 있는 책 내에서 본문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고, 또 있다면 어떻게 반복되는지 살피면서 연관된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관주와는 다르다. 관주는 같은 단어가 포함되거나 유사한 표현 중심으로 결정되지만, 책 한 권 내에서의 문맥은 서로 떨어진 본문 간에 문맥상의 유사점이 있어야만 한다.
같은 책 내에서 멀리 떨어진 문맥을 찾아서 해석하는 예를 들면, 마 11:28-30의 말씀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 짐과 멍에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짐과 멍에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하여 아무리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더라도 무거운 짐(Burden)을 지고 힘들어하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진짜 멍에(Yoke)를 메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도저히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영해(靈解)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짐이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라고 한다. 또는 주님을 믿기 전에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한다.
한편 주님의 멍에란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주님을 따르면서 지고 가는 십자가라고 한다. 또는 기독교인으로 살면서도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 곧 연단의 시험이라고도 한다. 혹은 주님을 믿는 자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하기도 한다.
아무튼 모두 그럴듯하지만 과연 그런지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인접된 본문만 가지고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즉, 인접문맥만으로는 본문의 뜻을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본문을 포함하여 마태복음 11장은 대부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9절까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나서, 이어서 20절부터는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즉, 주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셨는데도 그들이 회개치 않기 때문에 심판 때 두로와 시돈이나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5-27절에서 주님은 베푸신 이적과 권능을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이 알지 못하는 대신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사실에 감사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28-30절의 본문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데 앞의 내용들과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어린아이 같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짐과 멍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조금 먼 문맥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천국 복음으로 시작되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주님의 일관된 교훈의 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주님과 유대인들이 갈등을 빚은 것은 주님의 교훈이 그들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마 7:29)이다. 주님의 교훈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율법주의 와 대조된다. 율법주의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외형적인 예배의식과 절차를 지키면서도 신앙의 본질적인 면은 도외시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진리로써 드리는 참된 예배(요 4:23-24)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또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율법의 본질과 정신을 오해함으로써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세부적인 조항들을 수없이 만들고 그것들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에 율법과 유대교 신앙은 모든 자들에게 커다란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의 정신과 본질을 완성(마 5:17, 롬 13:10)하심으로써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더 이상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지 않도록 해주셨으며,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롬 8:2, 갈 3:13)시켜 주셨다. 주님께서는 주님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진정한 생명과 평안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쉬게 하시는 것이다.
이상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본문들이지만 문맥적으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자들과 율법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간에 계속된 긴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접문맥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짐'이란 유대주의적인 율법을 의미하고, 주님의 '멍에'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대신 주님 안에서 참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본문과 관련된 문맥은 또 있는데, 바로 마 23:2-4 말씀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당시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율법의 본질과 제정 정신은 망각한 채 율법의 세부적 조항에 집착하여 축조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이며, 게다가 자신들은 그 율법을 실제로 지키지도 않으면서도 백성들을 향해서는 무리하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고 있다.
여기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운다고 하셨는데, 이는 율법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계명에서 파생된 세부적인 조항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거운 짐이란 바로 율법을 뜻하는 것이다. 롬 2:21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지키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인접문맥으로 뜻을 잘 파악할 수 없는 경우는 이밖에도 많다. 예를 들어 마 5:31-32에서 이혼에 대하여 주님께서 교훈하시는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말씀을 오해하면 주님께서 이혼을 정당한 것으로 가르치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9장에서 평행 본문(Parallel Paragraph)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마 19:3-9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님께서 혼인과 이혼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계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씀은 혼인의 본질을 가르치고 있다. 주님의 교훈은 항상 지엽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다. 기본 정신과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본질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지려 하는 것이 정작 문제가 된다.
다음으로, 같은 책 내에서 문맥을 발견하기 힘들 때는 더 광범위하게 성경의 다른 책에서 유사한 내용이나 평행 본문을 발견함으로써 해석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 곧 신약 내에서 또는 구약 내에서 혹은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평행 본문을 찾음으로써 성경 전체의 문맥을 통해 해석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맥적 해석에 반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접문맥이 제일 중요하며, 인접문맥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같은 책 내에서 떨어진 본문을 통해 문맥을 찾고, 그래도 안될 때 성경책 전체 내에서 문맥적으로 관련 있는 본문을 찾는 것이다. 다른 책에서 평행 본문을 찾아서 해석하는 예를 살펴보자.
마 7:11에 보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 중에는 무엇이든지 힘써 기도하면 얻게 된다고 기복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마 7:7부터 시작되는 문맥을 보더라도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게 될 것이요, 두드리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앞에서 곧 마 6:25-34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모두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우리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으며,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맡기라고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마태복음 7장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변덕스럽게 말씀하셨다는 것인가?
또 진실하게 말해보라. 무엇이든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마다 얻어지고 찾아지고 열렸는지를. 아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잘못된 약속을 주셨는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 이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좋은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안에서 문맥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지만, 더 결정적인 단서가 다른 복음서에 있으므로 그것을 참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다른 책인 누가복음에 기록된 평행 본문을 비교하는 것이다. 눅 11:10-13에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하는 마태복음과 평행을 이루는 본문이 나온다.
이상의 본문에서 대부분의 내용이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에서 좋은 것이라고 한 것을 성령이라고 분명히 말씀한 것이다. 누가복음의 평행 본문에서 발견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한 마디의 말씀은 기복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바꿔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좋은 것을 단순히 세상적인 복으로 알고 구하던 자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성도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임재를 통한 영적인 복을 구하라는 뜻이다.
또 앞에서 말했지만 마 7:7-11의 본문 바로 앞에서 주님께서 이방인처럼 물질적인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마 6:32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육적인 것을 구하지 말고 영적인 것을 구하라는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이상에서 본문과 조금 멀리 떨어진 본문과의 관련성 곧 분리된 문맥을 무시해도 어떤 흐름과 관련 없는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인접한 문맥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처럼 원접문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접문맥과 원접문맥을 통틀어서 문맥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큰 깨달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