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 요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두 기둥은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조각가인 그의 아버지는
어느날 돌기둥을 보여 주면서 소크라테스에게 "얘야 이 돌기둥이 무엇으로 보이느냐?"라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글세요 저의 눈에는 그저 돌덩이로 보이는 데요."라고 대답하였다. 그후 조각가인 그의 아버지는
돌기둥을 조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후 그 돌덩어리는 아름 다운 여인의 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그 돌덩이 속에는 아름다운 여인은 숨어 있었단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물질보다는 생각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간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을 관념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관념을 당시 많은 청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의 산파술을 교훈 삼아 교육의 방법으로 받아 들였다.
산파는 본인이 직접 아이를 낳는 일은 아니지만 순산하도록 도와주는 (helper)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는 직접 아이를 대신하여 깨달을 수 없지만 도와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대화법, 산파법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아테네의 젊은 이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웃음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처는 세계에서 내놓라하는 세계3대 악처로 손꼽힌다.
이러한 악처와 함께 살던 소크라테스의 인품은 다음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어느날 소크라테스의 집에 많은 제자들이 찾아 왔다. 항상 많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집에서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늘 소크라테스의 처는 이 일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의 남편에게 항상 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집을 찾았다. 밤늦은 시간에 아내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소크라테스에서 소리 지르며 이 늦은 시간에 손님을 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소리를 버럭 버럭 질러댔다.
제자들과 소크라테스는 쥐죽은 듯이 듣기만 하였다.한참 시간이 지나서 그의 아내는 성이 들풀렸는지 소리 소리
지른뒤 그릇에 물을 담아 소크라테스의 얼굴에 부어 버렸다.
소크라테스의 얼굴에는 온통 물에 빠진 생쥐 모습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제자들이 기가막혀 너무한다는 뜻으로 그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말을 건냈다.
" 선생님! 그동안 선생님의 아내에 대한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정도는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이정도면 이혼할 사유가 될 것 같습니다. 왠만하면 이혼하시죠?"라고 이말을 듣고 있던 소크라테스가 답했다.
"이보게들! 천둥이 치면 비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리고 비가 오고 나면 화창한 날이 올거야"라고...
따라서 관념이 물질보다 중요하며, 진리를 깨달아가는 방법의 영향은 문답법, 대화법, 산파법, 반어법 등을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윤리적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무지의 자각 " 너 자신을 알라 "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선악을 분별할 줄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고 선한 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선을 행할 것이라는 주지주의적 입장을 강조한다.
철학의 출발을 "너 자신을 알라"라고 게시된 델포이 신전을 통하여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인간의 본성이 보편적 이성임을 강조하였다.
3. 지행합일설
보편적 진리와 지식을 실천하는 지행합일설을 주장하였다.
'누구도 알면서 자발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으며, 악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4. 지덕복합일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 덕을 쌓고 선을 실행할 수 있는 기초가 되며 지식을 최고의 덕으로 삼으며,
참된 앎을 통하여 덕을 쌓아 갈 때에 사람은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5. 의 의
이성존중 철학의 시조라는 점에서 의의,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절대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6. 비 판
인간 의지의 나약함 (akrasia)을 간과하고 있다. 즉, 인간은 알면서도 욕망이나 충동 등에 의해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식은 덕을 행하는 필요조건 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후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 BC 470경 아테네~BC 399 아테네 .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석조가(石彫家)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술(産婆術)에 능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린시절부터 <다이몬(많은 번역에서
다이몬을 악마로 번역하고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인간본성의 소리, 즉 양심과 같은 것이다.)의 소리>
를 듣고, 자주 깊은 몰아상태를 경험하는 <신들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대에 악처로 유명했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 때에 중장보병(重裝步兵)으로 북그리스로 2회, 보이오티아로 1회
종군했으며, 이때 훌륭한 인내심과 침착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종군 때 이외에는 아테네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자연에 대한 연구도 했으나 그 뒤에는 인간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 아테네의
거리와 시장·체육관 등에서 대화와 문답을 하면서 지냈다. 그의 인격과 유머가 있는 날카로운 논법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동아리>를 형성하였고, 플라톤도 그 모임에 들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전쟁 종결 5년 뒤인 BC 399년 신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재판에서
사형 받아 일생을 마쳤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아 플라톤의 대화편(주로 초기)과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계
저서를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덕(德)>과 세상의
이른바 지자(知者)라는 사람들의 <지(知)>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거나 밝혀내려 했다. 덕은 지와 동일시되며
혼(魂)의 비합리적인 부분 및 감정 등을 배제한 지의 추구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지가 원래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는 절대 확실한 것이라면 참된 지자는 신뿐이며, 우리 인간은 선미(善美)의
사항을 어느 한 가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이런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 이상의 지자는 없다>고 한 델포이의 신탁(神託)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뜻을 해명하기를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에서 말하기를 나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이 신탁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래서 전 아테네를 돌며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그 결과, 모두가 한가지 잘 아는 걸 가지고 뭐든지 잘 안다는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그들보다 지혜롭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따라서 신탁의 참뜻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모든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덕이란 무엇인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항을 음미, 논박하며 무지를 깨닫게 하는 활동을 <신명(神命)>으로 알고 그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었다.
이 문답의 과정에서 제시된 지의 기준의 엄격성, 논리와 방법에 대한 명확한 의식, <무엇인가>라고 하는
물음에 담겨진 본질에 대한 지향 등은, 그의 생사에 대한 본연의 자세와 함께 철학에 커다란 전환과 비약을
가져다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