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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지기 손상익입니다.
우리 카페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 특히 카페지기 손상익이
'강화화승총'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경위를 관련 자료와 사진,
신문기사 등으로 보완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 YCT(인천황해문화행동대)의 출범
손상익 간사는 2009년 가을, 인천에서 출근하고 인천으로
귀가했던 '서울생활 28년'을 마감하고 가족이 거주하는
인천에 정착하여 '향토 문화기업'을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기자로 혹은 문화평론가로, 문화이론 대학출강,
또 문화콘텐츠 기획자로 벤처기업을 경영했던 경험 등
서울에서 쌓은 모든 문화적 내공과 경력들을 한 군데 모아
새로 설립하는 '문화기업'에 쏟아부으려 했습니다.
몇 달간의 준비과정을 끝내고 2010년 1월, 인천시 간석동에 사무실을
얻고 인천과 강화지역 문화콘텐츠를 기획, 생산하는 문화기업
(주)월인천강(越仁川疆)을 설립하여 대표이사로 취임했습니다.
(주)월인천강은 인천, 강화지역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개발하기
위해 인천지역의 중견 사학자와 문화인들을 전문위원으로 초치하여
2010년 8월13일 '인천황해문화행동대'(YCT)를 조직, 손상익이
간사직책을 맡아 본격적인 문화콘텐츠 개발의 시동을 걸었습니다.
▲ YCT의 2010년 9월 회의, 전문위원들 모습.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상익 간사, 박창규감독(하늘소리 대표), 이기문위원장(인천지방 변호사회
회장), 박혜경씨(예총 무용협회 인천지부장), 김진만(현대해양레저 사장),
삐수신관장(인천 정무문대표, 차이나타운 운영진)
문화콘텐츠는 주로 손상익이 기획하고 집필, 여타 전문위원들은
개발된 콘텐츠를 자신의 예술장르와 접목하여 창작품을 만들어내고
공연무대에 올리는 등의 실험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문화콘텐츠가 인천의 '3차례 개항'을 주제로 한
종합상황극 시나리오 '인천오디세이아'를 비롯, 인천과 강화지역
문화유적 관광지를 새로운 문화적 관점에서 해설한 '가이드 북'의
집필 및 편찬이었습니다.
손상익이 기획하여 집필한 '인천과 강화 가이드북' 두 문화콘텐츠는
인천관광공사가 전국의 여행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관광상품 공모전에
출품한 결과, 80여개 응모작 가운데 최고상인 '대상'과 그 아래인
'우수상'을 차지하여 500만원의 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때 개발된 '강화도 유적' 문화콘텐츠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를 지켰던 백두산 범포수의 '강화화승총'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 2011년 4월 5일의 공모전 시상식. 왼쪽에서 4번째가 손상익 간사.
굵직한 상 두 개를 독식하였던 탓에, 장려상 등을 탄 다른
여행사 분들에게는 참 미안했습니다.
이때부터 손상익 간사의 '강화화승총'에 대한 관심은
날로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특히, 2010년 3월에 한 재일동포 독지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화승총 총목에는 "1901년 강화도의 무기고에 보관됐다" 는
먹글씨가 적혀있어서, 그 화승총이 개화기 시절 강화도의 조선군이
무장한 것으로 확인된 '유일한 화승총'임을 알게 됐습니다.
손상익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그 화승총에 "강화화승총"이란
이름을 붙여서 그 총에 관한 애정을 더욱 키워갔습니다.
아래의 신문기사가 바로 그 강화화승총에 관련된 신문기사입니다.
* 기사출처 : 천지일보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7324
■ 강화화승총과 역사소설 '총의 울음'의 집필
강화화승총에 관한 카페지기의 관심이 컸던 만큼 남 모를 고민도 함께
쌓여 갔습니다. 그것은 곧 '문화콘텐츠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강화화승총에 관하여 아무리 훌륭한 관광문화 콘텐츠(유적지 해설서 등)를
개발한다 한들, 국민과 대중에게 그 문화적 가치를 널리 인식시키는
것에는 그리 큰 효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화화승총이 등장하는 문학소설 창작이 아니고서는 '강화화승총'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이 서면서 카페지기는
독하게 마음먹고 "강화화승총이 전면에 등장하는 역사소설을 쓰리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러데... 의욕만 앞섰던 소설집필의 과정의 마치 가시밭길 같았습니다.
카페지기 손상익은 1980년 초반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삼십 년 가까이
글을 쓰는 직업에 종사했고 게다가 문화이론서를 10여 권이나 집필했지만,
역시 처음 써보는 소설이란 장르는 까따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소설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을 하던 중
2009년 가을에 그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손상익이 인천에서 문화기업을 설립한다는 뜻을 굳혔을 무렵이었습니다.
신미양요(1871년 6월)때 미국 종군사진사가 찍은 조선군 포로사진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곤 마치 감전된 것처럼 얼어붙었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과 의회가 정식으로 승인하고 의결했던 국제전쟁 신미양요.
당시 미군은 5척의 전함에 최첨단 총포를 싣고 정예 해병대와 해군 전투병
1,400명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상륙, 한미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군에
맞선 조선군의 주력은 임진왜란때 왜군이 들고왔던 그 화승총으로 무장한,
맨몸이나 다름없었던 백두산 범포수였습니다. 조선군은 강화도 광성보를 최후의
보루삼아 어재연장군의 지휘로 미 해병대와 피와 살과 뼈가 튀는 한낮의 백병전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무장의 수준에서 미군과는 원체 차이가 컸던 만큼,
백두산 범포수들은 전원이 장렬하게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살아서 눈을 뜨고있는
다음에야 한 치의 조선 땅도 침략군 미군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오기였습니다.
화승총을 들었던 그 백두산 범포수의 투혼에 기가질린 미군은 급기야 조선을
도망치듯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 '신미양요'입니다.
<사진; copywriter@Felice Beato>
위의 사진은 당시 광성보전투에서 경상을 입고 실신하여 미군의 포로로 잡혔던
조선군 포로입니다. 1871년 6월13일, 포로를 인수하러 온 영종진 소속의
교졸(갓 쓴 분)이 백두산 범포수들과 면담을 하는 모습입니다.
카페지기는 사진의 앞 부분 왼쪽에서 무릎을 꿇고있는 젊은 범포수에게
온통 관심이 쏠렸습니다. 저 분은 포로석방이라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도 왜 저런
슬픈 표정을 지어야만 했을까... 저 분의 안타까운 심경을 표현하고 싶어,
급기야 카페지기가 붓을 집어들고 소설을 쓰리라 작정하게 된 것입니다.
손상익은 그 분에게 '정복길'이란 이름을 지어드렸고, 그 분이 미군을 향해
쏘았던 강화화승총의 강렬했던 총성, 그 총성은 차라리 '울음'이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5년 간의 집필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2014년 10월, 상하권으로
발행한 소설책.
- 그 소설의 제목이 '총의 울음'으로 정해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출범, 카페의 개설
소설 집필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던 2011년 봄부터,
카페지기에게는 또 하나의 가능성, 즉 "강화화승총을 복원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가슴 밑바닥에서 치받고 올라왔습니다.
불과 140여년 전 강화도에서 산화한 백두산 범포수의 화승총에서는
'강렬한 나라사랑 아우라(Aura)'가 피어오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강화화승총에 담긴 의의를 공유하고 강화화승총 복원을 위해
함께 움직일 동지가 절실히 필요해 졌습니다.
화승총복원 작업을 비롯하여 화승총과 관련된 모든 문화적
콘텐츠개발과 의미의 공감, 확산작업 등은 결코 손상익의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2011년 여름부터 콘텐츠를 준비하고 모았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10월, 드디어 다음(Daum) 카페 '강화화승총 동호인회'를 개설했습니다.
그로부터 카페지기는 '화승총 관련 콘텐츠' 개발에 주력했고
동호인회를 구성하고 강화화승총을 복원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 참고로 현재까지 진행된 강화화승총 복원의 진행과정은
우리 카페 홈페이지의 왼쪽 메뉴 상단의 '화승총복원 프로젝트'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시면 그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1) 2011년 1차 복원작업 스케쥴 ;
http://cafe.daum.net/matchlock/HCjn/1
(2) 왜 하필이면 강화화승총인가? - 카페지기 손상익의 에세이 ;
http://cafe.daum.net/matchlock/HCjn/2
(3) 2013년 2차 복원작업 및 강화화승총 활용방안;
http://cafe.daum.net/matchlock/HCjn/4
- 카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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