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공수(攻守)의 바란스(BALANCE) 감각을 결여하고 있지 않은가?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공격력이 매우 강하면, 적(敵)은 방어에만 사로잡혀 반격할 여력이 없다. 확실히 이 말은 명언(名言)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공격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경우이거나, 작전이 주효하여 공격일변도로 싸움이 우세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에 한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조금 우세하다고 해도, 적은 방어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은밀히 반격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혼자 좋아 난잡한 공격을 하거나, 수비를 잊고 있으면 반격당해서 잠시도 버티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세하여도 수비를 잊지않는 것이 승부의 요체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꼭 들어맞는다. 결국 공격가운데 수비를 포함하고, 수비가운데에 공격을 포함한다. 이것이 없는 공방은 반드시 실패로 귀착되는 수가 많다. 장기(將棋)에서도 수비를 소홀히하여 공격에 이어 공격으로 나가면, 결과적으로 국면(局面)이 엉망이 되고 말아 수습할 수 없이 지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지나침이라고 한다. 검도에서도 옛날부터 지나치게 치는 것과, 지나치게 달려드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로 되어있다. 바둑에서도 지나치게 많이 치는 것이 패인이 되었다고 하는 평이 가끔 신문의 바둑란에 나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격언이 있는데, 수비를 잊고 공격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옛사람들은 공방(攻防)을 현대(懸待), 두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현(懸)은 달려드는 것, 대(待)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懸中待, 待中懸]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달려들 때에도 기다리는 기분을 가지고, 기다릴 때에도 달려드는 기분을 잊어서는 안된다. 현대일치(懸待一致), 공방불기(攻防不岐-공격과 방어가 나누어지지 않는다)의 가르침인 것이다. <공격 가운데에 수비를 포함하고, 수비 가운데에 공격을 포함한다> 3-1. 일도류전서(一刀流 傳書)에서 보는 현중대(懸中待), 대중현(待中懸)의 해설 [懸中待 = 적을 향하여 내가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공격하여 베고 찔러들며, 격렬하게 쳐들어 가 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나아가 공격할 생각만하여 뛰어들어가는 양(陽)의 기분뿐이고, 수비의 음(陰)의 기분이 결여될 때, 적(敵)이 착오없이 그곳으로 급변하여 공격하면 그에 응할 대비가 없어, 나는 파탄에 이르고 만다. 따라서 내가 나아가 달려들 때에도 적의 색(色-기색)을 보고, 그 급변하는 공격에 즉시 응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잃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항상 나는 양(陽-공격)에서 시작할 때도 음(陰-수비)의 생각을 쌓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개가 장한 호방한 무사는 과감히 공격하여 달려드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뛰어난 지혜가 있는 장수라해도 앞으로 뛰어들 때에 후방의 수비를 완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천리(千里) 밖으로 진격해도 나의 아성(牙城)을 습격당해서야 좋은 장수라고 할 수 없다. 懸中待는 하나의 기술에서도, 만군(万軍)의 총수(總帥)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이다. 待中懸 = 내가 몸을 완전하게 하는데는 우선 수비를 견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적이 쳐오는 것만 염려하여, 겨눔만을 굳히고 기다리며, 발을 열고 멈추어서, 방어만 해서는 이기지 못한다. 적이 공격해오는 것을 기다릴 것만이 아니라, 그 기세가 사라짐을 헤아려 좋은 기회를 보아 반격으로 전환하고, 나아가 적을 쳐부수는 점이 없어서는 안된다. 기다리기만 하고, 내가 공격할 양(陽)의 기분이 없으면 기세가 없고, 적에게 선(先)을 빼앗겨 적의 헛점을 탈 수가 없다. 따라서 항상 적의 동정을 살펴 내가 움직임을 걸고, 기다리는 중에도 달려들기를 잘하여 승리를 일순간에 놓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 笹森順造(세삼순조)가 지은 {一刀流極意-일도류 극의}에서. 대단히 알기 쉽고, 또 친절한 해설로서, 待中懸의 극의(極意)를 빠뜨림없이 설명하고 있다. <일도류 검술의 形을 보여주는 생전의 笹三順造 선생(左)> 3-2. 공격과 수비의 바란스 감각의 중요성 앞에서 적은 {일도류전서}가운데, [기개가 장한 호방한 무사는 과감히 공격하여 달려드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뛰어난 지혜가 있는 장수라해도 앞으로 뛰어들 때에 후방의 수비를 완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천리(千里) 밖으로 진격해도 나의 아성(牙城)을 습격당해서야 좋은 장수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참으로 명언이다. 호방한 무사가 아니라해도 기세를 타서 공격하고 있을 때는 참으로 기분이 상쾌하여, 멈출 곳을 모른다, 라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은 지나친 공격을 하고 있다든가, 무리한 공격을 하고 있다든가, 난폭한 공격을 하고 있다든가 하는 등의 자각(自覺)을 할 여유도 없어, 패배쪽으로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다는 위기감이 전혀 없다. 그러나, 정신이 들었을 때는 지고 있다는 케이스가 많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명민(明敏)한 청소년 검사(劍士)는 공격을 시작했다면 기세있는대로 전후의 분별도 없이 멋대로 돌진하여, 브레이크도 듣지 않는 이성을 잃은 야성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공격가운데에 수비가 있고, 수비가운데에 공격이 있다고 하는 검의 극의(極意)를 잊지말고 싸움을 진행시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실전이 한창 진행중, 피아(彼我)가 치열하게 흥분되어 있을 때 이 극의를 생각해내고, 유리하게 전황(戰況)을 전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일도류 전서에서도 이 가르침은 [단련한 뒤가 아니면 그 의미를 체득하기 어렵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말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懸中待 있고, 待中懸 있다]라는 것을 실전에서 행동으로 체득하는 것은 상당한 단련이 있지 않으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수(攻守-懸待)에 관한 옛사람들의 가르침은 거의 이해했다고 하고, 다음은 그 이론을 현대풍(現代風)으로 조절하여 실전에 응용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3-3. 실전에서 공수(攻守)의 바란스 감각을 닦는다. 공수 바란스 감각의 우열로 승부는 결정된다고 각오해도 좋다. 옛사람들은 [음양(陰陽)의 균형으로 승부하는 것을 배울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陽)은 懸(공격)의 기(氣)가 발산되는 것이고, 음(陰)은 待(수비)의 기(氣)이다. 음양의 균형이란 현대풍으로 말하면 공수의 바란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어떠한 바란스로 싸우면 좋은가?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본인의 검도수련의 정도에 따라서도 다르고, 성격에 따라서도 다르다. 여기서는 이와같은 개인차이를 한번 고려의 대상외로 제쳐놓고, 극히 일반적인 인물상을 가슴에 그려 생각해보자. 그래서, 우선 싸움에 임하는 속셈으로서는 공수의 氣를 6:4 정도로하면 어떨까? 기백을 가득넘치게하고, 先의 기위(氣位)를 충실히하여 마주선다. 마음으로써 적을 제압하여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려고 달려든다. 청소년 검사에 있어 이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6:4의 비율이 된다. 어떻든 상대가 있는 승부이다. 자기만 유리하다는 것은 없다. 시종 냉정하게 공방(攻防) 6:4의 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면, 유리한 시합이 되고, 승리를 거둘 확율이 높다. 3-4. 특기(特技)로 짠 공격 패턴(PATTERN)은 자신있는 수비로부터 시작할 것. 장기(將棋) 대국을 테레비로 보고 느낀 것은 기사(棋士)에 따라 각각 특기로 하는 공수 형태가 있다는 것이다. 공격에서는 거비차전법(居飛車戰法), 중비차(中飛車), 삼간비차(三間飛車), 4간비차(四間飛車)전법등으로 부르며, 공격의 중심이 되는 비차(飛車)의 위치가 전법의 명칭이 된다. 수비에서는 야구라카꼬이(矢倉圍い)라든가, 미노가꼬이(美濃圍い)등의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왕(王)을 둘러싸는 수비진형에서 여러가지의 명칭이 있다. 그리고 공격이 거비차전법일 때는 자기 진지를 '야구라카꼬이'의 수비진형으로 굳힌다는 식으로 공격전법과 수비진형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세트(SET)로 되어있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기본형과 같은 것으로서, 작전에 따라 말(馬)의 배치가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장기 대국 전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공격전법을 취한다고 하면 그 전법을 백업(BACK-UP)하기 위해 가장 알맞다고 생각되는 수비진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전투의 경우에 참고가 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즉, 전선(前線)에서 공격을 하고 있을 때 후위(後衛)는 후방을 굳게 지키고, 기회를 보아 공격진을 원호(援護)한다는 것이 전투의 원칙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효과적으로 행해지는데는, 공격전법에 어울리는(=매치-MATCH) 수비진형이 있다고 하는 교훈이다. 이 교훈을 검도에 살릴 수는 없을까? 물론 장기나 팀 게임(TEAM GAME)의 경우와 같이는 되지 않겠지만, 한사람이 공격과 방어를 나누어 사용하여 싸운다고 하는 점에서는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우선 [특기로 구성된 공격패턴]을 연구하여 몇개 정도 만들어낸다. 장기에서 말하는 거비차전법이라든가, 중비차전법에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격도 비차(飛車)단독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비차를 도와 角 銀 桂(=말의 이름)가 공격말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검도에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이다. 단독으로 [머리!]하고 뛰어들어가도 아무 효과도 없다. 머리!하고 뛰어들기 전에 적의 죽도를 치든가, '찌른다!'는 듯이 보인다. 이렇게하여 적에게 압력을 건다든가, 손목을 공격하여 적의 마음을 흔든다든가 해두고 강력한 [머리!]를 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므로 항상 [머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잘 연습해둔 특기중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을 기세좋게 펼치면 된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그 공격을 밀어주는 수비진형이다. 공격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도 충분히 허리를 받치고 만전의 수비태세를 취한다. 공격이 중도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백업(BACKUP)하고, 적의 반격기회를 미연에 봉쇄함과 동시에 제2, 제3의 공격을 자아내는 몸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무언가 까다로워하여 귀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진보가 없다. 추상적으로 구름을 잡는 듯하지만, 이것만은 마음속에 넣고 연구하면 반드시 무언가 얻는 것이 있다. 옛사람의 말에도 있듯이, [실전에서 행동으로서 체득하는데는 잘 단련한 후가 아니면 곤란하다] 노력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수행을 거듭함에 따라 자꾸 벌어져 가는 것이다. 명저(名著)로 이름높은 {고양이의 묘한 기술}에 다음의 일절(一節)이 있다. [단지 자기에게서 구할 것이라. 스승은 그 일을 전하고 그 이치를 가르쳐 줄 뿐. 그 참된 진(眞)을 얻는 것은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자득(自得)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서는 결코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없다. 자기자신이 깊이 생각하고, 체험을 거듭함에 의해서만, 도(道)의 깊은 곳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모든 일에 다 해당된다. 이 항의 테마인 [특기로 구성된 공격패턴]을 고안하고, 거기에 열심히 숙달하는 것도 자신이 터득하지 않고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그 공격패턴을 도와주고 보충하는 수비진형은 어떠한 것이 가장 효과가 있는가 하는 것도 스스로 궁리하여, '이것이다!'라는 발견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이 경우 '이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는 것이 소위 [自得]이다. 3-5. 감(感)을 닦는다. 감(感)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직감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 깨달음. 제육감(第六感)]으로 되어있다. {검도독본}(野間恒 著)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感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한다면 가장 뛰어난 감각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눈에 의해 느끼고, 귀로 느끼고, 코에 의해 느낀다고 하는 정도로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입니다만, 다시 나아가면 울림없는 소리를 듣고, 형체없는 그림자를 보는, 신령스럽고 묘한 곳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러면 승부의 세계에 밤낮 종사하는 사람은 어떤가? [두개의 수(手)가 있고, 그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하는 취사선택의 판단에 망설일 때가 가끔 있으나, 이 경우 최후의 결정은 아무래도 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감은 용이하게 나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4단 이상이 되지 않으면 진정한 감은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옛날 장기(將棋)의 명인이던 키무라(木村義雄)씨의 말이다. 언제 공격하고 언제 수비한다, 공수의 교체는 언제가 좋은가, 이것을 순간적으로 결정하여 착오없이 하는데는 감의 움직임에 의할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앞서 나온 {一刀流 傳書}의 대중현(待中懸)의 설명가운데, [막는 것 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적이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기세가 소멸하는 것을 재고, 좋은 기회를 보아 되받아치기로 나간다...]로 되어있으나, 여기서 좋은 기회를 본다고 하는 것도 감(感)이다. 또 막부 말기의 千葉周作(치바 슈우사꾸?)의 고제(高弟)로서 알려진 森景鎭(삼경진)의 명저인 {劍法擊刺論-검법격자론}에는, [선인(先人)들은 여기서, 이길 곳이 있는 곳에 동시에 패배할 곳이 있다, 나에게 좋은 기회라면 상대에게도 또 좋은 기회라는 것을 지적하고, 결국은 어느쪽이 이 기회를 예민하게 깨닫는 감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에 승부가 걸려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 좋은 기회를 일본말로 [시오아이-汐合.鹽合]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 뜻은 [조수가 밀려오는 곳, 조수가 빠져나가는 때]로 사전에 나와있다. 이 '이길 곳'이라는 말에 대하여 故 瀨越憲作(고.뢰월헌작)씨가 7단일 때에, [한판의 바둑 시합에서 두번, 혹은 세번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므로, 이를 우리들은 '이길 곳'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곳을 알 수 없어서는 이기는 것이 곤란하다]라고 말했다고, 검도독본(野間恒 著)에 나와있으나, 이 이길 곳을 즉각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 감의 작용이리라. {검도독본}에는 다시 말을 이어서, [승리를 바라는 사람은, 瀨越(뢰월)씨가 말하는 소위 '이길 곳'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검도의 여러 전서(傳書) 가운데에는 이 이길 곳을 [시오아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때도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시오아이'이든, 이길 곳이든, 하늘은 적과 우리편의 구별없이 평등하게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것을 승리로 연결짓는가 못하는가는 감에 의할 뿐입니다. [모든 감각이라는 것은 몇번이나 되풀이하여 느끼는 가운데 예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샤미센(三味線)을 연주할 때는 세개의 실(絲)의 상태를 조정한다, 첫째 실의 소리, 두번째 실의 소리, 세번째 실의 소리가 조화되도록 실을 조이는 것이 필요하고, 태어날 때부터 청각이 예민한 사람은 배우지 않아도 그것이 가능하지만, 보통의 초보자에게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즉 상태(調子-쵸오시)가 맞는가 아닌가를 듣고서는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기 시작할 때는 스승에게 상태를 물어서 연주합니다만, 점점 샤미센의 소리에 익숙해지는 가운데 음의 고저(高低)라든가 조화라는 것을 알게 되며, 1년 정도 지나면, 스스로 상태를 맞출수 있게 됩니다. 매일 매일 같은 실의 음색을 되풀이하여 듣기 때문에 음에 대한 감각이 모르는 새에 예민하게 된다 ---- 귀가 열려져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승도 그렇게 하여 제자가 자연히 체득하는 시기가 올 때까지는 말없이 상태를 맞추어 줄 뿐이고, 이론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호(文豪)인 타니자끼(谷崎潤一郞)의 {문장독본} 가운데의 [감각을 닦는 것]이라는 장(章)의 일절입니다. 감각이든, 감이든, 노력하고 되풀이하여 연마하지 않으면 예민하게 되지 않습니다. 감은 소질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만, 커다란 착오입니다. 노력하여 연마하면 할수록 예민함도 늘어나는 것입니다. <{검도독본}의 저자인 故 野間恒선생> <시오아이(좋은 기회)는 감으로 깨닫는다> <칼럼> 속(續) 바람과 시가 있는 여록 저번회에 이어서 野間恒씨(편의상 '노마'로 읽음)의 수필을 몇개 소개하자. 여담이지만 본서에 추천의 말을 실은 오오노(大野) 占部 두 선생은 노마도장에서 野間恒선생과 자주 연습을 하신 분들이다. 공허감(空虛感) <1934년 5월 20일> 이번의 천황 왕림 시합에서 나는 다행히도 우승했다. (승리했다면 필경 유쾌할 것인데) 막연히 그런것을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이기고 보니 그렇게 기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축하합니다]라고 말을 걸어준다. 본인은 물론, 일가일문(一家一門)의 영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 틀림은 없으나, 나는 이기고 난 지금보다, 싸우고 있던 때가 얼마나 즐거웠던가! ---- 물론 괴롭기도 했다. 불안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긴장감으로, 오로지 승부 삼매(三昧)에 몰입하고 있던 그 순간만큼, 즐겁고 만족스런 기분은 없는듯이 생각된다. 인간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안일한 가운데에는 결코 없다. 팽팽하게 긴장된 정신이나 생활가운데에서 비로소 가장 많은 즐거움이나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런 감이 드는 것이다. 승리의 쾌감이라는 것도 절대 없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싸우는 즐거움에 비하면 얇고, 작고, 좁고, 얕은 것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승리라든가 명예라든가, 성공이라든가하는 것은 이것을 구하고 있을 때가 좋은 것으로서, 그것을 얻고 말면 오히려 쓸쓸한 공허감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검객의 강함 <1938년 8월 13일 병중(病中)에서> 여러 사람에게서, 여러 자리에서 미야모또 무사시(宮本武藏)와 쯔까하라 보쿠덴(塚原卜傳)중 누가 강할까 하는 것과,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와 이또오 잇또오사이(伊藤一刀齋)중 누가 강할까 하는 질문을 받고, 배움이 얕은 나로서는 누누히 대답에 궁해진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대답에 궁하다는 것은 반드시 나의 배움이 얕은 탓만은 아닐듯하다. 시대가 다른 사람의 경우는 말할 것까지도 없다. 가령 같은 시대의 검객이라도 명백한 승부의 기록이라도 남아있지 않는 한, 억측으로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꺼리어진다. 설사 확실한 승부기록이 남아있다고 해도, 서로의 연령의 격차라든가, 그 외에 그 때의 여러가지 컨디션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되고, 다루기 어렵고 거북한 상대도 있을 수 있다. 그것보다, 무엇보다도, 옛날에 있어서는 목도(木刀)시합이라해도 위험은 진검과 거의 같으므로, 가벼이 시합은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머리(호면), 손목(호완), 죽도를 사용하게 되고부터는 별도로하되, 그 이전에 있어서는 사실 일류(一流)의 검객들이 마주선 것은 거의 희귀하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이하 생략) 검도와 개성 <1933년 12월 20일> 가령 옷의 취향이라든가, 맵시있게 입는 것이라든가, 걷는 방법, 더 소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의 개성이라는 것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울지않는 두견새에 대하여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의 세 영웅을 비교 대조한 이야기가 있는데, 물론 후대(後代)의 사람이 지은 것일 것이고, 과연 세사람의 성격을 똑바로 꿰뚫고 있는가 어떤가는 알 수없으나 적어도 그러한 개성의 차이는 모든 사물에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흔히 우리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의 이모저모에서 과연 그 사람답다고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승부에 관해서라든가, 예술이라는 것이 되면, 다시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검도등에 있어 우리들은 특히 그 현저한 것을 보는 것이다. 수련이 초보일 때는 배우는 것만으로 좋고, 사범등 다른 사람의 모방만으로 충분하지만, 기술이 진전됨에 따라 그곳에 그사람의 독자적인 경지가 열려 간다. 또 열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수행시기에 있어서는 될 수 있는 한 자신을 죽이고, 좋은 것이라고 되어 있는 일정한 형(形)이나, 법칙.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지만, 언제까지나 그것에 구애되어 있어서는 진보가 없다. 수행을 하는 이상, {나}를 죽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해도, 그 {나}를 죽이면서 수행하여 가는 사이에 그 사람의 개성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다. 인간도 유년(幼年)시대는 거의 개성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어버이가 명령하는대로, 스승이 가르치는대로 무심(無心)하게 지나가지만, 이윽고 소년기, 청년기가 오면, 자연히 [자기]라고 하는 것에 눈떠, 독립한 하나의 인격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검도 수행의 길도 거의 마찬가지로서, 사람이 가르치는 대로, 스승이 이끄는 대로 길을 가다가, 이윽고 기술상에, 마음속에 개성이 눈떠지게 된다. 그것은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가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듯이, 풀이 솟아나고, 나무싹이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히 또 서서히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검도에 있어 조금 성숙해 간다, 한사람 몫이 되어간다 라고도 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