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시로군]

영화는 영화일 뿐?!

 

스파르타식

  얼마 전, 영화 <300>을 보다가 나는 엉뚱하게도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어구를 떠올렸다. 한때 우리나라에선 스파르타식 교육이 유행이었고, 나도 그 약한 맛이나마 보고 자란 세대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교육은 스파르타식이 아니었던 적이 별로 없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0>에 등장하는 왕을 중심으로 한 300명의 정예 병사들은 스파르타식 교육의 훌륭한 결과물로서, 그들이야말로 괴물과 거인, 불구로 구성된 야만국 페르시아의 무지막지한 공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순수 혈통의 순수 주체임을 영화는 역설하고 있었다. 

  물론 <300>은 스펙타클을 앞세운 블록버스터 액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렇기에 (영화의 의도에 맞게) 단순히 즐기면 될 일이지 어떤 정치적 관점을 앞세워 영화를 재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는 반론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영화의 모든 장면과 대사와 사건들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순수 주체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데 바쳐져 있는 통에, 나는 아무리 해도 <300>을 그저 오락물로 볼 수가 없었다. <300>에서 정치성을 떼어놓고 그것이 발휘한 액션 미학의 성과만을 평가하라는 것은 생각하기를 멈추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00>의 이데올로기가 몇천년 전의 먼 나라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한국 땅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카르페 디엠,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배경은 우수한 소수 인재만을 선발하여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시킨 후, 명문 대학에 진학시키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이다. 전통과 명예, 규율, 그리고 우수함을 교육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이 소수 정예 명문고에서 학생들은 그들의 꿈과 낭만을 억압당한다. 심지어는 문학 수업마저도 시의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평가(계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학교는 대학 진학에 필요한 것만을 외우도록 하는 주입식 암기 교육의 메카인 셈이다. 그런데 이 학교에 새로 존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부임해 오면서 상황은 약간 달라진다. 키팅은 학생들에게 책을 찢어버리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잠시 머뭇거리지만, 이윽고 책을 찢어낸다. 그리고 찢어낸 빈 자리에 키팅 선생의 가르침을 담는다. 그의 가르침은 딱 한 마디,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이다. 이 어구는 이후 학생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영화 속에서 키팅은 교육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 나름의 신념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도록 한다.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책에 실린 강압적인 가르침을 찢어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도록 하며, 자작시를 짓게 하고, 책상 위에 올라 다른 시각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도록 한다. 일부 학생들이 ‘죽은 시인 협회Dead Poets Society’를 재조직하여 동굴에서 시 읽기 모임을 갖는 것은 키팅 선생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능동적인 응답이다[소사이어티Society는 ‘협회’로 번역되는 것이 온당하다. 의미심장하게도 소사이어티는 (클럽Club과 비교해) 상류 계층 사람들의 사교 모임을 가리킨다.] 학생들 각자는 키팅 선생의 가르침을 토대로 부모와 학교의 압력 때문에 미뤄두었던 스스로의 꿈과 낭만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돌진한다. 하지만 영화는 키팅의 시도의 장밋빛 측면을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시도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는 데 까지 나아간다.

어쩌면 키팅은 낭만주의적 혁명가다. 낭만주의는 그것이 아름다운 만큼 무모하다. 영화는 키팅의 교육법이 만능임을, 그가 책의 페이지를 찢어 낸 자리에 대신 채워넣은 구호, “카르페 디엠”이 만능임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현실의 계기들은 생각보다 공고하게 짜여져 있어서 거기에 ‘맹목적으로’ 반항하다가는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메멘토 모리

  이 영화에서 학생들이 저지른 잘못―그 결과 한 학생의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요약하는 주제가 뭔가를 묻는다면, 물론 “카르페 디엠”이 정답일 테지만, 그렇게 영화를 요약했을 때, 우리는 영화 속의 학생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중요한 건 “카르페 디엠”이라는 구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그 가르침을 일단 받아들인 후부터는 그것을 마치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양 휘둘러대며, 자신들의 욕망과 반항심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이 “카르페 디엠”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키팅 선생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동굴의 모임에 여자들을 데리고 올 때, 연극을 위해 거짓 편지를 쓸 때, 학교 신문에 치기어린 장난 기사를 실을 때, 그들은 분명히 일탈로 인한 일시적인 해방감을 위해, “카르페 디엠”을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해방감이란 아무리 일시적일지라도, 너무나 달콤한 것이라 거부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만을 추구한 결과가 어땠는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카르페 디엠”의 철학이 어떤 맥락에서 비롯되었는가를, 그 배후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의 철학이 담겨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가 없는 “카르페 디엠”은 맹목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카르페 디엠”이 철학이 아닌 앵무새의 구호가 될 때,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좋은 핑계거리가 되고 만다.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현실 원칙’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죽음’일진대, 그러므로 우리는 “메멘토 모리”의 철학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다.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지 말고, 그것의 면면을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카르페 디엠”의 삶의 방식은 “메멘토 모리”의 철학이 바탕에 깔렸을 때만이 가능하다. 키팅이 말하듯, "오직 죽은 사람만이 협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삶이다

  영화는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던 학생 토드(에단 호크 분)가 분연히 책상 위로 올라서며 키팅을 “캡틴, 오 나의 캡틴”이라고 부르면서 끝난다. 일말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열린 결말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관객에게 선사하는 진한 감동에도 불구,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불 보듯 뻔하다. 키팅 선생은 학교에서 물러날 것이고, 학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애초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한층 더 강화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 역시 그래왔다. 우리는 재미있게 공부 하는 법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소수의 선생들과 학교들이 대안적 교육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의 내용은 실상 ‘재미있는 암기법’에 관한 것이고, 실제 ‘생각하는 법’을 알려주는 교육은 이 땅에 존재한 적이 거의 없다. 세기가 바뀌면서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교육이 등장하는 듯도 했으나, 그것의 진짜 강조점은 ‘국가 경쟁력’이었다. 스파르타식 교육 과정을 훌륭히 통과한, 정예로 양성된 소수에게 모든 기회와 연구비를 몰아줌으로써 미국과 일본을 능가하는 첨단 기술(혹은 문화상품)을 만들어 낸다는 목표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인정받는 창의성이었던 것이다. <BK21>이니 뭐니 하는 각종 사업과 기획들을 보며 나는 스파르타식 교육이 대학에까지 확대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본이 그 힘을 앞세워 스파르타식 교육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 열중하는 이 마당에 “메멘토 모리”니 “카르페 디엠”이니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자고 말한다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를 소비하는(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맥락 없이 “카르페 디엠”이란 주제로 요약되고(그러니 학교와 기성세대가 나쁘다는 식으로), <300>의 경우, 주제를 묻는 행위 자체가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일면적, 무비판적 태도는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과는 관계없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사고방식이 비롯된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영화는 시험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외국의 고전들과 현대 문학이, 기타 여러 미술과 음악들이, 예술 작품들이, 문화 전반의 것들이 소외된다. 예술은 우리의 실제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들만의 유희로 취급받는다. 남는 건 오직 화려하게 포장된 문화 상품들 뿐.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상영된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것이 개봉된 이래, 대안적 교육 내용을 담은 영화로 여겨져 왔으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키팅 선생은 대안적 교육의 실천자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죽은 시인의 사회>와 키팅 선생에게 부여된 그러한 ‘만병통치약적 이미지’야말로 우리 교육의 현실적 대안에 관한 논의를 일면화하고 추상화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 아니었을까? 17년 간 무엇이 달라졌는가? “내 인생의 영화”를 운운하며, 영화에 감동받았다는 (현직 교사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 정말이지, 영화는 영화일 뿐이란 말인가? 영화 속의 토드처럼, 긴긴 소심증을 딛고 높은 곳에 올라서서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과연 불가능하단 말인가? 영화를, 시를, 소설을, 음악을, 누군가의 강요로 시험에 나온다고 해서, 억지로 보고 읽고 듣고, 그러고 나선 주제만 달랑 외우고 안심하는 게 아니라, ‘죽은 시인 협회’의 개회사에서 낭송되는 소로우의 말처럼, 우리 자신의 “삶의 정수”와 관련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사려 깊게” 사는 건 과연 불가능하단 말인가?

다음의 사이트에 싣게 된 영화평입니다.

웹진 에듀컬처 http://webzine.ieduculture.org/

 

[강산]

아주 멋진 평입니다. 읽고, 보고, 감동을 받았다면 달라져야하는데 다시 제자리걸음이니...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