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장 인사 > e-mail -> lks33433@hanmail.net
안녕하세요?
이강석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원장 이강석입니다.
카페를 방문해주시고 회원으로 가입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어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특히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중에 학원에 갈 여력도 쉽지 않은 학생이 많은 것을 보고 이런 카페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지난 14년 동안 영어를 손 놓은지 10년, 20년 넘은 성인들에게 교양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조금이라도 영어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제가 독특하게 개발한 방법으로 수업을 한 바 있습니다.
진정 영어를 쉽고 재미있으면서 실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우미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Good luck to you all.
제 소개를 해 달라는 요청이 많이 있어 한겨레 신문에 인터뷰 했던 기사 전문을 올립니다. 비교적 저에 대해 소상히 소개한 자료라 올립니다.
한겨레 신문(2002.5.23)에 "내 고향 지킴이" 시리즈의 첫번째 인물로 선정되어 인터뷰기사로 실렸습니다. 이 시리즈는 매주 목요일에 연재될 예정으로 있는 것 같습니다.
관심있게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기사 전문입니다.
<기사 전문> 미군부대 "깡통소년"…날 키운 아린 기억들
이름: 이강석
고향: 경기 동두천시.
나이: 우리 나이로 마흔.
최종학력:고려대 영문과 졸업.
직업: 이강석어학원 원장.
꿈: 동두천 미군 체험소설 완성.
그는 의정부고에 차석 입학하고, 카투사 시험에 전국 수석으로 합격한 `동두천이 낳은 수재"다. 한때 대기업 기획실에서 국제변호사와 지적재산권분쟁 조정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출세가 보장된 서울 생활을 마다하고 마흔 인생 동안 군대생활 3년을 빼곤 늘 동두천을 지켰다. 그는 왜 동두천을 떠나지 않을까.
새벽 5시.잠에서 깬 그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아직 어두컴컴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갈까. 아직 밟아 보지 못한 동두천 땅은 어딜까. 창말고개를 넘던 그는 문득 어린시절 깡통을 주워 손수레에 싣고 이 고개를 힘겹게 넘던 기억이 떠올랐다.
법대를 나온 그의 아버지는 `좌절한 인텔리"였다. 한국전쟁 때 총에 맞아 숨진 큰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버지는 자포자기 상태로 전북 부안에서 동두천까지 흘러들었다. 그리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깡통을 모아 보일러 연통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래서 그의 집은 `흥신상회"라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항상 `깡통집"으로 불렸다.
2남3녀 중 장남이던 그는 완고한 아버지 때문에 방과 후에는 창말고개 `오물장"(쓰레기 집하장)에 가서 깡통을 골랐다. 온 몸이 깡통에서 묻어나온 케첩과 버터 찌꺼기로 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깡통을 삐삐선(전선줄)으로 묶어 손수레에 잔뜩 싣고 보산동 미군기지촌을 지날 때면 미군들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깡통을 툭툭쳤다.
주말이면 그의 집이자 작업장이던 생연동 `깡통집" 앞을 지나던 미군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곤 했다.
어느새 그는 봉암저수지 둑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둑 오른쪽 강을 보며 자연에 겸손해 하고, 왼쪽 마을을 보며 일상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스친 카투사가 그의 또다른 과거를 들춰냈다. 대학 2학년 때 세상을 비관하던 아버지가 싫어 집을 뛰쳐나온 그는 학교 벽보에 붙어 있던 카투사 모집공고를 보고 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수석합격. 하지만 입대일이 불과 엿새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도 덜된 상태에서 그는 501 정보대에 배치받았다. 미군에게 지기 싫어 부대 마라톤대회 때마다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집 근처 골목을 접어 든 순간 그의 눈에 비친 담벼락은 온통 붉은색 반미 반독재 구호로 도배질돼 있었다. 청년시절의 아픈 기억인 `스프레이 사건"이 되살아났다. 1983년 `동두천시대학생회" 부회장을 맡으며 한국 현대사에 눈을 뜬 그는 복학을 앞두고 있던 86년 8월 의정부경찰서로 연행됐다. 자신도 모르는 스프레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첫마디는 `너, 이 ××, 빨갱이 맞지?"였다. 그리고 물고문, 척추고문, 날개꺾이 등이 이어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한동안 `동두천문학회"에서 창작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졸업과 함께 90년 현대전자에 입사했지만 92년 4월 정주영씨의 국민당 창당과 함께 사원들에게 강요됐던 입당원서 확장, 지구당 창당대회와 유세 동원을 거부하고 사표를 던졌다.
오전 10시.“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지요? `scarf"라는 단어에 `f"하나를 떼면 `scar"(상처), `스카프"로`상처"를 가리다가 되겠죠?”
사무실을 겸한 30평 남짓한 강의실에서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그는 주말반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생연동 일터에 나왔다. `이강석 어학원". 3년 전부터 그가 출퇴근 하는 곳이다.
`일, 삶, 꿈". 사무실과 강의실을 갈라놓은 칸막이에 적힌 글귀가 보였다. 얼마 전부터 주말반을 만들어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지만 “일하는게 삶이고, 치열한 삶에서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 미군 깡통에 적힌 영어에 호기심을 가졌던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카투사에 근무하면서 `영어의 달인"이 됐다. 회사를 그만둔 뒤 그의 생계를 책임져 준 것도 출판사와 영어학원 강사였다. 99년 6월 <컨추리 보이 영단어>(사계절)라는 책을 내 공전의 히트를 친 그는 내친김에 자신의 학원을 차렸다.
강의실은 1천여개의 영화 비디오와 1천여권의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책이 꽂혀진 책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비디오는 돈 안들이는 영어학습을 위해, 책은 맹목적인 미국문화에 젖지 말라는 뜻이란다.
오후 5시.강의를 마친 그는 오랜만에 소요산을 찾았다. 자운서원이나 화석정, 반구정, 숭의전, 경순왕처럼 이야깃거리도 많고, 율곡 선생이나 황희 정승같은 인물도 많은 인근 파주나 포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곳, 여진 정벌에 앞장서고 성종 때 병조판서까지 지낸 어유소 장군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자재암보다 험난한 공주봉을 택했다. 공주봉에 서니 동두천 땅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미군부대 430만평이 내려다 보였다. 자재암의 `전설"보다 공주봉쪽 `현실"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군기지는 `천혜의 요새"다. 포탄이 날아오면 모두 민가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지난해 9·11 테러 당시 동두천은 미군들의 외출·외박이 금지돼 보산동 업소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만큼 미군 의존도가 높다는 얘기다. 때문에 81년 양주군 동두천읍에서 동두천시로 승격될 때 7만명이던 인구가 지금은 6만7천명으로 줄었다.
산에서 내려온 그는 생연동 집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기지촌 `양공주" 자리를 차지한 러시아와 필리핀 여성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생각해 보니 동두천은 어느새 `인종 전시장"으로 변했다. 동두천 가죽공장과 염색공장에는 방글라데시, 말레이지아, 스리랑카, 가나, 나이지리아, 카자흐스탄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즐비하다.
생연동에서는 어제 미군과 한국인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특이하게도 이번엔 한국인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미군기지가 자리한 보산동에서는 한국인이 조심하지만 생연동이다보니 분노가 폭발한 모양이다. 불평등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소파)이 생생하게 적용되는 곳이다보니 합리적 사고가 아쉬울 뿐이다.
밤 10시.그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었다. 이 홈페이지는 책, 문화, 인물, 소설 등을 소개하는 곳이다. 이 게시판에 올라온 학생들의 질문에 그는 일일이 답변했다. 그의 꿈은 동두천의 체험을 영어와 한국말 소설로 한미 두 나라에서 펴내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동두천 미군기지가 물러난 뒤 그 자리에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세익스피어, 빅토르 위고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흉상과 작품을 전시해 동두천이 간직한 현대사의 아픔을 아름답게 승화할 생각이다.
부리깊은 편견이 더 큰 상처
미군도시, 마약, 폭력, 혼혈아, 양공주….
이강석씨가 경험한 동두천에 대한 외지인의 이미지다. 그는 대학 신입생 시절 자기 소개를 하면서 “고향이 동두천”이라고 말하자, 모두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교육환경이 좋지 않은 곳, 휴전선과 맞닿은 지역으로 인식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서 공부하면서 대학에 들어올 수 있었냐”는 눈치였다고 그는 전했다.
지난해 그의 여제자가 맞선을 봤다. 어느 한군데 나무랄 곳 없는 신부감이었지만 남자쪽 부모는 그녀가 동두천 출신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얼마전 시트콤 드라마를 보던 그는 한마디 대사가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우스꽝스런 영어를 쓰던 인물에게 상대방은 `넌 왜 발음이 동두천 발음이냐?"라는 말을 던진 것이다. 드라마 작가도 무의식 중에 동두천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증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인근 도시조차 동두천을 애물단지 취급한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동두천시와 양주군 통합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양주군쪽에서는 “이미지 상실 때문에 득이 될 게 없다”며 “통합은 같은 군사지역인 연천군쪽과 의논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두천은 한국 현대사와 한반도의 온갖 시련을 상징적으로 받고 있는 곳”이라며 “광주가 민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듯이 동두천도 편견없이 민족의 상징으로 승화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동두천/김동훈 기자cano@hani.co.kr
< 책 소개 >
추후 생활영어, 영화장면을 통한 영어학습법 등을 특허낼 계획입니다.
드디어 2005년 3월 5일 특허를 획득했습니다.