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로마서 되게 하라: 선교 신학적 시각에서 보는 로마서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논평
노 윤 식
(성결대학교)
오늘 발제하여 주신 방동섭 교수는 기존의 개신교 신학의 로마서 연구가 주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에 따라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비판하고, 선교 신학적 관점에서 로마서를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구자는 교리 서신으로 해석되어 왔던 로마서를 본래의 선교 서신으로 바로 해석하여 “로마서를 로마서 되게 하라”고 본 논문에서 제안적 명령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제안의 근거로 연구자는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의 선교적 상황과 서신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자기 정체성 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던 사회, 역사적인 상황을 기독교가 유대적 특성을 넘어 소아시아와 유럽에 하나님의 공동체를 건설해 갔던 선교적 상황이었음을 부각시키고, 바울의 자기 정체성의 면에서도 바울이 주후 1세기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일평생을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해 선교 사역했던 선교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덴마크의 요하네스 멍크(Johannes Munck)와 스웨덴 출신의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연구를 적절하게 인용하여, 로마서가 어거스틴과 루터 등 서방교회의 우울한 양심에 근거한 신학 경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바울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도덕적 고통의 해결을 위해 “이신칭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선교적인 목적으로 이를 주장하였음을 시원하게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럿셀(W. B. Russel III), 존 머레이(John Murray), 던(James Dunn) 그리고 쉬르마허(Thomas Schirmacher) 등의 주장을 근거로 로마서는 교리적 구조가 아니라 선교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로마서의 서론인 1:1-15절은 선교적 서론으로서,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과 이의 실천 방안이 포함되어 있는데, 곧, 이방인의 “믿음의 순종”을 이끌어내려는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사도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로마서의 본론인 1:16-15:13절은 바울의 선교적 메시지로서, 복음의 정체성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제시하여 미래 선교 사역의 내용과 방향성을 인식시키는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1:16-17)가 된다는 것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20), 하나님의 의의 근거(롬3:21-5:21), 하나님의 의의 수여(6:1-8:39), 하나님의 의의 섭리와 주권(9:1-11:36),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실천(12:1-15:13)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로마서 결론 부분인 15:14-16:27절 역시 서론에서 언급된 선교적 사명에 대하여 평행적으로 바울이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로마서 전체 구조가 철저하게 선교적임을 방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방교수는 결론적으로 로마서가 주후 1세기 선교적 상황 속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제시하려고 했던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바울의 선교적 서신이기 때문에, 로마서를 선교적 관점에서 연구해야 함을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다.
연구자는 이 논문을 통하여 복음주의 선교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교 신학자들에게 몇 가지 점에서 도전을 주고 있다.
첫째, 본 논문은 선교학의 정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고 있다. 혹자는 선교학은 교리나 성서 연구가들이 정립해 놓은 주제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론을 연구하는 전달학이지 교리나 성서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은 전달 내용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선교학은 전달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리적인 것이나 성서적인 연구는 성서 신학자나 조직신학자에게 일임하고 선교신학자들은 복음 전달 방법론에 전념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이러한 편견에 대하여 방향 수정이 필요함을 적절하게 지적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방교수는 로마서를 교리신학적 틀에서 해방시켜 그 본래적 의미인 선교 신학적 서신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학은 성서와 교리를 선교지향적인 교리와 성서연구로 진행되도록 “선교학적 관점”(missional perspectives)을 제시할 뿐 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선교적 관점”에서 직접 교리와 성서를 재해석하는 일종의 “선교 해석학”(a missionary hermeneutics)이 되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즉, 선교학은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이 발견해낸 주제들을 전달하는 방법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직접 신학의 내용을 종교문화와 상황에서 전달하기 위해 "선교적 관점"(Missional Perspective)으로 재해석하여 신학적 내용을 토착화시키고 상황화시키는 연구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본 논문은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방향성에 대하여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함으로써 도전을 주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은 그 역사적 전통과 근본을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특히 이신칭의 사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은 지난 16세기 이후 20세기까지 개인의 죄책과 부패성에 대하여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칭의와 중생의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방교수는 스텐달의 주장을 받아들여, 로마서의 이신칭의 해석이 “서방교회의 우울한 양심에 근거한 어거스틴이나 루터의 도덕적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신학 경향”과 연결되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고 보여진다. 그는 이신칭의 교리가 개인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선교 신학적 차원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폭넓게 주장하고 있다. 즉, 로마서는 바울 개인이 죄책에서 고민하고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방민족들을 영적인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보다 넓고 큰 구원의 계획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교수의 주장은 복음주의 신학의 경향성이 극도로 개인 경건 근본주의로 나아 갈려고 하는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된다. 복음주의 신학은 개인 경건의 차원에서 머무르기 보다, 선교적 차원에서 복음주의 선교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셋째, 연구자는 로마서 연구에서 “믿음의 순종”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여 바울의 선교 목적을 설명하였는데, 이것 또한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목적과 내용에 대하여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선교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고 개종시키는 것으로 보아왔다. 그런데, 방교수는 “믿음의 순종”을 해석함에 있어서, 믿음과 순종을 동격으로 보는 것과 순종하다보면 믿게 된다는 것보다는, 순종이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견해를 바울의 본래 의도로 해석하고 있다. 즉, 믿음과 순종은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 선교 신학의 내용에서 기존의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였던 배타적인 관점에서 매우 진일보한 것으로서, 믿음과 순종이 결코 배타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으로만”의 개인 경건적인 차원만을 강조하는 것에서, 믿음의 결과는 순종이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선교에 있어서 개인 구원 뿐 만 아니라, 사회 참여적인 봉사의 헌신도 복음주의 선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동양의 종교문화 상황에서 “순종하다보면 믿게된다”라는 해석도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참고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위에서 제시한 연구 논문의 복음주의 선교 신학에 대한 도전과 기여 외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용어의 선정에서 몇 가지 부주의함이 나타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을 카톨릭으로, 기독교를 개신교로, 복음의 세계화를 기독교의 세계화로 등 용어 사용에 세심함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글의 흐름상 오해의 소지가 보이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본 논문의 논지가 로마서에 대한 선교 신학적 해석이기에 그에 걸 맞는 구체적인 로마서 본문에 대한 선교 신학적 해석을 기대하였는데, 그 내용상 너무 방법론에만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로마서가 그 구조상 선교적 서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으나, 그 내용이 되는 본론(롬1:16-15:13)부분이 서론과 결론 부분에 비해 너무 약화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로마서가 진정으로 선교적 서신이라면, 선교적 주제인 문화 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 2:6-7절의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구원”문제나 로마서 9-11장의 “이스라엘의 구원”문제 등이 다루어졌으면 논문이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사료된다. 그리고 지난 9월 30일 “신학과 교회성장”이라는 주제로 열린 아시아신학회(ATA) 동북아 제 2회 국제 학술 대회에서 타카노리 고바야시 박사가 “교회 성장과 이신칭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논문에서 언급했던, 종교 개혁의 핵심인 로마서 3:22-25절의 “그리스도의 믿음“(faith in Jesus Christ) 문제 등도 심도 있게 다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신자의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믿음을 강조하여 이를 따르는 헌신을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로마서를 선교 신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많은 저술과 논문들을 소개했는데, 이것이 소개로만 끝난 감이 없지 않다. 스텐달이나 러셀, 던, 쉬르마허 외에도 스티브 모셀(Steve Mosher)이나 맥클렁(Grant McClung) 등의 연구도 소개되었으면 더욱 깊이 있는 논문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지만, 이것은 동료 선교신학자들의 남은 몫이라 생각하고 좋은 논문을 발표하신 방교수께 치하를 드리며 논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