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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태조(왕건) + 신명왕태후 劉氏 → 제4대 광종 + 대목왕후 황보씨 → 제5대 경종 흥방공주(광종의 배다른 형제) + 신정왕태후 皇甫氏 → 대목왕후 + 경덕왕후 柳氏 → 원장태자 + 흥방공주 → 대명궁 부인 유씨
제5대 경종 + 대명궁부인 유씨 |
7. 성의 보급과 확산
①왕실 → 귀족 → 평민 → 천민
о처음엔 왕실만 성을 사용하였다. 6세기 말 신라시대엔 귀족도 중국식 성씨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말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천민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은 성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②중앙 → 지방 귀족 → 일반인
о처음엔 중앙의 왕실과 귀족들이 성을 사용하였다. 통일 신라말엔 지방 호족이 성을 사용하였다. 서울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개성 호족들은 중국과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개성 호족인 왕건은 중국과 해상 무역을 활발히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성을 직수입하였다. 신라 6두품으로 중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도 중국에서 성을 직수입하였다. 그렇지않은 사람들은 신라 왕실이나 귀족들의 성을 모방하여 성을 만들어 사용였다.
③고려의 건국으로 생겨난 성씨들
о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였다. 개국 공신인 洪述, 白玉三, 能山은 처음엔 성이 없었다. 이들에게 태조 왕건은 성을 하사하였다. 홍유 → 洪儒, 백옥삼 → 裵玄慶, 능산 → 申崇謙, 복사귀 → 卜智謙
④지역 단위 성씨 분정(分定)
о태조 왕건은 개국공신에게 성을 하사하였을 뿐 아니라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들에게 각 출신지와 거주지별로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土姓=토착성)을 분정(分定=나누어줌)하였다. 따라서 지방행정단위(목,군현.향소부곡)에 따라 본관과 성이 주어졌다. 그 지역의 유력 인사는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안동 지역 유지에겐 안동 장씨와 안동 권씨 성등을 주었다. 상주 유지들에겐 상산 김씨등이 주어졌다. 그 전까지 사용하던 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성씨를 나누어 준 것이다 상주지역 유지가 받은 김씨와 경주 지역 유지가 받은 김씨는 김씨 성만 같지 혈통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о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군현 양민층까지 성이 보급되었다. 그러나 노비를 비롯한 천민들은 조선 중후기까지 여전히 성이 없었다. 16세기 전후 노비 비율이 전인구의 40-50%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조전 중기까지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까지 성이 없었다. 성이 없던 천민들도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 양민층으로 신분 상승과 조선말 신분제 폐지에 따라 성을 가질 수 있었다.
《상주 토착 성씨》 о土性 (5) : 김, 박, 周, 黃, 尹 - 고려 시대 상주를 대표하는 5가지 성. 상주 최고 유력 집단임을 알 수 있음 о來性 (4) : 高, 李, 荊, 羅 о賜姓 : 이, 옥성(1) = 林 о소속부곡 : 장천부곡 - 尹, 朴 о연산부곡 : 尹 о보광부곡 : 尹 о백원부곡 : о속현 -화령현 (6) = 임, 고, 방, 장, 전, 신 관제 부곡(임,고,전). 선은소(임, 전) -산양현(방,경,신,채), 보량부곡(진) -공성현(4) 성, 손, 장, 전 -평만부곡 (방,심,구) -안산부곡 (신)
※지방의 공직자(면서기급, 부역 동원, 공문서 수발등)들이 성과 본관을 받았으나 이 때 만들어진 성과 본관은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다. |
연도구분 |
전체 호수 |
유성 호수 |
성관수 |
1678년 |
2105 |
945(45%) |
225 |
1786년 |
2873 |
2493(87%) |
196 |
о법적 제도적으로 모든 사람이 성을 가지게 된 것은 갑오개혁(1894년) 신분제 폐지 이후이다. 물론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노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1950년 6.25까지 종이 있었다. 그러나 신분제 폐지로 노비제도가 없어짐으로써 천민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성을 가지게 된 것은 백여연 전 부터라고 할 수 있다.
о조선 시대 양반집 노비 문서에 나타난 노비 이름 : 非介德, 東介, 장대, 막지, 달구지, 어둔이, 떡쇠등등. 집안 살림하는 종(점막이, 말랑이, 쫄랑이, 산술이, 막걸이, 떡걸이)과 집 밖에서 일하는 종의 구분이 있었다. /조선 시대 16-17세까지 호적(주민등록증)은 양반 호적에 노비 명단을 함께 기록하였다. 노비를 많이 소유한 양반 호적은 장부가 길었다. 이 문서를 보면 노비는 성이 없었다.
8. 이왕이면 다홍치마
①성 250개 -조선세종시록지리지(경상도지리지등등) : 우리 나라 국세 조사, 군현 마다 들판의 넓이, 대표적 산물, 사는 사람들의 성씨 조사. 이 때 총성씨 숫자는 250개 전후 였음.
②5대 성씨(김,이,박,최,정) : 51% /1-35위 성 : 90% / 1-90위 성 : 99%
③15세기 인구의 반이 무성(無姓). 오늘날 모두가 유성(有姓)
о인구의 절반이 성이 없다가 지금은 모두가 성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성씨의 숫자는 늘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새로 성을 만드는 사람들이 좋은 성을 골라서 성을 붙였기 때문이다.
о새로 성을 짓는 사람들은 이왕이면 명망있고 유력한 문중의 성으로 성을 지었다. 따라서 김씨성이 많아지게 되었다. 김씨가 많은 것은 김씨들이 자손을 많이 낳아서 다른 성씨보다 인구가 많아진 것이 아니다.
9. 본관은 우리 성씨의 특징
①성씨의 원형 - 중국에서 수용 성자(姓字)
о중국 성씨의 글자만 받아들임
о중국인이 우리 나라에 귀화하여 중국성을 그대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음. 따라서 중국인을 시조 할아버지로 둔 중국성씨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о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공신에서 성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중국 황제로부터 직접 성을 하사받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태조 왕건은 중국 성관제도를 참조하여 2500여개의 성 중에서 선택해서 성을 정하게 하였다.
②본관 : 시조의 거주지 → 지역 명칭
о성을 처음 가졌을 때 지역의 명칭. 촌, 향소부곡, 속현을 본관으로 정함
③왜 본관이 필요했나?
о같은 성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성은 같아도 완전히 다른 혈통임을 구별하기 위해서 본관을 만들었다.
10. 본관을 바꾸다.
①본관 수 : 15세기 4500개(세종실록지리지). 오늘날 1100개 감소하여 3400개
②왜 감소했나?
о무성층(無姓層)→ 유성화(有姓化) : 작은 고을 속현이 큰 고을에 소속하는 경우 작은 고을 본관 버리고 큰 고을의 본관을 쓰게됨. 그러므로 17세기엔 본관이 대폭 줄어들게됨
о유성층의 본관 바꾸기 : 조선 시대엔 양반 사회였고 문벌을 중시하였다.큰 고을이라도 뛰어난 인물 배출하지 못한 문중에서는 뛰어난 인물을 배출한 다른 큰 고을로 본관을 바꿈. 또 하층민이 양반화하면서 양반의 본관을 유력 양반의 본관을 사용하였다.
о행정구역의 통폐합 → 본관의 통폐합 : 조선 시대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면서 본관도 통폐합되어 본관의 숫자가 대폭 줄어듦
о본관 바꾸기의 결과 → 족보에 수록
-족보는 15세기 후반부터 발간되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대대적인 족보 발간이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는 안동 성화보(1784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안에서 족보를 처음 만든 것은 20세기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이다. 일제 침략기인 이 때 우리 성씨를 없앨 때 후손을 위해서 족보를 만들었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족보가 없으면 상놈이 된다는 의식으로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또 IMF 때 족보를 많이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족보를 보면 계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족보가 만들어졌지만 족보에 나와 있는 각 성씨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시조를 찾아보면 신라시대 시조가 100여명이 안된다. 고려 시대 시조가 수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족보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후손을 두었던 무수히 많은 조상들은 후손은 있지만 시조는 되지 못한 것이다. 그 분들도 아들 딸 낳고 이 땅에서 살았건만 족보에선 조상으로 대접 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관의 변화상-경상도의 경우〉
15세기 |
17세기 | |
성씨 |
본관지수 |
본관 |
조 |
15 |
창녕 |
전 |
17 |
천안,옥천 |
윤 |
16 |
파평,해평 |
오 |
11 |
해주,동복 |
백 |
11 |
수원 |
황 |
9 |
장수,창원,평해 |
송 |
9 |
은율,치성 |
11. 우리 성과 본관의 미래
①성과 본관은 우리 사회의 온갖 풍상을 겪으며 존립해 왔다. 앞으로도 온갖 풍상을 겪으며 흘러갈 것이다. 성과 본관은 역사적 산물이므로 지금까지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바뀌어져 왔고 앞으로도 필요에 의해 변한다. 필요하면 새로운 성씨가 만들어질 것이고 불필요하면 이미 있던 성씨 제도를 버리고 새롭게 성씨 제도가 생길 것이다. 오늘날은 성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고 성관제도가 완벽하게 체계화되어 있어 대대적인 변화는 없겠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는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에 의해 결정되어질 문제이다.
②‘앞으로 세상 어떻게 되겠느냐?’를 두고 현세대가 앞질러 걱정할 필요는 없다.
о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부계 혈통의 성씨제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이 앞으로도 부모 양계, 신라 초기와 같은 부모 양계 중 택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부모의 성을 복합하여 이름 앞에 붙이는 오늘의 현상이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일지 모른다. 김박00, 박이00등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지만 제도적으로 정착되어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성씨 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처음엔 미약하지만 큰 변화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성씨제도가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후손들이 결정할 문제이지 지금 현세대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о어느 시대나 기성 세대는 그 다음 세대를 걱정 어린 눈으로 보았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세상 살아갈지 모르겠다.’면서 걱정하였다. 우리 앞 세대는 우리 세대의 지나친 개방화를 걱정했지만 우리 세대는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다. 우리 세대는 우리 당대의 문제만 걱정하면 된다.
③결론
о혈연에 목매지 말아야 한다.
о성씨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혈연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혈성된 것이 아니다. 동성동본이라고 해도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수도 있다. 성과 본관은 역사적 산물이다. 더 이상의 변화가 용납될 수 없을 것같은 오늘날 성관제도도 지금까지 엄청난 변화와 변질을 거쳐 형성되었다. 그래서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오늘날에는 같은 조상을 둔 형제가 되고 동족이 되어 있다.
о이러함에도 우리는 성씨문제에 기반을 둔 완고한 혈연의식을 가지고 있다. 혈연의식이 동성간의 친목도모, 조상 숭배 차원에서 끝난다면 괜찮다. 그러나 집단적 이기심을 부추기고 이성적 논리적 판단까지 원천적으로 봉쇄하게 될 때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맹목적 무조건적 혈연 의식은 능력 본위의 민주 사회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선거철이 되면 각 성씨마다 화수회와 종친회를 열어 같은 성씨를 무조건 지지하게되는 일이 나타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흘러온 돌을 배척하고 본토박이를 우대해야한다.’는 의식이 작동하면 일반적인 상식과 논리가 설 땅이 사라져 버린다. 무법천지, 불공평 사회가 된다.
о건강한 민주 사회, 공평하고 정당한 능력 위주의 사회를 후손에게 물려주려면 혈연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о이제는 성씨제도를 혈연에 바탕을 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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