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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벡의 히바로 이동 중 가이드 이야기]
히바는 우르겐치에서 남서쪽 35km 지점에 있었고, 히바에 가까워지자 가이드는 설명을 시작했는데 히바는
16세기경 야무 다리아(강)의 이동에 따라 사람들이 콘예 우르겐치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히바가 비록 16세기부터 시작됐다고 하지만 그 아름다움 때문에 명성은 2.400년 전부터 주위에 알려졌다고
하며, 도시의 유명한 첨탑이 많아 ‘첨탑의 도시’ 또는 ‘미나렛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우즈벡의 자랑 중에 하나는 왕국의 수도가 많았다는 것으로 ‘마라칸다’라고 부른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왕국의
수도였고, 부하라는 사마니드와 카라한왕조의 수도이었는데 지금도 순례자들이 찾는 종교도시라고 한다.
사막이 아니고 아름다운 숲이 있는 페르가나는 티무르의 5대손인 바베르가 무굴제국을 세우기전 이곳에
있었고, 코칸트 칸국도 있었으며, 히바는 호레즘 왕국의 수도이었다.
1865년 러시아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을 점령하고 5개
지역을 다스리는 중심지가 타슈켄트라고 하며, 1917년 이 나라들은 형제 국이 되었다고 한다.
1991년 이 나라가 독립하고는 우즈벡을 빼놓고는 마땅하게 수도로 정할 곳이 없어 애를 먹었다고 하며,
러시아지배를 100년 받다가 독립 된지 20년이 안되다 보니 나이든 사람은 러시아어가 편하다고 한다.
젊은 사람은 자국 언어를 배워 사용하지만 지금도 러시아 시절의 언어들이 남아 있다고 하며, 우즈벡에는
아랄 해라는 바다가 있고, 2개의 사막과 강도 있으며, 산맥도 있다고 한다.
<히바의 남쪽 이찬성벽>
[카라 칼팍(칼파크 Kara Kalpak) 자치공화국 이야기]
아랄 해의 남해안 유역에 있는 카라 칼팍 지역의 사람은 우즈벡 사람과 특이하게도 완전히 다른 인종으로
풍습도 많이 다르다고 한다.
예로 우즈벡에서는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면 빵과 차를 주면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뜻인데 카라 칼파크
사람들은 반대로 ‘이것만 먹고 가세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즈벡에서는 흰색 상의를 입고 있으면 존경받는 노인으로 생각하고 젊은 사람만 빨간 색을 입는데 반하여
카라 칼파크 사람은 노인이 빨간 색을 입고 젊은 사람이 흰색을 입는다고 한다.
이들은 유목민이라 떠돌아다니다가 아랄 해의 유역에 있을 때 러시아의 점령으로 국경이 정해지자 그들은
나라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는데 생선이 많이 잡히는 아랄 해에 반해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아랄 해(Aral Sea)와 목화 이야기]
중앙아시아가 목화재배지로 주목 받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의 남북전쟁(1861-65)이 그 원이라고 하며,
목화로 인해 아랄 해가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남북전쟁으로 인해 목화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목화지배지로 적당한 곳이 비옥한 페르가나
강 유역이라는 것을 알았고, 목화를 얻기 위해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침략했다.
가이드는 면적이 줄어드는 아랄 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BC 4세기 마라칸트(사마르칸트)로 진군했던
알렉산더는 아랄 해 쪽으로 이동해 왔지만 어느 기록에도 작은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
희한하게도 AD 7세기에 왔던 아랍인들은 작은 바다를 건넜다고 했는데 AD 14세기의 티무르는 작은 바다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랄 해가 있다가 없다가를 반복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 증거로 현재 줄어든 바닥에는 성벽 같은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앞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유적이
발견될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희한한 것은 카스피 해의 수위가 올라가면 아랄 해의 수위가 낮아지고, 반대의 현상도 나타나는
것은 카스피 해와 아랄 해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위배되는 현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물의 높이는 당연히 같아야
하는데 수긍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지금 심각한 것은 바다의 면적이 줄어드는 것이 매우 빠르다는 것인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전에는
시르 다리아와 야무 다리아 2강이 증발되는 물만큼 공급되어 수위가 일정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목화재배를 위하여 1960년 무렵부터 투그크멘, 우즈벡, 카자흐스탄에 엄청난 면적의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투그크멘은 야무 다리아로부터 카라쿰 운하를 만들어 물길을 돌렸다.
시르 다리아 강은 우즈벡, 카자흐스탄의 경작지에 물을 공급하므로 아랄 해에 유입되는 물이 급격히 줄어
들어 증발되는 물보다 유입되는 물이 적어졌는데 여름에는 2강이 아예 말라버린다고 한다.
지금은 유입되는 물도 절반으로 줄었고, 수위도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높은 염분은 풍부하던 어종을
전멸시켜 사실상 어업은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언제가 읽은 글인데 환경보호단체에서 금반지와 면직 옷을 입지말자며, 금 1돈을 채취하려면 폐석이 20톤이
나오고 우리가 입은 면직 때문에 아랄 해가 없어진다고 주장한 것이 생각나게 했다.
그렇게 살기 좋았던 땅이 아랄 해가 줄면서 자연의 변화를 심화시켰는데 겨울은 더 추워졌고, 대신 여름은
훨씬 더워졌으며, 많아진 소금모래는 건강을 악화시켜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 되었다고 한다.
또 러시아가 폭탄실험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것으로도 생각하지만 이런 것들은 추측일 뿐 확실한 원인을
학자들은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아랄 해: 아랄 해는 1,000 여개의 섬들이 있어 '섬들의 바다'라는 뜻이라고 하며, 북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시르 다리아와 남쪽에서 흘러들어가는 야무 다리아의 2강은 거대한 삼각주를 만들었다.
<히바 박물관에 있는 아랄 해 지도인데 카라 칼팍와 참고로 지명들을 표기해 봤다.>
[우즈벡 대한 이야기]
우즈벡은 80~90% 1차 산업이지만 특히 농업이 차지하지만 그중에 목화와 관련된 산업이 활발하여 국가의
상징될 정도인데 생산량은 세계에서 6위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들을 보면 문이 열린 집이 많은 것은 이슬람에서 알라신이 새나 짐승이나 이방인으로 찾아오기에
항상 열어놓고 반기라는 것이며, 비록 식사 때 온 손님이라도 꼭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나무를 심는다고 하며, 18세가 되어 장가갈 대가 되면 이 나무를 베어 집의 틀을 만드는
것에 사용하는데 집을 짓는 것은 너무 쉽다고 한다.
집 짓는 재료로는 소금과 건초 그리고 진흙으로 만든 벽돌만 있으면 된다고 하며, 햇볕이 좋아 건조가 너무
잘 돼서 집을 짓는 데는 1~2달이면 다 짓을 수 있다고 한다.
장남은 부모를 섬겨야 하기에 부모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야 하는데 앞의 ‘샤흐리 샤브즈로 가는
길’에서 설명했듯이 장남은 ‘마할라 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부는 마할라뿐 아니라 어디서나 자유롭게 데려올 수 있다고 하며, 새댁은 일찍 일어나야 하고,
청소도 잘해야 한다고 한다.
조금 있으면 아름다운 히바 풍경이 보일 것이라고 하며, 이곳 호라즘지방은 사막인 것, 소금과 바람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한다.
여기 바람이 얼마나 잘 부는 가하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호라즘 것과 같은 성분의 소금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소금은 이곳의 바람을 타고 간 것이라고 한다.
호라즘소금은 부하라, 사마라칸트, 타슈켄트의 소금보다 훨씬 양이 많아 이 때문에 물도 부족하지만 식물이 살지
못해 고통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히바에 도착했다.
<히바의 진흙 벽돌집에서 목공공예를 하는 모습>
[히바의 유적지 구경]
호텔이 이찬칼라 남문(타쉬 다르바자, Tosh Darvoza) 앞에 있어 너무 반가웠는데 짐만 방에 들어놓고 저녁
먹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 이 선생님과 성안으로 들어갔다.
인터넷에 히바는 아침, 점심, 저녁 3번을 봐야한다는 것을 본적 있는데 그중 저녁을 볼 수 있는 시간이라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성문을 들어서자 부하라처럼 유적지 안에 호텔이 먼저 보인다.
이곳도 부하라처럼 유적지와 함께 사람이 살고 있어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니마렛를 사진 찍으려니 늘어선
전기선, 배관, TV안테나 등이 못마땅했다.
그때 지나가는 백인여자 한분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전선을 가르치며 고개를 흔들고 지나갔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고 해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어찌하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 볼품 없는 안테나이며, 목공공예를 만드는 곳엔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있어 안타까움을
더 하게 했지만 언제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늦은 시간이라 관광객도 적었고, 설명을 들을 듣는데 신경 쓸 일 없으니 보고 사진만 찍으면서 다니다가
또 하나의 성벽과 정문을 보고 이곳이 이찬칼라로 생각했으나 쿠냐 아르크 요새였다.
저녁시간이 되어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이제는 야경을 보기 위해 성으로 향했는데 성문만 조금 조명이 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조명이 없었으며, 어느 식당에서 공연하는 전통 쇼를 공짜로 구경했다.
동행자 이 선생님이 계시기에 용기를 내서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동상이 있는 성문을 찾아 나섰다가 성문을
발견하고 나가 봤는데 동상은 보이지 않았고, 멀리 대형의 어린이 놀이기구가 보였다.
이 북쪽 성문은 부하라 다르바자(Buhoro darvoza)라인데 이제는 더 이상은 움직이기도 싫었고, 밤도 늦어
콰리즈미 동상은 내일 아침에 찾기로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남쪽 타쉬 다르바자에서 바라본 히바에서 가장 높은 이슬람 호자 미나렛>
[9일] 12년 5월 9일 수요일
●일정: 종일 이찬칼라 관광 1. 아타 다르바자 2. 무하마드 아민 칸 3. 칼타 미나렛 4. 사이드 알로부딘 마우솔레움
5. 요크보이 호자 마드라사 6. 팔라반 마흐무드 마크바라시 7. 이슬람 호자 콤플렉스 8. 쿠냐 아르크 요새
9. 무하메드 라킴 칸 10. 주마 마스지드 11. 하렘 12. 히바전통춤 석식 후 [21:10] HY1058 우르겐치 공항 출발→
[22:40] 타쉬켄트 도착→ DEDEMAN SILKROAD 호텔
[히바의 아침]
이제가면 언제 또 오겠는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으로 향했는데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없어 사진 찍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라 지금 찍어두면 설명들을 때 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카페 여행기에는 가능한 내가 들어가 있는 사진을 사용하므로 이렇게 찍는 것은 불만이지만 어쩌라 오늘
아침에는 어제 못 찾은 동상과 미나렛을 올라가 히바시가지를 구경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먼저 제일 큰 미나렛을 찾았으나 문이 잠겨 있어 다른 미나렛을 찾아 나섰는데 큰 미나렛이 2개 있는 모스크의
표지판 'SAID NIYOZ SHOLIKORBOY MASJI야 VA MINORASI 1835'라고 씌어있었다.
이 마스지드를 들어가려는데 2명의 남자 노인 나오셔서 ‘살람 알레쿰’ 인사를 했더니 그들도 인사를 했으며,
그들이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가 미나렛의 입구를 찾았다.
옥상까지 올라갔으나 오른쪽 미마렛의 입구를 찾지 못해 다시 내려와 왼쪽으로 가 조금 올라가니 작은 문이 있어
열어보니 입구가 맞아 문을 살짝 닫아놓고 정신없이 올라갔다.
들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조금은 걱정을 하면서 오르는데 조금 오르니 빛이 들오는 창문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미리 준비한 미니전등을 키고 올라갔다.
어두움을 보고 왜? 장님이 무아진이 되었는지를 알 것 같았으며,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찾지만 꼭대기는 높기는
했으나 들키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어지럽도록 한 방향으로만 돌고 돌아 꼭대기에 도달 하고보니 무아진들이 예배시간을 알려던 장소는 생각보다
협소했으며, 의자하나만 달랑 노여 있었는데 경치는 장관이라 혼자보기가 아까웠다.
가장 중앙에 위치한 미나렛이라 이찬칼라를 다 보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어 오래 동안 머물고 싶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반대로 돌고 돌아 내려와 문을 조금 열고 밖의 동태를 살피면서 무사히 나왔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잘 걸을
수도 없었지만 허벅지근육통 때문에 내려가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제일 큰 미나렛이 잠겨 있었던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리 아프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동쪽지역을 다본 후 동상을 찾으러 가다가 만난 이 선생님이 동상의 방향을 알려주신다.
서쪽 성문에서 알 콰리즈미 동상을 찾았으나 이른 아침이라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어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실크로드의 지도가 그려진 것을 보았는데 대충으로 그렸지만 우리나라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일본은 오사카 하나만 표기되었으나 우리나라는 부산과 평양이 표기되어 있었으며,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
부산이었는데 더디어 남자 한분을 만나 사진을 찍고 호텔로 돌아왔다.
미나렛 위에서 찍은 사진을 팀들이 구경했는데 의사선생님은 시간만 준다면 미나렛을 꼭 올라갈 것이라고 했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으며, 아침식사 후 가이드와 함께 걸어서 유적지로 향했다.
<아침에 마나렛에 올라 가서 본 첨탑의 도시 히바 전경>
[1. 성의 정문인 서쪽 성문인 아타 다르바자(Ota Darvoza) 관람]
우리 호텔 옆의 진흙성벽이 히바의 외성인 디산 칼라의 성벽이며, 디산은 소금 뜻으로 길이 5.500m이고,
내성인 이찬 칼라(Ichon Kala)의 진흙성벽 길이는 2.250m, 높이 10m, 폭 8m이라고 한다.
이찬 칼라 성벽에는 3개의 망루(전망대)가 있다고 하며, 남문 성벽에 위에 있는 묘지는 이곳에라도 묘지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하였고, 히바는 17세기부터 정식으로 건설을 했다고 한다.
성문 옆에는 내가 그 토록 찾아다닌 알 콰리즈미(호라즈미)의 청동 동상이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데 그는
아라비아 사람으로 대수학을 처음 언어로 만든 사람이라고 통역했다.
사실은 대수학의 알고리즘(algorism)이라는 어원인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며, 그의 본래 이름은
무하마드 이븐 무사 알 호라즈미이라고 한다.
아랍은 지명 앞에 ‘알’자를 꼭 넣기 때문에 ‘알 호라즈미’는 ‘호라즈미 사람’ 뜻이고, 마호메트의 어록을 모아
만든 성훈집으로 유명한 ‘알 부하리’도 ‘부하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의 정문(Main)인 서쪽 성문 아타 다르바자의 아타는 아버지, 다르바자는 문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남문인
타쉬(Tosh) 다르바자는 카라쿰 사막 방향이고, 북문인 부하라(Buhoro) 다르바자는 부하라방향이다.
※알 콰리즈미는 아래 [아랍의 과학 참조]에서 다시 설명한다.
<위 사진은 아타바르자이고, 아래 사진은 디샨 칼라(Dishan Qala)의 성벽이다.>
[실크로드 프로젝트(Silk Road Project) 이야기]
성문 옆에 그려진 ‘실크로드 프로젝트’라는 지도 앞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실크로드는 문물교환만 아니라
왕들은 정치에 필요한 각 나라의 정보를 얻는 것이 더 절실했다고 한다.
중국이나 각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은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인 부하라로 모인다고 하며, 모인 문물은 다시
타슈켄트로 가서 상품들을 선별해서 보낼 곳을 정해진다고 한다.
정해진 물품은 다시 부하라로 와서 남쪽은 인도, 북쪽은 러시아, 서쪽으로는 유럽과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갔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야기는 긍정하기 힘들었다.
낙타가 시속 5km를 기준으로 해서 40km 마다 그들이 쉴 수 있는 숙소(카라반 사라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참고해서 대충계산해도 부하라에서 타슈켄트까지 700km 정도의 거리이다.
그 옛날 겨우 물품을 선별하려고 왕복 1개월의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리고 그 선별이라는 것은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을 것이고, 대상들도 웬만큼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나, 가이드, 대상들 중에 하나가 바보이든지, 아니면 TC가 잘 못 번역했을까?
하여튼 긍정하기 힘든 이야기이다.
그리고 가이드는 물건 값이 얼마나 비싼 것이지 계산해보라고 하면서 가깝게 보이는 히바에서 부하라까지가
500km인데 중국에서 6개월 걸리며 평생 몇 번 밖에 못하는 장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비싼 물품을 누가 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지배자들? 귀족들? 부호들? 그럼 그들은
극소수인데.. 그런데 답은 간단했는데 값이야 얼마가 됐던 수요자가 있으니까 장사했겠지.
1개 대상은 보통 1.000명의 낙타가 필요했으며, 500마리는 물품을 실었고, 500마리는 생필품을 실었으며,
방향을 잡기 위해 과학자도 함께 갔으며, 이익은 군인들과 대상이 나누었다고 한다.
대상들은 물품을 판 후에 그곳의 물건을 사왔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며, 이곳 사람들은 아이에게 일찍이
장사하는 기술 그리고 계산과 장부기록 하는 법도 가르쳤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허가증명서가 있어야 장사를 할 수 있는데 몰래하면 사형에 처할 만큼 엄격했다고 한다.
종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첩자가 용케 종이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고 했으나 이것은 역사와 다르기에
종이역사는 뒤에 탈라스 전투와 고선지 장군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가이드는 아랍과 중국의 전쟁(탈라스 전투)에서 졌다면 지금 자기들은 중국말로 ‘차오~’라고 인사 했을
것이라고 해서 웃었는데 지금 모든 상품은 중국 것이라서 사실상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
10세기부터 생산되는 브라운(갈색) 종이는 눈에 피로를 줄인다고 하였으며, 이곳 종이는 순전히 수작업으로
만들어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비싸 찾는 사람이 없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종이 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에서 장인들에게 지원을 하면서 되살아나 나는 중이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와 서쪽(옥시던트) 실크로드>
[실크로드(Silk Road) 참조]
실크로드란 말은 19세 말경 독일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 길은 6~14세기에 걸쳐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잇는 교통로였으며, 이 외에도 뱃길, 초원길, 철(기차) 길도 있다.
실크로드는 인류가 만든 지상최대의 길이자 살아있는 역사의 발자취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있으며,
서역남로를 합쳐 3갈래의 길이 있는데 중국의 서안에서 시작했다.
1. 천산북로: 서안→ 소주→ 고비사막→ 투르판(우르무치)→ 석하자→ 이리→ 알마아타→
사마르칸트(북쪽→ 타슈켄트→ 알마타)→ 부하라(1.북쪽→ 히바, 2.남쪽→ 테르메즈→ 카불→ 페샤와르→
라호르→ 델리→ 아그라)→ 메르브→ 바그다드→ 다마스코스(1.북쪽→ 이스탄불→ 베네치아 → 로마,
2.남쪽→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2. 천산남로: 서안→ 소주→돈황→ 하미→ 투루판→ 코라→ 쿠차→ 악슈→ 카슈가르→ 사마르칸트
3. 서역남로: 서안→ 소주→돈황→ 타클라마칸 사막 남부→ 호탄→ 야르칸트→ 카슈가르→ 사마르칸트
※비단길: 사막길이라고도 하며, 안녹산의 난 이후로 당과 서역이 무역이 단절되면서 쇠퇴하였다.
※ 뱃길: 해상교역로인데 아랍인이 많이 사용하였고, 이 길 따라 난파한 선원들이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과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 이슬람을 전하였다.
※스텝루트: 북아시아 유목민이나 몽골족이 사용하는 스텝(초원)지대를 통과하던 길로 장건 이전에도
서구교역은 있었으며, 이 길을 일명 모피(毛皮)로드라고도 한다.
모피로드는 소련의 사람들은 혹한은 모피외투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이 길을 통하여 유통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후에는 이 길을 따라 철(기차)의 실크로드가 열렸다.
실크로드는 인도의 불교,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회교가 전파되었고, 칭기즈칸, 티무르, 신라의
혜초와 고선지 장군이 역사에 등장했다.
또한 이 길을 통해 대상들의 무리는 비단, 보석, 도자기, 향료 같은 값비싼 물건들을 낙타에 싣고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멋진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주철 기술과 양잠, 제지법 등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동쪽(오리엔트) 실크로드>
[2. 무하마드 아민 칸(Mohammed Amin Khan) 마드라사 관람]
칼타 미노르 미나렛과 함께 있으며, 중앙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마드라사라고 하며, 1852년에 완공하였고,
전성기 때는 200여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1977년부터 오리엔트스타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는 부유층과 귀족자제만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하며, 과학은 신을 부정하기에 배우지 않았고, 오로지
영성교육만 18년 간 공부했다고 한다.
러시아 보고서에 ‘이곳 사람들은 오직 신만 경배하고 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만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고
하며, 7~8세기 아랍이 들어오면서 과학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학 공부는 칼타 미나렛과 같은 것을 짓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의문점은 아랍이 들어오면서
이슬람이 들어왔는데도 과학을 안 배웠다는 것과 앞뒤가 맞지 않았다.
[3. 칼타 미노르(Kalta Minor) 미나렛 관람]
부하라의 칼란(미나렛)은 ‘크다’라는 뜻이지만 이곳의 칼타는 ‘짧다’라는 의미라고 하며, 이 마나렛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를 하면서 부하라는 왕을 아미르라고 하고, 호라즘의 히바는 칸이라 했다.
1851년 모하마드 아민 칸은 500km에 있는 부하라를 볼 수 있는 높이 70m의 미나렛을 장인에게 만들라고
했는데 이것을 안 부하라의 아미르는 더 높은 미나렛을 만들려고 장인을 데려오려고 했다.
또 그 사실을 안 히바의 칸은 장인을 죽이려고 했으나 그 사실을 먼저 알고 장인은 부하라로 도망가 칼란
미나렛을 만들었다는 것과 히바 칸이 부하라로 가기 전에 죽였다는 2가지가 있다고 한다.
1855년 모하마드 아민 칸 죽어 미완성인 칼타 마나렛의 높이는 36m, 하단부의 지름이 14m로 청색타일로
모자이크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며, 여기서부터 이찬칼라의 중심도로가 연결된다고 한다.
2500~2700년 전에 사람이 거주를 시작했지만 현재 보이는 것은 17~18세기의 것이라고 하며, 거리에 팔고
있는 털모자는 여름에도 사용하지만 겨울에 바람이 차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타 미노르 니마레트와 무하마드 아민 칸 마드레세>
[칼라 사진에 대한 이야기]
가이드는 1910년에 찍었다는 사진을 들고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당시 칼라가 없던 시절이라 대단히
희귀한 사진이라고 하며, 이 사진은 러시아 기술자 코로프빈이 3가지 색깔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압둘란 한이라고 한 왕은 사이드 무하마드 라킴 칸 2세(Mohammed Rakhim Khan II, 1865~
1910년)로 1867년 러시아가 점령하여 정책상 러시아 대령의 계급을 주어 다스리도록 했다고 한다.
다른 또 하나의 칼라 사진은 부하라 에미르 사이드 미르 알림(1910~1920년)의 사진이라고 하며, 그는
지역도 크고 금을 많이 가지고 있어 러시아 장군에 해당하는 계급을 주어 다스리도록 했다고 한다.
11세기의 아부 알리 이븐시나는 오줌의 맛을 보고 당뇨를 알았다고 하며, 7세기에는 과학의 중심지가
그리스였으나 아랍인들이 그리스와 교류가 되면서 그들의 책을 번역해서 배웠다고 한다.
후 우마이야(756-1231의) 수도 코르도바 도서관에는 서양 책을 번역한 6.000권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것이든 공부를 할 수 있어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과학을 다시 서양으로 전했다고 한다.
<큰 사진은 부하라 에미르 사이드 미르 알림이고, 작은 사진은 히바의 라킴 칸 2세의 칼라 사진>
[아랍의 과학 참조]
10C부터 회교는 이집트 카이로의 파티마왕조, 스페인 코르도바의 후(後)우마야왕조, 이라크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의 3대 문명권으로 분할되면서 과학이 발달하였다.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는 각 지역에서 많은 학자들을 데려오고, 그리스 책을 수집하여 후나인 이븐
이샤크 등의 학자들이 히포크라테스, 갈렌의 의학논문, 인도의 천문학 등을 번역하였다.
이런 새로운 지식은 독자적인 과학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알 콰리즈미 같은 수학자들은 인도에서 처음
알아낸 ‘0’의 개념을 도입하여 계산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켜 유럽에 전파했다.
그리스와 인도의 천문학을 발전시켜 천체를 관측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천문계산표를
작성하였고, 이븐 유니스(Ibn Yunis, ?∼ 1009년) 학자는 ‘하킴천문표’를 작성했다.
우리가 잘 아는 중세 연금술은 비록 금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으나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로
오늘날 도구와 기계를 크게 발전시켰고, 화학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의술이 대단히 발전한 것은 900년까지 번역을 통해 얻은 그리스와 인도의학을 크게 발전시켜
현대병원과 같은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을 갖추었으며, 목욕실과 식당 등을 완비하였다.
의사는 지금의 의사면허제도의 효시가 된 국가자격시험을 실시하였으며,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
이븐 알 나휘스 등의 유명한 의학자를 배출하였다.
아랍은 동양(중국, 인도)과학과 서양(그리스, 로마)과학을 8세기 후반에 받아드려 13세기까지 발전시켜
전성기를 이루었고, 유럽의 르네상스는 아랍의 과학을 근대과학으로 발전시켰다.
※알 콰리즈미(Al Khwarizmi, 780?~846?): 그는 인도의 대수와 그리스의 기하를 정리하고 발전시켜 유럽에
전해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지리학자로 그가 정리한 알고리즘이 유명하다.
알고리즘은 어떤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면 합리적이고 우선적인 정해진 일련의 절차를 거쳐야하는데 이런
단계적인 풀이과정을 정리한 것을 말한다.
※이븐 시나(Ibn Sina, 980~1037년):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리는 그는 이슬람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이며,
철학자이자 과학자인데 부하라에서 탄생하여 하마단에서 죽었다.
그는 아랍에서 가장 유명한 책 중에 하나인 ‘의학정전’을 저술했으며, 그는 이 책에서 맥을 짚어 진찰하는
방법을 소개하였고, 최초로 정신, 신경병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이븐 알 나휘스(Ibn al Nafis, 1210∼1288년): 그는 피의 소순환(피→우심실→허파→좌심실)을 주장했다.
※이븐 루시드(Ibn Rushd, 1126∼1198): 그는 광범위하게 기술한 종합의학서 ‘일반의학’을 저술하였는데
그는 이 책에서 해부, 생리, 병리, 진단, 위생 등과 눈의 망막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한 첫 의학자이다.
또 천연두는 한번 걸린 사람은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알 하이삼(Al Haitham, 963∼1039)은 사막으로 인한 눈병이 많아 눈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렌즈의 이용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아타 다르바자 옆에 있는 수학자 알 콰리즈미 동상>
[4. 사이드 알로부딘 마우솔레움(Said Alovuddin Mausoleum) 탐방]
14세기의 사이드 알로부딘(Sayid Allauddin) 영묘 옆에 있는 4개의 묘지를 보고 가이드가 설명을 했는데
아랍인들은 성자같이 훌륭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도 성자로 취급하여 영묘를 만든다고 한다.
아랍인들은 그 옆에 묻히면 좋은 곳으로 간다고 믿어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자꾸만
커지기 때문에 다른 묘지는 밖으로 내 보내고 남은 묘지라고 한다.
알로우딘 묘당은 굉장히 작기 때문에 특이 하다고 하며, 계단을 밟고 들어가면 건물사이에 나무가 있는
것은 성벽이나 건물을 지지도 하지만 습기나 소금기를 머금어 손상이 덜 가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왼쪽 편에는 청색무늬를 한 관 2개가 있으며, 룸에는 종교지도자 물라(Mullah) 앞에 있는 탁자 주위로
신자가족이 앉아 있는데 가이드는 물라가 신도들을 위해 대신기도도 해준다고 한다.
물라 뒤에 있는 벽에는 콘예 우르겐지에서 본 모스크와 미나렛 등의 사진과 영묘의 도형이 있었으며,
가다가 다마스, 마티즈 등의 대우 차량을 만났다.
앞에서도 말했는데 지금은 시보레에서 인수했으나 사람들이 대우를 좋아해서 마크는 지금도 대우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며, 호자 마드라사를 들어가기 전에 배화교 상징의 도자기가 보였다.
이 도자기는 선과 악을 상징하는데 이슬람은 배화교를 믿는 이곳에 들어와 강요하지 않고 300년 동안
천천히 포교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이드가 자기들이 믿는 이슬람을 좋게 표현한 것이리라.
알란은 메르브 사람들은 자청해서 이슬람을 받아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슬람이 한손에 칼, 한손에
코란을 들고 포교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큰 사진은 사이드 알로부딘의 영묘이고, 작은 사진은 물라의 기도를 받는 신도 사진이다.>
[5. 요크보이 호자 마드라사(Yoqubboy Xoja madrasasi) 관광]
1873년 마드라사로 지어졌는데 공주가 장인과 결혼하여 실크를 만드는 비밀을 풀었다고 하며, 지금은
카펫 공방으로 사용되며, 관광객에게 카펫 만드는 것과 자수를 놓는 것을 보여 주며, 판매도 한다.
<현재는 카펫 공방인 요크보이 호자 마드라사>
[6. 팔라반 마흐무드 마크바라시(Pahiavon Mahmud Maqbarasi) 관광]
성지순례자들이 많아 가이드의 말소리도 듣기 힘든 우물가 그늘에 모여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마크바라시(complex)'는 ‘여러 기능이 모인 곳’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가이드는 우물 옆에 벽에 있는 초상화를
보고 ‘마토흘 마토리’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팔라반 마흐무드(1247~1326년)’이다.
그는 시인이자 철학자이지만 몸도 건장하여 밀어내기 씨름에서 여러 번 승리를 한 사람이라고 하며, 그는
독재자 칸에게 대항하여 사람들에게 추앙받던 사람으로 죽은 후에 성자되었다고 한다.
그의 묘당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며졌는데 독재자 칸도 시샘을 하여 자신의 묘지도 아름답게
장식을 했으며, 칸의 관은 문구멍으로 들어다보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팔라반 마흐무드는 임종 때 ‘나의 무덤에 오시려면 먼저 나의 스승의 묘당을 먼저 들려 달라.’라고 했기에
우리는 그의 유언에 따라 ‘사이드 알로부딘’ 묘당을 들러서 온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성지순례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는 당시에는 사막으로 인한 눈병의 환자가 많았는데 장님이 되기
전 이곳에서 머물며 치료를 받던 곳이라고 하며, 히바가 시작되었다는 우물에 대한 전설을 들었다.
어떤 사람이 심한갈증으로 죽기직전 지팡이로 바닥을 찍자 물이 솟구쳤는데 이 물을 맛있게 마신 후 너무
감격하여 ‘히 바이~’라고 부르짖은 것이 지금의 ‘히바’라는 지명이 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현지인들은 이 우물을 마시는데 소금기가 많아 관광객은 배탈이 날 수 있어 안 먹는 게 좋다고 한다.
벽과 천정의 장식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실감케 했는데 문구멍으로
아름다운 칸의 묘지도 보았는데 이곳도 물라가 순례자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번: 구멍으로 들어다 본 칸의 아름다운 관, 2번: 팔라반 마흐무드 초상화, 3번: 히바의 이름의 근원이 된
우물과 사진 위는 우물의 지붕, 4번: 팔라반 마흐무드의 영묘.>
[7. 이슬람 호자 콤플렉스(Islam Khodja Complex) 관람]
이찬칼라 남쪽 '타리브 막숨 마드라사(Talib Makhsum Madrassah)'라는 신학교 옆에 있는 이슬람 호자
미나렛(Minaret)은 히바에서 가장 큰데 높이는 45m이고, 기단의 지름은 10m이라고 한다.
이 미나렛은 1910년 지어져 사막의 등대역할도 했지만 무아진의 소리로 시계역할도 했다고 하며, 돈을 내면
올라가 히바의 전경을 볼 수도 있으나 우리는 올라가지 않았다.
미나렛과 같이 있는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어 이곳에 들어가 설명을 들으며, 전시된 유물들을
구경했는데 부하라는 대리석기단을 히바는 나무기단을 사용했다고 한다.
메카방향을 가르치는 미라브는 히바 발음은 미하랍이라 하고, 아랍은 문양 중에 안의 원은 태양을, 밖에 있는
사각은 아랍을 의미한다고 하며, 히바의 무늬는 단조롭다고 한다.
배화교는 흙(땅), 물, 불, 바람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이 4가지를 물질의 원소로 보았다고 하며, 옷은 신분을
상징하고, 1960년까지만 해도 부인의 얼굴은 남편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14세 정도부터 결혼하는데 아들을 낳으면 농사일을 시키지만 여자 아이를 낳으면 결혼 때 예물로 지참금을
받아 재산이 생겨 좋아했다고 한다.
아랍에서는 40을 좋은(good) 숫자로 여겨 머리를 딸 때도 40가닥으로 땄고, 키리키스탄의 키리키스는
‘40명의 처녀 미인’의 뜻이라 한다.
타타르족은 러시아 사람들이 그들의 말음이 타타타 하는 것처럼 들려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학생
시절에 본 칭기즈칸의 영화에서는 타타르족을 ‘땅딸 족‘이라 번역을 해 키가 작다는 뜻으로 알았다.
유물들의 설명은 기억에 없으나 히바 건물에 사용된 자재들로 나무 재료는 기둥, 문, 조각된 문양과 무늬,
기둥 받침대 등이 있었고, 다음은 모자이크로 쓰였던 타일이 전시 되어 있다.
다음은 돌과 철의 재료가 있었으며, 다음은 당시에 입었던 옷들이 전시되었고, 가정도구로는 접시, 항아리,
주전자 등의 도자기가 있었으며, 다음은 청동재료로 된 주방기구와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식당으로 향했는데 성 안에 있는 식당은 보호받아야 할 마드라사이라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오른 쪽은 이슬람 호자 미나렛이고, 왼쪽은 '타리브 막숨 마드라사'이며, 현재는 박물관이다.>
<이슬람 호자 미나렛 주위의 히바>
[쿠냐 아르크 요새로 가는 길]
쿠냐 아르크로 가는 길에 주택마당 같은 곳에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작은 ‘땅딸 미나렛’도 보였는데 하도
작아 일반 가정용이거나 아니면 아이들 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다.
미나렛의 도시답게 여러 종류의 미나렛 볼 수 있어 좋았고, 요새 광장에는 진흙으로 만든 ‘땅딸 굴뚝’이
보였는데 이것은 나보르(Nabor)축제 때나 명절 때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고 한다.
명절 때 이곳에 모여 양고기를 볶거나 빵을 구어 나누어 먹었다고 하며, 소금물로 요리해서 짜다고 한다.
<1번: 쿠냐 아르크 요새 정문, 2번: 땅딸 미나렛, 3번: 명절 때 음식을 만드는 곳, 4반: 요새 광장>
[8. 쿠냐 아르크 요새(Kuhna Ark Citadel) 관람]
가이드를 따라 서쪽 정문 옆에 있는 궁전 안으로 들어가 설명을 들었는데 궁전은 아무도 말을 타고 들어
갈 수 없으며, 궁전을 들어오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 허락은 문 뒤에는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에는 쿠시백이라는 행정관이 있으며, 이 행정관들이 방문자들의
이유를 알고 난 뒤 칸에게 알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알현하는데 히바는 1~2개월이 걸리지만 부하라의 아미르는 6~12 개월 걸린다고 하며, 행정관들은 알현을
기다리는 동안에 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다시 묻는다고 한다.
칸의 면담하려면 소유한 것에 1/10을 내야하고, 교역을 통해 이익이 생기면 또 세금을 내기에 칸은 엄청난
부를 챙겼다고 하며, 대상들은 알현을 마치면 묶을 장소로 이동했다고 한다.
대상들의 대기 장소에는 깊이 7m의 우물이 있었는데 일행들이 이 우물을 퍼서 맛을 보았는데 매우시원하고
짜지 않았다고 했으며, 칸을 알현 장소로 이동했다.
칸을 알현하는 장소에는 백금옥좌가 있었고, 칸을 알현할 때 머리가 칸보다 높아도 안 되고, 눈을 마주쳐도
안 된다고 하며, 천정에 있는 8개의 별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칸이 혼자서 올라 이찬칼라를 바라보았다고 하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것이 좀 힘들었는데 칸이 혼자 올라다는
것이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며, 새벽에 올랐던 미나렛 같이 도시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의 건물은 칸만 들어갈 수 있다는 여인들의 숙소 하렘이었는데 일반인들은 하렘을 들어다 볼 수 없도록
더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다고 한다.
알현장소의 옥상은 칸이 아무도 모르게 만나는 비밀장소이라고 하며, 이찬칼라에는 삼천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히바 전체는 5만 정도가 산다고 한다.
이곳을 나오다가 성지순례를 온 아줌마부대를 만났는데 이들도 역시 우리나라 아줌마같이 용기가 대단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자고 했는데 동 연배인 진주 싸모님은 그들에 비하면 새댁이다.
쿠냐 아르크 궁전은 19세기 전반기 내성 동쪽 끝에 건설한 타샤 하울리 궁전(Tash Khauli Palace)보다
‘오래된’ 것이라 쿠냐라고 했는데 코니에(쿤야 Kunya) 우르겐지의 코니에와 같은 의미이다.
아불 가지 아누샤 칸(재위, 1663~1687년)은 아버지와 함께 건축 붐을 일으켰는데 이 궁전은 1686년에
건축되었으나 이란군대가 파괴하여 현재 건물은 19초에 재건축 된 것이다.
처음 봤을 때 정문과 높은 성벽으로 인해 이곳이 이찬칼라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요새화 된 궁전인데 여러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인터넷에서는 봤으나 우리가 본 것은 이 정도이다.
<큰 사진은 칸의 망루에서 본 히바 전경인데 왼편 미나렛이 아침에 올라던 곳은 아니지?
1번: 칸의 알현실, 2번: 칸의 비밀 장소, 3번: 칸의 백금옥좌>
[9. 무하메드 라킴 칸(Mohammed Rakhim Khan II) 마드라사 탐방]
가이드는 이곳을 14세기 이전의 이맘 쿨리 칸 마드라사라고 했는데 칼타 미나렛 앞에서 보이는 히바건물은
17~18세기의 것이라고 하였고, 히바는 16세기 이전에는 칸도 존재하지 않아 자료를 찾아보았다.
힘겹게 찾아낸 것은 14세기 이전에는 티무르 시대이고, 그 이전에는 몽골제국시대이라 이맘 쿨리 칸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과 이맘 쿨리 칸(재위 1611~1642년)은 부하라의 아미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히바한국은 샤이바니 왕조의 후예인 일바르스가 1512년에 세웠기에 그 이전에는 칸이 없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이곳은 '무하마드 라킴 칸 메드레샤'라는 것이다.
무하마드 라킴 칸 2세(재위 1865~1910년)는 앞의 칼라사진에서 이야기했던 사람이고, 이 건물은 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마드라사는 러시아 이후로는 병원으로 개조되었다고 하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나는 것이 없어 더욱더 애를
먹었는데 하여튼 가이드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이곳에서 이슬람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무하마드 라킴 칸 메드레샤>
[이슬람 신학에 대한 이야기]
지배자 칸이 이런 마드라사를 건설한 것은 역사에 자기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다음은 신학교를
많이 세움으로 좋은 이름과 이미지를 남기고 존경을 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티무르 시대 이후로는 다들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신학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칸의 신학교가 의미를
잃게 되면서 칸들은 더는 신학교를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티무르 제국의 울루그 벡은 신학교의 룰을 바꾸고 모든 제도를 규정했지만 그가 죽은 후 다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여성은 코란의식에 제한이 있어 공부하기가 어려워서 남자들만 다녔다고 한다.
꼭 여성이 공부하고 싶으면 유일하게 부하라와 타슈켄트의 2곳에서만 다닐 수 있었다고 하며, 성직자가
되겠다고 하면 신하교도 나와야 하지만 성직자 전문대학에서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험이 매우 어려운데 예로 코란의 아무 페이지나 열고 다 외워보라고 하는데 그래서 정직자가
되려면 마음에 코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11년의 교육을 미치면 물라가 될 수 있다고 하며,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코란을 해석해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박물관 관람]
이제는 유물들을 설명했는데 여자들의 장신구 유물 앞에서 이슬람에서는 남편이 부인 보고 ‘가라 가라 가라’
3번만 하면 바로 이혼이며,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집을 나가야 한다고 한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여인들은 항상 몸에 값진 보석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며, TC는 농담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시리아에서도 똑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옛날에는 그랬을 것 같다.
시리아 가이드는 이슬람여인들이 남들에게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금이나 보석으로 몸에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것은 ‘나가라’라는 말을 3번 들으면 몸에 지닌 것만 가지고 집을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랍인의 칼은 초승달 같은 형이라고 하며, 지도 앞에서 타슈켄트의 4.600m인 침간 산을 우리는 1.600m만
올라간다고 하며, 여기서 이야기한 아랄 해와 칭기즈칸은 앞에서 했기에 생략한다.
옛 히바의 사진을 보면서 당시는 전부 1층짜리 건물 밖에 없었고, 직인이 찍혀 있는 서류는 칸이 명령한
것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한다.
무하마드 라킴 칸 2세와 최고 관리요원들과 함께 있는 사진 앞에서 이스판지야르라는 마지막 칸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했다고 하며, 그는 영어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동전은 낙타 2마리를 살 수 있는 화폐라고 하며, 총이 전시된 곳에서는 러시아가 빠르게 이 지역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물었다.
그 이유는 칸의 군대는 10%만 총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러시아는 1분에 16발을
발사하는 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 궁전인 쿠냐 아르크 궁전과 제2 궁전인 타샤 하울리 궁전(Tash Khauli Palace)이 있는데 아쉽게도
제2 궁전은 가지 못했으나 이 궁전을 지을 때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칸이 제2 궁전을 지으려고 장인을 불러 조건을 물었는데 그는 비용으로 황금과 인부로 노예를 주면 10년 안에
건설하겠다고 했으나 칸은 기간을 더 줄이라고 하자 그럼 9년 안에 건설하겠다고 했다.
칸은 바로 장인을 죽이고 다른 장인을 불렀는데 그는 8년 걸린다고 했다가 또 죽임을 당했고, 다른 장인은
앞 장인들이 죽은 이유를 알고 3년이면 끝낼 수 있다고 하여 그에게 건설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반년이 지나도록 일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자 주변사람들이 걱정이 되어 시간도 모자라는데 왜?
이러고 있냐고 물으니 그는 ‘곧 칸이 죽을 꺼야.’라고 했는데 정말로 2년 뒤에 죽었다고 한다.
새로운 칸이 몇 년 안에 지을 수 있냐고 물을 때 10년이 걸린다고 하여 허락을 얻었다고 하며, 그래서 이곳
속담에 ‘칸은 똑똑하니 명령에 거절하지 마라 그러나 오래 살지는 못한다.’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 된 것, 1번: 사이드 무하마드 라킴 칸 2세와관리 요원들, 2번: 칸의 직인이 찍혀 있는 서류,
3. 아랍인의 칼, 4번: 옛 히바의 사진, 5번: 당시 사용하던 동전, 6번: 이스람 여인들이 착용하던 보석>
[10. 주마 마스지드(Juma masjid) 탐방]
성내 가장 중앙에 위치하는 쥬마(금요일) 모스크(사원)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으며, 이 모스크는
아랍식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본 것과는 너무 다르다.
화려한 도자기문양도 없고, 천장도 돔이 아니고 나무로 만들어진 평면이며, 메카를 가르치는 미라브도 없고,
3m 간격의 214개의 기둥에는 칭기즈칸이 말을 맸다고 하여 마구간 같다는 생각도 든다.
모든 기둥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기둥들을 전부 수리했지만 4개는 옛 것이라며 가이드는
찾아보라 했으며, 이곳은 나무가 귀하여 생기는 대로 지어 나아갔다고 한다.
천장은 새로 만들었다고 하고,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은 온 적이 없다고 하며, 말을 맸다는 것은 전설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원은 55m ×46m의 크기로 5천명이 예배할 수 있다고 한다.
<주마(금요일) 모스크>
[노예 통로 이야기]
동쪽 성문 아래는 ‘노예 통로’라고 하는 곳에는 양쪽에 작은 문들이 있는데 이곳은 노예를 가두어 두는
곳으로 러시아가 오기 전 1823년이 마지막으로 노예가 팔려나간 곳이라고 한다.
노예 상인은 칸에게 세금을 내고 했으며, 젊은 남자는 15틸로라 정도 했고, 이란 언어를 알면 50틸로라까지
받을 수 있었으며, 여관의 뒤처리를 하는 소년이 많이 필요했다고 한다.
<양쪽에 있는 작은 문들이 노예 가두는 곳>
[11. 하렘(harem) 관람]
경비도 훔쳐보다 눈이 빠졌다는 남성금지구역엔 15~25세의 여인들이 40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하는데 선택된
여인은 칸에게 선물을 받아 좋아했으나 쫓겨난 여인은 결혼도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1층은 여가로 수를 놓거나 카펫을 짰으며, 2층은 여인들이 사는 공간은 너무 협소해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할 정도이었는데 별로 볼 것은 없었고, 이곳에 있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 박물관은 당시 삶을 보여주는 곳으로 규모가 작아 잠시 동안에 다 볼 수 있었는데 항아리와 독을 만드는
사진, 나무수레, 대장간과 도구, 재봉틀, 철 공예품을 주문한 귀족이 찾으러 오는 그림도 있다.
이 그림에는 철 공예품을 만드는 여려 명의 기능공과 주문한 귀족 앞에 무릎 꿇고 물품을 보여 주는 모습은
안톤 슈낙이 봤다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추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재봉틀은 너무 잘 만들어 망했다는 미국제품 싱거 미싱(singer machine)이라 너무 반가워 다시
뛰어가 사진을 찍었는데 이곳에서 기념품을 사다가 남편이 부산에서 일한다는 아줌마를 만났다.
부산에서 일하시는 의사선생님은 그녀의 사진을 꼭 전해 주겠다며, 전화번호도 받았는데 이것으로 히바의
관광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전통춤을 보려갔다.
<1번: 하렘, 2번: 싱거 미싱, 3번: 공작소 그림, 3번: 히바의 '독짓는 늙은이'>
[12. 히바의 전통 춤 관광]
이곳도 마드라사를 식당으로 사용하는 곳으로 차와 약간의 견과를 먹으면 전통 춤을 구경했는데 구성원은
성인남자 4명과 남자아이 1명, 그리고 여자 무희 2명이다.
성인남자 3명은 북과 아코디언, 피리를 불었으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젊은 남자 1명과 젊은
여자 1명이고, 코미디 역은 남자아이가 맡았다.
남자아이의 행동은 웃음보다는 너무 어린나이이라 안톤 슈낙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남자는 양손에 검은 돌(?) 같은 것을 쥐고 박자를 맞추며, 춤도 추지만 어떻게 그 돌이 손에 붙어서
소리를 내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기술이 좋아 보였고, 소리도 경쾌해서 듣기 좋았다.
젊은 여인이 춤을 출 때는 아라비아나이트를 연상하면서 분위기에 젖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으나 당시는
칸과 귀족들만 구경했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 쉽게 귀족이 된 것 같다.
춤과 음악은 부하라처럼 단조로운데다 규모도 작았으며, 꼬마가 자전거를 타고 마지막 인사로 이찬칼라를
나와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비행장으로 향했다.
[히바여 안녕~]
히바에서 우르겐지까지는 60km이라고 하는데 이 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잘 포장되어 있었으나 운행하는 차량이 없어 매우 한가한 도로이다.
이 도로는 시가(市街) 전차라는 트롤리(trolley)도 함께 운영되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평원을
달리는 도로가 우르겐지까지 거의 40km 정도의 거리가 직선이라는 것이다.
벨기에서 네덜란드로 가는 길도 직선이지만 이 도로 같이 길기는 안했는데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샤바트 운하를 건너면 시가지의 건물도 깨끗하고, 공원도 잘 조성된 것 같았다.
우르겐지 공항은 규모는 작지만 깨끗했으며, 밤늦게 타슈켄트에 도착하여 전에 묶었던 호텔에 들어갔다.
<1번: 우르겐지의 공원, 2번: 비행장, 3번: 우르겐지 수로, 4번: 비행장으로 가는 직선 도로>
[히바(Khiva) 칸국 참조]
1505년 호라즘 지배자인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샤이바니 칸이 정복당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호라즘은
시아파인 이란의 이스마일 샤에 종속되었으며, 수니파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몰아냈다.
그 후 샤이바니 왕조의 후예인 일바르스에 의하여 1512년 히바한국 건국되어 여러 민족과 부하라의
아스트라 왕조의 침략을 받았다.
1538년 일바르스가 죽고, 그의 사촌 아바네쉬가 히바한국을 통치할 때 부하라 우바이둘라흐 칸에게 정복당했으나
곧 아바네쉬의 친척들이 영토를 되찾았다.
하지 무하마드 1세 칸(재위 1558~1602년)이 히바한국의 통치할 때 1573∼1575년 사이에 아무 다리야 강의
흐름이 바뀌어 우르겐치 주변은 사막으로 변했고, 도시는 폐허가 되어 17세기초 수도를 히바로 옮겼다.
1593년 부하라 한국의 압달라흐 2세는 히바를 정복하였고, 1598년 압달라흐 2세가 죽은 이후다시 독립하였으며,
아랍 칸 무하마드 1세(재위 1602~1623년)와 이스판지야르 칸(재위 1623~1642년)이 히바를 통치하였다.
아불 가지 1세(재위 1643~1663년)와 그의 아들 아불 가지 아누샤 칸(재위 1663~1687년)의 치세 동안 히바는
건축 붐이 일어났고, 17세기 후반기 동안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했다.
숩한 쿨리 칸(재위 1688년), 샤 니야즈(재위 1688~1702년), 쉬르 가지 칸(재위 1715~1728년)이 히바를 통치할
때 1717년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침략을 받았고, 이나크 아바즈(재위 1790~1804년)가 히바를 통치했다.
무하마드 라힘 1세(재위 1806~1825년), 알라 쿨리 칸(재위1825~1842년)은 중앙아시아 전역을 장악했으며,
1839년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고, 그는 궁전과 1842년 디샨 칼라를 완공했다.
1839년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러시아는 히바에 있는 러시아노예의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페롭스키
장군은 겨울에 히바를 침공했으나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회군하여 1717년에 이어 두 번째로 실패했다.
무하마드 에민 칸(재위 1845~1855년)이 통치했으며, 무하마드 라킴 칸 2세(재위 1865~1910년) 때 1873년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이스판지야르 칸(재위 1910~1918년)이 마지막 통치를 했다.
1920년 소련에 합병되어 멸망했으며, 1924년 히바 칸국은 우즈베키스탄에 편입되었고, ‘중앙아시아의 보석’이라는
별명과 함께 1990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처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쿠냐 아르크 요새의 망루에서 본 히바 전경>
[10일] 12년 5월 10일 목요일
●일정: 침간 산 이동 치르박 호수 감상→ 타슈켄트 귀환 호텔 휴식
[침간 산(Chimgan Mountain)으로 가는 길]
어제 저녁에 늦게 잤지만 그래도 어제 들어올 때 보아두었던 티무르 공원을 안 볼 수가 없어 찾아 갔으며,
아무도 없어 혼자 독차지 하고 구경했는데 햇볕을 등진 티무르 동상은 사진 찍기가 나빴다.
오늘은 사실상 타지키스탄의 펜지켄트로 가야하는데 대신 가는 곳이라 마음에도 안 들지만 솔직한 심정은
가지 말고 그 만큼 여행경비를 줄여 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차에 올라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침간 산은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며, 이곳은 물과 초록이 넘치는
‘정원의 도시’이라고 하며, 남쪽에 페르가나 계곳이 있다.
타슈켄트는 너무 급성장하고 변화가 심해 우즈벡 사람들조차도 따라가지 못해 어리둥절하다고 한다.
그리고 인구가 타슈켄트는 300만, 사마르칸트는 36만, 부하라는 24만, 히바는 10만 정도인데 결혼식 때
하객은 타슈켄트는 200~~300명, 사마르칸트는 1.000명, 부하라는 400명, 히바는 적다고 한다.
가이드는 유머로 결혼 때 여자는 예쁠수록 칼림(지참금)을 많이 주어야 하는데 가이드의 여자 친구아버지가
5.000달러를 요구하여 여동생도 함께 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여 거절했다고 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지금은 칼림이 없어지고 남녀가 돈을 내서 간소하게 결혼한다고 하며, 타슈켄트는 120개의 부족이 있지만
다툰 적이 없는 평화의 도시로 고려 한인을 위해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나가는 곳은 ‘키 부라이’라는 작은 도시인데 러시아 기업들이 들어서면서 커진 도시라고하며, 지금은
농기구와 공구 등을 제작하는 곳으로 변했으나 지금도 커지는 도시라고 한다.
천만 년 전의 물고기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키 부라이에서 잠간 내려 음료수를 샀는데 이후로는 자연만
감상하면서 갔는데 발칸반도처럼 호두나무가 많다는 것 외에는 기록할 만한 사항이 없다.
중간에 내려서 변소도 들리고 우리나라 강정처럼 꿀로 만든 아몬드나 살구 씨 같은 강정을 팔고 있었는데
맛이 있어 몇 개 사왔는데 한국에 와서 더 못산 것이 후회되었다.
<위 사진은 키 부라이고, 아래 사진은 만년설이 있는 텐산 산맥의 침간 산이다.>
[침간 산(3,309 m) 관광]
침간 산은 어제 해발 4.600m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3.309m으로 이 산은 톈산(천산) 산맥의 서쪽((the Western
Tian Shan) 끝자락에 있는데 겨울에 스키 타는 사람을 위해 만든 리프트를 타고 올라 갔다.
만년설이 있는 산에는 가끔은 꽃이 핀 나무가 있었고, 그중에 제일 예쁜 것은 꽃핀 야생 튤립이었으며, 날씨도
춥고 볼 것도 없는데 타는 시간은 왜? 그리 긴지 인내가 필요했다.
인내의 한계가 올쯤에 리프트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안 그래도 못 마땅한데 내리자마자 비가 오더니 우박이 함께
쏟아졌으며,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아 떨고 있었다.
주위에 승마 할 사람을 기다리는 말들이 보였지만 탈 관광객이 없으니 공치게 생겼으며, 늦게 도착한 가이드는
반팔 티셔츠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벗어주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우리도 추워 참고 있는 중이라 그럴 수도 없었는데 가이드는 3월에 왔을 때도
이렇게 안 추웠다고 하며, 떨고 있는 가이드를 보니 산행하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있고 싶지도 않아 바로 내려가자고 하여 사진만 찍고 다시 줄을 섰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아줌씨
공주님은 어디서 구했는지 야생 튤립을 들고 왔다.
비를 맡고 다 내려오니 날씨가 좋아져 날씨가 사람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아쉬운 것은 없었다.
※리프트(lift)는 스키장에서는 사람을, 광산에서는 물건을 나르는 것을 말하며, 케이블카(cable car)는
외국에서는 로프웨이(ropeway)이라고 말한다.
레일 위에서 케이블로 끄는 차는 후니쿨라인데 정식명치은 후니쿨라 레일웨이(Funicula railway)이다.
<큰 사진은 침간 산의 리프트 정거장이고, 작은 사진은 야생화 튜립>
[치르박 호수(Charvak Lake) 관광]
어제 침간 산은 1.600m까지만 올라간다고 했으나 치르박 호수의 높이가 1.600m인데 차를 타고 더 올라 가서
리프트를 탔고 또 올라갔으니 우리는 그 보다 훨씬 높이 올라갔다는 증거다.
규모가 크지 않는 치르박 호수는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을 인공으로 담수한 것으로 이 물로 타슈켄트의
생활용수와 콜호즈(집단농장)에서 밀, 목화 등을 짓는 농업용수로 이용된 다고 한다.
사진 찍기가 알맞은 곳에서 내려 호수의 전경과 넓게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별장이 볼 수 있었고, 주위에는
양들이 열심히 일(풀 먹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좀 더 내려와 휴게소 들려서 볼 일도 보고 꼬치구이 샤슬릭도 맛보고 늦게 점심을 먹는다고 TC가 준비해온
누룽지를 점심은 어떻게 되던 간에 일단 음식을 남기는 것은 죄이니까 다 비우고, 식당으로 향했다.
<위 사진은 차르박 호수이고, 아래는 휴게소에서 굽던 샤슬릭>
[고려 한인(까레이스끼이) 이야기]
우리는 고려 한인이 거주하는 곳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는데 식당분위기가 한국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젊은 식당 종업원들은 고려 한인들의 자녀들이어서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여행 전부터 고려 한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금은 실망스럽게 되었는데 그들은 한국말은
전혀 하지 못했으며, 우리를 대하는 것도 반가운 눈치가 아니고 그저 사무적이다.
우리 여행을 맡은 현지 사장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 인사를 했으며, 이런 일은 좀처럼 없지만 시리아
여행사 사장님과 같이 저녁 먹은 것이 여행 중에 처음있었던 일이다.
사장님은 생일 맞은 사람에게 환영도 해주었는데 나도 그 때 생일이었으나 여권이 음력이라 대접은 받지
못했지만 일정에 없는 다마스코스의 야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곳에는 고려인 1천700여 명이 거주한다고 했지만 종업원 외에는 보지 못했으며, 주택에는 성을 써놓은
집들이 몇 가옥 보였는데 지금은 대부분 도시로 나아갔다고 비어있다고 한다.
점심은 한식으로 불고기 쌈이었는데 쌈장 같은 것을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했으며, 이번 여행에서 처음 먹는
한식이라 좋아했지만 조금 전에 먹은 그 놈의 간식 때문에 죄 짓지 않으려니 힘들었다.
<고려 한인들이 운영하는 침간 산 식당>
[까레이스끼이 참조]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이 6천㎞나 떨어진
황막한 중앙아시아를 개척하기 위하여 우즈베키스탄 16,272 가구에 76,525명, 카자흐스탄 20,170 가구에
95,256명으로 총 36,422 가구에 171,781명이 강제이주 당하였다.
강제 이주 전 지식인의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2,500명은 총살하였고 또 끌려간 수천 명의 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며, 이주에 대한 통보도 출발 며칠 전에야 이루어져 거의 맨몸으로 정든 땅을 떠날 때
그 와중에서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한인들의 농사에 대한 집념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화물차와 가축 운반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채 엄청나게 추운 시베리아의 강풍 속을 42일 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하였는데 먹을 것과 물을 전혀 공급하지 않아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정차하면 이때를 이용하여 먹을 것이면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구해다 먹으면서 이동하였다.
대소변은 기차가 서는 곳이면 역이나 허허벌판을 가리지 않았고, 제대로 먹지 못한 노인과 어린이는 홍역으로
사망하였으며, 한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토굴이나 창고, 마구간 등을 개조하여 겨울을 났으며,
방바닥은 맨 땅이었다고 한다.
그해 겨울은 길고도 무서운 고통 속에 살았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데 1938년도의 인구 표본 조사를
보면 1천 명 당 42명이 사망하였으며,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강제 이주 후 1953년까지 약 16년간 한인들은 모든 것이 제한되었고,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하였으며, 교육도 금지되었고, 국가 기관 취업도 제한하여 사회와 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었으나
고려인들을 살아남게 한 것은 한(限)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이 많아 한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집단적 수용소 생활가운데서도 한인은 벼농사를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은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으며,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는데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 콜호즈였으며, 수많은 노력 영웅을 낳아 인구 대비로 노력 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라고 한다.
폴리타주의 신화를 창조했던 전임 위원장 황만금씨는 사회주의 노력영웅으로 구소련 노력영웅 800명 중에서
200명이 고려인이며, 황만금씨의 아들은 거대한 온실을 '아렌다(임차농업)'해 토마토 등을 온실재배, 수십만
달러를 벌어들인 재력가다.
고려인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으며, 식자층이 많은 덕분에 농촌을 떠났고, 이로 인해
고려인이 건설한 콜호즈도 차츰 타민족에게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인들을 러시아어로 '까레이스끼이(고려인)'라고 부르는 것은 고려가 러시아의 영토였다는 의미라고 한다.
<우즈벡의 고려 한인 촌>
[티무르 공원과 티무르 박물관]
타슈켄트로 들어오다가 모차르트(?)의 동상도 보였는데 이른 시간이라 이 선생님과 함께 티무르 공원의
옆에 있는 박물관은 몇 번을 보았으나 사진을 찍지 못했던 곳이다.
티무르 그림 옆에 있는 티무르 박물관은 이곳 화폐 1.000 솜(SOM)의 도안에도 들어가 있는데 이슬람식의
파란 돔(둥근)형의 지붕과 이슬람문양이 그려진 창문이 있으며, 유물은 20여 만점이 있다고 한다.
우즈벡에는 티무르의 동상이 3개 있는데 사마르칸트는 앉아 있으며, 샤흐리 샤브즈는 서있고, 이곳에는
유일하게 말을 타고 있는데 티무르 광장 주위에는 정부청사들이 있다.
유럽풍의 시계탑도 있고, 건물과 갈색의 벽돌 건물은 국립법과 대학이라고 하며, 지붕에 학이 있는 흰
건물은 시청이라고 하며, 그 옆에는 우즈베키스탄 호텔이 있다.
저녁을 먹고 오다가 나보이 극장의 정원에서 음악에 따라 조명과 어우러진 멋진 분수 쇼를 보고 호텔로
돌아 왔는데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든다.
<1번: 우즈베키스탄 호텔, 2번: 티무르 동상, 3번: 시청, 4번: 티무르 박물관>
[11일] 12년 5월 11일 금요일
●일정: 타슈켄트 관광 1. 바락 카나 마드라사, 2. 쿠겔데쉬마드라사, 3. 프렌쉽 광장 등 탐방, 4. 나보이 극장,
5. 파인 예술박물관 탐방→ 석식 후 공항 이동, OZ574 [22:30] 타쉬켄트 출발→ [08:50] 인천 도착
[타슈켄트의 마지막 아침]
오늘 아침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 보았는데 이곳에는 큰 바자르가 있어 들어가 호두와 말린 과일을
사려고 했으나 현지 돈이 없어 달러로 계산하려다가 환율 문제로 포기했다.
더 가다가 더 볼만한 것이 없어 돌아와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 관광은 10부터이라 시간이 있어 다시 나아가 안 간 곳을 찾아 가다가 큰 건물이 있어 들어갔더니 식전에
들린 그 바자르이었으며, 좀 더 헤매다가 돌아왔다.
차를 타고 가면서 타슈켄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도시는 처음에 ‘차르치’라고 했는데 아랍인들은 ‘치’라는
발음이 없어 ‘샤시’라고 했다고 하며, 그 후 여러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돌의 도시’라는 뜻의 타슈켄트는 티무르가 확실하게 부른 이름으로 돌은 도시에 돌이 많다는 뜻이 아니고, 많은
침략에도 돌같이 강하게 견디었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1925년까지는 우즈베크라는 말이 없었다는데 러시아가 관리하기 쉽도록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5개
지역으로 모여 살도록 분류하면서 이 지역을 우즈베크라고 했다고 한다.
<1번: 아침에 본 바자르, 2번: 마른 과일을 사려다 못산 상인과 바자르 내부>
[1. 바락 칸 마드라사(Barak Khan Madrassah) 탐방]
비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타슈켄트인데 오늘따라 비 구경을 하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축복인줄 몰라도
여행자에게는 결코 반가운 축복은 아닌 것 같고, 차에서 내려 수리 중인 묘당으로 갔다.
이곳은 3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1530년 울르그 벡의 손자이며, 타슈켄트의 지배자 수유니디
칸의 영묘와 성직자의 무덤이 함께 있는 곳이다.
하나는 16세기 중반 수유니디 칸의 아들 바라크 칸이라고 불리는 마드라사로 바락 칸이며, 바락 칸은 샤이바니
왕조의 7대 누르즈 아흐마드 칸(재위 1551~1559년)의 별명이고, 꾸란 박물관이 있다.
나머지는 최근에 지었다는 금요일에 집단으로 예배 보는 주마 모스크로 이 모스크는 ‘성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하스트 이맘 주마 마스지드(하자라티 이맘 주마 모스크)이다.
<바락 칸 마드라사 전경>
[2. 수유니디 칸(Suyunidi Khan)의 영묘]
먼저 이곳의 카팔레 알레 샤시라는 성직자의 이야기인데 카팔레는 열쇠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는 3g
밖에 안 나가는 열쇠를 만드는 기술자이며, 알레는 호라즘, 샤시는 타슈켄트의 뜻이라고 한다.
그는 836년 사람으로 이미 이 지역에 샤머니즘,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압으로
전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자연스럽게 받아 드리도록 한 성직자의 묘라고 한다.
쿠쿰 바즈라(Kuk gumbaz)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것은 별로 장식되어 있다는 뜻이며, 칸의 아들 교육을 위해 초대
받은 바시피라는 시인의 글도 있다고 한다.
그는 ‘타슈켄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은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이지 못할 것이다.’라는 글이라고 하며, 그는
타슈켄트에서 죽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며, 바락 칸 마드라사로 이동했다.
<수유니디 칸 영묘>
[3. 바라크 칸 마드레세(Barak Khan Madrassah)]
16세기 지어진 이곳은 3단계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누구인지 모르는 무덤이 기초이고, 다음은 이누스 칸의
무덤이며, 마지막으로 지어진 것이 후즈라라는 학교이라고 한다.
후에 바락 마드라가사 되었는데 그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작어로 행운(lucky)이라는 뜻의 바락이라
불리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며, 천정의 거미줄문양에 대하 이야기를 해 준다.
무하마드가 쫓기다가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갈 때는 거미가 비껴주었고, 들어 간 후에는 거미줄을 쳐서 목숨을
건저 주었기에 이슬람에서는 거미줄 문양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다윗이 똑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건진 이야기가 있는데 어쩌면 이런 이야기까지 모방한
것일 까? 이곳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3개의 공방이 있는데 일단 들어가 보자고 한다.
나무필통같이 생긴 것을 주면서 한번 열어보라고 했지만 쉽게 열리 않았으며,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에
알라딘의 요술필통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여자 친구가 선물했을 때 통만 보고 고맙다고 했는데 2달 후에 다른 친구가 뚜껑을 열었는데 그 속에 다른
선물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 통속에 물건을 꺼내면 가져가라는 장난도 한다고 하는데 여는 방법은 다들 가셔서 배우시기를 바라며,
다음에 여행하는 분을 위해서 그리고 있지도 않은 것을 배운들 무엇하리요.
손녀들이 좋아 할 것 같아 2개를 샀는데 돌아와 자세히 보니 하나는 약간의 흠이 있었는데 꼼꼼히 살펴보고
사시기를 그리고 예쁜 아라비아문양의 기념품도 있으며, 다음은 꾸란 박물관에서 설명을 들었다.
<1번: 바락 칸 마드르사, 2번: 거미줄 문양>
[4. 꾸란(Quran) 박물관 관람]
유리관 속에 있는 이 책은 세계에서 최고로 오래된 오스만(Osman) 꾸란으로 16세기 샤이바니 왕조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6부가 필사된 것 중에 바그다드 것이라고 했다.
TC는 646년 압바스 왕조의 제3대 칼리프 오스만의 꾸란을 4본 필사 하여 터키 이스탄불, 이집트 카이로,
아라비아의 메디나, 이라크의 남부 바스라에 있었다고 수정해 주었다.
이 꾸란은 비비하눔 모스크에서 이야기 했던 것으로 14세기에 티무르는 페르시아 원정 때 이라크의 바스라
것을 노획물로 가지고 와서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눔 성원의 꾸란 대에 있었다고 한다.
1869년 중앙아시아를 침범한 제정 러시아의 허프만 장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박물관로 옮긴
후에 50권을 필사하여 선물로 주거나 25달러를 받고 팔았다고 한다.
그 사본 하나가 중앙 유리진열대에 있으며, 1917년 볼셰비키 때에 레닌이 이 책은 중앙아시아에 있어야
된다면서 다시 타슈켄트로 오스만 사본이 반환됐어 다고 한다.
이 꾸란은 모두가 4장이고, 한 장은 338페이지이라고 하며, 가이드는 한 장 중에 15페이지만 없어졌다고
하였으나 TC는 한 장 전부가 없어 졌다는 것을 책에서 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 꾸란은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하며,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7페이지만 있는
필사본의 꾸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 작은 꾸란은 목에 걸고 다니며, 시간이 있을 때마다 돋보기로 보면서 외웠다고 하는데
이것도 유대인이 토라(모세5경)를 미간이나 손목에 차고 다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마호메트의 어록집인 하디스(Hadith) 이야기]
가이드는 하디스는 7~12세기 이전까지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관행과 어록이 다양했으며, 코란과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고 하며,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디스는 무함마드의 말과 관행의 전승을 기록한 것으로 코란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졌는데 이 어록들을
다마스코스까지 가서 모아 성훈집을 만든 사람이 부하라 사람의 ‘알 부하리’이다.
알 부하리(810~870년)는 16년간 노고 끝에 7,397개의 하디스를 모아 97권의 책으로 만들었으며, 또 한
하디스 편찬자로 유명한 사람은 무슬림 이븐 알 하자지(817~875년)가 있다.
‘알 부하리’의 성훈집이 어떤 것인지 물었더니 가이드는 직원에 물어 보았고, 직원이 가르쳐 준 방으로
가서 성훈집을 구경한 후 하스트 이맘 주마 모스크로 향했다.
[꾸란(Quran) 참조]
꾸란은 ‘읽혀야 할 것’이라는 뜻이며, 610년 무함마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히라산 동굴서 천사 가브리엘에게
처음계시를 받았고, 그 후 23년간 알라에게 받은 계시를 양피지에 기록한 책이다.
646년 압바스 왕조의 제3대 칼리프 오스만 때 최종집대성한 정본을 ‘오스만 본’이라고 하며, 꾸란은 아랍
언어만 그 뜻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은 꾸란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번역된
책은 꾸란을 해석한 참고서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1번: 부하리의 성훈집 하디스, 2번: 오스만 꾸란 사본, 3번: 하자라티 이맘 주마 모스크,
4번: 꾸란(코란) 박물관>
[5. 하자라트 이맘 주마 마스지드(Hazrati Imom Jume Masjidi) 구경]
티무르의 고향 샤흐리 샤브즈에도 이름이 같은 모스크가 있었는데 하자라트(성스러운), 이맘(예배인도자),
주마(금요일 단체예배), 마스지드(모스크)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대 모스크는 최근에 지었으며, 모스크의 3대 요소인 나무와 뜰은 있지만 왜? 우물이 없냐고 물었으나 가이드는
대답을 못했는데 최근에 지은 것이라 편리한 수도를 사용하지 불편한 우물은 사용하겠는가?
이 모스크는 남자와 여자가 예배 보는 장소가 구분되어 있다고 하며, 인도에서 기둥과 대리석을 보내 주어 1년
안에 다 건설했다고 하였고, 한 번에 1만 명이 예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1990년부터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초대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에 의해 지어졌고, 오늘이 금요일이라 들어 갈 수
없었으며, 아랍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고, 우즈벡이나 러시아는 반대로 읽는다고 한다.
정원에는 특이한 나무 2 그루가 있었는데 하나는 커다란 부케 같이 생긴 장미꽃이고, 하나는 수양버들같이 아래로
자라는 나무이었으며, 다음은 차를 타고 쿠켈다쉬 마드레세로 향했다.
<1번: 부케 같은 장미꽃, 2번: 아래로 크는 나무, 3번: 하스트 이맘 주마 모스크, 4번: 3번의 안뜰>
[6. 쿠켈다쉬 마드레세(Kukledash Medressa) 탐방]
16세기 때 3명의 칸을 거치면서 많은 부를 축척했던 우유형제(milk brothers)가 대상의 숙소로 시작했으나
마드라사(신학교)로 운영된 적이 없었으며, 러시아가 총기보관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러시아는 마드라사로 복원하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으며,입구구조는 카라반 사라이 시절 방범을 위해
양쪽에서 범인을 제압할 수 있도록 특수하게 건축했다고 한다.
1층은 교실, 사무실, 식당 등 있고, 2층은 숙소로 사용하고 있고, 현재는 150명 정도의 학생이 있으며, 입학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외국 학생은 딱 10명만 입학했다고 한다.
가이드는 돌아보라고 했지만 공부하던 학생들이 제지하여 더 갈 수는 없었으며, 인터넷에서는 압둘라 한(재위
1557~1598년)의 명령으로 과학자이자 시인인 쿠겔데쉬가 건설했다고 했다.
그런데 가이드는 그의 이름은 거론하지도 않았으며, 마드라사와 함께 있는 멋진 돔형 건물인 주마 모스크가
있는데 이 마스지드는 15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 마스지드는 16세기 때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러시아 시절에는 철물공작소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옛 모습으로
복원 되어 주마 모스크(금요 사원)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며, 우리는 걸어서 초르수 바자르로 향했다.
<1번: 쿠켈다쉬 마드라사, 2번: 주마 모스크>
[7. 초르수 바자르(Chorsu Bazar) 구경]
16세기부터 시작된 초르수는 4개의 길이 만나는 교차로라는 뜻으로 일반인들의 정보교환장소이기도 했으며,
우리는 인사하려고 변소를 먼저 찾았으나 가이드도 잘 찾지 못했다.
1층은 야채와 과일을, 2층은 견과류와 향신료를 팔고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뽕나무 열매인 하얀 오디를
팔고 있다는 것이고, 마늘같이 우리가 흔히 보던 것들은 만나면 왠지 반가운 생각이 든다.
바자르는 여러 번 봤기에 오는 길에 보아두었던 잡화상의 가계로 혼자 달려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구경하면서 이곳을 기억할 만한 상품을 살려고 했지만 없었다.
<1번: 파란 돔 건물이 바자르, 2번: 바자르 내부>
[마지막 점심식사]
빗물로 인해 흐린 창으로 내다보면서 러시아인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우정궁전, 축제를 많이 한다는
보모르 공원, 타슈켄트 역(Tashkent Vokzal)과 기차 박물관 등의 이름을 들었다.
처음 찾아간 한식식당은 잘 못 찾아가 다시 찾아 갔는데 음식은 한식이라 마음에 들었으나 아침을 늦게
먹은 탓으로 많이 먹을 수 없었지만 죄는 짓지 않했다.
TC는 2시간 후에 저녁을 먹을 것이라고 해서 농담으로 여겼으며, 차에서 러시아 시절이 물가도 싸고 살기
좋았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티무르 공원 쪽으로 향했다.
서커스 장, 티무르 박물관, 일정에 있는 나보이 극장도 차 안에서 보여 주면서 TC는 크레임이 두려운지
못 보았다는 말은 하지마라고 했는데 그럼 이렇게 보여 줄 것이라면 어제 밤에 봤는데 뭐 하러 또 와...
이번 여행은 경비가 비싸서 다른 여행사보다는 좀 다르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것이 없었으며, 어제
같은 날도 그렇고 오늘도 좀 더 일찍 시작하면 더 보여 줄 수 있지 않을 까?
타슈켄트는 우리가 본 것 외에도 무스타킬릭 공원 광장과 전 시가지를 볼 수 있는 전망대, 프렌쉽 광장,
지진 기념비, 로마노프 왕자궁전, 인민진선 광장, 역사박물관도 있다.
그리고 우리와 관련 있는 정재영, 수애, 유준상, 김성겸이 출연한 영화 '나의 결혼 원정기'를 촬영했다는
압둘카심 마드라사도 있으며, 까레이스끼이 중에 성공한 김병화 박물관도 있다.
1937년 하바롭스크에서 일본 간첩죄로 사형 당했으나 1956년 소련정부부터 복권 받은 낙동강(1927년)의
저자로 소설가이자 시인인 조명희 기념관도 있으며, 조명희 거리도 있어 너무 볼 것이 많이 있었다.
휴일이 금요일이면 어제일정과 바꾸면 되고, 시간도 넉넉한데 일생에 단 한번만 올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그들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정말 섭섭했으며, 이제는 마지막 일정인 파인예술박물관으로 향했다.
<1번: 타슈켄트 역, 2번: 기차 박물관>
[8. 파인 예술 박물관(Fine Arts Museum) 탐방]
'Museum Of Applied Art(응용예술박물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한국어를 배운다는
예쁜 우즈벡 아가씨 3명이 우리말로 인사를 한다.
이곳은 러시아 황제 시대의 외교관으로 있었으며, 부유했던 그의 집이 바로 응용예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사용하던 방들에는 19~20세기 응용예술의 소장품이 진열되어 있다.
예술에 무뢰한이라 어떤 것이 응용예술인지는 모르나 우리 눈에는 평범한 도자기, 카펫, 악기 등을 진열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그 작품들이 어떤 문양을 응용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룸에 있는 페치카와 벽에 데코레이션 해 놓은 것은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것이 기억나고
각 룸에는 기념품도 파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어제와 오늘은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어찌하라 이것으로 이번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쳤는데 건강하게 돌아
갈 수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하겠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응용 예술 박물관 전경>
[중앙아시아여 아디오스~]
공항에 도착하여 정말로 점심 먹은 지 2시간 만에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모두들 어떻게 먹을 것인가 한탄
소리만 들리었으며, 먹지 말자고 했으나 이미 돈은 다 지불됐다고 한다.
이렇게 배가 포화인 상태는 어제 누룽지부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배 꺼질 시간이 없었는데 17년 동안
15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인도의 뭄 타지마할은 17년 동안 계속 배가 불렀다는 생각났다.
몇 사람은 포기하고 종업원들에게 먹으라고 주었으나 오직 한 사람만 닭요리를 다 먹은 것을 모두들 구경을
했는데 그 사람이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죄(음식을 남기)를 지을 사람이 아니다.
‘박학다식(博學多食)’은 박사와 같이 학문이 많으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인데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그것도 고민 중에 하나라고 한다.
<파인 예술 박물관 1번: 응접실, 2번: 응접실의 페치카, 3번: 한국어를 배운다는 우즈베크 아가씨
4번: 박물관에 전시된 예쁜 도자기>
[타슈켄트(Tashkent) 역사 참조]
BC 2~1 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예전에는 ‘차치(Chachi)’, ‘샤슈’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으나
우즈벡어로 '돌(Tosh)의 도시(Kent)'가 되었고, 이것을 중국은 석국(石國)'으로 불렀다.
동서양으로 가는 대상로 직접은 통과하지 않았지만 사마르칸트(북쪽→ 타슈켄트→ 알마타)의 연변에 있어
예전부터 중요한 교역 중심지로 수공예가 발달했다.
4세기 때 투르크의 강력한 지배로 연어도 투르크 알타이어로 바뀌었고, 8세기 초부터 아랍인이 점령한 후
셀추크 등의 여러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750년 당나라의 고선지장군이 점령했다.
1219년 칭기즈칸에게 점령당했고, 1370년 티무르가 지배했으며, 1576년 압둘라 한(재위 1557~1598년)이
타슈켄트를 점령하였고, 1809년 코칸트 칸국에 병합되었다.
1865년 러시아 군대가 타슈켄트 점령하였고, 1924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형성되면서
사마르칸트가 처음수도이었으나 1930년 타슈켄트로 옮겨졌다.
1966년 4월 26일 새벽 5시 20분경 타슈켄트는 진도 7.8의 강진으로 도시의 80%가 폐허로 변하고 주민의 80%가
사망했으며,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중요한 건물만 남겨 놓고 모든 건물을 헐어냈다.
그리고 각 지역으로부터 온 3만 여명의 건축가들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카자흐 공화국 등의
건축양식으로 강도 9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건축했고, 인구 약 250만 명이다.
타슈켄트는 옛 유적이 남아 있는 구시가지와 지금도 현대화가 진행되는 신시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타슈켄트의 야경>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 종이 전파, 고선지(Gao Xianzhi) 장군]
1. 탈라스 전투: 751년 7~ 8월 당나라와 티베트의 동맹군과 압바스왕조와 카르룩의 연합군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지금의 카자흐스탄 영토인 탈라스 강 유역에서 싸운 전투이다.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배경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로써 서역(동투르키스탄)에
주둔하면서 서쪽의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에 압력을 가했다.
샤슈(타슈켄트)의 왕은 시르 강 서쪽을 지배하던 이슬람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며, 747년 우마이야 왕조
세력을 멜브에서 몰아낸 아바스왕조의 호라산총독인 아브 무슬림은 지야드 이븐 사리프를 파견시켰다.
전투 중 당나라 편이던 카르르크(텐산북쪽 유목민)가 배신하고 지야드를 지원하여 당나라군은 전투에서
괴멸하였고, 이후 안녹산의 난으로 국력이 쇠퇴해 더 이상 서역경영은 어렵게 되었다.
이 승리로 아바스왕조는 중앙아시아의 기반을 굳혔고, 유목민족은 이슬람을 믿기 시작했다.
2. 종이의 유럽전파: 이 전투 때 포로로 잡힌 고선지의 부하 중에 종이 만드는 기술자가 세계 최초의
섬유질제지법을 유럽에 전파됐다.
탈라스 전투가 끝나고 6년이 지난 757년 탈라스 강에서 가까운 사마르칸트에 제지 공장이 세워져 동아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종이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후한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가 유럽으로 전파와 쿠텐베르그의 활자발명은 성경을 인쇄하여 대중화됨으로
종교개혁을 가져왔으며, 또 문예부흥이 이루어졌다.
※종이의 전파 연대를 살펴보면
중국 낙양(105년)→한국(4세기경)→일본(고구려 담징 610년 전파)→사마라칸트(고선지 751년)→
바그다드(793년)→알렉산드리아, 카이로(900년경)→모로코 페스(1100년경)→베네치아(1276년)→
유럽(1300년경)→미국(1650년)
3. 고선지(高仙芝) 장군 (?~755):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서역지방으로 이주하여 군의 장교로 있었으며,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군 생활에 참여하여 20세 때 당나라 장군이 되었다.
그는 747년 토번(吐蕃: 티벳)과 서역의 소발률국을 토벌한 공적으로 안서부도호의 2인자가 되었으며, 1차
원정에서 불름(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 72개국의 항복을 받았다.
고선지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이 되었고,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했으며, 755년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 도중에 모함을 받아 참수 당하였다.
<탈라스 지도>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역사 참조]
B.C 6세기 고대 페르시아가 점령하였고, B.C 4세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정복하였으며, B.C 3세기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왕조가 일어났고, AD 3세기 이란의 사산조가 이 땅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AD 6세기에는 서투르크 족, 7세기에는 아랍 및 이란의 샤마니 왕조가 들어오면서 이슬람화가 되었으며,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코칸트, 부하라 등지가 종교중심지와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번성했다.
751년 고구려출신 고선지장군의 당과 티베트의 동맹군과 아랍과 카르룩의 연합군 간에 전쟁이 있었다.
9~10세기에는 부하라 왕국, 가즈나비드 왕조가 11세기에는 남쪽에 호라즘 왕국이 세워졌고, 북부는 셀주크
투르크의 일부가 되었으며, 1220년 칭기즈칸의 침략으로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차카타이 한국(1227~1360년)에 이어 티무르는 대제국(1369~1508)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몽골족이 세운
마지막 제국이 되었고, 우즈베크 족의 샤이바니 왕조(1501~1598년)가 통치했다.
우즈베크 족의 일바르스는 호라즘 지역에 히바한국(1512~1918년) 건국하였으며, 또 우즈베크 족의 수장이
페르가나 지역에 코칸트(Kokand)를 수도로 하는 코칸트한국(1709~1875년)이 타슈켄트도 지배했다.
19세기에 영국의 진출을 의식한 제정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가 이곳에 진출하여 1868년 부하라한국,
1873년 히바한국, 1876년 코칸트한국을 합병했다.
1924년 우즈베크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된 후 러시아를 위해 면화재배는 심각한 환경파괴로
아랄 해의 수량은 급격히 줄었다.
1980년대에 소련의 개방과 개혁정책으로 민족주의운동과 이슬람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90년
고르바초프가 시장경제를 도입하였고, 각 지역은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였다.
1990년 6월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공화국들 중 최초로 자국 법률의 주권을 선언했으며, 1991년
연방의 해체를 원하는 옐친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9월 1일 완전한 독립을 얻어 우즈베키스탄공화국 탄생하였고, 12월 직접선거에서 초대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가 당선되어 지금까지 독재를 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가장 강력한 대 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 동상>
[12일] 12년 5월 12일 토요일 인천 도착
[아디오스 아미고(Adios Amigo)~~~]
오전 9시 인천에 도착해서 물건을 찾은 후 인사들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섭섭한 것을 보면 그래도 비록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동안 정들었나 보다.
공항에서 천천히 모든 것을 마치고 안산가는 버스를 탔는데 가장 은혜를 입은 이 선생님 부부가 아침식사를
하셨는지 이제서 가방을 끌고 길을 건너고 계시어 반가워 창문을 두드렸으나 듣지 못하셨다.
울산에 도착하여 가장 보고 싶었던 손녀들을 만나면서 아라비아 나이트에서 나 올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여행 후기]
◈역사의 복잡성: 대포나 총이 없었던 시절 사실상 유목민은 말을 타는 모든 젊은 남자는 다 싸움을 할 수
있는 잘 훈련된 기병으로 그들은 보병이 없었기에 기동성 또한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했다.
우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먼 거리를 그 옛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 것도 말을 탈 수 있기에 가능했으며,
그들은 정착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하면 수시로 이동하여 하였다.
이런 이유로 강자가 나타나면 잠간 사이에 지배자가 되었다가 다른 강자가 나타나면 지배자가 또 바뀌는
역사는 복잡해졌으나 그나마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주민들은 피해가 적었다.
◈우리 가이드: 가이드가 사람인 이상 틀리 수도 있으나 우즈벡의 마랏은 그 점에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으며, 인간성이 좋은 투르크멘의 알란은 자랑할 만한 것은 너무 부풀리는 것이 흠이었다.
티무르는 성의도 없었고, 운영의 묘도 부족하였는데 이 지역 인사는 ‘살람알레쿰’인데 꼭 기억해야 한다.
◈중앙아시아 음식: 샤슬릭(Shashlik)은 꼬치 바베큐로 고기종류는 양,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
종류가 무척다양하며, 식초에 절인 양파를 것 들여 먹는다.
라그만(Laghman)는 고기, 야채 등과 만든 향료가 풍부한 국수 종류로 짬뽕과 비슷하고, 만티(Manti)는
고기, 양파, 양꼬리 지방을 다져 만든 찐 만두다.
플롭(Plov)는 고기, 쌀, 양파, 마늘, 향료 등으로 만든 볶음밥 종류이며, 삼사(Samsa)는 고기, 양파, 양꼬리
지방을 다져서 가루반죽으로 만든 만두 인데, 만티라는 다르게 화덕에서 구워낸다.
리피오쉬카(Lepyoshka)는 둥근 모양의 밀가루 빵으로 화덕에서 구워낸 것이고, 피로쉬키(Pirozhki)는 고기,
양파, 야채 등을 넣고 가루 반죽을 해 튀겨낸 빵으로 고로케와 비슷하다.
이렇게 쉽게 분류는 해 놓았지만 설렁탕, 곰탕, 국밥처럼 오래 먹어보지 않은 단체 여행자는 설명을 듣고는
분간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하나씩 따로 시켜서 먹어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엄청나게 큰 빵 ‘난(러시아어 리피오쉬카’이 가장 좋았고 지금도 이 빵이 그립다.
<1번: 리피오쉬카(난) 빵, 2번: 히바, 3번: 아쉬가바드, 4번: 사마르칸트, 5번: 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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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디오 찍느라고 가이더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송선생님 덕분에 자세한 정보 잘 보고 갑니당! 늘 건강하시구요! 종종 방문하여 좋은 지식 머리 속에 많이 담아 가겠습니다 제가 세계사에 많이 유식해지면 모두 송선생님 탓입니다ㅎㅎㅎ ^^
인스토리님 ~ 다녀오신 여행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길게 적으셨네요 ..
참으로 대단하십시다 ~
저는 읽는것도 시간이 걸려 .. 수시로 들어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ㅎㅎㅎ
수기로 적은 한편의 역사책 같은 진실 ... 천천히 잘 볼께요 ..
다녀오신 즐거운 여행길에 휼륭히 남겨지는 이야기들 .. 차곡히 쌓여갑니다~ 감사합니다 ^^
카페의 단골 애독자 부용화님 !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님과 같은 분이 계시기에
보람을 느낍니다.
늘 찾아 주시고 격려해 주세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