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만 되면 씁쓰레해지는 독립투사 쟁탈전
해마다 3.1절만 되면 기분이 씁쓰레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경주시(慶州市) 외동읍(外東邑) 출신인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의사(義士)를 울산시(蔚山市)에서 출생한 독립투사(獨立鬪士)로 굳혀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녹동리(鹿洞里) 파일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박상진(朴尙鎭) 의사는 분명히 경주시(慶州市) 외동읍 녹동리(鹿洞里)에서 출생한 외동읍(外東邑) 출신 독립투사였다. 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 기록에도 그의 출생지가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 당시의 월성군 외동면)으로 되어 있다고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관련기관의 확인결과에서도 박상진(朴尙鎭) 의사가 외동(外東) 출생이 확실하다고 증명하고 있다. 다만, 박상진 선생이 그분의 향리와 인접한 울산(蔚山)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셨기 때문에 울산에서도 기념비(記念碑)를 세우는 등 그를 기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울산시(蔚山市)에서는 박상진(朴尙鎭) 선생을 자기지역 사람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울산(蔚山) 중부도서관 북정공원에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동상과 추모비를 세웠고, 울산시(蔚山市) 북구 송정동에는 누구의 집인지는 몰라도 한 기와집을 지정하여 가옥 소유자가 4대째 상속되어 온 자기 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도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생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울산시가 오래전부터 수십억 원의 예산을 들여 생가(生家) 복원사업을 벌인 끝에 오는 4월 완공을 앞두고 벌써부터 각종 언론에 요란스럽게 홍보되고 있다.
뭐가 뭔지 혼란스럽기 이를데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경주시(慶州市)나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아무런 대응이나 의사표시가 없는 것 같다. 박 의사가 울산에서 출생한 것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라도 증언해 줬으면 하는데 일체의 언급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경주사회가 지역출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이처럼 무관심한 사이에 출생지가 외동읍인 박상진 의사는 울산(蔚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둔갑돼 버렸고, 외동읍 녹동리(鹿洞里) 생가 터는 밭으로 방치되어 있으며, 내남면(內南面) 노곡리에 터 잡은 묘지는 경주시민들에게는 그저 잊혀진 역사로 방치돼 있다.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독립투사가 출신지역이 경주든, 울산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마는 울산시민(蔚山市民)들의 일부가 경주출신인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자신들의 지역출신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치술령의 망부석을 두고 자기 지역의 것이 진짜이고, 경주시(慶州市) 외동읍(外東邑) 지역에 있는 것은 위석(僞石)이라는 주장을 제기한 바도 있어 씁쓸한 기분이 들기만 한다.
고헌 박상진 의사
너무나 답답하여 필자가 조사한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박상진(朴尙鎭) 의사는 1884년 음력 12월7일 경북 경주시(慶州市) 외동읍(外東邑) 녹동리 469번지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박 의사의 조부는 박용복으로서 당시 과거등과를 목표로 경북 경주시(慶州市) 외동읍(外東邑) 녹동리에 이주하여 온 이후 박 의사의 생부이며, 당시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박시규(朴時奎), 그리고 백부이자 양아버지로서 당시 교리(校理) 벼슬을 지낸 박시용(朴時龍)과 함께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이홍식 편저 ‘지문각’에서 간행한 국사대사전 526페이지 박상진 란에도 출생지가 바로 경북으로 명기되어 있다. 이 것만으로도 박상진(朴尙鎭) 의사는 경주시(慶州市) 외동읍(外東邑) 사람이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참고사실을 소개하면, 1989년 6월 10일 경주군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경주군사(慶州郡史)에 의하면 박 의사는 그의 동지 우재룡(禹在龍)과 함께 당시의 경주군(慶州郡) 외동면(外東面) 석계리(石溪里)에서 거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녹동리(鹿洞里)와 석계리(石溪里)가 같이 연접해 있어 부락 경계선 정도에 거주하여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도(道)를 달리하는 경상남도(지금의 울산광역시)가 아님은 마찬가지다.
각설하고, 박 의사의 일생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박 의사께서는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세 되던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당시 서울 평리원 판사로 있던 허위 문하에서 수학하고, 1904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여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였고, 평양법원(平壤法院)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이후 박 의사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체결이란 비분을 맞게 되면서 국내에서 일어나는 의병활동을 돕기 위해 청국(淸國)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영해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사와 지의를 맺었다.
박 의사는 또 그의 스승인 허위(許蔿)가 1910년 임진강(臨陣江) 유역에서 전개한 독립전쟁에서 패배 순직하심에도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을 때 박 의사가 현장의 시신을 인수하여 허위선생의 고향에다 장례를 치르고, 장례비도 그의 사비로 부담했다.
또한 자신의 천석(千石)이나 되는 재산을 그의 종 처남인 경주시(慶州市) 교동 최준에게 맡기고, 만주로 달려가 독립군 양성의 전신인 신홍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장차 조선인의 우수한 무관양성을 목적으로 중국혁명당 수령 손문(孫文)의 승낙을 얻어 황포군관학교에다 한인특별부를 설치하도록 하여 우수한 독립투사를 배출케 하였다.
또한 중국(中國) 동삼성 성장인 장작림의 협조를 얻어 군사기지 사용을 허락 받아 김좌진, 노백련, 홍범도 장군 등에게 그 지역을 위임하는 한편 종래 의병과 만주(滿洲) 이주민을 소집 훈련시키도록 하여 독립군의 모체를 이루었다.
이후 1912년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한 후 1915년 1월 안일암에서 조선국권 회복단을 결성하였고, 그해 7월 풍기광복단의 의사와 합작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였다.
박 의사는 여기에서 총사령(總司令)으로 취임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와 만주 각지의 조직을 가지는 등 1910년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케 하였다.
박 의사는 광복회(光復會) 조직이후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동지 우재룡, 권영만을 시켜서 경주, 영일, 영덕 3개 군에서 징수한 세금 전액을 탈취하였고, 또한 동지 채기중 등을 시켜서 칠곡군의 악질지주인 친일파(親日派) '장승원'을 처단케 하는 등 몇 번에 걸쳐 친일부호들을 처단하였다. 박 의사가 처단한 '장승원'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말기 때는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자심했었다. 당시 경북관찰사(慶北觀察使 ; 지금의 경북 도지사) 자리가 공정가격으로 20만 냥, 당시 쌀 2천 가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고 한다.
1905년에 이 관찰사(觀察使) 자리를 사기 위해 의정부(議政府) 참찬(參纂)인 ‘허위(許蔿)’를 찾아간 ‘장승원’이 돈 받기를 거절하는 ‘허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안 받겠다 하시니 나라에 필요한 때에 말씀하십시오. 득달같이 바치러 오겠습니다”.
‘허위(許蔿)’란 분은 앞에서 기술한 대로 바로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스승이었다. 이때 스승인 ‘허위(許蔿)’와 박상진 의사는 장승원이 돈을 줄 경우 나중에 독립운동자금(獨立運動資金)으로 쓸 것을 계획하고 '장승원'을 관찰사에 임용되도록 협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위(許蔿)’의 주선으로 경북관찰사(慶北觀察使)를 하게 된 ‘장승원’은 『매천야록』이란 책에 “탐학으로 누거만을 쌓았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가렴주구(苛斂誅求)만을 탐했다.
그는 또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구타해서 즉사케 하는 등 갖은 비행(非行)을 저지른 인물로도 유명했었다. 그리고 '허위' 등이 정작 그와 약속했던 군자금(軍資金)을 요구했을 때는 이를 일본경찰(日本警察)에 밀고하여 당초의 약속을 헌신짝 같이 버렸다.
이때의 일로 박상진(朴尙鎭) 의사에게는 원한 맺힌 친일지주(親日地主)가 되었고, 결국 ‘장승원’은 박상진(朴尙鎭) 의사에 의해 처단되고 말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이 되고 미군정(美軍政)이 시행될 때 수도경찰청장(首都警察廳長)에 임명된 사람이 바로 이 ‘장승원’의 셋째 아들 ‘장택상’이었다.
미군정당국(美軍政當局)과 초기 우리 정부인사들의 일제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긴 일제의 경찰(警察)이나 관리(官吏) 출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대였으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택상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각하께서 새 나라의 경찰권(警察權)을 장악했으니 독립운동자에게도 잘 해야 안되겠습니까?” 국일관 연회에서 누가 장택상에게 말하자 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수 없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자에게 살해되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잘 하겠느냔 말이오”.
박상진(朴尙鎭) 의사 사망 이후 그의 집안은 그 당시 시가 6, 7만원에 상당하는 900두락(18만평)의 농토를 독립운동자금(獨立運動資金)으로 전부 쓰다보니 급격하게 몰락해 버렸다.
친일파(親日派)는 해방 이후 모두 흥하고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는 완전히 집안이 거덜났다는 말은 이때부터 증명되기 시작했다.
출천의 효자인 박 의사는 1917년 12월 20일 자신의 생모께서 별세했다는 연락을 받고, 마지막 자식의 도리나마 다하고자 경주시(慶州市) 외동읍(外東邑) 녹동리에 본집을 찾았다가 왜경에 체포되었다.
그 뒤 4년 동안의 예심 끝에 1921년 8월 11일 향년 38세의 나이로 대구교도소(大邱矯導所)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순국하였으며, 묘소는 현재 경주시(慶州市) 내남면(內南面) 노곡2리에 현존하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외동읍(外東邑) 녹동리(鹿洞里)에서 마석산 줄기의 제내리(堤內里) ‘사일고개’를 넘어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일제당국(日帝當局)으로부터 인계받은 시신(屍身)을 안장한 것이다.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생가(生家)가 실제로 울산시(蔚山市) 송정동일 경우 울산시에 소재하는 무룡산과 동화산, 치술령 서남기슭과 동대산(東大山) 등의 명당(明堂)자리를 모두 지나쳐 경상남도의 경계선을 넘고, 경상북도 내륙 깊숙이 자리한 그 멀고 낯선 곳까지 묘소를 정할 이유가 없는 곳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울산(蔚山) 지역에서는 박 의사의 재종제(再從弟) 박용진 옹의 구술증언 하나만으로 박 의사를 자신들 고장 출신으로 확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고자 추모비(追慕碑)와 동상(銅像)을 건립했으며,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대대적인 복권운동을 벌여왔다.
1960년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천안에도 광복회 기공비가 건립된 바 있다. 의사에 대한 복권운동은 치하하여 마지 않으나, 그의 출신지역까지 왜곡하는 듯하여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울산 중부도서관 북정공원에 있는 박상진 의사의 동상과 추모비
지난 1995년 경상북도의회에서 증언된 회의록에 의하면 ‘대한민국 국민운동 공훈사’, ‘일본고등경찰 비사’ 179항, ‘경성배심원판결문’, 외동읍(外東邑) 사무소에 비치된 호적부, 경주(慶州) 향토지인 ‘동경속지’, ‘진문각’에서 간행한 국사대사전 562페이지 등의 기록에서 박 의사의 출생지와 성장지가 외동읍(外東邑)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울산(蔚山) 시민들은 박 의사가 마치 울산(蔚山) 출신인 것처럼 왜곡시키고 있음은 무슨 이유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또한 1995년 8월11일 '경남매일'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당시의 경상남도 울산시 송정동 355번지 소재 지방문화재 211호로 지정된 박 의사의 한옥 생가(生家)는 당시 등기부상 소유자인 부산시 남구 우암동 55-1번지 거주 박진형씨가 “이 집은 우리 가문에서 4대째 상속되어 오고 있는 집으로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생가(生家)가 아니라”며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취소 행정심판을 청구했다는 내용이 보도된 바 있는데 이 소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알 길이 없다.
또한 현재의 소유주가 그 이후 울산시 당국의 박 의사 생가 복원에 반대하여 몇 년째 법정공방을 벌여 왔는데 그 사연의 진실 또한 무엇인지도 오리무중이다.
울산시가 박상진 의사의 생가라고 주장하는 집(울산시 송정동)
※ 박상진 의사의 스승인 허위(許蔿, 1854년 4월 1일 ~ 1908년 10월 21일)는 호를 왕산(旺山)이라 하며,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경상북도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도 경상도에서 이기찬, 이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그를 등용하여 성균관 등에 기용했는데, 1904년에는 사법 기관인 평리원의 재판장 서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격문 살포로 저항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또 다시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전국에 흩어진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을 노렸을 때 의병 연합군인 13도창의군(총대장 이인영)의 진동창의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허위의 부대는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였지만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하여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부르짖는 강경파로 활동하면서, 한일 강제병합 음모를 진행 중이던 일본을 괴롭혔다.
허위는 4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의 맏형은 항쟁에 군자금을 댔고, 셋째형 허겸은 의병투쟁을 함께 했다. 일제의 국권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남 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허위의 조카인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이로 인해 자손들이 해외에 뿔뿔이 흩어졌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 허위의 후손들 예가 종종 인용되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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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실과 역사를 왜곡 하는것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네요 역사를 중시하는 경주시는 도대체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고요정말 안타깝네요
강의원! 울산서 살다 보니 이제 울산사람이 되었나? 첨부한 자료는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한 검증된 자료이네! 고헌선생의 선대는 울산이 세거지였으나, 녹동리로 이거하여 살면서 고헌선생을 낳으셨다는 명확한 사실이네! 그리고 우리의 고향출신인 선생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순국하시고 그 사실이 입증되어 건국훈장까지 추서된 역사적 일로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나? 강의원! 울산서 오래 살다보니 이젠 고향도 울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지 울산 출신 인사들이 당치도 않는 사실을 왜곡 하는 것에 분개하는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