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3.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에서 현대까지 4]나폴레옹(Napoleon I ) 시대 [영국: 조지 3세, 오스트리아: 프란츠 2세, 독일: 빌헬름 3세,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 ![](https://t1.daumcdn.net/cfile/cafe/1918DD234CC515968D)
(1)나폴레옹(1769-1821, 1통령 1800-1804, 황제 1804-14/15) 아버지 샤를 보나파트르 아래 1남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1806년나폴리 왕, 1808년 에스파냐 왕을 했고,
2남 나폴레옹 1세는조세핀과 결혼은 자식이 없으며, 마리 루이즈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 나폴레옹 2세로 로마 왕을 했고, 3남 네덜란드 왕을 했던 루이의 아들이 나폴레옹 3세(1852-1870)이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769.8.15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에서 출생하였고, 보나파르트(이태리식: 부오나파르테) 나폴레옹은 자코뱅당이 물러난 뒤 온건파 공화파가 만든 집정관 정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외국군대를 무찔렀으며, 1793년 24세에 준장이 되었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앞잡이로 몰린 나폴레옹은 음모와 반역 혐의로 체포당했다가 풀려났고, 26세로 프랑스 국내 총사령관이 되어 아이 2명의 어머니이며, 숱한 염문을 뿌리던 조제핀과 결혼했다. 1796년 오합지졸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빈 100km까지 진격하여 토리노, 밀라노, 네덜란드 남부를 얻어 인기 절정을 이루었고, 1798년 영국의 제정을 고갈시키기고 인도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하여 이집트로 원정하였으나 영국 넬슨 제독과 나일강 전투에서 패하여 이집트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육로를 열기 위하여 시리아로 진격하였고, 1799년 '불가능은 없다'라고 호언하던 나폴레옹도 돌레마이 (아콘)을 여러번 공격하였으나 영국군에 패하여 육로를 포기하고 이집트로 되돌왔다. 이 때 이스라엘의 욥바에서 많은 사람을 무차별 죽였는데 이것을 '욥바의 도륙'이라고 하며, 나폴레옹도 패할 수 있다는 것에 고무된 영국이 수상 피트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프랑스를 침입했는데 집정관 정부는 무능으로 패배하자 프랑스 내에도 동요가 일어났으며, 이 같이 다급한 형세를 보자 나폴레옹은 부하 몇 명만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왔다. 1799년 쿠데타로 집정관 정부를 넘어뜨리고 사임했던 2총재와 함께 3통령 정부를 세워 자신이 제 1통령이 되어 약관 30세에 정권을 독점하였고, 1800년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승리하였다. 국경을 라인강, 알프스 산맥, 피레네 산맥으로 인정받았으며, 1802년: 전쟁에 지친 영국도 1802년 아미앵 평화조약으로 잠시 평화가 이루어졌고, 그의 위상은 더 높아져 그를 종신 통령으로 통과 시켰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2BA61F4C7E0CD72F) <1798년 이집트 원정에서 낙타를 타고 진격하는 나폴레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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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나폴레옹 법전 1804년 3월 21일 공포한 '나폴레옹 법전'은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후세에 각 나라(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법률제정에 본보기가 된 것으로 즉 개인의 자유, 노동의 자유, 양심의 자유, 국가의 세속적 성격, 법 앞에서의 평등 등을 뚜렷이 규정하였다. 그러나 토지재산을 보호하고, 고용주에게 더 큰 재량을 주었으며, 피고용자를 거의 배려하지 않았고, 또한 이혼을 인정하였지만 여자에게 아주 한정된 법적 권리만을 주었다. 그는 신앙에 대해 무관심했으나 종교 자유를 허락하여 신앙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농민의 지지를 받고, 도로 건설, 고등교육(초등교육은 등한시하였다)과 종합대학을 만들어 과학을 장려하였다. 1803년 루이지애나를 판매하였는데 214만㎢의 광대 지역을 미국에 에이커 당 3센트도 안 되는 약1500만 달러에 팔았고, 1803년 아미앵조약 내용에 영국은 몰타 섬의 원주인 구호기사단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폴리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자 영국도 철군하지 않아 위기가 고조되어 1804년 12월 2일 결국 영국이 선전포고하였는데 이것이 나폴레옹을 황제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이 나폴레옹을 제거하고 부르봉왕조의 푸셰를 세우려는 것이 발각되어 푸셰는 처형당했으며, 다시는 체계를 뒤엎는 음모를 없애는 방법으로 종신통령제를 세습하도록 하는 것이 건의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를 받아 드려 황제에 오르게 되었고, 나폴레옹의 가족은 황족칭호를 내렸으며, 위상을 더 높이기 위하여 교황 피우스 7세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마지막 순간에 황제는 교황에게서 황제 관을 건네 받아 손수 자기 머리에 썼다.
(3)트라팔가르 해전 1803-05년 프랑스와 전쟁한 나라는 영국뿐이었고, 프랑스 육군이 영국에 상륙해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으며, 영국은 대륙에 있는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야만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전보다 더 큰 규모로 영국을 침략하려고 준비하였고, 1803년 군함 2,000척 가량 끌어 모아 불로뉴에 집결시켰으나 1798년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협을 건너려면 바다를 장악해야만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2나라 해군을 합쳐도 영국 해군의 함대들 가운데 하나를 겨우 상대할까말까 정도였는데 스페인은 1804년 12월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는 앤틸리스 제도에서 만났다. 영국 함대 하나를 유인해 쳐부수어 2진영의 해군력을 비슷하게 만든다는 작전을 세우고 해협 입구에서 싸운다면 승리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나 그 작전은 실패하였다. 빌뇌브가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에서 앤틸리스 제도로 갔을 때에 스페인 함대는 오지 못하였으며, 프랑스 함대는 넬슨에게 쫓겨 공격 한번 못한 채 1805년 7월 유럽으로 되돌아가 카디스로 피했다. 그곳에서 영국 함대에게 봉쇄 당했고, 빌뇌브는 스페인 함대의 도움을 얻어 봉쇄를 뚫으려 했으나 1805년 10월 21일에 트라팔가르 곶 앞 바다에서 넬슨의 공격을 받았다. 그 전투에서 넬슨은 목숨을 잃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궤멸시켜 영국은 침략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 마음껏 바다를 누빌 수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11월 13일 빈에 입성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무찔러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어 나폴리 왕국의 부르봉 왕가를 내쫓고 그 왕관을 나폴레옹의 맏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씌웠다. <트라팔가르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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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1806년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란 말을 남긴 나폴레옹은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어 신성로마제국을 점령하여 보호자로 자청하고 나서자 플랑로드(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황제 칭호를 포기하였다. 이로서 신성로마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독일도 점령하여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프랑스의 안전을 위하여 16주를 떼어내어 '라인연방(동맹)'이라는 중간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영국본토 상륙이 좌절되자 '베를린 칙령(대륙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목을 조이려 했고, 영국의 오랜 동맹자인 포르투갈은 자기 나라 상업을 파멸시킬 봉쇄에 처음부터 협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응징하려고 리스본을 점령하였으며, 프랑스군이 북부 스페인에 너무 오래 주둔하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편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는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를 양도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가문 출신의 마지막 군주를 유럽에서 몰아낼 기회로 삼아 1808년 4월 카를로스와 페르난도 모두 퇴위를 강요하였고,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가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그 뒤 스페인 전지역으로 반란이 퍼졌고,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리 왕 조제프 보나파르트(맏형)를 새 국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국자 마리에 발레프스카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하나 얻었고, 1809년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반란을 거의 진압하였다. 그 뒤 바이에른을 공격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를 또 다시 패배시켜 쉰브룬 조약(1809)으로 대륙봉쇄 체제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고, 1810년 아이를 낳지 못한 조제핀을 버렸다. 황제의 체통에 맞은 오스트리아 황제(프랑로드 2세)의 딸 마리 루이즈(마리 앙투아네트 조카)와 결혼하여 이듬해 그녀가 아들을 낳자 제국의 미래가 보장된 듯하였다. 이 해에 포도가 많이 생산되어 나폴레옹이 코냑의 상표가 되었다. <나폴레옹 제국>
(5)러시아 침략과 나폴레옹의 몰락 1812년 베를린 칙령을 따르지 않는 러시아와 협상이 결렬되자 총 45만 3,000명 가량의 병력으로 러시아로 진격했고, 러시아군은 초토전술을 펼치며 퇴각했는데 프랑스 군은 9월초에야 모스크바 근처에 도착했다. 1주일 뒤 텅 빈 모스크바를 입성하는 날 엄청난 화재로 인해 모스크바의 대부분이 타버렸고,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 협상하려 하지 않았기에 나폴레옹은 퇴각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발진티푸스가 유행해 전력의 4/5를 잃었고, 때 이르는 겨울 한파로 퇴각하는 프랑스군에게 커다란 재앙을 안겨주었는데 나폴레옹을 물리친 장군은 '동장군'이었기에 지금도 무서운 한파를 동장군이라고한다. 러시아군의 추격으로 살아온 군대는 1만 명도 채 못되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한편으로 다른 주장은 늦게까지 날씨가 따듯해 대포와 마차가 진흙에 빠져 퇴군에 지장을 받아 전멸했다고도하는데 1813년 러시아 원정 실패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동맹을 결성해 프랑스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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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파리까지 점령당해 결국 황제자리를 내어놓고 지중해 엘바섬으로 유배갈 때 그에게 섬을 영지로 주며, 해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200만 프랑을 받고, 400명의 자원 호위대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1814년 유럽의 각국 대표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트르니히를 중심으로 빈에 모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뒤처리를 상의한 것을 '빈 회의'라고 하며, 루이 16세 동생 루이 18세가 즉위해 부르봉왕조가 부활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대륙 상황을 주시했고, 엘바가 프랑스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그를 대서양의 먼 섬으로 쫓아내고 싶어하는 것도 알았으며, 또 오스트리아가 아내와 아들이 그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불만이 쌓였는데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금지불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나폴레옹은 행동을 취하게 하였는데 그는 3월 1일 칸에 상륙해 알프스를 넘을 때 공화주의자 농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온 군인들이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파리로 들어와 다시 권좌에 올랐으며, 벨기에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무찌르고 이틀 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영웅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 4개 연합군과 워털루에서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이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프로이센군이 도착해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파리로 온 나폴레옹은 의회의 요구로 1815년 6월 22일 퇴위하면서 미국으로 망명하려 하였다. <나폴레옹 마지막 전쟁 워털루>
그러나 영국 함대는 모든 프랑스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고, 이에 그는 영국 정부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며, 그의 요청을 받아 동맹국들의 의견을 감안해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3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권력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라고 하며, 1821년 5월5일 52세도 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유해는 그가 좋아했던 군복을 입히고 묘비에는 이름도 없었다. 다만 '여기에 눕다(Ci-Git)'라고만 새겼는데 그가 죽자 신화는 급속히 확산됐고, 알렉산드르 뒤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31)'작품으로 죽은 지 얼마 안 된 나폴레옹 황제에 대한 전설을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1840년 나폴레옹의 아들 프랑수아는 세인트헬레나로 가서 나폴레옹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센 강변으로 옮겨 왔고, 그해 12월 파리에서 웅장한 장례식을 치른 뒤 앵발리드 돔의 기념관(군인 박물관)에 그를 묻었다. 나폴레옹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은 그 신화에 힘입어 1848년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1852년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관대하여 유대인의 거주제한을 철폐하였으며,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였고, 그는 18세기 사람이자 마지막 '계몽군주'이었는데 그는 중앙집중의 행정제도, 나폴레옹 법전, 프랑스은행, 금융조직, 대학과 육군 사관학교 등 오늘날 프랑스의 주춧돌이 된 제도들을 남김으로써 프랑스와 세계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나폴레옹 이야기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 할 때 영국의 넬슨 제독은 프랑스함대의 감시가 임무여서 지중해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나 나폴레옹을 놓쳤는데 안개가 끼어 놓쳐다 고도하고 혹은 강한 북서풍을 만나 넬슨의 소(小)함대는 정박 지에서 떨어져나가 놓쳐다 고도 하는데 하여튼 나폴레옹은 무사히 이집트에 도착하였다. 만일 놓치지 않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며, 나폴레옹은 이집트 갈 때 많은 학자를 데리고 갔고, 그 중에 젊은 역사학자 상폴리옹이 있었고, 그는 요새를 구축하다가 로제타 지방에서 송덕 비문을 상형문자와 그리스어 문자와 민중문자로 3번 반복한 글이 새겨진 돌판을 발견했다. 이것이 유명한 '프톨레이마이오스 5세의 송덕비 로제타석인데 탁본을 가져와 연구 중 영국 물리학자 토머스 영이 이 비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고, 뒤이어 샹폴리옹은 이 상형문자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이로서 고대이집트의 비밀을 풀게 되었는데 로제타석은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 아부키르 전투에서 영국에 패하여 평화조약 대가로 모든 전리품을 영국에 빼앗겨 지금은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식물학자도 데려갔는데 그들은 조세핀을 위해 중동 장미와 유럽장미 그리고 아시아장미를 교배하여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장미를 만들었다고 한다. 1798년 나폴레옹은 해로가 막혀 육로를 열기 위해 시리아로 진군 할 때 수에즈만 근방의 '바르 에 콜줌(익사의 바다)'이라고 불리는 홍해바다 1.6km의 모래톱을 모세와 같이 걸어서 건너갔다. 이것으로 모세의 기적이 불가사의 한일이 아님을 증명했다고 하며, 나폴레옹은 자신을 후세에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민법전으로 영구히 알아 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그는 대단한 열의(87회의 토론에 36회 참석)를 가지고 법을 만들었으며, 지금의 민법에 기초가 되어 '법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는 하루에 3시간의 잠을 잔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대단한 애서가로 러시아원정에서도 괴테의 책을 가지고 다니며 전쟁터에서도 책을 읽었다고 하며, 또한 조세핀에게 반한 것도 미모가 아니라 그의 대단한 지성이었다고 전한다. (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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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법의정신: 목적은 도덕을 법률과 결합시켜 건전한 가족을 만들고 국가의 정신으로 보급시키는데 있으며, 훌륭한 아버지는 훌륭한 남편이며, 훌륭한 아들로 훌륭한 국민을 형성한다. 2. 가족의 존중: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를 진다. 3. 소유권의 절대: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 먹고 입을 수 있어야 하고, 생존과 그 유지에 필요한 물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그러므로 소유권은 자연적으로 직접적인 절대 권리이다. 4. 계약의 자유: 인간은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자유로이 거래할 수 있어야 하며, 계약은 정의나 선량한 풍속과 공익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고, 적법한 계약도 공공질서나 선량한 풍속에 저촉되서는 안 된다. 문체는 스탕달(1783-1842)이 문장을 다듬어 간단 명료한 모범적인 문장으로 여기는데 우리 민법에 건축물은 경계로부터 50cm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은 나폴레옹의 법전에도 똑 같이 명시되어 있다. 이유는 옆집은 비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한 것과 빗물이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스위스는 통일당과 연맹당으로 갈라져 난동이 계속되어 걷잡을 수 없을 때 오랜 지방자치의 특징을 직관하고 있던 나폴레옹 덕분에 1803년 새로운 헌법을 탄생했는데 너무나 스위스 특징을 잘 살리고 있다고 한다. 고로 고칠 부분이 없을 정도라고 하며, 그는 점령지마다 프랑스 혁명정신인 자유, 박애, 평등사상을 심어주어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고, 당대 유명한 '미스터 파리'라는 기요틴 오퍼레이터(운전자)가 있었다. 그가 샤를 앙리 상송이 있었는데 그는 1793년부터 2년 동안에 3,000명의 목을 잘랐으며, 그 중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로베스피에르도 포함되었는데 유명인물들은 조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조각가 '마리에그로졸츠'에게 석고를 만들 수 있도록 넘겨주었는데 나폴레옹이 그에게 나의 목도 때가 되면 자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었고, '폐하 제가 루이 16세의 목도 잘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귀족만 사용하던 기요틴은 모든 사형수에게 이용되면서 기계를 이용하여 가능하면 고통 없이 처형할 것을 요구한 법률이 외과의사 조제프 이냐스 기요탱 노력으로 통과되어 그의 이름인 '기요틴'으로 불렀다. 후엔 범죄자들은 '과부'라는 별명을 붙였고, 1977년 마지막 사용했는데 1981년 사형제도를 금지해 단두대도 폐기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마리 레티티아 라모니노는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나폴레옹은 2번째이며, 12명 자녀 중에 4명은 왕이 되었고, 2명의 딸은 왕비가 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외국서는 영웅 대접하고 있으나 프랑스서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욕심을 위해 국민을 전쟁터로 끌고 간 독재자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며, 나폴레옹은 영웅답지 않게 개와 고양이를 무척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그가 모스크바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그를 보고 짖자 막사의 커튼 뒤로 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법의 아버지'로 더 위대한 나폴레옹> (나폴레옹과 통조림의 역사) 1809년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지속적이고 빠른 수행을 위해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식료품의 새로운 저장과 포장 법을 공모하였다. 그 중에 '아페르'라는 한 요리사가 만든 병조림법이 선택되었다. 그것이 식료품의 가공 보관에 혁신을 가져온 통조림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병조림은 무게와 잘 깨지는 단점이 있어 10년을 넘지 못하였다. 병조림을 좋아하던 영국의 깡통 기술자 '듀란드'는 겨울날 병조림의 음식을 자신이 만든 깡통에 부어서 데워 먹다가 병조림 대신에 깡통조림을 만들어도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특허 출원하여 만든 깡통 통조림은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나 만드는 과정이 수(手)작업으로 이루어져 일일이 납땜을 하여야 했기 때문에 단가가 높아 중단되었다. 본격적인 통조림 시대는 1830년 영국의 대 자본가에 의하여 통조림 공장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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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교향곡과 베토벤(1770-1827) 이야기무명시절 오선지를 구할 수 없이 가난하여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번 동생에게 구걸 편지를 보냈는데 동생은 밥도 못 먹는 직업을 치우라는 편지만 받았는데 그는 이 전의 음악가처럼 귀족의 도움을 않고, 자기 곡을 팔아 살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 음악가들이 살아 가는 방법을 열어 놓았다. 빈의 그린찡 숲 속에서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로 베토벤은 숲 아래 그린찡마을애서 살았는데 술을 많이 먹어 하숙집에서 자주 쫓겨났고, 숲 속에 자주 산책도 하고 낮잠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곡이 떠올라 땅 바닥에 오선을 긋고 작곡을 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전원 교향곡'이며, 그의 나이 서른 무렵 피아노제자 '줄리에타' 사랑했으나 그녀는 다른 백작과 결혼했다. 그녀에게 헌정한 곳이 '월광'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인데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후회했다고 하며, 월광이라는 이름은 베토벤이 죽은 후 시인이며 음악평론가인 레슈타프가 이 곡을 이렇게 표현했다.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달빛이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 같다.'라고 한 것이 월광이 되었으며, 그는 안토니 폰 비르켄슈톡이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평생독신으로 살았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해 1804년 '보나파르트'를 작곡하였으나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그는 실망하여 그의 이름을 지우고 심술로 이탈리아어인 '심포니아 에로이카(영웅 교향곡)'이라 하였다. 그는 괴테와 함께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 변혁기에 낳은 인물로 낭만파의 거목으로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멘델스존,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낭만파가 나오게 하였는데 음악가인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다. 그의 삶의 고뇌는 음악으로 표현했고,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영혼안식과 구원의 길을 터주는 음악을 작곡하여 예술가로의 베토벤보다 인간 베토벤이 한층 더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독일인이라 빈에서는 모차르트나 요한 스트라우스보다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 5] 부르봉왕가와 나폴레옹 3세
(1)루이 18세(1814-1824)루이 15세 아들 중에 넷째 아들로 2명의 형이 죽고, 남은 한 형이 1774년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후계자로 예정 되었으나 루이 16세가 두 아들을 낳자 왕권 야망은 수그러들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1791년 프랑스에서 도망쳤고, 그는 반혁명 성명서를 발표해 망명귀족연합을 조직하여 혁명에 대항한 싸움에 다른 나라 군주들의 지원을 얻으려 애썼다. 1793년 루이 16세와 왕비가 처형당하자 스스로 조카 루이 17세 왕세자의 섭정으로 선포하였고, 1795년 루이 17세가 죽은 뒤 자신을 루이 18세로 선언해 왕이 되었으나 이름뿐이었고 실권을 잡은 것은 1814-24년이다. 또 나폴레옹이 다시 정권을 잡은 백일천하 기간에는 지위를 잃었으며,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듯하였고, 재정적으로 시달렸지만 왕위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보나파르트가 주는 연금도 거부했고, 1813년 나폴레옹이 패배를 거듭한 뒤 성명서를 발표해 부르봉 왕정복고 뒤에도 혁명의 결실들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으며, 1814년 유럽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그리고 왕정복고를 둘러싼 협상에 성공하여 루이 18세는 전쟁으로 지친 시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으며, 그는 양원제의회, 종교의 자유, 시민들의 헌법상의 권리들을 보장한다는 입헌군주제를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다시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돌아옴으로 중단되었고, 미셸 네 원수가 1815년 마음을 바꿔 나폴레옹에게로 돌아 서자 루이 18세는 도망쳤으며,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에야 돌아왔다. 루이 18세 통치기간은 프랑스 혁명 뒤 처음으로 의회정치가 시도된 시기였고, 왕이 '법안발의권'과 행정권을 가졌으며, 자문 역할을 하는 의회는 왕이 발의한 법안에 찬반 투표를 하여 예산을 승인하였다. 그가 죽자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뒤를 이어 샤를 10세가 되었으나 67세의 고령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BA61F4C7E0CD734) <루이 18세와 가족>
(2)샤를 10세(1824-1830) 1824년,형이 죽자 왕위에 올라 의회를 무시하고 언론과 출판을 자유를 탄압하였고, 여론을 무시하고 반동적인 극우 교권주의자이며, 악명 높은 쥘 드 폴리냐크 공에게 내각구성을 위촉하였다. 이로 인해 커다란 소요가 뒤따랐으나 그는 더욱 완강해졌고, 1830년 3월 자유주의 의원들이 폴리냐크 내각을 반대하자 샤를은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으며, 5월 선거에서 국왕의 반대파가 다수당이 되었다. 7월 26일 국왕은 출판의 자유를 탄압하는 등 4개 칙령을 공포하는 탄압조치가 오히려 파리 급진파들을 부추겨 7월 혁명을 일으켰고, 미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한 그는 우선 베르사유로 피신하였다가 랑부예로 옮겼다. 반란 진압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8월 1일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필립)를 국왕대리관으로 임명하고, 손자 앙리에게 와위를 계승하려했으나 시민은 투표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프라하에 정착했으나 1836년 객지에서 죽어 무덤은 같은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인 괴르츠에 묻혀 프랑스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 무덤이 있는 왕이다. 괴리츠의 현재 지명은 노바고리차로 슬로베니아 영토이며, 서쪽 국경으로 지중해까지 20km 정도 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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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루이 필리프(필립, 1830-48) 산업혁명이 진행되어 시민과 노동자 힘이 강해지고 기대를 가졌던 루이 필리프 정치에 불만이 폭발해 1848년 2월에 다시 혁명이 일어나 국왕은 국외로 도피하여 또 다시 왕정은 폐지되고 공화정치가 부활하였다. 1831년 루이 필리프는 *용병(외인 부대)을 정규군으로 만든 사람이다.
*용병(외인 부대) 용병은 본래 봉급을 받고 병역에 복무하는 병사를 말하지만 통상적으로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외인부대를 말하며, 프랑스는 흰색 베레모를 쓴 '캐피블랑'으로 알려진 외인부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는 병사가 아니고 돈을 위해 분쟁이 있는 곳에 목숨 걸고 달려가는 인간병기로 15세기 프랑스는 국지적인 분쟁들이 생길 때마다 영국, 독일, 스위스 출신의 용병들을 뽑아 활용했다. 나폴레옹도 상당수의 용병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전투 선봉에 내세웠고, 1831년 루이 필리프는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 확보에 국력을 다하던 반면에 프랑스는 국내외 어려움이 많았다. 알제리에서 벌이고 있던 식민지 전쟁에 병력 지원 요청이 쇄도하였지만 지원병을 보내줄 처지가 못 되었는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외인부대였다. 외인부대는 실업자가 된 직업군인들을 비롯해 골치 아픈 정치 망명객, 도피자, 부랑자, 범죄자로 급조 되었고, 외인부대는 훈련을 마치자 알제리로 투입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외인부대가 오늘날까지 유지해 오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전투 부대로 성장하였다. 외인부대의 지원자 요건은 1. 프랑스 본토 밖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2. 연령은 만 18세-40세 미만으로 신장은 160cm 이상이어야 한다. 3. 수배자, 전과자, 타국의 군부대에서 탈영한 자는 안 된다. 특전은 지원자들에게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 10여명이 캐피블랑 요원으로 있다고 하며, 캐피블랑 첫 전투는 1831년 알제리에서 시작으로 1846년 멕시코 카메론에서 빛난 전투는 외인부대의 축제일이 되었는데 이 날은 매년 4월 30일 펼쳐지는 카메론 데이(Camerone day)이다. 이 날은 외인부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축제일로 꼽히며, 캐피블랑은 지금도 르완다 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와 전쟁에 참가했는데 용병의 이야기로는 루이 14세의 용병 크로바트이다. 이들은 화려한 천을 장식용 목도리로 사용하였는데 귀족들이 목도리의 맵시에 매료되어 너도나도 크로바트를 매기 시작한 것이 넥타이의 기원이 되었고, 1792년 루이 16세를 지키던 786명 스위스 용병들의 충성을 기념하기 위해 덴마크 조각가가 트로발트젠이 조각한 '빈사의 사자 상'이 스위스 루체른에 조각을 하였다. 9m 사자 상은 부르봉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를 죽어가면서 지키고 있는 스위스 용병은 유럽에서 이름나 있어 로마의 바티칸 시티를 지키는 경비병은 아직도 스위스 용병 100명 정도가 맡아 하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창을 들고 다람쥐 무늬의 제복을 입은 사람이 그들이며, 영국의 용병은 네팔의 구르카 족으로 만 구성된 것이 프랑스와 다르고, 이들은 군 생활을 마치면 영국에 남던 고향으로 가던지 선택 할 수 있으며, 이집트의 맘루크왕조(1250-1517년)와 인도의 노예왕조(1206-90)도 용병들이 세운 왕조이다. <개선문 앞을 지나가는 외인부대 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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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루이 나폴레옹(1848-52)에서 나폴레옹 3세(1852-1870) 1848년 11월 새로 제정된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선거에서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큰 표 차이로 당선되었고,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단임으로 중임 할 수 없었다. 1851년 그는 헌법개정에 필요한 의원 수 3/4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배경으로 쿠데타가 성공하여 공화주의자를 몰아냈다. 1852년 제위에 올라 나폴레옹 3세라고 칭한 이것을 '제2 제정(군주정치)'이라고 한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1806-10년 네덜란드 왕을 지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보나파르트였다. 1832년 사촌인 라이히슈타트(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 공작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공공사업, 철도건설, 은행설립을 비롯하여 공업과 농업발전을 촉진시키고 대규모 기술개발과 발명가들을 지원하였고, 그는 자신이 말한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필수품의 가격을 낮추고 위생시설을 갖춘 노동자주택을 건설하며 중재위원회도 설립했으며, 복지사회는 사용자와 노동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것을 배우게 하였다. 사회복지기관에 기부금을 하사해 시민들도 이 같이 했으며, 파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대외정책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하였고, 1861년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해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해 물질적 보상을 기대하면서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안데스 왕국'을 건설하여 견제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먼로 정책의 일환으로 남북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를 남아메리카에서 몰아냈다. 그의 대외 정책은 어느 정도 주도권을 확보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실패하였고, 1869년 수에즈운하를 완성하여 유럽과 인도양 및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항로를 만들었다. 1870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 전쟁해 자신이 포로가 되었고, 최초로 파리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알자스지방을 돌려주었고, 50억 프랑을 배상하는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무거운 배상금으로 프랑스를 몇 년 동안 묶어두려고 하였는데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 국민이 스스로 모금하여 몇 달 안에 해결하자 그는 놀랐다고 한다. 이 전쟁 이후로 독일이 유럽의 무대를 장악하게 되었고, 프랑스와 감정은 악화되었으며, 파리시민은 폭동을 일으켜 제정(군주정치)을 폐지하고, 1875년 헌법을 개정하여 제 3공화국을 세웠다. 전쟁 중에 천연두가 퍼졌는데 백신으로 예방한 프로이센 병사는 300명 정도만 죽었고, 프랑스 병사는 10배나 많은 병사가 죽어 예방의 힘을 실감케 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후 영국에서 살다가 지병으로 고생하던 방광결석 제거수술을 받은 후 죽었는데 그는 당시 금보다 더 귀하고 비싼 알루미늄 단추를 달고 자랑했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BA61F4C7E0CD836) <프랑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나폴레옹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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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화정(1871-현재)
(1)제 3공화국시대(1871-1914) 나폴레옹 3세가 물러나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1871년 3월 1일 독일과 휴전조약으로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이 비준되고, 프랑스는 동부 프랑스의 독일군 주둔 비와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된 알자스와 로렌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절반을 독일에 양도되었으나 후에 제1차 세계대전 종결 때 이 지방들은 프랑스가 반환 받았다. 강화조약이 체결된 며칠 후 의회는 파리 코뮌의 반란에 직면했는데 '파리 코뮌'은 것은 프랑스 민중이 독일과 조약에 반대한 프랑스는 평의회를 선출하여 파리 코뮌을 설립하였다. 파리 코뮌에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이 반란을 주도하여 3월 18일 코뮌은 국민방위군을 무장 해제하려 했으나 유혈충돌이 발생해 폭력사태가 확산되었다. 정부군은 파리를 포위공격하여 코뮌 반란자들은 2만 명이 전사하거나 처형되었고, 수천 명의 생존자들은 유배 되거나 망명하였는데 이를 '피의 일주일(5. 21-28)'이라고 한다. 1882년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었고,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였다. <프랑스 알자스 로렌지방의 포도생산단지 콜마르>
(2)제 1차 세계대전 1914년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하여 공격하면서 파리를 포위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은 이를 저지하였고, 그후 양군은 참호전에 들어가 1918년까지 서로 대치하였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조약이 조인되었고,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비준되었다.
(3)제1-2차 세계대전 사이(1920-1940년) 1920년 최대 관심사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전비 및 재건에 관한 재정문제였고,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배상금 지불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그 의무를 거듭 이행하지 않았다. 1929년 배상금에 관한 새로운 수정안으로 독일은 부담이 훨씬 가벼워졌고, 당시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이 1931년 유럽과 프랑스도 그 와중에 휩쓸렸다. 독일 나치의 부흥은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가 됨으로 절정에 달하였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폴란드를 함락한 후 히틀러가 제안한 강화는 서방 연합국에 의해 거절되자 1940년 5월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파리에 접근하자 파리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하였고, 페탱 내각이 조직되었다. 6월 22일 휴전 조약이 성립되었고, 이 조약으로 프랑스의 형식적인 주권은 인정되었으나 국토는 독일군의 점령지역과 비 점령지역으로 분할되었으며,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4)제 2차 세계대전(1940-44) 1940년 샤를 드골 장군이 전투를 계속할 것을 호소했으나 국민은 페탱에게 기대하였고, 비시에서 열린 의회는 제3공화국을 폐지하고 비시 프랑스를 수립하였다. 1942년 북아프리카가 독일 로멜 군대가 미국군에 항복하자 히틀러는 프랑스 전 국토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고, 비시 프랑스는 독일의 관용으로 그 생명을 유지할 뿐이었으나 비시 프랑스는 쇠퇴했다. 이때에 독일에 대항하는 지하운동이 일어나 런던에 본부를 둔 드골은 '자유프랑스'를 조직했고, 1943년 그는 레지스탕스 운동의 대표가 되었으며, 1944년 프랑스 기갑부대가 파리에 입성하였다. 1944년 10월 미국, 영국, 소련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은 드골의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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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 1월 의회는 10월에 국민투표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고 제4공화국은 의회 민주주의가 부활했다. 1954년: 식민지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남부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회복한 프랑스는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주의자들과 오랫동안 싸웠고, 베트남은 임시로 남과 북의 독립국가로 나뉘었다. 1954년: 10월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봉기는 제4공화국을 붕괴시켰다. 1961년: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프랑스 식민지는 독립을 달성하였다. 1962년: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헌법개정이 국민투표를 통과되어 1965년 드골은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1968년: 5월에 대학생들의 소요가 공장으로 확산되었고, 5월말에는 급진파들이 제5공화국의 타도를 표명하기에 이르렀으며, 국민투표에 의한 헌법 수정안이 부결되면 사임하겠다고 천명하였다. 1969년: 4월 27일에 헌법 수정안의 부결되자 그날 밤으로 드골은 집무실을 떠났고, 70년 그는 사망하였다. 1969년: 대통령에 선출된 퐁피두는 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였고, 1974년 퐁피두가 사망하자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그는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의 미테랑이 당선되었으며, 의회선거에서도 사회당은 과반수를 훨씬 넘는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들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했다. 1988년 미테랑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라크가 사회당의 조스팽을 누르고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7년: 5월 총선에서 좌파연합이 승리하여 제5공화국 들어 세 번째 동거 정부가 탄생하였고, 좌파로 기운 민심을 확인한 시라크는 사회당 당수인 조스팽을 총리로 지명하였고 조스팽은 사회, 공산, 녹색당 등 좌파연합 하여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우파 대통령과 좌파 총리가 한 이불 속에 사는 '꼬 아비타시옹'(co-habitation 동거) 체제가 시작되었다. <훈장을 목에 걸은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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